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키 가즈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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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가즈히로
佐々木 主浩

Kazuhiro Sasaki
K Sasaki.JPG

시애틀 매리너스 시절의 사사키 가즈히로

기본 정보
국적 일본 일본
생년월일 1968년 2월 22일(1968-02-22) (46세)
출신지 미야기 현 센다이 시 이즈미 구
신장 190 cm
체중 98 kg
선수 정보
투구·타석 우투우타
수비 위치 투수
프로 입단 연도 1989년
드래프트 순위 1순위
첫 출장 NPB / 1990년 4월 7일
MLB / 2000년 4월 5일
마지막 경기 NPB / 2005년 8월 9일
MLB / 2003년 9월 28일
경력
일본 야구 전당
Empty Star.svg Empty Star.svg Empty Star.svg 전당 수상자 Empty Star.svg Empty Star.svg Empty Star.svg
선출년 2014년
선출방법 경기자 표창
사사키 가즈히로
일본어식 한자 표기: 佐々木 主浩
가나 표기: ささき かづひろ
외래어 표기법 표기: 사사키 가즈히로
통용 표기: 사사키 카즈히로
로마자: Kazuhiro Sasaki

사사키 가즈히로(일본어: 佐々木 主浩 (ささき かづひろ), 1968년 2월 22일 ~ )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해설가·평론가이다.

현역 시절에는 구원 투수로서 활약하여 일본 프로 야구의 한 시대를 쌓아 올리는 등 일본에서는 ‘(하마의)대마신’((ハマの)大魔神), 메이저 리그에서는 ‘KAZU’(가즈)라는 별명이 붙여질 정도로 유명하다. 메이저 리그로 이적하면서 입단 발표할 당시 GREAT DAIMAJIN(그레이트 다이마진)이라고 소개되어 등판할 시에도 ‘DAIMAJIN’이라는 글자가 구장의 대형 전광판에 등장했던 적이 있다.

인물[편집]

프로 입단 전[편집]

미야기 현 센다이 시 출신으로 도호쿠 고등학교 시절 다케다 도시아키 감독 아래에서 2학년 여름부터 팀의 에이스로서 활약, 3연속 고시엔 대회에 출전하여 3학년 시절 봄과 여름에는 팀은 8강에 진출했다. 대학 진학할 시에는 도쿄에 가는 일도 생각을 했지만 다케다 감독의 권유로 미야기 현에 소재하고 있는 도호쿠 복지대학에 진학했다. 도호쿠 복지대학 시절 전일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두 차례의 준우승(2학년·3학년)을 이끌었다.

다이요(요코하마) 시절[편집]

입단으로부터 1991년까지[편집]

1989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1순위(노모 히데오의 낙첨 1순위)로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현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로부터 지명을 받았는데 대학 시절에 허리 부상으로 수술을 받은 적도 있어 프로팀 입단에 적극적이지는 않았지만 구단으로부터 설득을 받아 고심 끝에 입단, 등번호는 22번으로 배정을 받았다. 등번호는 2월 22일 오후 2시 22분에 태어났다는 데에 유래되어 루키 이어(ルーキーイヤー)의 춘계 캠프를 다룬 스포츠 뉴스에서는 ‘헤이세이 2년 2월 22일에 22세의 생일을 맞이한 등번호 22의 사사키 투수’(平成2年2月22日に22歳の誕生日を迎えた背番号22の佐々木投手)라는 제목의 특집을 편성한 적도 있다.

입단 당시 감독이었던 스도 유타카는 “팀에서 가장 좋은 투수가 중간 계투를 맡아야 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엔도 가즈히코를 중간 계투로 기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로 2년차인 1991년 시즌 초반까지는 선발 투수로 기용되기도 했지만 엔도의 부상으로 인해 중간 계투로 뛰게 되었다. 속구와 낙차가 있는 포크볼을 주무기로 높은 탈삼진률을 기록했다. 1991년 8월 28일의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 9회에 ‘3자 연속 3구 삼진’을 달성했다.

