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형 증기 기관차
제작 및 운영 | |
---|---|
제작사 | 미국 Baldwin |
제작 연도 | 1919년 |
제원 | |
전장 | 22,032 mm |
전폭 | 3,023 mm |
전고 | 4,383 mm |
차량 중량 | 116 t |
궤간 (mm) | 1435 |
성능 | |
동력 방식 | 텐더식 증기기관차 |
영업 최고 속도 | 70 km/h |
제작 및 운영 | |
---|---|
제작사 | 미국 ALCO |
제작 연도 | 1919년 |
제원 | |
전장 | 22,094 mm |
전폭 | 3,023 mm |
전고 | 4,254 mm |
궤간 (mm) | 1435 |
성능 | |
동력 방식 | 텐더식 증기기관차 |
영업 최고 속도 | 70 km/h |
![]() 의왕 철도박물관에 보존 중인 미카3-161호 기관차 | |
제작 및 운영 | |
---|---|
제작사 | 일본 기샤가이샤, 니혼샤료, 가와사키, 히타치 |
제작 연도 | 1927년~1945년 |
제원 | |
전장 | 22,035 mm |
전폭 | 3,078 mm |
전고 | 4,507 mm |
궤간 (mm) | 1435 |
성능 | |
동력 방식 | 텐더식 증기기관차 |
영업 최고 속도 | 70 km/h |
제작 및 운영 | |
---|---|
제작사 | 일본 미쓰비시 |
제작 연도 | 1950년 |
제원 | |
궤간 (mm) | 1435 |
성능 | |
동력 방식 | 텐더식 증기기관차 |
영업 최고 속도 | 70 km/h |
미카형 증기 기관차는 대한민국에서 운행했던 바퀴의 배열이 2-8-2인 증기 기관차의 이름이다. 일본어로 황제(Mikado)를 뜻하는 단어의 첫 두 음절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1] 1919년부터 300량 이상 도입되었으며,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전량 퇴역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미카 3형이 최소 2003년까지 운용되었다.
역사[편집]
1910년대 말, 당시 한국에 도입되어 있던 증기 기관차가 성능이 화물을 끌기에 적합치 못해서,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는 화물용 증기 기관차를 도입하기로 했다. 1919년에 미국 볼드윈에서 미카1형 12량을 도입해 주로 경의선에서 사용했고, 그와 동시에 미카2형 또한 12량을 알코에서 수입해 경의·경원·함경선에서 사용했다. 이후 1927년부터 1945년까지 298량의 미카3형이 도입되었는데, 정비 시의 부품 교체가 쉽도록 파시4형과 부품이 유사하게 제작되었다. 1950년대[출처 필요]에는 미카5형이 등장했고, 기존의 미카1·2형을 한국산 갈탄을 사용하려고 개량했다. 중국의 sy11형 증기 기관차를 수입해 미카6형으로 명명했고, 일본의 D51형 증기 기관차를 수입해 방연판만 개조해서 미카7형으로 이름을 붙였다.
- 1919년 미카1형: 볼드윈에서 12량
- 1919년 미카2형: 알코에서 12량
- 1927년 미카3형: 기샤가이샤(汽車會社)에서 8량
- 1928년 미카3형: 니혼샤료(日本車輛)에서 3량, 기샤가이샤에서 3량, 가와사키에서 5량, 히타치에서 3량
- 1930년 미카3형: 경성공장에서 7량
- 1934년 미카3형: 기샤가이샤에서 4량
- 1935년 미카3형: 히타치에서 4량
- 1936년 미카3형: 기샤가이샤에서 7량
- 1937년 미카3형: 기샤가이샤에서 14량, 가와사키에서 5량
- 1938년 미카3형: 기샤가이샤에서 18량
- 1939년 미카3형: 니혼샤료에서 5량, 기샤가이샤에서 12량, 가와사키에서 5량, 히타치에서 4량
- 1940년 미카3형: 니혼샤료에서 30량, 기샤가이샤에서 27량, 히타치에서 23량, 경성공장에서 2량
- 1941년 미카3형: 기샤가이샤에서 12량, 히타치에서 2량
- 1942년 미카3형: 니혼샤료에서 6량, 히타치에서 6량
- 1943년 미카3형: 니혼샤료에서 16량, 기샤가이샤에서 6량, 히타치에서 24량
- 1944년 미카3형: 니혼샤료에서 14량, 히타치에서 18량
- 1945년 미카3형: 가와사키에서 4량, 히타치에서 1량
- 1950년 미카7형: 미쓰비시에서 2량
보존[편집]
- 미카3-129호: 국립대전현충원
- 미카3-161호: 철도박물관 옥외전시장. 이 차량을 소재로 시인 안도현은 2001년에 《증기기관차 미카》라는 제목으로 책을 내기도 했다.
