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도 히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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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도 히로시
権藤 博

Hiroshi Gondo
Gondoh hiroshi.jpg

곤도 히로시(2012년 8월 28일)

기본 정보
국적 일본 일본
생년월일 1938년 12월 2일(1938-12-02) (75세)
출신지 사가 현 도스 시
신장 177 cm
체중 73 kg
선수 정보
투구·타석 우투우타
수비 위치 투수, 3루수, 유격수
프로 입단 연도 1961년
첫 출장 1961년 4월 9일
마지막 경기 1968년
경력

선수 경력

감독·코치 경력


곤도 히로시
일본어식 한자 표기: 権藤 博
가나 표기: ごんどう ひろし
외래어 표기법 표기: 곤도 히로시
통용 표기: 곤도우 히로시
로마자: Hiroshi Gondo

곤도 히로시(일본어: 権藤 博 (ごんどう ひろし), 1938년 12월 2일 ~ )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지도자, 야구 해설가·평론가이다.

현역 은퇴 후에는 긴테쓰 버펄로스,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투수 코치를 역임한 것 외에도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의 코치와 감독을 맡았다.

인물[편집]

프로 입단 전[편집]

사가 현립 도스 고등학교 시절엔 원래 내야수였지만 투수의 부재로 인해 투수로 전향했다. 고시엔 대회에 가지 못했지만 그 활약을 인정받아 프로 구단인 니시테쓰 라이온스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이 제안을 거절하고 사회인 야구팀인 브리지스톤 타이어에 입사해 같은 회사의 구루메 공장 야구부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신체 능력은 뛰어났지만 다른 분야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오다 미키오가 “어떻게 하든 곤도를 도쿄 올림픽에 나가게 할 수 없을까, 올림픽에 나가면 금메달은 확실하다”라고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1] 도쿄 올림픽을 위해서 육상 경기 400m 허들 선수로 전향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는 등 몇 차례나 프로 구단으로부터 입단 제의가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계약금은 어느 구단보다 높게 준다’고 말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입단 제의를 거절하고 1961년 주니치 드래곤스에 입단했다.[2]

프로 야구 선수 시절[편집]

스기시타 시게루가 착용했던 등번호 20번을 이어받아 같은 해 시범 경기에서 28.1이닝을 던져 1자책점(평균 자책점 0.31)의 성적을 남겼고 프로 1년차부터 팀내 에이스로서 활약했다. 프로 1년차인 1961년에는 전체 팀 경기수 130경기의 절반 이상에 해당하는 69경기에 등판하여 그중 선발 등판은 44경기였다. 35승 19패, 투구 이닝 429.1회, 탈삼진 310개, 평균 자책점 1.70을 기록하는 등 사와무라 에이지상센트럴 리그 신인왕 동시에 수상했고[3] 그 외에도 최우수 평균 자책점다승왕, 최다 탈삼진 등의 투수 부문 타이틀을 연거푸 석권했다. 35승은 신인으로서의 최다승을 기록한 것은 일본 프로 야구 기록이다. 연투에 연투를 거듭하면서 곤도를 지칭하는 ‘곤도, 곤도, 비, 곤도’(権藤、権藤、雨、権藤, 비가 오지 않는 날은 매일 곤도가 던졌다)라는 유행어도 생겼다. 이듬해 1962년에는 61경기에 등판(선발 등판 39경기)하여 30승 17패, 투구 이닝 362.1이닝, 탈삼진 212, 평균 자책점 2.33의 성적을 남기는 등 2년 연속 다승왕 타이틀을 차지했다.[4]

가혹한 등판에 더해 당시의 잘못된 트레이닝과 재활 치료 방법(투구 직후에 어깨를 따뜻하게 데웠다)으로 인해 어깨를 다쳐서 프로 3년차인 1963년부터는 구위가 떨어질 정도의 투구로 시즌 10승 밖에 올리지 못했고 1964년엔 6승에 그치는 등 컨디션 난조로 부진을 겪었다. 1965년부터 타자로 전향해서 1967년에 센트럴 리그 최다 희생타를 기록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성과가 나지 않으면서 1968년에 투수로 다시 복귀했지만 제구력 난조와 구위가 떨어지는 것을 감출 수 없어 시즌 1승 1패라는 저조한 성적을 기록해 결국 1968년 시즌 종료 후 30세의 젊은 나이로 현역 생활을 은퇴했다. 투수 시절 혹사될 정도의 체험은 본인 뿐만 아니라 야구계에도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현역 시절에 투수 코치를 역임했던 곤도 사다오는 ‘투수 분업제’를 제안하는 등 훗날 일본 프로 야구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 후[편집]

