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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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
출생1898년 9월 28일(음력 8월 13일)
대한제국의 기 대한제국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읍 내이리 901번지
사망1958년 11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인불확실함 (처형 혹은 자살설이 있음.)
거주지대한제국의 기 대한제국, 중화민국의 기 중화민국,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성별남성
국적대한제국의 기 대한제국, 중화민국의 기 중화민국,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별칭호 약산(若山)
별칭 최림(崔林), 김약산, 진국빈(陳國斌), 이충(李冲), 김세량(金世樑), 왕세덕(王世德), 암일(岩一), 왕석(王石), 운봉(雲峰), 김국빈(金國斌), 진충(陳沖), 천세덕(千世德), 김약삼(金若三)
학력경성 중앙중학교 졸업,신흥무관학교 자퇴,황푸군관학교 졸업
직업독립운동가, 군인, 정치인, 공무원
종교없음, 무신론자
부모부 김주익(金周益), 모 이경념(李京念), 계모 천연이(千蓮伊)
배우자최씨, 박차정, 최동선
자녀아들 김철근, 아들 김중근
친척동생 김경봉, 이복 동생 김춘봉, 이복 여동생 김복잠, 이복 동생 김익봉, 이복 동생 김용봉, 이복 동생 김봉철, 이복 동생 김봉기, 이복 동생 김덕봉, 이복 동생 김구봉, 이복 여동생 김학봉, 고모부 황상규, 외척 윤세주[1], 사돈 최기일[2]
약산 김원봉
별명 약산(若山), 다른 이름은 김약산, 최림(崔林)
출생지 대한제국의 기 대한제국 경상남도 밀양군
사망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복무 중화민국의 기 중화민국
복무기간 1927년 ~ 1930년
최종계급 중화민국 국군 육군 소위
주요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기타 이력 의열단의백, 조선의용대 총대장, 한국광복군 부사령관,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 노동상, 국가검열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약산 김원봉
별명 약산(若山), 다른 이름은 김약산, 최림(崔林)
출생지 대한제국의 기 대한제국 경상남도 밀양군
사망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복무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복무기간 1941년 ~ 1945년
최종계급 한국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
지휘 한국 광복군, 제1지대
주요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기타 이력 의열단의백, 조선의용대 총대장, 한국광복군 부사령관,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 노동상, 국가검열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서훈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로동훈장(1958년)

김원봉(金元鳳, 1898년 9월 28일(음력 8월 13일) ~ 1958년 11월?)은 한국독립운동가이자 군인이며, 혁명가·정치가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1948년 4월 월북 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1919년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여 조선총독부일본정부를 상대로 항일무장투쟁을 하였으나 실력의 한계를 느껴 이후 황푸군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졸업후 국민당 장교 신분으로 제1차 국공합작에 참여해 국민혁명(북벌)에 가담했다. 이후 군사 양성을 위해 남경군관학교의 한인 입학을 추진했고,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여 게릴라 전투를 지휘했다. 1935년 김규식(金奎植) 등과 민족혁명당을 창당 활동하다가 중국 국민당의 한국 독립운동단체 통합 요구에 부응, 1940년대초,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임시의정원(경상도 지역구)의원, 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으로 활동하고 1944년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선출됐다.

해방 후, 1946년 2월 민족주의민주전선, 인민공화당 등에서 활동하였으며 김규식·김구 등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가한 뒤, 귀환하지 않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잔류하여 정치인으로도 활동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수립 후 국가검열성상에 임명된 뒤 노동상, 다시 국가검열성상,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58년 11월 연안파 숙청작업 때 숙청당했다.

호는 약산(若山)으로 그래서 김약산으로도 불린다. 가명으로 최림[3](崔林), 김약산, 진국빈(陳國斌), 이충(李冲), 김세량(金世樑), 왕세덕(王世德), 암일(岩一), 왕석(王石), 운봉(雲峰), 김국빈(金國斌), 진충(陳沖), 천세덕(千世德), 김약삼(金若三) 등 다양한 가명이 있다. 고모부 황상규의 문인이다. 본관은 김해(金海), 경상남도 밀양군 출신.

생애

생애 초기

출생과 가계

1898년 음력 8월 13일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읍 내이리 901번지에서 가야김수로왕의 72대손인 아버지 역관 김주익(金周益)과 어머니 경주 이씨의 2남 1녀 중 장남, 아버지 김주익의 9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경주이씨 이경념(李京念)은 그가 4살 되던 해 동생 경봉을 낳다가 사망했다. 아버지 김주익은 영양 천씨 천연이(千蓮伊)와 재혼하여 8남 2녀를 두었고, 박순남이라는 서모에게서는 3명의 이복 동생이 태어났다. 이 중 익봉은 어려서 요절했고, 계모 천연이가 낳은 배다른 동생들 중 봉철, 봉기, 덕봉, 구봉은 뒤에 보도연맹원으로 몰려 한국전쟁 중 처형됐다.

몰락 양반가의 후손으로 김해 김씨 참판공파로 참판을 지낸 영견(永堅)의 후예였으나, 서얼의 후예였던 탓에 신분은 중인이었고, 선조들 중에는 역관을 몇명 배출했다. 할아버지 김철화(金哲和)가 역관이었고, 아버지 김주익은 일본어 역관이었으며, 아버지가 역관생활을 하며 토지를 마련하여 어렵지 않은 유년기를 보냈다.

아버지에게는 김주오(金周五)라는 동생과 손아래 여동생이 있었다. 그의 고모는 독립운동가 황상규에게 시집갔는데, 약산의 재능을 알아본 황상규는 그에게 한학을 가르쳤다.[4] 아버지 김주익은 첫 아들이 태어나자, 밀양읍내에 살던 자신의 외가 친척이자 정3품 통정대부 시종원 시종을 지낸 윤희규(尹憘圭)를 찾아가 아들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역술에도 소질이 있던 윤희규는 아이가 ' 장상(將相)이 될 팔자를 타고 났다'며 돌림자인 봉에다가 으뜸 원(元)자를 따서 원봉이라 이름지어주었다.

그의 생외가인 경주이씨는 밀양군 부북면 감내리에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생모 이경념이 일찍 세상을 떠나고, 부친 김주익이 재혼하고 또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멀어졌다. 거기다 장남인 약산이 약관의 나이에 망명한 터라 그의 집안과 연결이 끊어졌다.[5]

유년기

유년시절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1908년 밀양공립보통학교로 편입학하였으나 1911년 11월 메이지 천황의 생일에 동창 한봉인(韓鳳仁), 윤세주, 강인수(姜仁壽) 등과 함께 일장기를 변소에 넣은 사건으로 심한 구타를 당했다. 그러나 혐의를 부인하다가 홀로 퇴교당했고, 다시 보통학교 2년 과정에 편입하여 졸업했다.

1910년동화중학교(同和中學校) 2학년으로 편입학하여 학업에 익혔으며 교장인 전홍표(全鴻杓)의 영향을 받아 항일사상을 갖게 된다. 그는 학생들에게 '우리가 목숨이 붙어있는 한 우리 민족의 원수 강도인 일본과의 투쟁을 단 하루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점과 '빼앗긴 국토를 되찾고 도로 잃어버린 주권을 회복하기 전에는 우리는 언제나 부끄럽고, 슬프고, 언제나 비참하다'는 등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훈시를 하였고, 그는 전홍표 선생의 훈화에 감화되었다. 그러나, 동화중학교는 얼마 못가 일제 총독부의 압력에 의해 학교는 폐교된다.

그는 밀양 시내의 남천강변에서 축구를 즐겨하거나 아침저녁으로 냉수욕을 하면서 신체를 단련하였고 일본인들이 조선역사에 대한 것을 금지하였음에도 조선의 역사에 관련된 서적들과 위인전기, 지리, 육도삼략 등에 대한 서적을 찾아서 탐독하였다. 전홍표 교장의 배일사상으로 중학교가 폐교당하게 되자 그는 동료 학생들과 함께 80원의 성금을 모금하여 폐교를 면하게 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청소년기

동화중학교가 폐교당한 뒤 김원봉은 표충사로 들어가 손자병법과 한비자, 오자 등과 같은 병서들을 읽었다. 표충사에서 독학하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뜻을 품게 된다. 그리고 1913년 경성중앙중학교로 편입학하여 학업에 중시했는데, 거기서 김성수·유근·안재홍 등을 스승으로 만나게 되었고, 윤치영·변영로 등과도 조우하게 된다.

중앙학교 재학 중 김원봉은 김약수(본명 김두전)·이여성(본명 이명건) 등과 교류하였으며, 이들과 평생 친구가 되었다. 김약수와 이여성은 후일 그가 파리강화회의에 반대하여 간도로 가서 군대를 조직하는 등의 계획을 털어놓을 정도로 친한 친구가 된다. 또한 중앙중학교를 먼저 졸업한 김두봉, 윤치영과 나중에 졸업하게 된 무정 등을 만나 친분관계를 쌓는다. 1916년경성 중앙중학교를 졸업한 뒤 독립 운동에 뜻을 두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본래 평안도 출신의 최석진이라는 사람의 딸과 결혼한다.[6] 그러나 본처가 병으로 죽고 나중에 새 장가를 든다. 후일 정화암은 그가 박차정을 만나기 전에 본처가 있었으며 김두봉의 조카딸(박차정)과의 결혼은 새장가라고 증언하였다.[6]

학창 시절

덕화학당 재학 시절

김원봉

이때 김원봉과 함께 일제 일경의 추적을 피해 개명의 필요성을 느끼던 중, 작명을 알던 김원봉의 고모부였던 황상규의 도움으로 이름을 김두전과 이명건 이렇게 셋이서 개명을 하게 되는데, 김두전은 '약수'로 이명건은 '여성(如星)', 김원봉은 '약산'으로 각각 개명하였다 한다. 김원봉과 김약수, 이여성은 1년 뒤에 망명을 목표로 삼고 열심히 일해 돈을 모으기 시작했으며, 김원봉은 중국어에 문맹이었던 김약수, 이여성에게 중국어의 기초를 가르쳤다.

1916년 10월 독일계에서 운영하는 천진의 덕화학당에 입학하여 독일어와 중국어를 익혔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국의 협상국측 참전으로 중국은 독일과 적국이 되었고, 독일계에서 운영하는 덕화학당 역시 폐교할 수밖에 없었다. 덕화학당의 폐교로 한동안 방황하였다.

망명과 중국 생활 초반

1917년 방학으로 일시 귀국했으나 중국독일,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면서 독일인들은 적국인으로 간주되어 상하이에서 추방당하고 덕화학당도 폐쇄되었다. 다니던 학교가 폐교되면서 오래 방황하던 그는 중앙학교 때부터의 친구인 이여성, 김약수 등과 망명을 결심한다.

다시 중국행을 결심하고 1918년 여름 김원봉은 일행과 경성부로 올라가 경의선 열차에 탑승, 압록강 국경을 넘어 안동에서 안봉선(安奉線) 기차로 갈아타고 봉천까지 가서 고모부 황상규를 다시 만났다. 황상규의 소개로 봉천에서 며칠을 쉬고 대련(大連)으로 건너갔으며, 기서 상해로 가는 기선을 탔다.[7] 상해에 도착한 이들은 아르바이트와 노동으로 생계를 마련했다. 곧 김원봉은 1918년 9월 남경(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하였다.

대학 재학과 신흥무관학교 시절

난징 진링대학에서 그는 독일어, 중국어, 영어를 배웠고 1년다니다가 중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려는 상하이 지사들의 정책에 반발하고, 독립을 위해서는 군대를 양성해야 된다는 뜻을 품고 간도로 가서 군대를 조직할 계획을 세운다. 1919년 2월 만주로 건너가 만주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서 6개월간 폭탄 제조법, 체력 단련, 군사학 교육 등을 받았다. 신흥무관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졸업 3개월 남겨둔 상태에서 신흥무관학교에서 중퇴하였다.

만주로 떠날 의사를 교관 김경천에게 표시했으며, '윤세주, 이종암, 한봉인, 한봉근, 신철휴, 서상락(徐相洛), 이성우, 권준(權晙), 강세우(姜世宇)' 등과 뜻을 같이하기로 했다고 밝혔으나 집단 탈출은 동기생들의 사기를 꺾을 것[8] 이라 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신흥무관학교 교장 이시영을 찾아가 뜻이 있어서 자퇴한다며 특별히 자퇴를 허락받고 신흥무관학교를 나왔다.

독립운동

의열단 창단과 무장 활동

의열단 조직
1921년 3월 5일자 동아일보 기사. 1920년 12월에 의열단최수봉이 밀양 경찰서에 폭탄 투척 의거를 보도한 내용이다.[9]

1919년 11월 9일 밤, 길림성에 소재한 길림성성(吉林省城), 파호문(把虎門) 밖의 중국인 반 모의 집에서 양건호, 한봉근, 곽재기, 김옥 등과 회합하여 밤을 새워 숙의한 결과 강렬한 방법으로 일본의 침략본거를 파괴할 것을 결의하고 독립비밀결사로 암살과 기관 파괴를 위한 무장항일운동 조직단체인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여 의백에 취임, 국내의 기관 파괴, 요인암살 등 여러 차례 무정부주의적 항일 투쟁 활동을 벌였다. 단원은 김원봉, 양건호, 곽재, 김옥, 윤세위, 윤치형, 이성우, 강세우, 한봉인, 신철휴, 배동선, 서상락, 권준 등 13명이었다.(의열단 참고.) 이어 그는 공약 10조를 발표하였다.

  1. 천하에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기로 한다.
  2. 조선의 독립과 세계 만인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바쳐 희생하기로 한다.
  3. 충의의 기백과 희생정신이 화고한 자라야 단원이 될수 있다.
  4. 단의를 우선하고 단원의 의를 급히 한다.
  5. 의백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하게 한다.
  6. 어떤 시간, 어떤 곳에서든 매일 1차씩 사정을 보고케 한다.
  7. 어떤 시간, 어떤 곳에서든 초회에는 필히 응한다.
  8. 죽음을 피하지 아니하여 단의에 뜻을 다한다.
  9. 일이 구를 위하여 구가 일을 위하여 헌신한다.
  10. 단의를 배반한 자는 학살한다.

그는 의열단이 제거해야 할 인물로 총독부의 고관 등을 선정한다.

제거해야 할 대상

  1. 조선총독부 총독 이하 고관
  2. 주조선 일본군 주둔군 수뇌
  3. 대만총독부 총독과 대만총독부 고관
  4. 매국적
  5. 친일파 거두
  6. 적의 밀정
  7. 반민족적 귀족 및 대지주

뒤이어 이를 두고 7가살(반드시 죽여야 할 7가지 대상)이라 이름한다. 이어 반드시 파괴해야 할 곳 5곳을 선정했는데,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각지의 경찰서와 순사 주재소, 기타 왜적의 주요 기관이 그것이었다. 그밖에 친일파들의 회합 장소와 대만 내 일본 총독부, 그리고 중국의 일본 군사 시설을 목표지로 정하였다.

의열단원들은 각자 한사람이 여러 개의 가명을 사용하고 있었고, 사진 이외에는 본인을 찾는 일이 쉽지 않았다. 사진 촬영 뒤에는 반드시 원판과 필름까지 가져가거나 찢어버리거나 라이터, 성냥 등으로 바로 소각했으므로 사진도 찾기 쉽지 않았다. 약산은 이들이 연락할 대상으로 암호를 정하고, 힘 력(力)자를 공중에 손가락으로 써서 신호를 주고, 확인은 얼굴을 오른쪽으로 저으면서 신호를 하게 했다.

그는 자기가 만난 사람을 설득시켜서 동지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면 집요하게 며칠간 시간이 들더라도 반드시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동지와 부하들을 위해서는 재산을 능히 잃고도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으며, 비용 투자는 물론이고 때로는 동지와 부하들의 가난함과 궁핍 소식을 들으면 자기가 입은 옷을 벗어주거나 시계 등을 전당포에 전당 잡히게 하였다. 그의 변함없는 신뢰에 감동한 청년들은 자발적으로 사지로 달려가게 된다.

폭발물 제조와 반입

1920년초 김원봉은 단원들을 바로 국내에 투입시키기 위해 총기와 폭탄의 반입을 계획한다. 그는 많은 폭발물과 총기를 국내로 반입하여 조선총독부 요인들과 주요 친일파들을 척살하고, 국내의 자본을 빼가는 동양척식회사 등의 폭파를 계획하기로 결정하고 자신이 소지한 비상금 천원을 내놓았다. 이어 이종암이 내놓은 천원, 윤치형과 구영필 등에게 각각 맡겨둔 3백원 등을 포함한 약 3천원 가량의 돈으로 1919년 12월말 김원봉 본인과 이종암, 곽재기, 이성우 등과 함께 상하이로 가서 무기를 구해오기로 하고 길림 성을 출발했다.