- 미카3-244호: 임진각 평화누리공원
- 미카3-304호: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연동 삼무공원
- 미카5-31호: 호남선 영산포역. 인천광역시 운봉공업고등학교에 있다가, 2002년 광주비엔날레공원에 전시되었고, 이후 이전되었다.
- 미카5-34호: 광주 어린이대공원. 1981년 어린이대공원 개관과 함께 전시물로 들어왔으나[2], 현재 소재가 미상이다.
- 미카5-37호: 현대로템 창원공장
- 미카5-48호: 대구 어린이회관
- 미카5-56호: 경춘선 화랑대역. 서울 어린이대공원에 있다가 2017년 5월 18일 이전하였다.[3]
그 외 중국철도박물관에도 미카 3형과 동일 기종인 JF9 3673이 전시되어 있다.
등록문화재[편집]
![]() | |
![]() | |
종목 | 등록문화재 제414호 (2008년 10월 17일 지정) |
---|---|
시대 | 1944년 |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연동 270-5 (삼무공원) |
정보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
![]() | |
![]() | |
종목 | 등록문화재 제415호 (2008년 10월 17일 지정) |
---|---|
시대 | 1940년 |
주소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 국립대전현충원 |
정보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
미카형 증기기관차 3-304호[편집]
등록문화재 제414호로 지정된 미카3-304호에 대해서는 미카형 증기기관차 304호 문서를 참조.
미카형 증기기관차 3-129호[편집]
등록문화재 제415호로 지정된 미카3-129호는 1940년 일본에서 제작되고 조선총독부 철도국 경성공장에서 조립한 텐더식 증기 기관차로 경부선 등 주요 간선에서 운행되다 1967년 8월 디젤 기관차의 등장으로 운행이 중단되었다. 1981년 10월부터 2년간 동해남부선(부산~경주) 관광열차로 운행되었다.[4]
이 기관차는 한국전쟁 중 북한군에 포위되어 있던 미 제24보병사단의 군수물자 후방 이송 작전을 위해 대전으로 들어갔던 기관차[4]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사용된 기관차는 미카 3-219호이었다.[5][6][7]
부연하자면 다음과 같다.
1944년 일제강점기 당시 철도국에 입사하여 대전기관차사무소 기관사로 일하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 개전 후 약 20일 이후 시작된 대전 전투에서 미국 육군 제24보병사단이 북한군에게 포위당하고 있었다. 이에따라 사단장인 윌리엄 F. 딘 소장은 대전역에 있던 탄약 등 군수물자가 적재된 화차(화물열차) 10량의 후방 이송을 명령하였고, 김재현 기관사는 이 군수물자 후송 작전[8]을 수행하기 위하여 부기관사인 본무조사 황남호, 보조조사 현재영과 함께 자원하였다. 그리하여 증기기관차 미카 3-219호[9]에 탄수차만을 연결한 채 기관차에 올라 미군들[10]을 싣고 7월 20일[11] 이원역을 출발하였으나 대전역으로 가는 도중 북한군의 공격을 받아 탄수차에 총알 구멍이 생겼고 이로인해 물이 새면서 압력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어렵사리 대전역에 도착하였으나 군수물자가 적재된 화차 10량을 연결시 기관차의 동력 부족으로 이동이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하여 군수물자 후송 임무를 포기하고 다시 옥천역으로 돌아가던 중, 세천역 부근 구랑터널에서 매복해 있던 북한군의 집중사격을 받고 28살에 순직하였으며 김재현 기관사가 총에 맞아 즉사한 이후 현재영 부기관사도 총에 맞아 의식을 잃고 쓰러지면서 옥천역까지 겨우 귀환하였다.