은퇴 후 구단으로부터 1군 매니저로 맡아달라는 제의가 있었지만 고사했다.[5] 도카이 라디오에서 야구 해설자가 되는 한편, 골프와 관계된 직업과 미국 플로리다로 교육 리그에서의 코치를 거쳐 1973년부터 1980년까지 주니치 2군 투수 코치, 1981년부터 1983년까지 주니치 1군 투수 코치를 맡아 1974년과 1982년 팀의 센트럴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1984년부터 1987년까지 도카이 TV후지 TV의 야구 해설자, 주니치 스포츠의 야구 평론가를 거쳐 1988년부터 긴테쓰 버펄로스의 1군 투수 코치를 맡아 1989년에 리그 우승에 기여했지만 오기 아키라 감독과의 타협점을 잡지 못하고 의견 대립으로 인해 1989년에 코치직에서 물러났다.[6]

1990년에는 닛칸 스포츠 야구 평론가를 맡았고 1991년부터 1993년까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군 투수 코치를 맡았다. 1994년부터 1996년까지 도카이 TV와 후지 TV 야구 해설자, 주니치 스포츠 야구 평론가를 맡았다.

1997년에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의 배터리 코치와 수석 코치를 맡아 투수진을 정비해서 팀을 2위로 끌어올리는 데에 기여했다. 1998년에는 요코하마 감독으로 취임하여 부임 1년째인 1998년에 팀을 38년 만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그 후 2000년까지 감독을 맡아 3년 동안 모두 팀은 A클래스(1위 ~ 3위, 상위권을 지칭하는 일본 언론의 표현) 진입에 성공했다.

요코하마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도카이 라디오(2001년부터 2011년까지), 스포츠 호치(2001년부터 2008년까지)의 야구 평론가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 기간에 요미우리[7]를 비롯한 그 외의 구단으로부터 코치를 맡아달라는 제의가 공식, 비공식적으로 있었다고 한다.[8]

현역 시절의 동료이기도 한 다카기 모리미치가 주니치 드래곤스의 감독에게 복귀한 2012년에는 1군 투수 코치로 부임했다. 일본 프로 야구 구단의 현역 감독과 코치로서 최고령이 되는 73세에 12년 만에 현장에 복귀하게 됐다. 복귀 이후에는 신인과 젊은 투수들의 적극적인 기용과 그때까지 선발 요원이었던 야마이 다이스케의 구원(셋업맨 → 마무리)으로의 전향 등을 통해서 팀의 센트럴 리그 2위와 6년 연속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에 기여했다. 시즌 종반에 에이스였던 요시미 가즈키가 부상으로 출전이 불가능하게 됐고 나카타 겐이치, 엔옐버트 소토도 등판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에 몰리기도 했다. 남은 선발 투수는 시즌 10승을 기록했던 야마우치 소마를 제외하면 4승의 오노 유다이, 3승의 가와카미 겐신, 야마모토 마사, 1승의 이토 준키라는 상황으로 요미우리에게 3연승 기록해서 추월했다. 그러나 구단 측은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 상대인 요미우리에게 패한 직후(2012년 10월 24일)에 곤도의 퇴단을 공식 발표하면서 1년 만에 코치직에서 물러났다.[9]

2013년부터는 도카이 TV와 도카이 라디오의 해설자로 발탁됐고 더욱이 닛칸 스포츠의 야구 평론가도 맡고 있다.