상하이 보창로 보강리 60호에 살던 재중교포 김대지(밀양 내이동 출신이다.)를 만나 그의 집을 근거지로 하고 상하이의 프랑스 불조계 마당로에 있던 임시정부를 찾아가 여러번의 설득 끝에 폭탄 세 개와 탄피 제조기와 폭약 재료, 뇌관, 심지, 기름 등을 받아 1920년 3월초 자동차로 비밀리에 길림성으로 되돌아왔다.

한편 김원봉과 이성우는 상하이에 더 체류하면서 임시정부의 별동대인 '구국모험단'의 단장 김성근(金聲根)을 만나, 그를 어렵게 설득하여 그로부터 폭탄 제조 기술을 배우게 된다. 며칠간 김성근의 집에 머무르던 김원봉과 이성우는 김성근에게서 폭탄제조법을 배우다가 직접 폭탄을 제조할 수 있는 재료들과 화약, 심지, 뇌관 등을 선물로 받고 그를 데리고 길림성으로 다시 되돌아온다. 첫 폭탄 제조가 성공을 거두고 한적한 곳에서 그들이 직접 제조한 폭탄도 성능이 양호하고 성공적이었다.

3월 중순 김원봉은 혈기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보고 의열단을 몇개의 조로 나누어서 무기 입수와 연구, 준비를 하기로 하고 김원봉은 이성우, 곽재기 등과 함께 상하이로 가서 무기를 구입하기로 하고, 자금 조달책은 황상규, 윤세주, 김상윤(金相潤) 등이 소수의 청년들을 데리고 국내로 들어가서 활동하기로 정하였다. 지린성을 중심으로 한 의열단 근거지는 이종암에게 지휘책임을 맡기고 신철휴 등과 함께 지린성에서 조직을 돌보다가 적당한 시점에 입국하기로 정한다. 무기의 운반책은 이병철과 마산에 있던 배중세가 맡기로 하고, 무기를 인계받을 사람으로는 밀양 사람 김병환으로 정했다다. 이들은 국내에 들어가 국내에서는 보다 많은 거사 동지들을 포섭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또 다시 국내에 돌아가서 1개월 이내에 의거를 단행할 계획을 세운다.

그는 상하이에 체류하면서 연락으로 의열단원들을 시켜 상하이에서 입수한 폭탄 등을 연구하여 그 설계도를 만든 뒤 폭탄 제조에 활용하였다.

밀양 폭탄 미수 사건 계획

1919년 12월에 이미 불조계에서 입수했던 폭탄 중 일부는 만주의 우체국을 통해 조선과의 국경지대인 안둥 현의 중국 세관에 근무하는 영국인 포우인 앞으로 택배로 보내고, 상하이에서 다롄을 거쳐 기차로 안둥 현에 도착한 곽재기가 임시정부의 외무부차장이자 김원봉과 친하던 장건상의 서한을 포우인에게 증표로 보이고 이 소포를 찾아, 의열단안둥 현 비밀연락소를 후원던 이병철(李炳喆)이 운영하던 원보상회(元寶商會)에서 고량 수수 20가마니 속에 폭탄을 숨기고 일부는 길림 성의 본부로 보내고, 일부는 1920년 4월 12일 안둥역전의 택배 회사 의신공사를 통해 밀양에 있는 한 미곡상으로 보냈다. 보낸 폭탄은 4월 15일에 밀양으로 도착한다.

1920년 3월 중순 신철휴 등이 국내에 잠입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이어 이종암은 다시 상하이로 돌아와 김원봉 등과 힘을 합쳐 폭탄 13개, 미제 권총 2자루 및 은제 탄환 백발과 몇개의 소총을 프랑스 조계 오흥리에 살던 중국인 무기거래상 단익삼(段益三)에게 개당 230원을 주고 구입했다. 일설에는 임시정부의 별동대인 구국모험단이 가지고 있던 것을 의열단에서 가져간 것이라고도 한다. 이때 입수한 폭탄과 총의 일부는 택배로 이병철에게 보낸 뒤 쌀가마니에 숨겨서 밀양으로 보낸다. 수수 5가마니에 각각 나눠서 넣고, 다른 20여 가마니에도 분산시킨 뒤에 부산진역전의 김영국 운송점으로 보내고, 마산역전의 배중세 미곡상과 밀양역전 김병환 미곡상에 배달하고 일부는 진영역전 강원석 미곡상의 창고에 각각 보관케 했다. 동지들은 당초 계획대로 입국에 성공하였다.

검거와 실패

계획이 지연되면서 1920년 5월 김원봉은 이종암을 국내로 보내고 혼자 상하이에 남게 되었다. 5월 초 원보상회에 들린 이종암은 2월 말에 이병철이 국내로 보낸 폭탄 3개가 김병환의 집에서 밀양경찰서 경찰관들에게 발각되어 압수당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1차 검거에도 뒤에 보낸 폭탄 13개와 권총 2정과 탄환 등은 발각되지 않았고 따라서 지장은 없으리라 믿고 국내로 잠입한다. 이종암이 국내에 진입하자 배중세는 나머지 폭탄과 총기를 김병환에게 넘겼고, 김병환은 총독부의 눈을 피해 강원석 미곡상과 진영억전 근처 창원군 동면 무점리 강상진의 집에 운반, 은닉시키고 조선총독부동양척식회사, 경성일보 등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김원봉은 이들과 전보와 전화로 비밀 교신을 하며 거사를 지휘했다. 그러나 1920년 6월 16일 곽재기, 이성우, 한봉근, 윤세주, 신철휴, 김기득 등 의열단의 간부 6명이 경성부 인사동에 있던 모 중국인 요리집 2층에서 거사를 논의하던 중, 경기도 경찰청 제3부의 김태석에게 매수당한 의열단원 배신자의 밀고로 모두 체포된다. 이들은 모두 재판에 회부되었고 징역 10년 가량의 형기를 받고 투옥당했다. 사건이 발각되자 김원봉은 자신이 지시한 것임을 언론에 발표하고 이로써 의열단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발각되지 않은 폭탄들이 존재했고 이는 그해 말의 부산과 밀양에서 벌어질 거사용으로 사용된다. 재판이 진행되는 중 그는 검거되지 않은 다른 동지들과 연락하여 새로운 거사를 준비한다. 1920년 9월 14일 의열단박재혁부산경찰서 서장실에 폭탄을 던져 하시모토(橋本秀平) 서장을 살해하고 경찰서 직원들에게 중상을 입혔다. 12월 27일 밀양출신 의열단최수봉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
박재혁 동상

6월 의열단원들의 체포 소식을 접한 김원봉은 싱가포르에 체류중이던 의열단박재혁을 급히 소환한다. 9월박재혁은 상하이로 왔다. 박재혁을 만난 김원봉은 그에게 동지들의 복수를 위해 바로 부산으로 가게 하였다.

"박 동지! 지금 부산으로 가서 부산경찰서장을 죽이고 오시오. 그 자를 죽이되 그냥 죽일 것이 아니라 누구의 손에 무슨 까닭으로, 왜 죽지 않으면 안되는 지를 깨닭도록 단단히 그의 죄를 밝힐 필요가 있소."

1920년 9월 초순 박재혁은 배편으로 부산항으로 갔다. 박재혁을 전송한 뒤로 그는 이 말 한마디가 살아서 돌아올 수도 있는 동지를 죽인 것은 아닌가 하며 오래 자책했다 한다. 박재혁은 일본 수송선을 타고 나가사키로 갔다. 여기서 시모노세키를 거쳐서 연락선으로 부산에 갈 생각이었으나 나가사키에 가서 보니 시모노세키를 거치지 않고도 쓰시마 섬의 이즈하라 항을 거쳐 부산항을 가는 배편이 있어서 바로 그 배편으로 부산항에 갔다. 박재혁은 입국 직전 그에게 편지 한통을 보냈다.

"어제 나가사키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거래가 뜻대로 순조롭게 잘 되고 있으니 이것이 여러분들의 염려 덕택인가 합니다. 초가을 바다 바람에 몸과 마음이 모두 즐겁습니다. 많은 이득을 거둘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다시는 당신의 모습을 볼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1920년 9월 4일 와담 드림"

9월 13일 박재혁에게서 부산항 도착 소식을 접하였다. 박재혁은 가족들을 만난 뒤 14일 고서적 장수를 가장하여 골동품 수집이 취미인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를 면회요청하였다. 하시모토는 순순히 면회에 응했고 박재혁은 고서적을 꺼내는 척 하다가 폭탄을 꺼내 던졌다. 서장과 현장에 있던 순사들과 비서진 등이 그자리에서 중상을 입고, 서장은 부산의 병원으로 옮겨지던 중 죽었다. 나머지 순사들과 보조원들은 부상을 당하거나 불구가 되었다. 박재혁은 떠나지 않고 "나는 의열단원이다. 네놈들의 소행으로 이번에 우리 동지들이 구속되고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고 있다. 네놈들은 우리의 원수다. 죽어 마땅한 줄을 너희놈들도 잘 알고 있겠지"라고 외친 뒤 체포되었다.

박재혁은 체포후 유치장에 옮겨졌다가 부산지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21년 2월 14일 대구 복심법원에서 무기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다가, 고문 후유증, 폭탄 파편 등으로 인한 상처와 폐병으로 고통을 받던 중 단식으로 3월 12일에 옥사했다.

밀양 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

1920년 9월 박재혁의 투탄 소식을 접한 의열단최수봉은 밀양경찰서에서 동지들을 많이 검거하였으므로 밀반입한 무기로 제2차 거사 계획을 세운다. 이어 12월에 밀양경찰서를 목표로 삼기로 하고 그에게 연락하였다. 1920년 12월 27일 월요일 아침 비밀리에 폭탄을 숨긴 뒤 밀양경찰서에 투척한다. 12월 27일 오전 9시 30분경 서장실에서 와타나베(度邊末次郞)가 순사 19명 등을 불러놓고 특별 순시를 할 때 최수봉은 창밖에서 수류탄을 던졌다. 이 중 한 발의 수류탄은 순사부장 조선인 남경오(南慶吾)에게 맞았으나 불발이었고, 한발의 폭탄은 경찰서 본관의 사무기구를 파괴했다.

최수봉은 도주하다가 근처의 지인인 황석(黃錫)의 집에 숨어있다가 25 cm 단도를 꺼내 자결하려고 배를 긋고 15cm를 그었으나 체포되었다. 바로 추격한 일본군에 의해 병원으로 후송된 뒤 치료, 1921년 4월 16일 대구복심법원 형사 2부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항소, 경성고법에서는 5월 23일에 사형이 집행되어 1921년 7월 8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 사건으로 의열단원 한봉인과 부단장 양건호, 그밖에 이수택, 고인덕, 이원경, 김상윤, 구영필(김상윤 이하 미체포) 등이 이미 투옥, 복역중이었으나 일본 경찰은 최수봉의 시신을 매장하려고 대기하던 청년들 수십여 명을 구속, 처벌하였다. 곳곳에서 의열단 색출로 여러 사람이 체포되자 김원봉은 부산경찰서 투탄과 밀양경찰서 투탄은 자신이 지시한 것임을 밝힌다.

조선총독부 투탄 사건

1920년 5월 만주 봉천(奉天)의 광성연초공사(廣成煙草公司)의 기계감독으로 일하던 김익상은 천진, 상해, 광동, 북경 등지를 떠돌아다니다가 우연찮게 김창숙의 소개로 베이징에서 김원봉을 만났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김원봉은 그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얻어지는 것이오. 결코 남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오, 조선민족은 능히 적과 싸워 그들을 몰아낼 힘이 있소. 그러므로 우리는 앞장서서 민중을 각성시켜야 하오. 이것을 위해서 우리가 먼저 피를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김익상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보았으나 특별히 웅변조로 말하는 것도 아니였고 또 용모가 남달리 뛰어나서 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슨 위압을 느끼게 하는 그런 사람도 아니였다. 그저 평범한 얼굴이고 평범한 말씨였을 뿐, 낯을 붉히거나 음성을 높여하는 말도 아닌데도 깊이 감동하게 되었다. '우리가 먼저 피를 흘려야만 하겠다'는 약산의 말에 감동한 김익상은 바로 의열단에 가입하고 조선총독부 폭파계획에 스스로 자원하였다.

9월 10일 베이징을 출발, 일본어에 능했던 김익상은 학생복을 입고 일본인 학생으로 위장, 몸에는 폭탄과 권총이 각각 2개이며 폭탄 2개는 사타구니에 차고 나머지는 모두 트렁크 속에 숨겨두었다. 봉천과 안동을 거쳐 신의주로 들어오는 길이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열차안에서 만난 어린아이를 데리고 앉은 일본 여인에게 친숙하게 접근, 대학생 부부처럼 위장하여 무사히 국경을 넘어 서울역에 도착해서도 일본 여인의 어린아이를 안고 아빠처럼 행세하며 개찰구를 빠져 나와 무사히 경성으로 들어왔다. 정거장에서 일본 여인과 헤어져 바로 이태원에 살던 동생 김준상(金俊相)의 집에 가, 동생집에서 의탁하고 있던 아내 송씨를 만났다.

1921년 9월 12일 이날 9시경 김익상은 일본인 전기공으로 변장, 검정색 양복저고리에 흰 바지차림에 한쪽 어깨에 수리기구를 넣은 가방을 메고 진고개를 올라 전기공을 가장하여 총독부에 잠입, 비서실과 총독부 회계과에 폭탄을 던졌다. 비서과에 던진 폭탄은 불발이고, 회계과에 던진 폭탄은 사무실과 사무집기를 폭파시켰다. 김익상은 아수라장이 된 건물을 빠져나와 황금정(黃金町, 을지로4가)으로 빠져나와 전차를 타고 서대문과 창경원을 왕복하며 동정을 살피다가 다시 을지로 4가에 와서 일본인 목수들이 입는 '한땡'(はんてん)이라는 상의와 쫄바지 '모모히끼'(ももひき)를 사서 갈아입고 서빙고(西氷庫) 앞에서 전에 입던 검정 양복저고리와 흰 바지는 큰돌에 매달아 한강에 던진 뒤 새로산 한땡과 모모히끼로 일본인 목수로 위장, 강변길을 따라 용산 정거장에 가서 평양행 경의선 열차를 타고 출발했다. 김익상은 신의주에서 내려 압록강철교를 건너 1921년 9월 17일 베이징 정양문(正陽門)밖에 있던 김원봉과 동지들에게 돌아와 사건의 전말을 보고하였다.

국내 거사 미수 사건

1922년 겨울 김원봉은 의열단원 김상옥, 안홍한(安弘翰), 오복영(吳福泳) 등에게 폭탄, 권총, 실탄 등 무기를 휴대하여 국내에 잠입시켰다. 경성에 잡입한 이들은 국내에서 활동하던 의열단원 김상환(金相煥, 다른 이름 김응환(金應煥)), 김한(金翰) 등과 연락하며 거사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중에 갑자기 종로경찰서 사건이 발생하여 취소하게 된다. 김상옥은 다시 1923년 1월 기회를 봐서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저격하려다가 실패한다.

황포탄 오발 사고

1922년말 새로운 구상을 하고 있던 김원봉은 우연히 일본군 육군대장 다나까(田中義一)가 상하이에 올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냥 넘어갈 사항이 아니라고 판단한 김원봉은 즉시 상하이에 머물고 있는 동지들을 소집하여 다나까를 암살할 방안을 구하였다. 동시에 의열단의 활동에 있어 자금 부족과 단원들의 생계 문제와 무기 구매 문제를 논의했다. 다나까 암살 작전에 김익상, 오성륜(吳成崙), 이종암은 서로 자신이 가겠다고 자원했고 그는 오성륜을 보내려고 했으나 다른 두 명이 양보하지 않아 모두 보냈다. 내심적으로는 오성륜을 보내고 싶었으나 이종암과 김익상 두 동지가 절대로 양보를 하지 않겠다고 하니 약산은 마침내 세 동지 모두를 이번 거사에 내 보내기로 작정하였다.

