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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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
영국의 군주
재위 1952년 2월 6일 ~ 현재
부군 에든버러 공 필립
왕가 윈저
부왕 조지 6세
모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출생일 1926년 4월 21일(1926-4-21) (83)
출생지 영국의 국기 영국 런던 메이페어
종교 영국 성공회
자녀 웨일스 공 찰스
프린세스 로열 앤
요크 공작 앤드루
웨식스 백작 에드워드
이전 왕 조지 6세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II, 1926년 4월 21일~)는 영국을 포함한 16개국과 기타 국외 영토와 보호령의 여왕이다. 본명은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 윈저(영어: Elizabeth Alexandra Mary Windsor)이다. 호칭은 ‘영국 연방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 폐하(영어: Her Majesty Queen Elizabeth II of the United Kingdom)’이다. 그녀는 1952년 2월 서거한 부왕 조지 6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또한, 영국 외에도 (실질적으로는 연방총독이 대표하고 있지만)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자메이카, 바베이도스, 바하마, 그레나다, 파푸아뉴기니, 솔로몬 제도, 투발루, 세인트루시아, 세인트 빈센트 그레나딘, 벨리즈, 앤티가 바부다, 세인트키츠 네비스의 여왕이기도 하다. 여왕을 모시는 영국 연방 16개국의 총인구는 보호령까지 포함해서 1억 2900만 명이 넘는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그녀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셈이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정치적 문제에 좀처럼 개입하지 않고 있다.

엘리자베스 2세는 그 밖에도 영국 성공회의 우두머리[1], 노르망디 공작, 랭커스터 공작, 맨 섬의 영주, 피지의 최고 추장, 함대 사령장관 등의 다양한 직함을 보유하고 있다.

목차

[편집] 개요

엘리자베스 2세는 1952년 2월 6일 그녀의 아버지 조지 6세가 서거함에 따라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파키스탄, 실론(지금의 스리랑카)의 여왕이 되었다. 그녀의 치세에 대영 제국의 다른 식민지들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달성함으로써 이후 그녀가 왕위에 오른 후 56년 동안 54개국이 가입한 영국 연방 가운데 절반인 32개국은 공화국이 되었고 5개국은 독자적인 군주를 가지게 되었지만, 16개국은 아직도 영국 군주를 자국의 국가원수로 모시고 있다. 엘리자베스 2세는 각각의 나라에서 다른 정식 칭호를 가지고 있다. 영국에서의 정식 칭호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레이트 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과 그 밖의 왕국과 영토의 여왕, 영국 연방의 우두머리, 신앙의 옹호자이신 엘리자베스 2세 폐하(Her Majesty Elizabeth the Second, By the Grace of God of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and of Her Other Realms and Territories Queen, Head of the Commonwealth, Defender of the Faith)’이다. 오늘날 그녀는 지구상에서 1개국 이상의 독립국을 다스리는 유일한 군주이다.

이 때문에 법적으로 그녀는 이따금 서로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나라의 국가원수로서의 얼굴을 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2003년에 일어난 이라크 전쟁의 경우, 전쟁에 찬성하며 참여한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 여왕의 입장을 가지는 한편, 전쟁에 반대한 캐나다 여왕으로서 행동할 수도 있다. 실제로 영국 이외의 나라의 여왕으로서 행동하기도 하므로(특히 그 나라에 체재하는 경우 : 예를 들어 캐나다 체제 중에는 캐나다 여왕으로, 오스트레일리아 체제 중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여왕으로, 파푸아뉴기니 체제 중에는 파푸아뉴기니 여왕으로 행동함) 이 문제는 매우 까다롭다고 할 수 있다.

1947년 엘리자베스 2세는 먼 친척인 에든버러 공작 필립과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다. 본래 그리스덴마크의 왕자로 태어난 그는 필립 마운트배튼으로 개명해 영국에 귀화해 에든버러 공의 작위를 부여받았다.

[편집] 초기 삶

엘리자베스는 1926년 4월 21일 런던 메이페어의 브루턴 거리 17번지에서 요크 공 앨버트(훗날의 조지 6세)와 요크 공주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나중에 그녀의 딸 엘리자베스가 여왕으로 즉위한 후로는 왕대비로 격상됨)의 맏이로 태어났다.

