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사다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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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사다하루
王 貞治

Sadaharu Oh
WBC2006 Sadaharu Oh.jpg

오 사다하루
(2006년 WBC 일본 대표팀 감독 시절)

기본 정보
국적 중화민국 중화민국
생년월일 1940년 5월 20일(1940-05-20) (74세)
출신지 일본 일본
도쿄 부 도쿄 시 혼조 구(현 : 도쿄 도 스미다 구)
신장 177 cm
체중 79 kg
선수 정보
투구·타석 좌투좌타
수비 위치 1루수
프로 입단 연도 1959년
첫 출장 1959년 4월 11일
마지막 경기 1980년 10월 20일
경력

선수 경력

감독·코치 경력

일본 야구 전당
Empty Star.svg Empty Star.svg Empty Star.svg 전당 수상자 Empty Star.svg Empty Star.svg Empty Star.svg
선출년 1994년
선출방법 경기자 표창
오 사다하루
일본어식 한자 표기: 王 貞治
가나 표기: おう さだはる
국립국어원 표준 표기: 오 사다하루
통용 표기: 오우 사다하루
로마자: Sadaharu Oh

오 사다하루(일본어: 王 貞治 (おう さだはる), 중국어 병음: Wáng Zhēnzhì 왕전즈, 1940년 5월 20일 ~ ) 또는 왕정치일본에서 태어난 중화민국 국적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지도자, 야구 해설가·평론가이다.

세계의 홈런왕’(世界の本塁打王), ‘세계의 오’(世界の王), ‘왕 짱’(ワンちゃん) 등 다수의 애칭도 가졌다. 1977년에 일본 정부가 수여하는 국민영예상의 첫 번째 수상자로 알려져 있으며, 2010년에는 문화공로자로서 선정됐다.

개요[편집]

외다리 타법’(一本足打法)으로 불리는 독특한 타법으로 통산 홈런수, 당시 시즌 홈런 갯수의 일본 기록을 수립하는 등 ON포로서 불리는 나가시마 시게오와 함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V9’ 황금 시대의 주역으로서 국민적인 인기를 자랑했다. 사다하루가 기록한 통산 홈런 868개는 베리 본즈이 보유하고 있던 메이저 리그 통산 홈런 기록인 762개를 넘은 세계 최다 홈런 기록을 수립한 것 외에도[1] 수많은 일본 프로 야구의 대기록을 남겼다(기록에 대해서는 상세 정보를 참조).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요미우리, 후쿠오카 다이에·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감독을 역임하는 등 지도자로서 활동했으며 2008년 시즌 종료와 동시에 소프트뱅크의 감독직에서 물러나면서 소프트뱅크 구단 최고 고문으로 발탁됐고 2009년 1월 1일부터 이사회 회장으로 승진됐다. 제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아 팀의 우승을 이끌었으며, 제2회 대회에서는 감독 자문역을 맡았다. 현재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구단 이사회 회장, 일본 프로 야구 조직(NPB) 커미셔너 특별 고문, 요미우리 자이언츠 OB회 회장,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 회장으로 있는 등 다수의 경력을 갖고 있으며 세계 소년 야구 추진 재단 이사장, 외무성에서 위촉된 야구 특별 대사 등을 맡고 있다.

중화민국 2등 경성훈장이 수여된[2][3] 것을 비롯해 도쿄 도 명예 도민[4], 스미다 구 명예 구민[5], 메구로 구 명예 구민, 후쿠오카 시 명예 시민[6], 미야자키 시 명예 시민[7]으로도 선정됐다.

인물[편집]

어린 시절[편집]

도쿄 부 도쿄 시 혼조 구(현재의 도쿄 도 스미다 구)에서 중화민국 국적(저장 성 칭톈 현 출신, 1922년 일본 방문)의 아버지 오 시후쿠(王仕福), 일본인(도야마 현 히미 시 출신) 어머니 토미(登美)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5월 10일에 2란성 쌍둥이의 남동생으로 태어났지만 호적상의 출생일은 5월 20일이다. 실제 출생일과 호적상의 출생일이 다른 이유로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출산 때에도 울지않을 정도의 미숙아였던 탓에 부모가 출생 신고의 제출을 주저했다는 설과 가업인 중화요리 라멘점 ‘고주반’(五十番)의 운영을 위해 출생 신고 제출이 늦었다는 등의 설이 있다. 이름을 붙인 것에 대해서도 승려가 이름을 붙였다는 설과 그의 어머니인 토미가 애독하고 있는 책의 작품 속 인물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설이 있으며 더욱이 쌍둥이 누나 히로코(廣子)는 한 살(1세 3개월) 때에 사망했다. 사다하루는“3살 때까지 서는 것조차 힘들었다”라고 말했다. 태평양 전쟁 중에 사다하루 일가는 어머니의 옛 성 ‘도즈미’(當住)를 사용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후에 스승이 되는 아라카와 히로시와의 만남은 구립 혼조 중학교 재학 시절 당시 마이니치 오리온스의 현역 선수였던 아라카와가 자신이 키우고 있는 애완견과 함께 산책을 하고 있다가 스미다 공원 이마도 그라운드에서 사다하루가 나오던 야구 경기를 바라본 것으로 시작됐다.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아라카와는 당시 우타자였던 사다하루에게 “왜 너는 왼손으로 던지는데 오른쪽에서 치냐?”고 묻자, 사다하루는 “그것은 아버지께서 젓가락과 연필, 계산하는 것은 오른쪽으로 하라고 하셔서 방망이도 오른쪽에서 치지않으면 아버지께 꾸중을 들을까봐….” 라고 대답했다. 아라카와는 “지금의 야구는 왼손잡이의 선수에겐 희소 가치가 있는데 너는 일부러 오른쪽에서 치다니 아까운 이야기이다….” 라고 말했다(아라카와 자신도 좌타자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다하루는 곧바로 왼쪽으로 치는 것을 실행에 옮기면서 2루타를 쳤고 이후에는 왼쪽에서 칠 수 있었다. 아라카와는 그 때 사다하루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얼마나 순수했던 소년이라고 생각했다. 보통은 경기 중에 우타자에서 좌타자로 바꾸는 일을 남이 시켰다고 해서 바꾸지 않는다. 그것을 단번에 바꾸는 것은 대단하다.

또한 그때부터 사다하루는 신장 176cm에 당시의 젊은 선수로서는 장신이었다. 사다하루의 소질을 인정한 아라카와는 “너는 지금 몇 학년이야?”라고 물었는데 사다하루는 “2학년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아라카와는 고교생으로 착각해 “그런가, 그럼 와세다 대학(아라카와의 모교)은 어떠냐?”라고 권했다. 그러자 사다하루는 “네, 그렇게 하면 좋은데 그 전에 고등학교에 가지 않으면”이라고 대답해 아라카와는 “2학년생이라는 것은 중학생이었던가”라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초등학생 시절엔 당시의 요코즈나였던 요시바야마 준노스케에게서 ‘스모 선수가 돼라’고 권유할 정도로 스모에 강했다. 그리고 혼조 중학교에서는 육상부와 탁구부에 소속된 적이 있다. 야구부에도 소속돼 있었지만 그라운드를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활동을 중단하는 것과 다름없는 상태였다.

아버지인 시후쿠는 자신의 출신지에 의사와 전기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장남인 데쓰조를 의사로, 차남인 사다하루를 전기기술자로 키워 형제 모두가 모국으로 돌아가 일해 주었으면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1지망이었던 도립 스미다가와 고등학교의 입학 시험에 낙방하면서 아라카와의 모교인 와세다 실업고등학교(상업과)에 진학하게 됐다. 당시 스미다가와 고등학교에는 경식 야구부가 없어 후에 사다하루는 이 입학 시험에 낙방한 것을 “인생의 큰 분기점의 하나”라고 회상했다.[8] 또한 아라카와와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도립 스미다가와 고등학교 입학 시험에 낙방한 후 야구를 하자고 마음먹고 와세다 실업고등학교에 갈 일도 없었으며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의 입단도 없었을 것이라며 이야기하고 있다.[9]

와세다 실업고등학교 시절[편집]

와세다 실업고등학교 시절에는 1학년 때 외야수 겸 후보 투수로서 팀의 하계 고시엔 대회(제38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 출전을 이끌었다. 2차전에서는 1학년이면서도 선발 등판을 했지만 강호인 현립 기후 상업고등학교를 상대로 1대 8로 패했다.

1학년 가을부터 팀의 에이스가 됐는데 구보타 다카유키 총감독과 미야이 가쓰나리 감독의 지도 하에 ‘노 와인드 업 투구법’을 몸에 대며 투구에 안정감이 늘어났다. 춘계 고시엔 대회(제29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서 준결승까지 3경기 연속 완봉승을 거뒀다. 고치 상업고등학교와 맞붙었던 결승전에서는 8회에 3점을 빼앗겨 4경기 연속 완봉승을 놓쳤지만 5대 3으로 완투 승리하여 우승을 이끄는 등 간토 지방에선 처음으로 선발 대회 우승기를 가져와 인기를 모았다. 2학년 때인 하계 고시엔 대회(제39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2차전 상대인 네야가와 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연장 11회를 완투 하여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연장전에서의 노히트 노런 달성은 고시엔에서 춘계와 하계를 통틀어 유일한 기록이다. 훗날 사다하루는 “고교 2학년 시절이 투수로서의 전성기였다고 생각한다. 이후 배팅은 좋아졌으나 피칭은 어디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어딘가 이상해졌다”라고 말했다.

2학년이던 그 해에 와세다 실업고등학교는 국민 체육 대회의 경식 야구 고교 부문에 선출됐으나 사다하루는 당시의 국적 규정(사다하루는 중화민국 국적) 때문에 출전할 수 없었다(다만 현재 이 국적 규정은 폐지됐다). 사다하루는 자신의 저서인 《회상》에서 “생애 가장 억울했던 일”이라고 말했지만 훗날 인터뷰에서는 “고교 야구 선수는 고시엔이야말로 목표이고 국민 체육 대회에는 그렇게까지 동기부여는 없었다. 지금 되돌아봐도 ‘그런 일도 있었지’ 정도였다. 고시엔 대회에서 그런 규정이 있었다면 후회해도 분통을 차마 다 풀진 못했을 테지만”이라고 말했다.[8]

3학년 때의 선발 대회(제30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서는 타자로서도 맹활약하는 등 30년 만에 2경기 연속 홈런을 때려냈다(또한 당시의 한신 고시엔 구장은 럭키 존이 있었지만 고교 야구에도 나무 배트를 사용하고 있었다. 금속 배트의 사용이 인정된 것은 1974년부터이다). 3학년 여름에는 도쿄 도 대회의 결승전인 메이지 고등학교와의 맞대결에서 1대 1로 맞이한 연장 12회초에 4점을 내줬고 그 뒤에 5점을 빼앗기는 등 역전 끝내기 패배를 당해 5시즌 연속 고시엔 대회 진출은 무산됐다. 이 때 와세다 실업고등학교 야구부장의 인솔로 고시엔 본대회를 향해서 오사카로 출발하는 메이지 고등학교 선수들을 와세다 실업고 야구부원 전원이 도쿄 역에서 전송했다. 원래 사다하루는 아버지의 의향도 있어서 대학 진학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고교 2학년 여름에는 이미 요미우리 자이언츠로부터 권유가 있었지만 대학 진학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요미우리리 측의 제안을 거절했다.[8] 사다하루는 “만약 5시즌 연속 출장을 이뤘더라면 야구에 확실히 구분을 해서 대학에 갔을 것이라 생각한다. 마지막에 나가지 못했던 것으로 기분이 어중간해 졌다”라고 말했다.[8]

프로 야구의 각 팀이 열심히 권했지만 특히 열심이었던 것이 사다하루와 인연이 깊은 고시엔 구장을 연고지로 하는 오사카 타이거스였다. 신문에는 ‘사다하루, 한신으로’라고 크게 보도했고 부모도 고졸 선수가 많은 한신을 추천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초에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사정도 있어 스카우트에 참여하지 않았던 요미우리가 서둘러 “대학에 간다고 듣고 있어서 획득할려고 나서지는 않았지만 프로로 간다면 꼭 우리한테”라고 영입에 참여했다. 원래 도쿄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사다하루는 ‘프로로 간다면 요미우리’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마음은 아주 흔들렸다고 한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자신의 기분을 관철해서 요미우리에 입단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형인 데쓰조가 동의해 준 것도 마음이 든든했다고 한다.[8]

프로 야구 선수 시절[편집]

침체기[편집]

1959년에 계약금 1,800만 엔,[10] 연봉 144만 엔, 등번호 ‘1’번을 배정받고 고졸 신인으로서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요미우리에 입단했다. 등번호 ‘1’번에 관해서는 중국어로 ‘王’(왕)을 ‘ワン’(원)으로 발음하는 것에서 영어의 ‘one’을 붙여졌다는 설이 있지만 등번호 그 자체는 미나미무라 유코의 은퇴에 의해 1번이 비어있었기 때문에 그 번호를 이어받게 됐다는 것이 실정이다. 프로에 입단한 동기로는 무라야마 미노루, 반도 에이지, 가와무라 야스히코, 에토 신이치, 다나카 도시유키, 하리모토 이사오, 아다치 미쓰히로 등이 있다. 당초는 투수로서 입단했지만, 감독인 미즈하라 시게루에게서 “이봐, 사다하루. 너는 투수로서 성공하지 못한다”라는 말을 듣고 곧바로 1루수로 전향하였다.

당시 에이스였던 후지타 모토시는 사다하루의 인상에 대하여 “고시엔에서 활약하는 등 고교 시절에 너무 노력한 탓일까, 내가 보는 한 투수로서의 사다하루는 녹초가 돼있었다”라고 말했다. 또한 전년도에 은퇴해 그 해부터 코치를 맡은 가와카미 데쓰하루는 “뭐랄까, 투구 코스가 부드럽다. ‘어,어!’라는게 없다. 그러나 배팅은 정말 대단했다”라고 말했다. 가와카미에 의하면 사다하루의 배팅은 자세부터 스윙까지 얼굴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18세의 어린 나이에 이미 기본이 완성돼 있었다고 한다. 당시 2군 감독이었던 지바 시게루는 연습 후에 사다하루와 온천에서 입욕했을 때 “사다하루의 체격에는 놀랐고, 상당히 좋은 체격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솟은 어깨로 대성공한 투수는 없을 뿐더러 투수로서는 힘들 것이다”라고 느껴 미즈하라에게 “투수로는 안 된다. 그렇지만 타자라면 가와카미의 절반은 친다”라고 야수 기용에 대한 의견을 냈다.

사다하루 자신은 “(자신이 투수로서 적용되지 않은 것은)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다. 그렇지만 역시 야구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투수를 동경하기 마련이기에 ‘너는 내일부터 야수다’라고 들었을 때 솔직히 말하면 슬펐다”라고 말하곤 있지만 가와카미의 은퇴 직후였고, 가와카미의 후계 1루수로서의 기대는 컸었다. 라이벌도 이미 전성기를 지난 요나미네 가나메 정도 뿐이었고 그러한 요나미네도 스프링 캠프에서 사다하루의 타격 연습을 보고는 “나는(1루 포지션 경쟁에선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외야수로 돌아가겠다”고 했다고 한다.

시범 경기에서 5개의 홈런을 날리는 등 순조롭게 시즌을 맞아서 4월 11일 고쿠테쓰 스왈로스와의 개막전에서는 고졸 신인이면서 7번 타자 겸 1루수로서 선발 출전했다.[11] 그러나 이 경기에서 가네다 마사이치와 맞붙어 3타석에서 삼진 2개와 볼넷 1개에 그쳤다. 이 결과는 나가시마 시게오의 첫 경기에서 4타석 연속 삼진과는 자주 비교된다. 이것을 계기로 시범 경기에서 일변하여 타격이 멈췄고 26타석 무안타라는 부진이 계속돼 방망이를 956g에서 938g으로 가볍게 했다.

4월 26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우노 미쓰오가 소속된 고쿠테쓰와의 6차전(더블헤더 2차전)에서는 득점없이 0대 0에서 맞이한 7회초 2사, 고쿠테쓰의 실책으로 출루한 사카자키 가즈히코를 1루에 두고 사다하루에게서 세 번째 타석이 돌아왔다. 미즈하라 감독은 대타 작전도 생각했지만 당시 팀은 개막전에서만 가네다에게 패했을 뿐 그 후 8연승하는 등 성공적인 시즌 개막을 맞이했다. 고쿠테쓰와의 경기에서도 이날 1차전을 포함해서 4연승을 달리고 있는 중이라 여유가 있었고 또한 주자가 득점권이 아닌 1루에서 이날 사다하루의 타순은 8번으로 다음 타자가 투수였기 때문에 대타를 아끼고 싶었던 사정도 있어서 사다하루를 그대로 타석에 내보냈다. 사다하루는 고쿠테쓰의 무라타 겐이치가 볼카운트 2-1에서의 4구째에 던진 몸쪽 낮은 커브를 걷어올려서 타구는 우측 스탠드 맨 앞줄에 떨어졌다. 수비에서는 이토 요시아키가 4피안타로 완봉해서 경기는 요미우리가 2대 0으로 승리했다. 공식전 첫 안타가 결승 2점 홈런(11경기째 출전)을 기록하면서 이것이 사다하루가 기념할 만한 제1호 홈런이 됐다.

그해 6월 25일 천황 참관 경기에서는 7회에 2대 4로 2점을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고야마 마사아키로부터 4호 홈런이자 동점포인 2점 홈런을 때려냈다. 이것이 나가시마 시게오와의 ON(오 사다하루와 나가시마의 영문 이니셜)콤비·동반 홈런인 제1호 홈런이다.

그러나 그 이외에는 거의 눈에 띄는 활약도 없었고 프로 1년째는 타율 1할 6푼 1리와 홈런 7개로 당초의 기대치에서 본다면 저조한 성적을 남기면서 시즌을 마쳤다. 특히 눈에 띈 것이 72차례의 삼진이 많아지면서(2.7타수에 삼진 1개 꼴) ‘왕은 왕이라도 삼진왕’(王は王でも三振王) 등이라는 야유섞인 표현과 타격 부진에 대한 혹평을 받아야만 했다. 다만 주력 선수로서도 걱정하고 있었던 미즈하라의 옆자리를 항상 차지하고 “감독님, 지금 1루수의 플레이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라고 당당하게 질문하기도 하였고 기자로부터 “(부진에 대한)중압감은 없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아도 “별로였고, 써 주시는 건 감독님이시니까”라고 대답해 신인으로서는 이례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한 기대에 못 미친 성적에도 불구하고 2년째의 연봉은 추정 연봉 140만 엔에서 160만 엔으로 올라갔다. 이것은 연습 때의 공 줍기를 할 때 자비로 전용 실을 구입해서 정성스럽게 공이 훼손된 것을 수선하고 있었던게 구단 대표가 평가해줬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러한 구단의 평가에 감명을 받은 사다하루는 이후 현역에서 은퇴할 때까지 단 한 번도 계약 갱신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일은 거의 없었다. 1974년의 계약 갱신에서는 2년 연속 3관왕임에도 불구하고 연봉이 동결됐지만 그런데도 불평 한마디도 없이 계약서에 서명했다.

프로의 물에 익숙해진 2년째는 타율 2할 7푼과 홈런 17개(이 시즌에서의 팀 최다)와 팀의 주축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성적을 남겼고 올스타전에서도 팬 투표로 선출됐다. 이것은, 도쿄 6대학 야구의 대형 1루수인 기쓰기 후미오의 위기감을 안고 있었던 것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러나 삼진도 101개를 기록하여 여전히 많았다.

3년째인 이듬해 1961년, 가와카미가 미즈하라의 뒤를 이어 감독으로 취임했다. 가와카미는 사다하루에게 나가시마를 잇는 중심 타자로서의 활약을 기대했지만 타율 2할 5푼 3리, 홈런 13개로 프로 2년째보다 성적이 떨어져서 가와카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이 해에 주니치 드래곤스에 입단해 신인이면서 에이스로 활약한 곤도 히로시는 사다하루에 대해 “직구는 어느 정도 대응하고 있지만 커브를 던지면 간단히 헛스윙을 해서 엉덩방아를 찧고 있었다. 불쌍하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고졸 3년째로서는 그 나름대로의 성적은 내고 있었지만 계약금의 액수나 수뇌부의 기대에서 본다면 부족한 숫자에 불과했다.

