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테카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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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테카 제국
중앙아메리카에 있던 아스테카 제국
수도 테노치티틀란
언어 나우아틀어
정치체제 속국들로 이루어진 제국
웨이 틀라토아니 (세습되지 않는 군주)
건국
멸망
1248년
1521년

아스테카 문명(Azteca)은 지금의 멕시코 지역에 존재하던 아즈텍인들이 만든 문명이다. 수도는 멕시코 중부의 텍스코코 호 중앙의 인공 에 있던 테노치티틀란이었다. 마야 문명의 영향을 받았다.

1519년 11월 8일, 에스파냐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가 수도 테노치티틀란에 들어갔다. 아스테카 제국의 통치자였던 몬테수마 2세백인인 코르테스와 그의 무리를 아스테카 문명의 전설에 나오는 깃털 달린 케찰코아틀로 여겨 환대했으나 내부의 정치적 위기를 이용한 코르테스의 계략으로 1521년, 코르테스의 군대에게 정복당했다.

이름의 유래[편집]

아즈텍이란 이름은 나후아틀어의 아즈틀란(나우아틀어: Aztlān)에서 유래하였다. 아즈틀란아즈텍 신화에 등장하는 애초에 아즈텍인들이 살던 곳이다. 전해 오는 전설에 따르면, 아즈텍인은 신의 나무에서 과일을 따 먹는 바람에 신의 노여움을 샀다. 그 벌로 그들은 중앙아메리카를 방황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가 1300년대 초에 멕시코에서 비옥한 골짜기를 발견했는데, 그곳 원주민은 아즈텍인을 가리켜 '낯선 사람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1]

아즈텍 인은 자신들을 멕시카(Mexica)라고 불렀다. 원래 멕시코 북부에 살다가 1200년대에 남쪽으로 거주지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의 정복 이후 이주민들이 자신들을 멕시코인이라 부르면서 이전의 선주민들을 아즈텍인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아즈텍이란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세기 이후의 일이다.

역사[편집]

초기 역사 (1200년~1345년)[편집]

1200년에는 톨텍 족이 멸망하고 톨텍의 수도였던 툴라도 폐허로 변했다. 그래서 북방에 살던 민족들이 멕시코로 이주하게 된다. 이 중 가장 늦게 이주한 종족이 바로 아즈텍인이다. 그들은 싸움에 능해서 1300년부터 한동안 콜오우칸에 살던 톨텍족의 노예가 되었으나 톨텍 족의 공주를 살해한다. 그래서 그들은 마을에서 쫓겨나 늪지의 섬에 살게 된다. 그러다 그 섬에서 선인장 위에서 을 먹고 있는 독수리를 보고 신의 뜻으로 생각하여 그 곳에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1345년, 섬 주위에 있던 진흙뻘들을 개척해서 땅으로 만들고, 테노치티틀란(지금의 멕시코시티)이라는 새 수도를 만들게 된다.

중기 역사 (1345년~1517년)[편집]

테파넥 족의 지배와 삼각동맹의 등장 (1372년~1428년)[편집]

1372년, 아즈텍인들은 첫 번째 왕을 아카마피츠틀리로 정했다. 그는 왕이 된 1372년부터 약 20년 동안 아즈텍인을 이끌면서 당시 위세를 떨치던 테파넥 족의 한 도시국가 아스카포찰코의 압력에도 끈질기게 저항했다. 그러나 결국 아즈텍인들은 아스카포찰코의 군주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얼마 후 틀라텔롤코에 아스텍 왕조가 세워지자, 왕이던 아카마피츠틀리의 아들들은 새로운 지배계급의 시조가 되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스카포찰코텍스코코를 제외한 나머지 도시국가들을 굴복시키고 톨텍 이후, 중앙 멕시코에서 가장 완벽한 지배체제를 구축했다. 그러다 아스카포찰코 지배하에 있던 아즈텍인들은 점차 특권을 누리게 된다.

15세기 초, 텍스코코가 막강한 군사력을 갖게 되자, 테파넥 족의 왕 테소소목텍스코코멕시코 계곡을 지배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결국 전쟁이 일어났는데, 당시 텍스코코의 지도자였던 익스틀리소치틀은 자신의 도시국가를 포기하고 말았다. 이로써 텍스코코 영토의 많은 부분이 테파넥 족의 손으로 넘어 갔으며, 그에 따라 아즈텍인들은 텍스코코를 감독하고 그들의 공물을 나눠 가질 권리를 얻었다. 그러나 테소소목이 죽은 뒤 1426년에 왕위를 이어받은 아들 막스틀라는 큰 실수를 자주 저지르는 데다가 독재적으로 통치했기에 테파넥 왕조는 급속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 때 테노치티틀란텍스코코가 연합해 막스틀라에게 저항하기 시작했고, 합법적인 상속자 네사우알코요틀테파넥 족에게 빼앗겼던 텍스코코의 지배력을 되찾았다. 테파넥 족아스카포찰코는 114일로 계속된 연합군(아스텍,텍스코코,타쿠바)의 포위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1428년에 멸망했다. 이 연합군은 삼각동맹이라는 정치구도가 되는데, 이로써 아스텍 제국으로 발전하게 된다.

몬테수마 1세 (1440년~1468년)[편집]

1440년, 테노치티틀란몬테수마 1세는 나이 40에 이츠코아틀의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했다. 몬테수마 1세는 즉위하자마자 만년설로 덮인 화산에 숨어 살던 찰카 족과 전쟁을 벌였지만, 흉년으로 곧 중단되었다. 1446년 메뚜기떼가 몰려와 농지의 식물들을 먹어 버렸고, 1449년에는 홍수가 나서 테노치티틀란이 잠겼으며, 1450년부터 1454년까지는 한파와 흉년이 계속되기도 했다. 이 시기는 아스텍 역사 중 가장 힘든 시기로 평가되고 있으며, 150년이 지난 뒤인 1604년에도 여전히 이 재앙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다행히도 1455년에는 비가 내려 옥수수 농사가 풍년을 이루었지만, 그 해는 52년의 순환주기가 끝나는 날이어서 제사를 지냈다. 하지만 1455년에도 화로에서 이 타오르자, 1450년부터 1454년 사이의 계속된 재앙은 단지 신의 노여움 때문이었다고 믿었다.