자세한 작전 과정은 2021년 한국철도공사에서 제작한 철도박사가 들려주는 한국철도 10대 사건 - 3️⃣ 한국전쟁 영상에서 작전 목적 이외에는 거의 정확하게 설명되어 있다.
한편 이 군수물자 후송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7월 20일에 기관차를 운전할 기관사가 없어서 신호수였던 장시경 철도원이 직접 기관차를 몰고 미군들과 함께 한번 더 군수물자 후송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대전으로 들어갔다는 본인의 증언이 있었지만, 미군 측 기록 및 자료로는 확인되지 않으며, 미 육군 군사편찬연구소의 한국전쟁 공식 전사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169 페이지)에 따르면 김재현 기관사의 기관차가 되돌아간 이후 딘 소장이 한번 더 사단 본부에 군수물자 후송을 위해 기관차를 대전역으로 보내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그 후 기관차는 오지 않았고 이 기관차를 대전역에서 기다리던 수송장교 햇필드 대위가 북한군에게 공격을 당해 전사하였다고만 기술되어있다. (수송장교 햇필드 대위는 이 군수물자 후송 작전 중 전사한 공적이 인정되어 은성훈장이 수여되었다.[12])
그러나 이렇게 한국인 기관사들과 미군들의 노력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결국 군수물자가 적재된 화차 10량의 후방 이송에 실패하여 7월 21일 08시에 미 공군이 폭격을 가해 북한군에게 노획되는 것을 막았다.
한편 오랜세월 동안 이 작전과 관련하여 그 동안 잘못 알려진 사실들이 여러개 있었다.
잘못 알려졌던 사실들[편집]
김재현 기관사의 순직일과 작전 일시[편집]
김재현 기관사의 순직일은 7월 19일 아니고 7월 20일이었다.
김재현 기관사의 공식적인 순직일은 현재 국립서울현충원 묘비, 국가보훈처 자료 등등에서 7월 19일로 기록되어 있으며,1975년 동아일보 기사처럼 7월 19일을 김재현 기관사의 순직일로 보도한 과거 기사도 존재한다.
그러나 생존 기관사들인 황남호, 현재영 부기관사들의 증언이 수록된 1962년 경향신문 기사 등의 자료에는 7월 20일 18시에 대전으로 출발했고 이날 김재현 철도 기관사가 순직했다고 기술하였으며, 딘 장군 회고록 (General Dean's Story) 비롯 미군 측 자료에 대전으로 들어왔다 나가던 기관차에서 한국인 기관사가 적의 총탄을 맞아 죽은 사건을 일관되게 7월 20일로 기록하고 있으며 제24사단 기록에는 옥천으로 되돌아와서 도착한 시각을 16시 45분으로 시각까지 기록되어 있다.
종전 후 미군 측 기록 및 자료들과 교차 검증을 할 수 없었던 시기에 증언에만 의존한 기록들이 후대에 전해지면서 순직일 및 작전 일시에 혼동이 생겼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재현 기관사가 운전했던 기관차의 모델명[편집]
김재현 기관사가 운전했던 기관차의 모델명은 미카 3-129호가 아니고 미카 3-219이었다.
김재현 기관사의 유품은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철도박물관에 소장, 전시 중이며 그가 운전했다고 알려진 미카 3-129 증기기관차는 2008년 10월 17일 등록문화재 제415호로 지정되었으며 한 때 대전철도차량관리단에 정태 보존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옮겨 현충원 내 철도추모관에 야외전시 중이다.