지도자로서의 평판[편집]

선수의 자주성을 존중하면서 승리로 이끄는 지도자로서의 수완은 야구계 내부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코치로서[편집]

현역 은퇴 후에 주니치 드래곤스, 긴테쓰 버펄로스,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등에서 코치와 감독을 역임했다. 스즈키 다카마사, 고마쓰 다쓰오, 우시지마 가즈히코, 요시이 마사토, 아와노 히데유키, 무라타 가쓰요시, 요시다 도요히코, 시모야나기 쓰요시 등을 길렀다. ‘투구폼은 그 투수의 주장’이라는 게 지론이어서 폼에 대해서는 거의 간섭하지도 않았다. 코치로서 폼 교정을 한 것은 미야코 유지로 뿐이었다고 한다.[10]

긴테쓰 코치 시절에 지도한 가토 데쓰로는 곤도의 지도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시 투수진은 모두 곤도를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야구 인생에서 은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곤도 밖에 없습니다. 현역 시절에 잦은 등판으로 어깨를 다친 경험이 있으므로 투수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생각해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가토 데쓰로[11]

코치로서는 직언을 잘 해서 가령 상사(감독)라고 해도 잘못됐다고 생각되는 의견에는 철저히 반론을 제기하는 스타일이며 긴테쓰 코치 시절에는 오기 아키라와, 다이에 코치 시절에는 다부치 고이치, 주니치 코치 시절에는 다카기 모리미치와의 불화설도 나돌았다. 특히 주니치 코치 시절는 다카기 감독과의 대립이 일부 언론이나 타블로이드 신문에서도 가끔 거론될 정도였다.

긴테쓰 코치 시절에 곤도는 투수의 육성, 심리적인 컨디션 측면에서 오기의 투수 기용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다.[12] 한편의 오기는 자신의 저서에서 코치는 감독이 아니고 투수의 이익 대표도 아니라는 점에서 곤도의 자세를 “코치라는 직분, 위치를 분별하지 못했었다”라고 비판했다.[13]

주니치 코치 시절(2012년)에는 다카기 감독(당시)과 투수 기용 등에서의 의견이 서로 대립된 적도 있었고 또한 당시의 다카기는 언론 앞에서나 팀 내부에서 팀내의 선수들을 혹독하게 비판 또는 질타하는 일이 많아질 정도였는데 그것에 대해 “감싸줄려고 하는 자기 팀에게 화를 낼 만큼 힘든 일은 없다. 몇 십년이나 코치를 해도 화를 내서 선수가 좋아진 적은 없다”, “맞고 안 맞는 것은 코치의 책임이며 이기고 진 것은 감독의 책임”이라고 비유한 적도 있었다.[14] 그런 한편으로 주니치 퇴단을 앞두고 “다카기 감독에 대한 응어리는 없다”라고 말했다.[15]

에나쓰 유타카는 곤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높게 평가했다.

명감독은 많아도 명코치는 적다. 그 중에서 타격 쪽의 명코치는 나카니시 후토시이고 투구 쪽의 명코치는 곤도이다.

에나쓰 유타카[16]

또한 에나쓰는 2012년 클라이맥스 시리즈 요미우리와의 경기에서 계투책을 높게 칭찬하면서 곤도가 주니치를 퇴단한 것에 대해서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17] 도요다 야스미쓰도 역시 곤도와 다카기의 대립을 “서로의 직무를 다하려 한 마음에서 비롯된 싸움이었다. 이렇게 에너지 가득한 팀과 맞붙는 것은 오히려 싫은 일이다”이라고 평가하면서 곤도의 퇴단을 안타까워했다.[18] 주니치에서 퇴단한 것을 1989년에 긴테쓰 퇴단 당시와 겹쳐서 보는 견해, 그 중에서도 2012년 클라이맥스 시리즈와 1989년 일본 시리즈의 모두 투수 기용을 둘러싼 감독과의 대립이 퇴단의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고 보여지고 있다.[19][20]

볼카운트 2스트라이크 노 볼부터 명백한 볼을 던져 대결을 피하는 것에 대해 ‘투수가 유리한 상황인데 왜 고의적으로 피하는가’라면서 3구 승부를 하지 않는 배터리가 많은 사실에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감독으로서[편집]

요코하마 감독 시절에는 스스로를 ‘감독’이 아닌 ‘곤도 상’이라고 부르라고 지시했다. 이것은 감독직에서 물러난 후를 내다봄과 동시에 직함을 버리는 것으로 부하들과의 격의를 없애려는 목적에서였다. 이 룰은 선수와 코칭 스태프 일동 뿐만 아니라 취재진에게도 적용됐는데 이를 어겼을 경우엔 벌금 1,000엔을 내게 되어 있었다. 실제로 곤도에게 ‘감독님!’이라고 불렀던 다니시게 모토노부는 곤도가 안 들리는 척 하자 이를 알아채지 못하고 재차 ‘감독님!’이라고 불렀다가 곤도는 “어 그래, 자네는 벌금 2,000엔!”하고 말하는 통에 아연실색케 했다고 말했다.