"김익상 동지와 이종암 동지는 이미 국내에서 활약이 컸소. 그러니 이번일은 오성륜 동지가 선두에 서면 어떠하겠는가 생각하는데. ...(이하 중략) ... 첫 번째로 오성륜 동지는 상해에서, 두 번째로 김익상 동지는 남경에서, 세 번째로 이종암 동지가 천진에서 결행을 한다면 그놈이 무슨 재주로 우리들의 총구를 빠져나가겠소"라고 약산이 말했다. 그의 제안이 그럴 듯 하였으나 김익상과 이종암이 서로 먼저 상해를 맡겠다고 우기는 통에 한동안 왈가왈부 하다가 결국엔 약산의 안을 따르기로 하고 사용할 무기와 복장 등을 점검하며 거사 일자만 기다리고 있다가 갑자기 일정이 변경되었다는 신문기사를 접했다. 다나까가 상하이에 오기는 오는데 당초 예정된 대로 3월 28일 오후 3시 30분에 왔다가 남경과 천진, 북경은 들르지 않고 바로 일본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다시 동지들을 모아 논란 끝에 순서는 그대로 하되 거사 장소만 바꾸었다. 오성륜은 배에서 내려 부두로 걸어 나올 때, 김익상은 부두에서 나와 자동차에 오르려 할 때, 그리고 이종암은 격려의 의미로 따라 갔다가 적당한 기회에 거사하기로 했다. 그러나 3월 28일 오전 뉴스에서 다나까의 방문계획이 약간 변경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는데, 부두로 오지 않고 배가 상해 황포탄 세관앞 공공마두로 온다는 것이다.

세 사람은 제각기 나름대로 변장을 하고 무기를 감추어 가지고 각각 현장으로 나갔다. 상해 부두가 국제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평소에도 내·외국인의 출입이 많은 곳인데 일본의 저명한 군인을 맞기 위해서 상해 주재 일본총영사를 비롯한 고관들과 중국대관, 외국사신, 보도진, 일본 거류민, 기관원, 상해 조차지(租借地)에 나와 있는 각국 호위병, 일본군 헌병 등등이 늘어서서 복잡한 속에 특히 경계가 엄중하였다. 이때 오성륜, 김익상, 이종암 세 사람은 저마다 정해둔 자리에 은신, 배가 도착하여 부두 사이에 잔교(棧橋)가 걸쳐지고 승객들이 차례로 상륙했다. 이들은 잔교를 내려오고 있는 사람들을 일일이 지켜보던 이들 중 오성륜은 군중들 틈에 끼여 서서 군복을 입은 다나까를 찾아 권총 세 발을 쏘았으나 뒤에서 빨리 뛰어나오던 브라질계 미국스니드 부인이 맞고 절명했다. 김원봉은 현장 근처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오발 사고 직후

오발 사고 직후 김익상은 안맞았다고 소리쳤으나 오성륜은 흥분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김익상은 뛰어가는 다나까를 저격했으나 모자에 구멍이 났고, 수류탄을 던졌으나 안전핀을 뽑지 않고 던져서 맞추지 못했다. 폭탄은 배 카리슬 호의 승무원이 몽둥이로 쳐서 바다로 밀어넣었다. 이들은 한구로 방향으로 도망치던 중 교차로를 건널 때 누군가를 향해 한발을 발사했다. 이들은 규강로를 질주하다가 다시 한구로로 도망쳤는데 사천로에서 군중들이 추적하자 다시 남쪽으로 달아나던 중 영국 경찰 시크인의 추적을 받았다.

이들은 사천로 어귀 유니온 은행에서 정지하여 군중들을 향해 총을 쏘다가 사천로 외곽 파크 유니온 은행에서 갑자기 정지하여 중국인 손수레장사의 하복부를 맞추었다. 중국인 경찰 한명이 달려들자 김익상은 권총으로 사격을 가해 중국인 경관의 목을 관통시켰고, 레이스 회사 건물로 피신했다가 다른 문을 통해 규강로로 달아나던 중 양국 군인 톰슨이 이들을 추적했다. 이들은 톰슨에게 사격을 가해 가슴을 명중시키고 달아나다가 미국인 증권중개인 호라스 규릭에게 붙잡혀 영국 조계 공무국에 끌려갔다가 일본 영사관으로 인도되었다. 김원봉은 그 뒤 김상환을 파견하여 종로경찰서를 표적으로 삼는다.

종로경찰서 투탄 사건

1923년 1월 12일 오후 8시경 감상옥과 김상환 등은 각각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종로경찰서를 크게 파괴하지는 못했지만 일본경찰에서는 현장에 있던 김상옥을 유력 용의자로 보고 추격, 시가지에서 총격전(銃擊戰)이 벌어졌다.

1월 17일 김상옥은 총독 사이토가 일본으로 간다는 보도가 있어서 전에 사이토를 죽이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여 혼자 해치우려고 남대문역(현재의 경성역)에 나갔다가 시간이 맞지 않아 실패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았다. 은신처까지 따라온 일본 경찰을 상대, 종로서 형사 다무라(田村長七)를 맞춘 뒤 추격하는 종로경찰서 이마세(今瀨太郞) 경부와 동대문서 우메다(梅田) 경부에게 중상을 입히고 맨발로 남산으로 도주 눈쌓인 남산을 넘어 왕십리로 빠져나온 김상옥은 안정사(安靜寺)라는 절로 달아났다. 달아나면서 적의 추격을 혼란스럽게 할 목적으로 일부러 짚신을 거꾸로 신고 뛰기도 했는데 안정사 스님에게는 도박을 하다가 경관에게 쫒기는 사람이라고 속이고 다음날 아침밥을 얻어 먹을 수 있었다.

배를 채운 뒤에는 피신처를 찾다가 동대문안 효제동 73번지에 있는 전부터 교회관계 일로 잘 알고 지내던 여자친구인 이혜수(李惠秀)의 집으로 찾아 들어가 몸을 숨겼다. 그러나 이혜수의 집을 수색하던 중 이혜수의 여동생 이요안이 그가 은신한 방문을 열어주었다. 김상옥은 도피하다가 다른 집으로 피신했으나 쫓아온 경찰들과 교전 중 사망했다. 이 일로 김상옥과 친분이 있던 전우진(全宇鎭), 안홍한(安弘翰), 김한(金翰, 의열단원), 이혜수(李惠秀, 김상옥의 여자친구), 서병두(徐丙斗), 정설교(鄭卨敎, 중학생), 신화수(申華秀, 불교대학생), 윤익중(尹益重, 동아일보 홍성지국장) 등이 체포되었다.

외연고리 확대와 무장 항쟁

의열단원의 수는 약 1천여 명 정도였으나 정확한 수는 알지 못했다. 이들 외에도 의열단을 외곽에서 지지, 지원하는 인사들도 있었다. 의열단을 암암리에 도와준 인사로는 영문학자 김규식, 김원봉의 고모부 백민 황상규, 폭탄의 국내 반입을 도운 장건상, 여류 정치인 박순천, 의열단 성명서를 작성해 준 단재 신채호, 김원봉의 중앙학교 재학 시절 스승인 안재홍김성수, 송진우, 김익상을 소개해준 심산 김창숙, 김원봉의 북경 탈출을 도와준 안창호 등이었다. 또한 고향 밀양에 남아있던 친구와 친척들 중 일부 역시 그들의 행동을 비밀리에 부치며 도와주고 고국의 소식을 알려주었다.

박재혁, 최수봉, 김익상, 김상옥의사 등의 활약으로 의열단이란 이름이 국내외를 통해서 늘리 알려졌고, 왜적들은 그 이름만 들어도 겁을 집어먹는 정도였으나 약산의 생각은 그동안에 의열단이 펼쳐 온 활동이 만족할 만한 성과를 올렸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보다 큰 성과를 기대하기 위해서는 더욱더 치밀한 계획과 완전한 준비로 가장 큰 규모의 암살, 파괴활동를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폭탄을 갖기를 원했던 약산은 수소문 끝에 헝가리 출신의 폭탄제조 전문가 마자르를 상하이로 데려와서 폭탄을 만들고는 상해 앞바다 무인도에 나아가 성능시험까지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고, 의열단원들에게도 폭탄제조 훈련을 받게 했다. 사회주의자로 국내에서 고려공산당 경성지방 간부로 있던 김시현(金始顯)을 북경에서 만나 또다른 투쟁을 계획하였다.

1923년 1월에는 베이징에서 신채호에게 조선의열단 명의로 조선혁명선언을 작성을 요청했다.[10] 국민대표회의 이후 임시정부를 이탈한 학자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에 호감을 보이면서 몇번의 대화가 오가며 김원봉과도 친분을 쌓게 된다. 신채호는 의열단의 활동을 지지하며 이론적인 지지를 보냈다. 김원봉과 신채호가 서로 만난지 수일만에 그는 오랜 대화 끝에 단재의 학식과 인품과 지조를 우러러 인격적으로 가장 숭배할 수 있는 분이라 생각하게 되었고 단재 역시 이 젊은 항일애국지사를 신뢰하게 되었다.

의열단의 여러 테러활동으로 왜적들의 경계는 더욱 엄중해지고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을 뿐만아니라 하물며 폭탄을 가지고 일본으로 잠입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며 특히 왜적의 국회의사당 안으로 뛰어 들어가 각 대신들과 군벌들을 암살하는 일이란 더할 나위 없이 어려운 일이었다. 약산은 여러모로 이 문제에 관하여 연구하고 계획을 세워 보았으나 실현 가능성이 희박했기 때문에 그는 본래의 계획을 바꾸지 않으면 안되었고, '일을 크게 꾸미는 건 애당초 잘못이다. 그러나 이번 계획을 아주 포기할 수는 없다. 한 명의 동지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동경으로 들여보내 놈들 앞에서 우리 민족의 분노를 보여주도록 하자....'고 결심한다.

도쿄 이중교 투탄 사건

1923년 12월 20일 동경으로 사람을 파견할 때 김지섭이 자원 폭탄 3발을 지니고 상해를 떠난 김지섭이 일본 구주 야와다시(八蟠市)에 상륙한 것이 출발후 열이틀만인 12월31일 야와다시의 부두에서 가까운 하젠야여관에 투숙을 하고 1924년 1월 3일 밤차로 다시 동경을 향해 출발했다. 의열단의 활동이 항상 자금부족으로 실패하는 경우가 대부분 이였는데 상해를 출발할 때 여비라고는 겨우 일화40원만 가지고 떠난 김지섭도 야와다에 도착하자 그 돈은 이미 다 떨어져 버리고, 하는 수 없이 휴대하였던 모포며 시계, 외투 등 돈 될 만한 것은 모조리 전당포에 잡혀서 동경가는 여비를 어렵게 마련했다. 1924년 1월5일 오전 6시,시나가와역(品川驛)에서 하차하한 김지섭은 조선인 하숙을 찾아 헤매었으나 모두 실패하고, 쓰루바마찌(鶴卷町)서수관(瑞穗館)에서 조반을 사먹고 휴대했던 손가방 한 개는 그곳에 맡겨 놓고 히비야(日比野)공원으로 향했다.

그날 신문을 한 장 사서 읽어보니 제국의회는 언제 열릴지도 모른다고 보도되자, 여비는 떨어지고 몸에 폭발물은 지닌 상태에서 황궁 투탄을 계획한다. 우선 거사하기 전에 한번 현장을 답사할 필요를 느끼고 이중교와 사꾸라다문 부근을 배회하며 궁성 정문앞에 있는 이중교를 확인하고는 일단 현장을 떠나 날이 저물기를 기다리다가 하오 6시경, 풍경을 구경 나온 일본인 속에 섞여 갑자기 궁성으로 뛰어 들어가 거사를 시도하려는 순간, 정문 보초병의 저지에 막혀 다리 위에서 폭탄 두발이 터지고 김지섭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바로 무기징역형이 선고되었다가 찌바(千葉)형무소에 수용되어 복역 중 이듬해에 소위 은사에 의해서 20년형으로 감형되긴 하였으나 2년 후인 1928년 2월 20일 김지섭은 독방 10호실에서 44세를 일기로 옥사하였다.

거사 자금 마련 활동

김지섭의 거사가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이 자금 부족에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실의에 빠졌으나 동지들의 사기를 생각해서라도 나약해 질 수만은 없었기에 다시 무기자금을 마련할 요량으로 광둥 성을 거쳐 홍콩쪽으로 떠나 자금 모금 활동에 전념했다. 의열단 부단장 이종암(李鍾巖)도 종래와 같이 군자금을 강제적인 수단으로 조달하는 것은 위험만 되풀이 할뿐, 효과가 적음을 깨닫고 다른 방법으로 활동자금을 조달할 것을 협의하고는 1925년 7월에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서 조용히 국내로 들어오게 된다.

한편 그의 모금활동은 순조롭지 못했다. 그러나 의열단원 배중세(裵重世)는 대구부 달성군 달성면에서 일만여원을 투자해서 공사중에 있는 수리사업을 김재수(金在洙)에게 그 권리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5,000원을 받기로 하고, 또 경남 하동군 하동면 박종원(朴宗源)으로 부터는 포항에서 어장을 경영하는데 투자하는 형식으로 역시 5,000원을 1925년 10월 15일까지 입금할 것 등 도합 일만원의 자금을 각출해 주겠다는 약조를 받아냈다.

그러나 이종암이 입국한지 대구부 달성군 달성면 노곡동에 있는 이기양(李起陽)의 산장에서 지병인 각기병을 요양하다 그해 11월 11일 경북경찰부의 갑작스런 습격으로 이종암이 체포되었다. 약속한 날 박종원이 내 놓을 돈만 왔으면 무사히 도쿄로 갈 수 있었을 것인데 박종원으로부터 돈 입금이 늦어지는 통에 대사를 그르치고 만 것이다.

의열단 활동의 쇠퇴

이종암은 밀양폭탄 사건 때 의열단원이였던 구 모의 밀고 때문에 거사 직전에 단원들이 일망타진된 적이 있어서 사람을 시켜 구 모를 제거하였다. 그러나 이 때에도 배후에서 왜경들에게 연락해 준 자가 있었기 때문에 이종암을 비롯하여 모두 12명이 안타깝게도 체포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 일로 의열단의 활동에 타격을 받게 되었다.

1924년 사회주의운동과 노동대중운동이 급격히 성장하는 추세에 편성하여 의열단 고위 간부 출신으로 국내 서울청년회의 유력한 성원이였다가 상해에 들어와 ¨청년동맹회를 결성한 윤자영(尹滋英)에게 많은 젊은이들이 찾아갔고, 윤자영 등은 그의 노선을 비판하였으며 및 단원의 이탈과 자금의 부족으로 생활마져 궁핍한 지경에 다달아 의열단의 활동은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1925년 2월에는 김원봉이 2월 20일과 21일 동아일보를 통해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하는 내용의 글을 실었다가 일부 문제가 되었다.

이후 의열단의 소수의 의열투쟁에 한계를 보이면서 그는 새로운 대책을 찾게 된다. 조선총독부일제 요인 암살과 기관 파괴등 무장 항일투쟁에서 벗어나 좀 더 조직적으로 군사조직등 발전적 전략을 갖출 수 있도록 보다 더 조직적인 무장 항일투쟁을 위해서 장제스가 교장으로 있었고 국민당이 만든 광저우 황푸군관학교에 입교를 결심, 1926년 봄에 김원봉은 손두환, 김성숙과 함께 장개석 교장을 찾아가서 조선인 학도 병사의 중국군 사관학교 편입을 청하여 수락을 얻었다.[11] 동시에 재학 중의 학비까지 전원 학교측에서 지급받도록 했다.[11]

의열단 해체

1926년 1월 광주에 집결한 의열단원들을 소집, 총회를 개최하고 해산을 선언한다. 유자명(柳子明)을 비롯한 일부의 맹렬한 반대도 있었지만 약산은 그 준비단계로 결사적인 항일 군대를 편성하기로 마음먹고 민중을 무장시키기 전에 우선 자기 자신부터 무장하리라 생각하고 의열단 단장이라는 막중한 직책에 연연하지 않고 일개 생도로서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교육을 받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이러한 결단에 대해서 제일 반대의사를 보인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밀양 하남출신의 김상윤(金相潤:일명 金玉)이다. 김상윤과 그의 동화학교에서 동문으로 의열단 창단멤버의 한 사람이요, 황상규, 곽재기, 윤세주, 이성우 등과 함께 밀양폭탄사건에 자금책으로 참가하였다가 동지들이 검거된 뒤 경계망을 뚫고 중국으로 되돌아온 사람으로, 그의 능력과 명성을 누구보다도 아끼고 존경하는 마음에서 지금에 와서 그가 일개 군관학교 생도로 들어간다는 것은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국내외의 모든 동포들에게 기대를 져버리는 일이 될 것이라고 극력 만류하였다.

김원봉은 그에게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의열단 활동을 하자며 설득한다. 그러나 훗날 군관학교를 나온 약산은 김상윤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려 하지도 않고 동지들과 더불어 바로 북벌에 참가해 버리는 바람에 이를 비관한 김상윤은 복건성 천주에 있는 설봉사로 들어가 머리를 깍고 중이 되었다. 이때 해체된 의열단 단원들은 각자 자기 길을 가기로 하고 그를 최종적으로 따른 이는 24명이었다.