그녀는 버킹엄 궁전의 개인 부속 예배당(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파괴되어 지금은 존재하지 않음)에서 코스모 고든 랭 요크 대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녀의 대부모(후견인)는 그녀의 조부모들인 조지 5세메리 왕비이다; 그녀의 외조부모들은 스트라스모어 백작 클라우드 보우스-라이언메리 엘핀스톤 부인이다.

그녀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이름인 엘리자베스 다음에 각각 그녀의 친증조모 알렉산드라 대비와 할머니 메리 왕비의 이름에서 따와 그녀의 중간 이름으로 지명되었다. 어린 시절, 가족들은 그녀를 “릴리벳(Lilibet)”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그녀는 할아버지 조지 5세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1929년 병상에 누워 있던 그의 회복을 돕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1933년 7살 때의 엘리자베스 공주.

엘리자베스 공주의 유일한 자매는 1930년에 태어난 마거릿 공주이다. 두 공주는 집에서 그녀들 어머니의 감독 아래 교육을 받았다. 그녀들의 가정교사는 매리언 크로퍼트라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이튼 칼리지의 학장 C. H. K. 마틴과 함께 역사를 공부했으며 또한 현대 언어에 박식하여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말할 줄 알았다. 세계 성공회 공동체(Anglican Communion)의 상징인 캔터베리 대주교로부터 종교학을 수업받은 그녀는 신심 깊은 성공회 신자가 되었다.

영국 왕의 증손녀로서 엘리자베스는 “전하”라는 호칭과 함께 영국 공주의 직함을 보유하였다. 그녀의 정식 직함은 “요크 공주 엘리자베스 전하(Her Royal Highness Princess Elizabeth of York)”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현 국왕의 차남이었고 그녀의 백부 에드워드(훗날의 에드워드 8세)가 웨일스 공이 되어 장차 왕위를 약속받았기 때문에, 비록 그녀의 출생이 대중의 관심을 받기는 했지만 많은 이들이 웨일스 공이 조만간 결혼해 아이들을 낳고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가 여왕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1936년 에드워드 8세가 자식을 남기지 못한 채 하야하고 그녀의 아버지가 조지 6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조지 6세에게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엘리자베스는 곧바로 차기 왕위 계승자가 되어 본격적인 제왕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숨 쉴 틈 없이 짜인 교육 일정에서 그녀의 유일한 취미는 시골길을 을 타고 달리는 것이었다. 이 때문인지 그녀는 “내가 여왕이 되지 않았더라면 시골에서 말과 개들을 많이 키우면서 지냈을 것이다.”라고 측근들에게 자주 말하곤 하였다.

[편집] 추정 상속인

그녀의 큰아버지 에드워드 8세가 퇴위함에 따라 그녀의 아버지가 왕이 되었고, 그녀는 추정 상속인이 되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엘리자베스 공주 전하(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Elizabeth)”로 불리게 되었다. 곧 그녀에게 웨일스 공작 부인이라는 적합한 직함이 주어졌지만, 왕은 이 직함이 본래 웨일스 공의 아내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수여하는 것을 심사숙고하였다.

엘리자베스가 열세 살이 되던 해,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그녀와 그녀의 어린 여동생 마거릿 공주는 버크셔 주윈저 성으로 대피하였다. 일부에서 공주들을 캐나다로 대피시켜 브리티시컬럼비아 주하틀리 성에 머무르게 하자는 제안을 하자, 그녀들의 어머니는 “아이들은 나 없이 지내지 않을 것이며, 나는 왕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왕은 결코 조국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저에서 엘리자베스 공주와 마거릿 공주는 성탄절에 가족과 친구들을 초대하여 왕실 직원들의 아이들과 함께 무언극을 연출하였다. 그녀가 13살이 되었을 때 먼 친척이자 미래의 남편이 될 그리스 출신의 필립 왕자를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영국 해군에 복무하던 그를 본 엘리자베스는 첫눈에 반하여 그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편집] 군 복무