몬테수마 1세삼각동맹을 이끌고 화산 반대편인 푸에블라 틀락스칼라 계곡에 살고 있는 부족들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그래서 삼각동맹푸에블라 계곡 종족들은 적대관계가 되었고 이것은 척박한 삼각동맹의 정착지를 벗어나 풍요로운 푸에블라 계곡 쪽으로 영토를 넓히려던 아즈텍인들의 야만과도 일치했다. 이 적대관계는 스페인멕시코에 상륙할 때까지 계속되어 스페인은 이 갈등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아즈텍인이 팽창정책을 펼치자, 멕시코 계곡의 굶주린 피난민들이 푸에블라 계곡 쪽으로 몰려들었는데, 피난민들이 몰려간 곳은 보석이나 들의 귀한 것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몬테수마 1세푸에블라 계곡을 마침내 정복하게 된다.

이후 몬테수마 1세는 남동쪽으로 정복을 시작해서 1458년 코익스틀라우아카를 포위했다. 그리고 멕시코 만 동쪽으로 침략해 우악스테 족토토낙 족이 사는 곳을 정복하기도 했다. 1464년, 몬테수마 1세는 화산 너머의 계곡으로 군대를 이끌고 갔다. 왜냐하면 그곳에 있던 테페아카는 남쪽, 남동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이다. 1465년에는 찰코를 정복했는데, 이는 몬테수마 1세가 치른 마지막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는 1468년 세상을 떠났다.

악사야카틀티속 (1468년~1486년)[편집]

1468년, 제 7대 황제로 악사야카틀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러던 중 1473년 멕시코의 상업 중심지인 틀라텔롤코테노치티틀란에 시비를 걸어왔다. 이 틀라텔롤코가 일으킨 쿠데타테노치티틀란에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었다. 틀라텔롤코쿠데타를 일으킨 이유는 이츠코아틀몬테수마 1세와 함께한 정복전쟁에서 얻은 전리품 덕분에 부유해졌으면서도 그들의 지배는 받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로 돌아갔고, 틀라텔롤코악사야카틀 손에 파괴되고 자치권을 빼앗겼지만 스페인이 아스텍 제국을 정복할 때까지도 멕시코 전역을 돌아다니는 상인들을 계속해서 보호해 주었다. 악사야카틀은 서부와 북서부 지역에서도 계속해서 전쟁을 벌였지만, 군대의 힘을 보여 주려던 그의 계획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미초아칸타라스카 족틀락스칼라 족처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악사야카틀의 후계자인 티속1481년에 왕위를 물려받아 선왕에 이어 전쟁을 벌였지만 그는 멕시코 계곡에서 다른 족장 손에 1486년에 일찍 죽게 된다.

아우이소틀 (1486년~1502년)[편집]

1486년, 제 9대 황제로는 아우이소틀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는 뛰어난 명성만큼이나 악명 높은 학살의 대가였고, 상상하기조차 힘든 제식을 만든 왕이기도 했다. 아우이소틀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쿠데타를 일으킨 나라들과 전쟁을 벌여 승리를 이끌었다. 그리고 몬테수마 1세때 짓기 시작한 대신전의 마무리 공사에 포로들을 동원했다. 대신전의 개관식은 화려한 축제와 더불어 대규모 학살극으로 꾸며졌는데, 아우이소틀인간을 신에게 바치는 희생제식을 행한 후, 포로들을 잡아먹기도 했다. 전보다 더욱 격렬해진 그들의 첫 원정 상대는 남부 열대지방으로 테노치티틀란텍스코코의 식민지를 그 곳에 두어 귀족이 소비하는 카카오 농장을 개발하였고 만만치 않은 상대인 타라스카 족 영토의 경계에는 보초를 세우기도 했다. 이때 텍스코코의 지도자 네사우알피이테노치티틀란을 도왔다. 하지만 전쟁 이후에는 테노치티틀란텍스코코보다 군사적으로 강해졌다.

꾸준한 확장정책을 펼친 아우이소틀1491년1495년 사이에 태평양 연안지방을 점령했다. 몬테수마 1세에 시작된 오하카 지방 정복전쟁에서도 승리하여 멕시코 계곡에는 , 염료, 염색 면직물 같은 공물이 풍부하게 지급되었다. 아우이소틀은 계속해서 정복전쟁을 펼쳤다. 중요한 상업거점이 될 수 있는 테완테펙을 점령하기 위해 아우이소틀은 최장거리 원정대를 파견했지만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1500년, 테완테펙멕시코에서 10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소코누스코에 대항하기 위해서 아우이소틀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하지만 그 원정은 매우 어려운 결정이었다. 그래서 아우이소틀은 이번 원정을 위해 타쿠바텍스코코의 지배자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아우이소틀에게 협력하기를 거부했다. 결국 아우이소틀은 단독으로 소코누스코 지방을 점령했다. 그러나 삼각동맹 역시 동시에 여러 곳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영토확장은 그쯤에서 중단해야 했다. 각 나라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정복한 땅에 대해 목록을 작성한 후, 상형문자로 남겼다.

아우이소틀이 제국의 국경을 확장하는 동안 멕시코 계곡은 번영을 누렸다. 인구가 증가하자 더 많은 농산물을 생산해야 했기 때문에 큰 관개공사를 벌여 신선한 호수쪽으로 흐르게 했다. 하지만 1500년홍수가 나서 도시의 정원이 모두 파괴되자, 귀족들은 그곳을 떠나 버렸다. 그러자 아우이소틀은 할 수 없이 동맹자 텍스코코에 조언을 구했고, 텍스코코의 왕 네사우알피이는 신의 노여움을 풀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네사우알피이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계곡의 도시에서 파견된 노동자들은 귀족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귀족들은 노동자를 감독하여 화려한 궁전정원을 건축하게 했다. 운하 양쪽 둑에는 버드나무포플러를 심고 제방오 튼튼하게 쌓았다. 그렇게 해서 테노치티틀란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되었다.

몬테수마 2세 (1466년 또는 1480년 ~ 1520년 6월 29일)[편집]

몬테수마 2세(Moteuczoma Xocoyotl)

목테수마(Moctezma, Montezuma)라고도 불리며, 1502년부터 1520년까지 아스텍을 통치한 제9대 황제이다. 그가 군림하던 시기에 에스파냐가 본격적으로 아스텍을 정복하기 시작한다.

몬테수마는 같은 이름의 몬테수마 1세의 증손자이자 6대 왕 악사카야틀(Axayacatl) 왕의 아들이자 티조악, 아우이트소틀의 조카였다. 1502년 숙부인 아우이트소틀의 뒤를 이어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당시 제국의 영토는 최대로 커져 오늘날 온두라스니카라과까지 뻗어 있었다. 그러나 종교의식에 쓰이는 제물과 조공을 종속 부족들에게 점점 더 많이 요구했기 때문에 그들의 분노를 사 제국의 세력은 약해졌다. 그는 방대한 정복 계획을 세웠지만, 신(神) 우이트실로포치틀리에 대한 신앙에 크게 영향을 받기도 했다. 이 신은 점성가를 통하여 몬테수마 황제에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일종의 숙명론을 주입했다.