황포군관학교 재학 시절

그의 의열단 해체와 황포군관학교 입교를 일부 동지들은 반대하였으나 그는 의열단을 해산하고 황푸군관학교에 일부 단원들을 입교시켰다. 1926년 장제스와 친분이 있던 손두환여운형의 추천으로 김원봉 자신도 광저우 황푸군관학교에 4기로 입교했다.[12] 약산과 함께 보병학과에 강병국, 박효삼, 김용제, 권준, 노흥국, 유원욱, 박건웅, 양검, 전의창, 이우각, 이집중, 왕자랑, 윤의진, 최영택, 이종원, 이기환 등이 들어가고 포병학과에는 오세진, 공병학과에는 전흥묵, 정치과학에는 노세방, 백홍, 박익제, 문선재, 노건 등 모두 24명이 입학을 하였고 이동화는 국민혁명군 제2군 군관학교에 들어갔으며 강세우는 중산대학 정치과에 적을 두게 되었던 것이다.

1926년 1월 김원봉 이하 24명의 의열단 단원들은 중국 황포군관학교에 4기로 입학하여 민족해방운동에서 대중운동이 차지하는 위치, 군사이론 및 실전 등을 학습하였다.[10] 이 기간에 약산이 유능한 중국인 동창생들과 군관학교 교관들을 많아 알게 되었다는 점인데 이들 황포군관학교 출신들은 이후 장개석이 국민당과 국민정부를 장악하게 되면서 장개석 정권을 뒷받침하는 요인들이 되었고 약산은 이들로부터 적극적인 도움을 받게 된다.

군관학교 제1군단 제5연대에서는 특히 삼민주의역행사(일명:藍衣社)서기가 되어 훗날 임정 시절의 김원봉을 적극 도왔던 중국인 등걸도 있었고 또한 교장 장졔스, 정치부 부주임 저우 언라이 등을 만나 친분관계를 형성한다.

이곳에서 그는 일제 밀정들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최림'(崔林)이라는 가명을 쓰고, 군관학교에서 강도 높은 훈련 등 소화하고 지식 및 공산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중국군 장교 복무

1926년 10월 졸업과 동시에 국민혁명군 소위로 임관되어 황포군관학교 군관단에 배속되었다.

황포군관학교 재학 중 김원봉, 김성숙, 장지락 등은 황포군관학교·중산대학 등의 졸업생들을 의열단에 포섭하는 작업을 계속하여 단원들은 100명이 넘었다.[10] 1926년 10월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 4기로 졸업하고[10] 중국군 소위가 되었다.[13]

그와 그를 따르던 의열단원들은 국민당 장교신분으로 제1차 국공합작에 참여해 국민혁명(북벌)에도 가담하였다.[12] 1927년 8월 김원봉은 저우언라이, 주더 등이 지도한 중국공산당의 출범을 이루어낸 난창봉기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또한 광저우에 모여든 청년층 활동가들을 정파·출신에 관계없이 통괄 대표하는 유오한국청년혁명동지회(留奧韓國革命同志會)를 조직했고, 우창(武昌)에서도 외곽단체로서 우창한국청년회를 조직했다.[10]

민족유일당 운동

제1차 민족혁명당 결성과 좌절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연대가 필요함을 인식한 그는 독립운동 단체 간 단결을 역설한다. 1926년 가을 김원봉은 총회를 열어 혁명정당을 세워 운동해야 한다는 인식하에 의열단조선민족혁명당으로 확대, 개편했다.[10] 이어 민족주의적 강령과 정책을 채택하고 김원봉을 당수로, 김성숙·오성륜 등을 중앙위원으로 선출했다.[10]

1926년 겨울 다시 의열단 총회를 열어 과거와 같은 단순 폭력운동만으로는 조국의 광복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민족주의 정당을 만드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나 국내에서는 만들 수 가 없다 하여 의열단이 중심이 되어 해외에서라도 발전시켜 나가자고 하였다. 이로써 구 의열단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고쳐 당의 강령을 채택하고 정책을 제정하였으며 김원봉을 최고지도자(위수)로 정하고 11명의 중앙위원을 선출하게 된다. 조선민족혁명당에는 김원봉 양검,유자명을 비롯하여 다나까 저격사건 이후 탈출하여 모스코바 동방대학에서 유학하고 광주로 돌아와 황포군관학교 러시아어 교관을 맡고있던 오성륜, 그밖에 김성숙, 장지락,박효삼, 이집중 등이며 조직은 중앙집행위원회를 광주에 두고 무창과 남창에 지부를 두고 있었다.

민족혁명당은 중앙집행위원회를 광저우에 두고 활동했으나, 1927년 국공분열로 체제를 갖추기도 전에 유명무실해져 다시 의열단으로 환원되었다.[10] 1927년 4월 김원봉은 상해에서 광동혁명청년회, 무창혁명청년회, 북경혁명청년회, 상해한인청년회대표를 모아 한국독립과 세계혁명의 이론과 실제적 전술을 토의 연구하고 그 실현을 기하기 위해 중국본부 한국청년동맹을 결성하였으나 국공분열로 인한 여파로 쉽게 해체되었다.

단원 이탈과 혼란

국민당 정부공산당 세력 사이에서 자행된 살육전을 통해 이데올로기의 기만성을 직접경험할 수 있었던 그는 광저우 봉기에는 참여하지 않았다.[14] 이후 그는 국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윤치호, 안창호, 이광수, 김성수, 안재홍 등의 자치 운동을 비판하며, 그들이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다고 비난하였다.

1928년 10월 상하이에서 제3차 의열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하여 '일본 제국주의 타도', '조선독립 만세', '전민족적 혁명적 통일전선', '자치운동 타도'의 4대 슬로건과 20대 강령을 발표하고, 지금까지의 유일당운동 대신 국내의 광범위한 노농대중에 기반한 조직적 투쟁을 주로 할 것을 천명했다.[10] 그러나 의견 차이에 의한 내부 분열이 극심하여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1929년 봄 그는 활동 근거지를 북경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때 베이징에서는 김해 출신의 공산주의자 안광천과 자주 만나 교류하였다.

내부 분열이 가속화되자 좌파단원들은 중국 공산당을 따라 광저우 봉기에 참가했고, 김원봉 이하 소수 단원들은 베이징으로 본부를 옮겨갔다.[10] 베이징에서 김원봉은 제3차 조선공산당의 간부였던 안광천 등과 연대, 1929년 12월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결성하여 연합전선운동을 전개했다.[10] 김원봉은 안광천 등과 잡지 레닌주의의 발행 및 레닌주의정치학교를 개설하여 간부를 양성한 뒤, 졸업생들을 서울·평양·강릉·원산 등에 파견하여 비밀지부를 결성하게 했다.

조선의용대 조직
조선의용대 홍보 장면

1930년베이징(北京)에서 안광천(安光泉)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지도했고, 레닌주의 정치학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등을 설립·운영했다. 한편 안광천의 소개로 국내에서 근우회 활동을 하다 중국으로 망명해온 부산 동래출신의 박차정(朴次貞)을 만나게 된다. 1930년 후반 그는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하였고, 이듬해 1931년에는 박차정과 결혼하였다. 박차정과의 결혼은 재혼이었다.[6] 이후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지도해왔으나, 1933년 종연방직 파업사건을 계기로 전원 체포되어 동맹의 국내기반은 붕괴되었다.[10] 1928년 이후 조선총독부상하이 영사관 경찰에 의한 집중 검거와 구속, 탄압 등으로 자금난을 겪게 된다.

독립운동가 박차정과의 결혼 사진 (1931년)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김원봉은 상하이에서 삼민주의역행사의 서기 텅제를 만나 재정을 지원받았다.[10] 이후 중화민국 국민당 정권의 군부의 지원으로 자금난을 해결하고, 차량을 구하게 된다. 그해 독립운동가인 박차정과 결혼한다.

한편 김원봉은 남의사의 간부인 강택을 찾아간다. 강택은 황포군관학교 동창회장이라서 김원봉이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15] 강택은 삼민주의청년회라는 것을 조직해 이 기관을 책임맡아 지도해 나가고 있었다. 강택이 김원봉에게 '네가 조선의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조직운동을 할 수 있도록, 내가 무엇인가 돕고 싶다'고 말하자, 김원봉은 '그러면 내가 군관학교를 하나 만들 수 있도록 도와다오'라고 했고, 강택이 '그러면 그렇게 해라.'고 해서 결국 그로부터 나오는 돈으로 난징에 군관학교를 세우게 된다.[15]

1932년 장제스의 도움으로 조선혁명군사간부학교중국 난징 외곽에 설치하고 교관을 담당하여 혁명요원 모집과 양성을 하고,[16] 중국국민당의 동의를 얻어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를 편성하였다. 이후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한 구 의열단 단원 및 신규 청년들을 모집하여 활동하였으며, 중국 국민당 정부와 연대하여 항일전을 펼쳐 나갔다. 소수의 인력이었던 조선의용대는 직접적인 교전보다는 선전활동과 홍보 업무를 주로 하였고, 김원봉은 중국의 방송에 출연하여 연설하였다. 초반에는 소수의 인력이었지만 황푸군관학교의 인맥을 통해 중국내에 흩어진 조선인들을 규합하여 1천여 명 이상의 한국인 청년들을 규합하여 세력을 확장시켜 나간다.

1930년대 중반부터 중국 국민당 정권은 김구, 조소앙, 김규식, 김원봉 등 한국인 지도자들에게 단체 통합을 주문한다. 그러나 각자 의견의 대립과 김구의 임정 법통 고집 등으로 성사되지 못하였다. 1930년대 중반부터는 민족유일당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러나 그의 움직임을 임정우파 독립운동가들은 부정적으로 평가하거나 비협조적이었고 우파 인사 중 김규식(金奎植)만이 호의를 보였다.

민족유일당 운동과 독립운동 단체 통합 운동

1934년부터 민족유일당 운동이 확산됨에 따라 그는 윤세주 등과 협의하에 통일동맹 회의에 참가를 결정한다. 1935년 2월에 열린 통일동맹 제3차 대표회의에서 의열단 대표로 참석한 김원봉과 윤세주 등은 유일당 결성을 강력히 주장하여 여러 대표들로부터 대체로 찬동을 받아냈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인 한국독립당이동녕, 김구 등 일부 반공적 민족주의자들은 신당의 건설이 의열단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고 의열단은 사회주의자들의 집합체라며 참여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한독당의 이사로 참여하고있던 백연 김두봉(약산의 장모 김명년의 사촌오빠로 처5촌 아저씨)이 끈덕지게 설득하여 마침내 한국독립당조소앙, 지청천 등이 1935년 5월의 신당 결성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김구, 이동녕 일파는 끝까지 참여를 거부한다.

민족혁명당 결성
김규식, 조선민족혁명당의 당수였다.
조선의용대 대장 재직 중

1935년에는 김규식(金奎植)의 민족유일당 운동에 동참하여 민족혁명당을 결성한다. 구 의열단 단원들이 주류를 차지하여 당내 실력자가 되었으나 김원봉은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통합을 위해 당총재 직을 김규식에게 양보하였다.[17] 그러나 그의 민족유일당 결성을 장준하는 부정적으로 평하였다. '김약산은 그때 김규식 박사를 당수로 업고 이끌고 있는 조선민족혁명당의 부당수로 있기는 했으나 이미 판에 박힌 공산분자의 한사람이었다. 아마 연립정부 내각에 참여하기 위해서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했던 것 같다.[18] 는 것이다.

1936년 6월 최창익 등 50여 명은 조선민족혁명당을 탈당한다고 선포하고 조선청년전위동맹을 창건하고, 최창익이 위원장이 되었다.[19] 그해 최창익전위동맹 본부를 한커우(漢口) 옮겼다. 그러나 다시 김원봉과 협력하게 된다.

1937년 김원봉은 일시적으로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의 정탐이 파악한 동향은 일본의 정보기관에 그대로 보고되었는데 당시 보고에 의하면 김원봉은 자신의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임시정부보다는 장쉐량 일파에게 더 많은 자금을 받고 있었다고 보고하였다.[20][21] 1937년 7월 10일, 중화민국 정부의 초청으로 피서지이자 중국 고관들의 회의장소인 난징 서쪽의 루산(蘆山)에 초대되었다. 루산에는 김구 등이 와 있었다. 초대에서 중국 정부측 대표자는 일본을 상대로 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귀환하기 전 중국 정부 대표자로부터 사명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거액의 자금을 지원받았다.[22]

민족혁명당 내 내부 갈등

지청천

민족혁명당은 민족통일전선을 강령으로 내세웠으나 헤게모니 문제, 그리고 중국 국민당으로부터 받는 지원금 문제로 김원봉파와 지청천파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37년 7월 3일 당의 기관지인 '민족혁명'3호 에 민족혁명당기(黨旗)를 실어야 자리에 의열단의 단기가 게재되는 실수를 지청천이 문제삼게 되자, 이때부터 당기 문제로 지청천파와 갈등이 깊어지고 지청천파 사람들이 사회주의자를 비판하게 되자 마침내 지청천을 당에서 제명시켰다. 이어 조소앙 일파도 민혁당을 탈퇴한다.

그해 7월 민족혁명당의 산하단체로서 그의 부인 박차정의 주도로 '남경조선부인회'를 설치, 산하기관으로 두고 부녀의 특수이익을 위한 부분적 투쟁은 전국적 민족해방운동과 보조를 같이하는 차원에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전조선 부녀대는 총단결할 것,민족혁명전선에 무장참가할 것' 등의 구호를 내세우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민족혁명당은 자금을 중국측의 지원에 크게 의존하였지만 때로는 중국에 진출해 있던 일본이나 영국 등 열강의 자본가들, 조선인 매국노들, 부자들의 재산을 털어서 보충하는 한편 때로는 교민들의 지원금과 모금, 청부일을 하여 조달하는 등 경제적으로 궁핍한 생활을 하였다.

독립운동 내부 갈등과 사회주의자들의 집단 이탈

최창익

1937년 최창익, 운암 김성숙 등과 함께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여 연대하였다. 그는 당의 강령을 세워 1)중국 관내에 계급적 토대가 없기 때문에 계급을 대표하는 정당이 되어서는 않되며, (2)구성원 모두는 일본 제국주의의 타도와 민주공화국을 건설하겠다는 강령이 동일하므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이념적 구분을 없애야 하며, (3)중국내 공작 및 그 배경이 동일하므로 국민당 지구내에서 대일 군사작전에 종사해야 하고, (4)중국내 각 단체 구성원의 상황이 근사하고 각 단체의 성질과 공작이 동일하기 때문에 결코 계급정당이 될 수 없다.며 통일전선정당을 유지 강화하려 하였다. 그러자 최창익민족혁명당은 계급정당이 되어야 하고 통일전선은 당 밖에서 일종의 전선 형태로 이루어져야 하며, 항일전선의 선명성이 강한 화북과 만주로 나아가 직접 일본군과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여 계속 대립하게 되었다.

1938년 5월 다시 충칭으로 돌아온 최창익에게 재무한조선청년전시복무단의 지휘를 맡기도 하였으나, 최창익은 전위동맹 조직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와 협상을 추진했다. 그러나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 관계를 가지고 대일선전전에 주력하는 입장을 고수했고, 최창익은 그가 부르주아와 결탁한다는 이유를 들어 그와 의사충돌 뒤 결별하고 화북으로 가게 된다.

군사단체 재건 노력

난징에서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의 필연성을 감지하고 그날을 대비하기 위하여 조선인 무장부대(나중에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자 했다 조선인무장부대의 창설은 조선인들의 긍지를 더 높일 뿐만아니라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조선 국내와 해외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조선인들의 항일의지를 발동시키기고 나아가 조선인이 강제 동원되어 있던 주중 일본군대 내부를 분열시킬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군관학교 출신자를 100여명 보유하여 인적자원도 어느정도 확보 되었고, 주변 여건이 조선인 독자 무력의 건설을 절실히 요구하는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하여 이를 적극 추진한다.

1938년 7월 7일 “조선무장부대 건설계획(안)을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에 제출하여 무장 부대 편성을 허락받는다. 그는 조선인 무장부대를 만들면서 김구가 이끄는 광복단체연합회측에 함께 참여할 것을 제안하였지만 광복단체연합회측은 거절 하였으나 최창익이 이끌던 전위동맹측은 경제난으로 독자생존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민족혁명당에는 재입당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붙여 무장부대에 참여할 의사를 표시해 왔다.