곤도가 감독직을 맡고 있는 동안 큰 활약을 펼쳤던 로버트 로즈는 곤도를 ‘최고의 보스’라고 존경했다. 로즈는 거의 해마다 자기를 대체할 외국인 선수를 영입하거나 연봉 협상을 꺼리는 요코하마 프런트 측에 불만을 품고 은퇴까지도 고려했다. 곤도는 1999년 여름에 구단측 통역이 아니라 영어를 할 줄 아는 자신의 딸만 대동한 상태에서 로즈와 1대 1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결과 로즈는 “곤도가 감독으로 있는 동안에는 은퇴를 생각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곤도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대활약의 발판을 만들었다.

곤도의 좌우명은 ‘Killed or be Killed(죽이거나 내가 죽거나)’인데 요코하마 감독 시절에 개막전 벤치에 들어간 투수 전원에게 이 문장을 새겨넣은 싸인볼을 건네줬다고 한다.

덕아웃에서 지휘할 때 벤치에 앉아있지 못하고 일어선 채로 턱이나 뺨에 손바닥을 대는 모습이 중계 카메라에 자주 잡히기도 했다. 이 스타일은 곤도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고 당시 스포츠 신문이나 주간지의 풍자 만화에 소재로 자주 등장하곤 했다. 코치 시절에도 똑같은 포즈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용병술의 특징[편집]

미국 플로리다 교육 리그에서 코치 수업을 받았던 경험에서 선수를 어른으로 취급하는 ‘Don't over teach’(너무 가르치지 않는다·지나친 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용병술과 지도 지침이 기본에 있었다. 선수의 감성과 자주성을 존중한, 얼핏보면 방임주의적인 스타일은 당시 언론에서도 화제가 됐다. 곤도 자신은 이 스타일을 방임주의가 아닌 ‘분방주의’라고 말했다.[21] 야간 훈련을 강제로 하지 않고 각 선수들의 자주성에 맡겼다. 또한 선수 전원을 모이게 하는 미팅은 기본적으로 하지 않았으며 실시하더라도 ‘여러분은 프로이니까 프로답게 해 주십시오’라는 말 한마디로 끝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 대신에 그라운드 등에서 선수들과 커뮤니케이션을 취했다고 한다. 경기에서도 ‘(자신은)8할은 피칭 코치’라고 공언하여 공격 면에서의 작전 진행은 수석 코치인 야마시타 다이스케나 타격 코치 다카기 요시카즈에게 거의 일임했고 타자와 주자에게 보내는 사인도 최소한으로 누르고 선수 개개인의 판단에 맡겼다.[22] 그러나 사인을 너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최하위로 침체를 겪었던 2000년 전반에는 선수가 주도해서 소집한 미팅에서 사인을 좀 더 내달라는 요구를 받았다고 한다.

‘심판은 절대적이다’라는 원칙을 준수하고 판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오카다 이사오에 의하면, 어느 날 경기에서 스트라이크·볼의 판정으로 옥신각신하다가 선수에게 떠밀려 항의하러 갔지만 심판 앞에 서서는 “선수들 앞에서 아무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사적인 얘기를 좀 해도 될까? 조금 시간을 달라”고 하면서 사적인 얘기를 시작하다가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고는 벤치로 돌아왔다고 한다.[23]

자신의 체험을 통해 ‘투수의 어깨는 소모품’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요코하마의 감독으로 부임한 1998년에는 마무리 투수 사사키 가즈히로를 부동의 중심으로 하고 구원 투수에도 ‘중간 계투 로테이션’을 확립해 연투로 인한 혹사를 힘껏 피하게 하였다[24]