큰 기대가 걸리면서 기대에 못 미칠 정도로 주춤거리고 있던 사다하루에게는 한큐 브레이브스의 에이스 요네다 데쓰야와의 맞트레이드 설도 나오고 있었다(결과적으로 한큐가 거절했기 때문에 이 트레이드는 무산됐다).

전환기·외다리 타법[편집]

1961년 시즌 종료 후 아라카와 히로시가 요미우리의 타격 코치로 부임했다. 아라카와 취임은 요미우리 신문의 관계자가 히로오카 다쓰로를 거쳐서 가와카미에게 아라카와를 추천한 것[12]이며 가와카미는 에노모토 기하치를 키운 아라카와의 타격 코치로서의 수완을 믿고 사다하루를 맡겼다. 가와카미는 사다하루에 대해서 “타율 3할, 25홈런은 충분히 칠 수 있는 소질이 있다”고 기대하고 있으며 그 전망에 대해 성적이 생각처럼 늘지 않는 이유는 연습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뚜렷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고 그 때문인지 자신감을 갖지 못하여 더욱이 연습에 전념하지 않는다는 악순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가와카미가 아라카와에게 가장 강하게 기대했던 것은 사다하루에게 연습에만 전념하도록 의식 개혁을 시키는 것이었다. 1961년 추계 스프링 캠프에서 오랜만에 사다하루를 본 아라카와는 “뭐야, 이런 스윙에서는 피구공에도 못 맞히겠다. 노는 것은 능숙했는지 몰라도 야구가 서툴렀다”라고 지적했다. 사다하루는 울컥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라카와는 동시에 “이만큼 나쁜 타격 자세(치기 어려울 때 손발의 움직임이 따로 놀아서 불안정 또는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간단하게 스윙 자세가 무너진다)로도 2할 7푼을 때려낸 적도 있으니까 역시 소질은 뛰어나다”라고 느꼈다고 한다.

아라카와는 또한 사다하루는 프로의 직구에 대응하려고 하는 나머지, 공을 앞에서 칠려고 하기 위해 그립 포지션이 안정되지 않는 것이 결점이라고 판단해 그것을 수정하기 위해 다양한 폼을 시도했다. 그 중 하나가 ‘외다리 타법’(一本足打法)이었는데 스프링 캠프에서는 몇 차례나 시도했던 타법의 하나에 지나지 않아서 겨우 2, 3일 정도 연습했을 뿐이었다.

1962년 시즌이 개막되면서 가와카미는 사다하루에 대한 기대를 담아 개막전(4월 7일, 한신전)에서 공식전에서는 처음으로 사다하루를 4번 타자로 기용했다(공식전 이외에서는 전년도 일본 시리즈 1차전과 2차전에서 사다하루를 4번으로 기용했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나도 홈런 갯수는 불과 9개로 성적은 나아지지 않았고 특히 6월 후반에는 극도의 부진에 빠져 있었다. 자신감을 갖지 못한 사다하루는 아라카와와의 연습에도 열중하지 않았다고 한다. 팀도 흐름을 타지 못해서 2위와 3위를 오갈 정도로 침체된 상태였다. 시즌 중반이던 7월 1일, 경기를 앞둔 코칭 스태프 회의에서 벳쇼 다케히코 수석 코치가 화풀이를 하듯 “사다하루가 못 치니까 이기지 못한다”라고 아라카와에 말했고 아라카와도 화를 내며 무심코 “나는 사다하루에게 3관왕을 시켜주려고 생각하는 마음으로 지도하고 있다. 홈런만이라면 언제라도 때리게 해준다”라고 맞받아쳤다(아라카와는 훗날 ‘3관왕을 시킨다’고 말한 것은 허풍을 떨어버린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벳쇼는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듯 “그 홈런만이라도 좋으니까 치게 하라”고 언성을 높이며 화를 냈다. 난감해 하며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아라카와는 안색을 바꾸고 방을 뛰쳐나간 뒤 사다하루를 잡고선 “오늘부턴 외다리 타격을 하되 삼진을 두려워 하지마라”고 명령했다.[13][14]

더욱이 사다하루 본인에 의하면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외다리 타격을 시작한 이유는 기억이 확실하진 않다. (중략) 나 자신은 보통의 타법으로 칠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4년차 시즌 중에 아무래도 손해보는 일이 많아져서 그렇다면 차라리 오른발을 들어서 때려보자하고, 그 타석에서 대폭발했다.[15]

1962년 7월 1일, 미하라 오사무가 이끄는 다이요 웨일스와의 더블헤더(15·16차전, 가와사키 구장)에서는 전날 밤부터 당일 낮까지 우천의 영향에 의해 경기 개시가 30분 지체됐다. 전날 밤 경기(14차전)에서는 22세의 사다하루를 3번 타자로 기용했지만 2타수 2삼진 볼넷 1개로 끝나 팀도 이틀 간격의 좌완 스즈키 다카시에게 눌려서 안타는 스도 유타카의 텍사스 안타 1개만, 볼넷은 2개로 완봉패를 당했다. 6개의 피안타로 완투하고 있던 후지타 모토시를 도와주지 못하고 9회말 선두 타자 모리 도루의 홈런에 의해 0대 1로 끝내기 패배를 맛보았다. 그 때문인지 이날 요미우리는 경기 시작 전의 타격 연습을 10분간 연장했고 더욱이 첫 번째 경기에서 사다하루를 1번 타자로 기용했고 사다하루는 외다리 타법을 실행에 옮겼다.

사다하루는 선발이자 신인이던 우완 이나가와 마코토로부터 첫 번째 타석에 2스트라이크 노 볼에서의 3구째 바깥쪽 커브를 우전 단타, 3회초 두 번째 타석에서 초구를 몸쪽 낮은 직구를 우측 관중석에 선제 10호 솔로 홈런(통산 47호, 16경기 68타석째)을 때려냈다. 세 번째 타석에서는 좌완 곤도 마사토시로부터 6회초 네 번째 타석에 2사 만루 2-3 풀카운트에서 커브를 받아쳐 중견수 왼쪽으로 향하는 단타를 기록해 누상에 있던 주자를 모두 불러 들이는 활약을 보여 결과는 5타수 3안타 4타점이었다. 경기에서 사다하루(3회초 솔로 홈런), 모리 마사히코(4회초 솔로 홈런), 시오바라 아키라(5회초 솔로 홈런), 후지모토 신(8회초 3점 홈런) 등의 타자들이 총 4개 홈런을 포함한 13안타의 맹공과 나카무라 미노루 투수의 2루를 허용하지 않는 3피안타 완봉승을 따내 요미우리는 10대 0으로 승리했다.

두 번째 경기에서도 사다하루는 1번 타자로 기용돼 결과는 4타수 무안타였지만 2회에 유격수 겸 8번 타자인 후지모토가 1사 만루 상황에서 시마다 겐타로로부터 우익수 앞에 선제 2점 적시타를 날렸고, 7회에 미야모토 도시오아키야마 노보루를 상대로 좌익 폴대에 솔로 홈런을 날렸다. 투수진은 미야타 유키노리(3이닝)에서 호리우치 아쓰시(6이닝)의 계투로 프랜시스 아그윌리의 3피안타만, 7회 우익 폴대에 솔로 홈런의 실점으로만 막아내면서 끝까지 지킨 끝에 팀은 3대 1로 연승했다.

후에 아라카와는 “그날 안타가 나오지 않았더라면 외다리 타법은 그만뒀을 것이다”고 말하고 있어서 단 하루에 사다하루의 운명이 좌우된 것이 된다. 다만 이 때의 사다하루는 타격폼을 바꾸는 것이 드물지 않아서 7월 1일 경기에 있어서 타격폼의 변화에 대해서는 이튿날 신문에는 요미우리 구단의 모회사인 요미우리 신문을 비롯해서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7월에 들어가면서 사다하루가 연거푸 2개, 3개로 홈런 페이스가 올라간 점에서 “그러고 보니 이상한 타법을 하고 있다”라며 떠들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8] 시즌이 개막된 4월부터 6월까지 9개의 홈런을 기록했던 사다하루는 7월 한 달에만 10개의 홈런을 날리면서 단번에 홈런을 양산하는 페이스를 끌어올렸다.

사다하루 자신도 기대 이상의 결과가 나오게 되자, 외다리 타법에 대한 진지하게 임하는 기분으로 연습에 들어가게 됐다. 이 때의 연습의 가혹함, 연습량을 나타내는 에피소드로서 ‘연습에 사용한 방의 다다미가 닳아서 줄어들고 끝이 잘게 갈라졌다’, ‘연습 이튿날 아침에 얼굴을 씻으려고 하면 팔을 움직이려고 해도 움직이지 않았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검도가인 하가 준이치의 문하에 제자로 들어가서 앉은 채로 칼을 뽑는 것을 배움과 동시에 가타나에 의한 거동의 지도를 받았다.[16]

특히 유명한 에피소드로서 ‘천장에서 늘어뜨린 실의 끝에 붙인 종이를 가타나로 자른다’라는 연습이 있었다. 이것은 외다리 타법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외다리 타법은 투구의 타이밍을 늦추면 통용되지 않게 된다고 하는 약점이 있었다. 7월 1일에 외다리 타법을 보여줬지만 그 후에 고쿠테쓰의 가네다 마사이치에게서 이같은 약점을 간파 당해 너무나도 빨리 벽에 부딪히게 됐다. 예를 들면 가네다는 직구를 던지는 시늉을 해서 느린 공을 던지는 등으로 타격 타이밍을 비켜가는 투구를 보였던 것이다. 아라카와도 그 약점을 파악하고 있어서 약점이 간파되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거기서 외다리로 서서 교묘하게 투구를 해도 대응할 수 있는 훈련을 사다하루에게 지도했다. 이것은 기술로서 가타나로 종이를 자를 정도로 타격을 예민하게 한다는 이상으로 타석내에서의 집중력을 높이는 것으로서 불필요한 것을 생각하지 않아도 될 만큼이라는 정신 단련의 목적도 있었다.

이러한 사다하루의 연습이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해서는 당시 팀 동료였던 히로오카 다쓰로, 후지타 모토시가 당시 사다하루의 연습을 지켜본 것을 떠올리면서 히로오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무나도 긴박감이 있는 연습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후배의 연습이 어느 정도인지 하고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편안하게 지켜보자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 사이엔가 지켜보고 있던 사람 전원이 정좌해서 보고 있었다. 정말 굉장한 연습이었다. 그런 필사적인 연습을 하는 선수는 이제 없다.

후지타도 그 날의 상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방 안에는 사다하루의 움직이는 소리와 아라카와 코치의 목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사다하루가 조금이라도 나쁜 움직임을 하면 ‘긴장을 늦추지 마라! 그럴려면 빨리 돌아가라!’라는 아라카와 코치의 호된 질책에 사다하루도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해 연습이 재개된다. 그런 자리에 같이 있었더라면 보고 있는 자신들마저 질책을 받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책상다리를 하거나 엎드려 누워서 볼 수 없었다.

난카이 호크스 시절의 노무라 가쓰야도 자신의 저서 《교진군론》 중에서 사다하루의 연습의 굉장함을 회상하고 있다. 어느 날 사다하루와 노무라가 각각 친구와 함께 긴자의 음식점에서 술을 마시고 있을 때 밤 10시가 되자 사다하루가 “노무 상(ノムさん, 노무라의 애칭), 미안하지만 아라카와 코치랑 연습을 하기로 해서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라고 하며 노무라가 만류해도 사다하루는 연습을 하러 갔다. 그 때 노무라는 “아… 언젠가 저 녀석이 날 뛰어 넘겠구나…”(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는 노무라가 사다하루보다 통산 홈런수가 위였다)라고 느꼈다고 한다. 그 후 노무라가 아라카와 코치에게 부탁하여 사다하루의 연습을 견학해 본 결과, 단지 ‘대단하다’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고 사다하루에게 도저히 건넬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으며 “사다하루의 휘두르는 방망이에 비교하면 내 것은 그냥 놀이였을 뿐이다”, “사다하루가 그토록 이렇게 연습을 열심히 하니까 세계 기록을 세워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라고 밝혔다. 더욱이 노무라는 사다하루를 이렇게 평가했다.

실적이 있는 선수는 주위에서 뭐라 할 수 없는 점을 이용하여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설렁설렁 하려고 하는데 사다하루는 일절 타협하지 않고 자신에게 엄격했다. 중심 선수는 팀의 귀감이 되지 않으면 안되고 사다하루는 정말 그랬다.

이 해에 38홈런과 85타점을 기록하여 처음으로 홈런왕타점왕을 동시에 획득했다. 이후 사다하루는 은퇴할 때까지 외다리 타법을 고수하면서 이 타법으로 822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1977년 가지와라 잇키와의 대담[17]에서는 ‘두 다리라면 타율 4할도 노릴 수 있다’라고 말한 가지와라에게 ‘한 다리로 안되면 은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신인 시절인 1959년 시즌에는 사다하루를 잘 속였던 곤도 히로시도 외다리 타법이 된 사다하루의 변화에 놀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곤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혀 빈틈이 없는 타자가 됐다. 내가 생각하는 곳에 완벽하게 던지지 않으면 막을 수 없다. 공 1개 정도 빗나가면 볼이 되고, 공 1개 정도 안쪽에 들어가면 홈런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이 같은 타법으로 홈런 기록을 달성하여 미국의 언론에서는 ‘홍학 타법’(フラミンゴ打法)이라고 불리게 됐다. 메이저 리거 중에서는 ‘플라밍고 사다하루 오’(フラミンゴ・サダハル・オー)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1981년부터 1987년까지는 고라쿠엔 구장, 1998년부터 현재는 도쿄 돔의 1번 게이트는 ‘오 게이트’(王ゲート)라고 불리고 있으며 그 기념물로서 재현되고 있다. 또한 2002년에는 사다하루의 현역 시절 배팅을 재현한 ‘오 사다하루 슈퍼 리얼 피규어’(868개 한정)이 판매되면서 외다리 타법이 재현되고 있다.

이듬해 1963년에는 처음으로 타율 3할과 40홈런을 기록하여 2년 연속으로 홈런왕을 차지했다. 나가시마와의 콤비를 ‘ON포’라고 부르는 호칭도 정착돼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됐다.

시즌 55호 홈런[편집]

1964년 3월 20일, 하야시 기이치가 이끄는 고쿠테쓰와의 개막전(고라쿠엔 구장)에서는 프로 15년차로 통산 10번째의 개막전 선발 투수를 맡는 가네다 마사이치 투수와 가랑비가 내리는 와중에서 대결을 펼쳤다. 23세이자 프로 6년차인 사다하루는 개막전에서 15타석 안타가 없었지만 16타석째에 3회말 2사에서 1루에 시바타 이사오를 두고 1스트라이크 3볼에서의 5구째인 한 가운데 약간 낮은 직구를 우측 장외로 2점 홈런(통산 116호)을 날렸다. 타구는 우측 관중석 장외에 설치돼 있던 롤러 스케이트장 근처의 커피숍 지붕까지 날아갔고 비거리는 151m로 추정하고 있다. 가네다의 입장에서 홈런을 맞은 공은 “놓치면 볼이었고 사다하루에게 삼진을 빼앗을 수 있는 절대적인 공”이라고 말하고 있다. 수비에서는 처음으로 개막전 선발 투수를 맡은 다카하시 아키라가 6피안타를 기록하여 완투해 경기는 3대 1로 요미우리가 승리했다.

이 홈런은 가네다를 경악하게 만들었지만 가네다는 외다리 타법 전향 후에도 사다하루를 종종 속여온 적도 있어 안타나 홈런을 맞은 구질과 코스를 계속 던졌는데도 불구하고 그 해의 사다하루가 연거푸 때려냈다고 한다. 이로 인해 가네다는 “나가시마는 맞대결하기 전부터 연구하고 있었지만 사다하루는 맞고 나서부터 연구했다”라고 말하고 있다(다른 TV 프로그램에서는 “나는 타자 연구따윈 한 적은 없다. 연구한 것은 오 사다하루가 처음이었다”라고 말했다). 그 해에 사다하루는 가네다로부터 동일 투수에게 시즌 홈런 수의 타이 기록인 7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5월 3일, 후지모토 사다요시가 이끄는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7차전, 고라쿠엔 구장)에서는 사상 최초로 한 경기 4타석 연속 홈런을 기록했다. 1회에 구니마쓰 아키라가 1루로 진출한 상황에서 선발 좌완 투수인 오타 고이치를 상대로 풀카운트에서 6구째로 날아온 한가운데 약간 높은 커브를 우측 장외로 쳐냈다. 도미사카 경찰서 구장 파출소를 넘어 아이스 팰리스와 롤러 스케이트장 중간까지 뻗는 약 150m의 14호 2점 홈런이었다. 계속된 4회에는 한가운데 약간 높게 날아온 직구를 오타의 초구의 또 다시 쳐내 15호 솔로 홈런, 6회에는 팀의 세 번째 투수로 등판한 와코 도모오로부터 1스트라이크 2볼에 이은 4구째 한가운데 높은 커브를 16호 솔로 홈런으로 쳐냈다. 게다가 7회에는 시바타가 2루에 있는 상황에서 한신의 네 번째 투수인 혼마 마사루가 1스트라이크 2볼에 이어 4구째로 던진 바깥쪽 낮은 직구를 17호 2점 홈런으로 연결했는데 모두 130m 이상의 홈런으로 4타수 4안타 6타점을 기록했다. 수비 면에서는 투수 다카하시 아키라가 완봉해 요미우리가 9대 0으로 완승했다. 이 시점에서 39타점, 4할 5리의 타율을 기록하여 3관왕에 올랐다. 걷잡을 수 없는 사다하루의 타격에 맞서기 위한 대책으로 이튿 뒤인 5월 5일 히로시마와의 더블헤더 2차전(8차전, 고라쿠엔 구장)에서 시라이시 가쓰미 감독이 7회말 1사 상황에서 ‘오 시프트’(王シフト, 다른 말로 시라이시 시프트(白石シフト))라고 불리는 수비 체제를 시작해 큰 화제를 모았다.

‘마지막 4할 타자’라고 불린 테드 윌리엄스를 상대하고자 고안한 ‘부드로 시프트’(ブードローシフト)를 원형으로 한 수비였는데 사다하루의 필드의 오른쪽 절반에 집중된다는 점을 고려해서 넣어 이 가운데 야수 6명을 우익 쪽에 배치했다. 그러나 타석에 들어선 사다하루는 이러한 수비 체제에도 끄떡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풀히팅이나 공을 가볍게 밀어치는 타법도 하지 않고 투수 우가리 미치오가 던진 1스트라이크 2볼에 이어 던진 4구째 몸쪽 높은 공을 백스크린부터 불과 오른쪽 방향으로 18호 홈런(통산 133호)을 때려냈다. 7월 19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고쿠테쓰와의 경기(21차전)에서는 7회에 시오바라 아키라가 유격수 오른쪽으로 빠지는 내야 안타를 쳐내며 출루함으로써 무사 1루 상황(시오바라는 이 날 2개째의 안타)이 됐다. 1스트라이크 뒤에 한자와 시로가 2구째로 던진 약간 바깥쪽으로 기울 정도의 낮은 직구가 하늘을 가르며 높이 9m의 백스크린을 넘겨 기록 게시판 사이의 스탠드에 닿는 150m급 37호 2점 홈런을 기록했다(통산 152호). 고라쿠엔 구장이 개장된 이래 백스크린을 넘긴 홈런은 사상 최초였다.

9월 6일, 시즌 129번째 경기이자 미하라 감독이 이끄는 다이요와의 더블헤더 1차전(24차전, 가와사키 구장)에서는 1회 첫 번째 타석에서 투수 스즈키 다카시가 1스트라이크 1볼에 이어 3구째로 던진 무릎께로 낮게 떨어지는 몸쪽 낮은 커브를 52호 솔로 홈런을 때려냈고 6회에 세 번째 타석에선 교체돼 갓 등판한 투수 미네 구니야스가 던진 초구 한가운데 높은 직구를 역풍 속에서도 53호 홈런을 기록했다. 전년도에 노무라 가쓰야가 기록했던 시즌 홈런 기록 52개를 단번에 앞질렀다.