아스텍인들은 언젠가는 턱수염을 가진 백인 신 케트살코아틀(깃털달린 뱀이라는 뜻)이 돌아와 제국을 통치할 것이라고 두려워하면서도 이를 기대하고 있었다. 백인 신 대신에 턱수염을 가진 백인 코르테스가 나타났다. 코르테스는 이런 두려움을 알고 있었고 멕시코 횡단 원정에 이것을 이용했다. 몬테수마는 그를 매수하려고 했으나 스페인 정복자는 아스텍의 지배를 싫어하던 종속 부족들과 동맹을 맺었다. 몬테수마는 수도 테노치티틀란으로 코르테스를 유인했으나 함정임을 눈치챈 코르테스에게 오히려 포로로 잡혔다. 그는 황제가 포로로 잡혀 있는 한 아스텍인들이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몬테수마가 스페인 정복자에게 굴복하자 백성들은 그에게 등을 돌렸다.

스페인의 기술에 따르면, 황제는 백성들에게 연설을 하려고 하다가 돌과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어 그로부터 사흘 뒤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스텍인들은 스페인인들이 그들의 황제를 죽였다고 여겨, 밤을 틈타 테노치티틀란 시를 빠져나가려던 코르테스 군대를 거의 전멸시켰다. 코르테스는 잠시 퇴각했다가 다시 돌아와 재정복, 몇 년 동안 멕시코를 지배했다.

아스텍 제국의 멸망 (1517년~1522년)[편집]

스페인 군과 아즈텍인들의 테노치티틀란 전투. 중간에 에르난 코르테스가 보인다.
몬테수마 2세의 모습.

1517년부터 1519년까지 에르난 코르테스가 오기 전, 각각이 일어나는 불길한 징조 때문에 아스텍 제국은 불안에 휩싸였다. 불길한 징조는 다음과 같다.

멸망 과정[편집]

코르테스는 유카탄 반도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탐험대장으로 내정되었다. 하지만 그의 승승장구를 두려워한 총독 벨라스케스가 이를 번복하자 1519년 병사 508명과 말 16필을 11척의 배에 나누어타고 독자적으로 유카탄 반도에 상륙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베라크루스라는 도시를 건설하였고 유카탄 반도의 마야족들과 전투를 벌이면서 부족들을 점령해나갔다. 말이나 대포에 관해서 전혀 모르는 틀락스칼라인들은 한번의 전투후 코르테스에게 항복하였다. 코르테스는 원주민을 통해 아스텍 왕국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왕국을 정복하기 위해 진군하였다.

코르테스는 아스텍 왕국에 들어갔으나 아스텍 황제 몬테수마 2세가 베라크루즈를 기습해 오히려 황제를 사로잡을 구실을 만들어주었고, 황제는 궁에갇히고 포로신세로 변하게된다. 그의 행동을 좋지않게본 쿠바 총독 벨라스케스가 판필로 나르에바스에게 900명의 에스파냐인과 500명의 흑인노예를 주어 코르테스를 토벌하라고한다. 결국 수비대장 후안 데 에스칼란데가 전사하면서 그는 이일이 보통일이아니라고 판단, 그는 그의 부관이자 친구였던 알바라도에게 100명의 군대를 남겨주고 테노치티틀란을 떠난다. 알바라도는 신중한 인물이 아닌듯했다. 그는 우이칠포로치틀리 봄축제를 즐기는 아스텍귀족들이 반란을 모의한다고 판단, 군대를 이끌고와서 귀족 1만명을 학살했다. 코르테스일행이 승리를거두고 돌아왔을때 분위기가 심상치않았다. 그래서 알바라도에게 좌초지종을 물었더니, 그가 대답을 하자 그는 사태의 심각함을 깨닫고 도시를 빠져나가려하지만 포위당한다. 그래서 황제로 하여금 설득하라고하지만, 황제는 흥분한 관중들의 돌과 화살을맞고 사망한다. 이설에는 다양한설이있다. 이게 6월 25일에 일어난 슬픔의 밤이란 사건이다.

코르테스는 일행을 데리고 6월 30일 탈출을 시도하지만, 아스텍인들의 공격으로 대부분 사망하고, 석궁과 대포, 철갑옷, 철검, 철투구, 아르퀘버스등의 무기들을 탈취당한다. 군마도 23마리만 남고 만다. 동맹국 틀락스칼라까지 150마일의 지옥의 행군을 해야했다. 그들은 7월7일 오툼바에서 테노치티틀란-텍스코코-타쿠바 아스텍 삼각동맹군 4만을 보게된다. 모든병사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상태였고, 석궁이나 아퀘버스도 없었다. 에스파냐인 400명과 1~2000명의 틀락스칼라인뿐이었다.

아스텍군은 심지어 탈취한 스페인무기 [물론, 아퀘버스나 석궁은 사용법을 모른다.]로 무장하고 있었다. 코르테스는 단단한 사각진형을짜고 에스파냐인 뒤에 틀락스칼라인들을 배치했다. 틀락스칼라인들은 크게 환영했는데, 그들은 슬픔의밤이후로 아스텍군을 크게 두려워했고, 에스파냐군과 전투를한적이 있었으므로, 그들의 무기의 강력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보병은 부관에게 맡긴뒤 자신은 23기의 대부분 부관출신으로 이루어진 기병대를 이끈다. 그는 후방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는 시우아코아틀[나우나틀어로 군사지휘관]을 눈여겨 보았다. 시우아코아틀은 코르테스에게 갈기갈기 찢겨 살해되고, 나머지 아스텍 부관들은 그의 기병대가 살해했다. 시우아코아틀이 죽은걸안 아스텍군들은 모두 달아나기 바뻤다. 코르테스는 이전투에서 2번이나 아스텍 돌팔매에 맞았으며, 슬픔의 밤때난 손가락상처가 악화되어 2개의 손가락을 쓸수없게되었다.

대부분의 사상자는 부상자들이었으며, 애초에 아스텍군은 포로를잡기위해 상대를 죽이지않아, 보통은 달려들어서 묶기바빠서 대부분 한번에 찔러죽이라는 코르테스의 말에따라 죽었다. 사상자는 정확히 언급되지 않으나, 몇천명에 이를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코르테스와 부관들이 죽인 지휘관들은 몇안되는 나머지 아스텍 귀족들이므로, 아스텍의 피해는 매우컸다. 그 이후 9월에 에스파냐의 정복자들에 의해 옮겨진 천연두가 창궐하자 아즈텍인들이 죽어나갔고 심지어 황제마져 죽고 마지막황제 쿠아우테목이 즉위한다. 그는 몬테주마의 직계도 아니었고 몬테주마의 자식들을 죽여 많은귀족들의 반감을 사게 된다.

