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마르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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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마르텔
680년 8월 23일 - 741년 10월 22일
Charles Martell 1.jpg
카를 마르텔
태어난 곳 프랑크 왕국 아우스트라시아
죽은 곳 프랑크 왕국 아우스트라시아
별명 마르텔, 마르텔은 망치라는 뜻
복무 프랑크 왕국 육군
복무 기간 719년 ~ 741년
최종 계급 프랑크 왕국 육군 총사령관
주요 참전 투르-푸아티에 전투
기타 이력 프랑크 왕국 궁재 겸 섭정, 국왕 직무대리(737-741)
카롤링거 왕조
피핀 가문
카롤링거 가문
베르됭 조약(843) 이후
v  d  e  h

카를 마르텔 (독일어: Karl Martell, 프랑스어: Charles Martel 샤를 마르텔, 영어: Charles Martel 찰스 마텔, 라틴어: Carolus Martellus 카롤루스 마텔루스) (680년[1] 8월 23일741년 10월 22일)은 프랑크 왕국의 동쪽 지방인 아우스트라시아궁재로 사실상 아우스트라시아, 네우스트리아, 부르군트 3개로 나뉜 프랑크 왕국 전체를 지배했다. 마르텔은 "망치"라는 뜻이다. 사라센의 침략을 격퇴하여 신망을 얻었으며, 로마 교회는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는 데 공이 컸던 카를루스 마르텔의 아들인 피핀의 왕위를 승인하게 된다.

프랑크 왕국의 궁재직을 석권한 뒤, 737년부터는 공석이던 프랑크 왕국의 국왕을 대신하여 왕국을 통치하기도 했다. 그의 사후 프랑크 왕국의 궁재직은 카를로만 1세피핀 3세가 나누어 차지하였다.

생애[편집]

출생과 초기 삶[편집]

Charles Martel looks after punishment and banishment of two men.jpg

카를 마르텔은 680년 8월 23일 프랑크 왕국 아우스트라시아헤르스탈에서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의 궁재 피핀 2세의 서자로 태어났다.

그는 피핀 2세의 서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노예 출신 여성이었다는 것이 알려졌을 뿐 모계에 대한 것은 알려진 바가 없다. 그와 함께 피핀 2세의 서자로는 힐데브란트 등이 있었다. 카를은 바이에른 출신 로트루드와 결혼하여 카를로만, 피핀 3세, 알다 등의 자녀들과 첩에게서 베른하르트, 그리포 등의 서자들을 두었다.

정변 기도[편집]

714년 아버지 피핀이 사망하기 이전에 피핀의 적자들은 사망했고, 마지막 남은 적자 그리모알트 2세는 피핀의 지위를 승계하러 오던 중 알프스 산맥 근처에서 살해됐다. 결국 피핀은 죽으면서 본처인 플렉트루디스에게 어린 손자들의 후견인을 맡을 것을 유언하고 사망했다. 그의 계승자가 된 사람들은 그의 세 손자들이었고 그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는 피핀의 아내 플렉트루데가 후견인으로서 손자들을 후견하게 되었다. 카를은 아버지 피핀의 유언에 반발했고, 적모 플렉트루데는 그를 투옥시켰다.

동시에 피핀 2세의 죽음으로 카롤링거 가의 성년 후계자가 없음을 절호의 기회로 여긴 근왕파들은 이때를 틈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려 시도하였다.

집권 과정[편집]

카를 마르텔

카를 마르텔은 아버지의 유언을 전적으로 무시했으며, 자신 역시 피핀의 아들임을 들어 플렉트루데와 권력 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피핀의 유언이 프랑크 왕국 전역에 알려지자 왕국 곳곳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카를은 근왕파는 물론이고 피핀의 측근자들과도 상대하게 되었다. 네우스트리아의 궁재 라감프리트와 왕 힐페리히 2세는 홀란드에 있는 프리지아인의 왕이자 프랑크의 적인 라트보트와 연합해 카를을 제거하려 했다. 피핀에게 복속되어 피핀의 적자 드로고에게 딸을 시집보냈지만 프리기아의 라트보트는 내심 반감을 품고 있었었다.