2차 대전 당시 트럭 바퀴를 교체하던 엘리자베스 공주

1945년, 열여덟 살의 엘리자베스 공주는 전쟁에 직접 참가해 조국에 봉사하고 싶다며 아버지 조지 6세를 설득하여 끝내 허락을 받아냈다. 3월 4일 그녀는 또래 여자들이 봉사하는 영국 여자 국방군에 입대하여 구호품 전달 서비스 부서(WATS; Women's Auxiliary Territorial Service)에 배치되었다. 여자들로 구성된 WATS는 1938년 창설 당시에는 주 업무가 취사, 사환 업무, 부대 내 매점 관리 등의 비(非) 전투업무였으나, 전쟁이 커지자 운전, 탄약 관리 등의 전투업무로 확대됐다. 그곳에서 엘리자베스 영국 공주는 No 230873 Second Subaltern Elizabeth Windsor로 불리며 군용 트럭을 모는 운전사로 복무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였다.

당시 기록을 보면 엘리자베스 공주는 왕위 계승자였음에도 다른 병사들과 똑같이 운전과 탄약 관리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녀는 왕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던 손으로 흙바닥에 앉아 차량을 고쳤다. 그녀가 무릎을 꿇고 앉아 트럭 바퀴를 교체하는 모습, 트럭의 보닛을 열고 수리하는 모습을 담은 흑백사진이 당시의 활동모습을 말해 준다.[2]

여성 왕족 가운데 다른 학생들과 동등한 훈련을 받으며 군 복무를 한 사람은 현재까지 그녀가 처음이자 유일하다. 비록 이전의 왕들이 영국군캐나다군최고 사령관이기는 했지만 명목상에 불과했으며 왕실 여인들에게는 명예상의 직함만 주어졌을 뿐이었다. 당시 엘리자베스는 이러한 경험을 무척 기쁘게 했으며, 이 경험을 통해서 자기 아이들을 궁정에서 가르치기보다는 학교에 보내 공부시키는 게 낫다고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런던에서 브이이 데이를 기념하는 동안 그녀와 그녀의 여동생 마거릿 공주도 모두와 함께 축하하며 한밤중까지 군중과 어울렸다.

[편집] 결혼

영국의 국장
영국 왕실의 구성원
 HM 엘리자베스 2세
 HRH 에든버러공 필립 마운트배튼
  HRH 웨일스공 찰스 필립
  HRH 콘월공작부인 카밀라
   HRH 웨일스왕자 윌리엄 아서
   HRH 웨일스왕자 헨리(해리) 찰스
  HRH 요크공작 앤드루 앨버트
   HRH 요크공주 베아트리스
   HRH 요크공주 유지니아
  HRH 웨식스백작 에드워드 앤터니
  HRH 웨식스백작부인 소피
   레이디 루이스 앨리스
   세번자작 제임스 알렉산더
  HRH 프린세스 로열 앤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그리스와 덴마크 왕자 출신의 에든버러 공 필립1947년 11월 20일에 결혼하였다. 이들 부부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세의 자손들로서 칠촌관계에 해당하는데, 엘리자베스 2세는 크리스티안 9세의 둘째이자 장녀 덴마크의 알렉산드라의 증손녀이며 필립 공은 셋째이자 2남인 그리스의 게오르기오스 1세의 증손자이다. 더구나 두 사람은 또한 빅토리아 여왕을 같은 조상으로 두어 팔촌에 해당하기도 한다. 엘리자베스의 증조부는 에드워드 7세이며, 에드워드 7세의 누이인 헤세와 라인의 대공 부인 앨리스는 필립 공의 외증조모에 해당한다.

필립 공은 자신의 그리스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결혼에 앞서 에든버러 공의 작위를 받기 전에 간결하게 필립 마운트배튼 중위로 불렸다. 필립은 그리스 왕족으로 덴마크 왕실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사운덴부르크-글뤽스부르크 왕가의 일원이자 올덴부르크 왕가의 계통이었다. 둘의 결혼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필립이 그리스 정교회 신자인 데다가 뒤를 받쳐줄 후원 세력도 없었고, 나치 지지자와 결혼한 누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의 어머니도 강력히 반대했다고 하며, 심지어 필립을 “훈족”에 비유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진작에 알았던 조지 6세는 엘리자베스가 스물한 번째 생일을 맞기 전에 두 사람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1947년 7월 두 사람의 약혼이 선포되고 11월 20일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후 두 사람은 1949년 7월 4일까지 윈들즈햄 무어에 살았으며, 나중에 대저택인 런던의 클래런스 하우스로 이사하였다. 1948년 11월 14일 엘리자베스는 첫째 아이 찰스를 낳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총 네 명의 아이가 탄생했다:

[편집] 왕위 계승

1951년에 들어서 조지 6세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엘리자베스는 자주 왕실 행사를 대행하게 되었다. 특히 건강을 1순위로 요구하는 외국 순방은 더욱 엘리자베스의 몫이었다. 그녀가 케냐에 도착했을 때 1952년 2월 6일 조지 6세가 폐암으로 서거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그의 서거는 자동으로 그의 맏딸이자 웨일스 공작 부인의 작위를 받은 엘리자베스에게 왕위가 돌아감을 의미했다.

조지 6세가 서거하고 다음 군주로 엘리자베스의 이름이 올랐을 당시 그녀는 케냐에 머무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에게 부왕의 부고 소식을 전한 사람은 남편인 필립 공이었다. 그 후 왕실 일행은 즉시 영국에 돌아왔다.

맨 처음 엘리자베스는 1952년 2월 6일 캐나다 추밀원에 의해 캐나다 여왕으로 선포되었다. 그녀의 영국 여왕으로서의 선포는 다음날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서 이루어졌다.

1년 후인 1953년 3월 24일에 여왕의 할머니 메리 왕태후가 폐암으로 서거하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임종 시 그녀의 소망은 손녀의 대관식이 뒤로 미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은 1953년 6월 2일 TV를 통해 전 세계에서 2,500만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웅장하게 거행되어 여왕으로 정식 즉위하게 되었다. 당시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대전쟁 후 위축되어가던 영국의 대외적 위상 회복과 국내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을 화려하게 진행할 것을 지시하였다고 한다.

[편집] 여왕으로서의 삶

대관식 후 여왕과 필립 공은 주거지를 군주의 주요 관저인 런던 중심부에 있는 버킹엄 궁전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소문에 따르면 수많은 그녀의 선왕들과 마찬가지로 버킹엄 궁전을 좋아하지 않았던 그녀는 장래의 주거지로 또 다른 주요 관저인 윈저 성으로 옮겨가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편집] 연방의 지속적인 발전

영국 연방의 우두머리일 때 사용하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전용 깃발.

1926년 제국회의의 밸푸어 선언은 1931년 웨스트민스터 제정법의 통과로 이어지면서 대영제국의 변화가 시작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엘리자베스 1세를 떠올리며 “새로운 엘리자베스 시대”가 도래하리라는 기대감을 품었다.

1952년 엘리자베스의 즉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여왕의 임무대로 영국을 통솔하면서 성장하는 독립국 무리와 세계 경제와 군사력을 분담하고 있다. 여왕은 과거 50년 동안 국가들이 경제와 문화가 고도로 발전을 목격하면서 영국 연방의 새로운 지도자들과 대영 제국의 점차적인 변모를 사이에 놓고 부딪쳤다.

당시 영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승전국이었음에도 위상이 무너져가고 있었다. 1947년 조지 6세의 치세에 인도를 상실한 여파는 실론, 버마, 말라야, 이집트, 로디지아의 독립으로 줄줄이 이어졌다. 심지어 영국 연방의 자치령들도 모국인 영국과는 큰 틀만 유지하고 독립된 정치 구조를 구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엘리자베스 2세는 이미 독립한 옛 식민지들은 제쳐놓고라도 영국 연방만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1953년 11월부터 6개월간 영국 연방을 순회할 계획을 세웠다.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순방은 영국 군주로서는 처음 갖는 행사로 그들과의 유대를 맺게 해주었다. 또 영국 군주로서는 50년 만에 인도를 방문했으며 이후 남아프리카페르시아 만 연안 국가들을 꾸준히 순방하였다. 그녀의 적극적인 행동은 성과를 거두어 1977년 여왕 즉위 25주년에는 영국 연방의 35개국 지도자들이 축하 연회에 참석하는 결실을 보았다. 한마디로 급속하게 추락하던 영국의 위상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2007년, 프랑스 총리 기 몰레와 영국 총리 앤서니 이든프랑스와 영국의 합병 실현성을 놓고 검토한 1956년 국가 문서가 기밀 취급에서 해제되어 세상에 공개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엘리자베스 2세를 프랑스의 국가원수로 천거하자는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결국 흐지부지됐으며, 다음해 프랑스는 로마 조약에 서명하였다.

