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유민/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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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지금의 지역에 독일(獨逸) 또는 도이칠란트(독일어: Deutschland)라는 하나의 단일 국가가 등장한 것은 1871년 독일 제국이 지금의 독일 지역과 프로이센, 알자스, 로렌 지역을 합쳐 성립된 때이다. 이전에 지금의 독일 지역은 여러개의 영방국가로 나뉘어 있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프로이센 지역은 폴란드에, 알자스로렌프랑스에 넘어갔다.

역사가들 사이에서 독일의 역사의 시작점은 논란의 대상이다. 843년 베르됭 조약 이후 세워진 동프랑크 때로 보는 관점, 911년 콘라트 1세독일 왕국의 왕으로 뽑힌 때로 보는 관점, 936년 오토 1세가 독일의 왕으로 뽑힌 때로 보는 관점, 962년 오토 대제가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받아 신성 로마 제국이 성립한 때로[주 1] 보는 관점 등등이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1] 이뿐만 아니라 베르됭 조약 이전에 샤를마뉴 대제(카를 대제)가 즉위한 시점을 독일의 기점으로 보는 역사가들도 있다.

동프랑크 왕국 이후 "독일"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갖춘 나라가 세워진 것은 911년 동프랑크의 네 게르만 부족 국가인 프랑크, 슈바벤, 바바리, 작센이 모여 독일 왕국을 세웠을 때이다. 925년에는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쓰던 로타링기아 지역이[주 2] 독일 왕국으로 편입된다.[1] 독일 왕국에 편입되었다. 하인리히 1세오토 왕조를 창건한 뒤, 그 아들 오토 1세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어 독일 왕국 뿐만 아니라 지금의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북부 지방까지를 통치했다.[1] 오토 왕조에 이어 잘리어 왕조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통치 아래서 크리스트교(로마 가톨릭 교회)는 엘베 강 너머로 전파되었으며, 엘베 강 동쪽 지역도 개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곧 벨프 가문과의 대립으로 권력을 상실하고, 프랑스오스트리아의 성장, 종교 개혁30년 전쟁 등을 계기로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바이에른 등을 비롯한 2000개에 가까운 영방국가로 쪼개졌다. 남부의 오스트리아는 명목 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국을 겸하면서 북동부에서 성장하던 프로이센과 대립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은 1806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의 정책으로 해체되고, 독일 서부 지역에서는 나폴레옹 법전을 받아들인 라인 연방이 세워져 프랑스의 간섭을 받았다.[1]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영국러시아의 주도로 독일 지역에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39개의 국가들이 모인 "독일 연방"이 세워졌다가, 1871년 빌헬름 1세와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통일된 "독일 제국"이 세워졌다.[2]

독일 제국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기존의 열강들과 대립하다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으나 결국 패배하고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한 조항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호엔촐레른 왕가가 추방당한 뒤 세워진 바이마르 공화국국제 연맹에 가입하고 경제 회복을 위해 노력했으나, 세계 대공황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경제난의 책임을 유대인집시에게 전가한 아돌프 히틀러나치1933년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으며 집권했으며, 제3제국, 즉 나치 독일을 선포했다.[2] 나치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을 폐기하고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을 무단으로 점령했으며, 1939년 동유럽을 지배하기 위해 일본, 이탈리아 등과 손을 잡고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으며, 수백만명에 이르는 유대인을 학살했다. 1945년 나치 독일은 멸망했으며, 독일 지역은 영국, 프랑스, 미국, 소비에트 연방이 분할하여 영국·프랑스·미국령은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 소비에트 연방령은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으로 분단되었다.[2] 분단된 독일의 두 나라는 나치 독일의 잔재를 청산하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경제를 발전시켜나갔으나, 동독은 재정 관리에 실패하여 곧 경제가 악화되었다. 결국 동독은 합의를 통해 1990년 10월 3일 독일 연방 공화국의 주로 가입하는 형식으로 흡수되었고, 독일은 재통일되었다.