또 시외전화 국번인 ‘022 …’번이 미야기 현에 배정된 것과 관련해서 “미야기 현 출신인 나에게 있어서도 기쁘다”라고 말하는 등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밝혔고 사사키의 활약 이후 등번호 22번은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고 있는 선수에게 주어지면서 한신 타이거스후지카와 규지는 사사키와 똑같은 등번호를 착용하게 되었을 때 “사사키와 다카쓰(신고, 야쿠르트)와 같은 등번호를 갖게 되어 영광이다”라고 말했다.

1992년 ~ 1999년[편집]

이듬해 1992년에는 데뷔 후 처음으로 최우수 구원 투수라는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 해에 중간 계투인 모리타 고키로부터 사사키에게 연결되는 중간 계투 릴레이가 확립되어 있었다. 그 후 2년 간은 갑작스런 부상으로 슬럼프에 빠지는 등 침체되었지만 1995년부터 1998년까지 4년 연속 최우수 구원 투수상을 석권했다. 이전에는 산케이 스포츠요미우리 자이언츠 담당 기자가 사사키를(적팀에서 봤을 때) ‘악마의 수호신’(悪魔の守護神)을 생략한 ‘악마’라고 표현했고 그 후 ‘하마의 대마신’(ハマの大魔神)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1]

1998년에는 51경기에 등판하여 평균자책점 0.64의 안정감을 갖고 있을 정도로 당시로서는 프로 야구 신기록이 되는 45세이브를 기록해 요코하마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큰 기여를 했다. MVP를 시작으로 일본 야구계의 최고 상인 쇼리키 마쓰타로상일본 프로 스포츠 대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이 45세이브는 계산상 3경기에 1세이브를 기록하게 되면서 46세이브를 기록하고 있는 이와세 히토키(3.17 경기), 후지카와 규지(3.13 경기)를 넘는 기록(비공식)이다. 10월 8일의 리그 우승을 결정한 경기에서도 마무리 투수로 등판해 본인 스스로 이 경기를 ‘베스트 게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9월 19일, 요코하마의 우승을 기원하는 목적으로 요코하마역 동쪽 출입구에 위치한 지하 상가인 ‘요코하마 포르타’내에 ‘하마의 대마신사’(ハマの大魔神社)라는 동상이 설치되면서 사사키가 포크볼을 쥐는 듯한 투구 폼을 본뜬 청동상이 놓여져 다음해인 1999년 1월 17일에 철거될 때까지 약 1,660만 엔의 새전이 모였다. 새전은 전액을 요코하마시 사회 복지 협의회에 기부되었다. ‘하마의 대마신’이라는 이 단어는 한 해 동안 일본 내에서 화제의 유행어를 남긴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인 새로운 말·유행어 대상을 수상했다.

1999년 시즌 종료 후 FA(자유 계약 선수)를 취득해 메이저 리그의 이적이 가능해졌다. 그 해에는 시즌 도중에도 불구하고 수술을 실시했던 것에 대해 요코하마 구단으로서는 강한 불신감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사사키도 잔류를 암시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메이저 리그 이적 후 구단 측은 등번호 22번을 다른 선수에게 건네준 이유가 사사키의 행동에 대한 실망이나 불신감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했다.[2] 시즌 종료 후 FA권을 행사해 메이저 리그인 시애틀 매리너스에 이적하면서 당시 매리너스의 구단주인 닌텐도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은 “메이저 리그의 피카츄가 되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시애틀 매리너스 시절[편집]

2000년[편집]

스프링 트레이닝으로 호세 메사와 함께 마무리 투수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등 시즌 개막 5일전인 3월 30일에 마무리 투수로 지명되었다. 4월 5일 보스턴 레드삭스전에서 메이저 리그 진출 이후 첫 등판을 했는데 이 때 세이프코 필드의 전광판에 일본어로 “어서 오십시오 매리너스 대마신”(ようこそマリナーズ 大魔神)이라는 문자와 함께 ‘DIAMAJIN’이라는 문자가 반대로 표시되는 해프닝도 있었다. 그러나 5월 10일의 텍사스 레인저스전에서 끝내기 홈런을 허용했고 12일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전에서도 맷 스테어즈에게 끝내기 홈런을 허용하는 등 중간 계투로 변경되었지만 그 후 마무리 투수를 맡은 호세 메사도 23일의 볼티모어 오리올스전에서 끝내기 홈런을 허용했기 때문에 다시 마무리 투수로서 기용되었다.

