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나쓰 유타카
| 에나쓰 유타카 江夏 豊 Yutaka Enats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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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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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적 | |
| 출신지 | 효고 현 아마가사키 시 |
| 생년월일 | 1948년 5월 15일 (65세) |
| 신장 | 178 cm |
| 체중 | 95 kg |
| 선수 정보 | |
| 투구·타석 | 좌투좌타 |
| 수비 위치 | 투수 |
| 프로 입단 연도 | 1967년 |
| 드래프트 순위 | 1966년 1차 1순위(한신 타이거스) |
| 첫 출장 | 1967년 4월 13일 |
| 마지막 경기 | 1984년 7월 12일 |
| 경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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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나쓰 유타카 | |
|---|---|
| 일본어식 한자 표기: | 江夏 豊 |
| 가나 표기: | えなつ ゆたか |
| 외래어 표기법 표기: | 에나쓰 유타카 |
| 통용 표기: | 에나츠 유타카 |
| 로마자: | Yutaka Enatsu |
에나쓰 유타카(일본어:
1967년 한신 타이거스의 소속으로 프로 야구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프로 통산 206승, 193세이브를 기록할 정도로 뛰어난 좌완 투수였다. 특히 1968년에는 한 시즌 401 탈삼진을 기록했는데 이는 일본 프로 야구 역대 최고 기록이다.
목차 |
인물 [편집]
아마추어 선수 시절 [편집]
형제·자매가 모두 아버지가 다른 복잡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정식으로 야구를 한 적은 없었는데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한 번은 야구부에 입단했지만 2개월이 지나면서도 공 줍기 정도로의 연습을 시켜 주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상급생과의 다툼이 일어나게 되자 결국 야구부를 퇴단하게 되었다. 이 때 야구부 감독이었던 교사로부터 “야구는 다양한 스포츠의 결정이기 때문에 다른 스포츠를 체험하라”라고 설득한 끝에 배구나 럭비, 스모 등을 경험했고 최종적으로 육상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육상부에 있을 당시에는 투포환 선수로 활동하면서 소속 현 대회에서 2위에 입상한 적도 있다.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한 것은 당시에는 약소 팀이었던 오사카가쿠인 대학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선 이후였다. 고교 시절에는 직구 이외의 공, 즉 변화구를 던질 줄 몰랐지만 포수와의 사인 교환 시 고개를 젓는 것으로 상대 타자들을 속이기도 했는데 구위력이 있는 직구와 여러가지 궁리를 해나가면서 활약했다. 3학년 때인 1966년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팀을 4강에 진출하는 기여를 했는데 예선 7경기를 혼자서 투구하는 등 3실점을 기록했고 준결승에서는 팀 동료의 실책으로 1실점하는 바람에 0대 1로 패했다. 에나쓰의 활약하는 모습을 지켜본 한신 타이거스의 스카우트 관계자는 에나쓰의 영리함을 주목하였다.
1966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는 한신 타이거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도에이 플라이어스, 한큐 브레이브스 등 4개 구단에서 1차 지명을 하는 등 경합을 벌였는데 추첨 결과, 1차 지명 교섭권을 획득한 한신에 입단했다.
한신 타이거스 시절 [편집]
입단 1년째인 1967년의 춘계 스프링 캠프에서는 고교 시절까지 던질 수 없었던 변화구를 습득하기 위해 곤도 마사토시 등과 같은 선배 투수에게 가르쳐달라고 요청했지만 어느 쪽도 던지는 방법을 습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규 시즌에 돌입, 속구를 무기로 삼아 시즌 최다인 225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볼넷이나 피홈런이 많으면서 타격 능력이 부족한 당시 팀의 사정도 겹쳐 12승 13패를 기록했다. 그 해 센트럴 리그 신인왕 타이틀은 다케가미 시로가 차지했는데 단지 구단과는 1승 10만엔의 인센티브 계약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연봉에서 상당한 수입을 얻었다고 하였다.
이듬해인 1968년 스프링 캠프에서는 투수 코치로 새로 발탁된 하야시 기이치 코치와 함께 투구 폼(중학교 시절 투포환 선수로 활동해서 투구 폼이 어깨 위에서 메어 던지는 형태였음)을 교정하였다. 이것에 의해 컨트롤과 구종의 폭을 몸에 익혀 그 해에는 시즌 개막 이후부터 전년도를 웃도는 페이스로 탈삼진과 승리를 연달아 기록하였는데 이 일로 인해 에나쓰는 야구계를 대표하는 중심 투수로 성장하게 되었다. 에나쓰는 자상하고 온후한 성품의 하야시 코치를 ‘스승님’으로 부르면서 존경하였다.