현재 독일은 국제 연합의 회원국이자 G20의 일원이며, 서독 시대의 체제를 계승하여 유럽 연합북대서양 조약 기구의 회원국 지위를 가지고 있다. 또 1936년1972년(서독)에 하계 올림픽을 개최했으며, 2006년FIFA 월드컵을 개최하여 국제적인 위상을 높여가고 있다. 그러나 낙후된 구 동독 지역의 개발, 서독 지역과 동독 지역 간의 지역 감정 해결, 외국인 노동자 이주 문제가 당면 과제로 남아 있다.[2]

선사 시대[편집]

1907년 호모 헤이델베르겐시스가 발견되었는데, 이로써 독일 지역에 구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존재했었다는 설이 입증되었다. 중석기 시대에 그들은 사냥을 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은 조개를 채집하기도 했으며, 씨족집단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신석기 혁명의 여파는 독일 지역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으며, 동부의 라이프치히에서 신석기유물이 발견됨으로써 입증되었다. 이때부터 씨족 중심의 원시 사회는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했고, 귀족 집단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기원전 700년경 소아시아로부터 이 들어왔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계급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농업과 목축업이 분업되었다. 소아시아로부터 들어온 철기문명은 우선 무기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켰고, 농업생산력을 발전시켰는데, 이때부터 전쟁으로 생긴 노예가 그 노동을 담당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 노예가 로마 제국처럼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고대 게르만 사회[편집]

로마와의 대립[편집]

1884년, 독일의 한 화가가 그린 아르미니우스의 초상화.

로마 공화정 말기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갈리아 지방을 정복하면서 지금의 독일 지역에 살던 부족들과 자주 충돌했다. 카이사르는 지금의 독일 지역에 대해 "울창한 숲으로 덮여있으며, 야만인들과 기괴한 동물이 산다. 절대 식민지로 만들 수 없으니 그냥 두는게 좋다"고 말하며 게르마니아 리베라 (Germania libera, 자유로운 게르마니아 땅)라는 이름을 붙였다.[3] 카이사르의 뒤를 이은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아를 공격하려다 아르미니우스 등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쳤다. 아르미니우스는 토이토부르크 숲(토이토부르거발트)에서 로마의 대부대를 격퇴했지만, 곧 부족간의 내전에 휘말린 끝에 죽었다. 로마는 라인 강에서 다뉴브 강을 잇는 경계선을 짓기 시작했으며, 도미티아누스 황제대에는 코블렌츠에서 레겐스부르크에 이르는 로마와 게르마니아 사이의 국경선이 갖춰졌다.[3] 하지만 고트족프랑크족, 알레마니족을 비롯한 부족들은 로마의 정세가 혼란스러웠던 3세기~4세기부터 자주 로마 지역을 공격했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를 비롯한 로마의 황제들은 몇몇 부족과 동맹 관계를 맺어 이들에 저항했으며, 나중에는 유화책으로 게르만 부족을 용병으로 고용하고, 그 추장들을 로마군의 고위 장성으로 임명했다.[3]

이 과정에서 로마와 가까운 라인 강, 다뉴브 강 유역에 거주하던 게르만인들은 로마 문화에 동화되었으며, 발칸 반도 지역을 자주 공격하던 고트족은 발칸 반도 출신 포로들로부터 크리스트교를 소개받고 개종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고트족의 추장 울필라스아리우스주의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여 사제 서품을 받고 성경고트어로 번역했다.[3] 콘스탄티누스 2세는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인 울필라스와 고트족이 다른 고트족의 박해를 피해 동로마로 넘어오자 지금의 불가리아 지역을 하사했다. 고트족 안에서는 크리스트교를 믿는 이들을 "로마 제국의 앞잡이"라 비난하며 박해했으나 크리스트교 신도수는 계속 증가했으며, 일부 부족장이 울필라스를 따라 개종을 하기도 했다.[3]