쿠아우테목은 틀라텔롤코에서 최후의 항전의지를 보이고 모든국경수비대를 모두 불러들이고, 테노치티틀란으로 가는 길목을 모두 파괴하고 한개만남긴다. 하지만 텍스코코 호수를 관장하던 텍스코코가 코르테스에 항복하면서 호수의 소유권도 코르테스군이, 게다가 텍스코코인들도 아스텍에대한 반감때문에 코르테스에 군대를 지원하게되고, 결국 1521년 8월 13일 아스텍은 항복하고, 테노치티틀란은 점령당하게 된다.

아스텍인을 포함해 그 어떤 원주민도 스페인인들을 신으로 믿지 않았으며, 신으로믿은 부족이 있더라도 금방 깨달은게 보통이었다. 에스파냐인들이 원주민들을 쉽게 이길수있었던것은 원주민들의 총에 대한 공포심이 매우 강했으며, 말과 군견, 돼지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주민[편집]

아즈텍인들은 14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멕시코에서 높은 수준의 문화를 이루며 살던 원주민이다. 나우아틀어를 썼다. 그 외에도 틀락스포칼 인, 텍스코코 인 등의 다양한 민족이 뒤섞여 있었다. 또한 아즈텍인들은 정복한 지역들을 아스텍 제국의 주요 종족이었던 아즈텍인, 틀락스포칼 인, 텍스코코 인과의 삼각관계를 유지하면서 나라를 다스렸다. 정복한 지역에서 살던 주민들은 아스텍 제국에 공물을 바쳐야 했다.

계급[편집]

몬테수마의 궁전.

아스텍 사회는 절대적인 계급 사회였다. 맨위에 틀라토아니, 그 아래 피필틴, 그 다음에 시민 마세우알틴이 있었다. 마세우알틴은 '복종' 이란 뜻이었지만 행동은 자유로웠다. 마세우알틴 계급은 약 100여가정으로 이루어진 카풀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각 카풀리에는 시민 등록을 받고, 공동 소유의 땅을 관리하며 세금을 모으는 노인 협의회가 있었다.

왕과 귀족[편집]

아즈텍인들은 자신들이 정복한 부족들에게 공물을 바칠 것을 강요했다. 이것은 거대한 양의 값진 물건들이 테노치티틀란으로 흘러 들어왔음을 뜻하는데, 그 중에서는 담요, 군사 용품, 깃털, 구슬, 염료, , 목면, 후추 같은 향신료, 옥수수카카오 콩, 소금과 그 밖의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부는 공공 행사를 치를 때 사용했고, 일부는 귀족들에게 주었으며, 나머지는 다른 물건과 바꾸도록 지역 항인들에게 주었다.

궁전과 계급[편집]

옆 그림은 테노치티틀란에 있는 몬테수마의 궁전이다. 몬테수마는 안쪽 왕좌가 있는 방에 혼자 앉아 있고 아래에는 장군들과 참모들이 있는 만남의 방이 있다. 몬테수마의 관리인 테쿠틀리는 일을 해 주는 대신에 좋은 집과 땅을 받았으며, 많은 봉급과 세금 혜택도 받았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풍요의 여신 이름을 따라서 '뱀 여성'이라고 부른 남자였다. 그는 정부의 모든 일상 업무는 살피는 제일의 장관이었다. 아스텍 제국에서는 귀족들만이 정부의 관리가 될 수 있었다.

귀족이 되는 법[편집]

귀족의 신분은 대대로 이어졌다. 평민이 귀족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틀라토아니가 훌륭한 전사를 재규어 전사나 독수리 전사의 위치까지 승진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몬테수마 2세는 이것마저 없애 버렸다.

평민과 노예[편집]

농부의 집과 가구[편집]

아스텍 농부의 집은 다셋 채씩 단체로 지어서 가운데 둥근 정원을 두고 서로 마주보게 했다. 벽은 흙벽돌로 쌓고 용설란의 잎으로 초가지붕을 엮었다. 한 집에서 한두 가정의 5~8명이 함께 살았다. 집은 매우 작았으므로 요리, 식사, 실 잣기, 옥수수 갈기, 사람들을 만나는 것 등의 대부분의 활동은 밖에서 이루어졌다.

가난한 가정은 가구도 없이 간단한 옷이 전부였다. 그들이 소유한 몇 가지 필수품은 옥수수를 갈기 위한 숫돌, 항아리 몇 개, 잠자는 깔개 등이었다. 그러나 최근 고고학자들이 농부의 집 바깥에 있는 커다란 쓰레기 더미를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수입 도자기, 흑요석으로 만든 칼들, 심지어 청동 핀까지 있었다. 아스텍 농부는 가난했지만 일할 거리가 많았고 제국으로 들어오는 돈이 매우 많았으므로 아주 궁핍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주 가난한 가정이라도 그릇은 필요했다. 물 항아리,옥수수를 젹셔 놓는 사발, 요리용의 평평한 판, 저장 항아리, 접시, 컵 등과 적어도 매운 후추를 가는 바닥에 바둑판 무늬가 있는 세발 달린 몰카헤테 하나는 있어야 했다.

노예[편집]

사회의 맨 아래 계층에는 노예 틀라코틴이 있었다. 노예들은 정복한 도시에서 공물로 받아왔다. 때때로 술, 도박으로 망하거나, 재난을 입은 농부들이 나머지 가족을 위해 빚을 갚으려고 스스로 노예로 팔려갔다. 주인은 노예가 게으름을 필 때만 다시 팔 수 있었는데, 만약 이런 일이 세번 일어나면 신전에 희생물로 팔아 버리기도 했다.

여가 활동[편집]

희생된 사람 해골들을 모아놓은 제단.