6월 6일 콜로라도 로키스전에서 무라카미 마사노리, 하세가와 시게토시에 이은 일본인 최다 타이 기록인 9세이브째를 기록했고 12일의 캔자스시티 로열스전에서 일본인 최다 기록인 10세이브째를 들었다. 올스타전 출전은 없었지만 출장 선수 전원의 싸인이 새겨진 사사키의 유니폼을 알렉스 로드리게스로부터 받아 “일생의 보물입니다”라고 말했다.

포스트 시즌에서는 4경기에 등판해 무실점의 호투로 3세이브를 올렸지만 팀은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상대인 뉴욕 양키스에게 패했다. 정규 시즌에서는 최종적으로 구원 투수들 가운데 리그 1위의 탈삼진률 11.20, 공동 6위인 WHIP 1.16의 투구로 메이저 리그 신인 기록인 37세이브(2010년에 네프탈리 펠리스가 40세이브를 올리며 경신)를 들어 아메리칸 리그 신인왕에 선정되었다.

2001년[편집]

이듬해 4월 16일 LA 에인절스전에서 개인 최고 속도가 되는 96mph(약 154km/h)를 기록하면서 비교적 무난한 첫 출발을 알렸고 4월의 메이저 리그 최다 기록이 되는 월간 13세이브를 기록했다. 5월 29일의 볼티모어 오리올스전에서는 1994년에 리 스미스가 달성한 46경기째에 뒤를 이은 역사상 2위인 50경기째의 20세이브를 달성해 5월 종료 시점에서의 21세이브는 최다 세이브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7월 2일에 29세이브를 올린 이후에는 세이브를 달성할 기회가 줄어들면서 8월 2일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전에서는 미일 통산 300세이브를, 다음날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전에서는 메이저 리그 생활 2년차로서의 아메리칸 리그 모든 팀을 상대하면서 세이브를 달성했다. 8월 18일의 뉴욕 양키스전에서 당시 구단 신기록이 되는 38세이브를 각각 달성했지만 시즌 종반에는 오른쪽 넓적다리에 통증을 일으켜 컨디션이 무너지는 등 마리아노 리베라와의 5개 차이로 리그 2위에 끝났다. 정규 시즌 최종 등판이 된 10월 6일의 텍사스 레인저스전에서는 메이저 리그 타이 기록이 되는 45세이브를 달성해 “이런 시합을 매듭지을 수 있게 되어 영광이다”라고 말했다.

포스트 시즌에서는 8경기에 등판하여 14.63의 탈삼진률을 기록했지만 뉴욕 양키스와의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4차전에서 개인 최고 속도가 되는 96mph(약 154km/h)를 기록하였지만 알폰소 소리아노에게 끝내기 홈런을 허용하여 팀은 다음날에 열린 경기에서도 패배했다. 오프에는 시즌 종료를 보고하기 위해 닌텐도 본사를 방문하면서 메이저 리그 이적을 목표로 하고 있던 다니시게 모토노부의 획득을 제안했지만 그 후 메이저 리그 진출에는 이뤄지지 않았다.

2002년[편집]

부인의 갑작스런 병으로 인해 한 때는 일본에 귀국했지만 6월 1일까지의 무자책점을 기록하여 호투를 계속했다. 6월 26일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전에서 19세이브를 올려 사상 최고 속도가 되는 메이저 리그 통산 160경기째의 통산 100세이브를 달성, MLB 올스타전에서도 전년도에 이어 2년 연속으로 출전하는 등 메이저 리그 개인 최고 성적인 2.52의 평균자책점을 남겼다. 그러나 시즌 후반기에 오른쪽 팔꿈치를 다치면서 약간의 컨디션이 떨어지게 되자 8번의 구원 실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정규 시즌 종료 후에는 “미국에 있으면 텔레비전(플레이오프)을 보았기 때문에 포스트 시즌에 출전할 수 없게된 것이 유감스럽다”라고 말하면서 10월 상순에 귀국했다. 오프에는 미일 야구 대회의 출전도 포기하여 오른쪽 팔꿈치의 유리 연골 제거 수술을 받았다.