플렉트루데는 카를 마르텔을 투옥시켰으나 714년 궁궐을 탈출, 도망쳐나와 군사를 모아서 비밀리에 네우스트리아에 잠입, 힐페리히 2세라감프리드를 패배시키고 적대적이던 네우스트리아를 정복했다. 피핀의 죽음을 기점으로 분리 독립을 선언한 작센 · 알라만 · 프리기아 등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고 아키텐 공작 에우도를 격퇴하였였다. 717년에는 아우스트라시아로 진격하여 적모 플렉투르데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그의 성공으로 플레크트루데와 일부 아우스트라시아인들의 저항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으며 젊은 카를의 세력과 정신력에 두려움을 느낀 그들은 카를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국내적으로는 국왕 힐페리히 2세를 받들고 카롤링거 가로부터 왕권을 확립하려던 네우스트리아긔 귀족들과 싸웠으며, 719년 이들을 모두 격파하였다. 718년에는 스스로 프랑크 공작이라 칭하였고, 719년 이후 프랑크 왕국 3개 분국의 궁재을 모두 차지하여 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변방의 다른 게르만 부족들은 혼란을 틈타 독립을 시도했고, 그는 라인 강도나우 강 지역과 작센, 알레만니아, 바이에른 등에 대한 정벌을 계속하였다.

이슬람과의 전쟁[편집]

파리 시내에 진입한 이슬람 군대

719년에 에우도는 네우스트리아의 힐페리히 2세에게도 아키텐의 분리독립을 지지한다는 조건으로 제휴, 카를 마르텔에 대항하는 레인프로이(Rainfroy)를 지원했지만 719년 10월 14일 네리(Néry)의 생 리스와 수아송에서 카를 마르텔군에게 크게 패하였다. 에우도는 살아남은 아키텐 군사 일부를 데리고 루아르 강을 넘어 패주하였다.

731년 카를은 루아르 강을 건너 아키텐을 공략, 에우도가 공작으로 있던 아키텐으로 진군했다. 에우도는 혼란기를 틈타 독립을 시도했고, 카를의 진격 소식을 접하고 사라센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카를은 우스만 이븐 나이사와 에우도의 제휴를 비난하고, 루아르를 넘어 아키텐을 침공했다. 카를 마르텔의 군대는 부르쥬를 쑥밭으로 만들었고, 에우도는 카를 마르텔의 군대와 싸웠으나 참패하였다. 그리고 카를은 곧 프랑크로 되돌아갔다.

아프리카에서 건너와 스페인을 정복한 사라센 왕국732년에는 지중해 북서부 연안을 점령하고 갈리아 지방으로의 진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투르 푸아티에 전투를 지휘하는 카를 마르텔

732년 에우도의 요청을 받은 총독 아브드 알 라만 가비키의 군대는 바스코니아(Vasconia)를 넘어 보르도를 향해 전진하고 도시를 점령, 교회를 불태우고 약탈을 감행했다. 에우도는 즉시 이들을 지원하였다. 아브드 알 라만이 이끄는 군대는 보르도에서 아키텐을 가로질러 투르-푸아티에로 왔으나 푸아티에 시 외곽에서 카를에게 격퇴당했다.

투르-푸아티에 전투[편집]

사라센의 군대 중 일부는 파리 시에도 쳐들어와 약탈과 방화를 감행하였다. 732년 에스파냐로부터 침입해 온 사라센 제국 군과 교전, 피레네 산맥알프스 산맥에서 이슬람 군대를 격퇴하고,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이슬람 군대를 궤멸시켰다. 또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오는 이슬람 군대 역시 계곡에서 격파함으로써 프랑크 왕국을 이슬람 군의 점령 위기로부터 구하였다. 이는 서유럽의 기독교 세계를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보호한 것으로 높이 평가된다.

사라센과의 교전 과정에서 기마병이 강한 아라비아군과 대항하기 위하여 보병 중심의 프랑크 군제를 개혁, 기사의 병역을 부담하는 가신에게 교회령(敎會領)을 몰수하여 봉토로 주었다. 이것이 봉건제도의 기원이라는 견해에 최근 비판적인 평가가 있다.