그 사이 서쪽 지역에서는 알레마니족과 프랑크족이 로마 제국 영토로 이주했고, 고트족들도 훈족의 침략을 피해 로마 제국 영토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로마 제국 관리들은 새로 들어온 게르만 부족들을 통제하지 못했고, 갑작스러운 인구 증가로 식량난이 발생했다.[3] 또한 로마와 크리스트교에 아직 적대적이었던 일부 고트 부족들은 군대가 비워둔 지역을 습격해 약탈을 계속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결국 크리스트교도들을 보호하기 위해 고트 부족들에게 자치를 허용하였다.[3]

375년, 아틸라를 우두머리로 하는 훈족 군대가 남부 러시아에 살던 고트족을 시작으로 여러 게르만 부족들을 장악해갔다.[4] 크림 반도와 지금의 우크라이나 일대에 살던 동고트족이 다뉴브 강 유역으로 들어왔고, 원래 다뉴브 강 유역에 살던 서고트족아드리아노플에서 로마 제국군을 격퇴한 후 그리스 식민지를 거쳐 이탈리아 반도에 도착했다.[4] 서고트족은 알라리크 1세 시대에 로마를 약탈한 뒤 아키텐을 거쳐 이베리아 반도로 옮겨갔다. 지금의 슐레지엔 땅과 테이시스 계곡 등에 살던 반달족, 수에비족, 알란족406년 마인츠에서 라인 강을 건넌 뒤 갈리아 지역을 약탈했다. 이들도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로 옮겨갔다.[4] 447년 아틸라는 흑해지중해 근역을 정복한 뒤 지금의 베오그라드와 크리스토발 근교를 수도로 삼았다. 그 후 아틸라는 서쪽의 게르만 부족들과 동맹을 맺어 로마를 압박했다.[4] 하지만 아틸라는 로마 공격에 실패한 뒤 453년 사망했고, 지도자를 상실한 훈족은 알다리히와 게피다이가 이끄는 게르만 부족 연합군에게 무력화당하여 흩어져 여러 부족 속에 동화되었다.[4] 한편 각지에 정착한 게르만 부족들은 그 곳에 저마다의 나라를 건국하기 시작했다. 476년에는 서로마 제국의 용병대장으로 있던 게르만족인 오도아케르가 서로마 제국의 황제를 쫓아내 멸망시킨 뒤 480년부터 동로마 제국이 보낸 섭정을 자처하며 이탈리아 반도를 지배했다. 그 외에도 서고트 왕국, 동고트 왕국, 부르군트 왕국 등이 난립했다.[4]

프랑크 왕국[편집]

카롤루스 대제의 초상화.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림.)

다른 게르만족과는 달리 원래 살고 있던 라인 강 지역에 그대로 머무르고 있었던 프랑크족프랑크 왕국을 건국했다. 프랑크 왕국의 왕 클로비스는 서고트 왕조의 알라리크 2세를 전투에서 죽이고 보르도툴루즈를 손에 넣었다.[5] 클로비스는 왕비인 성 클로틸다의 영향으로 크리스트교로 개종했는데, 다른 게르만 부족 왕들이 아리우스주의를 받아들인 것과 달리 클로비스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정통 교리로 인정된 삼위일체론을 받아들였다.[5] 클로비스는 486년 갈리아의 로마 잔당을, 496년 알레마니족을, 507년 서고트족을 복속시켰으며, 정적들을 모두 몰아내고 메로빙거 왕조를 확립했다.[5] 클로비스는 511년 동고트 왕국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뒤 죽었지만 클로비스의 정복 활동을 통해 프랑크 왕국은 갈리아 지방의 대부분을 복속했다. 그러나 클로비스의 왕 자리를 잇는 것을 두고 아들들간에 권력 다툼이 벌어져 프랑크 왕국은 정치적 혼란기를 맞았다.[5] 8세기 초반 메로빙거 왕조의 실권을 장악한 재상 피핀의 아들 카를 마르텔은 알레마니족과 바바리족을 정복했으며,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옴미아드 왕조의 북진을 막았다. 735년에는 부르고뉴와 랑크 도크 지역에서 옴미아드군을 몰아내 명성을 얻었다.[6] 카를 마르텔의 차남 피핀 3세교황 자카리아의 승인을 얻어 킬데리크 3세를 몰아내고 프랑크 왕이 되었다.

