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효세자
문효태자
文孝太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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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세자 | |
재위 | 1784년 7월 2일 ~ 1786년 5월 11일 (음력) |
전임 | 왕세자 선 (사도세자) |
후임 | 왕세자 공 (순조) |
이름 | |
휘 | 이양(李㬀) |
별호 | 문효세자(文孝世子) |
신상정보 | |
출생일 | 1782년 9월 7일(음력)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창덕궁 연화당 |
사망일 | 1786년 5월 11일(음력) | (3세)
사망지 | 조선 한성부 창경궁 자경전 동쪽 행각 |
부친 | 정조 |
모친 | 의빈 성씨 |
묘소 | 효창원 |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년 10월 13일(음력 9월 7일) ~ 1786년 6월 6일(음력 5월 11일))는 조선의 왕세자(王世子)이자 제22대 정조의 장자이며, 의빈 성씨에게서 얻은 첫아들이기도 하다. 휘는 양(㬀),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제23대 순조의 이복 형이다.
대한제국 수립 후 태자로 추증되었다.[1] 첫 시호는 온효(溫孝)였다가 뒤에 문효로 개칭되었다.
생애
[편집]1782년 음력 9월 7일 새벽, 정조와 의빈 성씨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조선 제 22대 임금인 정조의 서자이지만 장남으로 태어났다. 문효세자가 태어났을 당시 정조는 매우 기뻐했다.[2] 수빈 박씨에게서 태어나는 순조의 이복 서형이 된다.
“ | 비로소 아비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 ” |
— 정조, 《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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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없던 정조는 아들의 탄생을 소원하였고 따라서 원자(元子)로 봉하고 그가 3살(22개월 만 1세) 때 바로 왕세자(王世子)로 책봉했던 것이다.[3]
그러나 문효세자는 1786년 6월 6일(음력 5월 11일) 미시(未時)에 5세의 나이에 홍역으로 창경궁(昌慶宮) 자경전(慈慶殿) 동쪽 행각에서 갑자기 훙서하였다.[4][5]
문효세자 태실
[편집]아기비 앞면 : 건륭 47년생 9월 초7일 인시생 원자아기씨 태실 (乾隆四十七年九月初七日寅時生元子阿只氏胎室)
아기비 뒷면 : 건륭 48년생 9월 초6일 립 (乾隆四十八年九月初六日立)
태지석 앞면 : 임인년 9월 초7일 인시 생/원자아기씨 태 (壬寅年九月初七日寅時 生/元子阿只氏胎)
태지석 뒷면 : 건륭 48년 9월 초6일생 오시(午時) 장 (乾隆四十八年九月初六日午時藏)
왕실 자녀의 태를 봉안한 곳을 태실이라고 한다. 1783년(정조 7년) 문효세자의 태를 봉안하였다. 용문사 대장전 뒷산 두운암 근처 50m 거리에 봉안하였다. 태실은 일제강점기 때 이왕직에서 그 내부를 수거해 가고 비석만 남아 있다. 다소 파괴된 것을 1977년에 복원하였다.[6] 경북 예천군 용문사길 285-30번지 용문면 내지리 산 81에 위치하고 있다.[7] 예천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 태실이 있어서 정조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지역이다.[8]
사후
[편집]1786년(정조 10) 5월 14일 시호를 의논하여 온효(溫孝)라고 하였다가[9] 뒤에 개정하였다.
