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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1년(세종23) 영흥대군(永興大君)으로 봉해졌으며, 1443년(세종25)에 역양대군(歷陽大君)으로, 1447년(세종29)에 다시 영응대군(永膺大君)으로 개봉되었다. 대군은 원래 [[대방군부인 송씨|여산 송씨]]와 결혼하였으나 송씨는 병을 이유로 내쫓겼다.<ref>《조선왕조실록》, 세종 123권, 세종31(1449) 3월 18일 1번째기사</ref> 세종의 명으로 송씨가 쫓겨난 뒤 영응대군은 참판 정충경의 딸 해주 정씨를 춘성부부인으로 맞이하였다. |
1441년(세종23) 영흥대군(永興大君)으로 봉해졌으며, 1443년(세종25)에 역양대군(歷陽大君)으로, 1447년(세종29)에 다시 영응대군(永膺大君)으로 개봉되었다. 대군은 원래 [[대방군부인 송씨|여산 송씨]]와 결혼하였으나 송씨는 병을 이유로 내쫓겼다.<ref>《조선왕조실록》, 세종 123권, 세종31(1449) 3월 18일 1번째기사</ref> 세종의 명으로 송씨가 쫓겨난 뒤 영응대군은 참판 정충경의 딸 해주 정씨를 춘성부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출처|날짜=2012-03-05|이는 영응대군이 단종의 후원세력이 되기를 바라면서 수양대군을 견제하려는 세종의 심모원려였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이를 간파하고 본부인을 잊지 못하는 영응대군을 늘 송현수(대방부부인의 오빠)의 집에 데리고 다녔다.<ref>송현수는 [[조선 단종|단종]]비 [[정순왕후 (단종)|정순왕후]]의 아버지로 대방군부인 송씨는 정순왕후의 친고모이기도 하다.</ref> 이러한 잠행으로 영응대군은 궐 밖에 있는 송씨와의 사이에서 두 딸까지 두었고, [[1453년]](단종1) 단종은 결국 춘성부부인을 폐출시키고 송씨를 다시 부인으로 맞아들이게 했다.<ref>《조선왕조실록》, 단종 9권, 단종1(1453) 11월 28일 4번째기사</ref>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척살하러 가면서 김종서를 유인하기 위해 썼던 이야기도 영응대군의 부인 문제였다.{{출처|날짜=2012-05-31}} 영응대군이 죽고 난 뒤 송씨는 절을 짓고 승려를 가까이 했는데 그 중 [[학조]]와 사통했다는 이야기를 [[김일손]]이 사초에 적어 큰 파문을 일으켰다.<ref>《조선왕조실록》, 연산 30권, 연산4(1498) 7월 12일 6번째기사</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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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와 그림에 뛰어나고 음률(音律)에 밝았으며, 세종시대 때에는 고려 말의 최무선이 만든 화약 병기 주화(走火)를 발전시킨 신기전(神機箭) 개발에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세조 9년에는 '[[명황계감]](明皇誡鑑)'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세종은 여러 아들들 중에서도 영응대군을 특별히 사랑하여 총애하였고<ref>《조선왕조실록》, 세종 124권, 세조31(1449) 6월 26일 1번째기사</ref> [[1450년]] 그의 저택인 동별궁(東別宮)에서 승하하였다. |
글씨와 그림에 뛰어나고 음률(音律)에 밝았으며, 세종시대 때에는 고려 말의 최무선이 만든 화약 병기 주화(走火)를 발전시킨 신기전(神機箭) 개발에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세조 9년에는 '[[명황계감]](明皇誡鑑)'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세종은 여러 아들들 중에서도 영응대군을 특별히 사랑하여 총애하였고<ref>《조선왕조실록》, 세종 124권, 세조31(1449) 6월 26일 1번째기사</ref> [[1450년]] 그의 저택인 동별궁(東別宮)에서 승하하였다. |
2019년 4월 21일 (일) 05:23 판
영응대군
永膺大君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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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大君) | |
이름 | |
휘 | 이염 李琰 |
별호 | 자(字)는 명지(明之) 호(號)는 서곡(西谷) 시호는 경효(敬孝) |
신상정보 | |
출생일 | 1434년 5월 23일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
사망일 | 1467년 2월 2일 | (32세)
사망지 | 조선 한성부 대군 사저에서 병사 |
왕조 | 조선 |
부친 | 세종대왕 |
모친 | 소헌왕후 심씨 |
배우자 | 부부인 해주 정씨(초실) 부부인 여산 송씨(계실) 부부인 연안 김씨(삼실) |
자녀 | 슬하 1남 3녀 |
기타 친인척 | 태조 이단(증조할아버지) 태종 이방원(할아버지) 정종 이경(큰할아버지) 무안대군 이방번(작은할아버지) 의안대군 이방석(작은할아버지) 양녕대군(큰아버지) 효령대군(큰아버지) 성녕대군(작은아버지) 문종(동복 형) 세조(동복 형) 안평대군(동복 형) 임영대군(동복 형) 광평대군(동복 형) 화의군(이복 형) 금성대군(동복 형) 평원대군(동복 형) 한남군(이복 형) 수춘군(이복 형) 영풍군(이복 남동생) 의경세자(동복 조카) 단종(동복 조카) 귀성군(동복 조카) 예종(동복 조카) 심온(외조부) 심준(외숙부) 심회(외숙부) 심결(외숙부) |
종교 | 유교(성리학) |
영응대군 이염(永膺大君 李琰, 1434년 5월 23일/음력 4월 15일 ~ 1467년 2월 2일)은 조선의 왕족이다.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여덟번째 아들이자 막내아들로, 문종, 세조, 안평대군 등의 친동생이다. 성은 이(李)씨, 이름은 염(琰),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명지(明之). 호는 서곡(西谷)이다. 시호는 경효(敬孝)이다.