피핀 3세의 뒤를 이은 카롤루스는 50차례가 넘게 정복 전쟁을 일으켰다. 동생 카를로만이 죽어 3년 간의 공동 통치 기간이 끝난지 1년이 지난 772년, 스카롤루스는 색슨족이 살던 작센을 복속시켜 777년에 프랑크 왕국의 일부임을 선언했다.[6] 비록 색슨족은 이후에도 반란을 일으키며 저항했지만 804년에 이르러서 모든 반란 세력들이 진압당했고, 생존자들은 강제적으로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이게 되면서 차차 동화되었다. 프랑크 왕국의 영토는 엘베 강 유역까지 넓어졌다. 작센 공격에 이어 카롤루스는 교황 하드리아노 1세의 부타그로 롬바르드족이 머무르던 롬바르디아 지방을 정복했다. 하드리아누스 1세는 카롤루스에게 "로마의 보호자"라는 칭호를 하사했다.[6] 788년 카롤루스는 바이에른 지방의 공작 타실로 3세를 몰아내고 바이에른 지역을 정복했으며, 791년에는 바바리족과 동맹 사이였던 아바르족을 복속시켰다. 이어 에브로 강 유역에서 무어인들을 몰아냈다. 800년 카롤루스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추대되었는데, 처음에 비잔틴 제국 황제는 이를 인정하지 않다 812년에서야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다.[6]

프랑크 왕국은 메로빙거 시대부터 종교적으로 크리스트교만을 믿는 단일한 국가 정체성을 확립했다. 하지만 그 신앙의 수준은 기적을 믿는다는데서 그쳤다는 한계가 있었다.[5] 프랑크 귀족들은 일정한 수입을 확보하기 위해 수도원과 교회를 자신의 영지로 끌어들였지만 강압적으로 통제했다. 귀족들은 사제를 마음대로 임명하거나 해임해 성직자들로부터 빈축을 샀다. 메로빙거 왕조 아래서 교회의 조직과 선교 활동은 약화되어갔으나, 카롤링거 왕조 하에서 다시 부흥하기 시작했다.[5] 카롤루스는 프랑크 교회 내 문화 활동을 부흥시키기 위해 유럽 각지에서 부족과 상관없이 학자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했으며[6], 786년 지금의 독일어의 원형이 되는 고대 독일어 문법을 정리했다. 794년 카롤루스는 이 고대 독일어가 히브리어, 라틴어, 그리스어와 동등한 위상에 있음을 선포했으며, 라틴어 문학 작품들을 독일어로 옮기는 일을 장려했다.[6] 사후 시성보니파시오는 카롤링거 시대에 헤센, 튀링겐, 바이에른, 베스트팔렌, 뷔르템베르크 등 지금의 독일 지방 각지를 돌면서 수도원을 세우며 교세를 확장했다.[5] 이 수도원들은 글을 통해 기록을 보존하는 일 등을 맡았으며 카롤링거 시대에는 수도사들이 행정과 사법 분야에서 활동했다.[6]

또, 프랑크 왕국은 갈리아 지방을 정복한 뒤 갈리아 문화와 로마 문화가 융합된 "갈로 로만 문화"를 받아들였다. 프랑크 사회는 농경 사회로 변해갔으며, 프랑크족은 빵을 굽는 방법, 포도주를 만드는 방법, 과일과 야채를 기르는 방법, 벽돌을 만들고 쌓는 법, 유리를 만드는 법, 철로 농기구를 만드는 법 등을 받아들였다.[5] 또한 프랑크 관리들은 수도사들의 영향을 받아 행정과 경제, 사법 분야의 업무를 수행하는 방식을 습득해나갔다.[5]

중세[편집]

독일 왕국 시대[편집]

오토 1세.