중국 군사위원회가 승인한 조선인 부대는 정식 전투부대가 아니고 중국의 항전을 보조하는 부대 정도급의 수준이긴 하였으나 약산의 황포군관학교 은사이자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 부부장인 주은래의 적극적인 협조에 힘입어 1938년 10월 10일 무한에서 역사적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그를 총대장으로 추대하였다. 결성식에는 조선인들뿐 아니라 중국의 군,정 관계요원들이 많이 참석하였다.[23]

조선의용대 재 조직

1938년 10월에는 훈련해온 청년들을 규합하여 중국 한커우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 산하에 항일 군사 조직인 조선의용대를 조직, 편성하여 대장에 취임했다. 당시 조선의용대는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는 대원들이 많았으므로 선무공작 즉 선전 업무를 맡아 일본군에게 전단를 배포하고 확성기를 이용한 방송을 했다. 1939년 5월에는 김구 등과 전국연합전선협회를 결성했고, 민족유일정당 결성에 합의하여 7당통일회가 열렸으나 결국 우익 인사로는 김규식만의 호응을 얻었을 뿐,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의 부정적, 소극적인 반응 때문에 민족혁명당에 의한 민족유일당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부대는 총대와 2개 지대로 편성되었는데 그는제1지대와 제2지대장에게 각각 군기 하나씩을 수여하자 대원들은 그 군기 밑에 서서 일본군 섬멸을 다짐하였다. 76명의 민족혁명당원으로 구성된 제1지대는 의열단 때부터 함께 활동했으며 황포군관학교 4기 동기생이자 현역 중국 국민당군 대좌 박효삼이 지대장을 맡고 왕통이 정치지도원을 맡아 중국군 제4전구(광서성 방면)와 제9전구(호남성을 중심으로 호북성의 양자강 이남과 강서성 서북부에 주둔)에 들어가 활동하기로 되었고, 73명의 전위동맹 소속원들로 구성된 제2지대는 성자군관학교 소대장이였던 이익성이 맡고 정치지도원에는 임평을 임명하여 중국군 제1전구(하남성 전역, 안휘성 북부 일부)와 제5전구(호북성 북부, 하남성 남부, 안휘성 서부지역에 주둔)에서 활동하도록 임무가 부여 되었다. 조선의용대 최고사령부의 지도원으로는 이춘암, 김성숙, 유자명, 최창익이 추대되었고 부대장에 신악,정치조장에 김학무, 학무조장에 이집중, 훈련소 주임은 김원봉이 겸임하였다. 그 외 부녀봉사단 단장에는 그의 부인 박차정이, 3.1소년단 단장은 당시 17세였던 최동선이, 의무실 주임은 한금원을 임명했고 편집위원에는 이두산을 임명하여 월간 잡지'조선의용대', 계간 잡지 '조선의용대 통신'을 발행케 했다.

조선의용대가 창설되던 바로 그 시기에 일본군 25개 사단 약100만명의 병력이 중국 내륙의 거점 도시인 무한,한양,한구 등 소위 무한삼진지구를 향하여 진격하자 조선의용대는 창설 즉시 중국군과 함께 무한방어전에 참여하였다. 대원의 수가 많지 않았으므로 직접 전투보다는 선전, 전술, 홍보와 포로교화 등에 보조하게 된다. 비록 그가 총대장이었지만 총 지휘권은 중국 국민당에 있었고, 그는 국민당군 최고사령관 장졔스의 지시를 받아야 했다.

중국 국민당군 지원 활동

10여일 동안 참전한 무한방어전에서 의용대원들은 자기가 덮고 자던 흰 이불속을 뜯어내 만화 표어 등을 써서 선전사업을 펼쳤고, 먹을 것이 없으면 의복까지 팔아서라도 하루에 한끼정도 겨우 배를 채우면서 거리에서, 극장에서, 역전에서, 선전고무사업을 하여 무한 시민들에게 항일투쟁에 일어서라고 호소하는 활동을 계속했다. 전세가 악화되자 국민정부의 당,정,군, 요인들 마져 모두 무한을 빠져나갔다. 이들이 통보도 없이 무한을 탈출하자 무한이 함락되기 3일전인 1938년 10월 22일 김원봉은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무한을 떠났다. 이어 박효삼의 제1지대는 제9전구인 장사지역으로, 이익성의 제2지대는 제1전구인 낙양지역으로 철수하고 김원봉은 민족전선 및 의용대 본부를 이끌고 제4전구인 광서성 계림으로 퇴각, 1938년 12월 3일부터 계림시 동령가 1호(현,칠성공원 자리)에 조선의용대 본부가 자리 잡게 되었다. 중국군에 배속된 각지의 조선의용대원들은 진지에서나 적후에 들어가거나를 막론하고 포로를 교양하고 적을 와해시키는 사업에 참여했으며 군과 민을 고무하는 항일 홍보활동을 계속하였다.

특히 포로교양 사업에 있어서 그 성적이 뛰어났는데 교양을 거친 많은 일본인 포로들은 의용대를 떠나지 않고 그림을 그리거나 표어를 쓰거나 참호에서 고함지르는 연습(喊話)을 하는 등 일본군을 와해시키는 사업에 큰 기여를 하였다. 조선의용대가 창설이후 2년이 되는 1940년 하반기까지의 사업실적을 보면 진지상 대적 공작으로 적진의 200~300m에서 최고 50m까지 접근해서 '염전반전정서([24] 厭戰反戰情緖) 공작'을 벌이고 반전가극을 공연하였으며, 직접 전투에 참가하여 유격전 반소탕전,통신 및 철도 파괴공작에 참가하였고,한,중,일문으로 책자 5만여권,전단 50여만장,표어 40여만장, 적의 통행증 1만여장을 위조하여 살포하였다.

이어 자진 귀순자들과 적의 포로 50여명을 교육하여 의용대에 편입시키고 75명을 훈련시켰으며 122명을 심문하였고 적의 문건 95만자를 번역하였으며 6만여명의 대적 선전요원을 교육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의용대 세력 확장과 김두봉 일파의 이탈

1939년 말에는 제1지대 일부 인원과 일본군과 학도병 귀순자를 포함한 신입대원을 합쳐 조선의용대 제3지대를 창립시켰는데, 최고사령부 100명, 제1지대 78명(지대장:박효삼), 제2지대 75명 (지대장:이익성), 제3지대 63명 (지대장:김세왈) 등 320여 명의 대원을 새로 확보하여 창립당시 76명 보다 약3배 가량 인원수가 불어났다. 조선의용대를 창설할때부터 그의 목적은 독자 무력으로 성장하여 우리의 군대로 일제를 섬멸하겠다는 것이였는데, 창설된 이후 2년동안 많은 공적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의용대가 중국의 각 전구에 분산 배치되어 있어 독자적 무력으로 발전하는데 한계가 있고, 지휘권은 국민당군에 있으며, 인원수도 소수였고, 활동지역이 주로 국민 정부군의 작전 지역 내의 일선 진지로 국한되어 적후 공작이 초보적 수준에 머물러 그 성과가 미미한 점을 고충사항으로 접하게 된다. 이어 국민당 정권의 소극적 항일이 대원들의 불만을 초래하였으며 의용대가 정식 부대로 성장하려면 무장대오를 증대시키는 일이 절실한 문제인데도 조선인들이 별로 없는 화중지방과 화남지방에서 활동하므로서 무장대오를 늘릴 수 가 없는 것이 대원들의 불만이자 문제점이었다. 계속된 불만을 접한 김원봉은 이러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기 위해 조선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화북지방이나 만주로 진출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1940년 저명한 독립운동가이자 한글학자였던 김두봉이 자신의 첩이 다른 아나키스트 김진익과 불륜, 임신한 사실과, 상하이 임시정부내 보수주의자들과의 갈등으로 임정 참여를 거부하고 연안으로 떠나자 최창익은 우리도 떠날 때라며 전시복무단원은 물론 조선의용대내 사회주의자들에게도 함께 화북으로 가자고 연락하였고, 각 소대 내 사회주의자들이 이탈하여 최창익일파를 따라갔다. 최창익 일파는 화북으로 가겠다는 서신 몇장만 남기고 떠났으므로 막지 못했고, 조선의용대의 세력은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광복군과의 경쟁

1940년 9월 김구한국독립당 특무대라는 당군을 확장, 임시정부 산하에 광복군을 설치하여 탈영병과 학도병, 만주군 탈영자 등 의 청년들을 많이 끌어들이는 한편, 의용대 분열공작을 취하는 것과 소속원 속에 있는 사회주의자들이 의용대 내부에서 분파투쟁으로 고민하게 되었다. 그는 의용대의 중심을 화북으로 집결시켜 적후방 유격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의용대도 단결시키고 지도력도 확고해 질 것으로 판단하고 1940년 11월 4일 중경에서 개최된 조선의용대 확대간부회의에서 의용대를 화북으로 북상시킬 것을 결정하게 되었다.

1차로 화북으로 이동하는 부대의 지대장을 박효삼이 맡고 정치위원에 윤세주, 두 부지대장을 이춘암과 김세광에게 인솔케 하여 조선의용대 1.3지대 혼성지대를 편성, 1941년 1월 1일 화북을 향하여 민생호 기선에 태워 전송하였이였다. 전선에 있던 제2지대도 지대장 이익성에게 무전 연락하여 인솔하여 낙양 방향으로 이동하게 했다. 이로써 의용대 사령부를 제외한 전 의용대원이 북상을 시작하게 되었다. 선발대로 최채와 이근 등이 이끄는 일부를 5월에 보낸 뒤 결과가 좋자, 충칭을 출발하여 만현, 노하구, 뤄양, 맹진, 임현, 섭현을 거쳐 팔로군 관할 지역인 태항산지역에 7월에 도착한 조선의용대 1.3 혼성지대와 제2지대는 하북성 요현 동욕진 상무촌에 있는 홍복사터에 주둔하며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명칭을 변경하고 지대장은 박효삼, 정치위원은 윤세주로 하여 마전에 있던 팔로군 제18집단군전방총사령부의 보호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화북으로 간 조선의용대지대는 무정, 김두봉 등과 함께 활동하면서 김원봉과의 연락, 관계는 점차 소원해졌고 이로써 그의 세력은 몰락하고 만다.

화북지대가 완전히 이탈한다면 민족혁명당의 당세는 형편없이 약화될 것을 예상하였다. 또한 의용대 일부의 화북행은 임시정부반공주의자들과 국민당내 반공주의자들로부터 의용대 역량을 팔로군에게 넘겨주었다는 공격과 공산주의자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게 되면서 그는 인하여 자신이 직접 화북으로 가서 지휘권을 확보하고자 중경에서 중국공산당을 대표하고 있던 저우 언라이에게 화북행을 신청하였다. 그러나 저우 언라이는 "충칭에 머무르면서 혁명운동을 위해 더 좋은 일을 하라"며 그의 화북행 요청을 거절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합류

임정 합류 결정과 내분
김구, 김원봉은 임정 입각 이후 임정의 주도권을 놓고 김규식과 함께 김구에 대항하였다.

그러다 1940년, 3개 지대 중 2개 지대가 중국 공산군이 집결하고 있는 중국 화북지역으로 이동하여, 의용대 사령관 김원봉의 지휘하에서 이탈하자 김원봉의 힘은 급속도로 약화되었다.[25] 여기에 김원봉은 사상 이념을 떠나서 조선의용대와 임정세력과 합작을 할 것을 제의했으나, 임정내 보수세력 우파김구와 대립하였다. 1939년, 김원봉이 한국독립당과 통합논의를 제의했으나 임정내의 보수세력들의 반발로 인해 성사되지 못하였다. 임정내에서 반발했던것과 마찬가지로 민족혁명당내 일부에서는 기존의 단체를 연대하는 것에는 찬성하나 기존의 조직을 해체하고 새로운 당을 만드는 데는 찬성할 수 없다고 반발했던 것이다.[26]

김성숙은 '김원봉 일파는 김구 일파와 크게 대립했다'고 증언하였다. 김성숙에 의하면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의 군벌은 강택파로부터도 지원을 받는다'고 하였다. 김성숙은 김구는 중국 국민당의 진과부-진립부 계열의 지원을 받고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의 군벌은 강택파의 지원을 받는 것도 경쟁관계를 부추긴 것이라고 보았다.[27] 김원봉은 자신이 임시정부에 들어가도 대접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반대하였다.[27] 그러나 김성숙은 김원봉에게 임시정부에 들어갈 것을 주장하였고, 김원봉은 이를 반대하여 대립하게 되었다. 그 뒤 조선민족혁명당 사람들이 화베이의 연안으로 건너가자 김원봉은 더욱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27] 아나키스트 김진익김두봉의 첩과 불륜관계를 갖고 임신시킨 것도 민혁당 당원들이 임정에 악감정을 갖고 화베이로 이탈하는 원인이 되었다. 최창익 일파 외에도 김원봉의 오른팔격이었던 박효삼 일파 등도 이탈하여 화베이로 건너갔고 조선의용대민족혁명당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조소앙삼균주의를 채택한 후, 〈동지 동포에게 고함〉(1939년)이라는 성명서를 김구와 공동 명의로 발표하였다. 이후 한국 광복군에 참여를 결심하였는데, 이 때문에 당내 공산주의계열의 반발이 컸다. 그러나 1941년 6월 조선민족혁명당은 제6회 전당대표대회에서 임시정부 참가를 결의했고 '조선의용대'도 광복군 제1지대로의 편입에 동의하였다. 여기에 반발한 남아있던 일부 사회주의계열은 조선의용대에서 이탈, 화북김두봉·무정이 이끄는 조선독립동맹을 찾아갔다.

임시정부와의 갈등
이승만, 임정 주미대사인 이승만은 그의 임정 참여와 광복군 참여를 반대했다.

국민당 측의 임정 입각 요청을 받아들일수 없었던 그는 임시정부가 문호를 개방하여 각 당파들을 흡수, 재개편하지 않으면 중국 측에서는 임시정부를 승인해서는 안 된다며 국민당 측에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말 것을 요구하여 국민당으로부터 동의를 얻고, 1941년 10월에 열리는 제33차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 회의에 참여하려 하였다.

그러나 한독당임정 세력은 민혁당의 참여를 저지하기 위하여 건국강령을 결정, 공포하는 등 많은 방해를 해 왔으나 중국 국민당 중앙당부측이 경제적으로 한국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차관의 지불 조건 등을 이용하여 의용대를 광복군에 편입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자 김원봉은 다시 의용대가 광복군에 흡수 통합할 수 없으니 의용대광복군을 똑같은 조건으로 합병하여 "조선혁명군"을 만들게 하자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국민당에서 그의 요구를 거절하므로 하는 수 없이 1941년 5월 조선의용대 최고사령부는 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되었다. 이로써 김구 등을 찾아가 광복군에 편입하고, 김원봉은 광복군 제1지대장이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합류와 광복군 활동
광복군 사진

1942년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이 되었다. 광복군 부사령관으로 취임하였으나 이 시점에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야당인 조선민족혁명당의 지도자로서, 여당인 한국독립당 당수인 임정 주석 김구와 끊임없이 정쟁을 벌였다.[28] 1942년 7월 중국 화북에서 '조선독립동맹'이 창설되자, 민족혁명당과 의용대의 대원들 일부는 김원봉의 곁에서 이탈하여 독립동맹으로 건너갔다.[29] 1942년 6월에 윤세주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김원봉은 매우 충격이 컸다고 한다. 충칭으로 거처를 옮겨온 약산은 부인 박차정과 함께 중경의 강남에 해당하는 남안(南岸)에서 살았다. 그러나 1943년박차정은 총상 후유증과 관절염, 화류병 등의 여러가지 병을 앓다가 사망하였다.

부인 박차정

1942년 한국 광복군 부사령관이 되었고, 임시 의정원 의원으로 참가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내에서 그의 위상은 내실이 없었는데,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을 김구 중심의 민족주의 우파계열에서 장악을 하고 있었고, 중국 정부는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 그리고 이청천의 광복군을 원조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하지만 김원봉은 좌절하지 않고 중국공산당과 우호관계를 지속하고 미국과 영국 연합군과 관계를 강화하여 민족혁명당 독자적으로 협력하였다. 한국독립당과 광복군사령부는 민족혁명당과 미와 영이 협력하는 것을 달가와 하지 않았으나 민족혁명당은 1942년에 두 명의 대원을 인도에 파견하였고, 1943년 5월 영국군과 12개조의 협정을 맺어 협력을 하였다.[30] 1944년 5월 8일임시정부 제38차 회의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의원 겸 군무부장에 선출되었다. 김구 일파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으나 임정 내에서 총기도난사건이나 공금유용사건 등이 일어나자 부득이 민혁당과의 연립내각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원봉은 한국 광복군과 화북지대에 있는 조선의용군이 합작하여 하루빨리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할 것을 김구,김규식에게 수 차례 제안했으나, 임정 내 보수세력들은 '사회주의자들과는 연탁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31][32] 또한 구미위원부 위원장이승만(李承晩)은 수시로 김구이시영, 조소앙에게 전화와 전보, 서신으로 공산주의자를 임정에서 축출하라며 압력을 행사했다.