15일 후, 9경기를 치른 후인 9월 21일에 히로시마에서 치른 28차전을 나나모리 요시야스가 마지막 승리를 유일한 완봉승(피안타는 3회에 커브를 쳐낸 다나카 다카시와 3루수와 유격수 사이로 빠져나가는 공을 날린 오와다 아키라 두 사람에게만 허용했고 히로시마에게 3루를 밟을 기회를 주지 않았음)으로 장식했다. 이 경기에서는 그러나 4회에 아니야 소하치가 1볼에 이어 2구째로 던진 한가운데 높은 직구를 사카자키 가즈히코가 백 스크린 쪽으로 선제 5호 솔로 홈런을 날린 데 이어 6회에는 나가시마 시게오가 중전 안타를 친 1사 1루 상황에서 아니야가 볼카운트 1-1 뒤에 던진 무릎쪽으로 떨어진 안쪽 슬라이더를 사다하루가 치면서 타구는 역풍을 거스르면서 우익 펜스를 간신히 넘어 53호 홈런 이후 37타석 만에 54호 2점 홈런을 기록했다. 이날 히로시마는 사다하루의 안타를 약 15개나 막아내 사다하루가 수위 타자(3관왕)에 오르는 것을 저지했다는 평가를 받은 ‘오 시프트’를 해제했다(이유는 비공개). 날아간 54호의 홈런을 쫓던 히로시마의 우익수는 고사카 요시타카였다.

9월 23일, 다이요를 상대로 치른 최종전인 더블헤더 2차전(28차전, 고라쿠엔 구장)에서 비가 내리는 가운데 5회말엔 투수 사사키 기치로에게서 시즌 55호 홈런(통산 170호)을 24세 나이에 기록했다. 이것은 2013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블라디미르 발렌틴에 의해 경신될 때까지 오래도록 깨지지 않는 일본 프로 야구 기록으로 남았다. 55개 홈런 중 24개는 비거리가 400피트(약 122m) 이상으로 메이저 리그 구장에서도 충분히 중간까지 뻗는 대형 홈런이며 결코 구장이 좁은 덕에 얻어진 홈런이 아니라고 우사미 데쓰야는 평가하고 있다. 참고로 그해 센트럴 리그 홈런 부문 2위는 마이크 크레스닉(당시 다이요 소속)의 36개였고 양대 리그 합친 홈런 2위는 41개를 기록한 노무라 가쓰야(당시 난카이 소속)였는데 사다하루의 기록은 이들을 10개 이상이나 앞서고 있다.

그 해에 요미우리는 우승을 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정규 페넌트레이스 우승 팀은 한신) 사다하루는 시즌 MVP로 선정됐다. 사다하루와 아라카와 코치는 외다리 타법에 그렇게까지 강한 집착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고 실제로 이 시즌의 캠프에서는 두 다리 타법으로 돌아가는 것을 검토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시즌 55 홈런’이라는 위업 달성을 계기로 사다하루는 외다리 타법이야말로 자신의 배팅 스타일이라고 확신했다. 이 해 오프 때부터 시범 경기 도중까지 두 다리 타법으로 돌아갔던 3개월 동안 자신에게는 외다리 타법이 자신에게 가장 적합하다는 사실을 재확인했고 그러한 확신이 55개 홈런이라는 그 해의 대기록으로 이어졌다고 밝혔다.[18]

또한 사다하루는 ‘나는 타율을 신경쓰는 타자가 아니다’라고 말하곤 있으나 상대 배터리가 경계하여 볼넷 또는 고의사구가 늘어남과 관련하여 타율이 남기 시작해 1964년에는 에토 신이치와 마지막까지 수위 타자 타이틀을 놓고 경쟁을 계속했다. 이 해에는 통산 2번째의 타점왕도 획득했으나 수위 타자 경쟁에서는 3리차로 에토에는 미치지 못한 채 3관왕은 놓쳤다. 이듬해 1965년에는 시즌 중의 부상의 영향으로 홈런은 42개로 감소했으나 4년 연속 홈런왕과 109타점으로 2년 연속 통산 3번째의 타점왕을 연거푸 석권했다. 타율은 다시 에토에는 미치지 못하고 2위를 기록했지만 2년 연속 시즌 MVP로 선정됐다.

1966년과 1967년에는 모두 97경기에서 40호에 도달하는 나름대로의 활약으로 홈런 갯수가 증가되는 모습이 보였지만(1985년에 랜디 바스가 타이 기록을 만들었으나 현재까지도 40호 도달한 것과 관련해서는 가장 빠른 기록) 모두 시즌 종반에 페이스가 떨어지면서 기록 경신에는 미치지 못했다.

훗날 1992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 있어서 주력 선수의 한 명이 된 마쓰이 히데키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게 됐다. 요미우리 감독으로 갓 복귀한 나가시마 시게오는 그 때 마쓰이의 등번호를 55번으로 했으나 그 계기가 된 기록이기도 하다.[19]

라이벌 대결[편집]

1968년 9월 17일에 열린 한신전(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프로 2년차였던 에나쓰 유타카에게서 이나오 가즈히사와 맞먹는 시즌 353개째 탈삼진을 당했다. 그리고 나서 에나쓰는 일부러 8명의 타자를 삼진없이 넘긴 뒤 다시 사다하루를 상대로 삼진을 뺏아내 354개째의 탈삼진이라는 신기록을 세웠다. 사다하루는 의도적으로 삼진을 뺏지 않고 타석을 한 바퀴 돌린 것에 대해 “나는 이거(눈썹에 침을 바르는 시늉을 하며)라고 생각한다”라며 회의적인 생각을 내비쳤다. 하지만 에나쓰와 맞붙은 것에 대해서는 “삼진을 두려워하는 스윙만큼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어중간한 스윙으로는 에나츠의 공은 못 쳐낸다”라고 말해 항상 온힘을 다해서 경기에 임했다고 증언했다. 사다하루에게서 가장 많은 삼진을 뺏아낸 투수는 최대의 라이벌이었던 에나쓰였지만 그러한 에나쓰가 제일 많은 홈런을 맞았던 타자 또한 사다하루였다. 그리고 약 250차례의 맞대결하는 동안 몸에 맞는 볼이 나온 것은 딱 한 차례뿐이었는데 관계자가 이를 지적할 때까지 이들은 서로 몸에 맞는 볼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사다하루는 에나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 녀석만큼은 반드시 눌러 주겠다’, ‘저 녀석이 던진 공은 기필코 쳐내겠다’라며 서로 강한 의식을 지녔던 상대라는 점에서 최고의 라이벌이었던 것 같다.

이튿날인 9월 18일의 한신전에서는 진 바크가 위협구 수준의 공을 던지자 방망이를 쥔 채로 바크에게 거세게 항의했다. 이 때 사다하루는 첫 번째 타석에서 바크에게서 몸에 맞는 볼을 받았고 두 번째 타석은 삼진으로 넘어갔다. 그러다가 4회에 바크가 요미우리 타선에 잡혀 실책과 3연타 등을 연발하면서 나가시마도 “바크가 좀 위험하겠는데”라고 수군대던 와중에 맞이한 세 번째 타석에서 바크가 던진 머리 가까이로 위험하게 날아왔다. 포수였던 쓰지 요시노리가 “다음에 또 (이런 위협구가)오면 더 이상 못 참는다”라고 격분하던 참에 이어진 2구째도 허리 근처로 날아온 것이다(다만 사다하루 자신은 바크와 사이가 좋았던지라, ‘이봐 이봐’하고 타이르는 정도로 끝낼 생각이었다고 한다). 이에 격분한 아라카와 코치가 바크와 난투극을 벌여 두 사람 모두 퇴장당했다. 더욱이 설상가상 교체돼 들어온 곤도 마사토시가 던진 공이 사다하루의 머리를 직격했다. 그리고 나서 팀 동료인 나가시마가 좌측 스탠드를 향해 3점 홈런을 때려내면서 사실상 곤도에게 보복을 했다. 사다하루도 두부 함몰 골절이라는 중상을 입긴 했으나 접골의의 결사적인 치료 덕에 별다른 일은 없었고 2경기만 결장하고 나서 복귀한 뒤 복귀한 경기에서는 2개의 홈런을 날렸다. 한편 이 사건으로 아라카와와 난투극을 벌였던 바크는 손가락 골절로 인해 투수 생명이 끝날 정도의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참고로 사다하루는 1965년 4월 12일 주니치와의 경기(고라쿠엔 구장) 도중 주니치의 가키모토 미노루가 나가시마에게 던진 위협구로 인해 빚어진 난투극(이 난투극으로 가네다 마사이치가 가키모토에게 발길질을 했다가 퇴장당했다)이 벌어진 당시에도 싸움에는 참여하지 않고 벤치에서 혼자 손을 씻고 물을 마셨다는 일화가 있을 만큼 싸움을 싫어했다. 난투극의 도화선이 됐던 사건은 바크와의 언쟁이 유일하다.

슬럼프, 그리고 타격 3관왕[편집]

외다리 타법을 더더욱 갈고 닦아 타격의 확실성을 높인 사다하루는 1968년에 처음으로 수위 타자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후 1970년까지 3년 연속으로 수위 타자에 오르는 위업을 달성했다. 모두 홈런왕까지 겸한 2관왕이었지만 타점왕은 3년 연속으로 나가시마에게 저지당해 3관왕은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69년과 1970년에는 다시 2년 연속으로 MVP에 선정돼 MVP를 5차례나 획득한 이 시점에서 4차례를 차지한 나가시마를 추월했다.

그러나 1971년 시즌 후반에는 극심한 슬럼프에 시달렸는데 타석에 서는 것이 ‘무서웠다’라고 회고할 정도로 극심한 부진이었다. 3년 연속 수위 타자였던 타율이 2할 7푼 6리까지 급격하게 떨어졌고 홈런도 39개에 그치는 등 8년 연속으로 기록했던 40홈런에는 1개에 닿지 않았다. 그래도 타이틀은 10년 연속 홈런왕을 타이틀을 지켜내면서 타점왕도 탈환했지만 MVP는 통산 6번째로 수위 타자가 된 나가시마에게 양보했다.

그해 9월 15일에 열린 한신과의 경기(24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에나쓰에게 3연속 삼진을 당하고 0대 2로 뒤진 채로 맞이한 9회초 2사 2, 3루 상황에서 네 번째 타석에서 기록한 역전 3점 홈런은 사다하루에게 있어서 756호 홈런과 맞먹을 만큼 잊지 못할 홈런이라고 한다. 에나쓰가 던진 이 타석의 7구째이자 경기 개시로부터 153구째인 공은 몸쪽 벨트 근처로 날아드는 속구였다. 극도의 부진에 시달리고 있던 와중에 쳐낸 홈런이기도 했기에 내야를 한 바퀴 도는 동안 끝내 울었다. 사다하루로서는 “현역 시절에 유일하게 눈물을 흘린 홈런”이 된 것이었는데 이 경기에서의 홈런은 에나쓰도 잘 기억하고 있었으며 두 사람 모두 “이런 대결이야말로 야구의 참맛”이라고 말한다. 이 홈런은 사다하루의 통산 485호 홈런이었다. 더욱이 그 해 일본 시리즈 3차전(10월 15일, 고라쿠엔 구장) 9회말 2사 1, 3루 상황에서 당시 퍼시픽 리그를 대표하는 투수였던 야마다 히사시가 볼카운트 1-1에 이어 3구째로 던진 몸쪽 낮은 공을 골라내며 시리즈의 흐름을 결정짓는 역전 끝내기 3점 홈런(시리즈 통산 21호)을 때려내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이 홈런에 대해서도 “마치 공중에 둥실둥실 뜨는 듯한 기분으로 베이스를 돌았던 것은 그때 뿐으로 전무후무한 경험이었다”라고 말하고 있어 통산 홈런에는 포함되지 않아도 기억에 남는 홈런이라고 밝혔다.

한편, 슬럼프는 다음해인 1972년까지 그 영향이 지속되면서 너무나도 심각한 부진에 빠져있던 사다하루를 지켜본 가와카미 데쓰하루 감독도 두발 타법으로 되돌리도록 권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32세의 사다하루는 완고한 고집으로 외다리 타법을 관철해서 슬럼프에서 벗어나 9월 20일에는 무게 923g, 길이 88cm의 압축 배트로 마침내 공식전 7경기 연속 홈런 기록을 달성했다. 9월 11일에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투수 미야모토 요지로로부터 34호 솔로 홈런(고라쿠엔 구장, 통산 520호)을 때려냈고 13일엔 선발 우에다 지로가 던진 슬라이더를 35호 솔로 홈런으로 연결지었고 이어서 에나쓰가 던진 직구를 노려 36호 솔로 홈런(고라쿠엔 구장)을 기록했다. 그 다음날인 14일에는 다니무라 도모히로로부터 비가 내리는 와중에 37호 2점 홈런(고라쿠엔 구장)을 때려냈고 17일에 열린 더블헤더에서는 첫 번째 경기에서 시부야 유키하루로부터 38호 솔로 홈런, 두 번째 경기에선 이나바 미쓰오로부터 39호 솔로 홈런과 쓰치야 히로시로부터 2점 홈런(시즌 40호)을 기록하는 등 이들 두 경기에서의 성적은 6타수 4안타, 그리고 볼넷 4개(고라쿠엔 구장)를 기록했다. 19일에는 신인 야마모토 가즈유키가 던진 풀카운트에서의 6구째(경기 개시부터 19구째) 직구를 41호 2점 홈런(한신 고시엔 구장), 20일에는 무라야마 미노루가 던진 4구째(시합 개시부터 15구째) 한가운데 높은 포크볼을 42호 솔로 홈런(한신 고시엔 구장)을 때려냈다. 이것은 1986년에 랜디 바스와 맞먹는 기록이지만 현재까지도 일본 프로 야구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해 전반기의 슬럼프 영향으로 타율만 2년 연속으로 3할에 못미쳤지만 홈런 48개로 다시 큰 폭으로 상승해 당시 개인 최다인 120타점을 기록하여 부활을 이루었다.

1973년에는 타율 3할 5푼 5리, 51홈런, 114타점으로 일본 프로 야구 역대 세 번째의 3관왕을 획득했다. 지금까지 9년 연속을 포함한 10차례의 2관왕인 사다하루에게 있어서 그토록 간절하게 바라던 3관왕을 달성한 것이었다. 그 해에는 통산 홈런 갯수에서도 노무라 가쓰야의 기록을 경신하여 일본 프로 야구 역대 1위로 올랐다(1973년 시즌 종료시 사다하루는 585개, 노무라는 579개).

이듬해 1974년에도 타율 3할 3푼 2리, 49홈런, 107타점을 기록으로 사상 첫 2년 연속 3관왕을 달성했다. 그해 8월 4일 한신과의 경기에서는 후루사와 겐지로부터 역대 8번째가 되는 개인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 이 즈음에는 나가시마가 이미 현역 최고령으로 전성기때 보여준 불방망이가 나오지 않아서 타 구단의 경계는 사다하루에게 집중돼 있었다. 이것은 1973년의 볼넷 124개(고의 사구 38개), 1974년의 볼넷 158개(고의 사구 45개)라는 기록에도 나타나 있다. 특히 1974년에는 볼넷과 고의 사구에 더해 출루수 294, 7할 6푼 1리의 장타율도 일본 프로 야구의 시즌 최고기록을 경신해 비공식 기록에서는 출루율 5할 3푼 2리, OPS 1.293, 홈런율 7.86, 14.9825의 RC27 등도 시즌 최고 기록이었다. 이러한 기록 가운데 장타율, 홈런율(현재의 기록 보유자는 모두 블라디미르 발렌틴) 이외의 기록은 아직 경신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요미우리는 근소한 차이의 경기에 매우 약하여 아무리 사다하루가 괴물같은 타격을 하더라도 팀의 우승 경쟁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1973년 시즌 최종전에서 센트럴 리그 우승을 극적으로 결정지어 일본 시리즈에서도 우승했지만 이듬해 1974년에는 주니치 드래곤스에게 센트럴 리그 10연패를 저지당했고 사다하루는 2년 연속 MVP에 선정됐다.

홈런 기록의 도전[편집]

사다하루의 통산 홈런이 600개를 넘어섰을 무렵부터 사다하루의 기록은 이미 메이저 리그 기록에 육박하는 것임이 인식되기 시작했다. 때마침 1974년에 행크 에런베이브 루스를 제치고 715호를 기록하였기 때문에 미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홈런 기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던 시기여서 요미우리의 간판 선수인 나가시마의 은퇴와 함께 야구 팬은 사다하루의 기록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1975년 스프링 캠프에서 다리를 다친 것의 영향으로 시즌 출장이 늦어졌고 또한 나가시마의 은퇴로 더욱이 사다하루를 타 구단들이 집중 견제하여 타율 2할 8푼 5리, 33홈런, 96타점에 그쳐 타점왕은 지켰지만 타격 부문에서 타점왕에만 그치는 등 13년 지켜왔던 홈런왕의 자리를 다부치 고이치에게 양보했다. 이 시점에서 사다하루는 35세이며, 이제 한계라는 야구계 내부에서도 나돌았다. 은퇴한 나가시마의 후계자로서 기대를 받았던 데이비 존슨이 큰 부진을 겪었고 다른 주력 선수들도 연거푸 부진에 빠지는 등 요미우리는 구단 창단 이후 처음으로 최하위(6위)로 떨어지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기록에의 도전을 동기부여로서 삼았고 더욱이 하리모토 이사오의 입단에 따른 ‘OH포’(OH砲)의 형성과 존슨의 회복으로 공격의 부담이 경감되는 등 이듬해 1976년에는 다시 팀 타선이 폭발했다. 64경기에서 30호에 도달했고 올스타전까지 32홈런이라는 쾌조의 컨디션으로 홈런을 양산했다. ‘64경기에서 30호’는 2001년에 알렉스 카브레라가 타이 기록을 만들었지만 현재도 가장 빠른 기록이다. 시즌 65경기째인 7월 3일, 나고야 구장에서 열린 주니치와의 경기(15차전)에서 2타석 연속 홈런을 날리는 등 시즌 32호로 통산 699호에 도달했다. 이 경기에서 6회에 스트레이트 볼넷에 의해 1루로 출루한 하리모토를 두고 팀의 첫 선발이자 신인이던 아오야마 히사토가 풀카운트에서 6구째 바깥쪽 높은 직구를 처음으로 좌측에 때려내며 동점 2점 홈런(통산 698호)을 때려냈다. 이어진 8회에는 주니치의 두 번째 투수로 등판한 스즈키 다카마사가 1볼에서의 2구째인 포크볼을 던져 역전 홈런인 2점 홈런을 기록했다(통산 699호).

이 경기에서부터 일수로 20일 후, 경기수로는 7경기째(삿포로, 고라쿠엔, 가고시마, 구마모토를 경유), 올스타전이 열린 직후의 한여름인 7월 23일 다이요와의 경기(16차전, 가와사키 구장)에서는 8회초 다섯번째 타석에서 투수 우자와 다쓰오가 던진 초구 한가운데 높은 포크볼을 33호 2점 홈런으로 때려내며 통산 2270경기째에 개인 통산 700호를 달성했다. 700호 홈런을 날린 가와사키 구장에서는 홈팀이 아닌 선수의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그 구장의 펜스에 기념 플레이트가 설치됐다.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히로시마전에서 3타석 연속 홈런 기록을 세워 712호까지 도달하였고(9월 30일 미와 사토루로부터 솔로 홈런 2개, 10월 1일 이케가야 고지로로부터 2점 홈런), 그로부터 6경기 후인 10월 10일 한신과의 경기(22차전, 고라쿠엔 구장)에서 후루사와 겐지로부터 2개 홈런(1회의 첫 번째 타석에서는 1루에 하리모토 이사오를 두고 볼카운트 1볼에서의 2구째 바깥으로 떨어지는 슈트를 때려서 ‘가미카제가 날린’ 46호 2점 홈런, 7회의 세 번째 타석에서는 오후 3시 2분에 초구 한가운데 높은 슬로 커브를 때려서 우측 외야 지정석 442번으로 날린 47호 솔로 홈런)을 기록하여 현역 18년째이자 통산 2317경기째에 베이브 루스의 714호와 맞먹는 기록을 세웠다(루스는 2503경기째, 에런은 2965경기째에 기록). 이튿날 10월 11일, 최초의 4타석은 4개의 4사구로 이 날의 기록 경신은 불투명해졌지만 714호의 25시간 10분 후, 8회말 다섯번째 타석에선 야마모토 가즈유키가 풀카운트 상황에서 던진 높은 볼의 슈트를 이 날의 3스윙째에 포착해서 우익 폴대의 철망을 직격하는 ‘최단 거리로 경제적’이며 파울도 되지않고 ‘손쉽게 번’ 2점 홈런(시즌 48호이자 통산 715호)을 날려(구심은 마루야마 히로시) 단번에 루스를 제쳤다(‘ ’ 안은 사다하루 자신의 발언).

