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원
| 최동원 崔東原 Choi Dong-Won 롯데 자이언츠 No.11(영구 결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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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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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적 | |
| 출신지 | 경상남도 부산시 |
| 생년월일 | 1958년 5월 24일 |
| 사망일 | 2011년 9월 14일 (53세) |
| 신장 | 179 cm |
| 체중 | 95 kg |
| 선수 정보 | |
| 투구·타석 | 우투우타 |
| 수비 위치 | 투수 |
| 프로 입단 연도 | 1983년 |
| 드래프트 순위 | 1983년 1차 10순위 (롯데 자이언츠) |
| 경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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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경력 코치 경력 감독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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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원(崔東原[1], 1958년 5월 24일 ~ 2011년 9월 14일)은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이자 감독이다. 한국 프로 야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한국시리즈 4승을 올리며 1984년 롯데 자이언츠가 우승하는 데 기여하는 등 프로야구 초창기를 이끌었다. 150km/h 대의 강속구와 강한 어깨로 '무쇠팔 최동원'으로 불렸다. 롯데 자이언츠와 삼성 라이온스 투수 생활 이후, 한화 이글스의 투수 코치 및 2군 감독, 한국야구위원회(KBO) 경기감독위원 등을 역임했으나, 2011년 9월 14일 호전되었던 대장암이 악화되면서 54세로 타계했다.[2]
목차 |
플레이 스타일[편집]
최동원은 150km/h를 상회하는 강속구와 70~120km/h의 다양한 속도의 가감을 줄수 있는 커브가 대표 구종이다. 이외에도 슬라이더와 투심패스트볼과 같은 볼은 던졌다. 그의 투구폼이 오버핸드로 알려졌음에 반해, 꼭 그렇지만도 않았던듯 하다. 예를 들어 우타자 몸쪽으로 포심패스트볼을 붙일때는 극오버핸드로, 우타자 바깥쪽으로 포심패스트볼을 붙일때에는 사이드암으로 던지는데, 팔 각도의 변화에 때를 투구폼의 변화가 없어서 같은 직구가 오고 있음에도 타자는 궤적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최동원이 활동할 당시 대한민국의 프로야구는 선발투수 중심의 야구를 하고 있었는데, 시대상황과 맞물려서 최동원은 팀의 20이상을 책임져주는 투수였고, 그는 자신의 어깨와 팀의 승리를 바꿀수 있다는 신념으로 롯데를 1984년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아마추어 시절[편집]
최동원은 경남고등학교 2학년 때, 경북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후, 바로 그 이튿날 선린상고와의 경기에서 8회까지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는 투구를 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3학년 때, 청룡기 고교야구 대회에서 승자 결정전에서는 김성한의 군산상업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9이닝 동안 20개의 탈삼진을 잡고 완봉승을 거두었다. 이어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 특히, 1981년 대륙간컵 대회에서 개최국 캐나다를 상대로 삼진 11개를 잡는 등 8회까지 무실점 호투를 펼쳐 4강 진출에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되고, 이 장면은 2011년 영화 퍼펙트 게임에서 비중있게 다뤄진다. 이로 인해 토론토 블루제이스로부터 메이저리그 영입 제의를 받게 되지만 병역문제로 무산된다.[3][4] 1982년에는 세계 선수권 대회에 대표팀 선수로 참가해 우승에 기여했다.
프로 선수 시절[편집]
1983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고, 이듬해인 1984년에는 프로 야구사에 길이 남을 대기록들을 세웠다. 51경기에 출전해 14차례나 완투하며 27승(6세이브 13패)과 223 탈삼진, 평균 자책 2.40으로 한국 프로 야구 최우수 선수상와 다승왕, 탈삼진왕을 석권한 것이다. [5] 특히 이 해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1패 포함, 1차전 완봉승 3차전 완투승 5차전 완투패 6차전 구원승 7차전 완투승)을 따내 팀의 창단 첫 우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역대 한국시리즈에서 한 선수가 4승을 모두 거둔 선수는 최동원이 유일하다.
