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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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중근
Bong Jung-Keun
LG 트윈스 No.51
기본 정보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생년월일 1980년 7월 15일(1980-07-15) (34세)
출신지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신장 188 cm
체중 93 kg
선수 정보
투구·타석 좌투좌타
수비 위치 투수
프로 입단 연도 2007년
드래프트 순위 2007년 1차 지명 (LG 트윈스)
첫 출장 MLB / 2002년 4월 23일
KBO / 2007년 4월 11일
사직롯데전 선발
마지막 경기 MLB / 2004년 6월 20일
획득 타이틀
계약금 10억 원
연봉 4억 5천만 원(2014년)
경력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올림픽 2008년 베이징
WBC 2006년·2009년
아시안게임 2010년 광저우, 2014년 인천
메달 기록
대한민국 대한민국의 선수
남자 야구
올림픽
2008 베이징 야구
아시안 게임
2010 광저우 야구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009 로스앤젤레스 2009 WBC
2006 샌디에이고 2006 WBC

봉중근(奉重根, 1980년 7월 15일 ~ )은 한국 프로 야구 LG 트윈스투수이다.

아버지 봉동식 씨와 어머니 김숙자 씨의 1남 3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나 1997년 신일고등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 입단했다. 당시 18세로 한국인으로는 가장 어린 나이에 메이저 리그에 진출한 것이었다. 미국 메이저 리그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무대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으며,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을 통해 확실한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LA 다저스류현진, SK 와이번스김광현 등과 함께 대한민국 3대 좌완으로 불리고 있다. 대한민국 최정상급의 제구력을 자랑하며 대한민국 최고의 견제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선수 활동[편집]

고등학교 시절[편집]

수유초등학교신일중학교를 거쳐 신일고등학교에 입학한다. 1학년 때인 1996년 제50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팀이 올린 5승 중 4승을 책임졌고, 이듬해인 1997년 제51회 대회에서는 팀의 4승을 혼자 거두며 신일고등학교의 2연패에 공헌했다.[1]

1997년 캐나다 몽튼에서 열린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36타수 18안타, 타율 0.500로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하였다. 당시 4연속 경기 홈런을 기록하면서 왼손 거포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왼손 투수로서 140㎞대의 빠른 볼을 던지는 것을 보고 당시 메이저 리그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빌 클라크' 국제 담당 스카우트는 타자보다는 투수로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여 입단 계약을 추진하였다.

미국 메이저 리그에서의 활동[편집]

1997년 10월 봉중근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계약한 뒤 구단 산하 마이너 리그 팀 생활을 거치면서 투수로 정착했다. 그리고 2002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산하 더블 A 팀 그린빌 브레이브스에서 뛰다 4월 24일 홈 구장인 터너 필드에서 열린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경기에 선발 등판, 최고의 투수로 꼽히는 커트 실링과 맞대결을 펼치며 메이저 리그 데뷔전을 치렀으나 6이닝 동안 27타자를 상대로 삼진 4개를 잡으며 8안타(2볼넷) 5실점, 패전 투수가 되었다. 하지만 2002년 마이너 리그에서 탈삼진 4위, 평균 자책점 6위를 기록하고 2003년 시즌을 앞두고 벌어진 시범 경기에서 8경기 연속 무실점으로 9경기에서 평균자책점 1.42를 유지해 메이저 리그에 합류했다. 이로써 봉중근은 메이저 리그에서 뛰고 있는 한국인 투수 중 유일한 좌완 투수로 활약하며 2003년 시즌 중반까지 좌완 중간계투로 제 몫을 해냈으나 후반에 페이스가 떨어지며 마이너 리그로 내려갔다. 2004년 신시내티 레즈로 트레이드되어 마이너 리그에서 시즌 개막을 맞았다. 시즌 중반 팀 동료의 부상으로 메이저 리그로 승격되어 같은 해 6월 21일 메이저 리그 선발로 첫 승을 이루기도 했으나 다시 마이너 리그로 돌아갔다. 이후에는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출전 외에 별 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했고, 그의 아버지가 암 투병으로 인해 건강이 좋지 않은 등 가정 문제로 대한민국 복귀 의사를 밝히자 신시내티 구단에서도 방출 요청을 받아들여 2006년 5월 신시내티 레즈에서 퇴단하고 귀국했다.[2](이후 아버지는 2012년에 암으로 타계하였다.)