2003년[편집]

4월 3일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전에서 1이닝 4개의 삼진이라는 진기록을 달성했지만 같은 달 23일 오른쪽 허리 통증을 일으키는 부상을 당하면서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 5월에는 다시 복귀하여 호투를 계속했지만 그 후에 다시 부상자 명단에 오르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결국 시즌 종료 후 계약이 1년 남아 있던 매리너스와의 계약을 파기하여 퇴단했는데 퇴단한 이유에 대해 “일본에서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라고 말했다. 매리너스에서 활동하던 중 자신의 대표로 있는 모터 스포츠팀에서 선수로 뛰며 자동차 경주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요코하마로 복귀[편집]

2004년[편집]

그 해 요코하마에 복귀하면서 과거에 비해 위력은 다소 약해졌다고는 해도 여러 종류에 변화하는 포크볼은 타 구단의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있었다. 그러나 8월 4일의 주니치 드래건스전, 8월 7일의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는 연속으로 구원 투수로 등판했지만 모두 구원에 실패해 다음 날인 8일 야쿠르트전에서는 도바시 가쓰유키, 이와무라 아키노리, 후루타 아쓰야를 상대로 3타자 연속 홈런을 허용하는 등 역전패를 당했다. 11일에는 현역에서 은퇴하겠다는 입장을 구단에게 전하기도 했지만 구단의 만류로 철회되었고 그 후 2군으로 떨어지면서 그대로 시즌을 마감했다.

2005년[편집]

거듭된 부상의 영향으로 3경기에 등판했지만 3경기 연속 끝내기 패배를 당하는 등 총 8경기에 등판했지만 0승 3패와 4세이브, 평균자책점 9.53이라는 기대 이하의 성적을 남기며 결국 2군으로 떨어졌다. 그 후 1군 복귀를 목표로 두고 조정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컨디션이 좀처럼 오르지 않았고 그 사이에 마크 크룬이 팀내 간판 마무리 투수로 군림할 정도의 기대 이상의 맹활약을 펼치면서 팀의 전력에서 제외돼 결국 8월 7일 부로 현역 은퇴를 공식 표명했다. “어머니가 지켜보는 앞에서 던지고 싶다”라는 희망에 의해 이틀 후인 8월 9일에는 고향인 센다이 시풀캐스트 스타디움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 등판해 이 경기는 사실상 은퇴 경기였다. 대전 상대는 고교 시절부터의 라이벌이자 친구인 기요하라 가즈히로였다(결과는 3구 삼진).

사사키는 구단과의 계약을 방패로 쇼난 시렉스의 유니폼을 착용하지 않아 이스턴 리그에서의 조정 등판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팀은 A클래스(1위 ~ 3위, 상위권을 지칭하는 일본 언론의 표현) 진입을 놓고 경쟁을 하고 있는 상황에 요코하마의 우시지마 가즈히코 감독은 경기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평상시에는 구원 투수였던 하타 유지를 등판시켜 기요하라의 첫 번째 타석에서 사사키를 투입해 기요하라의 타석이 들어선 후 재차 원래 선발 투수였던 가도쿠라 겐을 등판시킨다고 하는 ‘이어서 던지는’ 작전을 취했다. 이 같은 투수 기용에 대해 우시지마 감독은 경기 직전 요미우리의 호리우치 쓰네오 감독에게 “시끄럽게 해서 미안하다”라고 말해 사과했다. 이 은퇴 경기의 등판한 것에 대해서 ‘정규 경기의 사물화’라는 야구계 내부에서도 비판적인 시각도 있어 요코하마 팀내에서도 노무라 히로키 코치와 후쿠다 이사오 수석 코치 간에 갈등이 생기는 등 내분이 일어나기도 했다.