생애
1441년(세종23) 영흥대군(永興大君)으로 봉해졌으며, 1443년(세종25)에 역양대군(歷陽大君)으로, 1447년(세종29)에 다시 영응대군(永膺大君)으로 개봉되었다. 대군은 원래 여산 송씨와 결혼하였으나 송씨는 병을 이유로 내쫓겼다.[1] 세종의 명으로 송씨가 쫓겨난 뒤 영응대군은 참판 정충경의 딸 해주 정씨를 춘성부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이는 영응대군이 단종의 후원세력이 되기를 바라면서 수양대군을 견제하려는 세종의 심모원려였다.[출처 필요] 그러나 수양대군은 이를 간파하고 본부인을 잊지 못하는 영응대군을 늘 송현수(대방부부인의 오빠)의 집에 데리고 다녔다.[2] 이러한 잠행으로 영응대군은 궐 밖에 있는 송씨와의 사이에서 두 딸까지 두었고, 1453년(단종1) 단종은 결국 춘성부부인을 폐출시키고 송씨를 다시 부인으로 맞아들이게 했다.[3]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척살하러 가면서 김종서를 유인하기 위해 썼던 이야기도 영응대군의 부인 문제였다.[출처 필요] 영응대군이 죽고 난 뒤 송씨는 절을 짓고 승려를 가까이 했는데 그 중 학조와 사통했다는 이야기를 김일손이 사초에 적어 큰 파문을 일으켰다.[4]
글씨와 그림에 뛰어나고 음률(音律)에 밝았으며, 세종시대 때에는 고려 말의 최무선이 만든 화약 병기 주화(走火)를 발전시킨 신기전(神機箭) 개발에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세조 9년에는 '명황계감(明皇誡鑑)'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세종은 여러 아들들 중에서도 영응대군을 특별히 사랑하여 총애하였고[5] 1450년 그의 저택인 동별궁(東別宮)에서 승하하였다.
가족관계
- 조부 : 제3대 태종대왕(太宗大王, 1367~1422, 재위: 1400~1418)
- 조모 : 원경왕후 여흥 민씨(元敬王后 驪興 閔氏, 1365~ 1420)
- 외조부 : 영의정부사 청천부원군 심온(領議政府事 靑川府院君 沈溫, 1375~1418)
- 외조모 : 삼한국대부인 순흥 안씨(三韓國大夫人 順興 安氏, ?~1444)
- 아버지 : 제4대 세종대왕(世宗大王, 1397~1450, 재위: 1418~1450)
- 어머니 : 소헌왕후 청송 심씨(昭憲王后 靑松 沈氏, 1395~1446)
- 형 : 제5대 문종대왕(文宗大王, 1414~1452, 재위: 1450~1452)
- 형 : 제7대 세조대왕(世祖大王, 1417~1468, 재위: 1455~1468)
- 누나 : 정의공주(貞懿公主, 1415~1477)
- 정부인 : 춘성부부인 해주 정씨(春城府夫人 海州 鄭氏) - 참판 정충경(鄭忠敬)의 딸
- 1계부인 : 대방부부인 여산 송씨(帶方府夫人 礪山 宋氏) - 판중추 송복원(宋復元)의 딸
- 2계부인 : 연성부부인 연안 김씨(延城府夫人 延安 金氏) - 목사 김영철(金永轍)의 딸
- 장남 : 청풍군 원(淸風君 源, 1460년 ∼ 1504년)
- 차녀 : 배사종(裵嗣宗)에게 출가
- 삼녀 : 조덕온(趙德穩)에게 출가
관련 작품
드라마
같이 보기
- 영응대군 묘 및 신도비 - 시흥시 향토유적 제9호
각주
참고 자료
함께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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