대한민국에서의 활동[편집]

LG 트윈스 시절[편집]

마이너 리그에 계속 머물게 되면서 서서히 국내 복귀를 타진[3]하기 시작한 봉중근은 드래프트 신청서를 작성하자마자 2006년 5월 18일에 연고 팀 LG 트윈스와 총액 13억 5천만원(계약금 10억, 연봉 3억 5천만)에 입단 계약을 체결하였고, 그 해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하여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하였다. 당시 두산 베어스이용찬임태훈을 이미 지명하여 입단시켰고, 김강률이 LG의 1차 지명 직전 전학생 규정에 걸려 취소[4]되었기 때문에, 봉중근은 LG 트윈스와 일찌감치 입단 협상을 진행했다. LG 트윈스신시내티 레즈에 낸 이적료가 없어서 협상도 유리하게 진행했다.[5]

2007년에는 1군 24경기에 등판하여 111과 2/3이닝 동안 6승 7패, 평균 자책점 5.32를 기록하면서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시즌 중반인 2007년 5월 4일에는 두산 베어스 내야수 안경현과 빈볼 시비가 있기도 하였다.[6] 이 난투극으로 두 선수 모두 벌금형을 받았다. 2007 시즌 후 미국식 훈련에서 탈피하여 훈련량과 훈련 강도를 높여 2008 시즌을 대비하였다.[7]

2008년에는 좋은 성적으로 LG 트윈스를 이끌어 갔으며, 그 해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하였다. 시즌 중 개최된 베이징 올림픽국가대표팀으로 선발되어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금메달 획득에도 기여하였다.

2009년 3월 9일에 제 2회 WBC 1라운드(일본 도쿄 돔)에서 열린 일본과의 아시아 예선 순위 결정전에서 선발로 자원 등판하여 5⅓이닝 동안 3피안타 무실점으로 일본 타선을 꽁꽁 틀어막아 팀의 1:0 영봉승을 이끌었다. 삼성 라이온즈 윤성환2009년 전 구단 상대 승리투수를 먼저 기록한 다음에 그도 전 구단 상대 승리 투수 반열에 오르면서, LG 트윈스 선발진의 중심 기둥이 되었다.

2010년에는 시즌 초 박종훈 감독과 마찰을 빚어 문책성으로 2군에 내려갔고, 이 사건으로 그의 부인이 미니홈피에 박종훈 감독을 비난하는 발언을 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8] 1군 복귀 후 에이스로의 기질을 다시 보이며 꾸준히 성적을 이어 나갔다. 그는 선발진이 약했던 LG 트윈스 마운드를 묵묵히 지켰고 사실상 LG 팀의 살림꾼 역할을 다했다. 그로 인해 무리가 오게 되어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던 중 팔꿈치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고, 2011년에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 1승 2패로 부진했다. 2군으로 내려간 후 도미하여 조브 클리닉에서 검사를 받은 결과 팔꿈치 부상이 발견되어, 토미 존 수술을 받아 시즌을 마감했다.[9] 재활 후에는 송신영의 FA 이적 및 리즈의 제구난으로 리즈를 대신하여 마무리로 등판, 대한민국 무대 복귀 이후 세이브를 기록하기 시작하였고 마무리로 완전히 전업하였다. 2013년 8월 17일 군산 KIA전에서 30세이브를 기록하였으며, 2007년우규민 이후 LG 트윈스에서 30세이브대를 기록하게 되었다.[10]

2002년시즌 이후 11년만의 진출한 포스트시즌에서, 미디어데이때는 '완투도 가능하다.'는 말을 남겼으나, 두산 베어스와의 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8회말에 등판해서 최준석에게 솔로홈런, 오재일에게 그라운드홈런성 3루타1에러, 오재원에게 3루타를 맞으면서 0.1이닝동안 3실점하고 강판되었다. 이는 LG 트윈스가 11년만의 진출한 포스트시즌의 허무한 탈락이 된 시초가 되고 말았다.