그런데 당시 증언 및 관련 사료들을 살펴보면 김재현 기관사가 운전한 기관차는 미카 3-129호가 아니고 미카 3-219호였다고 한다. 이 차량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고 등록문화재로는 미카 3-129호가 지정되어 있다. 1962년 경향신문 기사, 1969년 동아일보 기사, 1975년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이때까지만 해도 미카 3-219호라고 정확히 기술되었지만 1981년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미카 3-129호로 기술되었는데 이렇게 기록이 내려오는 도중 129와 219 숫자 기재 과정에서 착오가 생기면서 이런 오류가 발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재현 기관사가 수행한 작전의 목적[편집]
김재현 기관사가 수행한 작전의 목적은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아니고 대전역에 있던 군수물자(화차 10량)의 후방 이송 작전이었다.
즉 지금까지 '딘 소장 구출 작전'은 대전역에 적재되어 있던 군수물자 후방 이송 작전이 와전되어 한국철도공사 등 군 이외의 정부기관에 의해 잘못 전파된 것으로 과거부터 현재 기밀해제된 최신 미군 측 공식 전사(戰史) 및 기록 모두 군수물자 후송 작전으로 일관되게 기술하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 국군 측 역시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1979년 발간한 한국전쟁 공식 전사(戰史) 한국전쟁사 제2권 지연작전기 536P에서 "열차작전의 목적이 딘 소장 구출에 있었다는 생존 기관사들의 증언이 있었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못 박았으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2008년에 발간한 한국전쟁 공식 전사(戰史) - 6.25전쟁사 4 금강-소맥산맥전 지연작전기 161P에서는 '대전역 보급품 후송 실패'라는 제목의 문단으로 기술하여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아닌 '군수물자 후송 작전'이었음을 명확히 하였다. 전쟁기념관 역시 2020년에 발간했던 학예지 호국인물총서 (1): 6·25전쟁 개전의 순간 - 김재현 기관사 파트에서 미군 측 자료와 기록을 근거자료로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아닌 '군수물자 후송 작전'이었음을 명확히 하였다.
덧붙여 그 동안 북한군에게 포위된 상태의 대전에 남아있던 딘 소장을 구출하는 것도 아니고 일부 언론 기사 (매일건설신문 기사, 세계일보 기사) 및 영상 콘텐츠 (국립서울현충원 교육용 애니메이션,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딘 소장이 아예 행방불명 혹은 포로가 된 이후 미군이 이 사실을 인지하고 김재현 기관사의 기관차로 특공대를 투입하여 대전역을 수색하는 등 딘 소장 구출 작전을 펼쳤다고 드라마틱하게 묘사하기도 했는데 이는 역사 왜곡으로 이러한 영화같은 구출 작전은 시간 순서상 아예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이었다.
왜냐하면 딘 장군 회고록 (General Dean's Story)과 미 육군 군사편찬연구소의 한국전쟁 공식 전사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에 딘 장군이 내렸던 군수물자 후송 명령 때문에 김재현 기관사의 기관차가 대전으로 출발한 것이며, 김재현 기관사의 기관차가 대전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화차 연결에는 실패 후 다시 되돌아가는 도중 김재현 기관사가 순직했다는 사실까지 딘 소장과 수송장교 햇필드 대위가 보고 받았었고 그리하여 다시 한번 사단본부에 군수물자 후송을 위해 기관차를 보내라고 명령했다는 내용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딘 소장은 7월 20일 5시 이후 대전에서 마지막으로 철수한다는 내용의 전보문을 사단 본부에 보내고 6시 이후 미 제24 보병사단 34연대의 잔류 병력과 함께 약 50여대의 트럭 등 차량을 이용하여 대전을 빠져나가었는데, 그 후 북한군의 매복 공격을 받아 차에서 내려 도보로 철수하던 중, 함께 가던 부상병에게 물을 떠다 주기 위하여 어둠 속에서 물을 찾아 계곡을 내려가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져 실신하면서 행방불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딘 소장이 포로가 된 시점도 낭떠러지로 떨어져 실신하면서 홀로 낙오된 이후 본대로 복귀하기 위해 36일 동안 산천을 헤매다가 전라북도 진안군에서 8월 25일이 되어서야 북한군에게 포로가 되었으며, 미군에서는 실종 중 전사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다 1950년 10월말 북진 중 평양 부근에서 포로로 잡은 북한군 병사의 진술로 미군에서도 이때 북한군에 포로가 되었을 가능성을 인지하였다고 하는데[13]그래도 미군에서는 진술보다는 정황상 전사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을 하였는지 1951년 2월 16일에 명예훈장이 추서되었으며 그 후 생사여부를 계속 조사 중 1951년 12월 18일 북한군이 오스트레일리아 종군기자 월프레드 버체트를 초청해서 인터뷰를 시키면서 딘 장군이 생존해 있고 자신들이 포로로 잡고 있다는 것을 공개하면서 딘 소장의 상황이 명확하게 알려지게 되었다.