10월 16일, 히로시마에서 열린 최종전에서 사다하루는 6회초에 지금까지 4피안타 1실점으로 호투하고 있던 다카하시 사토시가 던진 2스트라이크 1볼에서 5구째 한가운데 높은 직구를 노려 2점 홈런으로 동점을 만들었고(통산 716호, 오후 2시 18분) 존슨이 다카하시가 던진 한가운데로 들어오는 공을 때려 좌익 최상단 관중석에 결승 26호 솔로 홈런으로 팀 승리를 이끌었다(오후 2시 21분). 더욱이 고노 가즈마사, 가토 하지메, 시바타 이사오의 3연타로 역전극을 보여줬고 수비에서는 가토 하지메(5이닝 6피안타 3실점) - 고바야시 시게루(4이닝 1안타 무실점)의 등판 릴레이로 점수는 5대 3으로 달아나면서 ‘나가시마 교진’은 전년도 최하위에서 리그 우승을 이뤄내는 위업을 달성했고 사다하루는 개인 통산 14번째의 홈런왕을 획득했다. 그 해에 에런이 은퇴했고 사다하루의 목표는 에런의 기록인 755개로 정했다.

756호 홈런[편집]

신기록인 756호까지 40개를 남겨둔 1977년, 언론과 팬의 관심이 사다하루의 ‘세계 신기록’에 집중되고 있을 때 4월 2일 주니치와의 개막전(고라쿠엔 구장, 통산 2323경기째)에선 3회말 2사에 두 번째 타석에서 마쓰모토 유키쓰라가 던진 2구째 한가운데 낮은 커브를 쳐서 통산 14개째의 만루 홈런을 날리는 등 좋은 출발을 보이는 듯 했으나 그 후에는 타구가 좀처럼 오르지 않았고 4월의 타격 성적은 타율이 3할 5푼대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홈런도 한 달 동안 4개에 그쳤다. 5월이 되면서도 극도의 부진에 시달렸고 타율 10위 안에도 자신의 이름이 사라질 정도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홈런 경쟁에서도 좋은 출발을 보인 다시로 도미오, 헐 브리든, 야마모토 고지 등과 크게 차이가 벌어져 본인의 입에서도 “에런의 모습이 보였다고 생각했는데 흐려져 간다”는 무기력인 발언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37세가 된 5월 말 경부터 조금씩 컨디션을 되찾아 7월이 종료될 때까지 26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그리고 항상 가장 많은 홈런을 양산해왔던 8월에는 부활의 조짐이 있었는데 8월 11일에는 16년 연속이 되는 30호(통산 746호) 홈런을 기록하였고 홈런왕 경쟁에서도 선두를 달리고 있던 야마모토 고지를 추월했다. 8월에 가장 홈런이 나오지 않았던 기간은 고비였으며 신기록을 향한 카운트다운이 현실성을 띄게 되는 750호 달성 시의 9일간으로, 그 후에는 거의 한결같게 홈런을 양산했다. 8월 31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다이요와의 경기(22차전)에서 1회말 1사(당시 시각은 오후 6시 37분 40초) 상황에 출루한 도이 쇼조를 1루에 놓고 미우라 미치오가 던진 볼카운트 1스트라이크 3볼에서 5구째 한가운데로 들어오는 약간 낮은 커브를 쳐 체공시간 5초인 2점 홈런을 때려내 23초 6, 64번의 걸음으로 내야를 한 바퀴를 돌아 현역 19년째이자 통산 2425경기째, 10145타석째에서 에런과 맞먹는 755호(시즌 39호) 홈런을 기록했다(에런은 23년째, 3275경기째에 기록). 8월에만 13개의 홈런으로 맹추격을 보였다.

그 3경기 후, 14타석째(통산 7878타수째)의 9월 3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경기(23차전)에선 3회말 1사 주자 없는 두 번째 타석에서(오후 7시 10분 6초) 풀카운트에서의 6구째(경기 개시부터 50구째), 스즈키 야스지로가 던진 한가운데의 슈트를 체공시간 4초 만에 우측 관중석을 향해 메이저 리그 기록을 넘어서는 통산 756호 홈런을 달성했다.

756호 홈런에 관한 시상을 위해 15만 엔 분의 카네이션으로 장식된 상패가 주어질 예정이었으나 이틀간 홈런이 나오지 않았기에 당시 제작을 하고 있던 꽃집은 30만 엔 분의 카네이션을 버리게 됐다. 또한 1, 3루측 관중석에는 기록 달성이 가까워지자 각각 3개 씩(총 6개)의 구스다마를 놓고 기록 달성과 동시에 일제히 나누어져(구스다마는 800호 달성 시에도 준비됐다) ‘축·사다하루 선수 756호’라는 내용이 담긴 현수막으로 축하해줬다. 이 경기에서 사다하루는 자신의 부모님을 고라쿠엔 구장에 초대했는데 기록이 달성되는 순간 고라쿠엔 구장 1루측 1층에서 관전하고 있던 부모님에게 기록 달성을 축하하는 팬들이 악수를 청해오는 등 앞에서 말한 카네이션의 플레이트를 사다하루로부터 직접 부모님에게 전달하는 순간도 있었으며 고라쿠엔 구장에서는 ‘효도도 일본 내에서의 최고’라는 말도 울려퍼졌다.[20]

반면 756호 홈런을 맞은 스즈키는 당시 취재진들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는 등 심적인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렇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사다하루는 스즈키에 말을 걸어 “나 때문에 엄청난 일이 돼버렸네, 별의 별 얘긴 다 듣겠지만 절대 지지 말아달라”고 격려했다. 스즈키는 “내가 이대로 무너진다면 사다하루의 기록에도 먹칠을 하게 될 수도 있다”라고 말해 이듬해 1978년에는 시즌 13승을 거두어 야쿠르트 구단 창단 이후 최초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고 긴테쓰 버펄로스에 이적 후에는 구원 투수로서 활약했다. 프로에 은퇴한 이후에도 연식 야구로 전향하여 오랫동안 현역 생활을 계속해나갔다(현재는 야구가 아닌 아마추어 골프에서 활약하고 있다). 스즈키는 일본 야구 기구로부터 신기록을 맞은 기념으로 사이판 여행을 보내주겠다는 권유를 받았지만 프로의 의지로 이것을 거절했다.[21]

니혼 TV는 당시 요미우리 주최 경기를 독점 중계하고 있었는데 이 756호의 홈런은 생중계하지 못했다. 당시 중계는 19시 30분부터 방송되는 것으로 기록을 낸 19시 10분에는 《솟쿠리쇼》(요미우리 TV 방송)를 방영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시청자들로부터 항의가 들어왔었다고 한다. 또한 기록 달성 영상은 중계 시작과 동시에 VTR로 재생되는 것 외에 당일 스포츠 뉴스 및 심야 특별 프로그램 ‘축하합니다 사다하루 선수 세계 신기록이다 756호!!’에서 이를 반복하여 방송을 내보냈다.

이러한 위업을 기려 당시 후쿠다 다케오 총리로부터 그 해 일본 정부가 제정한 국민영예상의 첫 번째 수상자로 선정됐다. 더욱이 756호를 달성한 고라쿠엔 구장에서는 외야의 낙하 지점에 기념비가 설치됐다(현재는 도쿄 돔내에 있는 야구 체육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사다하루가 756호 홈런을 쳤을 당시 일본에서는 ‘세계 최고’라고 평가했지만 기네스북에서는 구기에 있어서는 리그의 레벨 등 조건이 반드시 평등하지 않다는 관점에서 경기 전체의 세계 기록이라는 개념을 인정하지 않았고 확인 가능한 최고 기록과 일정 레벨의 리그전에서의 기록을 병기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이것은 야구 뿐만 아니라 어느 구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다하루의 기록은 행크 에런, 배리 본즈조시 깁슨의 기록과 함께 홈런 기록의 하나로서 기재돼 있다. 또한 홈런에 있어서는 구장의 넓이도 중요한 인자가 되지만 사다하루의 현역 시절에 요미우리가 홈구장으로서 사용하고 있던 고라쿠엔 구장은 당시 메이저 리그의 구장과 비교해도 매우 좁은 구장이었다.[22]

미국 언론 대다수는 일본의 작은 구장과 투수 레벨을 예로 들어 사다하루의 위업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삼고 메이저 리그에서도 비공인 취급을 하고 있다. 하지만 사다하루를 높게 평가하는 목소리도 많으며 행크 에런 자신은 사다하루의 기록 달성에 경의를 표하며 신사적으로 축하해 줬고 박제된 플라밍고를 사다하루에게 선물로 보냈다. 또한 사다하루를 존경하는 메이저 리거도 적지 않다(#미국에서의 평가를 참조).

756호 홈런을 날린 9월 3일은 심야까지 TV 출연이나 인터뷰, 축하 전화 대응 등으로 거의 잠을 잘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튿날인 9월 4일 야쿠르트전에서도 평상시와 같이 출전하는 등 10회 무사 1, 2루 상황에서 야스다 다케시로부터 통산 757호가 되는 끝내기 3점 홈런(시즌 41호, 끝내기 홈런 8호)을 때려내 우승 매직 넘버를 ‘13’으로 만들었다. 이것을 포함하여 1977년 시즌에는 10개의 홈런을 더 기록하였고 자신의 세 번째가 되는 50홈런을 달성했다.

기록 도전이 계속된 1976년과 1977년 2년 동안 각각 49개와 50개를 기록하는 등 2년 연속으로 홈런왕에 복귀하였으며 123타점, 124타점(사다하루의 개인 베스트)으로 2년 연속 타점왕과의 2관왕, 4번째의 2년 연속 시즌 MVP에 선정됐다. 4차례의 2년 연속 MVP, 9차례의 MVP 선정은 현재도 일본 프로 야구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현역 말기, 그리고 현역 은퇴[편집]

1981년, 미일 야구 대회에서의 오 사다하루(가운데)

1978년에는 전인미답의 통산 800호 홈런을 달성했지만 시즌 홈런은 39개에 그쳐 홈런왕 타이틀은 44개의 홈런을 기록한 야마모토 고지에게 넘겨줬다. 그 해 9월에는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로 2000타점을 기록하여 8년 연속이 되는 타점왕을 차지했지만 이것이 현역 시절 마지막으로 획득한 주요 타격 타이틀이 됐다.

1979년에는 타율 2할 8푼 5리, 33홈런, 81타점에 그치면서 외다리 타법으로 전환한 1962년 이래 처음으로 타격 부문 3관왕 타이틀을 단 한 개도 얻지 못한 채 시즌을 마쳤다(베스트 나인에는 선출). 16년간 연속으로 계속돼 오던 OPS 10할, 볼넷 100개의 기록도 그 해에는 9할 8푼, 볼넷 89개 등 점점 체력이 한계에 다가서는 것이 누구의 눈에도 분명히 보였다. 또한 이 해의 9월 21일 한신과의 경기에서 자신으로서는 유일하게 대타 홈런을 날렸다(더욱이 나가시마 시게오는 13차례의 대타 출장이 있었지만 대타 홈런은 한 개도 기록하지 못했다).

이듬해 1980년, 시즌 1호 홈런으로 시범 경기와 일본 시리즈 등을 포함한 통산 총 홈런수는 1000개에 달했지만 타율 2할 3푼 6리(그 해 규정 타석을 채운 선수 중에서 가장 낮은 타율), 30홈런, 84타점에 그쳐 베스트 나인에도 선정되지 못했다. OPS에 이르러서는 8할 3리로 외다리 타법으로 전환한 1962년 이래 자신의 최저 기록이었다.

30홈런은 일반적으론 간판 타자로서 부끄럽지 않은 숫자였지만 팬이 사다하루에게 요구하는 숫자로서는 어딘가 부족한 것이며 사다하루 자신도 그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다하루는 30호 홈런을 날렸을 때 인터뷰에서 “내년 목표? 비웃음을 사도 좋다, 40개로”, “내년에는 한 단계를 뛰어넘는(통산 900호)다는 목표가 있으니까, 또 한번 힘껏 버텨봐야겠다”라고 말하기도 했고 압축 배트 사용이 금지되는 다음 시즌을 대비해서 연습에서는 백목 배트를 사용하기 시작하는 등 현역 생활을 계속하는 데에 의욕을 보이고 있었다. 훗날 사다하루 자신이 43세까지 현역을 계속하고 싶었다고 말하고 있어서[23] 다이호 야스아키고쿠보 히로키, 마쓰나카 노부히코, 터피 로즈 등과 같은 간판 타자에 대해 “43세까지 힘껏 뛰어달라”고 전했다.

그런데 10월에는 나가시마 시게오가 감독직에서 사임했고 후지타 모토시 감독의 취임이 발표되면서 후지타에게서 조감독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후지타는 요청 당시에 현역 겸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하였지만 현역을 계속할 것인지 은퇴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던 사다하루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서 결단을 내렸다. 그 해 10월 12일의 126경기째, 야쿠르트와의 경기(26차전, 고라쿠엔 구장)에서 6회말 2사 3루의 세 번째 타석에 간베 도시오가 던진 3구째의 커브를 때린 2점 홈런이 공식전에서의 마지막 홈런(통산 868호)이 됐다.

11월 4일, 사다하루는 현역 은퇴를 표명했다. ‘오 사다하루로서의 배팅을 할 수 없게 됐다’(王貞治としてのバッティングができなくなった)는 것이 은퇴 발표할 당시에서의 발언이었다. 사다하루는 훗날 은퇴를 결심한 순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해(1980년)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주니치와의 경기에서 선발한 도다(요시노리)의 공이 대단히 빨라 보였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때릴 수 있을 공이 때릴 수 없게 되었으므로 ‘아, 나도 이제 끝이구나…’라고 생각했다.

또한 곤도 다다유키 이외의 여러 기자들이 사다하루가 경기 중에 당시 유행하고 있던 루빅스 큐브를 돌리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었는데 곤도는 이러한 사다하루의 모습을 보고 “사다하루는 이제 힘이 다했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사다하루는 이렇게 말했다.

마음은 1000개의 홈런을 칠 때까지 현역으로 남고 싶었다. 756호를 경계로 해서 주위의 눈과 환경, 생활이 일변해 버렸다. 에런이 755개로 끝나지 않고 900개라도 때려주고 있었다면….[24]

통산 868호의 홈런을 때린 방망이는 도쿠미쓰 가즈오가 소유하고 있으며 도쿠미쓰가 《개운! 무엇이라도 감정단에게》(TV 도쿄)이라는 프로그램 출연했을 때 감정하기 위해서 갖고 들어왔던 적이 있다. 사다하루는 야시로 아키의 에피소드에도 있는 것처럼 홈런을 때린 방망이를 지인에게 선물한 적이 많았기 때문에 당초에 도쿠미쓰는 자신이 가진 방망이가 정말로 868호 홈런을 때린 방망이라곤 생각하지 않고 자택에서 발마사지 대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은퇴 표명한 지 4일 후인 11월 8일에 나고야 구장에서 열린 센트럴 리그 동서 대항전에서는 1개의 홈런을 포함한 4안타를 기록하는 등의 활약으로 MVP로 선정돼 은퇴를 안타깝게 만들었다. 이 경기 후 1980년 시즌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는 주니치의 다카기 모리미치와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팬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11월 16일, 후지사키다이 현영 야구장(구마모토)에서 열린 한신과의 추계 시범 경기의 최종 타석에서 우측 스탠드를 향해 홈런을 날렸다. 3루를 돈 시점에서 한신 선수들이 벤치에서 뛰쳐나와 사다하루는 한 사람씩 악수를 주고 받은 후에 홈을 밟았다. 이것이 마지막 타석이자 마지막 홈런이 됐다.

은퇴식은 11월 23일의 팬 감사의 날 이벤트의 마지막에 이루어졌다. 투수 마운드 위에 설치된 마이크를 통해서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였고 인사가 끝난 후 스스로 왼쪽 타석에 방망이를 두고 그대로 걸어서 1루 베이스 위에는 1루수용 미트를 두러 나간 뒤 동시에 현역에서 은퇴하는 다카다 시게루를 불러서 인사를 하도록 했다. 이 은퇴 시의 퍼포먼스는 야마구치 모모에의 그것을 본뜬 것이라고 일컬어졌다.

이 때 호리우치 쓰네오를 투수로 초청해서 거짓없는 진짜 최종 타석을 이루었다. 결과는 호리우치의 혼신을 다한 스트레이트 강속구에 의해 헛스윙 삼진으로 아웃시켰다. 또 입단 시의 포지션인 투수로 되돌아가서 호리우치와 승부를 했지만 이 역시 호리우치에게 좌측 홈런을 맞았다. 현역 은퇴한 이듬해 1981년 이후 선수 시절의 활약을 기려 고라쿠엔 구장이 폐장되는 1987년까지 1번 게이트는 ‘오 게이트’(王ゲート)라고 불렸다. 더욱이 폐장할 때 선수 시절에 요미우리의 1루수로 활약했던 점에서 고라쿠엔 구장의 1루 베이스도 기증됐다. 현재 도쿄 돔이 되면서 이 게이트의 이름은 일단 없어졌지만 1998년에 개장 10주년을 기념해서 도쿄 돔에서의 1번 게이트는 ‘오 게이트’로 부활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감독 시절[편집]

요미우리 조감독과 감독 시절[편집]

1976년부터 1980년까지 선수 겸임 코치, 1981년부터 3년간 요미우리의 조감독을 맡아 감독 후지타 모토시, 수석 코치 마키노 시게루와의 ‘트로이카 체제’로 1981년에 일본 시리즈 우승, 1983년에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1984년에 후지타 모토시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아 제11대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전년도에 리그 우승한 팀을 이어받으면서도 3년간 우승권에서 멀어지는 등 감독으로서의 자질에 의문을 나타내는 목소리가 팬들이나 평론가들 사이에서 나오기도 했다. 또한 1985년에는 자신의 홈런 기록에 1개 차로 따라온 랜디 바스에 대한 고의 사구 공격을 멈추지 않았던 것에 대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사다하루 자신은 그다지 느끼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젊은 선수들과의 의식의 단절도 심하고 그 해 1985년에는 나카하타 기요시의 ‘왕공’(ワン公, 사다하루의 중국어 읽기, 등번호 1과 개를 일컬음) 발언을 유발했다.

감독 취임 4년째인 1987년, 팀의 주포인 하라 다쓰노리를 작년 시즌의 부진으로 빼고 오치아이 히로미쓰주니치 드래곤스가 획득하는 등 팀은 전에 없던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러나 주니치와의 개막전에서 니시모토 다카시의 완봉 승리로 1987년의 시즌이 막을 열게 됐다. 더욱이 워렌 크로마티를 4번에 자리잡고 마무리로 돌아온 가토리 요시타카와 프로 2년째인 19세의 에이스 구와타 마스미, 부활한 에가와 스구루를 축으로 한 젊은 투수진들이 약진을 보였다. 공격 면에서도 타격 10위권에 진입한 시노즈카 도시오, 요시무라 사다아키, 나카하타 기요시, 그리고 전력에서 복귀한 하라와 크로마티 등 5명이 3할 대의 타율을 기록할 정도의 강력한 타선을 구축하여 팀도 시즌 기간 동안 1위 자리를 내주지 않은 끝에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하지만 일본 시리즈에서 세이부 라이온스에게 2승 4패의 성적을 기록하여 일본 시리즈 우승 달성엔 실패하는 등 ‘요미우리 감독’으로서의 수완에 대해서는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또한 1987년 리그 우승은 요미우리의 경기가 없었던 날에 결정(2위였던 히로시마가 패했음)됐기 때문에 숙소에서 헹가래가 이뤄졌다. 12년 후에 사다하루는 다시 헹가래를 받게 됐지만 사다하루는 최초에 헹가래를 받았던 당시의 인상이 희미했다고 한다.