10월 8일, 팀의 홈구장인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의 야쿠르트전에 최종 등판할 예정이었지만 팀의 A클래스 진입이 걸려있는 경기에서의 등판은 팀에게 폐를 끼친다고 하여 스스로 고사해 ‘혼자만의 은퇴식’을 거행했다. 당시 팬들에게 전한 인사말로 “생애 야구인일 것을 맹세합니다”라고 말했다.

그 후[편집]

현역 은퇴 후 요코하마 구단의 자회사인 TBS닛칸 스포츠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발탁되어 현재 야구 평론가로도 활동 중에 있으며, 2011년 한국 프로 야구팀인 LG 트윈스의 임시 인스트럭터로 활동했다.

2006년 5월 16일에 NAR마주 면허를 취득했고, 2007년에는 JRA의 마주 면허를 취득했다.

투구 스타일[편집]

주무기는 150km/h를 넘는 강속구와 속구보다 10km/h 전후 늦은 포크볼, 120km/h대의 세로로 던질 정도의 커브이다. 투구는 속구 또는 포크가 대부분이라 커브는 그다지 던지지는 않았다. 사사키의 포크는 몇 안 되는 옆회전만이 걸려 세로 회전이 없기 때문에 차이가 있어 회전하고 있으면서도 직구인지 포크인지는 구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3] 거의 스트레이트와 고속 포크가 2가지의 구종만 사용했기 때문에 일본 프로 야구와 메이저 리그에서는 높은 탈삼진률을 자랑했다.

상세 정보[편집]

출신 학교[편집]

선수 경력[편집]

NPB
MLB

기타 경력[편집]

수상·타이틀 경력[편집]

타이틀[편집]

NPB
  • 최우수 구원 투수 : 5회(1992년, 1995년 ~ 1998년)

수상[편집]

NPB
  • MVP : 1회(1998년)
  • 최우수 투수 : 1회(1998년)
  • 베스트 나인 : 1회(1998년)
  • 월간 MVP : 4회(1991년 7월, 1997년 8월, 1998년 6월, 1998년 9월)
  • 파이어맨상 : 5회(1992년, 1995년, 1996년, 1997년, 1998년)
  • 쇼리키 마쓰타로상 : 1회(1998년)
  • 최우수 배터리상 : 1회(1998년) [4]
  • IBM 플레이어오브더이어상 : 2회(1997년, 1998년)
  • 우수 JCB·MEP상 : 1회(1998년)
  • 일본 프로 스포츠 대상(1998년)
  • JA 전농 Go·Go상 : 1회(최다 탈삼진상 : 1992년 5월)
  • 센트럴 리그 회장 특별상(2005년)
MLB
  • 아메리칸 리그 신인왕(2000년)

주요 기록[편집]

첫 기록(NPB)[편집]

기록 달성 경력(NPB)[편집]

  • 통산 100세이브 : 1995년 9월 27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26차전(도쿄 돔), 8회초 2사에 3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마무리, 1과 1/3이닝 무실점 ※역대 8번째.
  • 통산 150세이브 : 1997년 8월 7일, 대 한신 타이거스 17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8회초 2사에 5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마무리, 1과 1/3이닝 무실점 ※역대 2번째.
  • 통산 200세이브 : 1998년 9월 4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18차전(나고야 돔), 10회말 2사에 4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마무리, 1/3이닝 무실점 ※사상 최초.
  • 통산 250세이브 : 2005년 4월 14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2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9회초에 4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마무리, 1이닝 무실점 ※역대 2번째.