아즈텍인들에게 종교는 생활 그 자체이자,그들 존재의 중심이었다. 심지어 잠시 일을 멈추는 것도 종교적인 이유가 있어서였다. 따라서 아스텍 사람들에게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의 단순히 즐기기 위한 여가 활동을 없었다. 아스텍의 어른들은 축제와 게임을 즐겼지만,그 목적은 단순히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여가 활동은 신의 의지에 따르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볼라도르 의식[편집]

블라도르 의식에서는 사람들이 새처럼 차려 입었는데,이것은 신이 스스로 이 모습을 택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생명의 나무를 뜻하는 기둥에 매달려 둥글게 흔들리는 사람들을 밧줄을 서서히 풀면서 땅으로 내려놓았다. 밧줄의 길이는 정확하게 52번을 돌고 땅에 닿도록 계산했다. 이 의식은 52년 만에 일어나는 아스텍의 두 달력의 일치를 나타내는 것이다. 또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틀라치틀리[편집]

틀라치틀리는 경기자가 큰 고무 공을 차기 위해 엉덩이 ,무릎, 팔굼치 등을 사용하는 놀이다. 선수가 공을 쳐서 코트 한쪽 면에 높이 건 띠를 통과시키면 바로 이기게 된다. 틀라치틀리는 인기 있는 관람 경기였는데 종교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어 때때로 진 사람은 종교 의식의 희생물이 되었다. 또 미래를 점치는 데 이용되기도 했다. 텍스코코의 지배자가 이방인이 곧 멕시코를 지배할 것이라고 예언했을 때, 몬테수마 2세는 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함께 틀라치틀리를 별였는데, 몬테수마가 3-2로 졌다. 걱정스러워 하는 그를 남겨 두고 경기는 끝났다. 그리고 2년 뒤인 1519년, 에스파냐 사람들이 아스텍에 도착했다.

파톨리[편집]

파톨리(Patolli)는 도박성이 있는 게임이었다. 경기자들은 말을 움직이기 위해 주사위를 던졌고,목표는 한 줄에서 세 곳을 얻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단순한 게임조차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하는 것이었다.

인생의 시[편집]

나우아틀은 아스텍의 언어였다. 시에 주로 나오는 나우아틀 언어는 '꽃'그리고'노래' 였다. 대부분의 아스텍 시는 생명을 주고 빼앗기도 하는 테스카틀리포가 신에게 바쳐졌는데, 많은 시에서 꽃과 노래,생명과 죽음에 대한 생각이 연결되어 있다.

너는 꽃과 노래에서 왔다. 너는 꽃을 사방으로 흩뿌리고, 그것을 짓밟는다.

시장과 교역[편집]

아즈텍인들은 시장(티안키스)에 가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매일 6만 명이 틀라텔롤코라는 곳의 큰 시장에 갔는데, 한 스페인의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시장에 가는 것과 천당에 가는 것을 선택하라고 하면, 대개의 아스텍 부인들은 천당을 택한다. 그러나 먼저 시장에 갈 수 있는지 물을 것이다

아즈텍인들은 다방면에 걸친 교역자들로, 상인들은 아스텍 사회에서 별도 신분이었고, 유럽길드처럼 그들만의 카풀리를 가지고 있었다. 또 야카테쿠틀리라는 신을 보셨는데 신의 상징은 여행자의 지팡이였다. 그러나 아스텍 상인들은 오늘날의 기업인처럼 사회적 신분이 상승될 수는 없었다. 그들도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위치를 지켜야 했다.

시장 물건[편집]

손님들은 아스텍의 시장에서 치남파스의 생산물을 사는 것은 물론, , 이구아나 계곡에서 잡은 야생 칠면조, 그리고 해안에서 가져온 , 가재 ,거북 등을 샀다. 그들은 또한 면화와 노예에서 조개황금에 이르기까지 여러 물건을 샀다. 아즈텍인들은 무게보다 수량을 중심으로 물건을 팔았다. 상인과 손님들은 보통 물건을 서로 맞바꾸었으므로 시장은 소음과 논쟁으로 매우 시끄러웠을 것이다. 정부 감독관은 물건이 제대로 진열되었는지 확인했으며, 속이는 사람에게 벌을 내렸다.

카누[편집]

일부 역사학자는 동의하지 않지만, 아즈텍인들은 바퀴가 달린 장치를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카누는 무거운 물건을 테노치티틀란으로 나르는 데 매우 중요한 것이었고, 그래서 운하는 그 도시의 중심이 되었다. 아스텍 상인들의 카누를 부수는 일은 전쟁의 선언으로 여겼다. 원정이 끝난 뒤 상인들은 에 도시로 몰래 물건들을 밀수해 들여오기도 했다. 아스텍 시민들은 그들의 부를 자랑할 수 없게 되어 있었으므로 상인들은 얼마나 평범한 옷을 입고 얼마나 벌었는지에 대해서는 비밀로 했다.

짐꾼[편집]

카카오 콩을 든 상인 인형.

다른 나라와 교역하는 것은 위험한 사업이었다. 나라에서는 상인들이 스파이만큼 쓸모가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유일하게 다른 나라로 가는 국경을 넘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 상인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고, 때때로 거래를 하러 간 상대방 사람들과 싸움을 하기도 했다. 모든 것을 운반해야 했기 때문에 아즈텍인들은 짐을 지는 배낭보다는 머리띠를 쓴 짐꾼을 고용했다. 출발하기 전에 상인들은 서로 만나서 건강과 안전을 빌면서 신에게 제물을 바치기도 했다.

카카오 콩[편집]

아즈텍인들은 비록 일부 위조꾼이 밀랍이나 가루로 가짜로 만들긴 했지만 카카오처럼 사용했으므로 부자들만이 카카오 콩으로 만든 쇼콜라틀(일명 핫초코)를 살 여유가 있었다.

예술과 건축[편집]

아스텍의 예술과 건축물은 신들의 힘과 아스텍 제국의 강함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졌다. 1500년 무렵, 아즈텍인들은 테노치티틀란홍수로 무너져 다시 지었는데 이방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도시를 세웠다. 호수를 가로지르는 두 개의 주요 도로가 중앙에서 교차하는 테노치티틀란은 정확한 바둑판 형태였으며, 해의 움직임과 일치하도록 동쪽에서 서쪽으로 달리는 주요 도로가 있었다. 아즈텍인들은 그 도시를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었고, 이 같은 성취감은 다음의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도시 자체가 자랑인 테노치티틀란. 이는 우리의 영광, 오 생명을 주신 이여. 누가 테노치티틀란을 정복할 수 있는가? 누가 세상의 근본을 흔들 수 있는가?

석공들[편집]

아스텍 채석장이들은 40이나 나가는 돌덩어리를 나무 쐐기를 이용해 조각으로 잘랐다. 그 다음 노동자들이 건설 현장까지 끌고 가면 석공들이 을 갈고 금속 을 사용하여 세부 조각을 새겼다.

건강과 의학[편집]

테노치티틀란에는 일하는 동물이 없었고, 집들도 상당한 거리를 두고 지었으므로 같은 시기 유럽의 도시들보다 깔끔한 편이었다. 또한 아즈텍인들은 개인 위생 관념이 철저하였다. 그들은 비누 나무 열매를 이용하여 자주 씻었다. 일반 가정에는 조그만 욕조가 있었지만, 몬테수마의 궁전에는 수영장이 있었다. 아즈텍인들은 소금과 가루 으로 이를 닦았는데, 그렇게 하면 충치를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또 서로 머리에 가 없는지 살폈다. 아픈 사람이 생길 때를 대비하여, 증상을 살피고 치료할 의사들을 키워냈다. 비록 아스텍의 치료법은 현대적이지 않았지만, 이들 의사의 지식과 기술은 유럽 의사들이 실패한 에스파냐 사람의 병을 일부 고치기도 했다.