정복 전쟁[편집]

베르사유 궁전에 세워진 카를 마르텔의 동상
카를 마르텔

733년 카를은 부르군드에 항복을 강요했고 734년에는 프리기아를 정벌하는데 성공한다.

734년 다시 아키텐을 공략했다가 회군하였고, 735년 에우도가 죽었다는 소식를 듣자마자 군대를 이끌고 다시 루아르 강을 건너가 아키텐, 보르도와 그 주변지역을 자신의 세력권 아래 두고 고트족 등을 축출했다. 736년 다시 군사를 이끌고 부르군드로 쳐들어가 부르군드 귀족들의 항복을 얻어냈고, 730년대에는 사라센인과 여러 차례 교전을 벌였다.

교회를 위해 열심히 일했으며 몇몇 대수도원, 특히 파리 외곽에 있는 생드니 대수도원에는 토지를 기부하는 등의 희사를 하기도 했다. 또한 잉글랜드로 전교를 위해 파견되는 로마 가톨릭 전도사들에게 보호와 여비 부담 및 원조를 베풀었다. 그 중에는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에서 선교활동을 한 성 윌리브롤드게르만 지역에 파견되어 기독교를 전한 성 보니파키우스 등이 있었다. 그럼에도 일부 교회와 수도원을 약탈하는 것을 방관하였다.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교회의 토지와 재산을 빼앗은 일이나 이를 묵인한 점을 두고 비판을 받게 된다.

만년[편집]

카를 마르텔의 묘
카를 마르텔의 무덤

737년 이후부터 메로빙거 왕조가 궐위된 것을 계기로 프랑크 왕국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시도에도 그는 왕에 취임하지 않고 국왕을 대리하여 정무를 주관하였다. 738년 레온부르고뉴에 진출했고, 아키텐의 반란을 다시 진압하였으며, 랑그독까지 영향력을 확보했다.

그러나 카를은 만년에 병에 시달렸고, 잦은 격무로 쓰러지기도 했다. 한편 739년 롬바르드족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던 교황 그레고리우스 3세의 구명, 군사원조 요청을 국력이 안됨을 이유로 거절했다. 교황에게서 값진 선물들, 심지어 성 베드로 무덤의 열쇠 등을 선물로 받았으나 카를은 형식적인 답례만을 했을 뿐 원조를 약속해주지 않았다. 741년 10월에 사망했을 때 그는 이슬람의 침입을 격퇴한 공로로 특별히 왕족들이 묻히던 생 드니 대성당 지하의 테오도리히 3세 묘소 옆의 석관에 안치되었다.

사후[편집]

그의 사후 2년 뒤 피핀 3세메로빙거 왕조의 왕족을 데려다가 힐데리히 3세로 옹립한다. 그러나 피핀은 자신의 이복동생 그리폰을 제거한 뒤, 형인 카를로만 1세와 조카 드로고를 제거하고 프랑크 왕국의 궁재직을 장악한다. 피핀은 751년 교황 자카리아스의 승인을 얻어 직접 국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가계[편집]

두 아들인 피핀과 카를로만에게 유산을 분배하는 카를 마르텔
생드니 대성당 내부 클로비스 2세 (앞)의 석관과 카를 마르텔의 석관
  • 아버지 : 피핀 드 헤르스탈(Pepin the Herstal, 630년경 - 714년)
  • 본처 : 플렉트루디스
    • 이복 형 : 그리모알트(? - 714년, 암살됨)
    • 이복 형 : 드로고(Drogo, ? - 708년)
  • 생모 :
    • 동생 : 힐데브란트 백작
  • 본처 : 클로트루드(Chrotrud, ? - ?)
  • 첩 : 스완힐드(Swanachild)
  • 첩 : 로우하이드(Ruodhaid)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일설에는 676년생 설, 686년생 설, 688년생 설 등도 있다.
전 임
테오데리히 4세
프랑크의 국왕 직무대행
737년 - 741년 10월 28일
후 임
힐데리히 3세
프랑크 공작
718년 - 74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