[편집] 정치

엘리자베스 2세는 입헌군주답게 공공연하게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표명하지 않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치세 내내 일반 대중을 상대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자제를 고수해왔다. 따라서 그녀의 정치적 관점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적절한 선에서는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한 예로 마거릿 대처 총리가 포클랜드 전쟁을 벌였을 때에는 명목적이지만 전쟁에 대한 여왕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엘리자베스 2세는 승인을 하면서도 “앤드루 왕자가 전투기 조종사로 전쟁에 참가하기에 부모로서 매우 걱정스럽다.”라며 나름대로 전쟁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였다. 대처가 총리직을 끝낸 다음 엘리자베스 2세는 “나는 무슨 일이든 그저 강하게 밀어붙이는 그녀를 싫어했다.”라고 사석에서 말했다. 이런 여왕의 중심을 잃지 않는 범위에서 하는 신중하면서도 정치적인 표현은 국민에게 묘한 매력을 발휘하였다. 다시 말해서 여왕의 존재는 상징적인 것 이상으로 국민과 정치를 중재해 주는 완충 역할을 한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엘리자베스 2세는 국가수반으로서 의회를 소집하고 해산하며 매년 가을 영국 정부의 정책을 요약하는 개회사와 함께 의회의 새로운 회기를 연다. 또한 여왕은 선거를 통해 영국의 총리가 선출되면 그를 임명한다.

그리고 정치에도 일정 부분 관여하고 있다. 매우 화요일마다 그녀는 총리를 만나 개별회의를 하며 나랏일을 논의한다. 재위기간에 여왕은 처칠과 대처를 포함해 열 명의 총리와 일했으며, 토니 블레어 총리는 다른 긴급한 용무를 이유로 여왕과의 화요일 약속을 취소한 적이 있는 유일한 총리다. 《여왕의 생활》이란 책을 쓴 왕실 전문가인 브라이언 호이는 “당시 여왕은 아주 불쾌해했다.”라며 “이제 블레어 총리는 영국에 있는 한 그런 행동을 다시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여왕은 매우 박식하다.”라며 “몇몇 총리들이 여왕보다 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했다가 여왕의 지적을 받은 적도 있다.”라고 말했다.

사회적으로는 엘리자베스 2세는 즉위 후 남편과 함께 영국 각지의 기관, 기업체, 지역사회 등을 방문하여 많은 내외국인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 엘리자베스 2세는 지금까지 38만 7천700건의 상과 훈장 수여식을 거행했다. 더불어 영국 적십자사, 영국 문화원, 영국 학술원 등을 포함한 620개가 넘는 자선단체와 기관을 후원하고 있다.[3]

2007년 12월 24일, 엘리자베스 2세는 유튜브에 전용 동영상 사이트를 개설하였다. 로열채널이라는 이름의 이 사이트(www.youtube.com/theroyalchannel)에서는 영국 왕실의 일상에 대한 옛 뉴스와 각종 동영상을 상영하고 있다. 성탄절에는 여왕의 성탄축하 메시지도 게시된다. 이 사이트는 정기적으로 새로운 소식을 갱신해 영국 왕실에 대한 누리꾼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영국 왕실 측은 “여왕은 국민과의 새로운 소통방식에 항상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라며 “영국과 영국 외의 좀 더 많은 젊은이가 여왕의 성탄 메시지를 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메시지는 텔레비전과 라디오로도 방송하고 있다. 매년 3월 영국 연방 기념일에는 라디오를 통해 축마 메시지를 방송한다.[4]