약초 식물[편집]

훌륭한 아스텍 의사는 1500가지가 넘는 약초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고 있었다. 예로 들면 의 통증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로 만든 감기 시럽과 용설란 시럽을 마시게 한 후 액체 고무로 목을 문질러 주었다.

사랑과 결혼[편집]

아스텍 사회에서 결혼은 매우 중요했으며,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시민이 될 수 없었다. 남자들은 보살필 수 있는 능력만큼 부인을 얻을 수 있었다. 결혼은 부모가 정했고,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미리 미래의 짝을 정했다.나이 든 여인이 신부의 부모에게 청혼을 허락받으로 가는 중매장이가 되었다. 결혼한 뒤에는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분명하게 정해졌다. 남자는 집을 짓고 생활비를 벌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게으름 피우지 마라. 그러면 아내와 아이들을 먹여살리지 못한다.

라고 충고했다. 여자가 할 일은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는 것이었다. 아스텍 어머니들은 딸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남편에게 복종해라. 깔보거나 화내지 마라. 어기면 쇼치케이트살 여신에게 벌을 받을 것이다.

새로운 생명[편집]

아스텍 부부들에게 아이는 중요했으므로 아이가 없으면 이혼할 수 있었다. 출산 때 산파는 어머니가 아이를 낳기 위해 싸우는 것을 상징하듯 전쟁터에서처럼 고함을 쳤다. 점성술가들은 탄생일을 근거로 아이의 미래를 예언해 주었다. 만약 사내 아이면, 태양에 적의 피를 바칠 수 있는 위대한 용사가 되라고 말했다. 여자 아이에게는 집안 일을 잘 하면서 살라고 말했다.

전쟁과 무기[편집]

'재규어 전사'의 모습.
아스텍 전사가 포로를 생포하는 모습.

아즈텍인들은 다음의 아스텍 시에 드러나 있듯이 전쟁을 찬양하는 사나운 군인들이다.

전쟁에서는 죽음보다 더한 것이 없다. 그래서 생명을 주신 이는 고귀하다. 나는 내 마음이 죽음을 갈망하는 것을 본다.

아스텍 제국의 확장은 전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아스텍 역사는 전쟁의 신 위트실로포치틀리가 아스틀란을 떠나서 땅을 정복하도록 말했다고 가르치고 있다. 제국의 경제는 정복한 부족들에게 받는 공물에 의지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신들이 세계가 분열되지 않도록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피의 제물을 원한다고 믿었고 전쟁은 제물을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전쟁 옷차림[편집]

각각의 카풀리는 전투집단에서 싸울 사람들을 많이 보냈다. 따로 유니폼이 없었으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입었다. 어떤 전사는 샌들에 색깔 있는 치마를 입고, 깃털 머리 장식을 했으며 아래에는 두껍게 누빈 면직 옷을 입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싸움을 하기에는 불편한 복장이므로 아마 싸우기 전에 면직 옷과 샌들을 제외하고는 다 벗어 버렸을 것이다. 전사들은 마크아위틀이라는 양날을 가진 긴 칼을 들었는데 아주 무겁고 단번에 말의 머리를 자를 수 있었다.

방패와 무기[편집]

전사들의 방패는 나무에 가죽을 덮어 만든 것인데, 박쥐 똥 접착제로 가죽을 붙여 장식하였다. 이것은 전쟁할 때 부분적인 보호대로 쓰인 것 같다. 그리고 죽은 처녀의 손가락을 붙이기도 했는데, 이것은 처녀의 손가락이 자신을 지켜준다고 믿었기 때문인 것 같다.

아스텍 사령관들은 주로 창을 던져서 전쟁을 시작했다. 창을 던지는 기구는 이름이 아틀라틀이었는데, 전사들은 이 무기를 투석기처럼 사용했다. 창을 아틀라틀의 홈에 꽂으면 상당한 힘으로 날릴 수 있었다.

전사의 계급[편집]

아스텍 군대 계급에서 가장 높은 두 가지는 '재규어 전사(기사)'와 '독수리 전사(기사)'였다. 많은 포로를 잡은 기사만이 이 두 계급에 오를 수 있었다. 그들은 별도의 땅과 특혜를 받았으며, 포로들이 희생당할 때 행사 춤에서 특별한 역할을 맡았다. 고고학자들은 테노치티틀란에 있는 거대 피라미드의 이글 하우스(독수리집)에서 독수리 전사를 실물 크기로 만든 도자기를 발견하기도 하였다.

종교[편집]

여러 전설들[편집]

천지 창조 전설[편집]

네 개의 멸망한 세상과 중간의 지금의 세상을 보여주는 돌판.

아스텍에는 다음과 같은 천지 창조 전설이 있었다. [2]

태초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옥수수를 먹고 키가 자라 거인이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키가 커도 물이 머리 끝까지 차 오르는 대홍수에서 무사할 수는 없었다. 물이 하늘의 마저 삼켜버리면서 4008년간 지속된 세상(테스카틀리포카)은 끝이 났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은 거의 모두 죽어서 생선으로 변했다. 이 때, 네네와 타타라는 두 사람만이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살아 남을 수 있었다. 결국 이들로부터 인류가 다시 번창했고, 두 번째 세상(케이트살코아틀)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4010년 후, 이번에는 거센 바람이 사람과 태양을 모두 날려 버렸다. 바람이 너무 거세어 사람들은 손과 발로 나무를 붙잡고 매달렸다. 그 때에 꼬리가 생겨났으며, 사람들은 모두 원숭이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역시 이 때에도 두 사람이 바위에 의지하고 살아남았다. 이들로부터 인류가 다시 번성했고, 세 번째 세상(틀랄록)이 시작되었다.