2013년 시즌을 끝으로 9이병규가 주장완장을 내려놓았고, 2014년시즌 후임주장 1순위로 꼽혔으나 결국 주장은 이진영이 되었다.

이외 사항[편집]

신일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미국에 건너가 메이저 리그에 진출했을 때 그는 신분 유지를 위하여 미국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완전히 마쳤고, 귀국 후 모교인 신일고등학교에서 명예 졸업장을 수여하였다.[11] 따라서 그는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할 수 있었다. 프로골퍼 안시현 등과 함께 성균관대학교에 지원하여 합격하였다.[12]

경력[편집]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활약[편집]

2008 베이징 올림픽[편집]

미국전에 선발로 등판하였다. 그 때 미국 팀 선발 투수는 브랜든 나이트였다.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편집]

2006년[편집]

3경기에 등판하여 2.2이닝 무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하였다. 이와 동시에 병역 문제도 해결하였다.[13]

2009년[편집]

당시 야구 국가대표팀은 2009년 3월 7일 1번째 일본전 선발 투수베이징 올림픽 일본전에만 2승을 거둔 일본 킬러 김광현을 내세웠지만 일본 국가대표팀의 철저한 분석과 공략으로 김광현의 투구 패턴이 읽히면서 2-14로 콜드패를 당했다. 그래서 김인식 감독은 2번째 맞대결에서는 김광현 대신 볼 끝이 좋고 빠른 직구와 메이저 리그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봉중근을 선발로 내세웠다. 그리고 그 경기에서 일본에 1-0 완봉승을 거두었다. 이후 2라운드 3번째 일본전에도 봉중근을 선발로 내세워 4-1의 승리를 거두었다.[14] 특히 일본 대표팀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했고 신일고등학교 시절부터 자신의 우상으로 여겼던 이치로를 완벽하게 봉쇄했다는 것이 결정적이었다. 견제 모션을 취하자 이치로가 움찔하며 1루로 귀루하는 모습은 두고 두고 야구팬들에게 회자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그를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안중근 의사와 이름이 같다고 하여 "봉중근 의사"(약칭 "봉의사")라고 빗대었고 그의 소속 팀 LG 트윈스는 이른바 "의사 봉중근" 티셔츠를 한정 판매하여 반나절 만에 매진되자 일본 네티즌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15] 또 그의 이니셜인 J.K.를 "Japan Killer"로 빗대어 "재팬 킬러 봉"(Japan Killer Bong)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봉중근은 일본과의 5번째 대결 겸 결승전에 선발 등판해 4이닝 1실점으로 호투했지만 연장 10회에 임창용이치로에게 결승타를 허용해 대표팀은 3-5로 패하여 준우승을 차지했다. 비록 WBC 해트트릭에 실패했지만, 이 대회를 통하여 봉중근이 확실한 스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2010년 아시안 게임[편집]

처음으로 출전한 아시안 게임에서 그는 대표팀의 주장을 맡았으며, 불펜으로 등판했다. 이 대회 때부터 그는 팔꿈치 통증을 느꼈고, 2011년 토미 존 수술을 받게 되었다.