이듬해 1988년(참고로 도쿄 돔이 오픈한 연도)에는 크로마티, 요시무라, 전년도 MVP를 차지한 야마쿠라 가즈히로 등의 부상으로 인한 은퇴, 에가와 스구루의 은퇴가 원인이 된 투수진의 약화로 그 해에 우승한 주니치에게 12경기차로 따돌려져 2위로 끝났다. 요미우리 감독을 맡은 5년 동안 리그 우승 1회를 포함한 A클래스를 유지하긴 했지만 구단 프런트로부터 문책을 당하는 형태로 사임하여(사실상의 해임) 후지타가 사다하루의 뒤를 이어 감독을 맡게 됐다. 요미우리 감독직을 사임하면서 앞에서 말한대로 30년간 사용된 등번호 ‘1’번은 야구계에서 모습을 감추게 됐다. 감독 퇴임 후에는 NHK 야구 해설위원을 맡았다.

다이에·소프트뱅크 감독 시절[편집]

1994년 10월 12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 해 다이에는 4위에 머물렀지만 승수와 패전 수가 9로 약진하고 있어 1995년에는 거물 용병인 케빈 미첼을 비롯해 세이부 라이온스로부터 구도 기미야스, 이시게 히로미치가 입단하는 등 전력에 대한 기대는 컸지만 주력 선수들의 잇단 부진과 부상자가 속출하는 등 결국 5위에 그쳤다.

이듬해 1996년 5월 9일, 닛폰 생명 구장에서 열린 긴테쓰 버펄로스와의 경기에서는 이 즈음에 최하위에 머물고 있는 다이에팬으로부터 사다하루나 세토야마 류조 구단 대표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이 담긴 현수막이 내걸렸다. 경기는 첫회 아키야마 고지의 홈런으로 선취점을 따냈지만 선발이던 요시다 도요히코가 역전을 허용했고 9회초에 요시나가 고이치로의 홈런으로 1점차까지 따라가지만 2대 3으로 긴테쓰에게 패했다.

그 후 구장에서 나온 선수들이 탄 버스에 ‘너희들 프로가 맞냐?’라는 비난을 시작으로 연쇄적으로 계란이 투척되는 사건이 발생했다(이른바 ‘날계란 사건’). 이 일에 대해 사다하루는 “나는 이런 처우를 받기 위해 하카타에 온게 아니다!”라고 격노했다. 이 때 사다하루는 “우리가 계란을 되던지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이것을 팬들의 의견이라 받아들인다면 이기는 길 밖에 없다”라고 말했다(이 경기는 닛폰 생명 구장에서 열린 마지막 프로 야구 공식 경기였다. 그리고 10년 후인 2006년 5월 9일에 닛폰 생명 구장이 철거된 부지에서 ‘날계란 사건을 추모하는 모임’을 당시의 긴테쓰 팬과 다이에 팬들이 가졌다).

요미우리 감독을 사임할 때 우승을 이끌지 못한 책임을 ‘구단 프런트 측으로부터’ 추궁당한 것과는 달리 ‘팀의 팬으로부터’ 무정한 처우를 당한다는 스타로서의 한 길을 걸어온 사다하루에게 있어서는 지금까지 맛본 적이 없을 정도의 견디기가 어려운 굴욕을 받는 시기가 이어졌다. 사다하루는 이들에 대해 줄곧 “나는 그만두지 않는다”, “우리는 이길 수 밖에 없다. 이기면 팬들도 박수로 맞이해준다”라고 발언하면서 계속 참았다.

1998년에는 예전 팀 동료였던 구로에 유키노부를 조감독으로 맞이하여 시즌의 남은 5경기까지 우승의 가능성을 남기는 분투를 보였다. 그 5경기를 전패했지만 오릭스 블루웨이브와의 동률로 21년 만에 A클래스(1위 ~ 3위, 상위권을 지칭하는 일본 언론의 표현)에 해당되는 3위를 차지했다. 1998년 시즌 종료 후에 오바나 다카오 투수 코치의 초빙으로 투수진의 정비가 진행돼 이듬해 1999년 개막을 앞두고 네모토 리쿠오 구단 사장으로부터 “너희들 뭘 그렇게 경계하고 있어? 이 사람은 지금이야 ‘세계의 오’(世界の王)라고 불렸지만 옛날엔 라면 가게의 아들이었거든. 너희들하고 다를게 전혀 없어. 그렇게 생각하고 임해달라”라는 말에 사다하루와 코치진, 선수 사이의 틈이 메워졌다고 전해진다.[25] 사다하루도 “선수라는 건 상상 이상으로 나의 안색을 살핀다. 그래서 나도 험한 표정을 되도록 하지 않고 선수들이 실패를 두려워 않고 마음껏 할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이라고 선수들에게 다가가는 발언을 했다. 이 때부터 팀의 활약이 시작됐다고 한다.

감독 경험을 쌓은 힘이 결실을 맺어 1999년에는 구단 창설 11년 만에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더욱이 주니치 드래곤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도 제패하는 등 감독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오르는 위업을 달성했다. 양대 리그 우승 감독은 미하라 오사무, 미즈하라 시게루, 히로오카 다쓰로, 노무라 가쓰야에 이어 역대 5번째이다. 이듬해 2000년에는 리그 우승을 이끌어 2연패를 달성했지만 일본 시리즈에서는 요미우리에게 패했다. 3년 뒤인 2003년에는 다시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올랐다(일본 시리즈에서 우승한 시즌의 상대 팀 감독은 모두 호시노 센이치였다). 1999년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오를 당시에는 같은 날 우연히 《ZONE》에서 다이에 호크스를 방송하고 하고 있어 엔딩 부분에서는 일본 시리즈 우승하는 순간과 헹가래의 장면이 삽입됐다.

2000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나가시마 시게오가 감독을 맡는 요미우리와의 일명 ‘ON 감독 대결’로 주목을 받았다. 참고로 이 해의 후쿠오카 돔에서의 일본 시리즈가 변칙 일정으로 시행됐는데 이것은 3년 전에 후쿠오카 돔을 먼저 예약했던 일본 뇌신경외과 학회의 일정을 우선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1997년까지 다이에는 만년 B클래스(4위 ~ 6위) 팀으로 전락하여 그 당시 다이에의 약진을 예상할 수 없어 학회의 예약을 승낙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1년에는 터피 로즈가 사다하루의 현역 시절에 맞먹는 시즌 최다 홈런 기록에 육박하여 사다하루는 경기 전의 연습 때 직접 로즈에게 다가가 홈런 신기록을 갈아치워 줄 것을 희망한다는 말을 걸었다. 로즈는 기록 경신에 도전했지만 다이에는 코치의 주도에 의해 로즈를 고의 사구하여 저지, 이를 말리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았다. 2002년 드래프트에서 스캔들이 발각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의 지명을 회피당한 다다노 가즈히토의 사건과 관련된 사실을 알고도 획득하려고 하여 고쓰카 다케시 구단 사장도 ‘GO’사인을 내보냈지만 구단주인 나카우치 다다시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영입은 무산됐다.

2003년에는 전년도에 아키야마가 은퇴한 것과 와카타베 겐이치의 이적이 있었고 개막 직전에 ‘정신적 지주’이자 주포였던 고쿠보 히로키가 큰 부상을 당하는 등 시즌이 절망적일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도 나왔지만 전년도 드래프트 자유 획득 범위로 입단한 와다 쓰요시, 아라카키 나기사 등 두 명의 투수가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여 사이토 가즈미의 시즌 20승이나 무라마쓰 아리히토, 가와사키 무네노리의 타격이 개선되는 등 전력을 끌어올리는 것에 성공했다. 이러한 주력 선수들의 활약으로 그 해 다이에는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동시에 달성하는 쾌거를 이뤘다.

2004년 6월 7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와의 경기에서 감독 통산 1000승을 달성했다. 감독 취임 11년째가 되는 2005년 1월 28일, 소프트뱅크에 정식으로 양도한 것에 따라 팀 이름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변경됨과 동시에 부사장 겸 총감독으로 취임(감독도 그대로 겸임)하였고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부터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장기적인 팀의 지휘봉을 잡게 됐다. 또한 지휘를 잡은 호크스는 2003년부터 3년 연속으로 정규 시즌 1위를 기록했지만 퍼시픽 리그에서 플레이오프 제도가 도입된 2004년과 2005년에 2년 연속으로 플레이오프 제2 스테이지에서 최종전까지 진출했는데도 불구하고 2004년에는 세이부 라이온스에게, 2005년에는 지바 롯데 마린스에게 리그 우승을 내줬다.

2006년 3월에 개최된 제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해 3월 21일에 열린 결승전에서 쿠바를 10대 6으로 누르고 일본을 초대 챔피언으로 이끌었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2006년 12월 12일에 마이니치 스포츠인상의 ‘감동상’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국가대표팀과 함께 수상했다. 12월 20일, 일본 프로 스포츠 협회로부터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국가대표로서 일본 프로 스포츠 대상을 수상했다. 또한 개인으로서 일본 프로 스포츠 특별상도 동시에 수상했다. 참고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기간 중에 있었던 시범 경기에서의 감독 대행은 수석 코치 겸 내야 수비 주루 코치인 모리와키 히로시가 맡았다.

2006년 7월 5일, 세이부와의 경기(후쿠오카 Yahoo! JAPAN 돔)가 끝난 후에 기자회견을 열어 에 종양이 생긴 사실을 밝혔다. 이튿날부터 위에 발병한 암치료를 위해 팀을 떠나 휴양 생활에 들어갔다. 감독 대행은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개최 때와 마찬가지로 모리와키가 맡았다. 수술전 진단에서는 점막하층까지의 암세포가 번져 1군 림프절전이됐다. 7월 18일, 게이오기주쿠 대학병원에서 복강경하에 위전적 Roux en Y법 재건과 2군까지의 림프절 제거가 이뤄졌다. 8월 2일에 퇴원하여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팬을 소중히 하는 사다하루답게 “여러분의 격려에 힘입어서 살 수 있었다”라는 소감을 말했다. 또한 수술 후의 병리진단 결과는 밝히지 않았다. 그 해 9월 29일, 후쿠오카 돔에서 열린 호크스 2006년 최종전 행사에 참석해 85일 만에 공식 석상에 모습을 나타냈다.

2007년 봄에 열린 미야자키 스프링 캠프부터 감독에 복귀했다. 2007년 시즌 성적은 3위였고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는 제1 스테이지에서 패했다. 경기 종료 후 선수들에게 “다음 시즌을 마지막 시즌으로 생각한다”고 말하는 등 성적에 따라서는 2008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날 뜻을 시사했다.

2008년 7월 1일부터 7월 3일까지 개최된 센트럴 리그 공식전 ‘요미우리 vs 야쿠르트’ 경기는 영구 결번 시리즈로 일명 ‘오 사다하루 시리즈’로 불린다. 영구 결번 시리즈로 열리긴 했으나 정작 ‘당사자는 다른 구단의 유니폼을 입고 지휘’에 나선 유일한 감독이 됐다. 경기가 이 시기에 열린 이유는 사다하루의 트레이드 마크인 외다리 타법이 탄생한 날(7월 1일)에서 유래한다.

2008년 6월 6일에 열린 교류전에서 현역 시절 일본 시리즈에서 5차례나 맞붙었던 ‘난카이 호크스’의 복각 유니폼을 입고 팀을 지휘했다. ‘난카이 호크스’의 유니폼을 입은 최초의 방계 출신 지휘관(현역 시절에는 난카이에 소속된 경험이 없음)이 됐다. 복원된 짙은 초록색 유니폼을 걸치면서 “최근에는 튀는 유니폼이 많지만 이런 색은 괜찮다”라고 감상을 말했다.

같은해 7월 8일 세이부 돔에서 열린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경기에서 세이부의 포수 호소카와 도루의 블로킹을 주루 방해라고 주장하며 약 5분 가량 심판단에게 거세게 항의했다. 이것이 지연 행위로 인정될 시에는 현역 시절과 감독 시절을 통틀어 처음으로 퇴장 처분을 받는 게 아닌가 염려됐으나 기우로 끝났다. 사다하루는 “저런 거친 플레이는 안 된다. 전 세계에 저 영상을 보여줘도 분이 안 풀릴 정도다”라고 격노했지만 이것은 전년도인 2007년에 세이부와의 경기에서도 다무라 히토시가 마찬가지로 홈에서의 블로킹을 피해 빠져나가다가 부상을 당했던 일이 있는 만큼 경계심을 곤두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7월 26일에 일본 프로 야구 역대 8번째가 되는 감독 통산 1300승을 달성했다. 그러나 그 해에 베이징 올림픽 출전을 강행했던 가와사키 무네노리가 피로골절을 당하는 등 선수들의 부상이 잇따른 탓에 시즌 막판인 9월과 10월에는 27경기 중 21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남겨 12년 만에 최하위(6위)로 떨어지는 수모를 당했다. 막바지에 보인 이 같은 부진은 사다하루 자신에게 감독 퇴임 결단을 내리게 하는 한 요인이 됐다.

9월 23일, 경기 종료 후 기자회견을 열어 체력적인 문제를 주된 이유로 시즌 종료 후 감독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기자회견에서 사다하루는 감독직에서 물러난 것에 대한 자신의 소회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50년, 멋진 야구 인생이었습니다. 50년간 한 길로 이것에만 푹 빠져서 마음을 설레이면서 68세까지 해왔던 것은 너무나도 행복했습니다.[26]

10월 7일, 시즌 최종전이 되는 K스타 미야기에서의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와의 경기가 마지막 경기가 됐다. 이날 날씨는 비가 내렸는데 상대팀이던 라쿠텐의 노무라 가쓰야 감독은 “오늘은 슬픈 일이 있을 때 내리는 비였다”라고 말했는데 사다하루는 “나에게 슬픈 일이 있을 때 내리는 비라고 표현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경기 종료 후에는 “승부사로서의 최후의 승리를 거두지 못해 유감”, “야구를 좋아하는 나 자신에게 어울리고 12번이나 할 수 있었다. 그 점에서는 좋았다”라고 말했다. 경기 종료 후에는 적지에도 불구하고 사다하루의 은퇴식이 열리면서 현역 시절부터 라이벌이었던 라쿠텐의 노무라 감독으로부터 꽃다발을 받았다.

감독으로서의 통산 성적은 2507경기에 출전하여 1315승(일본 프로 야구 역대 8위) 74무 1118패를 기록했다.

그 후[편집]

소프트뱅크 감독직에서 물러난 이후 계속해서 소프트뱅크 구단 회장이 됐고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국가대표팀에서는 일본 국가대표팀 감독 자문역을 맡았다. 마쓰다 노부히로가 개막전에서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이 골절돼 전치 2개월이라는 진단받아 팀 편성을 재고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여기서 구단 회장인 사다하루가 “개막 엔트리에 누락된 선수보다도 일본 야구계를 알고 있는 외국인 선수 쪽이 좋다”라고 제언해 멕시코 리그에서 플레이하고 있던 호세 오티스를 영입했다.[27] 오티스는 시즌 도중에 입단하면서 타율 2할 8푼 2리, 20홈런, 74타점 등의 결과를 남겼다.

2008년 12월 7일에는 나가시마 시게오의 후임으로 요미우리 교진군 OB회 회장으로 선출됐고 2009년 12월 13일에는 가네다 마사이치의 후임으로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의 차기 회장으로 선출됐다. 2009년 9월 21일, 도쿄 도내의 병원에서 장폐색, 담낭 적출 수술을 받았다.

이듬해 2010년 1월 5일에는 소프트뱅크 구단에 신설된 ‘편성 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취임(위원장은 가사이 가즈히코 구단주 대행)하여 구단 편성과 관련한 총지휘를 맡게 됐다. 같은해 2010년 7월 3일, 후쿠오카 돔내에 사다하루의 공적을 기리는 박물관인 ‘오 사다하루 베이스볼 박물관’이 개관됐고 2010년 10월 26일에는 다년간에 걸친 야구계에서의 공헌 등으로 인정받아 2010년도(헤이세이 22년) 문화공로자로 선정됐다.

선수·감독으로서의 특징[편집]

선수로서[편집]

홈런을 쳐도 흥분을 감추지 못할 정도의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형인 데쓰조에게서 받은 영향이다. 고등학교 시절에 홈런을 치고 홈베이스에서 기분이 좋을 정도로 어쩔 줄 몰라하던 사다하루를 본 데쓰조는 “홈런을 맞은 상대방의 심정을 생각해 봐라”라고 사다하루를 꾸짖었다. 그 이후로 사다하루는 홈런을 쳐도 기뻐하는 내색을 보이지 않게 됐다고 한다. 이 점에 대해 훗날 데쓰조는 “고등학생이었으니 좀더 솔직하게 자기 감정을 드러내도 괜찮았을 텐데 괜히 미안한 짓을 했다”라고 말했다.[28] 더욱이 1971년 일본 시리즈 3차전에서 역전 끝내기 홈런을 날렸을 때 손뼉을 치며 기뻐서 날뛰었던 등의 예외도 있다. 그리고 715호나 756호 홈런을 쳤을 때는 ‘만세’ 포즈를 취했는데 이것은 “평소에는 홈런을 쳐도 담담하게 베이스만 돌았으니까 이 정도 기록을 세웠을 때는 뭔가 퍼포먼스를 보여 주는 게 어떨까”라는 구니마쓰 아키라 코치의 말을 듣고서 퍼포먼스와는 담을 쌓다시피 했던 사다하루가 고심 끝에 겨우 생각해낸 포즈였다고 한다.

야구에 대해서는 무척 완고한 성격을 가졌다. 타격이 극도의 부진을 보일 때 타인에게서 조언을 해 줘도 “나보다 잘 치는 사람의 말이라면 듣겠지만요”라고 말하면서 상대가 연장자라도 그가 하는 말을 흘려듣곤 했다. 절대적인 존재인 가와카미 데쓰하루 감독이 “그런 불안정한 타격폼(외다리 타법)은 그만하고 기본인 양발 타법으로 돌아가면 어떻겠나? 너의 역량이라면 4할대 타율도 충분히 노려볼 만하다”라고 제안했는데도 외다리 타법에 강한 자신감이 있던 사다하루는 거절했다고 한다. 또한 만년의 나가시마 시게오가 타격에 대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묻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저렇게 재능있는 사람이 왜 남의 말을 쉽게 듣지? 치는 사람은 자신이니까 남의 이야기를 섣불리 듣다가는 오히려 선수 생명이 짧아지는 법이다”라며 이상하게 여겼다고 한다. 반면 가와카미 감독은 완강한 태도를 보인 사다하루에 비해 자신의 조언을 너그롭게 받아들이는 나가시마가 타격의 비법에 가장 근접했다는 평가를 내렸다.[29]

ON포[편집]

나가시마 시게오와는 팀의 주력이자 얼굴로서 16년이라는 오랜 기간에 걸쳐 활약했다. ON포(혹은 ON, ON콤비이며 오 사다하루와 나가시마의 영문 이니셜)라고 불리며 두 명이서 수많은 동반 홈런을 날렸다. ON의 첫 동반 홈런은 1959년 6월 25일, 천황 참관 경기가 열린 고라쿠엔 구장에서의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이다. 마지막은 1974년 10월 14일의 나가시마 은퇴 경기까지 통산 106개(홈런 연발은 29개)의 ON 동반 홈런을 때려냈다. 나가시마가 은퇴한 이후에도 선수·감독으로서, 사다하루의 은퇴 후에는 감독끼리, 때로는 친구로서 오랫동안 친분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또한 ‘존경하는 야구 선수는?’이라는 질문을 받은 때에는 행크 에런, 가와카미 데쓰하루와 함께 반드시 나가시마의 이름을 넣기도 한다. 다만 나가시마의 감독 부임 첫 해인 1975년에 나가시마가 경기 내용이 형편없다고 선수들에게 질책했을 때에 사다하루가 이에 반발하면서 갈등이 심해질 정도로 어수선한 분위기에 휩쓸린 적도 있었다.