일본군 탈영병 유치, 세력 확장 노력

중일전쟁 이후부터는 일본군에서 탈출하는 학도병을 보다 적극적으로 영입하였다. 또한 1940년 조선의용대의 일부가 김두봉, 최창익, 박효삼 등을 따라서 옌안으로 가버리면서 세력이 약화되자 김원봉은 탈영자들의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여러 학도병과 탈영병을 영입했는데, 그 중 1944년 시안에서 탈출한 장준하, 김준엽 등 50명을 광복군 제1지대로 받아들이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는 사람을 보내 장준하 일행이 떠나는 것을 막으려 했다.

탈영하여 노하구까지 왔던 이들이 충칭으로 떠나려 하자 제1지대의 한 중대장을 통해 이들의 이탈을 막으려 노력했다. 설득의 내용은 '노하구에 계속 머물러서 제1지대를 보강하자는 것이었다.[18]' 그러나 장준하 등은 거절했다. 장준하는 이를 두고 '청년동지 50명을 결속시켜 노하구의 기반을 확고히 하겠다는 야심인데, 이것은 실상 임정의 김약산의 속셈이었다. 이 대장이라는 사람을 통해 김약산은 그의 독자적인 세력을 확장 구축해 보려고 공작을 편 것이다.[18] 라고 했다. 일행의 포섭이 어려워지자 미인계까지 쓰기도[33] 하였다.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확신했던 장준하는 그가 충칭까지 비행기편을 주선해준다는 약속 조차 의심했다. '우리에게 애호와 지나친 친절을 베풀고, 헛된 약속으로 비행기편까지 알선해주겠다는 허풍은 전부 그들의 수작.[18]'이라 했다.

한편 그는 의용대를 탈퇴하고 연안으로 떠난 동지들과도 꾸준히 연락하였다. 이범석은 '김약산 일파는 자기세력 확충에 혈안이 되어 옌안(延安)과 내통을 하고 있[34]'다고 하였다.

이청천과의 갈등

장준하
(그는 장준하를 영입하려 했으나 거절당한다.)

1944년 중화민국군으로 있다가 충칭대한민국임시정부로 건너온 장준하 등을 다시 영입하려 했으나, 장준하는 김원봉의 영입 노력을 거절하였다. 뒷날 장준하는 '그가 미인계를 써서 현혹시키려 했다.'고 비판하였다.[35][36][37]

그는 자원징집 또는 강제징집으로 일본군으로 입대, 일본군에서 탈출한 한인을 적극 영입하려 하였는데, 장준하는 그의 책 돌베개에서 그가 일본군 출신 한인들에게 임시정부광복군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이소민 등을 파견하여 인척인 일본소위 출신 황용주 등을 끌어들이려 한다고 보았다.[38] 장준하는 그가 계략을 써서 일본군 출신 한인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광복군에 대한 불신임을 조장한다 하여 이소민 등에 대한 자료를 이청천에게 보고하였다.[38] 이청천은 광복군을 직접 사열하였다.

광복군 일부의 횡포가 계속되자 김원봉은 이를 이용하려 했다.[39] 임정과 광복군에 대한 불신작용을 일본군 출신 부대에 가했다.[39] 45년 10월 7일 충칭의 광복군 사령관 이청천상하이로 왔는데 일본군 출신 부대는 사령관 이청천에 대한 사열을 거부하였다. 장준하 등은 그들 가운데 모 장교, 모 장교 등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이 문제에 대한 의논을 시작했다.[39] 후일 장준하는 이를 두고 '의논을 시작했지만 실은 회유작전이었다.[39]'고 하였다.

광복 직전

부인 박차정을 사별한 약산 김원봉은 1945년 1월 민혁당 중앙감찰위원장이었던 우강 최석순의 맏딸 동선(東仙, 일명 최동옥(崔東玉))과 결혼하였다. 주례는 특별히 임정 주석인 김구가 맡았다. 그해 말에 아들 김중근(金重根)을 낳았다.

한편 광복군 내부 갈등이 지속되면서 장준하 등은 김원봉의 계획을 알려주고 그 대리인노릇을 했던 책임자 황모와 이소민에 대한 자료를 주어 그들을 불신임시켰다.[39] 설득은 주효했고 이청천이 직접 사열을 받게 되었다.[40] 이소민 등은 광복군 제1지대의 간부였고, 김원봉의 인척으로 일본군이나 학도병, 만주군 탈영자를 다른 곳에 알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광복군 1지대로 편입시키려 한 것도 모두 이청천에게 고하였다. 조선혁명당 시절부터 그를 안좋게 본 이청천과는 서로 갈등하게 된다.

실제로 김원봉은 '임정은 조선의용군과 합작을하여 국내 진공작전을 하루빨리 추진할 것'을 김구김규식한테 설득,제의하였고, 일제 패망이후 강제징집으로 일본군으로 끌려간 조선인 장병들에게 거처를 마련하는 한편, 고국으로 가는 배편을 마련하는등 강구 및 노력하였다.[41][42]

광복 직후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요인 귀국기념 사진.

이후 임시정부 군사부장을 역임하다가 1945년 8월 사천성 중경에서 광복 소식을 접하였다. 임정의 위상을 둘러싸고 국내에서 논란이 전개되고 있게 되자 충칭에 머물고 있던 김원봉은 임시정부는 하나의 독립운동 단체일 뿐이라며 당면 정책의 수립에 골몰하게 되었다. 그는상하이 임시정부가 연합국을 비롯한 세계 어느 나라로부터도 승인을 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쪽으로 진주해 온 미군정청으로부터도 인정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인민의 지지를 받는 정식 정부가 되지 못하리라는 예상, '앞으로 국내 인민대중의 자유로운 결단과 선택에 일임하여 민주원칙에 입각해 정권을 세우기 위해서는 임정 국무위원회는 총사직하고 임정의 잔무를 처리하는 기구' 즉 일종의 정권인수위원회 격인 '간수내각'(看守內閣)을 설치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김구 일파로부터 이것은 임정의 법통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안건이라며 강한 비난을 받고 무산되었다.

중국 체류중 10월 7일 전국군사준비위원회에서 여운형, 유동열, 이청천, 안재홍, 김동수 등과 함께 고문에 위촉되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귀국 직후인 12월 3일에는 전국청년단체동맹 전국대회에서 김일성, 여운형, 무정 등과 함께 명예대회장에 추대되었다.

국군은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군대가 되지 말고 이들을 배제한 옳은 노선 위에서 노동자, 농민, 근로 대중을 위한 인민의 군대가 되어야 한다.

전국군사준비위원회 결성 소식을 듣고 그는 급히 성명서를 전보로 보낸다.

해방 후 정치활동

독자 세력 형성 실패

광복 직후 상하이로 건너가 1개월간 머물렀다 되는데, 이곳에서 김원봉은 학병으로 징집되었다가 상하이에 머물고 있던 친척인 황용주(黃龍珠, 훗날 부산일보 주필을 역임)를 비롯해서 일본군 소속 조선인 병사 출신인 청년들 수십명을 귀순시켜 이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이 병사들의 대표는 황용주, 장경순(張坰淳), 민충식(閔忠植, 전 호주대사) 등이고 그들과 약6천명 가량의 한국인 사병들이 상해의 호강대학(湖江大學)에 머물고 있었다.

처음엔 이들에 대해서 약산의 휘하인 광복군 제1지대에서 이소민(李蘇民)이 나서서 황용주를 지대장으로 임명하고 광복군 제1지대 주호지대(駐湖支隊)라 이름 하여 이들에게 의열단의 투쟁을 부각시킴으로써 귀국 직후 민족혁명당의 부대로 만들어 가고 있었으나, 한독당측의 부대인 이범석의 제2지대와 만나면서 무산된다. 이범석의 제2지대는 서안에서 미국의 정보기관인 OSS의 협조로 훈련을 마치고 바로 지대장 이범석이 이끄는 대원들이 8월 18일 여의도 비행장으로 들어갔으나 일본군들의 저지를 받아 상해로 다시 돌아오자 이 주호지대를 찾아갔고, 그때부터 제2지대 대원 이였던 장준하(張俊河)와 김준엽(金俊燁) 등의 노력으로 이 부대는 이후 김구, 지청천 등이 상해로 오면서 광복군 사령관 지청천의 사열을 받으면서 그와는 멀어지고 만다.

황용주의 회고에 의하면 '약산이 상해에서 머무는 동안 그는 상해의 조선 청년들과 자주 어울렸다고 한다. 청년들을 상해의 명물인 두부찌개 주점으로 데리고 가서 술도 사주고 청년들과 새로운 민족국가 건설과 그 경영 방략에 관해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거나 청년들의 견해를 듣고 많은 토론을 나누기도 했다' 한다. 그에 의하면 김원봉은 대단한 호주가였다고 한다.

귀국

11월, 귀국 직전 그는 밀양 출신으로 정통 사회주의자인 안영달(安永達)을 만났다. 안영달은 그가 안광천, 김두봉, 최창익 등과 친하게 지낸 점을 듣고 그를 찾아왔다. 안영달은 김원봉의 사상에 대해서 정통사회주의자는 아닌 것 같지만 동조자 정도는 될 것으로 보고 자기의 경력, 활동사항, 생각 등을 솔직히 틀어놓으며 프로레타리아 혁명을 주장하였다. "향후 사회주의의 도래가 역사의 필연이고 우리도 그런 철저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강조하고는 특히 약산이 태항산(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팔로군과 함께 활동하였던 곳)을 거쳐 연안으로 가지 않고 남아 있었던 이유에 대하여 비난 섞인 추궁을 가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는 저우 언라이가 가지 말라고 했다며 대응하였다.

귀국 직후 김원봉은 황용주와 개인적으로 만나면 "안군은 머리도 영리하고 앞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할텐데, 너무 지나치다. 향후 혁명과제로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민주적인 정부도 만들고, 중요한 산업은 국유화해야 할 것 같으나 한국은 소련과는 사정이 다르고 소지주, 봉급생활자를 포함한 쁘띠부르조아층(中産層)을 혁명운동에서 제외해서는 안 된다"며 비롯 "조선 현지 사정은 잘 모르지만 항상 교조적으로 기계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비평했다 한다.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 제2진으로 귀국했다.[43] 귀국당시, 그는 고향 경상남도 밀양을 방문하였었는데, 당시 밀양에는 10만여 명 인파가 운집하여 그를 열렬히 환호하고 맞이하였다 한다. 1945년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내각이 발표되었을때, 김원봉은 군사부장으로 선임되었다.[44] 당시 귀국을 놓고 임정은 서로 이놈, 저놈 이라며 고성과 욕설이 오갔다.

민혁당 측에서는 한독당의 1진 귀국을 허용하는 대신 민혁당 위원장 김규식을 1진에 포함시킬 것을 요청했고, 한독당에서 이를 받아들임으로서 무난히 처리되었다. 그러나 김원봉의 양보를 후일 중차대한 실수라고 지적하는 의견도 있다.

광복 직후의 정치 활동

여운형, 여운형의 달변에 매료된 그는 이후 좌파 진영에 가담한다.

12월 3일 김원봉은 상하이(上海)에서 국민당 관계자와 전별하고 미군정이 보내준 비행기에 탑승, 신익희, 홍진 등 임정 환국요인 제2진과 함께 김포 비행장에 내리려 하였으나 기상악화로 눈발이 날리면서 전라북도 옥구군 군산비행장에 착륙하였다. 그러나 김포공항으로 입국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은 1진에 비교하여 호응이 없었다. 또한 비행기를 보내준 미군정도 그의 성향을 접하고는 냉담하게 대하였다. 바로 미군정이 보내준 군용 트럭을 타고 서울자유특별시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교통편이 나빠 불만이 터져나오자 결국 차를 논산에 정박하고, 다시 대전 유성비행장에서 비행기편으로 서울에 도착한다. 이후 충무로 2가의 한미호텔에 여장을 풀었다가 1946년초 김원봉은 따로 나와, 각처에 은신처를 마련해두고 옮겨다니게 된다.

12월 4일부터 이갑성, 조소앙, 안재홍, 신익희, 송진우, 김성수, 박헌영 등을 만났다. 이어 이여성, 백관수, 원세훈 등을 만나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정치관을 피력하였다.

12월에 귀국한 뒤 김원봉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별정치위원회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여 민족통합을 위해 좌익쪽과 협상을 해서 좌우합작 노선으로 갔는데,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문제안을 놓고 좌·우익의 대립이 첨예하게 발전하게 되면서[28], 한민당과 우익계열등 독단적인 행보와 임정의 파벌싸움등 지켜본 그는 실망감을 안게 된다. 이미 여운형(呂運亨)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민공화국이 조직되었는데, 그는 중앙인민위원 및 군사부장을 맡았다. 12월 말의 김구 등에 의해 주도된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처음에는 유보적인 입장이었으나 뒤에 송진우, 여운형, 박헌영 등이 미국, 소련 양국에 의한 신탁통치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찬탁으로 선회하자 김원봉 역시 신탁통치에 찬성한다. 이후 그는 우익 세력의 공적(公敵)으로 전락한다.

통일전선 수립 노력과 실패

해방 후 독립운동가이자 부인 박차정의 유해를 밀양에 안장하는 김원봉.

귀국 후 김원봉은 임정을 구심점으로 삼아 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을 추구하였는데, 걸림돌이 되었던 임시정부의 위상과 모스크바 3상회의의 산물인 신탁통치 문제가 46년 1월 큰 문제가 되자 김원봉은 이를 중재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좌익과 중도파는 임정을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고 우익은 반탁과 반공, 임정 법통을 고수하였기 때문에 그의 중재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결국 여운형, 박헌영과의 면담 후 여운형의 호쾌한 성격과 달변, '인분 사건'과 일제와의 격렬한 투쟁으로 유명했던 박헌영의 열정적인 항일 활동에 매료된 그는 좌파 진영으로 건너가게 된다.

1946년 1월, 김성수가 김원봉을 찾아가 민주의원에 협력할 것을 설득하였으나, 김원봉은 '좌우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라며 정중히 거절했다.[17] 이어서 그는 리극로(李克魯)와 함께 태고사에서 좌우 5당회의를 계획, 만남을 주선했으나, 우익청년단체의 습격으로 실패로 돌아가 버리자, 그는 1946년 2월 14일 임시정부를 탈퇴, 김성숙, 장건상 등과 함께 민족주의민주전선 준비에 가담하였다.

해방 정국의 정치 활동

민주주의 민족전선 활동
1946년 2월 민족주의 민주전선 회의장에서 연설하는 약산 김원봉
제1차 미소공위 환영 시민대회 집회에서. 왼쪽부터 김원봉,허헌,박헌영.

1946년 2월 조선공산당이 좌익단결을 위해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였는데 그는 2월 14일 민족주의 민주전선 중앙위원에 선출되고[45] 이어 5인의 공동의장에 선출되어 추대되어 활동하였다.[28]

민전 탄생 직후, 그는 지방순회단을 조직하고 1946년 2월말부터 3월초 까지 민전 결성을 경남 지방민에게 알리고 그 정당성을 홍보하며 민심파악 및 민전의 정당성과 자신의 존재와 주장을 홍보할 목적으로 부산, 마산, 창원, 울산, 진해, 진주를 순행하였다. 2월 25일에는 대구에 도착하여 만경관에서 개최된 환영식에 참여하고 26일 창녕을 거쳐 밀양에 되돌아왔다. 귀향하여 환대를 받은 직후 며칠 뒤 본처 박차정의 혈흔이 묻은 속적삼을 부산 동래 민중병원의 박문하에게 전달하고 유골은 밀양 부북면 제대리 송악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3월 1일 부산에 도착하여 민전 부산시위원회 주최 환영식에 참석하오 부산구덕공설운동장에서 3.1절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김규식의 탈당으로 온건우파가 탈당하면서 민혁당의 당세에 타격을 받게 되자, 6월부터는 민혁당의 정비를 하고, 8월 10일에는 민혁당 부산시지부를 결성, 박희병과 김동산에게 당을 맡기고, 13일에는 경남도지부를 수립해 김동산에게 지부장직을 맡게 했다. 이어 당세 확장을 위해 경남 지역과 전남 지역을 순회하였다.