통산 성적[편집]

연도 소속 경기 선발
출장
패전 세이브 홀드 완투 완봉 이닝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평균자책 비고
2002 ATL 1 1 0 1 0 0 0 0 6.0 8 0 2 4 5 5 7.50
2003 44 0 6 2 1 2 0 0 57.0 56 8 31 47 32 32 5.05
2004 CIN 3 3 1 1 0 0 0 0 15.1 17 3 10 11 13 8 4.70
2007 LG 24 22 6 7 0 0 0 0 111.2 121 6 60 56 71 66 5.32
2008 28 28 11 8 0 0 0 0 186.1 153 13 80 140 66 55 2.66 베이징 올림픽 대표 선수
2009 26 26 11 12 0 0 0 0 172.1 160 13 71 127 70 63 3.2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표 선수
2010 28 28 10 9 0 0 0 0 178.1 166 13 69 130 74 71 3.58 광저우 아시안 게임 대표 선수
2011 4 4 1 2 0 0 0 0 16.1 13 1 14 7 9 9 4.96
2012 40 0 0 1 26 0 0 0 38 26 1 14 36 5 5 1.18
2013 55 0 8 1 38 0 0 0 61 44 2 30 54 10 9 1.33
통산 7시즌 198 112 46 43 27 2 0 0 781.1 720 58 351 558 347 314 3.61

에피소드[편집]

  • 마무리로 나서게 된 첫 해 마무리로 좋은 모습을 보였다가, 2012년 6월 22일 잠실 롯데전에서 강민호에게 홈런을 허용하여 블론 세이브를 기록했고, 결국 LG는 연장전 끝에 패했다. 그 날 그는 블론을 기록한 것에 대해 분을 삭이지 못하고 덕아웃 뒤에 있었던 소화전을 때리는 바람에 오른손 뼈가 골절됐다. 이 사건 이후 LG 트윈스가 급추락했다. 이러한 선수들의 흥분으로 인한 자해 사건을 방지하기 위해 2013년 시즌을 앞두고 김기태 감독은 조계현 수석코치와 의논하여 덕아웃 뒷편에 오뚝이 인형 2개를 설치하기로 했다. [18] 이 결과 LG는 11년 만에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게 되는 시초가 되기도 하였다.

참조[편집]

  1. 봉, 잡았다 - 金, 빛났다…“대한야구 만세” 이끈 주역 2인 《동아일보》, 2009년 3월 19일 작성
  2. 신시내티, 봉중근 방출하기로 결정 - 스포츠서울
  3. 봉중근, 국내 복귀 공식 타진 - 연합뉴스
  4. '예비역' 김강률, "입단 동기들 보며 분발 중" - OSEN
  5. 봉중근, LG에서 얼마나 받을까 - 연합뉴스
  6. 네이버 스포츠 VOD - 2007년 5월 4일 두산 대 LG 경기
  7. 왼손 타자들, 기술이 늘었다 LG 왼손 에이스 봉중근 《스포츠 2.0》, 2008년 7월 22일
  8. 김성근 감독 "박종훈 감독, 용기 있네" - 뉴시스
  9. 봉중근, 왼쪽 팔꿈치 토미 존 수술 결정…시즌 아웃 - OSEN
  10. 봉중근, LG 마무리 30세이브 시대 다시 열었다 - 마이데일리
  11. '봉열사' LG 봉중근 공부 한 풀러 대학 간다 - 스포츠조선
  12. 탈북 복서 최현미, 유재석 앞에서 `맞짱` - 중앙일보
  13. 봉중근 "계약금 10억원도 과분하다." - 노컷뉴스
  14. 철벽 '황금계투' 일본 잠재우다 《한겨레》, 2009년 3월 10일 작성
  15. 한일 네티즌, 스포츠로 감정 격화 - 쿠키뉴스
  16. WBC 공식 홈페이지 2009년 3월 18일 경기 박스스코어
  17. 공식 홈페이지 2009년 3월 24일 경기 박스스코어
  18. 김기태 감독의 파격 행보, 분풀이용 오뚝이 설치 - 스포츠조선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