선동열과 함께 대한민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투수로 자리하고 있다., 선동열과의 맞대결에서도 1승 1무 1패를 기록한 사실은 매우 유명하다. 주무기는 140km/h를 넘나드는 직구와 커브였다.(스피드건의 작동방식 차이 때문에 요즘 기준으로는 150km/h를 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마추어 시절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측정한 바에 따르면 156km/h를 기록했다는 기사가 게재된 바 있다. [6] 1987년 시즌까지 10승 이상을 기록하며 200이닝 이상을 던지는 쾌투로 팀의 에이스임을 과시했다.
1988년에 선수협 파동으로 삼성 라이온즈의 김시진 등을 상대로 3:4 트레이드로 이적했으며, 트레이드에 반발하여 1989년 후반에서야 돌아왔다. 1990년 시즌을 마치고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1991년에는 미국으로 지도자 연수를 다녀온 경력이 있다.
선수협의회와 은퇴[편집]
1988년, 최동원은 선수협의회를 결성하고자 했다. 해태 타이거즈 투수 김대현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고 선수 복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 | 같이 운동을 하던 선수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도울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연습생 선수들의 최저 생계비나 선수들의 경조사비, 연금 같은 최소한의 복지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선수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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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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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욕에 따른 움직임이라는 일부의 편견도 있었다. 그러나 최동원은 “나는 1억 원의 연봉을 받는 선수였다. 그 돈이면 당시 강남에 아파트를 마련할 수 있었다. 내 욕심을 위해서라면 선수협을 결성할 필요가 없었다. 어려운 동료들을 돕고 싶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구단들의 강한 반발에 밀려 선수협 결성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 해 11월 최동원은 투수 오명록, 포수 김성현과 함께 삼성 투수 김시진, 전용권, 내야수 오대석, 외야수 허규옥을 상대로 한 3:4 트레이드로 이적했다. 롯데가 아닌 다른 팀의 유니폼을 입는 것은 최동원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트레이드 사실보다 최동원을 힘들게 한 것은 구단이 자신의 의도를 본의와 다르게 받아들였다는 점이었다. 구단에 대한 섭섭한 마음과 함께 선수 생활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최동원은 1990년까지 삼성에서 뛰었고 1991년 시즌이 시작하기 전 마운드를 떠났다. 가족들과 의논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32살이었다. 아마추어 야구 시절부터 혹사 당한 게 조기 은퇴로 이어진 것이 아니냐는 견해도 있었다.
| “ | 아마추어 시절이나 프로에서 무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시대에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름 세 글자에 부끄럽지 않게 맡은 바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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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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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선수협 법률자문을 맡았던 문재인이 이 사실을 나중에 트위터를 통해 알려졌다.[7][8]
은퇴 후[편집]
1991년 최동원은 민자당의 공천을 뿌리치고 민주당 간판으로 부산시 서구의 광역의원에 도전했다. '건강한 사회를 향한 새 정치의 강속구'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는 광역의원 선거에서 낙선했다.[9]
최동원은 계속 야구와 인연을 맺고 싶어 지도자 자리를 원했지만 그를 받아 주는 구단은 없었다. 팬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어 텔레비전의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했지만 사람들은 그의 뜻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야구 선수가 왜 오락 프로그램에 나오느냐’는 식으로 바라봤다. 자신의 의도가 다르게 전해진 것을 안 최동원은 1999년부터 방송 출연을 접고 다시 야구 현장으로의 복귀를 노렸다. 그러다 2001년 한화 이글스 투수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선수들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고 코치 직에서 물러난 뒤 2005년 다시 한화에서 코치를 맡았다. 2007년에는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을 맡아 2년 동안 유망주들을 가르쳤다. 2008 시즌을 마치고 한화에서 물러난 최동원은 2009년부터 한국야구위원회(KBO) 경기감독위원으로 야구장을 찾게 됐다.[10]
사망과 추모[편집]
-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으로 활동하던 2007년 대장암 초기 진단을 받았지만, 병세가 호전돼 2009년 야구계로 복귀했다. 그러나 2010년부터 병세가 나빠져 경기도 포천 등지에서 요양해 왔다. 그 와중에 2011년 7월 22일 목동에서 열린 경남고와 군산상고 간의 레전드 매치에 경남고 대표로 참석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경기에 뛰지 못하고 더그아웃을 지켰다. 결국 지병인 대장암으로 2011년 9월 14일 54세로 별세했다.[11] 장효조가 타계한 지 불과 1주일 후의 일이었다.