박헌영과의 갈등과 대구사태

46년 7월 22일 모스크바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박헌영[46] 이 민전 협의회 석상에서 좌우합작에 반대하며 5개항을 제시했다. 민전 회의에서 좌우합작에 참여 여부는 표결로 결정되었다. 박헌영은 다수결에서 패배하자 5개항을 지지할 경우 합작을 지지하겠다고 제의했다.[47] 그러나 김원봉은 여운형과 함께, 박헌영의 5개항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들은 5개항 가운데 토지몰수 조항이나 행정권을 인민위원회에 이양하는 조항, 입법기구 수립 반대 조항은 곧 합작반대로 비춰질 수 있으며 우익 측에서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며 수정을 요구했다.[47][48] 그러나 박헌영은 이를 듣지 않고 단독으로 5개항을 발표한다.

그는 박헌영에게 소부르주아층을 포함시키지 않는다면 혁명은 성공할 수 없다고 강조, 설득하였으나 박헌영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46년 인민공화당을 창당하고 당수가 되었다. 여운형의 좌우합작노선에 일부 동조하면서도 좌우합작 운동에의 참여에는 소극적이었다. 해방 정국에서의 잇단 정치 테러가 발생하자 그는 수시로 거처를 옮기며 은신하였다.

10월대구 폭동이 발생하자 김원봉은 민전의 진상조사단장이 되어 단원들을 이끌고 대구로 내려가 조사하고 관계자들을 면담했다. 서울로 돌아온 직후인 10월 21일 성북경찰서에 소환, 경찰관에게 폭행을 당했다. 1947년 1월 그는 민전의 공동의장의 한사람으로서 국민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발표, 우리 인민대중은 전쟁범죄자와 민족배반자인 친일파들을 처단하지도 못했고 토지개혁도 실시하지 못했다며 개탄하였다.

1947년 8월 3일, 여운형 장례식

1947년 7월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였고, 구심점 역할을 해오던 여운형이 암살되자, 여운형의 죽음에 분노에 찬 애도문을 '광명일보', '노력인민' 등 좌익지 7월 25일자에 게재하여 '여운형의 유지를 받들어 미소공위를 성공시키자.'고 호소했다.[49][50] 여운형의 장례식을 주관했으며, 이후 그는 여운형의 복수를 다짐하였다. 그러나, 이후에 그는 우익세력과 친일파세력들의 테러의 위협에 시달렸고, 여러번 거처를 옮겨다녀야 했다. 47년 8월 12일 새벽 4시 서울의 그의 거처에 경찰들이 들이닥쳐 수색했으나 그는 이미 피신한 상태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에 참여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이후

좌우합작운동에는 소극적이었으나 1948년 2월 김구, 김규식의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개최 요구 발표가 있자 동참하였다. 김일성은 이를 수락했고, 이들은 함께 월북하게 된다. 1948년 4월남북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김구, 김규식, 박헌영, 리극로 등과 함께 남한측 정치단체 대표의 한 사람으로 협상에 참여, 4월 19일 참석자 8명의 수행원과 함께 북한으로 넘어가 협상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약산의 중경시절 비서를 지내고 상해에 살고 있던 사마로(司馬路)에게 보낸 편지를 살펴보면 “북한은 그리 가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남한의 정세가 너무 나쁘고 심지어 나를 위협하여 살 수가 없다”는 뜻을 피력하기도 했다.

귀환하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월북 인사가 되었고, 1948년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제2차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다시 개최하자 참여, 8월 25일에 북쪽에서도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해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고,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수립 후 내각 국가검열상이 되었다.

한편, 김구의 임시정부의 보수세력은 역시 그를 경계하였다.[28]

김원봉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잔류하게 된 다른 원인으로는 최용건과의 관련설도 있다. 중국에서 활동할 때 김원봉과 친분관계가 있던 최용건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3인자였다는 점이 김원봉이 월북하게 된 동기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최용건운남강무학교를 졸업하고 황포군관학교 교관을 거쳐 광주봉기에 참여했다. 황포군관학교 시절에 김원봉과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51] 이후 최용건은 동북항일연군의 지휘관으로 일제와 싸웠다. 최용건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이 수립되면서 부수상 겸 민족보위상 등을 맡는 등 내각의 2인자의 위치에 있었다. 이런 최용건의 관계가 김원봉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택하게 되는 데 일정한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51]'는 것이다.

5월 다른 연석회의 참여자들이 월남할 때 그는 월남하지 않고 잔류하였다. 이후 조선로동당의 당원이 되었다.[5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에 참여

파일:Northkoreank1.jpg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 김원봉(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선글라스를 낀 사람)

6월 김일성, 박헌영, 김두봉 등에 의해 황해남도 해주에서 열린 제2차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全朝鮮 諸政黨社會團體 代表者 連席會議)에 참석하였다.

1948년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선출되었고[45], 북한에 정권이 수립되면서 김원봉은 국가검열상에 임명되었다(9월 9일).[53]

1950년 6월 한국 전쟁때, 김원봉은 김일성의 정책과 남침에 반대한것으로 알려져 있다.[54] 1950년 12월 김규식이 납북도중 사망하자 동료들과 함께 그의 장례를 주관, 만포진 부근의 야산에 안장해주었다.

한국 전쟁 기간 중

한국 전쟁의 과정에서 그의 형제 4명과 사촌동생 5명이 보도연맹으로 몰리거나, 월북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대한민국 국군에 의해 총살당하거나 살해되기도 했다. 그 학살의 과정에서 동생 김봉철, 김학봉만이 살아남았다. 그의 아버지 김주인은 외딴 곳에 유폐되었다가 굶어 죽었다.[55]

한국전쟁 이후로도 그는 납북된 인사들(조소앙, 안재홍 등)과 함께 '스위스같이 중립국 평화통일을 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한국 전쟁 이후에도 약산은 납북된 민족진영 인사를 포함해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등을 구성하여 민족통일전선운동을 추진하였다. 이후 1952년 5월 내각 노동상, 1956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등을 지내면서 고위직을 거쳤다. 1957년 8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45] 1958년 그의 탄생 60주년을 기념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로부터 노동훈장을 수여받았다.[56]

북한에선 고위직을 받았으나 한반도의 중립국화를 주장할 정도로 ‘하나된 자주독립국’에 집착했다.[57] 그것이 화근이 돼 1958년 옌안파 와 함께 숙청[57] 되는 빌미를 제공한다.

실각과 최후

김두봉은 김원봉의 본처 박차정의 외당숙이었다.[58] 김원봉과 친분관계가 있던 그는 김원봉에게 "내 조카 차정이는 갔지만 약산은 언제까지나 내 조카사위"라고 언명하기도 했다.[58] 이러한 친분관계는 김원봉이 재혼한 뒤에도 이어졌다.

1957년 8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이 되었고, 9월에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올랐다.[45] 그리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중앙위원 및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직을 맡았다. 그러나 1956년 종파사건계기로 김일성(金日成) 비판을 제기한 연안파(延安派)가 숙청되면서, 그도 역시 1958년에 실각했다. 1958년 10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 부위원장직에서 해임되었다.[45]

1958년 11월 이후, 그의 행적은 강등되어 시골로 내려갔다는 설과 자살설, 총살설 등이 떠돌아 실각직후 곧바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 자세한 사망 시기나 경위는 알 수 없지만,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었을 가능성이 높은것으로 추정하고있다.[54] 일설에는 김일성이 '장개석의 국민당 사주를 받은 간첩, 종파주의자'라고 몰아붙혀 김원봉은 옥살이를 하게 되었고, 김원봉은 정치보위부 감옥에서 청산가리를 입에 털어 넣고 자살했다고 알려져 있다.[59][41][60]

상훈

인물평

운암 김성숙은 그를 가리켜 '약산은 좋은 사람이요, 능력은 별로 없는 사람이지만 사람은 굉장히 좋아요. 혁명 지조가 있는 사람이고, 그러나 학식은 없다.[61] 고 평하였다.

김성숙은 또 그를 가리켜 '굉장한 정열의 소유자였습니다. 동지들에 대해서도 굉장히 뜨거운 사람이었지요. 그는 자기가 만난 사람을 설복시키고 설득시켜 자기의 동지로 만들겠다고 결심하면 며칠을 두고 싸워서라도 모든 정열을 쏟아서 뜻을 이뤘지요. 그렇기 때문에 동지들이 죽는 곳에 뛰어들기를 겁내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까? 그만큼 남으로 하여금 의욕을 내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김원봉의 가장 큰 능력이었습니다.[62] 라고 평하였다.

가족 관계

두 번째 부인 박차정

첫 부인 최씨는 평안도 출신 여성이었고, 두 번째 부인은 유명한 여성 독립운동가로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단장을 지낸 박차정[63] 으로 1931년에 결혼하였으나, 1939년 장시 성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입은 총상의 후유증과 관절염 등으로 1944년 충칭에서 병사했다. 이어, 세 번째 부인 역시 조선의용대 출신의 최동선이다.[64] 최동선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 아들은 김중근(1945년~)이고 둘째는 김철근(1947년~)이다.[65] 북에 최동선이 낳은 그의 두 아들이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

남에서 가족들중 남동생들은 모두 보도연맹 사건으로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져있었으나 봉철씨(1918 - 1986)는 당시 생존하였다.

남에 남은 유일한 남동생 봉철씨는 4. 19. 혁명 당시 동생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밀양피학살자조사대책위원회에 참여하였는데, 이후 이를 이유로 박정희 정권 하에서 무고한 옥살이를 하다 1986년 사망하였고 2010년 유족들의 노력으로 인해 대법원에서 재심결정 및 무죄를 선고 받았다 (관련한겨례기사링크). 여동생 학봉(1932년~)씨는 여전히 밀양에 생존해 있다.

  • 증조모 : 윤씨
  • 할아버지 : 김철화, 조선시대에 역관을 지냄
  • 할머니 : 천씨(千氏)
    • 삼촌: 김주오
      • 사촌: 김태근(金泰根)
    • 고모 : 김해 김씨
    • 고모부: 황상규
  • 아버지 : 김주익(金周益. ? - ?)
  • 어머니 : 이경념(李京念, 경주이씨, 다른 이름은 월향, ? - 1901년)
    • 남동생 : 김경봉(金景鳳, 1901년 - ?)
  • 계모 : 천연이(千蓮伊, 영양천씨, ? - ?, 생 6남 1녀)
    • 이복 남동생 : 김봉철(1918년 - 1986년 )
    • 이복 남동생 : 김봉기(1921년 - )
    • 이복 남동생 : 김덕봉(1925년 - )
    • 이복 남동생 : 김구봉(1928년 - )
    • 이복 여동생 : 김학봉(1932년 - )
  • 서모 : 박순남(朴順南, 생 1녀 3남)
    • 이복 여동생 : 김복잠(1911년 - ?)
    • 이복 남동생 : 김춘봉(1909년 - ?)
    • 이복 남동생 : 김용봉(1916년 - , 일명 용웅)
    • 이복 남동생 : 김익봉, 요절
  • 처:최씨(崔氏[6], 화류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 처:박차정(朴次貞, 독립운동가·부녀복무대 단장이었으며 김원봉의 조선의용군의 간부로 활동, 1910년[66] 5월 7일 ~ 1944년 5월 27일)
  • 처:최동선(崔東仙, 조선의용대 출신 독립운동가, ? ~ ?)
  • 장인 : 최석진, 첫 부인 최씨의 친정아버지
  • 장인 : 박용한(朴容翰, 두 번째 부인 박차정의 친정아버지)
  • 장모 : 김맹련(金孟蓮, 박차정의 친정어머니, 처남 3명과 처제 2명이 더 있었음)
  • 장인 : 최석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민혁당 중앙감찰위원장 역임, 세 번째 부인 최동선의 친정아버지
  • 사돈: 최기일(崔基一[68], 1922년 ~ )
  • 처외당숙: 김두봉(金枓捧, 1889~1961, 한글학자 겸 정치가, 김두봉은 김원봉의 본처 박차정의 외당숙이기도 했다.[58])
  • 장인 : 최석순(崔錫淳, 최동선의 친정아버지, 최동선은 그의 장녀이다.)
  • 인척 : 김약수(金若水, 본명은 김두전, 김원봉의 죽마고우였던 김약수 역시 박차정의 외가쪽 친척이었다.)
  • 인척 : 윤희규(尹憘圭, 증조할머니 윤씨의 친정 일족으로, 그의 동지 석정 윤세주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 조카 : 김태조

연보

  • 1898년 경남 밀양 출생
  • 1911년 일장기를 변소에 버린 사건으로 밀양공립보통학교 자퇴
  • 1911년 동화학교에 편입학
  • 1912년 표충사에서 수도하면서 독학
  • 1913년 서울 중앙학교에 편입학.
  • 1916년 중국 천진 덕화학당 입학
  • 1918년 남경 금릉대학 입학
  • 1919년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 입학했다가 자퇴하고 길림에서 의열단 창단
  • 1923년 단재에게 ‘조선혁명선언’ 집필 부탁
  • 1926년 의열단원 나석주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 투척
  • 1927년 중국공산당 남창 봉기 참가
  • 1931년 박차정과 결혼
  • 1938년 조선의용대 창설하고 대장에 취임
  • 1942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조선의용군으로 개편
  • 1944년 임시정부 군무부장 취임, 아내 박차정 사망
  • 1945년 봄 최동선과 재혼
  • 1945년 9월 중국 체제 중 건준 임시내각 군사부장 취임
  • 1947년 수도경찰청 수사국장 노덕술에게 체포, 고문당함. 고문의 고통보다는 심리적 치욕을 느꼈다.
  • 1948년 월북, 남북연석회의 축사 및 사회, 협상 종료후 남한으로 귀환 거부.
  • 1948년 9월 내각 국가검열상 취임
  • 1952년 내각 노동상 취임
  • 1958년 회갑을 맞아 훈장을 받고, 10월에 숙청

사상과 신념

개인주의

김원봉은 베이징텐진, 상하이를 오가며 의열단 등의 활동을 지도, 지휘하였다. 그는 냉정한 성격이었고, 개인주의적이었다. 아리랑김산에 의하면 '그는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고전적인 유형의 테러리스트였으며 개인주의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잘 어울려 다녔지만 청년기 이후의 김원봉은 김약수, 이여성, 김두봉 등 소수를 제외하고는 별로 친하게 어울리지 않았다.

의열단의 동지였던 김성숙조선의용대김학철, 최재 등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굉장한 정열의 소유자였고 동지들에 대해서는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라 한다. 그는 말을 할 때 목청을 높이지 않고 차분하게 말하였으녀, 낯을 붉히거나 음성을 높이지는 않았지만 듣는 사람에게 와닿는 말을 하였고, 담담한 가운데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열정을 느끼게 했다 한다.

그는 언제나 조용히 지냈고 운동에도 잘 참여하지 않았으며 주로 혼자 사색하였다. 김산이나 김성숙 등에 의하면 그는 대부분 거의 말이 없었고 웃는 법이 없었으며, 도서관에서 주로 독서를 하거나 홀로 사색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미남형인데다가 깔끔한 외모를 가졌기 때문에 여러 아가씨들이 그를 좋아하였지만 그는 아가씨들을 멀리하였다.

그가 화류계에 자주 출입했다는 증언도 있다. 정화암은 그가 화류계에 출입했고 이때 얻은 병 때문에 본처 최씨와 두 번째 부인인 박차정이 죽었다고 증언하였다.

정화암에 의하면 '영웅호색이라고, 김원봉이가 원래 호색을 했거든요. 그래서 화류병에 만신창이였지요. 그래서 그 부인(본부인)이 완전히 화류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6] 김두봉의 조카딸(박차정)도 마찬가지입니다.[6]'라고 증언하였다. 장준하는 그가 젊은이들에게 술을 사서 먹이거나 미인계를 쓰기도[33] 했다고 하였다.

흥선대원군과 쇄국정책 비판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대한 부정적인 평을 내리기도 했다. 그는 반탁운동에 대해서도 이것을 흥선대원군의 쇄국양이에 비기고 "프랑스 함대와 미국 함대를 격퇴시킨 병인양요(1868년)와 신미양요(1871년)는 그 나름대로 민족적, 국수주의적 견지에서 통쾌한 일이었지만, 그러나 세계 저세에서 살펴보면 민족의 장래를 그르치게 한 어리석은 짓이었다.[69]"라는 것이다.

안전과 불신

그는 안전에 대한 염려가 강하였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나 귀국 이후에나 여러 곳에 은신처를 마련해두고 암살과 테러를 피해 비밀리에 움직였다. 또한 사진 촬영 뒤에는 원판과 필름을 회수해갈 만큼 주변 관리를 깨끗하게 처리했다.

논란과 의혹

공산주의자 논란

장준하는 그를 판에 박힌 공산분자의 한사람이었다[18] 고 지적했고, 평소 김원봉에게 적개심을 갖고 있던 민필호는 '교활한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였다.[28] 김원봉은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고 공개적으로 밝힌적이 있었다.[41][70] 그러나 민필호장준하는 그를 공산주의자로 지목했다.