샤를마뉴 대제는 만년에 세 아들에게 왕국을 물려주었다가, 장남과 막내아들이 차례로 죽자 둘째 아들 루이 1세를 공동 황제로 임명했다. 루이 1세는 장남 로타르와 공동 황제가 되었고, 나머지 두 아들들을 왕으로 임명했다.[7] 그러나 여기에 루이 1세의 서자인 샤를 1세가 개입해 왕국끼리의 분쟁이 발생하자, 귀족들의 압력으로 아들들은 843년 베르됭 조약을 맺게 되었다. 장남 로타르는 지금의 서부 독일에서 이탈리아 북부에 이르는 지역(중프랑크)을, 샤를 1세는 지금의 프랑스 지역의 대부분(서프랑크)을, 루트비히에게는 지금의 중부 독일에 해당하는 게르마니아, 바이에른, 알프스 지역(동프랑크)을 차지하게 되었다.[7] 중프랑크는 로타르가 사망한 뒤에는 아들들인 루이 2세가 이탈리아 북부 지역을, 로타르 2세가 원래 프랑크 왕국의 수도였던 아헨을 비롯한 서부 독일 지역을 물려받으면서 분단되었다. 루트비히의 막내 아들인 카를 3세는 서프랑크 왕실에서 적합한 왕위 계승자가 없어지자[주 3] 서프랑크를 병합하여 881년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카를 3세가 887년 다시 물러나자, 옛 프랑크 왕국 지역은 5개로 분단되었다.[7] 이 중 네 곳은 프랑크 왕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왕위를 차지했으며, 독일 지역에 해당하는 동프랑코니아만을 카를 3세의 조카인 아르눌프가 다스렸다. 그러나 아르눌프가 899년 사망한 이후 동프랑크 왕실은 실권을 잃었으며, 908년에는 유아왕 루트비히 4세가 죽으면서 대마저 끊겼다.[7]

노르만족마자르족의 침략, 계속되는 귀족들의 왕위 계승 분쟁으로 혼란스러운 가운데 동프랑크 지역의 왕들은 귀족들의 선거를 통해 뽑히게 되었다.[7] 콘라트 1세에 이어 왕으로 뽑힌 하인리히 1세는 마자르족을 격퇴하고, 926년 아들 오토를 유일한 왕으로 지명한 뒤 분할 상속을 금해 왕권을 확립했다.[8] 936년 하인리히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오토 1세는 이복형제들과 공작 세력들을 굴복시키고, 공작들이 가지고 있던 영지들을 가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955년 마자르족을 레히필트 전투에서 격파해 저항 세력을 정리한 오토 1세는 동방 정책을 표방하며 보헤미아(지금의 체코 지역)를 정복하고, 슬라브족을 크리스트교로 개종시켰다.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지역은 독일 문화권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덴마크인들도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였다. 오토 1세는 이어 롬바르디아의 베렌가르를 몰아내고 롬바르디아를 평정했으며, 962년 교황 요한 12세로부터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추대되었다.[8] 오토 1세 이후로 독일 왕들은 로마 제국의 황제, 이탈리아의 왕을 겸하게 되었으며, 1032년부터는 부르고뉴(부르군트)의 왕을 겸하게 되었다.[8]