“ | 꿈인가, 참인가, 꿈이라 하여 반드시 꿈도 아닐 것이고 참이라 하여 반드시 참도 아닐 것이다. | ” |
— 정조, 《어제문효세자효창묘신도비》[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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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6년(정조 10) 5월 22일 문효(文孝)로 개정하였다.[11] 연암 박지원이 <문효세자진향문>을 썼고, 몽오 김종수가 <문효세자지문>을 썼다.[12] 정조 대의 문신 이성원이 쓴 시문집 《조은집》에 <문효세자만장>이 수록되어 있다. 현재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있다.[13]
그의 사당 문희묘가 경모궁 남쪽 담장 건너편에 세워졌다가, 그 어머니인 의빈 성씨의 묘(廟, 사당) 근처로 옮기는 것이 정리상 좋겠다는 건의로, 영건 및 신위가 옮겨졌다. 그의 사당은 1870년(고종 7) 1월 한성부 안국방(安國坊)에서 창의궁 궁내 의소묘 안에 있는 별묘(別廟)에 옮겨지고 1900년 의소묘와 함께 한성부 남부 훈도방(薰陶坊) 앞 있는 영희전(永禧殿)에 옮겨졌다. 1908년 7월 의소묘와 문희묘의 신위를 매장하면서 같이 철폐되었다.
효창원
[편집]문효세자의 무덤. 서울 용산구 효창동(孝昌洞)에 생모 의빈 성씨의 무덤과 함께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으로 강제이장되었다. 때문에 현재는 의령원(의소세자의 무덤)과 함께 있다. 효창원의 옛 터는 현재 효창공원 자리이다.
문효세자 관련 궁중행사도
[편집]18세기 이후에는 왕세자로 책봉되는 장면이나 왕세자의 교육과 관련된 동궁의례를 사실적으로 그리는 행사도 제작이 활기를 띠었다. '문효세자책례계병'이나, 효명세자의 성균관 입학 의식을 그린 '왕세자입학도첩' 등이 대표적인 예.[14]
정조는 왕세자의 통과의례를 궁중행사도로 남겼다. 《문효세자책례계병(文孝世子冊禮契屛)》(1784)과 《문효세자보양청계병(文孝世子輔養廳契屛)》(1784)[15] 은 왕세자 책봉례와 보양관 상견례를 그린 병풍이다. 원자가 왕세자로 책봉되는 의례인 책례를 기념하여 병풍을 제작한 경우가 이 전[16] 후[17] 에도 있었지만 책례 장면 주제로 삼은 것은 이 병풍이 유일하다. 《진하도(陳賀圖)》(1783)와 《을사친정계병(乙巳親政契屛)》(1785)은 문효세자 탄생을 기념하여 왕실 어른에게 존호를 올린 의례와 세자궁인 중희당에서 펼쳐진 친림 도목정사[親政]를 그렸다는 점에서 간접적으로 문효세자와 관련되어 있다. 현존하는 정조시대 행사도 병풍은 《화성원행도병》을 제외한 4점이 모두 문효세자와 직·간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후에 왕세자두후평복진하도병(1879)이 문효세자책례계병을 참고하여 제작하였다고 한다.[18]
관련 장소
[편집]승가사
[편집]정조와 의빈 성씨의 장남인 문효세자의 세자 책봉 때, 청나라 황실은 문효세자의 장수를 기원하는 미얀마산 옥불을 선물했다고 한다. 정조는 이 옥불을 보관하기 위해 승가사를 중건했으나 오늘날 그 옥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19]
거둥고개
[편집]정조는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묘에 몇 번이나 거둥(왕의 행차)하였고, 이 때문에 오늘날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고개의 이름이 거둥고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20]
홍예동
[편집]마포구 신공덕동에 있던 마을로서, 지금은 효창공원이 된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와 그의 생모인 의빈 성씨의 묘소인 효창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마을 이름이었다. 효창원의 봉분을 멀리서 보면 홍예(무지개)처럼 보이기 때문에 홍예분(紅霓墳)이라고도 하였다.[21]
가족 관계
[편집]- 왕가(王家 : 전주 이씨)
- 조부 : 추존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1735 ~ 1762)