- 롯데 자이언츠 구단은 2011년 9월 30일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故 최동원의 등번호 11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하고, 두산 베어스와의 홈 경기 직전에 사직야구장에서 영구 결번식을 엄수하였다.[12]
- 2011년 영화 ‘퍼펙트 게임’은 최동원과 선동열의 ‘세기의 맞대결’(1987년 선발 맞대결로 연장 15회까지 4시간 56분 소요)을 다룬 작품으로, 영화배우 조승우가 최동원 역을 연기했다. [13]
수상 경력[편집]
프로[편집]
아마추어[편집]
- 고등학교 2학년 전국 우수고교 초청대회 경북고등학교와 경기에서 경남고를 3관왕으로 이끌며 17이닝 노히트 노런 기록 (1975년)
- 고등학교 3학년 경남고 첫 청룡기 우승(결승전 경남고VS군산상고 한경기 20탈삼진 및 4게임 연속등판 완투우승, 화랑대기고교야구결승전-연이틀에 걸쳐 18이닝투구 1실점) (1976년)
- 연세대학교 시절 23연승 기록 (1981년 졸업)
- 아마야구 실업 팀 롯데입단 실업야구리그전에서 우승(1981년 실업 야구 코리안시리즈에서는 6경기 등판 42와 ⅓이닝을 투구), 최우수선수상, 최우수신인상, 최다승리상 3관왕 (전적:17승 4패)
- 캐나다 대륙간컵대회 최우수선수 - 8이닝 퍼펙트 게임 및 최우수 투수상 (1981년)
기타 경력[편집]
- SBS 야구 해설위원
- 한화 이글스 투수 코치
- KBS 스카이 스포츠 해설위원
- 한화 이글스 2군 감독 : 2008년 10월 11일, 한화 이글스가 최동원을 비롯한 코칭스텝 4명의 재계약을 포기하는 의사를 밝혀 2008년 시즌을 끝으로 한화 이글스의 2군 감독 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등번호[편집]
가족[편집]
최동원은 “아버지는 한국 전쟁으로 한쪽 다리를 잃어 의족을 차고 다녔다. 당신께서는 축구 선수가 되고 싶어 하셨지만 조부의 반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 나에게는 ‘네가 운동을 하고 싶다면 시켜주겠다’며 아낌없이 지원해 주셨다”고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드러냈다. 최동원은 불편한 몸으로 아들 뒷바라지를 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야구 외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안테나를 별도로 설치해 일본 고교 야구와 일본 프로 야구 중계를 볼 수 있게 해 주신 것도 아버지였고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함께 캐치볼을 했던 것도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였지만 최동원이 프로에 입단하는 과정이나 연봉 협상 과정에서 구단과 갈등을 빚을 때면 일부 언론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의 문제에 지나치게 간여한다며 최씨를 비난했다.
최동원은 일부 언론에 대한 섭섭한 마음을 드러냈다. 최동원은 “내가 해명을 하려고 해도 선수 한 명의 목소리는 구단에 비해 너무 작았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주위의 이야기에 흔들리지 마라”며 아들에게 힘을 실어 주곤 했다. 최동원은 아버지에게서 ‘즐겁게 열심히 사는 것이 건강하게 사는 것’이라는 가르침도 받았다. 아버지 최윤식은 2003년 세상을 떠났고 최동원은 아버지의 명예가 회복되기를 바라고 있다.