또한 장준하는 '김원봉은 그때 이미 공산당 노선을 취하고 있었으며, 지금은 이북에 있다.[71]'고 했다. 그가 광복군 제1지대 시절 이미 공산주의 사상을 가졌다는 것이다.

일본군 출신 이간질 논란

일본군을 처음 탈출한 장준하 일행이 그의 포섭 노력을 거절하자 그는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장준하는 그가 동지들을 이간질하려고 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나 김원봉은 계속 사람을 보내 이들을 설득하려 했는데, 장준하는 김원봉이 일본군 탈영병, 학도병 무리 사이에 이간질을 획책했다고 한다. 장준하는 '김약산의 부하로 파견된 분견대장의 설득공작이 실패한 것을 알아차린 그들은 곧 우리에게 이간공작을 시작했다.[18] 는 것이다.

또한 장준하1945년 광복 직후에도 그가 이간질을 획책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광복군 대원들의 무지와 행패가 계속될 때 그가 이를 이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일본군 출신 부대로 하여금 임정이나 광복군에 대한 불신을 부채질하면서 그 어부지리를 노리는 김원봉의 계산이었다[39]'고 했다. 광복군 편입을 거절하고 버티던 일본군 출신 부대의 책임자 격으로 있던 황모에게 김원봉이 직접 이소민을 파견, 광복군 제1지대로 끌어들일 공작을 했다[39] 는 것이다.

또한 장준하는 '김원봉이 열심히 임정과 광복군에 대한 불신작용을 일본군 출신 부대에 가했다.[39]'고 진술했다.

암살과 강등 의혹

그의 최후에 관해서 여러 가지 설은 있다. 일본인 학자 가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는 '명예로운 은퇴를 했다'고 했고, 다른 설에 의하면 1958년 11월에 총살당했다고 한다. 대한민국에 간첩으로 남파되어 활동하다 전향한 소정자 등은 '강등되어 지방에 배치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1958년 11월 임정 파벌과 중국계열, 소련파 숙청의 틈바구니에서 '국제간첩' 혐의로 투옥후 처형 되었다는 설이 있다.

조선의용대원 출신 김학철은 자살설을 제기했다. 그에 의하면 김원봉에게 국제간첩 혐의를 뒤집어씌운 것은 사실이며, 혹자는 약산이 대동강에 투신하였다고도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기로는 체포된 뒤 감옥에서 자살하였다고 한다.

평가 및 비판

평가

1925년 2월 20일동아일보.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이 '독립운동에는 좌파우파가 합치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기고했다.

1925년 동아일보자 사설란에 '합치되는 두 운동'이라는 내용을 실은적이 있었는데, 김원봉은 독립운동에 대한 노선을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운동선상에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두가지 풍조가 나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근일에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하여 토론한 문자도 종종 보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나의 의견을 간단히 말하면, 우리 조선 사람의 처지로는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연락과 합동이 있어야 한다기 보다는 민족운동이 곧 사회운동이 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조선 민중의 생존번영 자유평등을 위하여 분토노력한다는 그 실질문제에서 두가지 운동이 다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만, 하나는 형식이 종족의 투쟁으로 나타나고 하나는 계급의 투쟁으로 나타난다 하여 두가지 운동의 차이점을 말할 수 있겠지요. (중략) . . . 즉, 이 두가지가 조선에서는 합치한다고 생각합니다.[72]

그리고 한가지 더 근거를 들자면 1945년 8월 광복 직후, 귀국 전에 중국 상하이에서 체류하고 있을기간 동안 일본군으로 강제징집 당했던 소위계급 황용주(뒷날 MBC사장)는 김원봉하고 오랜시간동안 얘기나눴다는데, 황용주에 의하면 '김원봉은 김일성의 무장항일투쟁을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는 김일성의 활동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회고하였다.[73]

무장독립투쟁에서 큰 활약을 했으나, 활약에 비해 남북한 양쪽의 평가는 낮은 편이다.

김산은 그를 고전적인 유형의 테러리스트로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며 개인주의적인 아나키스트적인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12] 김산에 의해 묘사된 그의 모습은 웃는 법이 없었고 도서관에서 독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12]

김규식은 '약산은 혁명가의 자질을 타고난 인물이자 지도자이지만, 정치적인 인물로는 입지를 못잡아 아쉬운 인물.'이라고 평가하였다.[41]

독립기념관장을 지낸 김삼웅은 '일제강점기 일제와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독립투사'이자, '김원봉에 대해서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삼웅의 말에 의하면 '김원봉은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남에서는 사회주의자로 평가했지만, 그는 사회주의자와 입장을 달리한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다. 또 김일성의 입장에서 보면 해방 후 박헌영 등 남로당을 숙청한 후 김원봉은 마지막 남은 라이벌 같은 존재였고 이 때문에 김원봉을 배제시켰을 개연성이 크다.'라고 말했다. 이어 "해방 후 친일파들로부터 신변에 위협을 느껴 망명하듯 월북했는데, 이를 이유로 독립운동 서훈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덧붙였다.[54] 하지만 과연 사회주의자냐 아니냐의 문제가 독립운동가의 평가에 영향을 미칠 만한 근거가 되느냐, 그리고 사회주의자면 독립운동자체도 낮게 평가받아야만 하는 필연적 논리가 성립되느냐는 문제자체가 근본적으로 제기될 수 있다.

최근 대한민국에서는 김원봉의 독립운동 경력이 인정되고 있는 추세로 교과서에도 실리게 되었다. 2005년2007년에는 김원봉의 여동생 김학봉씨가 김원봉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해 건국훈장을 수여해줄 것을 신청하고, 그의 독립운동활동에 관한 공적자료를 함께 대한민국 정부에 제출했던적이 있었지만,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김원봉이 1948년 남북협상 이후 북에 잔류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주요직에 있었다는 이유로 건국훈장수여를 불인정했다.[74]

비판

일본 학도병 출신으로 강제징집되었다가 탈영하여 중국군으로 합류, 한국 광복군에 편입한 장준하는 '김원봉이 학도병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미인계를 썼다'고 비판하였다.[35] [37][75] 장준하는 그가 '헛된 약속으로 허풍[18] 을 떨었다'고 비판했다.

한편 김구의 측근이었던 임정내 보수세력인 석린 민필호는 '김원봉이 사사건건 김구에게 대드는 것을 거슬리게 생각하였으며, 그를 교활한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였다.[28]

장준하 역시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지목, 비난했다. 장준하는 '비록 그가 김규식 박사를 당수로 업고 이끌고 있는 조선민족혁명당의 부당수로 있기는 헀으나 이미 판에 박힌 공산분자의 한 사람이었다.[18]

장준하는 그의 영입 노력 역시 비난했다. 김원봉이 자신들을 영입하려는 노력에 대해 '우리들의 중경행을 막으려는 수작을 부렸다.[18]'고도 비판했다. 또한 장준하는 '김약산은 그의 독자적인 세력을 확장 구축해 보려고 공작을 편 것이다.[18]'며 비판했다. 장준하는 그가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하는데 참여한 것의 진심조차 의심했다. '연립정부 내각에 참여하기 위해서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했던 것 같다.[18]'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의 평가

1990년대 초반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복권노력이 추진되었다. 1995년 본처 박차정이 건국훈장을 수훈하였으므로 김원봉의 건국훈장 서훈 노력도 추진되었으나, 국가보훈처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자발적 월북자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장관급 이상의 고위직을 역임하였다.' 하여 2005년 건국훈장 서훈노력은 좌절되었다.

그 뒤 사단법인 임시정부기념사업회(회장 김자동)와 여천 홍범도 기념사업회(회장 이종찬), 도마 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회장 함세웅) 등 항일운동기념단체 11곳이 주축이 돼 약산 김원봉의 독립운동 서훈을 추진하고있다.[76]

기타

고국에서 부쳐주는 소수 인사들의 자금 외에 중국 국민당의 지원금에도 의존했다. 또한 김원봉의 일파는 중국남의사(中國藍依社)라는 특무기관의 원조를 받고 있는 처지였다.[77]

46년 2월에 그를 본 어느 인사의 회고에 의하면 '축지법을 쓰고, 변장술에 달인이며, 왜놈을 응징하는 데는 쾌도난마(快刀亂麻)하는 항우나 관운장 같은 장군의 모습 정도로 연상하고 있었는데, 그가 처음 만난 약산의 모습은 165-170cm정도의 키에 눈에서 광채가 느껴지는 흠잡을 곳 없이 잘 생긴 얼굴, 손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한다.

1945년 9월 조선인민공화국의 군사부장에 선출되었다.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귀국 제2진으로 환국, 인공 내각으로부터 취임 요청을 받았으나 그는 인공 군사부장직에 취임하지도 않고, 거절하지도 않는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

이승만돈암장을 찾았을때 이승만의 비서였던 윤치영은 직접 간을 봐서 식사를 차려왔다. 김원봉은 윤치영이 해온 식사를 단숨에 해치웠지만 박헌영은 음식에 독이 들었을 것이라면서 끝까지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러나 식사를 마친 뒤에도 김원봉은 무사하였다. 1946년 2월초까지 줄곧 돈암장과 마포장의 이승만을 찾아갔으나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본 그는 더 이상 이승만을 찾아가지 않았다.

문화에 나타난 김원봉

뮤지컬

드라마

같이 보기

주석

  1. 증조모 윤씨의 친정 일가
  2. 후처 최동선의 친척
  3. 이 가명은 황푸 군관학교 생도생활 지냈을때, 일제 밀정들과 장제스 등으로 대표되는 반공주의 세력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사용한 가명이다.
  4. 뒤에 그의 호를 지어준 것도 고모부 황상규였으며, 의열단을 지원해준 것도 그였다.
  5. 약산 김원봉(이원규 지음, 실천문학사, 2005) 44페이지
  6. 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도서출판 민음사, 2005) 244
  7. 황상규는 그들에게 중국어를 익히고 중국인 친구들을 많이 사귀라고 주문하였다.
  8. 약산 김원봉(이원규 지음, 실천문학사, 2005) 111페이지
  9. 당시, 총독부는 신문을 검열하거나 보도 통제를 가했기 때문에 뒤늦게 보도된 것이다.
  10. 정해영, 《한권으로 끝내는 적중 근현대사》 (문예마당, 2007) 174페이지
  11. 송건호, 송건호 전집 15 의열단과 민족해방노선(한길사, 2002) 188페이지
  12. 이우탁《김구, 장보고, 앙드레김》(이우탁, 출판사 동아시아, 2006) 142페이지
  13. 이원규, 《약산 김원봉》 (실천문학사, 2005) 308페이지
  14. 난창 봉기 참여당시 그는 한때 포로로 붙잡혀 강제노역을 당하는등 죽을뻔한 고비와 시련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 -<약산 김원봉>, 이원규 지음.- 참고.
  15. 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도서출판 민음사, 2005) 115
  16. 이우탁《김구, 장보고, 앙드레김》(이우탁, 출판사 동아시아, 2006) 142~143페이지
  17. 약산 김원봉, 실천문학사, 이원규 지음.
  18. 장준하, 《돌베개》 (도서출판 세계사, 2005) 205페이지
  19. 시대의창 편집부, 《중국항일전쟁과 한국독립운동》 (김승일 역, 시대의창, 2005) 149페이지
  20.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1페이지
  21. 사상휘보 제14호(1938.3)(조선총독부고등법원사상부, 1938) 219~222페이지
  22.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0페이지
  23. 이날 군관학교 졸업생이 중심이 된 100여명의 대원들은 배지 하나씩을 받았는데 거기에는 한문으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라는 다섯글자와 영문으로"korean Volunteer"라는 글자 한줄이 새겨져 있었다.
  24. 전쟁을 싫어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감정을 갖도록 하는 것
  25.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7페이지
  26.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5페이지
  27.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8페이지
  28. 이우탁《김구, 장보고, 앙드레김》(이우탁, 출판사 동아시아, 2006) 143페이지
  29. 이종석 《조선로동당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7)》 (역사비평사, 2006) 234페이지
  30. 김삼웅, 약산 김원봉 평전 512쪽, 시대의창 2008년
  31. 약산 김원봉, 이원규 지음.
  32. 더구나, 한국광복군은 중화민국의 산하기관으로 소속되었기 때문에 김원봉이 제안한 뜻대로 이룰수가 없었다.
  33. 장준하, 《돌베개》 (도서출판 세계사, 2005) 254페이지
  34. 장준하, 《돌베개》 (도서출판 세계사, 2005) 291페이지
  35. 민족주의자의 길(장준하 저, 세계사, 2002.05.02) 140페이지
  36.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박경수 지음, 돌베개 출판사, 2006.11.30) 165 페이지
  37. (26) 파쟁 속의 망명정부
  38. 장준하전집 1 : 돌베개(장준하, 세계사, 2001) 94~95페이지
  39. 장준하, 《돌베개》 (도서출판 세계사, 2005) 328페이지
  40. 장준하, 《돌베개》 (도서출판 세계사, 2005) 329페이지
  41. <<약산 김원봉>>, 이원규 지음.
  42. 실제로 임정내 보수세력들은 '사회주의계열과는 합작을 할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발하고는 했다.
  43. 김원봉은 원내 제2당의 실력자로, 다른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1진으로 귀국할 수 있을 만큼 영향력이 있었으나, 귀국 순서를 놓고 한독당계와 민혁당계가 갈등하자 한국독립당에 1진을 양보하고 스스로 2진으로 귀국한 것이다.
  44. 1945년 9월~: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60쪽
  45. 김원봉 - Daum 백과사전
  46.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284쪽.
  47.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285쪽.
  48. 브루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김자동 역, 일월서각) 331페이지
  49.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51~52쪽
  50. 그는 실제로, 여운형이 수차례 정치테러로 신변의 위협을 느꼈을때, 직접 찾아가 신변을 보호하는 방법등 수 차례 조언 및 도와주었다고 한다. 그 만큼 김원봉은 여운형과 깊은 인연이 있었다. - <<약산 김원봉>>, 이원규 지음. 서적 인용.
  51. 김삼웅, 《약산 김원봉 평전》 (출판사 시대의창, 2008) 577페이지
  52. 김원봉 외에도 홍명희, 박헌영 등이 월남하지 않고 잔류했다.
  53. “김일성내각 組閣을 완료”. 경향신문. 1면. 
  54. "가장 치열한 항일투쟁, 김원봉 정당한 평가를"
  55. 김삼웅, 약산 김원봉 평전 584쪽, 시대의창 2008년
  56.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p144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텍스트가 없습니다
  57. 남과 북 모두에게 외면당한 혁명가 문화일보 2005.08.16
  58. 약산 김원봉(이원규 지음, 실천문학사, 2005) 574페이지
  59. "<박용배 칼럼> 김원봉과 나혜석"
  60. 조선의용대출신 김학철의 증언.
  61. 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도서출판 민음사, 2005) 100
  62. 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도서출판 민음사, 2005) 101
  63. 박차정은 근우회 간부 출신이자, 신간회 간부로 활동했던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64. 최동선은 김원봉의 비서로 지냈었다.
  65. 의열단장 김원봉 여동생 이산가족상봉 신청 연합뉴스 2001/02/08
  66. 1909년생 설도 있다.
  67. 그가 노덕술에게 체포되었을 무렵에 태어난 아들로, 철창에 갇혔다는 뜻에서 아들 이름을 철근으로 지었다 한다.
  68. 한국의 정치가이자 대학교수인 최기일은 후처 최동선의 친척이었다. 최기일은 그의 회고록에 자신의 친척의 딸이 임정 국방부장관 김원봉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언급하였다.
  69. 정경모, 찢겨진 산하 - 김구,여운형,장준하:구름 위의 정담 (기획출판 거름, 1986) 36페이지
  70.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autogenerated6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텍스트가 없습니다
  71. 장준하, 《돌베개》 (도서출판 세계사, 2005) 201페이지
  72. 1925년 2월 20일동아일보신문 1면 내용 참고.
  73. 약산 김원봉 평전, 김삼웅 저.
  74. 약산 김원봉 여동생, 건국훈장 수여 신청
  75. 장준하 - 민족주의자의 길(박경수 지음, 돌베개 출판사, 2006.11.30) 165 페이지
  76. 박영배 밀양의 영웅 약산 김원봉 선생 서훈을 촉구하는 진정서 청와대·보훈처 제출 계획 범시민 서명운동 전개 2007-07-12 작성 <뉴스 경남>
  77. 장준하, 《돌베개》 (도서출판 세계사, 2005) 252페이지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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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국가검열상
1948년 9월 ~ 195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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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승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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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택
제2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노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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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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