감독으로서[편집]

감독으로 취임할 당시에도 주위의 조언을 듣지않는 ‘원맨적’ 지휘를 했다고 비판받았던 일도 있었다. 그러나 다이에·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 시절부터는 주변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받아듣이는 등 다이에·소프트뱅크 호크스 황금 시대를 구축해 교묘할 정도의 팀 지휘와 선수 육성의 재능을 발휘하게 됐다.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의 회장 신분이 된 오늘날에도 배후에서나마 적재적소에 선수를 획득 또는 육성에 힘을 발휘하고, 강한 호크스를 유지하는 활약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러한 것에서 성격은 결코 융통성이 없는 ‘완고한 사람’이 아닌 오히려 사람을 쓰는 재능은 매우 뛰어나며 명장으로서 많은 선수나 코치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지도자로서의 초기에는 고마다 노리히로나 이나가키 히데쓰구 등에게 자신의 외다리 타법의 습득을 추천하고 현역 시절 스승이었던 아라카와 히로시에게 지도를 맡겼던 적이 있었다. 특히 몸도 크고 21세 나이의 정규 시즌에 홈런 12개를 기록한 고마다에게는 큰 기대를 걸었지만 고마다에게는 분명 외다리 타법이 맞지 않아 성적이 떨어지고 더욱이 사다하루가 요구하는 높은 수준의 요구가 압력이 돼 반쯤 도망가듯이 외다리 타법의 습득을 포기해 버렸다. 또한 이나가키도 단 한번도 1군에 올라가지 못해서 뚜렷한 결과를 남길 수 없었다. 그 이후 사다하루는 자신의 타법을 선수에게 밀어붙이는 일을 포기하고 선수에게 맞는 지도를 하게 됐다.

사다하루는 투수 운용이 허술하다는 의견이 요미우리 감독 시절부터 들리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특히 중간 계투의 혹사, 계투의 지휘에 대한 비판을 받는 경우가 많았지만 사실은 투수의 역할 분담, 특히 구원이라는 것의 중요성, 지위를 확립한 것도 사다하루 자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요미우리 시절에 구원 투수로 활약한 가토리 요시타카, 스미 미쓰오 등과 같은 왕년의 간판 마무리 투수를 시작해 다이에·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 시절에는 각 투수의 재능을 구별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등 호크스는 일본 야구계 굴지의 투수 왕국으로 발전했다. 사다하루는 원래 투수에서 야수로 전향한 선수로서 투수라는 포지션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야수 출신의 감독’이었다. 그 때문에 야수의 육성 뿐만이 아닌 투수의 육성에도 자주 배려하고 있어서 소질이 있는 사람은 끈기있게 주어진 포지션에서 계속 사용하는 입장을 취하고 사다하루 아래에서 몇 사람이나 에이스급, 두 번째 투수, 마무리 투수로 대성하였다.

가와카미 데쓰하루 감독으로부터 승리에 대한 집념을 배웠다고 말했는데 자신의 감독 시절에 ‘가장 이기고 싶은 것은 나 자신이다’라는 가와카미의 말을 자주 사용했다고 한다.[30]

전화 걸기를 좋아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1981년 시즌 종료 후의 드래프트 회의에서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 우승 학교이자 PL가쿠엔 고등학교의 선수였던 요시무라 사다아키에 대해서 의욕적으로 전화를 걸어 ‘텔레폰 러브콜’로 입단 협상을 벌여 요시무라는 드래프트 3순위로 요미우리에 입단했다. 또한 다이에 감독 시절에도 오바나 다카오를 1군 투수 코치로 초빙할 때 스스로 오바나의 집에 직접 전화를 걸어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팀의 일원으로 만들었다.[31]

에피소드[편집]

인품·성격[편집]

진지하고 성실한 인품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는데 부인의 장례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직접 전화를 해서 감사의 인사를 했다고 한다. 장례식에 참례한 가네무라 요시아키는 설마 자신에게 사다하루 본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올거라곤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가네무라 본인의 부재중에 사다하루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그의 셋째 아들(당시 3세)이 “엄마, ‘다이에의 오’한테서 전화!!”라고 수화기를 막지 않은채 큰 소리로 전했기 때문에 아내가 전화기로 사죄를 했다는 에피소드를 전했다.

도구를 소중히 취급하는 것으로 현역 시절부터 알려져 있으며 같은 미트를 10년 이상이나 사용하고 “새것은 뻣뻣해서 익숙해질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며 스스로 바느질까지 해가며 계속 사용했다(라이벌인 나가시마는 실책을 범하거나 극도의 부진이 계속되면 나쁜 조짐을 고친다고 즉시 글러브를 바꿨기 때문에 현역 시절에는 수십 개의 글러브를 사용했다).

젊은 시절, 나고야의 초밥집에서 당시 주니치 드래곤스의 인기 선수였던 반도 에이지(사다하루와는 동급생이며 사이가 좋았다)와 우연히 만났을 때 자신의 지인(부친의 동포)이 운영하고 있는 작은 중화요리집에 데리고 가서 “반도도 가끔은 먹으러 와 주지 않을텐가?”라고 부탁했다. 반도는 이 이야기를 자신의 저서에서 “사다하루의 성장과 상냥한 인품을 이해할 수 있었다”라고 밝혔다. 또한 반도가 《금요일의 아내들에게》 시리즈에 출연했을 당시 요미우리 감독이었던 사다하루는 “나도 한번 나가보고 싶다”며 부러워했다고 한다.

고지식하고 의리가 있는 성격으로 팬레터나 연하장의 답장은 반드시 쓰기도 했다. 스프링 캠프에 갖고 들어온 엽서나 편지지의 양은 수만 통이나 된다고 전해지고 있다. 1960년, 처음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했던 해에 삿포로 야마노테 양호학교의 학생으로부터 팬레터가 왔는데 당시에 이미 스타 선수였던 사다하루는 대량으로 오는 팬레터 중 한 통만 대충 읽어버려 훗날 그 학교에 관한 사정을 알고 후회했다고 한다. 그 이후 사다하루는 팬레터를 반드시 읽게 됐다. 또한 사다하루는 이듬해 1961년 이후 감독을 퇴임하는 1988년까지 매년 삿포로 원정 시에 야마노테 양호학교를 지속적으로 방문했다.

사다하루의 젊은 시절에는 통행금지 시간을 단골로 어겨서 긴자아카사카에 있는 클럽에 다녔던 시기도 있었다. 사다하루 자신도 훗날 “고등학교를 갓 나온 체력으로 돈이 있어서 화려한 샹들리에, 아름다운 여성, 이상할 것이 없지 않은가”라고 술회했다. 다만 아라카와 히로시 코치에게서 “너는 정말로 잘하고 싶으면 오늘부터 3년간 술, 담배, 여자 모두 그만두고 나에게로 와서 연습해라. 그 대신에 3년 후에는 10년 놀아도 프로로서 밥을 먹을 수 있게 될테니까”라는 말을 듣고 술과 담배가 금지된 이후부터는 완전히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오랜 세월 요미우리의 사감으로 근무했던 다케미야 도시아키에 따르면 가장 나쁜 행동을 한 3명을 사다하루, 시바타 이사오, 호리우치 쓰네오 등을 꼽았는데 이들 3명 모두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의 회원으로 속했다.

또한 젊은 시절에는 자동차 운전이 난폭해서 ‘스피드광’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어떤 기자가 처음으로 사다하루가 운전하는 차에 탔을 때 부인으로부터 ‘조심하라’는 소리를 듣고 그 때는 사다하루에 대한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고속도로에서 콧노래를 부르면서 맹렬한 스피드로 차를 밟아대는 사다하루의 운전에서 사다하루의 조수석에 탄 자신에 대해 걱정한 말이라고 훗날 알아챘다고 한다. 다만 756호 홈런을 쳐서 국민영예상을 수상한 이후로는 교통법규를 준수하고 있다고 한다. 호크스 감독으로 취임한 이후 테리 이토(와세다 실업고등학교에서의 사다하루 후배에 해당)에게 “요미우리에 있을 때는 아무리 차가 달리고 있지 않아도 횡단보도가 없는 곳에서 도로를 건너는 따위는 할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좋아하는 차량은 렉서스 LS이다.

사와미야 유의 저서 《타격 투수》에 따르면 사다하루는 타격 투수에도 매우 친절하게 대했다고 한다. 오랜 세월 사다하루의 전속 타격 투수를 맡았던 미네 구니야스가 야구계를 떠나기로 함에 따라 1974년에 일본을 방문한 행크 에런과의 홈런 경쟁에서 사다하루에게 던진 투구가 미네의 은퇴 경기가 됐다. 홈런 경쟁 후 미네가 은퇴 기념으로 사다하루에게 사인을 부탁하자 사다하루는 “좋아, 미네. 기왕 하는 김에 에런의 사인도 같이 받으면 어떻겠나”하면서 에런이 있던 대기실까지 함께 가 주었고 에런도 흔쾌히 그 부탁에 응해서 사다하루와 에런의 사인이 함께 들어간 친필 사인을 3장이나 받았다고 한다. 더욱이 사다하루는 “나는 요즘 금주 중이니 차안에 있는 위스키를 자네가 대신 마셔 주겠나”하며 술상자를 건네준 것 외에도 “설날 떡값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내 마음일세. 그 동안 나를 위해 공을 던져 줘서 정말 고마웠다”라는 말과 함께 돈봉투를 건네주는 등 미네에게 예를 다했다고 한다.

사다하루가 프로 3년차에 알게 된 심장병을 앓고 있는 야구 소년에게 “나도 홈런을 날리는 선수가 될 테니까 너도 빨리 건강하게 야구를 할 수 있도록 힘내라”고 계속 격려했다. 그러나 그 소년은 약석의 보람없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 소년의 부모가 도쿄 도 시나가와 구에 있는 어느 사찰에 아들을 애도하며 방망이를 손에 든 지장을 세웠고 사다하루도 현역 시절에 정규 시즌이 끝나면 매년 같이 이 지장에 참배했다. 그러한 연유로 하여 이 지장을 언제부터인가 ‘홈런 지장’이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32]

대식가로도 매우 유명하다. 선수 시절에는 간식 대신에 라면이나 가쓰동을 먹어치우는가 하면, 야식으로 만두를 몇 인분 씩이나 먹곤했다고 하며 점심 식사를 마치면 곧바로 저녁 식사를 신경 쓸 정도였다. 감독 시절에는 젊은 선수들이 적게 먹는 것을 한탄했다. 마찬가지로 대식가로 알려진 가와카미 데쓰하루가 유일하게 당해내지 못한 상대가 사다하루로 ‘이건 못 당하겠다’고 항복했다고 한다. 술도 매우 강해 사다하루가 도전한 수많은 주량 대결에서 진 상대는 다이호가 유일하다.

위암 수술을 했던 때에 체중이 줄어든 이후 한 번에 많이 먹지 못하게 되어 원래의 대식가 모습이나 후쿠오카에 온 뒤로부터의 미식가를 의식해서인지 퇴원 기자회견 때 ‘야위었다’라며 체중이 줄어든 것에 기뻐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취미[편집]

  • 현역 시절에 독학으로 피아노를 배워 경기 전에 자택에서 정신 집중을 위해 피아노를 자주 연주하고 있었다.
  • 도쿄에 거주할 당시에는 요리를 전혀 하지 않았던 사다하루였지만(그러나 스파게티만은 상당히 열중했던 듯 워렌 크로마티에게도 만드는 방법을 지도했던 에피소드가 있다) 단신 부임이 된 현재는 생선을 뼈와 양쪽 살로 나눌 수 있을 정도의 솜씨를 가졌다. 생가가 중화요리 식당이었기 때문에 원래부터 어느 정도의 요리는 습득하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 정월에는 하코네 역전 경주를 연도에서 관전하여 응원한 적이 있다.

가족[편집]

사다하루의 아버지 시후쿠는 대륙에서 혼자 일본으로 건너온 천애고아에 가까운 경우로 더욱이 전시 중에는 적국인이었기 때문에 일본인인 어머니의 친족으로부터 정식 결혼을 허락받지 못했다. 그 때문에 종전 후에 정식으로 결혼할 때까지는 사다하루와 그의 형제는(표면적으로는 왕(王)씨 성을 쓰면서도) 법적으론 모친의 사생아로서 일본 국적을 보유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1985년 시즌 중에 사망하여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의 경기 종료 후 아버지의 부음 소식을 전달받았다. 시즌 중이면서 원정에서 경기하고 있는 중이라 당시 요미우리의 감독이었던 책임감으로 사다하루는 빈소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주변의 강력한 권유로 도쿄에 돌아와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 후 즉시 히로시마로 돌아가서 경기를 결장한 적은 없었다.

자신보다 10살 위인 친형 데쓰조는 사다하루가 2006년에 위암 수술을 받았을 때 자신의 출신인 게이오기주쿠 대학병원에 입원시켜 후배 의사였던 기타지마 마사키에게 사다하루의 수술 집도를 의뢰하는 등 동생의 투병을 뒤에서 받쳐주고 있었지만 2008년 가을에 컨디션이 나빠져서 그해 12월 20일에 호흡 부전으로 향년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다하루는 “내 부친의 대신이었다”라고 형의 죽음을 애도했다.

1966년에 결혼한 교코(恭子)와의 슬하에는 3녀가 있다. 부인은 사다하루의 신인 시절, 자주 연습을 보러왔던 두 명의 여학생 중 한 명으로 그중 한 명은 쾌활하게 이야기를 하는 여학생이었고 또 한 사람은 사다하루가 ‘얌전한 아이다’라고 느낀 여학생이 훗날의 부인이다. 아내에 대한 프로포즈의 말은 “도돈파는 좋아하세요?”였다고 한다. 3녀가 출생했을 때에 사다하루는 사내 아이를 갖고 싶었지만 또다시 여자 아이였기 때문에 혀를 차고 말았는데 끝내 부인에게 혼쭐이 났다(당시에는 ‘사내 아이 = 스트라이크, 여자 아이 = 볼’이라고 생각하는 야구 선수들이 많아서 이나오 가즈히사하리모토 이사오도 이런 류의 이야기를 했었다). 집에서는 매우 심한 성격을 가진 폭군 남편으로, 집안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집의 지붕을 고치는 일조차도 아내의 일이다. 다만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일만큼은 사다하루의 담당인데 예의범절에 대해서는 엄격하여 딸들이 본인이 이야기한 것에 대해 대들면 가차없이 주먹을 휘둘러 코피가 나올 때까지 때린 일도 있었다고 한다.

3명의 딸들은 모두 ‘理’(다스릴 리)자가 붙는 이름을 붙였다. 이것은 언젠가 시집을 가서 성이 바뀌어버리는 딸들(일본 국적을 가지는 남성과 결혼했을 경우 중국에서는 부부별성이다)이지만 사다하루의 딸로서 자각을 갖고 존재하고 싶은 의미와 ‘里’(마을 리, 또는 고향의 의미)는 오(왕)씨 집안이라는 의미를 넣어 ‘里’에 ‘王’을 붙인 ‘理’라 했다.

부인은 2001년 10월에 사망했고 그 후 부인의 유골이 묘지로부터 도난당해 300만 엔을 요구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어머니 토미는 2010년 8월 16일 폐렴으로 향년 10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3]

국적에 대해[편집]

사다하루의 국적은 중화민국이다. 예전에 중국 대륙의 지배자는 중국 국민당이며 국호를 중화민국이라 했었다. 그 시절 사다하루를 비롯한 중국 국내외에 사는 중국인은 모두 중화민국 국적이었다. 중국 국민당은 제2차 세계 대전중국 공산당과의 국공 내전에서 사실상 패배하면서 중국 대륙을 잃고 타이완 타이베이에 사실상 수도를 옮겼지만 1971년에 국제 연합에서 축출돼 국제 사회에서의 입지를 크게 상실했다.

그러나 사다하루는 스스로 지명도를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것을 싫어해 그 후에도 세계적인 강대국의 반열에 오른 중화인민공화국이나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일본의 국적에 편리함을 추구하여 귀화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다하루는 지금도 일본이나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닌 중화민국 국적이다. 이것은 중화민국 국적의 재일 중국인으로서 생애를 마친 아버지의 유지를 존중한다는 점과 세계의 홈런왕으로서 국제적으로 유명해진 현재 ‘일본 국적 취득’, ‘중화인민공화국 국적 취득’, ‘생애 중화민국 국적이기를 선언’ 등의 어느 거 하나를 취해도 정치적인 의미를 띠어버린다는 취지를 《정열 대륙》(마이니치 방송)의 인터뷰에서 이 같은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더욱이 사다하루의 딸이자 둘째 딸인 오 리에가 아버지를 따라 여전히 중화민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 간혹 사다하루가 ‘타이완인’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있는데, 실제 타이완 섬과의 연관성은 희박하다(왕씨 집안의 본적은 저장 성).

또한 사다하루의 동년배이자 친구로 사다하루와 서로를 잘 이해하는 사이이기도 한 하리모토 이사오[34]도 ‘어머니는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고 한국어를 평생 사용하셨다’, ‘아버지와 누나는 히로시마 원폭이 원인으로 사망하셨다’는 이유로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고 있고 주변으로부터 귀화를 권유받은 일이 많았지만 이때까지도 응하지 않고 있다. 다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해외 언론으로부터 “당신은 일본인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사다하루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버지는 중국인이지만 어머니는 일본인입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일본에서 자라고, 일본의 교육을 받고, 일본의 프로 야구 선수로서 인생을 보내왔습니다. 의심하는 여지 없이 일본인입니다.[35][36][37]

사다하루는 또한 국민영예상의 초대 수상자였는데 외국인 훈장과 구별되는 훈장과 달리 국민영예상의 수상에는 국적제한은 설정돼 있지 않아 일각에선 사다하루의 홈런 기록을 축하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상이라는 비판도 있다.

교우 관계[편집]

  • 야구계 이외에도 넓은 인맥을 갖고 있다. 쇼와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 미소라 히바리와는 ‘의남매’(오 사다하루 본인의 이야기)라고 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다. 히바리가 사망한 날(1989년 6월 24일) 사다하루는 타이완에 가 있어서 그 날 저녁에 나리타 국제공항에 귀국했을 시 보도진으로부터 ‘(미소라)히바리씨가 돌아가셨다’라는 말을 듣고 “그게 사실인가”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그 해 7월에 열린 히바리의 장례식에서 사다하루는 조사를 읽었다.
  • 프로 골퍼인 다카스 나미오와는 40년 이상에 걸친 친분이 있는 오랜 사이였다. 다카스의 소개로 아오키 이사오와도 친분을 갖게 됐다. 프로 골퍼로서 맹활약을 하며 몇 년간을 보내고 있던 아오키는 “사다하루를 스포츠 선수로서 거울삼겠다”라며 사다하루를 본보기로 해서 나날을 보내자, 1971년에 간토 프로에서 첫 승리 했고 그 후에는 사다하루와 똑같이 ‘‘세계’의 아오키’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가 됐다고 아오키는 말했다.[38]
  • 정치가인 니카이 도시히로와도 오랜 친구 사이이다.
  •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이치로는 사다하루에게 “감독은 현역 시절에 배팅이 간단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라고 질문했는데 사다하루는 “배팅의 비법을 알았다고 생각하면 달아나버리는, 그런 반복으로 결국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라고 대답했다. 이치로는 이것을 듣고 ‘오 사다하루 감독도 그러했군’이라고 스스로 느껴 ‘배팅에서의 고민은 당연한 것이다’라고 재인식할 수 있어서 안심했다고 한다.

미국에서의 평가[편집]

사다하루의 존재는 미국에서도 일찍부터 평가받고 있었다. 1970년에 열린 미일 야구(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전)에서는 1경기 2개 홈런을 치는 등의 활약을 보였고 친선 경기이긴 하지만 메이저 리그의 투수가 고의 사구하는 광경도 볼 수 있었다. 1976년에는 미국의 대표적인 스포츠 잡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에 일본 프로 야구 선수로서는 처음으로 표지를 장식했다.