같은 해인 1968년 9월 17일 홈구장인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맞대결에서 오 사다하루 타석에서 탈삼진을 기록하여 이나오 가즈히사가 수립한 일본 역대 한 시즌 최다 탈삼진 기록인 353 탈삼진 기록과 타이 기록을 세우게 된다. 이후 후속 타자들을 의도적으로 범타 처리하였는데 상대팀 투수였던 다카하시 가즈미에게 낮은 공을 던져 2루수 땅볼을 유도하였다. 다시 돌아온 오 사다하루의 타석에서 다시 삼진을 빼앗아 시즌 354번째 탈삼진을 기록하면서 역대 최고 기록을 경신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 경기의 마지막 타석에서 번트를 안타로 연결시켜 끝내기 안타를 기록하기도 했다.
오 사다하루와 에나쓰와의 대결은 특별한 것으로 에나쓰가 오 사다하루에게 통산 57개의 탈삼진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직구 승부를 고집했기 때문에 오 사다하루에게 20개의 피홈런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10월 8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에서 신타쿠 히로시에게 시즌 383번째 탈삼진을 기록했는데, 이는 1964년에 달성된 메이저 리그 한 시즌 최다 탈삼진 기록이었던 샌디 쿠팩스의 382 탈삼진 기록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1] 시즌 종료 후 에나쓰가 기록한 탈삼진 갯수는 총 401개로서 일본 역대 최고 기록일 뿐만 아니라 메이저 리그의 기록(1973년 놀란 라이언이 기록한 383개가 메이저 리그 역대 최고 기록)도 뛰어 넘는 세계 최고의 기록이다.
뛰어난 활약으로 혈행장애로 고생하던 무라야마 미노루를 대신해서 한신 타이거스의 에이스 역할을 하게 된다. 다승 2번, 최고 평균자책 1번, 최고의 투수에게 주어지는 사와무라 에이지상 1회 수상 이외에도 시즌 20승 이상 4번, 6년 연속 리그 최다 탈삼진을 기록하면서 센트럴 리그를 대표하는 투수가 되었다. 프로 4년차이던 1970년에는 통산 1,000 탈삼진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일본 프로 야구 통산 최다 탈삼진 기록을 가지고 있는 가네다 마사이치의 기록을 뛰어넘는 최단 기록이었다.
1971년 7월 17일, 니시노미야 구장에서 펼쳐진 올스타전 첫 번째 경기에서 빠른 직구와 정확한 제구력으로 9타자 연속 탈삼진을 기록하기도 했다. 전년도 올스타전에서 기록한 5개의 삼진과 다음날 펼쳐진 두 번째 경기에서 다시 삼진 1개를 추가하여 올스타전에서 총 15타자 연속 탈삼진을 기록했는데 이것 역시 올스타전 기록이다. 또한 그 경기의 타석에서 선제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는데 이는 1960년 다쓰미 하지무가 기록한 이래 두 번째 기록이고, 이후 올스타전에서 투수가 홈런을 친 적은 없었다.
1973년 8월 30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홈 경기에서 상대팀 투수였던 마쓰모토 유키쓰라와 팽팽한 투수전을 벌이면서 11회까지 역투를 하고 있었다. 11회말 타석에서 마쓰모토의 초구를 쳐서 우측담장을 넘는 끝내기 홈런을 기록하면서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초유의 연장전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였다. 당시 이 경기를 중계하고 있던 아사히 방송의 아나운서가 “에나쓰 만세”라고 외쳐대는 등 방송위원회로부터 주의를 받았다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뛰어난 활약을 보였지만 당시 리그의 최강팀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였으며 전인미답의 9시즌 연속 리그 우승을 기록하고 있었다. 1973년 1승만 더 추가하면 한신 타이거스의 우승이 결정되는 시즌 129번째 경기인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선발로 등판했지만 패전 투수가 되었다. 1974년에는 혈행장애와 심장질환이 악화되었고, 거기에 어깨 부상과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 복용하고 있던 진통제의 영향으로 체중이 급격하게 증가하기도 했다. 당시 라이벌이었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호리우치 쓰네오에 앞서 통산 150승을 먼저 달성하기는 했지만 해가 갈수록 성적은 나빠지고 있었다. 또한 당시 한신의 감독이었던 가네다 마사야스, 요시다 요시오와의 불화로 ‘독불장군’(一匹狼), ‘고독한 늑대’(ロンリーウルフ) 등의 별명을 얻으면서 구단 프런트와의 나쁜 관계가 언론을 통해 집중 조명되기도 했다. 또한 1970년의 검은 안개 사건(黒い霧事件, 1969년 ~ 1971년 사이에 행해진 일련의 일본 프로 야구 승부 조작 사건)에 본의 아니게 연루되기도 하였다. 결국 1976년 1월 난카이 호크스(현재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에모토 다케노리, 시마노 이쿠오와 트레이드 되어 난카이 호크스로 이적하게 되었다.