그러나 오토 1세가 죽은 뒤 독일 왕국은 다시 분열되었다. 오토 1세의 뒤를 이은 오토 2세는 주변국들의 반란에 휘말렸으며, 오토 3세하인리히 2세는 교회와 주변국에 대한 강압적인 통치로 반란을 수습하고 영토를 다시 회복하려 했지만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 오토 왕조의 대는 끊겼다.[8][9] 이어 콘라트 2세가 새로운 왕으로 선출되어 잘리어 왕조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귀족들은 독일의 왕으로 프랑스 아키텐의 공작 기욤의 아들을 추대하려 했기 때문에 콘라트 2세의 선출에 대해 반발했다. 콘라트는 귀족들과 생각을 달리하는 이탈리아 교회 성직자들과 손잡고 1026년 이탈리아 왕국 전역을 진압했으며, 1027년 황제로 즉위했다. 하이탈리아의 귀족들은 샹파뉴 공 오도 1세 등을 앞세워 콘라트 2세에 계속 저항했지만 오도 1세는 르 뒤크 전투에서 전사했고, 콘라트 2세는 이탈리아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했다.[9] 콘라트 2세의 뒤를 이은 하인리히 3세는 폴란드를 침공한 보헤미아 공작 브레티슬라프와 맞서 승리했으며, 헝가리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해 브레티슬라프와 헝가리 왕 페테르 오르세올로, 카지미에시를 각각 보헤미아, 헝가리, 폴란드의 봉신으로 임명해 동유럽으로 영향력을 확대했다.[9]

하인리히 4세는 교황과 성직자 서임권을 두고 대립했다.

하인리히 3세는 성직 매매를 비난하며 교황 자리를 사고 판 베네딕토 9세그레고리오 6세를 비판했으며, 동시에 경쟁자 실베스테르까지 몰아내고 봉신이었던 밤베르크 주교를 클레멘스 2세로 옹립했다.[9] 이후의 교황들인 교황 레오 9세, 교황 빅토르 2세는 독일 황실의 지원을 받았지만 레오 9세는 무리한 정벌 활동 끝에 죽었으며, 빅토리우스 2세는 레오 9세의 정복 계획을 포기해야만 했다. 하인리히 3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하인리히 4세는 헝가리의 제국 탈퇴, 프랑스와의 관계 악화 등 대외적인 문제에 부딪쳤고, 성직자 서임권을 두고 교황청과도 자주 충돌했다. 안으로는 귀족들과 주교들이 서로 권력 암투를 벌였다.[9] 교황과 황제가 서로 우위를 점하기 위해 투쟁을 벌이고, 하인리히 4세가 독일의 주교들을 시켜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파문했다. 남부 독일 지역의 귀족들은 그레고리오 7세를 지지하며 하인리히 4세에게 반기를 들었다.[9]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이 있는 카노사로 내려가 사흘 동안 기다린 끝에 교황을 만나 파문을 철회받았고, 독일 귀족들이 선출한 왕인 라인펠덴의 루돌프와 싸우려 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의 지지 요구를 거부하고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려 했으나, 정치적인 이유였기 때문에 지지를 얻지 못했다. 이어 하인리히 4세가 옹립한 클레멘스 3세의 등장으로 교회는 분열되었다.[9] 그레고리오 7세는 노르만족과 손잡고 하인리히 4세에 저항했지만 결국 로마는 1084년 하인리히 4세에게 점령당하고 하인리히 4세는 클레멘스 3세로부터 황제의 관을 쓰게 되었다.

정식으로 황제가 된 뒤에도 하인리히 4세는 남부 독일의 반대파와 계속 대립했다. 하인리히 4세는 유대인 학살에 책임이 있는 자들을 처벌해 유대인들로부터 지지를 얻고, 강제로 세례를 당한 사람들의 재개종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 때문에 하인리히 4세는 귀족들과 새 교황 우르바노 2세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차남 하인리히 5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만 했다.[9] 하인리히 5세는 서임권을 포기하는 대신 거부권과 함께 교황이 서임한 주교들이 황제에 충성을 하도록 할 것을 교황에게 요구했다. 교황은 이를 받아들였으나, 고위 성직자들은 이에 반발해 하인리히 5세를 파문했다. 귀족들도 성직자들의 파문에 가세하여 하인리히 5세에 저항했다. 계속되는 투쟁 끝에 1122년 교황 갈리스토 2세의 주도로 보름스에서 하인리히 5세와 교회가 타협을 갖게 되었는데, 여기서 결정된 《보름스 협약》에 따라 황제와 교황은 화해했다.[9] 교황과 타협한 하인리히 5세는 영국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공격하려 했으나, 귀족들의 반대와 프랑스의 저항에 부딪쳐 실패했다. 1125년 황제는 후사없이 사망했고, 잘리어 왕조는 대가 끊겼다.[9]