그런 한편으로 일본에서는 ‘세계의 (홈런)왕’이라고 불렸지만 일본 이외의 국가에서는 어디까지나 ‘일본의 홈런왕’으로서 알려져 있으며 영어권의 뉴스에서는 ‘Japanese Homerun king Sadaharu Oh’로서 소개되기도 했다. 일본에서도 오치아이 노부히코가 《그리고 내 조국》(1995년 슈에이샤 문고)에서 미국인이 사다하루를 세계 1위의 홈런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을 지적했다.

2006년 11월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 아시아판에서 아시아판 60주년을 기념해서 특집으로 기획한 정치, 비즈니스 등 5개 분야에서 활약한 66명이 영웅으로 선정되는 ‘60년의 아시아의 영웅’의 한 사람으로 선정됐다.

그 밖의 에피소드[편집]

  • 하라 다쓰노리가 요미우리 감독으로 재임한 시즌의 추계 캠프 당시, 생방송 TV 프로그램의 인터뷰에서 요미우리의 하라 감독이 화제가 됐을 때 응원으로 “자이언츠의 감독 따위는 되고 싶어서 된 인간은 없으니까 느긋하게 하면 된다”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 1990년, 사다하루가 야구 해설자를 맡고 있던 NHK이탈리아 월드컵의 결승전을 중계했을 때 게스트로 출연했다.[39] 1993년 5월 15일 국립 가스미가오카 경기장에서 열린 J리그의 개막전(베르디 가와사키 vs 요코하마 F. 마리노스전)에 내빈으로서 초청돼 J리그의 발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발언을 남겼다.[40]
  • 다이에의 감독으로서 연패를 달성한 2000년 시즌 오프에 요미우리의 OB전(TV로 방영됨)이 있어서 새로 마련된 등번호 ‘1’의 유니폼을 입고 참가했다.

상세 정보[편집]

출신 학교[편집]

  • 와세다 실업고등학교

선수 경력[편집]

지도자·기타 경력[편집]

지도자
기타

수상·타이틀 경력[편집]

타이틀[편집]

  • 타격 부문 3관왕 : 2회(1973년 ~ 1974년) ※2년 연속 기록은 연속 기록으로서 최다 타이
  • 수위 타자 : 5회(1968년 ~ 1970년, 1973년, 1974년) ※5회 달성은 역대 4위 타이 기록, 센트럴 리그 역대 2위, 3년 연속은 센트럴 리그 타이 기록
  • 홈런왕 : 15회(1962년 ~ 1974년, 1976년, 1977년) ※15회, 13년 연속은 모두 역대 최다 기록
  • 타점왕 : 13회(1962년, 1964년 ~ 1967년, 1971년 ~ 1978년) ※13회, 8년 연속은 모두 역대 최다 기록
  • 최다 출루수 : 12회(1967년 ~ 1978년) ※1967년부터 타이틀로 제정됐고 12회 달성과 12년 연속은 모두 역대 최다 기록
  • 최다 안타(당시는 타이틀이 아님) : 3회(1969년, 1970년, 1973년) ※1994년부터 타이틀로 제정됨
  • 최다 득점 : 15회

수상[편집]

개인 기록[편집]

첫 기록[편집]

  • 첫 출장·첫 선발 출장 : 1959년 4월 11일, 대 고쿠테쓰 스왈로스 1차전(고라쿠엔 구장), 7번·1루수로서 선발 출장
  • 첫 타점 : 1959년 4월 13일, 대 고쿠테쓰 스왈로스 3차전(고라쿠엔 구장), 8회말에 미야지 요시토모로부터 우익수 희생 플라이
  • 첫 안타·첫 홈런 : 1959년 4월 26일, 대 고쿠테쓰 스왈로스 6차전(고라쿠엔 구장), 7회초에 무라타 겐이치로부터 우월 선제 결승 2점 홈런

기록 달성 경력[편집]

홈런에 관한 기록은 ‘홈런 달성 일지’를 참조.

  • 통산 1000안타 : 1967년 7월 10일, 대 다이요 웨일스 15차전(가와사키 구장), 2회초에 모리나카 지카라로부터 우월 솔로 홈런 ※역대 65번째
  • 통산 1000경기 출장 : 1966년 8월 24일, 대 히로시마 카프 21차전(고라쿠엔 구장), 3번·1루수로 선발 출장 ※역대 116번째
  • 통산 볼넷 1000개 : 1968년 10월 11일, 대 주니치 드래곤스 27차전(고라쿠엔 구장), 9회말에 오가와 겐타로로부터 ※사상 최초
  • 통산 1000타점 : 1969년 10월 6일, 대 다이요 웨일스 25차전(가와사키 구장), 8회초에 히라마쓰 마사지로부터 우전 적시타 ※역대 7번째
  • 통산 3000루타 : 1970년 6월 26일, 대 주니치 드래곤스 8차전(고라쿠엔 구장), 8회말에 미즈타니 히사노부로부터 2점 홈런 ※역대 7번째
  • 통산 1000득점 : 1970년 7월 28일, 대 주니치 드래곤스 11차전(주니치 스타디움), 1회초에 스에쓰구 다미오의 적시타로 홈인 ※역대 6번째
  • 통산 1500경기 출장 : 1970년 8월 11일, 대 야쿠르트 아톰스 16차전(고라쿠엔 구장), 3번·1루수로서 선발 출장 ※역대 32번째
  • 통산 1500안타 : 1970년 10월 6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21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4회초에 소토코바 요시로로부터 우월 솔로 홈런 ※역대 27번째
  • 통산 3500루타 : 1972년 6월 6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5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1회초에 아니야 소하치로부터 우월 선제 2점 홈런 ※역대 6번째
  • 통산 2루타 300개 : 1972년 10월 7일, 대 한신 타이거스 25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3회초에 무라야마 미노루로부터 좌익선상 2루타 ※역대 11번째
  • 통산 4000루타 : 1973년 9월 19일, 대 한신 타이거스 22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1회초에 우에다 지로로부터 우월 선제 3점 홈런 ※역대 4번째
  • 통산 1000삼진 : 1974년 4월 23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4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8회초에 아사노 게이시로부터 ※역대 3번째
  • 통산 2000경기 출장 : 1974년 6월 29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13차전(고라쿠엔 구장), 4번·1루수로 선발 출장 ※역대 8번째
  • 통산 1500타점 : 1974년 7월 30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17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5회초에 마쓰오카 히로무로부터 우월 2점 홈런 ※역대 2번째
  • 통산 2000안타 : 1974년 8월 4일, 대 한신 타이거스 17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6회초에 후루사와 겐지로부터 우전 안타 ※역대 8번째
  • 통산 4500루타 : 1975년 8월 16일, 대 다이요 웨일스 18차전(고라쿠엔 구장), 7회말에 마시바 시게쿠니로부터 중전 적시타 ※역대 2번째
  • 통산 2루타 350개 : 1975년 9월 24일, 대 주니치 드래곤스 22차전(주니치 스타디움), 7회초에 마쓰모토 유키쓰라로부터 좌중간 2루타 ※역대 8번째
  • 통산 5000루타 : 1977년 7월 13일, 대 주니치 드래곤스 11차전(나고야 구장), 1회초에 호시노 센이치로부터 우중간에 선제 3점 홈런 ※역대 2번째
  • 통산 2500경기 출장 : 1978년 6월 3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0차전(고라쿠엔 구장), 3번·1루수로서 선발 출장 ※역대 2번째
  • 통산 2500안타 : 1978년 6월 27일, 대 주니치 드래곤스 12차전(고라쿠엔 구장), 6회말에 도다 요시노리로부터 우전 안타 ※역대 3번째
  • 통산 2000타점 : 1978년 9월 22일, 대 주니치 드래곤스 24차전(나고야 구장), 8회초에 프레드 쿠하울라로부터 우월 솔로 홈런 ※사상 최초
  • 통산 2루타 400개 : 1979년 5월 31일, 대 주니치 드래곤스 7차전(고라쿠엔 구장), 8회말에 고마쓰 다쓰오로부터 좌측에 결승 적시 2루타 ※역대 6번째
  • 통산 5500루타 : 1979년 6월 12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7차전(고라쿠엔 구장), 1회말에 간베 도시오로부터 우측 안타 ※사상 최초
  • 통산 희생 플라이 100개 : 1980년 10월 10일, 대 주니치 드래곤스 26차전(나고야 구장), 6회초에 사토 마사오로부터 ※역대 2번째

정규 시즌[편집]

  • 통산 출장 경기수 : 2831경기(역대 3위) ※센트럴 리그 역대 2위
  • 통산 타석 : 11866타석(역대 2위, 센트럴 리그 기록)
  • 사이클링 안타 : 1회(1963년 4월 25일, 대 한신 타이거스 전, 고라쿠엔 구장) ※역대 22번째
  • 5504경기 연속 퇴장 없음(1959년 ~ 1988년, 1995년 ~ 2008년) ※일본 기록

홈런[편집]

  • 통산 홈런 : 868개(세계 기록)
  • 통산 만루 홈런 : 15개(일본 기록)
  • 통산 끝내기 홈런 : 8개(센트럴 리그 타이 기록)
  • 통산 400홈런 도달 속도 1위 : 1422경기
  • 통산 450홈런 도달 속도 1위 : 1559경기
  • 통산 500홈런 도달 속도 1위 : 1723경기
  • 통산 550홈런 도달 속도 1위 : 1864경기
  • 통산 600홈런 도달 속도 1위 : 1983경기
  • 통산 650홈런 도달 속도 1위 : 2134경기
  • 시즌 50홈런 이상 : 3회(1964년, 1973년, 1977년) ※일본 기록
  • 시즌 40홈런 이상 : 8년 연속 포함한 13회(1963년 ~ 1970년, 1972년 ~ 1974년, 1976년 ~ 1977년) ※일본 기록
  • 시즌 30홈런 이상 : 19년 연속 19회(1962년 ~ 1980년) ※일본 기록, 20홈런 이상에서도 일본 기록 수립
  • 시즌 10홈런 이상 : 21년 연속 21회(1960년 ~ 1980년) ※일본 타이 기록
  • 시즌 30홈런 도달 속도 1위 타이 : 64경기(1976년)
  • 시즌 40홈런 도달 속도 1위 타이 : 97경기(1966년, 1967년)
  • 7경기 연속 홈런(1972년 9월 11일 ~ 9월 20일) ※일본 타이 기록
  • 4타석 연속 홈런(1964년 5월 3일) ※일본 타이 기록
  • 1경기 4개 홈런(1964년 5월 3일) ※일본 타이 기록
  • 1경기 3개 홈런 이상 : 5회(센트럴 리그 기록)
  • 1경기 2개 홈런 이상 : 95회(일본 기록)

공식전에선 통산 868개의 홈런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 외 일본 시리즈에서 29개, 올스타전에서 13개, 동서 대항전에서 1개, 미일 야구 대회에서 23개, 시범 경기에서 98개와 생애 통산 1000개를 넘는 홈런(1032개)을 기록했다.

또한 우천으로 경기 도중에 노 게임으로 무효가 된 홈런 등 이른바 ‘사라진 홈런’은 한 개도 없다. 1964년 9월 23일 다이요 웨일스와의 경기(고라쿠엔 구장)에서 기록한 마지막 55호 홈런은 거센 빗속에서 때려낸 것이었지만 도쿄 올림픽 때문에 일정 소화를 서두르고 있었던 사정에도 영향을 미쳐 어떻게든 5회까지 강행하여 경기를 성립시킨 결과, 55호 홈런이 사라지는 것을 면했다. 더욱이 1966년 미일 야구 대회인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의 경기에선 주자를 추월해 홈런이 취소됐다.

홈구장이었던 고라쿠엔 구장에서 413개의 홈런을 기록했는데 이 기록은 구장별 통산 홈런 갯수 가운데 역대 1위이며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타율[편집]

  • 통산 안타 : 2786안타(센트럴 리그 기록)
  • 시즌 최다 출루수 : 294개(1974년)
  • 시즌 최고 출루율 : .534(1974년)
  • 시즌 타율 3할대 이상 : 8년 연속 포함한 13회(1963년 ~ 1970년, 1973년 ~ 1974년, 1976년 ~ 1978년) ※센트럴 리그 기록
  • 시즌 100안타 이상 : 21년 연속 21회(1960년 ~ 1980년) ※일본 기록
  • 타율 10위권 진입 : 16년 연속 포함한 17회(1960년, 1962년 ~ 1977년) ※일본 타이 기록
  • 전 이닝 출장 수위 타자(1969년) ※사상 최초이며 그 외에 이치로(1995년), 마쓰이 히데키(2001년), 니시오카 쓰요시(2010년), 하세가와 유야(2013년)도 달성

프로 통산 타율은 3할 1리인데 실제론 선수로서 몸담았던 20년을 넘어 3할을 기록한 것은 그 외 하리모토 이사오 밖에 없는 대기록이지만 본인은 이러한 기록 유지를 걱정하고 있다는 듯하여 은퇴 기자회견에선 “오 사다하루의 배팅이 불가능하게 됐다”라고 밖에 하지 않았지만 훗날 “머릿속에 없었다라고 하면 거짓말이다”라고 그것이 은퇴하게 된 원인이었다고 토로했다.

장타력·득점 능력[편집]

  • 통산 득점 : 1967득점(일본 기록)
  • 통산 타점 : 2170타점(일본 기록)
  • 통산 루타 : 5862루타(일본 기록)
  • 통산 희생 플라이 : 100개(센트럴 리그 기록)
  • 통산 장타율 : .634(4000타수 이상으로는 역대 1위)
  • 시즌 최고 OPS : 1.293(1974년)
  • 시즌 최고 RC27 : 14.9825(1974년)
  • 시즌 최고 XRWIN : 9.70(1973년)
  • 시즌 100타점 이상 : 7년 연속 포함한 14회(1963년 ~ 1969년, 1971년 ~ 1974년, 1976년 ~ 1978년) ※14회는 일본 기록이며 7년 연속은 2010년 알렉스 라미레스에 의해 기록이 경신될 때까지의 31년간 일본 기록이었음

메이저 리그에서 널리 보급된 종합 타격 지표인 OPS(출루율+장타율)에서는 1.080(0.446+0.634)이라는 숫자를 남겼는데 OPS가 10할을 넘는 선수는 그 수가 적다. 일본 프로 야구계에서 2000타수 이상인 선수로 OPS가 10할을 넘는 타자는 사다하루, 랜디 바스(1.078), 로베르토 페타지니(1.051) 등 3명 뿐이며 4000타수 이상의 선수 중에서는 사다하루뿐이다(2위는 마쓰이 히데키의 0.996). 또한 시즌 기록에서도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10번 밖에 달성되지 않은 OPS 12할도 혼자서 5차례나 기록했다.

OPS, XR, RC 등 여러가지 득점 산출 능력에서는 1위이다. 타격 각 부문에서의 시즌 리그 1위 획득 횟수도 특출난 편이다(총 213개, 연도별 타격 성적 참조. 213이라는 숫자에는 아랫 표엔 없는 최다 장타수와 최다 출루수가 포함돼 있다).

4사구[편집]

  • 통산 볼넷 : 2390개(일본 기록)
  • 통산 고의 사구 : 427개(일본 기록)
  • 통산 몸에 맞는 볼 : 114개 ※역대 11위이며, 좌타자에서는 이나바 아쓰노리에 의해 기록이 경신될 때까지 역대 1위였다. 현재는 이나바, 마쓰나카 노부히코 다음으로 역대 3위
  • 시즌 최다 볼넷 : 158개(1974년) ※일본 기록
  • 시즌 최다 4사구 : 166개(1974년) ※일본 기록
  • 연속 경기 볼넷 : 18개(1970년) ※일본 기록

통산 볼넷 갯수인 2390개는 2위인 오치아이 히로미쓰의 1475개에 1000개나 가까운 차이를 내며 단독 1위이다. 사다하루의 은퇴 당시에는 홈런 갯수와 함께 볼넷 갯수도 메이저 리그의 기록(베이브 루스, 2062)을 웃돌고 있었다(현재는 배리 본즈가 경신). 시즌 볼넷 수는 역대 1위에서 4위까지 독점했는데 역대 5위인 가네모토 도모아키(2001년, 128개)를 사이에 두고 다시 6위에서 11위 타이 기록(121개, 두 차례, 2007년의 타이론 우즈와 타이 기록)까지 사다하루의 이름이 나란히 올랐다. 이들을 포함하여 시즌 볼넷 갯수의 역대 20걸 중에 총 14를 사다하루가 독점하고 있다. 또한 7타석 연속 볼넷을 두 차례(1971년, 1973년)나 기록했다(연속 타석 볼넷은 역대 5위).

게다가 통산 고의 사구 427개도 2위인 하리모토(228개)에게 200개나 가까운 차이를 낸 역대 1위인데 이 중엔 주자없이 13차례의 고의 사구가 포함된다. 이닝별로는 1회가 가장 많았으며, 더욱이 만루 상황에서 고의 사구가 된 적은 없다.

4사구가 매우 많았기 때문에 통산 타석수 11866은 센트럴 리그 기록이지만 통산 타수(9260)는 기누가사 사치오에 이어 센트럴 리그 2위가 됐다.

수비[편집]

  • 시즌 수비 기회 : 1607회(1963년) ※1루수로서의 센트럴 리그 기록
  • 시즌 척살 갯수 : 1521개(1963년) ※1루수로서의 센트럴 리그 기록
  • 시즌 수비 기회 연속 무실책 : 991(1980년 4월 25일 ~ 10월 10일) ※1루수로서의 센트럴 리그 기록

사다하루 본인은 “배팅에 비하면 수비는 대충하고 있었다”라고 말하곤 있지만 실제론 프로 2년차에 미국제 1루수용 글러브를 사용하는 등 수비에도 힘을 쏟고 있어서 타격과 함께 그 수비력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숏바운드의 처리, 번트 처리가 뛰어나는 등 1972년부터 제정된 다이아몬드 글러브상을 1980년 현역에서 은퇴할 때까지 매년 선정됐다.

오랫동안 사다하루와 함께 내야를 지킨 나가시마 시게오는 “1루수에서는 사다하루가 단연 잘했었다. 우리 내야수는 어떤 송구라도 안심해서 쏠 수 있었으니까”라고 회상했다. 또한 현역 시절 ‘번트의 명수’이자 감독으로서도 사다하루가 이끄는 요미우리와 맞붙었던 요시다 요시오(당시 한신 타이거스 감독)도 “사다하루에게서 그토록 압박을 당하면 번트가 성공할 것 같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1루수로서 1963년에 시즌 수비 기회 횟수와 시즌 척살 갯수의 센트럴 리그 기록을 각각 경신했으며(1607차례 수비 기회, 1521개 척살) 현역 마지막 시즌이던 1980년에도 수비 기회 연속 무실책이라는 센트럴 리그 기록을 경신(991차례 수비 기회 연속 무실책)했다. 다만 현역 생활이 길고 오랫동안 수비 기회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라 1루수로서의 통산 실책수 165개도 역대 1위이다. 1루수로서 통산 2799경기, 수비 기회 27743차례, 척살 25893개, 보살 1685개, 병살 2317개를 기록하고 있어 통산 수비 기록에 있어서는 다른 1루수들을 압도하고 있다(모두 1루수로서의 프로 야구 역대 1위).

행크 에런의 홈런 기록과 맞먹는 1977년 8월 31일에 열린 다이요 웨일스와의 경기와 에런의 기록을 갈아치운 9월 3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경기에서는 ‘외야석에 있는 팬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라며 경기 도중부터 우익수로서 출전했다. 공식전에서 사다하루가 외야수로서 출전한 경기는 이 두 경기 뿐이다.