또한 이 트레이드를 실시할 당시 에나쓰는 맞교환 상대인 에모토에 대해 “왜 저런 수준의 선수와(내가 맞교환 상대가 되는 것인가)….”라고 투덜대어 그 사실을 전해 들은 에모토가 “말하고 싶은 만큼 마음껏 싫어해라”라고 격노하는 등 일촉즉발의 상태에 놓여졌다. 그러나 에모토와는 그 후에 화해를 하면서 친구 사이가 되는 등 이후 에나쓰의 형사 재판에 대한 진술할 때까지의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난카이 호크스 시절 [편집]
원래 난카이 호크스로 이적할 마음이 없었던 에나쓰는 한신 타이거스 선수의 신분을 유지한 채로 은퇴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당시 난카이 호크스의 선수 겸 감독이었던 노무라 가쓰야의 설득으로 난카이 호크스 팀에서 선수 생활을 계속하기로 결심을 했다. 1975년 10월 1일 히로시마와의 경기에서 주자 만루인 상황에 기누가사 사치오가 타석에 들어서면서 2-3 풀카운트 상황에 의도적으로 볼을 던졌지만 타자의 헛스윙을 유도하면서 삼진을 잡았다. 당시 노무라 감독은 에나쓰가 일부러 볼을 던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적 첫 해인 1976년에는 혈행장애와 심장질환으로 인해 많은 투구 이닝을 소화할 수 없었던 탓에 뚜렷한 성적을 낼 수 없었다. 하지만 제구력은 여전히 리그 최상이었기 때문에 노무라 감독은 에나쓰를 50개 정도의 투구를 하는 구원투수로서의 전향시키고자 했다. 에나쓰도 처음에는 “트레이드에 이어 이제는 구원 투수로 전락시켜서 자신에게 수모를 주려고 하는가”라면서 반발을 했지만 “야구계의 혁명을 일으켜보자”라는 노무라 감독의 설득에 감명받아 1977년 6월 경에 구원 투수로 변신했다. 그 해 19세이브를 기록하면서 최우수 구원 투수에 등극하면서 일본 프로 야구계에서 구원 투수 부문의 선구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 프로 야구계에는 구원 투수의 컨디션 조절하는 방법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아서 허리 통증으로 고생하고 있던 에나쓰는 기자들에게 미국 메이저 리그 구원 투수들의 컨디션 조절법을 물어보기도 하였다. 결국 자기에게 맞는 조절법을 창안하여 경기가 시작해도 5회 이전까지는 덕아웃에 들어가지도 않고 라커룸에서 마사지를 받거나 수면을 취했다. 이런 조절법은 팀내에서나 야구계 안팎에서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현재 이런 방식의 구원 투수의 컨디션 조절법은 모든 시합에서 대기해야만 하는 구원 투수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난카이 호크스 시절 이후로 폭주 기관차와 같았던 불같은 강속구는 사라졌지만, 타자와의 수싸움에 능하고 변화구를 적절하게 사용하는 기교파 투수로서 완벽하게 탈바꿈하게 된다. 이러한 투구법을 보고 가네다 마사이치는 “현역 시절의 나보다 낫다”라고 말했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절 [편집]
1977년 시즌 종료 후 노무라 감독이 난카이 호크스에서 해임되자 자신도 팀을 떠나겠다고 구단에 말했다. 결국 현금 트레이드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이적하게 된다. 히로시마 구원 투수진의 에이스로 활약하면서 1979년과 1980년에는 히로시마의 2년 연속 일본 시리즈 제패에 크게 기여를 했다.