1999년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으로 대한민국을 방문해 하회마을성공회 서울 주교좌 대성당, 이화여자대학교를 다녀갔으며, 2004년에는 영국을 국빈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 내외를 만났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입지를 세운 영국 왕실의 권위는 그녀의 자녀에 의해 실추되기 시작했다. 딸인 앤 공주는 당시 소시지와 고기 파이를 만드는 회사를 가진 평민의 자녀인 마크 필립 대위와 결혼하면서 왕실의 권위를 떨어뜨렸다. 이 결혼은 결국 1982년에 이혼으로 끝나면서 더욱 국민을 실망시켰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2세의 여동생인 마거릿 공주마저 1978년에 공식적인 파혼을 하면서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결혼 전부터 염문을 많이 뿌리고 다니던 웨일스 공 찰스는 1981년 7월, 정숙하고 가문 좋은 스펜서 가문의 딸이며 유치원 보모로 일하던 다이애나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으로 왕실의 권위는 다시 회복되는 듯하였다. 둘 사이에서 윌리엄 왕자헨리 왕자가 연이어 탄생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절정에 다다랐다.

그러나 결혼 전부터 사귀던 카밀라 파커 볼스와의 관계를 잊지 못하던 찰스는 결혼 1년쯤 뒤부터 다이애나와 불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1986년부터 심심찮게 웨일스 공 부처의 불편한 관계가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하더니 결국 1996년 이혼을 하면서 국민의 실망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거기에 같은 해 둘째 왕자인 요크 공작 앤드루사라 퍼거슨과 이혼을 하면서 충격을 더했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사건은 1997년 8월 31일 다이애나가 프랑스 파리에서 연인 도디 알 파예트와 함께 파파라치를 따돌리려는 와중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국민의 원망이 찰스에게로 돌려지면서 왕실 권위에 치명적인 타격이 가해졌다.

1992년 다이애나는 자신의 결혼 생활과 왕실의 뒷이야기를 다룬 《다이애나-그녀의 진실》이란 책을 통해서 자신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밝혔었다. 그 내용은 대중매체를 타고 영국 내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으로 퍼져 나갔고, 이로써 그녀에 대한 동정과 왕실과 찰스에 대한 안 좋은 시각이 커졌다. 이후 찰스 대신 그 아들인 윌리엄을 왕위 후계자로 삼자는 의견과 심지어는 영국 왕실을 폐지하자는 주장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이렇듯 언급된 여러 문제에도 영국에서 입헌군주제가 유지되는 것은 엘리자베스 2세의 지혜로운 처신 때문으로 볼 수 있다.[5]

[편집] 재산

엘리자베스 2세가 보유한 재산은 3억 2000만 파운드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며, 전 세계 군주 가운데 12위를 차지한다. 재산 대부분은 부동산과 미술품, 보석이다. 하지만, 여왕의 개인 재산 가운데 공개되지 않은 것이 많아 정확한 액수는 여왕도 모를 것이란 관측도 있다. 게다가 왕실 이름의 재산과 수입도 상당수 여왕이 처분권을 가진 것을 고려할 때 여왕의 재산과 수입은 그 몇 배에 이를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절대 왕권을 휘두르는 중동 등의 왕실과 달리 재산을 함부로 처분할 수 없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1992년 11월 20일, 윈저 성의 대형화재에 따른 천문학적 보수비를 정부에서 지급하는 문제와 관련해 영국 사회에서 논란이 일자 엘리자베스 2세는 결국 국민의 압력에 굴복해 1993년 왕실의 면세 특권을 스스로 포기했다.[6]

2008년 4월 시점에 엘리자베스 2세는 개인 자산의 3분의 1인 1억 파운드 정도를 투자에 활용해왔다. 대부분은 런던 증시에 상장된 우량기업 주식에 투자했으나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에서 시작된 전 세계 증시를 강타한 주가 폭락 사태로 말미암은 주가 급락으로 불과 수주일 만에 자산가치가 37%나 격감해 3천700만 파운드의 막대한 손실을 본 것으로 알려졌다. 런던 증시의 주가지수는 4월 이후 3분의 1이나 떨어졌다. 엘리자베스 2세는 세계 최고의 투자자문가들과 계약을 맺고 자산을 관리해 왔는데 유럽의 여러 나라를 국가 부도 직전까지 몰고 간 금융 혼란으로 손해가 막심해지자 격노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부동산도 많이 가진 영국 왕실은 금융위기에 더해 주택시장이 침체하면서 주식과 부동산 양쪽 모두에서 엄청난 손실을 보았다.[7]