신성 로마 제국 시대[편집]

하인리히 5세의 죽음으로 잘리어 왕조의 대가 끊기자, 독일 왕좌를 두고 슈바벤의 프리드리히, 작센의 로타르, 오스트리아 변경백 레오폴트가 대립했다.[10] 세 제후의 갈등 끝에 작센의 로타르가 왕으로 추대되었고, 새로이 즉위한 로타르 3세는 바이에른의 공작이었던 벨프 가문의 하인리히와 사돈 관계를 맺어 바이에른 지방의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호엔슈타우펜 가문 출신인 작센의 프리드리히는 하인리히 5세로부터 물려받은 토지를 로타르 3세에게 돌려주려 하지 않았고, 슈바벤인들은 프리드리히의 동생 콘라트를 대립왕으로 추대하여 벨프 가문에 반기를 들었다.[10] 두 가문 사이의 분쟁은 1135년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콘라트가 왕위를 포기하는 대신 토지를 계속 소유할 수 있게 하는 협상을 통해 일단락되었다. 2년 뒤 로타르 3세가 죽자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콘라트가 왕으로 뽑히게 되었다.[10] 새 왕 콘라트 3세는 아헨에서 교황이 보낸 사절을 통해 왕관을 받았지만, 벨프 가문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왕의 상징을 넘겨주는 것을 거부했다.[10] 콘라트 3세는 경쟁자인 벨프 가문의 하인리히 오만공을 체포하고 왕의 상징을 몰수하여 이 문제를 일단락지었다.[10] 1144년, 장기 왕조이마드 앗딘 장기가 이끄는 이슬람군이 에데사 백국을 공격했다. 콘라트 3세는 프랑스의 왕 루이 7세와 손잡고 십자군을 결성하여 장기의 군대에 맞서기로 했다.[10] 또한 작센 사람들로 하여금 포메라니아, 브란덴부르크, 메클렌부르크 일대에 살고 있던 비기독교 신자들을 공격하게 했다.[10] 그러나, 독일과 프랑스가 주도해 장기 왕조를 공격하면서 시작된 제2차 십자군 전쟁은 십자군이 아나톨리아 지방에서 연달아 패배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십자군 전쟁의 패배 이후 독일에 돌아온 콘라트는 시칠리아루지에로 2세,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동맹을 맺은 벨프 가문의 하인리히 사자공의 반란에 직면했다.[10] 콘라트는 벨프 가문의 반란을 막아냈지만 황제 대관식을 치르지는 못하고 병으로 1152년 2월에 죽었다. 962년 이래 즉위한 독일왕으로서는 처음으로 황제의 관을 쓰지 못한 왕이었다.[10]