1979년에는 본인에게 처음이자 구원 투수로는 처음으로 최우수 선수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 해 긴테쓰 버펄로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 최종 7차전 1점차 9회말에서 무사 만루 상황을 초래했지만 원아웃을 잡고 난 뒤 상대의 스퀴즈 작전을 간파해서 무실점으로 경기를 마무리 지었다. 이 날 경기의 이 장면을 작가인 야마기와 준지가 《에나쓰의 21구》라는 논픽션 단편을 쓰기도 하였다. 에나쓰 본인도 “히로시마에서 뛰던 시절은 즐거웠다. 특히 1979년은….”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이 당시 오노 유타카의 투구 폼을 교정해 주는 등 오노가 발전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다.
1980년 7월 22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펼쳐진 올스타전 3차전에서 센트럴 리그 팀은 2대 0으로 이기고 있었지만 9회말 1점을 내주고 무사 만루의 위기에 처했다. 안타 하나면 끝내기 역전패 상황에서 이전 투수였던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의 노무라 오사무를 구원해서 에나쓰가 등판했다. 후속 타자인 레온 리, 아리토 미치요(롯데 소속) 그리고 야마우치 신이치(난카이)를 모두 삼진으로 잡았고 선제타를 때린 마유미 아키노부, 홈런을 친 가케후 마사유키를 연달아 막아내면서 경기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이 날 경기는 ‘9연속 삼진의 재현’(9連続三振の再現), ‘전년 일본 시리즈의 재현’(前年の日本シリーズの再現) 등으로 불리면서 화제가 되었다.
닛폰햄 파이터스 시절 [편집]
1980년 닛폰햄 파이터스는 후기 시즌에 우승 도전을 뒤로 미루었다. 팀 전력을 강화할 필요성을 느꼈던 오사와 게이지 감독은 히로시마 도요 카프 팀에 구원 에이스였던 에나쓰의 이적을 요구하였다. 결국 시즌 후 닛폰햄 파이터스의 선발 에이스 투수였던 다카하시 나오키와 트레이드 되어 닛폰햄으로 이적하게 된다.
이적 첫 해인 1981년에는 구원 투수진의 에이스로 활약하면서 소속팀의 19년 만의 퍼시픽 리그 우승에 기여하였고, 퍼시픽 리그 MVP(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이미 센트럴 리그에서 MVP로 선정된 적이 있는 에나쓰는 일본 프로 야구 최초로 양대 리그 모두에서 MVP를 수상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히로시마 소속이었던 1979년부터 1983년까지 5년 연속으로 최다 세이브를 기록하였고, 일본 프로 야구 12개 구단 전부를 상대로 세이브를 기록한 최초의 선수가 되기도 했다. 1982년에는 통산 200승을 달성하면서 왕년에 프로 야구에서 활약했던 선수들의 사적 모임이자 간판급 선수들의 모임인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에 가입하게 되었다.
세이부 라이온스 시절 [편집]
1983년 시즌이 끝나고 오사와 감독이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되자 에나쓰의 팀 내 입지도 줄어들게 된다. 오사와 감독은 자신의 저서에서 “나는 감독을 그만두려고 생각한다. 너도 다른 팀에서 다시 하는 것이 좋다”라고 말하면서 에나쓰의 이적이 정해졌다고 밝혔다. 그 배경에는 차기 감독으로 취임한 우에무라 요시노부의 구상으로 인해 빗나갔던 적도 있었다. 그 시점에서는 아직 이적처가 정해져 있지 않았지만 닛폰햄 구단 상무가 되는 오사와에게 희망하는 구단을 물었는데, “히로시마라든지 한신이라든지 요미우리를 넘어뜨리는 팀이라면 가도 괜찮다”라고 대답했고, “세이부는 싫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에나쓰 본인은 닛폰햄의 연고지가 같은 도쿄의 야쿠르트 스왈로스 근처일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시바타 야스미쓰, 기무라 히로시와의 트레이드로 세이부 라이온스로 이적되었다. 이적 첫 해인 1984년 시즌이 개막됐지만 몸상태는 예년과 같지 못했고 결국 시즌 도중 컨디션 저하를 호소하기도 했다. 엄격한 선수 관리를 하는 것으로 유명한 히로오카 다쓰로 감독은 팀이 우승권에 멀어진 상태에서 팀의 미래를 위해 주로 젊은 선수들을 기용하였고, 에나쓰와 같은 노장 선수들은 좀처럼 출장 기회를 가질 수가 없었다. 역대 최초의 200세이브와 통산 3,000 탈삼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현역 선수 은퇴를 선언하였다. 구단 측이 주최하는 은퇴 경기는 없었지만 스포츠 전문지 넘버 편집부가 주최하고 명구회의 협찬으로 다마시 잇폰스기 공원 야구장에서 ‘혼자만의 은퇴식’을 거행했다.
| “ |
에나쓰 유타카 36세, 정말로 시시한 남자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일본에 돌아왔을 때에는 단 한마디로 ‘수고했습니다’라고 그만큼 말해 주십시오. |
” |
은퇴식에서 에나쓰는 이 같은 말을 했는데 메이저 리그에 도전해 볼 것임을 천명했다.