[편집] 암살 음모

2007년 11월, 우간다에서 23일부터 25일까지 3일간 열린 영국 연방 정상회의에서 국제 테러 조직 알카에다와 연관된 과격파 이슬람 단체가 엘리자베스 2세를 노린 테러를 계획했지만 영국 정보기관이 사전에 이를 저지하였다. 당시 과격파는 현지 텔레비전 방송국 중계차 2대에 폭발물을 숨기고 테러를 계획했지만 정보 기관원이 이 중계차를 사전에 압수해 사건 발생을 막은 것으로 알려졌다. 우간다 정부 측은 엘리자베스 2세를 겨냥한 테러 계획이 있었던 것을 인정했지만 실제로 중계차에 폭발물이 설치됐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8]

2008년 8월 19일, 영국에서 엘리자베스 2세를 비롯한 영국 왕실의 주요 인물들을 겨냥한 아랍계 테러조직이 적발됐다. 이들은 자신들의 컴퓨터에 테러 대상의 인물사진은 물론 해당 거주 공관 등에 대한 지도와 자세한 정보를 언제든 사용 가능하도록 저장하고 있었다. 또 영국 의회 건물 등의 역사적 건조물들과 뉴욕과 워싱턴의 지하철 등과 관련한 구체적인 정보, 세계은행 건물 등을 찍은 홈 비디오테이프 등도 발견됐다. 적발된 테러 조직원 가운데는 열여섯 살의 최연소 테러범도 포함되어 있었다.[9]

[편집] 건강과 장수

2007년 12월 20일을 기점으로, 엘리자베스 2세는 81년 243일을 산 증조모인 빅토리아 여왕의 기존 최고 기록을 깨고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래 산 군주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2세가 빅토리아가 보유한 최장수 재임 군주라는 지위까지 차지하려면, 2015년 9월까지 생존해야 한다. 54년간 재임한 엘리자베스 2세는 빅토리아와 헨리 3세, 조지 3세에 이어 네 번째로 장기 재임한 영국 군주로, 현존하는 국왕으로서는 라마 9세 타이 국왕에 이어 두 번째로 가장 오랫동안 재임했다.[10]

[편집] 직함

1926-1936: Her Royal Highness Princess Elizabeth of York
1936-1947: 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Elizabeth
1947-1952: 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Elizabeth, Duchess of Edinburgh
1952-현재: Her Majesty The Queen

[편집] 주석

  1.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게 있는데, 영국 국왕은 영국 성공회 이외의 세계 성공회 공동체 자치 관구교회들과는 관련이 없다. 단지 영국의 국교인 영국 성공회에서만 상징적 지도자로서의 의미가 있을 뿐이다.
  2. 금동근. “[책갈피 속의 오늘1945년 英엘리자베스 공주 軍입대]”, 《동아일보》, 2008년 3월 4일 작성. 2008년 8월 12일 확인.
  3. 김진형. “80세 생일 맞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한겨레신문》, 2006년 4월 16일 작성. 2008년 12월 20일 확인.
  4. 손정협.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유튜브에 사이트 개설”, 《디지털타임스》, 2007년 12월 26일 작성. 2008년 12월 20일 확인.
  5. 김현주, 《이야기 영국사(개정판)-아서 왕에서 엘리자베스 2세까지 이야기 역사 시리즈(이야기 역사 시리즈)》, 청아출판사, 413-415쪽
  6. 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 재산은? 공식 집계만 6억5000만달러”, 《미주중앙일보》, 2008년 9월 16일 작성. 2008년 12월 20일 확인.
  7. 한성숙. “英여왕 엘리자베스 2세 "오 마이 갓"”, 《한국일보》, 2008년 10월 20일 작성. 2008년 12월 20일 확인.
  8. 서유정. “영연방 회의에서 엘리자베스 여왕 노린 테러 있었다”, 《뉴시스》, 2008년 1월 13일 작성. 2008년 12월 20일 확인.
  9. 英 여왕 노린 테러조직 적발”, 《연합뉴스》, 2008년 8월 19일 작성. 2008년 12월 20일 확인.
  10. 신보영.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영국 최장수 국왕 신기록”, 《문화일보》, 2007년 12월 22일 작성. 2008년 12월 20일 확인.

[편집]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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