4081년 후, 이번에는 거대한 불이 지구를 위협했다. 세상은 또다시 파괴되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역시 살아남아 네 번째 세상(찰치위틀리크웨이)이 시작되었고, 네 번째 세상 사람들은 또 피와 불의 비에 휩쓸렸다. 땅에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았고, 사람들은 굶어 죽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세상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토나티우)이며, 2012년 12월 22일지진으로 멸망할 것이다.[3]

다섯 번째 세상이 열린 곳이 바로 아스텍 문명에 있었던 테오티우아칸이었다. 테오티우아칸은 나우아틀어로 '신이 태어난 곳'을 말한다. 그러나 사방은 컴컴했다. 해를 다시 만드는 법은 오직 하나, 신들 중 누군가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것이다. 아무도 나서지 않자, 오만한신 테쿠시스테카틀이 스스로 가장 위대한 신이라며 태양이 되기를 자청했다. 다른 신들은 모두 그를 싫어했기 때문에 동의하진 않았지만, 신들은 커다란 화룻불을 피워 놓고 테쿠시스테카틀에게 불속으로 뛰어들라고 했다. 그는 불길을 보고 겁이 나고 말았다. 바로 그 때, 현명하고 인기가 많았던 나나우아신이 불 속으로 펄쩍 뛰어들어 태양이 되었다. 이를 본 테쿠시스테카틀도 불 속으로 뛰어들어 달이 되었다. 그러나 달과 태양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또 다른 희생이 필요했다. 그래서 신들은 차례로 뱀의 신 케찰코아틀에게 와서 자신의 심장을 꺼냈다. 그러자 달과 태양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코이올쇼키[편집]

아스텍 전설에 따르면, 코아틀리웨이위트실로포치틀리 신을 낳을 때, 큰딸인 코이올쇼키가 어머니를 죽이려고 성스러운 산으로 올라왔다. 위트실로포치틀리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뛰어나와 그의 누이를 조각내 산 아래로 던져 버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 때문에 피의 의식 후 시체신전계단에 내버려졌다고 한다.

치치메메[편집]

아스텍의 달력, 즉 52주기 끝나는 날은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신화에 따르면 그 날에는 태양 신이 활동을 시작해서 운명의 날을 생기게 한다고 믿었다. 그 때에는 지구의 서쪽에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괴물들, '치치메메'가 올라온다고 믿었다. 만약 그 날에 화로의 불이 붙으면 다행히 위기는 넘길 수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1455년엔 52주기가 끝나는 날이었는데, 다행히도 화로의 은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피의 의식[편집]

피의 의식을 치르는 모습을 그린 그림.

아스텍에서는 다른 신처럼 사람의 심장을 바쳐야 한다고 믿었으므로 심장을 꺼내는 의 의식을 하였다. 또한 그런 의식은 아스텍족이 섬기는 싸움의 신 '우이칠로포치틀리'에 대한 제사이기도 하였다.[4] 때로는 위험한 사람을 제거 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러나 족장이 피의 의식을 할 수는 없었고, 대신 족장은 피의 의식에 제물이 될 사람과 싸워서 누가 제물이 될 것인지 정하기도 했다.

  • 흑요석으로 만든 것이었다.
  • 아즈텍인은 생일이나 특별한 날 아니면 휴일인 월요일에는 의 의식을 치르지 않았다. 그 외의 날에는 무조건 심장을 꺼내야 했다.
  • 1년에 5만 명을 희생시켰다.(이것은 일주일에 천 명, 하루에 백오십 명, 한 시간에 여섯 명, 10분에 한 명을 죽인 셈이다.)
  • 테노치티틀란에 신전을 처음 지은 것을 기념하는 의식에서는 한번에 2만 명을 희생해야 했다.
  • 제물을 다뤄야 하는 사제에게는 별도의 경호 부대가 딸려 있었다. 훗날 이 사제들과 경호 부대원들은 에르난 코르테스에게 몰살당했다.
  • 아즈텍인은 정복한 부족들 사이에 싸움을 조장했다. 그래서 이를 빌미로 삼아 감옥에 가둔 다음, 의식에 필요한 산 제물로 삼았다.
  • 만약 제물이 다른 부족 또는 적이라면, 아즈텍인은 이렇게 말했다. "오, 사랑하는 내 아들이여." 그러면 적은 이렇게 대답했다. "오, 내가 존경하는 아버지시여."

아즈텍인이 제사를 치를 때에는 다섯 가지 방법이 있었다. 각각 잔혹함의 정도가 다르다.

  • 산 제물을 제단 위에 반듯하게 눕힌다. 가슴을 열고 심장을 꺼낸다. 둥근 그릇심장을 담아 에게 바친다.
  • 을 자른다. 이 방법은 주로 여자를 제물로 바칠 때 사용하는데, 희생된 여자는 나중에 부족을 지키는 이 된다고 믿었다.
  • 제물을 큰 에 묶고 방어용으로 을 준 다음, 아스텍 전사와 겨루게 한다. 이 때, 전사는 날이 달린 을 쓴다.
  • 제물을 양팔을 묶고, 온몸에 화살을 잔뜩 쏘아 죽인다. 심장 부위는 하얀 점으로 표시하는데, 처음 수십 발은 하얀 점을 피해서 쏜다. 왜냐하면 아즈텍인은 제물이 흘린 을 비옥하게 만들어 곡식을 잘 자라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 제물을 속에 던진다. 그러다가 다시 꺼낸다. 이것을 몇 번 반복해 제물이 바싹 구워지면 심장을 꺼낸다.


이러한 피의 의식들은 모두 명분상의 이유일 뿐이고 실제로 아즈텍인들은 고원지대에서 살고 있던 탓에 가축을 기르기 힘든 여건이므로 단백질 섭취를 위해 피의 의식이라는 이름으로 살인을 행하고 그 시체를 요리해서 먹었다. 주로 제물의 인육은 햇볕에 말려 먹거나 불에 구워 먹는다. 이 의식은 스페인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즈텍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에르난 코르테즈가 지배하고 나서야 에르난 코르테즈가 금지시켜서 중지했다. 대신 에르난 코르테스는 자국에서 돼지를 가져와 아스텍에 뿌렸으며 아즈텍인들로 하여금 인육 대신 돼지고기를 먹게 했다.

현실적으로 피의 의식이 아즈텍 문명을 멸망시킨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이유인 즉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즈텍에 쳐들어오자 가장 먼저 에르난 코르테스의 편에 붙은 무리들이 바로 피의 의식에서 희생제물로 확정된 이들이기 때문이였다. 그들은 죽음이 확정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에르난 코르테스에게 의존하게 되었으며 마침 에르난 코르테스가 피의 의식을 반대하는 입장이였으므로 에르난 코르테스의 편에 붙어 에르난 코르테스의 편에 도와서 자신들은 목숨을 부지하고 에르난 코르테스는 황금을 갖게 도와주자는 의도로 에르난 코르테스의 앞잡이로 붙었다. 에르난 코르테스 역시 희생제물로 확정된 자들의 이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희생제물로 확정된 자들을 보호하며 사제들과 여기에 딸린 창과 칼로 무장된 경호병들을 경호병들과는 비교도 안되는 무기인 총으로 모조리 제압했다. 코르테스는 피의 제사에 희생제물이였던 사람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어 아즈텍을 쉽게 정복하게 되었다.