보내기 번트라는 것은 일부러 적에게 아웃을 가져다 바치는 세상이라도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작전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몇몇 제한된 경우에서만 보내기 번트를 사용하지 않았다. 소위 ‘머니볼 이론’으로 말하는 것과 유사하여 ‘투수의 어깨는 소모품’, ‘중간 계투 로테이션’ 이라는 지론 등에서도 메이저 리그에서 볼 수 있는 사상과 통하는 것이었다. 다만 팀이 우승 경쟁을 하고 있는 동안엔 100경기를 넘긴 근방부터는 감독은 ‘승리를 위해서라면 무엇을 해도 괜찮다’라는 생각도 갖고 있었다. 요코하마가 우승했던 1998년에는 9월 후반 경부터 보내기 번트, 세이브가 연결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사사키를 기용하는 경우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방임주의와 심판 절대주의적 스타일은 원숙기에 있는 팀에서는 힘을 제대로 발휘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팀내에서의 알력이 생기고, 특히 야수진과의 균열이 심해져 갔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야수진의 일은 모두 코치에게 맡긴 적도 있어서인지 야수진과는 의사소통이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25] 그 상징적인 사건이 2000년 6월 18일에 열린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경기(12차전)에서 곤도는 히로시마의 우완 투수 나단 민치에 대응하여 좌타자인 고마다 노리히로를 대신해 우타자인 나카네 히토시를 대타로 내보냈다. 나카네를 대타로 내보낸 것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고마다가 경기 중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집으로 귀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25]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고마다는 곤도의 지휘관으로서의 지침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던 것도 이 사건의 원인으로 꼽았다. 더욱이 고마다는 2000년 시즌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한편 곤도 자신도 당시 오호리 다카시 구단 사장과는 형제처럼 지내는 밀월 사이였지만 다른 프런트와의 갈등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그 해를 마지막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노무라 가쓰야와의 대립[편집]

감독으로서의 곤도는 ‘무엇보다 야구는 선수가 하는 것, 감독은 선수 개개인의 생각이나 재능을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뿐’이라는 철학을 관철했다. 팀의 센트럴 리그 우승을 이루고 헹가래 받은 직후에 가진 히어로 인터뷰에서 한두마디만으로 끝내고 그 후의 개별 인터뷰에서도 ‘주역은 선수니까’라고 출연을 고사하는 등 팬이나 취재진 앞에서 선수들보다 눈에 띠는 언동도 삼가고 있었다. 이에 대해 같은 시기에 야쿠르트 스왈로스한신 타이거스의 감독이자 ‘야구는 감독의 지휘여하로 승패가 갈린다’라는 지론을 전개했던 노무라 가쓰야는 곤도의 지휘 스타일이나 머신건 타선을 ‘제멋대로이고 무례할 정도의 예의가 없는 야구’라고 평가절하해 곤도나 요코하마 선수의 인격에 관한 부분까지 공공연하게 비판을 가했다. 1998년에 정규 시즌 우승 매직 ‘3’을 남긴 요코하마는 10월 3일부터 10월 6일까지 홈구장인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야쿠르트와의 4연전을 맞이했다. 이 4연전 이전의 요코하마는 앞에서 말한 인연에서 곤도가 ‘ID야구따윈 필요없다’라고 선수들을 독려하고 있었던 적도 있어서 야쿠르트와의 경기에서는 특히 투지를 불태우며 싸워서 크게 이긴 적이 많았다. 연고지인 요코하마의 헹가래에 대한 기대는 최고조에 달했지만 노무라는 “부임 1년째인 곤도에게 간단하게 우승을 시켜서는 안된다”라고 투쟁심을 드러내 당시 호조를 보였던 가와사키 겐지로, 이시이 가즈히사, 이토 도모히토 등을 연달아 누르고 3연승을 기록해 자신의 눈앞에서의 헹가래를 하는 것만은 저지했다.

