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하르트 오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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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하르트 오일러
(Leonhard Euler)
레온하르트 오일러의 초상화
레온하르트 오일러의 초상화
출생 1707년 4월 15일
스위스 스위스 바젤
사망 1783년 9월 18일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거주지 스위스 스위스
프로이센 프로이센
러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
국적 스위스 스위스
종교 개혁 교회(Reformed Church)
주요 업적 오일러 각도
오일러 경로
오일러의 공식
오일러의 네 제곱수 항등식
오일러의 다면체 정리
오일러의 등식
오일러-라그랑주 방정식
오일러-마스케로니 상수
오일러 방정식
오일러선
오일러 수
오일러 운동 방정식
오일러의 정리
오일러의 정리 (기하학)
오일러 지표
오일러 피 함수
코시-오일러 방정식
분야 수학, 물리학
소속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
러시아 제국 과학 아카데미
박사 교수 요한 베르누이

레온하르트 오일러(독일어: Leonhard Euler, 1707년 4월 15일~1783년 9월 18일)는 스위스 바젤에서 태어난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이다.

그는 스위스에서 태어나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그가 자신의 뒤를 이어 개신교 목사가 되길 바랐지만, 요한 베르누이에 의해 발탁된 후 그의 제자가 되어, 수학자의 길을 선택한다. 그는 함수의 기호 (1734년에 처음으로 사용)와 같은 수학기호 및 법칙들로 인해서 역사상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긴 천재 수학자로 기억된다.[모호한 표현]

또한, 오일러는 그 어떤 수학자들보다도 가장 많은 책을 저술한 것으로도 유명하다.[출처 필요]

생애

성장기

오일러는 스위스 바젤에서 목사인 아버지와 목사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3명의 아이들 중 첫째로 태어났다. 그는 바젤에서 태어났지만, 이사를 간 리헬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당대 최고의 수학자였던 요한 베르누이와 친분이 있었으며, 이것이 어린 오일러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일러는 바젤에서 정규 교육을 받았다. 13세에 바젤 대학교에서 입학 허가를 받았고, 1723년르네 데카르트아이작 뉴턴철학을 비교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에 그는 그의 놀라운 수학적 재능을 알아본 요한 베르누이로부터 토요일 오후마다 개인 교습을 받았다. 하지만 오일러가 목사가 되기를 바랐던 부친은 그에게 목사에게 필요한 여러 언어들을 배우게 했다. 그러나 요한 베르누이가 오일러는 위대한 수학자가 될 운명을 타고 태어난 사람이라며, 부친을 설득했다.

1726년음향전파를 다룬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727년에는 파리 아카데미 문제 풀이 경연에 도전하기도 했다. 여기서 그는 2등으로 상을 수상하였다. 이후, 그는 이 연례 경연에서 12회 우승하는 기록을 남겼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절

이즈음 요한 베르누이의 두 아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에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1726년 7월에 니콜라스 베르누이가 충수염으로 사망하였고, 다니엘 베르누이수학/물리학부의 교수직을 승계하면서 공석이 된 생리학 교수직에 오일러를 추천했다. 오일러는 당시 바젤 대학교 물리학과 교수직에 지원했다가 탈락해서, 이 제의를 수락했다.

1727년 5월 17일에 오일러는 그 곳에 도착했고, 그는 곧 의학부의 조교수에서 수학부의 교수로 승진하게 된다. 그는 다니엘 베르누이와 같은 집에서 살았으며, 공동 연구 작업도 활발하게 했다. 오일러는 러시아어를 익히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정착했다. 그는 또한 러시아 해군의 의무관도 겸임했다.

표트르 대제가 세운 이 아카데미는 교육을 통해서 서유럽과 러시아의 과학 격차를 줄이는 것이 목표였다. 아카데미는 풍부한 재정과 표트르 대제와 귀족들의 장서들을 모아놓은 큰 도서관을 갖고 있었다. 또한 교수들의 강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학생들의 수는 매우 적었으며, 연구에 중점을 두어서 교수들에게 시간과 자유를 제공했다.

이에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던 예카테리나 1세는 오일러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날에 사망하는 바람에, 표트르 2세가 왕위를 승계하게 되었다. 하지만 표트르 2세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왕족들이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왕족들은 아카데미의 외국인 과학자들을 신뢰하지 않아서, 예산을 삭감하는 바람에 오일러와 동료들이 어려움을 겪게 된다.

표트르 2세가 사망한 후에는 여건이 나아져서, 오일러는 아카데미 내에서 승진하여, 1731년에 물리학 정교수가 되었다. 2년 후에 이곳의 검열과 외국인 적대에 실망한 다니엘 베르누이가 사직하고, 바젤로 떠났다. 오일러는 그를 대신해서, 수학학부의 장이 되었다.

1734년 1월 7일 오일러는 아카데미 김나지움 출신의 화가의 딸인 카타리나 젤과 결혼했다.

그러나 너무 연구에 물두한 나머지, 두 눈의 시력을 모두 잃게 된다. 백내장 수술로 잠시 앞이 보이는 행운을 맞았지만, 그 후에는 눈에 엄청난 고통을 느끼고, 다시 시력을 잃게 된다. 17년 동안이나 맹인으로 살게 됐지만, 그는 거기서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력을 잃은 후에 더 열심히 연구해서, 시력이 좋았을 때보다 더 많은 업적을 남기게 됐다고 한다. 그는 그 어떤 수학자들보다도 많은 책을 집필한 것으로 유명한데, 수학뿐만 아니라 천문학, 광학 등의 수많은 책을 집필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1권도 쓸모가 없는 내용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그 많은 책을 집필하면서 그렇게 내용도 잘 쓸 수 있는 거죠?"라고 묻자, "아, 그거요? 사실 내 펜이 나보다 더 똑똑하거든요."라고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사망

1783년 9월 18일 78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 오일러의 마지막 모습은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그날 오전에도 오일러는 팽창하는 풍선의 속도를 계산하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파이프를 물고 휴식을 취하면서 어린 손자들과 놀아 주던 그는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오일러는 곁에 있던 분필을 집고, 석판에 "나는 죽는다."라고 썼다고 한다. 마침내 그는 숨을 쉬면서 사는 일과 계산하는 일을 함께 마감했다. 그리고 이 일화는 훗날, 헝가리의 저명한 수학자가 되는 에르되시 팔이 신발을 신고 죽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쾨니히스베르크의 다리

오일러가 독일의 쾨니히스베르크의 거리를 걷고 있는데, 사람들이 모여서 쾨니히스베르크의 거리에는 7개의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들을 꼭 한 번씩 차례로 건널 수 있느냐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 오일러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오일러는 별로 고민하지도 않고 쉽게 대답해 주었다. "이 다리들을 한 번씩 차례대로 건넌다는 것은 불가능하답니다."라고 말한 후, 불가능한 이유에 대해서 자세히 증명했다고 한다. 이것은 오늘 날에는 "한 붓 그리기"와 같은 문제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위상기하학이라는 분야의 태동을 알리는 문제였다.

같이 보기

바깥 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