콘라트가 죽자, 어린 그의 아들을 대신해 콘라트의 조카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3세가 독일왕으로 즉위했다. 새 독일왕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주 4] 어머니가 벨프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에 벨프 가문에서도 지지했고, 벨프 가문의 하인리히 사자공은 바이에른 공국 지역을 하사받아 프리드리히 1세에게 협력했다.[10] 프리드리히 1세는 1153년 교황 에우제니오 3세콘스탄츠 협약을 맺어, 남부 이탈리아에 살고 있던 노르만인들을 몰아내 비잔티움 제국 황제의 지지 기반을 무너뜨리겠다고 약속했다.[10] 그 해에 에우제니오 3세의 뒤를 이은 교황 하드리아노 4세는 프리드리히 1세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주고 황제로서의 권위를 공인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1세는 로마의 반란을 진압하지도 못했고, 노르만인들을 정벌하지도 않아 콘스탄츠 협약을 어겼다. 이에 하드리아노 4세는 노르만인들과 직접 평화 협상을 맺게 되었다.[10] 콘스탄츠 협약의 파기로 인해 어색해진 교황과 황제의 관계는 1157년 10월 하드리아노 4세가 프리드리히 1세에게 보낸 서한에서 프리드리히 1세를 "교황의 봉신"으로 표현한 게 빌미가 되어 더욱 나빠졌다.[10]

또, 점차 유럽에 중세 국민국가가 형성되어가면서 독일왕의 로마 제국 황위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영국의 성직자인 솔즈베리의 존은 "어떠한 근거로 저속하고 미개한 독일인들이 다른 국가들 위에 군림하려 드는가"라며 독일을 비판했으며, 영국 왕 헨리 2세는 외왕내제를 칭하며 자신만이 영국 안에서 교황의 사절이자 황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10] 이처럼 황제로서의 권위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프리드리히 1세는 밀라노와 로마 교황령을 침공해 이탈리아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려 했으나, 말라리아의 창궐과 도시 국가들의 저항으로 실패로 끝났다. 결국 프리드리히 1세는 대립교황 갈릭스토 3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로마와 투스카니에 대한 지배권도 포기해야 했으며,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 및 노르만인들과 평화 조약을 체결해야만 했다.[10] 국외에 대한 간섭을 포기한 프리드리히 1세는 내부의 안정을 추구하여, 독일 귀족들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제국 법정에 출두하기를 거부해 온 하인리히 사자공의 토지들을 몰수하여 베스트팔렌 지방은 쾰른 대주교에게, 작센 남부 지역은 안할트의 베르나르트에게, 바이에른은 비텔스바흐 가문의 오토에게 나누어주었다. 비텔스바흐 가문은 바이에른 왕국이 해체된 1918년까지 계속 바이에른을 통치했으며, 하노버 왕국과 브룬스위크 공령, 그리고 오늘날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작센안할트 주 사이의 경계도 이 때 정해진 것이다.[10] 1180년 겔른하우젠 회의를 통해 정해진 이 처분으로 벨프 가문은 힘을 상실했으며, 하인리히 사자공은 영국으로 망명했다. 처분 이후에도 벨프 가문이 가지고 있던 브룬스위크, 뤼네부르크도 공작령이 되거나 1866년 프로이센에 합병되어 사라졌다.[10]

주해[편집]

  1.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명칭 자체는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시조인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때 만들어진 것이다.
  2. 서독의 대부분이다.
  3. 당시 서프랑크의 샤를 1세의 손자는 아직 나이가 어렸다. (키친, 34쪽.)
  4. 별명 "바르바로사" (Barbarosa)는 이탈리아어로 "붉은 수염"이라는 뜻이다.

주석[편집]

  1. 키친, 9쪽 ~ 11쪽에서.
  2. 키친, 12쪽 ~ 17쪽에서.
  3. 키친, 18쪽 ~ 21쪽.
  4. 키친, 21쪽 ~ 23쪽.
  5. 키친, 23쪽 ~ 28쪽.
  6. 키친, 28쪽 ~ 32쪽.
  7. 키친, 32쪽 ~ 37쪽.
  8. 키친, 37쪽 ~ 45쪽.
  9. 키친, 45쪽 ~ 65쪽.
  10. 키친, 66쪽 ~ 73쪽.

참고 문헌[편집]

  •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독일사》 (Cambridge Illustrated History: Germany), 마틴 키친 지음(1994), 유정희 옮김(2001), 시공사, ISBN 89-527-164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