메이저 리그 도전 [편집]
일본 프로 야구에서 은퇴한 다음 해인 1985년, 은퇴식에서 말한 것처럼 미국으로 건너가 밀워키 브루어스 스프링 캠프에 합류했다. “미국에서의 야구 선수 생활을 끝내고 일본으로 옮기는 메이저 리거가 많은 가운데 일본에서의 야구 생활을 끝내고 메이저 리그에 도전하는 36세의 신인”이라는 내용의 현지 언론에서 보도되는 등 주목을 받았다. 스프링 캠프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 주면서 개막전 선수 명단 후보에 올랐지만 최종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데에는 결국 실패하였다. 당시 밀워키 브루어스의 발표한 바에 의하면 36세라고 하는 고령이 팀 편성에 이득이 없다고 여겨지고 있어 에나쓰 본인도 “거기까지의 의지는 없다”라고 말하는 등 현역 선수에서 완전히 은퇴하게 되었다.
현역 은퇴 후 [편집]
선수 생활을 은퇴한 후 닛폰 TV와 아사히 방송의 야구 해설위원, 도쿄 주니치 스포츠 평론가로 활동했고, 그 외에 탤런트·배우로서도 영화, TV 드라마,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93년 3월 3일 각성제 단속법 위반 혐의로 현행범으로 체포돼 그 후의 경찰 수사에서는 각성제의 소지량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어 초범이면서 징역 2년 4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아 시즈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명구회에서도 자진 탈퇴하였고(이것은 가네다 마사이치 회장에 의한 제명 조치였다), 1995년 4월 27일에는 가석방 처분을 받아 출소하여 다시 야구 해설자와 평론가로 복귀했다.
형무소의 규칙에 따른 수감 생활로 인해 건강 상태는 극적으로 개선되었고 본인도 출소 후 법정에서의 변론에 나선 노무라 가쓰야나 에모토 다케노리, 기누가사 사치오 등 친분 있는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말과 함께 “만약 형무소에 가지 않고 있었으면 나는 이미 죽어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작가 아베 조지는 “그 오만 불손했던 남자가, 돌아오면 무척 배려를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형무소에 들어가 착실하게 돌아온 것은 야마모토 조지와 에나쓰 뿐”이라고 말하는 등 수감 전후의 에나쓰의 변화를 이렇게 밝혔다.
현재는 TV 오사카의 야구 해설위원과 데일리 스포츠의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평가 [편집]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활약한 최고의 좌완투수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에도 “20세기 최고 투수 중의 한 명”으로 손꼽을 정도로 알려져 있고, 히로시마와 닛폰햄 시절의 활약으로 ‘우승 청부사’ 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야후! 재팬이 기획한 ‘20세기 일본 프로 야구 베스트 나인’의 투수 부문에서도 사와무라 에이지, 가네다 마사이치, 이나오 가즈히사 등 왕년의 간판 투수들을 제치고 1위로 선정되었다.
한신 타이거스의 열혈 팬인 작가 오가와 요코의 소설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서는 에나쓰의 한신 타이거스 시절 등번호인 ‘28’(완전수)이 가지는 의미가 소재로 쓰이는 등 저자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에나쓰도 이 소설이 영화화 되었을 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고 한다.
그 밖에 [편집]
- 좌투좌타지만 원래는 오른손잡이였다. 야구를 하는 데 있어서 왼손잡이가 유리하다고 해서 큰 형의 명령으로 바꾸게 되었다. 글씨를 쓰는 것과 젓가락을 쥐는 것 역시 왼손으로 할 수 있도록 교정했다.
