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크로포트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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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르가 촬영한 크로포트킨.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러시아어: Пётр Алексе́евич Кропо́ткин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폿킨[*], 1842년 12월 9일(율리우스력 11월 27일) ~ 1921년 2월 8일)은 러시아 출신의 지리학자이자 아나키스트 운동가, 철학자였다. 보로딘(Бороди́н)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의 생애는 세계 5대 자서전[출처 필요] 중 하나로 꼽히는 《한 혁명가의 회상》으로 잘 알려져 있으나 노년기의 활동은 소비에트의 검열으로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아나키스트들의 왕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생애[편집]

표트르 크로포트킨은 2000여명의 농노를 소유한 모스크바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1862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근위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알렉산드르 2세의 시종무관과 아무르 강 코사크 기병대의 장교로 근무했다. 1867년 군을 퇴역한 후 지리학자로써 유럽 여러 곳을 탐험하였다.

이후 크로포트킨은 니힐리즘 성향 단체인 차이코프스키단에서 활동을 했다. 1874년 경찰에 체포되어 병원감옥에 수감되었으나 2년 후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영국, 프랑스스위스쥐라에서 아나키스트 활동에 참여하였으며 바쿠닌을 만났다. 1882년 프랑스에서 폭동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다시 체포되어 3년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그 후 크로포트킨은 국제노동자협회에서 활동하며 마르크스를 비롯한 권위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을 비판했다.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발하자 페트로그라드에 돌아와 민중들의 환영을 받았다. 게렌스키의 임시정부에서 교육장관을 맡아달라는 부탁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그는 혁명을 통해 아나키즘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를 했으나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고 독재 체제로 변화하자 이에 항의했다. 아나키스트 운동가들이 체포당하고 많은 단체들이 강제로 해산당하자 "이것은 혁명의 매장이다"라고 친구에게 말했다고 한다. 크로포트킨은 볼셰비키가 혁명이 전체주의적 방법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이유를 증명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네스토르 마흐노를 만나기도 하며 반 볼셰비키 활동을 응원했다.

크로포트킨은 말년에 《혁명적 윤리학》을 집필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심장질환과 폐렴으로 1921년 드미트로프에서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모스크바에서 동지장으로 치러졌으며 10월 혁명 이래 가장 많은 사람이 몰렸다고 한다. 시신은 데비치 묘지에 묻혔다.

작가 로맹 롤랑레프 톨스토이가 주창했던 삶을 산 것은 그뿐이라고 말했으며, 오스카 와일드는 크로포트킨이 자기가 이제까지 알고 있는 진심으로 행복한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사상[편집]

크로포트킨의 사상은 바쿠닌과 함께 19세기 후반 러시아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의 대표격으로 취급되며, 사회주의적 아나키즘의 분파인 아나코-공산주의는 크로포트킨이 창조하지 않았지만, 크로포트킨이 제일 많이 발전시킨 아나키즘 이론중 하나이다. 그의 사상의 목표는 아나키즘 이론을 과학적으로 정립하는 것이었다. 이런 그의 사상에 따라 바쿠닌과 크로포트킨을 경계로 공상적 아나키즘과 과학적 아나키즘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는 《상호부조론》에서 다윈의 이론에 반대해 종의 진화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경쟁이 아닌 협동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사유재산에 반대해 물자와 인력의 무상분배를 주장하였다.

저작[편집]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