- 조모 : 추존 헌경의황후 풍산 홍씨(獻敬懿皇后 洪氏, 1735 ~ 1815)
- 외조부 : 증 찬성 성윤우(贈 贊成 成胤祐, 1709 ~ 1769)
- 외조모 : 증 정경부인 부안 임씨(贈 貞敬夫人 扶安 林氏, 1722 ~ 1756)[22]
- 생모 : 의빈 성씨(宜嬪 成氏, 1753 ~ 1786)
- 동생 : 옹주(翁主, 1784 ~ 1784)
- 동생 : 복중 사망(1786 ~ 1786)
- 생모 : 의빈 성씨(宜嬪 成氏, 1753 ~ 1786)
문효세자가 등장한 작품
[편집]연도 | 장르 | 제목 | 역할 | 배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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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 로맨스소설 | 《옷소매 붉은 끝동》 | 문효세자 | |
2017년 | 로맨스소설 | 《우아한 환생》 | 문효세자 | |
2011년 | 소설 | 《문효》 | 이종운 | |
2007년~2008년 | 드라마소설 | 《이산 정조대왕》 | 문효세자 | |
2007년~2008년 | MBC 드라마 | 《이산》 | 문효세자 | 차재돌 |
2005년 | 로맨스소설 | 《비단속옷》 | 문효세자 |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문희묘영건청등록(文禧廟營建廳謄錄)
- ↑ 정조 14권, 6년(1782 임인 / 청 건륭(乾隆) 47년) 9월 7일(신축) 1번째기사 "문효세자의 탄생을 기뻐하다"
- ↑ 정조 18권, 8년(1784 갑진 / 청 건륭(乾隆) 49년) 7월 2일(을묘) 1번째기사 "원자를 책봉하여 왕세자로 삼다"
- ↑ 정조 21권, 10년(1786 병오 / 청 건륭(乾隆) 51년) 5월 11일(계축) 1번째기사 "왕세자가 훙서하다"
- ↑ “문희묘일기”. 2017년 4월 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7년 4월 2일에 확인함.
- ↑ “예천군청”.
- ↑ 왕실 자손의 胎(태)를 묻고 福(복)을 기원하다 Archived 2014년 7월 14일 - 웨이백 머신 "경북일보 2014년 6월 16일자 참조"
- ↑ <예천서 사도세자·문종 태실서 석물 무더기 발견>
- ↑ 정조 21권, 10년(1786 병오 / 청 건륭(乾隆) 51년) 5월 14일(병진) 2번째기사 "빈청에서 왕세자의 시호를 정하다"
- ↑ “규장각한국학연구원url=http://kyujanggak.snu.ac.kr/_Print/HEJ/HEJ_NODEVIEW.jsp?lclass=01&subtype=cg&sclass=&ntype=hj&type=MOK&ptype=list&cn=GK10321_00&mclass=&savetype=”.
- ↑ 정조 21권, 10년(1786 병오 / 청 건륭(乾隆) 51년) 5월 22일(갑자) 2번째기사 "왕세자의 시호를 ‘문효’로 개정하다"
- ↑ “<문효세자지문>”. 2016년 9월 2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8월 29일에 확인함.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조은집>
- ↑ 황정연, 박정혜, 강민기, 윤진영 (2011년 5월 9일). 《왕과 국가의 회화》. 돌베개. ISBN 9788971994221. 2017년 3월 1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 ↑ <문효세자보양청계병>
- ↑ 1690년(숙종 16년) 경종의 왕세자 책례를 기념하여 책례도감에서 발의한 병풍은 산수인물도를 주제로 삼았으며.
- ↑ 1800년(정조 24년) 순조의 왕세자 책례를 기념하여 선전관청에서 발의한 병풍은 요지연도(瑤池宴圖)를 주제로 그렸다.
- ↑ 유재빈 (2016). “정조의 세자 위상 강화와 〈문효세자책례계병〉(1784)”. 《미술사와 시각문화》 17 (0): 90-117. ISSN 1599-7324. 2016년 11월 2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11월 23일에 확인함.
- ↑ <승가사>
- ↑ <서울지명사전 - 거둥고개>
- ↑ <서울지명사전 - 홍예동>[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통덕랑 임종주(通德郞 林宗胄)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