- 고교 시절 연습 경기에서 상대한 이후 스즈키 게이시와는 친분이 깊다. 그 한편에 스즈키와 갈등을 겪고 있던 노모 히데오는 에나쓰를 스승으로서 존경하고 있었다. 이전에 긴테쓰 버펄로스에 있어서 당시 스즈키 감독과 에이스 투수였던 노모와의 갈등이 일어났을 무렵 에나쓰는 이에 대해 “트레이닝에 관한 노모의 주장도 이해할 수 있지만 스스로의 경험으로부터 생각하면 스즈키가 말한 것도 모두 틀린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일은 노모와 동조할 수 없다”라고 밝히는 등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술은 마시지 않는 편이라 체질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한신 타이거스 시절에 주치의로부터 “지금의 터무니 없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으면 틀림없이 수 년 이내에 목숨을 잃는다. 술, 담배, 여자, 마작, 어떤 것인지를 멈추어라”라고 말하면서 술을 끊는 것을 선택하여 그대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 현역 시절에는 일기를 쓰고 있었지만 메이저 리그 도전과 함께 일본에서 썼던 현역 시절의 일기장들을 모두 불태웠다고 한다.
- 히로시마 시절에는 큰 활약에 비해서 구단 수뇌부로부터의 낮은 평가를 받았고 특히 고바 다케시 감독으로부터 특별한 위로의 말이 없었다는 것이 강한 불신감을 갖는 등 히로시마를 탈퇴(실제는 닛폰햄으로의 트레이드)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 세이부에서 탈퇴한 것의 직접적인 원인은 히로오카 감독과의 갈등이었다. 갈등을 일으킨 결정적인 요인의 하나로 여겨진 것이 전지 훈련에서의 아침 식사 자리에서 영양 섭취에 중점을 두는 히로오카 감독으로부터 현미가 들어간 음식을 강하게 권유받았을 때 노골적인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러한 사정으로부터 에나쓰는 히로오카에 대해서 “인간적으로 허락할 수 없는 곳이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 한편으로는 닛폰햄 시절에 세이부에서 호평을 받은 집요한 번트 공격 등으로 히로오카 감독의 야구관을 높게 평가하고 있어 세이부 선수로서도 “야구라고 하는 면에서는 가르칠 수 있는 것이 많았고 훌륭한 지도자였다”라고 말해 감독으로서의 히로오카를 이렇게 평가했다.
상세 정보 [편집]
출신 학교 [편집]
- 오사카가쿠인 대학 고등학교
선수 경력 [편집]
- 한신 타이거스(1967년 ~ 1975년)
- 난카이 호크스(1976년 ~ 1977년)
- 히로시마 도요 카프(1978년 ~ 1980년)
- 닛폰햄 파이터스(1981년 ~ 1983년)
- 세이부 라이온스(1984년)
수상·타이틀 경력 [편집]
타이틀 [편집]
- 다승왕 : 2회(1968년, 1973년)
- 최고 평균자책점 : 1회(1969년)
- 최다 탈삼진(당시는 타이틀이 아님) : 6회(1967년 ~ 1972년) ※센트럴 리그에서는 1991년부터 타이틀로 제정됨.
- 최우수 구원 투수 : 5회(1977년, 1979년 ~ 1982년)[2]
수상 [편집]
- 최우수 투수 : 1회(1968년)
- MVP : 2회(1979년, 1981년) ※양대 리그에서의 수상은 사상 최초.
- 사와무라 에이지상 : 1회(1968년)
- 베스트 나인 : 1회(1968년)
- 올스타전 MVP : 3회(1970년 제2차전, 1971년 제1차전, 1980년 제3차전)
- 월간 MVP : 1회(1979년 8월)
- 파이어맨상 : 2회(1981년, 1982년)
주요 기록 [편집]
- 노히트 노런(1973년 8월 30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전, 한신 고시엔 구장)[3]
- 올스타전 출장 : 16회(1967년 ~ 1976년, 1978년 ~ 1983년)
- 시즌 401탈삼진(1968년) ※세계 기록.
- 1경기 16탈삼진(1968년 8월 8일) ※센트럴 리그 기록.
- 23이닝 연속 탈삼진(1968년 8월 8일 ~ 8월 21일)
- 41이닝 연속 무실점(1969년 4월 12일 ~ 5월 15일)
- 1경기에서의 34명 타자 연속 범퇴(1970년 9월 26일)
- 12개 구단 모두로부터의 세이브를 기록.