김재현 기관사의 기관차에 탑승했던 미군의 정체[편집]
김재현 기관사의 기관차에 탑승했던 미군의 정체는 특공대원들이 아니고 미 제24보병사단 병참부대 병사들이었다.
기존에는 기관차에 탑승했던 미군들이 인원은 30명에서 33명으로 딘 소장 구출 작전을 위한 미군 결사대 혹은 미군 특공대이며 구출 작전 중 29명에서 32명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김재현 기관사의 기관차에 탑승했던 미군이 미 제24보병사단 정보참모부 (G2)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기관차 탑승 미군들은 군수물자 후송 작전 지원 및 기관차 호위 임무를 맡았던 미 제24보병사단의 병참부대 혹은 수송부대 소속 병사들었으며 사상자는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사진[편집]
각주[편집]
- ↑ 배은선 2019, 119쪽.
- ↑ 鄭健朝 (1981년 8월 17일). “無等벌 6만坪에 펼치는 새싹들 꿈의동산”. 경향신문(네이버). 2019년 8월 12일에 확인함.
- ↑ “1950년대 미카열차와 협궤열차 '노원구로'”. 뉴스1. 2017년 5월 18일. 2017년 6월 25일에 확인함.
- ↑ 가 나 대한민국관보 문화재청고시 제2008-134호, 2008년 10월 17일.
- ↑ “京釜線沿邊에 새겨진『反共』”. 경향신문(네이버). 1962년 12월 11일. 2019년 8월 12일에 확인함.
- ↑ 交通史編纂委員會 1953, 330쪽 .
- ↑ 배은선 2019, 188쪽 .
- ↑ 최신 증거자료에 의해 밝혀진 작전 목적은 군수물자 후송 작전으로 관련 부연 설명은 잘못 알려졌던 사실들 문단 참고
- ↑ 최신 증거자료에 의해 밝혀진 실제 작전에 사용된 미카형 증기기관차 모델명은 미카 3-219호로 관련 부연 설명은 잘못 알려졌던 사실들 문단 참고
- ↑ 최신 증거자료에 의해 밝혀진 미군들의 정체는 미 제24보병사단 병참부대 소속 병사들로 관련 부연 설명은 잘못 알려졌던 사실들 문단 참고
- ↑ 최신 증거자료에 의해 밝혀진 실제 작전일 즉 김재현 기관사의 순직일은 7월 20일로 관련 부연 설명은 잘못 알려졌던 사실들 문단 참고
- ↑ Raymond Davidson Hatfield - Hall of Valor: The Military Medals Database
- ↑ 6.25 전쟁사 제4권 금강-소백산맥선 지연작전 166P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참고 문헌[편집]
- 交通史編纂委員會 (1953). 《韓國交通動亂記》. 서울: 交通部.
- 변성우 외 (1999). 《한국철도차량 100년사》. 서울: 철도차량기술점검단.
- 기차가 온다 - 한국철도박물관 관장 배은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