기타(NPB)[편집]

  • 3자 연속 3구 삼진 : 1991년 8월 28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23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5]
  • 올스타전 출장 : 8회(1992년, 1993년, 1995년 ~ 1999년, 2005년)

MLB[편집]

  • MLB 올스타전 선출 : 2회(2001년, 2002년)

등번호[편집]

  • 22(1990년 ~ 2005년)

연도별 투수 성적[편집]

연도 소속











상대
타자
투구
이닝





고의
사구
몸에
맞는 볼







평균
자책점
WHIP
1990년 다이요·
요코하마
16 7 0 0 0 2 4 2 -- .333 215 47.2 49 10 30 0 0 44 4 1 31 31 5.85 1.66
1991년 58 1 0 0 0 6 9 17 -- .400 467 117.0 72 7 51 8 4 137 5 1 33 26 2.00 1.05
1992년 53 0 0 0 0 12 6 21 -- .667 356 87.2 47 6 39 5 1 135 8 0 32 24 2.46 0.98
1993년 38 0 0 0 0 3 6 20 -- .333 226 55.0 35 6 21 1 2 84 3 0 24 20 3.27 1.02
1994년 31 0 0 0 0 3 1 10 -- .750 178 46.0 27 5 15 1 0 59 1 0 11 11 2.15 0.91
1995년 47 0 0 0 0 7 2 32 -- .778 210 56.2 30 5 17 1 0 78 4 0 12 11 1.75 0.83
1996년 39 0 0 0 0 4 3 25 -- .571 200 49.2 37 6 16 0 1 80 4 0 17 16 2.90 1.07
1997년 49 0 0 0 0 3 0 38 -- 1.000 219 60.0 25 6 17 2 1 99 2 0 6 6 0.90 0.70
1998년 51 0 0 0 0 1 1 45 -- .500 212 56.0 32 1 13 0 1 78 1 1 7 4 0.64 0.80
1999년 23 0 0 0 0 1 1 19 -- .500 94 23.1 19 1 6 0 0 34 3 0 5 5 1.93 1.07
2000년 SEA 63 0 0 0 0 2 5 37 0 .286 265 62.2 42 10 31 5 2 78 1 0 25 22 3.16 1.16
2001년 69 0 0 0 0 0 4 45 0 .000 261 66.2 48 6 11 2 4 62 4 0 24 24 3.24 0.89
2002년 61 0 0 0 0 4 5 37 0 .444 249 60.2 44 6 20 4 2 73 6 0 24 17 2.52 1.05
2003년 35 0 0 0 0 1 2 10 0 .333 150 33.1 31 2 15 2 1 29 4 0 17 15 4.05 1.38
2004년 요코하마 25 0 0 0 0 1 2 19 -- .333 89 22.2 18 4 3 0 0 18 0 1 8 8 3.18 0.93
2005년 9 0 0 0 0 0 3 4 0 .000 31 6.0 11 2 2 0 0 5 0 0 6 6 9.00 2.17
NPB : 12년 439 8 0 0 0 43 38 252 0 .530 2497 627.2 402 59 230 18 10 851 35 4 192 168 2.41 1.01
MLB : 4년 228 0 0 0 0 7 16 129 0 .304 925 223.1 165 24 77 13 9 242 15 0 90 78 3.14 1.08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 다이요(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는 1993년에 요코하마(요코하마 베이스타스)로 구단명을 변경.

주석[편집]

  1. 산케이 스포츠가 스포츠 신문으로서는 유일하게도 ‘악마’라는 표기를 계속하여 그룹의 모기업인 닛폰 방송에서는 사사키가 은퇴한 후에도 ‘악마’라고 불리는 일도 많았다.
  2. 다만 그것 이후에도 22번을 일관해 투수의 번호로서 취급, 요코하마에 복귀했을 경우 사사키에게 22번을 다시 주기도 했다.
  3. 당시 요코하마의 곤도 히로시 감독은 사사키의 포크볼이 떨어지는 방법은 대단한 일이 없지만 구속이 있어 회전하고 있기 때문에 타자에게 직구인지 포크볼인지는 구별되지 않을 정도의 공이었다고 말했다.
  4. 포수인 다니시게 모토노부와 함께 수상했다.
  5. 9회말에 다쓰카와 미쓰오, 하라 신지, 오토 시게키으로부터 삼진을 뺏어냄(역대 11번째이자 센트럴 리그에서는 6번째).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