최동원을 연기한 배우들[편집]
통산성적[편집]
- 투구 기록
| 연도 | 소속 | 평균자책 | 경기 | 완투 | 완봉 | 승 | 패 | 세 | 이닝 | 타자 | 피안타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
| 1983 | 롯데 | 2.89 | 38 | 16 | 1 | 9 | 16 | 4 | 208 2/3 | 863 | 202 | 59 | 148 | 89 | 67 |
| 1984 | 2.40 | 51 | 14 | 1 | 27 | 13 | 6 | 284 2/3 | 1132 | 229 | 82 | 223 | 91 | 76 | |
| 1985 | 1.92 | 42 | 14 | 4 | 20 | 9 | 8 | 225 | 865 | 170 | 49 | 161 | 60 | 48 | |
| 1986 | 1.55 | 39 | 17 | 4 | 19 | 14 | 2 | 267 | 1039 | 204 | 61 | 208 | 60 | 46 | |
| 1987 | 2.81 | 32 | 15 | 4 | 14 | 12 | 2 | 224 | 920 | 218 | 68 | 163 | 80 | 70 | |
| 1988 | 2.05 | 16 | 3 | 1 | 7 | 3 | 3 | 83 1/3 | 349 | 77 | 25 | 83 | 24 | 19 | |
| 1989 | 삼성 | 2.10 | 8 | 0 | 0 | 1 | 2 | 0 | 30 | 138 | 36 | 19 | 9 | 12 | 7 |
| 1990 | 5.28 | 22 | 2 | 0 | 6 | 5 | 1 | 92 | 424 | 113 | 56 | 24 | 62 | 54 | |
| 통산 | 8시즌 | 2.46 | 248 | 81 | 15 | 103 | 74 | 26 | 1414 2/3 | 5730 | 1249 | 419 | 1019 | 478 | 387 |
-
- 빨간 글씨는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다 기록
- 타격 기록
| 연도 | 타율 | 게임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4구 | 삼진 | 병살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 1984 | 1.000 | 1 | 1 | 0 | 1 | 1 | 0 | 0 | 2 | 2 | 0 | 0 | 0 | 0 | 1.000 | 2.000 | 3.000 |
| 통산 | 1.000 | 1 | 1 | 0 | 1 | 1 | 0 | 0 | 2 | 2 | 0 | 0 | 0 | 0 | 1.000 | 2.000 | 3.000 |
역대 선거 결과[편집]
|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
| 1991년 시도의회의원선거 | 부산직할시의원(서구 제1선거구) | 초대 | 민주당 | 10,667표 | 2위 | 낙선[15] |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 ↑ 당시 야구잡지 주간에 실린 최동원의 비밀 병기 중 한자 표기 참조 2011년 9월 21일 미디어다음에서 확인
- ↑ '불세출의 투수' 최동원 별세(종합2보) - 연합뉴스
- ↑ 5勝(승)2敗(패)로 準決(준결)진출 確定(확정) 韓國(한국),홈팀 캐나다制壓(제압)경향신문 1981.08.14
- ↑ 美(미)메이저리그 블루제이스팀 崔東原(최동원)에 스카웃손길경향신문 1981.08.18
- ↑ 김은진, '장효조, 최동원 불멸의 야구 천재' <<주간경향>>, 2011, 9, 27
- ↑ MBC ESPN. “15회 무승부 4시간56분”, 《MBC ESPN》. 유튜브 인용 (02분 ~ )
- ↑ 조수경. “롯데 최동원 선수협 법률자문, 문재인이 했다”, 《미디어오늘》, 2012년 2월 4일 작성. 2012년 2월 5일 확인.
- ↑ 손대선. “문재인 "최동원 프로야구선수 노조결성 생각한 선각자"”, 《뉴시스》, 2012년 2월 5일 작성. 2012년 2월 5일 확인.