일본 시리즈[편집]

  • 통산 출장 횟수 : 14회(시리즈 타이 기록)
  • 통산 출장 경기수 : 77경기(시리즈 기록)
  • 통산 득점 : 58득점(시리즈 기록)
  • 통산 홈런 : 29개(시리즈 기록)
  • 통산 희생 플라이 : 5개(시리즈 기록)
  • 통산 볼넷 : 83개(시리즈 기록)
  • 시리즈 홈런 : 4개(1963년) ※시리즈 타이 기록
  • 시리즈 볼넷 : 9개(1967년, 1976년의 2차례) ※시리즈 기록

올스타전[편집]

  • 올스타전 출장 횟수 : 20회(1960년 ~ 1964년, 1966년 ~ 1980년)
  • 출장 경기수 : 58경기(역대 1위)
  • 통산 타수 : 188타수(역대 1위)
  • 통산 희생 플라이 : 3개(역대 1위)
  • 연속 타수 무안타 : 33개(역대 1위)

2년째인 1960년부터 현역 마지막 시즌인 1980년까지 21년 연속으로 올스타전 팬 투표에 의해 선출됐다(1965년에만 부상 때문에 출전을 포기). 팬 투표 선출 횟수(21회), 연속 선출 횟수(21회) 모두 노무라 가쓰야와 맞먹는 타이 기록이다(선수로서의 최다 선출 횟수는 노무라의 22회). 올스타전에서는 통산 타율 2할 1푼 3리, 홈런율 14.46으로 본래의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위에서 말한대로 연속 33타수 무안타(중간에 5개의 볼넷이 있음)라는 불명예스런 올스타전 기록도 가지고 있다.

등번호[편집]

  • 1(1959년 ~ 1988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영구 결번(1989년 3월 16일 제정)이며, 입단부터 감독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30년간 사용됐지만 동일 인물에 의한 단절 기간 없는 30년간의 사용은 1984년 시즌부터 주니치 드래곤스에서 등번호 34번을 착용하고 있는 야마모토 마사와 맞먹는 최장 기록이다.[42]
  • 89(1995년 ~ 2008년)
‘야구’(野球), ‘파죽지세’(破竹の勢い)라는 음과 연관지어 정했다. 다이에·소프트뱅크 감독 시절의 등번호인 이 번호는 호크스의 영구 결번으로 할지가 검토되고 있다.

연도별 타격 성적[편집]

연도 소속




2

3





도루
실패
희생
번트
희생
플라이

고의
사구
몸에
맞는 볼








O
P
S
1959년 요미우리 94 222 193 18 31 7 1 7 61 25 3 1 1 1 24 1 3 72 2 .161 .262 .316 .569
1960년 130 502 426 49 115 19 3 17 191 71 5 4 3 1 67 5 5 101 7 .270 .375 .448 .823
1961년 127 471 396 50 100 25 6 13 176 53 10 5 4 4 64 3 3 72 7 .253 .358 .444 .802
1962년 134 586 497 79 135 28 2 38 281 85 6 4 3 2 72 9 12 99 6 .272 .376 .565 .941
1963년 140 609 478 111 146 30 5 40 306 106 9 5 0 2 123 12 6 64 7 .305 .452 .640 1.092
1964년 140 599 472 110 151 24 0 55 340 119 6 4 0 5 119 20 3 81 8 .320 .456 .720 1.176
1965년 135 575 428 104 138 19 1 42 285 104 2 4 0 3 138 29 6 58 7 .322 .490 .666 1.156
1966년 129 549 396 111 123 14 1 48 283 116 9 4 0 4 142 41 7 51 5 .311 .495 .715 1.210
1967년 133 566 426 94 139 22 3 47 308 108 3 5 0 3 130 30 7 65 7 .326 .488 .723 1.211
1968년 131 580 442 107 144 28 0 49 319 119 5 1 1 6 121 18 10 72 5 .326 .475 .722 1.197
1969년 130 576 452 112 156 24 0 44 312 103 5 2 0 8 111 12 5 61 7 .345 .472 .690 1.162
1970년 129 553 425 97 138 24 0 47 303 93 1 4 0 3 119 24 6 48 8 .325 .476 .713 1.189
1971년 130 565 434 92 120 18 2 39 259 101 8 2 0 5 121 17 5 65 8 .276 .435 .597 1.032
1972년 130 572 456 104 135 19 0 48 298 120 2 0 0 2 108 18 6 43 8 .296 .435 .654 1.089
1973년 130 560 428 111 152 18 0 51 323 114 2 1 0 4 124 38 4 41 7 .355 .500 .755 1.255
1974년 130 553 385 105 128 18 0 49 293 107 1 5 0 2 158 45 8 44 4 .332 .532 .761 1.293
1975년 128 523 393 77 112 14 0 33 225 96 1 0 0 6 123 27 1 62 9 .285 .451 .573 1.024
1976년 122 536 400 99 130 11 1 49 290 123 3 1 0 9 125 27 2 45 8 .325 .479 .725 1.204
1977년 130 570 432 114 140 15 0 50 305 124 1 3 0 6 126 16 6 37 14 .324 .477 .706 1.183
1978년 130 566 440 91 132 20 0 39 269 118 1 2 0 11 114 17 1 43 7 .300 .436 .611 1.048
1979년 120 506 407 73 116 15 0 33 230 81 1 1 0 5 89 10 5 48 9 .285 .415 .565 .980
1980년 129 527 444 59 105 10 0 30 205 84 0 1 0 8 72 8 3 47 9 .236 .342 .462 .803
통산 : 22년 2831 11866 9250 1967 2786 422 25 868 5862 2170 84 59 12 100 2390 427 114 1319 159 .301 .446 .634 1.080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붉은색 글씨는 일본 프로 야구 역대 최고 성적.

※다만, 일본 프로 야구 공식 출루율의 시즌 기록은 1986년에 오치아이 히로미쓰가 기록한 4할 8푼 7리이다(양대 리그에서 최고 출루율을 타이틀로 제정한 1985년 이후가 대상이기 위해서 였다).[43]

홈런 달성 일지[편집]

호수 달성일 상대팀 구장 이닝 투수 결과 비고
    1 1959년 4월 26일 고쿠테쓰 스왈로스 6차전 고라쿠엔 구장 7회초 무라타 겐이치 우월 선제 결승 2점 홈런 첫 안타
    4 1959년 6월 25일 오사카 타이거스 11차전 고라쿠엔 구장 7회말 고야마 마사아키 우월 동점 2점 홈런 ON 동반 제1호 홈런(천황 참관 경기)
  47 1962년 7월 1일 다이요 웨일스 15차전 가와사키 구장 3회초 이나가와 마코토 우월 선제 솔로 홈런 외다리 타법 제1호
  50 1962년 7월 11일 주니치 드래곤스 12차전 주니치 스타디움 8회초 곤도 히로시 우월 솔로 홈런
100 1963년 7월 28일 히로시마 카프 17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1회초 오이시 기요시 우중간에 선제 2점 홈런 32번째
150 1964년 7월 16일 히로시마 카프 22차전 고라쿠엔 구장 7회말 이케다 히데토시 좌월 2점 홈런 17번째
200 1965년 9월 19일 다이요 웨일스 20차전 고라쿠엔 구장 9회초 미네 구니야스 우월 2점 홈런 12번째
250 1966년 8월 18일 다이요 웨일스 22차전 가와사키 구장 4회초 니하리 신지 우월 솔로 홈런 4번째
300 1967년 8월 31일 산케이 아톰스 22차전 고라쿠엔 구장 3회말 무라타 겐이치 우월 3점 홈런 3번째
350 1968년 9월 21일 주니치 드래곤스 21차전 주니치 스타디움 6회초 오가와 겐타로 우월 2점 홈런 3번째
400 1969년 10월 18일 주니치 드래곤스 25차전 주니치 스타디움 1회초 도야마 히로시 우월 선제 3점 홈런 2번째
450 1971년 4월 18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 4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3회초 소토코바 요시로 우중간에 솔로 홈런 2번째
500 1972년 6월 6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 5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3회초 니시카와 가쓰히로 우월 2점 홈런 2번째
550 1973년 6월 21일 주니치 드래곤스 11차전 주니치 스타디움 4회초 이토 히사토시 우월 솔로 홈런 2번째
600 1974년 5월 30일 한신 타이거스 11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3회초 다니무라 도모히로 우월 3점 홈런 일본 프로 야구에서는 최초
650 1975년 7월 11일 한신 타이거스 9차전 한신 고시엔 구장 8회말 야마모토 시게마사 우월 2점 홈런 일본 프로 야구에서는 최초
700 1976년 7월 23일 다이요 웨일스 16차전 가와사키 구장 8회초 우자와 다쓰오 우중간에 2점 홈런 일본 프로 야구에서는 최초
714 1976년 10월 10일 한신 타이거스 22차전 고라쿠엔 구장 7회말 후루사와 겐지 우월 솔로 홈런 세계 2위 타이 기록
715 1976년 10월 11일 한신 타이거스 23차전 고라쿠엔 구장 8회말 야마모토 가즈유키 우월 2점 홈런 세계 2위 단독
750 1977년 8월 23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차전 히로시마 시민 구장 3회초 이케가야 고지로 우월 솔로 홈런 일본 프로 야구에서는 최초
755 1977년 8월 31일 다이요 웨일스 22차전 고라쿠엔 구장 1회말 미우라 미치오 우월 선제 2점 홈런 세계 타이 기록
756 1977년 9월 3일 야쿠르트 스왈로스 23차전 고라쿠엔 구장 3회말 스즈키 야스지로 우월 솔로 홈런 세계 신기록 수립
800 1978년 8월 30일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23차전 고라쿠엔 구장 6회말 오카와 히로시 우월 솔로 홈런 일본 프로 야구에서는 최초
850 1980년 6월 12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 9차전 고라쿠엔 구장 1회말 가네다 도메히로 우월 솔로 홈런 일본 프로 야구에서는 최초
868 1980년 10월 12일 야쿠르트 스왈로스 26차전 고라쿠엔 구장 6회말 간베 도시오 우월 솔로 홈런 현역 마지막 홈런

감독으로서의 팀 성적[편집]

정규 시즌[편집]

연도 소속 순위 경기 승리 패전 무승부 승률 승차 팀 홈런 팀 타율 팀 평균자책점 연령
1984년 요미우리 3위 130 67 54 9 .554 8.5 186 .268 3.66 44세
1985년 3위 130 61 60 9 .504 12.0 157 .279 3.96 45세
1986년 2위 130 75 48 7 .610 0.0 155 .270 3.12 46세
1987년 1위 130 76 43 11 .639 - 159 .281 3.06 47세
1988년 2위 130 68 59 3 .535 12.0 134 .268 3.09 48세
1995년 다이에
소프트뱅크
5위 130 54 72 4 .429 26.5 94 .259 4.16 55세
1996년 6위 130 54 74 2 .422 22.0 97 .263 4.04 56세
1997년 4위 135 63 71 1 .470 14.0 132 .264 4.26 57세
1998년 3위 135 67 67 1 .500 4.5 100 .264 4.02 58세
1999년 1위(※1) 135 78 54 3 .591 - 140 .257 3.65 59세
2000년 1위 135 73 60 2 .549 - 129 .268 4.03 60세
2001년 2위 140 76 63 1 .547 2.5 203 .273 4.49 61세
2002년 2위 140 73 65 2 .529 16.5 160 .267 3.86 62세
2003년 1위(※1) 140 82 55 3 .599 - 154 .297 3.94 63세
2004년 2위(※3) 133(※2) 77 52 4 .597 -4.5 183 .292 4.57 64세
2005년 2위(※3) 136 89 45 2 .664 -4.5 172 .281 3.46 65세
2006년 3위 136(※4) 75 56 5 .573 4.5 82 .259 3.13 66세
2007년 3위 144 73 66 5 .525 6.0 106 .267 3.18 67세
2008년 6위 144(※5) 64 77 3 .454 12.5 99 .265 4.05 68세
통산 : 19년 2507 1317 1118 74 .541 A클래스 : 15회, B클래스 : 4회
  • 다이에(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는 2005년에 소프트뱅크(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구단명을 변경.
※1 : 순위에서 굵은 글씨일본 시리즈 우승.
※2 : 2004년에는 프로 야구 파업 사태로 인해 2경기가 열리지 않았음
※3 : 2004년과 2005년 정규 시즌 승률이 1위이면서도 2004년 세이부, 2005년 지바 롯데와의 플레이오프에 각각 맞대결하였지만 모두 패해 ‘리그 우승 = 일본 시리즈 진출’을 놓침
※4 : 2006년에는 시즌 도중 이 발병하면서 치료 때문에 7월 8일 이후 55경기를 결장(30승 3무 22패)했고 그 기간동안 모리와키 히로시가 감독 대행을 맡았음
※5 : 2008년에는 컨디션 저하로 인해 1경기를 결장(그날 경기는 패배)했고 아키야마 고지가 감독 대행을 맡았음
※6 : 1984년부터 1996년까지는 130경기제
※7 : 1997년부터 2000년, 2004년은 135경기제
※8 : 2001년부터 2003년까지는 140경기제
※9 : 2005년과 2006년은 136경기제
※10 : 2007년부터는 144경기제
※11 : 통산 성적은 결장했던 56경기를 포함하지 않음(30승 3무 23패).

포스트 시즌[편집]

연도 소속 경기명 상대팀 성적
1987년 요미우리 일본 시리즈 세이부 라이온스 2승 4패
1999년 다이에
소프트뱅크
일본 시리즈 주니치 드래곤스 4승 1패
2000년 일본 시리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2승 4패
2003년 일본 시리즈 한신 타이거스 4승 3패
2004년 플레이오프 2스테이지 세이부 라이온스 2승 3패
2005년 플레이오프 2스테이지 지바 롯데 마린스 2승 3패
2007년 퍼시픽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1스테이지
지바 롯데 마린스 1승 2패
  • 2006년에는 모리와키 감독 대행이 지휘를 맡았기 때문에 제외됨.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편집]

연도 대회명 팀명 성적
2006년 제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국가대표팀 우승

미디어[편집]

  • 1966년 12월 1일, 일본 후지 TV에서 토크 프로그램인《스타천야》의 최고 시청률이 45.9%를 돌파하기도 하였다.

주석[편집]

  1. 현재의 메이저 리그의 기록은 배리 본즈의 762개이다.
  2. プロ野球の王貞治氏、台湾総統から勲章授与される - AFP BBNews, 2009년 2월 6일
  3. 馬英九総統が王貞治氏に「二等景星勲章」を授与 - 타이베이 주일경제문화대표부, 2009년 2월 6일
  4. 名誉都民の王貞治氏ら顕彰 理恵さんが手紙代読「精いっぱい生きていく」’ - MSN 산케이 뉴스, 2009년 9월 24일
  5. “世界の王”の原点 墨田区総合体育館に顕彰コーナー完成’ - MSN 산케이 뉴스, 2010년 3월 29일
  6. 王 貞治 氏 (平成16年12月17日選定) - 후쿠오카 시 공식 홈페이지, 2008년 2월 7일
  7. 王さん 宮崎名誉市民に、長嶋さんに次いで2人目’ - 요미우리 신문, 2009년 8월 9일
  8. 《고교 야구 : 열투의 세기》, 더 베스트
  9. 《WiLL》, 2013년 2월호, p.285
  10. 《교진군 최강 전설 : 나가시마 시게오 vs 오 사다하루》, 1983년 1월 방송에서 본인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11. 개막전 선발 출장의 센트럴 리그 고졸 신인은 사다하루 외에도 1957년 니혼 대학 제3 고등학교에서 한신에 입단한 나미키 데루오 외야수, 초등학교 4학년 때 사다하루를 동경해서 야구를 시작하여 1988년 PL가쿠엔 고등학교에서 주니치 드래곤스에 입단한 다쓰나미 가즈요시 유격수 등 2명이 있다.
  12. 《야큐코조》, 뱌쿠야쇼보, 2009년 4월호, p.203
  13. 우에마에 준이치로 저 《교진군 진영의 베스트 나인》, 가도카와 분코. 덧붙여 곤도 다다유키도 같은 내용을 기술했다.
  14. 荒川博 その2【全4回】 欠点を克服するための努力が生んだ一本足打法 (1)
  15. 《스포츠 20세기》, 베이스볼 매거진사, 2000년 7월, p.25
  16. 도모토 아키히코 저 《하가 준이치 검도 유고집 : 부전기·일기》, 시마즈 서점, 1999년
  17. 《'77 THE BASEBALL MOOK 프로 야구당》 (닛폰 스포츠샤)
  18. 《WiLL》 2013년 2월호, 오 사다하루 신춘 대담
  19. 그 때까지 요미우리에서의 등번호 50번대는 고졸 신인을 위한 등번호로 자리매김되고 있어 입단하고 1군에서 활약하면 맨 앞의 등번호로 바꾸게 돼있었다(예를 들자면 마키하라(5417), 요시무라(557), 고마다(5010), 무라타(569) 등). 그러나 마쓰이는 요미우리에서 10년간, 그리고 메이저 리그에서 9년간 등번호 55번을 계속 붙였다.
  20. 《일록 20세기: 1977년》, 고단샤, 1997년 발행
  21.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40년사 1969-2009 제비의 기억》, 베이스볼 매거진사, p.43
  22. 사다하루가 은퇴한 1980년에 메이저 리그 26개 구단의 연고지 구장의 대부분은 좌익, 우익이 100m를 넘었으며 좌익, 우익이 100m 이하인 구장도 좌우 중간은 115m 이상 등 충분한 외야의 넓이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 비해 고라쿠엔 구장은 좌익, 우익이 실측 87.5m, 좌우 중간 110m로 좁은 편이며 다른 센트럴 리그의 구장도 거의 비슷한 넓이였다.
  23. 21세기의 전설사 오 사다하루 ‘기력편’(애장본 발매 : (주)미디어 팩토리)
  24. 곤도 다다유키 저 《은퇴, 그 드라마》, 신초분코
  25. TBS 《ZONE》, 1999년 10월 28일 방송
  26. ソフトB王監督が退任発表「幸せでした」 - 닛칸 스포츠, 2008년 9월 23일
  27. 再来日の覚悟が見えたオーティズの箸使い。’ - Sports Graphic Number
  28. 오 사다하루 저 《야구에 설레며 : 오 사다하루, 그의 반생을 얘기하다》, 주오코론신샤, 2011년 03월. ISBN 9784120042171
  29. 곤도 다다유키 저 《이렇게 하면 사람은 움직인다 - 프로 야구 명감독의 용병술》, 도큐 에이전시, 1985년 12월. ISBN 9784924664111
  30. 《WiLL》 2013년 2월호, 오 사다하루 신춘 대담에서
  31. 그 당시 자신에게 사다하루가 직접 전화를 걸 리가 없다고 생각한 오바나가 “오 씨라고요? 실례합니다만 그런 분은 잘 모르겠는데, 몇 번으로 거신 겁니까”라고 되물었고, 그 질문에 사다하루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감독을 맡고 있는 오 사다하루라고 합니다”라고 정중하게 대답했기 때문에 도리어 오바나가 꼼짝할 수 없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32. 12位:ホームラン地蔵 - 《出没!アド街ック天国》(TV 도쿄), 2006년 11월 25일 방송
  33. 王貞治さんの母・登美さん死去…108歳’ - YOMIURI ONLINE(요미우리 신문), 2010년 8월 17일
  34. 사다하루도 하리모토도 서로 ‘절친한 친구’가 아닌 ‘心友’(마음의 친구)라고 써서 ‘친우’(しんゆう)라고 부른다고 한다.
  35. 편집위원 시미즈 미쓰루, ‘【王家の教え】 (上) 王貞治さんの信念「私は疑うことなく日本人」 (1/3ページ)’ - MSN 산케이 뉴스(산케이 신문), 2008년 12월 26일
  36. 편집위원 시미즈 미쓰루, ‘【王家の教え】 (上) 王貞治さんの信念「私は疑うことなく日本人」 (2/3ページ)’ - MSN 산케이 뉴스(산케이 신문), 2008년 12월 26일
  37. 편집위원 시미즈 미쓰루, ‘【王家の教え】 (上) 王貞治さんの信念「私は疑うことなく日本人」 (3/3ページ)’ - MSN 산케이 뉴스(산케이 신문), 2008년 12월 26일
  38. 青木功 - 世界の王さんあっての私 - 도요케이자이, 2009년 8월 4일
  39. 다마키 마사유키 네트워크’ 칼럼 - ‘‘일본 축구 청춘 시대’ 마지막 투쟁’, 해설은 가마모토 구니시게가 맡았다.
  40. 아사히 신문, 1993년 5월 16일자 조간, p.19
  41. 2011年度9月卒業式 王貞治氏にスポーツ功労者表彰 - 와세다 대학 공식 홈페이지, 2011년 9월 17일
  42. 선수 시절만으로 본다면 야마모토 마사가 최장 기록이다.
  43. 시즌 기록 랭킹을 참조(일본 야구 기구 홈페이지)

같이 보기[편집]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