등번호 [편집]
- 28(1967년 ~ 1975년)
- 17(1976년 ~ 1977년)
- 26(1978년 ~ 1983년)
- 18(1984년)
연도별 투수 성적 [편집]
| 연도 | 소속 | 등 판 |
선 발 |
완 투 |
완 봉 |
무 볼 넷 |
승 리 |
패 전 |
세 이 브 |
홀 드 |
승 률 |
상대 타자 |
투구 이닝 |
피 안 타 |
피 홈 런 |
볼 넷 |
고의 사구 |
몸에 맞는 볼 |
탈 삼 진 |
폭 투 |
보 크 |
실 점 |
자 책 점 |
평균 자책점 |
WHIP |
|---|---|---|---|---|---|---|---|---|---|---|---|---|---|---|---|---|---|---|---|---|---|---|---|---|---|
| 1967년 | 한신 | 42 | 29 | 8 | 2 | 0 | 12 | 13 | -- | -- | .480 | 923 | 230.1 | 167 | 27 | 88 | 1 | 3 | 225 | 3 | 1 | 81 | 70 | 2.74 | 1.11 |
| 1968년 | 49 | 37 | 26 | 8 | 3 | 25 | 12 | -- | -- | .676 | 1259 | 329.0 | 200 | 29 | 97 | 2 | 4 | 401 | 2 | 0 | 83 | 78 | 2.13 | 0.90 | |
| 1969년 | 44 | 23 | 17 | 7 | 3 | 15 | 10 | -- | -- | .600 | 1000 | 258.1 | 172 | 17 | 78 | 1 | 3 | 262 | 3 | 0 | 56 | 52 | 1.81 | 0.97 | |
| 1970년 | 52 | 37 | 25 | 8 | 3 | 21 | 17 | -- | -- | .553 | 1295 | 337.2 | 232 | 29 | 73 | 5 | 3 | 340 | 5 | 1 | 87 | 80 | 2.13 | 0.90 | |
| 1971년 | 45 | 30 | 16 | 6 | 4 | 15 | 14 | -- | -- | .517 | 1006 | 263.2 | 182 | 25 | 66 | 3 | 2 | 267 | 5 | 2 | 77 | 70 | 2.39 | 0.94 | |
| 1972년 | 49 | 31 | 16 | 3 | 3 | 23 | 8 | -- | -- | .742 | 1059 | 269.2 | 195 | 30 | 60 | 3 | 4 | 233 | 0 | 1 | 86 | 76 | 2.53 | 0.95 | |
| 1973년 | 53 | 39 | 18 | 7 | 2 | 24 | 13 | -- | -- | .649 | 1228 | 307.0 | 258 | 23 | 82 | 6 | 4 | 215 | 4 | 0 | 95 | 88 | 2.58 | 1.11 | |
| 1974년 | 41 | 23 | 12 | 2 | 1 | 12 | 14 | 8 | -- | .462 | 772 | 197.2 | 153 | 24 | 50 | 3 | 2 | 149 | 3 | 0 | 65 | 60 | 2.73 | 1.03 | |
| 1975년 | 49 | 27 | 9 | 1 | 1 | 12 | 12 | 6 | -- | .500 | 852 | 208.1 | 169 | 24 | 72 | 7 | 2 | 132 | 2 | 0 | 92 | 71 | 3.07 | 1.16 | |
| 1976년 | 난카이 | 36 | 20 | 6 | 1 | 1 | 6 | 12 | 9 | -- | .333 | 612 | 148.1 | 115 | 12 | 61 | 0 | 4 | 109 | 4 | 0 | 58 | 49 | 2.98 | 1.19 |
| 1977년 | 41 | 3 | 1 | 0 | 0 | 4 | 2 | 19 | -- | .667 | 346 | 84.0 | 72 | 5 | 21 | 0 | 5 | 60 | 2 | 0 | 28 | 26 | 2.79 | 1.11 | |
| 1978년 | 히로시마 | 49 | 0 | 0 | 0 | 0 | 5 | 4 | 12 | -- | .556 | 395 | 95.1 | 77 | 7 | 38 | 3 | 2 | 99 | 1 | 1 | 32 | 32 | 3.03 | 1.21 |
| 1979년 | 55 | 0 | 0 | 0 | 0 | 9 | 5 | 22 | -- | .643 | 420 | 104.2 | 77 | 10 | 36 | 2 | 1 | 117 | 3 | 0 | 31 | 31 | 2.66 | 1.08 | |
| 1980년 | 53 | 0 | 0 | 0 | 0 | 9 | 6 | 21 | -- | .600 | 334 | 86.0 | 61 | 12 | 20 | 4 | 1 | 86 | 1 | 0 | 27 | 25 | 2.62 | 0.94 | |
| 1981년 | 닛폰햄 | 45 | 0 | 0 | 0 | 0 | 3 | 6 | 25 | -- | .333 | 339 | 83.0 | 69 | 10 | 24 | 0 | 1 | 75 | 1 | 0 | 30 | 26 | 2.82 | 1.12 |
| 1982년 | 55 | 0 | 0 | 0 | 0 | 8 | 4 | 29 | -- | .667 | 354 | 91.0 | 56 | 8 | 31 | 1 | 2 | 107 | 0 | 0 | 22 | 20 | 1.98 | 0.96 | |
| 1983년 | 51 | 0 | 0 | 0 | 0 | 2 | 4 | 34 | -- | .333 | 318 | 77.1 | 63 | 6 | 27 | 1 | 3 | 82 | 2 | 0 | 24 | 20 | 2.33 | 1.16 | |
| 1984년 | 세이부 | 20 | 0 | 0 | 0 | 0 | 1 | 2 | 8 | -- | .333 | 106 | 24.2 | 22 | 1 | 12 | 1 | 0 | 28 | 2 | 0 | 11 | 10 | 3.65 | 1.38 |