- ↑ 민자당 거부하고 '꼬마 민주당' 선택한 최동원《오마이뉴스》2011년 9월 16일
- ↑ 김남형. “(원티드 인터뷰)이사람을 모르시나요 (1)최동원”, 《스포츠조선》, 2008년 10월 28일 작성. 2008년 10월 28일 확인.
- ↑ 이연우. “최동원 전 한화 2군 감독 14일 새벽 별세”, 《스포츠서울》, 2011년 9월 14일 작성. 2011년 9월 14일 확인.
- ↑ '무쇠팔' 최동원, 부산의 '영원한 11번'이 되다, 《오마이뉴스》, 2011년 10월 6일 확인.
- ↑ 가 나 ‘퍼펙트게임’ 조승우, 최동원 완벽변신…싱크로율 100% , 《데일리안》, 2011년 10월 20일 확인.
- ↑ 故최동원 동생 최수원 심판 “통증속에서 야구만 생각” - 일간스포츠
- ↑ 中央選擧管理委員會 (1991). 《市·道議會議員選擧總覽》, 189쪽
바깥 고리[편집]
- 최동원 - 한국야구위원회 투수별 기록
- 최동원 - 한국야구위원회 타자별 기록
- 종횡무진 인터뷰 - 최동원 《중앙일보》, 2008년 7월 4일
- 네이버 캐스트 : 오늘의 인물 - 최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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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자이언츠 - 1984년 한국시리즈 우승 (정규시즌 후기리그 1위, 통합 승률 3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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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강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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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 야구 다승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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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 야구 최다 탈삼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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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최다 탈삼진: 최동원 (1984년, 223개) | 최다 수상: 선동열,류현진, 5회
외국인 선수: 호세 에르난데스 (2001, SK 와이번스), 다니엘 리오스 (2005, KIA 타이거즈 → 두산 베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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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프로 야구 최다 이닝 투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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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다 이닝 투구 장명부 (1983,427⅓이닝) | 최다 기록자 리오스 (2004~2007,4회) | 외국인선수 대니 해리거(2000), 페르난도 에르난데스(2001), 다니엘 리오스(2004~2007), 아킬리노 로페즈(2009), 벤자민 주키치(2011),
브랜던 나이트(2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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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프로 야구 최우수 선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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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다 수상: 이승엽 5회 (1997,1999,2001~2003) | 연속 수상: 선동열 (1989~1990) · 장종훈 (1991~1992) · 이승엽(2001~2003)
외국인 선수: 타이론 우즈 (1998) · 다니엘 리오스 (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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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 야구 골든 글러브상 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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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황태환 · 1983년 장명부 · 1984년 최동원 · 1985년 김시진 · 1986년 선동열 · 1987년 김시진 · 1988년 선동열 · 1989년 선동열 · 1990년 선동열 · 1991년 선동열 · 1992년 염종석 · 1993년 선동열 · 1994년 정명원 · 1995년 이상훈 · 1996년 구대성 · 1997년 이대진 · 1998년 정민태 · 1999년 정민태 · 2000년 임선동 · 2001년 신윤호 · 2002년 송진우 · 2003년 정민태 · 2004년 배영수 · 2005년 손민한 · 2006년 류현진 · 2007년 리오스 · 2008년 김광현 · 2009년 로페즈 · 2010년 류현진 · 2011년 윤석민 · 2012년 장원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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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다 수상 선동열 (6회) | 연속 수상 선동열 (4년, 1988~1991), 정민태 (2년, 1998~1999)
신인 수상 염종석 (1992), 류현진 (2006) | 외국인 선수 다니엘 리오스 (2007), 아킬리노 로페즈 (2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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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 야구 영구 결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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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수 | |
| 타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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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나열은 영구 결번 지정 연도순. 이승엽은 은퇴 시 영구 결번 선포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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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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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단 | |
| 홈 구장 | |
| 훈련장 | |
| 라이벌 | |
| 영구 결번 | |
| 한국시리즈 우승 (5) | |
| 리그 우승 (6) | |
| 아시아 시리즈 우승 (1) | |
| 시즌 (32)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