종교 달력[편집]

아즈텍인들은 태양력(양력)으로 1년을 365일 6시간으로 사용했지만 종교 행사에서는 260인 종교 달력을 썼다. 52년마다 두 달력이 일치하게 되었고, 아즈텍인들은 이것이 세상이 끝날 위험을 뜻한다고 믿었다. 그 통합이 일어나기 5일 전에 모든 사람은 불을 끄고, 집을 청소하고,낡은 옷들을 버리고, 모든 항아리를 던져 버렸다. 아즈텍인들은 이 같은 행동이 세상의 파괴를 막는다고 믿었다.

다음은 종교 달력을 순서대로 나타낸 것이다.

음식[편집]

아스텍 그림 속 음식. 아주머니들이 감자 광주리를 들고 온다.

아즈텍인들은 전문적인 농부였다. 집에는 대부분 큰 정원인 칼밀이 있었는데, 틀라토아니는 정원사가 열대 꽃과 카카오 나무 등을 키우는 식물원도 갖고 있었다. 말이나 소, 바퀴 달린 장치, 쟁기 등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모든 일은 손으로 해야만 했다. 언덕에는 돌벽을 쌓아 농작물이 자랄 수 있도록 평평한 계단식 밭을 만들었다. 더운 계곡에서는 산에서 물이 흐를 수 있도록 수로를 만들었다.

아스텍 음식에는 팝콘, 초콜릿, 땅콩 등 현대적인 것도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음식이 충분하지 않아서 에스파냐 작가들은 아즈텍인들이 "세계 어느 누구보다 적게 먹는다'고 쓰고 있다. 각종 의식에서 보통 제물로 희생된 사람을 먹었으므로 역사학자들은 사람의 살이 중요한 음식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음료[편집]

늙은 여성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은 술에 취할 수 없도록 법으로 금지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결혼식 때 용설란 수액을 발효시켜 만든 알코올 음료 펄키를 마시고 즐길 수 있었다. 부자들만 카카오 열매와 꿀을 끓여 만든 음료 쇼콜라틀(chocolatl)을 살 수 있었다. 또한 일부 부자는 담배를 피웠는데, 몬테수마 왕은 코코아 한 잔과 담배 한 개로 하루 일과를 마치곤 했다. 일부 아즈텍인은 환각을 일으키는 페요틀(peyotl, 선인장 싹으로 만듦)과 테오나나카틀(teonanacatl, 쓴 맛의 검은 버섯)이라는 마약을 즐기기도 했다.

재료[편집]

아스텍에는 유럽에는 없는 많은 종류의 과일 또는 채소가 있었기 때문에 음식이 다양했다. 하지만 음식의 주요 재료는 옥수수였고, 에스파냐 사람이 유럽에서 돼지를 들여 오기까지 멕시코에는 기름진 음식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것도 먹었다.

하지만 이외에도 토르티야,부리또 같은 것도 있었다.

옷과 장신구[편집]

아즈텍인들에게 순수하고 아름답게 보이거나 최신의 것을 따르는 현대적 의미의 유행은 없었다. 고대에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의복도 개인의 부와 지위를 과시하는 수단이었다. 그래서 아즈텍인들이 입는 옷은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마세우알틴은 색깔 있는 옷이나 장식을 할 수 없었다. 옷의 길이도 법으로 정해져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법이 정한 것보다 옷을 길게 입으면 사람들은 그의 다리를 보았다. 다리에 전쟁에서 생긴 상처가 있으면 문제 삼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없다면 그는 사형에 처해졌다. 가난한 사람들은 외투를 살 여유가 없었으므로 용설란 섬유로 만든 거칠고 하얀 천으로 만든 허리에 걸치는 간단한 옷을 입었다. 틀라토아니와 귀족만이 색깔 있는 을 입고 보석 장식을 할 수 있었다.

화장[편집]

아스텍의 아버지들은 딸들에게 외모에 집착하지 말고 화장을 하지 않도록 일렀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으로 보이기 위해서 보다 극적인 효과를 얻으려고 화장을 했다. 얼굴빨강, 노랑, 파랑, 초록으로 두텁게 칠했다. 아스텍 여성에게 인기 있는 색은 노랑이었으므로 벌레를 으깨서 만든 악신이라는 연고를 얼굴에 문질렀다. 또 이빨은 밝은 빨강으로 물들였고, 에는 향긋한 기름을 발랐다.

머리 양식[편집]

아스텍의 여성은 머리를 꾸미는 것을 좋아하여 진흙으로 검게 하거나 인디고 물감의 짙은 청보라색으로 물을 들였다. 보통 머리 형태는 두 가닥으로 땋아 둥글게 머리 앞으로 돌려서 이마에서 묶었다. 머리 양식은 남성에게도 있었는데, 10세에서 15세 된 젊은이들은 머리 뒤에 돼지 꼬리 정도만 남기고 다 밀었다. 전쟁에서 포로를 잡아야만 그 돼지 꼬리를 자를 수 있었다.

장신구[편집]

아스텍의 귀족은 가능한 한 많은 장신구들을 지녔는데 과 값비싼 보석으로 만든 입술 고리, 마개, 귀고리 등이었다.

면화[편집]

면화는 테노치티틀란에서 자라지 않았으므로 중앙아메리카 저지대에서 수입해 왔다. 의복을 만드는 중요한 섬유일 뿐만 아니라 침대, 가방, 벽지, 전투복, 수의 등을 만드는 데에도 쓰였다.

주석[편집]

  1. "아스텍의 생활", 존.D.클레어, K자유학교, 2003, p. 2~3
  2. 세계사신문 편찬위원회 (1998). 《미지의 대륙을 가다 아메리카》, 세계사신문 제2권, 사계절, 87쪽 “아스텍인들은 우주가 주기적으로 순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인간이 창조된 후에 네 번의 태양(주기)가 지나갔다고 믿었다. 지금은 다선 번째 주기이며, 이 주기는 종말에 가까워지고 있다. 지금 시기를 통치하는 태양은 인간의 피와 심장을 먹고 산다. 그래서 아스텍인들은 심장을 재물로 바쳐서 태양신의 생명을 유지하여, 태양신의 죽음으로 세계의 멸망이 오는 것을 막으려 했다,”
  3. 세계사신문 편찬위원회. 《앞의 책》, 87쪽 “종말의 날짜는 오래전 멕시코에 거주했던 올멕인들이 계산해내었었다.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그들의 달력에 따르면, 이 세계는 기원전 3114년 8월 13일에 시작되었고, 이 세계의 종말은 2012년 12월 23일이다.”
  4. "멕시코의 새로운 문명국 아즈텍", 세계사신문 편찬위원회, 세계사신문2권, 사계절출판사, 1998, p.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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