| 통산 : 18년 | 829 | 299 | 154 | 45 | 21 | 206 | 158 | 193 | -- | .566 | 12618 | 3196.0 | 2340 | 299 | 936 | 43 | 46 | 2987 | 43 | 6 | 985 | 884 | 2.49 | 1.03 | |
- 굵은 글씨는 리그 성적, 붉은색 글씨는 일본 프로 야구 역대 최고 성적.
참조 [편집]
- ↑ 레전드 스토리- '찬란히 빛난 5년' 샌디 코팩스 《네이버 - 김형준칼럼》, 2006년 7월 24일 작성
- ↑ 최다 타이 기록이며, 그 밖에 아카호리 모토유키와 사사키 가즈히로가 차지했음.
- ↑ 연장전에서의 달성은 가장 유일함.
바깥 고리 [편집]
- 에나쓰 유타카 - 트위터
- (영어) 일본 프로 야구 경력 통계 - Japanesebaseba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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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 역대 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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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투수 | |
| 야수 |
야마우치 가즈히로 | 에노모토 기하치 | 노무라 가쓰야 | 나가시마 시게오 | 히로세 요시노리 | 장훈(하리모토 이사오) | 오 사다하루 | 에토 신이치 | 도이 마사히로 | 다카기 모리미치 | 마쓰바라 마코토 | 시바타 이사오 | 오스기 가쓰오 | 후지타 다이라 | 기누가사 사치오 | 후쿠모토 유타카 | 야마자키 히로유키 | 야마모토 고지 | 아리토 미치요 | 와카마쓰 쓰토무 | 야자와 겐이치 | 가토 히데지 | 가도타 히로미쓰 | 오시마 야스노리 | 아라이 히로마사 | 아키야마 고지 | 고마다 노리히로 | 다쓰나미 가즈요시 | 이치로(스즈키 이치로) | 기요하라 가즈히로 | 후루타 아쓰야 | 노무라 겐지로 | 이시이 다쿠로 | 마쓰이 히데키 | 다나카 유키오 | 마에다 도모노리 | 가네모토 도모아키 | 마쓰이 가즈오 |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 이나바 아쓰노리 | 미야모토 신야 | 고쿠보 히로키 | 알렉스 라미레스 | 나카무라 노리히로 | 다니시게 모토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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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와무라 에이지상 수상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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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년대 | |
| 1950년대 | |
| 1960년대 | |
| 1970년대 | |
| 1980년대 | |
| 1990년대 | |
| 2000년대 | |
| 2010년대 | |
|
※상기 이외의 연도는 수상자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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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트럴 리그 MV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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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년대 | |
| 1960년대 | |
| 1970년대 | |
| 1980년대 | |
| 1990년대 | |
| 2000년대 | |
| 2010년대 | |
|
퍼시픽 리그 MVP |
|
|---|---|
| 1950년대 | |
| 1960년대 | |
| 1970년대 | |
| 1980년대 | |
| 1990년대 | |
| 2000년대 | |
| 2010년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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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트럴 리그 베스트 나인 (투수 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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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년대 | |
| 1960년대 | |
| 1970년대 | |
| 1980년대 | |
| 1990년대 | |
| 2000년대 | |
| 2010년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