한편 곤도 자신도 “그라운드위에서 박보장기 따위는 보고 싶지도 않습니다”라며 은근히 노무라를 비하했다. 그리고 1998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상대팀인 세이부 라이온스의 감독이 이전부터 친분이 있는 히가시오 오사무였기 때문에 일본 시리즈 직전에 공개적으로 회식을 가졌다. 거기서 비공식이라고는 해도 예고 선발을 약속했다. 그라운드 밖에서의 탐색이나 설전, 밀고당기기를 배제하고 선수들의 힘과 기술의 승부를 만끽하겠다는 의미였다. 일본 시리즈가 끝난 후 스포츠 전문지 《Sports Graphic Number》에서 히가시오와의 대담을 가졌는데 일본 시리즈 종료 이후부터 몇 주 후에 감독끼리 대담을 가진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무엇보다 이런 곤도와 노무라의 대립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는 주로 야구관의 차이에 의한 것이 원인이며, 그 수완에 대해서까지 부정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노무라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감독에 취임했을 때 《슈칸 포스트》의 ‘위협구 좌담회’에서 에모토 다케노리와 히가시오 오사무가 노무라의 감독 취임에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던 것에 대해 곤도는 “라쿠텐의 선수들은 야구를 너무 모르다. 이런 때에 노무라로부터 야구를 제대로 배우는 편이 좋다”고 긍정적으로 말하는 등 노무라의 감독적 수완에 대해서 높이 평가했다. 노무라도 라쿠텐의 감독을 퇴임한 후에 후회가 남는 점으로서 선수들의 자주성을 설파하고 있어서 간접적이지만 곤도의 생각을 이해하게 됐다.

에피소드[편집]

  • 같은 규슈 출신의 간판 투수인 이나오 가즈히사를 존경했고 투구 폼에서 평상시의 걸음걸이까지 이나오를 모방한다는 본보기였다.
  • 럭비에 조예가 깊어 자신과 친분이 있는 모리 시게타카와의 텔레비전에서 대담했을 때에는 해박한 지식을 보였다.
  • 취미가 골프인데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한 때 골프와 관련된 업종에 종사했던 적도 있었다. 프로 골퍼로부터의 권유도 있었지만 거절했다.[26] 장타에서 72세로 헤드 스피드 48m/s를 기록했다.[27]
  • 1998년에 요코하마가 우승할 때 요코하마 핫케이지마 시 파라다이스곤도쿠지라의 대부로서 초대받았을 때 ‘유코’(優子)라고 명명했다.

상세 정보[편집]

출신 학교[편집]

  • 사가 현립 도스 고등학교

선수 경력[편집]

사회인 시대
프로팀 경력

지도자·기타 경력[편집]

수상·타이틀 경력[편집]

타이틀[편집]

수상[편집]

개인 기록[편집]

등번호[편집]

  • 20(1961년 ~ 1968년)
  • 64(1973년 ~ 1977년)
  • 76(1978년 ~ 1983년)
  • 70(1988년 ~ 1989년, 1991년 ~ 1993년)
  • 72(1997년 ~ 2000년, 2012년)

연도별 투수 성적[편집]

연도 소속











상대
타자
투구
이닝





고의
사구
몸에
맞는 볼







평균
자책점
WHIP
1961년 주니치 69 44 32 12 8 35 19 -- -- .648 1645 429.1 321 20 70 8 3 310 3 1 97 81 1.70 0.91
1962년 61 39 23 6 3 30 17 -- -- .638 1421 362.1 307 26 69 2 3 212 5 0 108 94 2.33 1.04
1963년 45 31 9 0 1 10 12 -- -- .455 922 220.2 205 29 79 2 4 88 1 1 105 94 3.83 1.29
1964년 26 16 3 0 1 6 11 -- -- .353 458 105.1 105 12 45 1 3 47 4 0 53 49 4.19 1.42
1968년 9 1 0 0 0 1 1 -- -- .500 95 18.1 32 5 11 0 2 10 0 0 23 22 10.80 2.35
통산 : 5년 210 131 67 18 13 82 60 -- -- .577 4541 1136.0 970 92 274 13 15 667 13 2 386 340 2.69 1.10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연도별 타격 성적[편집]

연도 소속




2

3





도루
실패
희생
번트
희생
플라이

고의
사구
몸에
맞는 볼








O
P
S
1961년 주니치 70 163 144 18 31 7 0 1 41 8 1 0 13 0 6 0 0 24 4 .215 .247 .285 .531
1962년 61 130 117 10 25 5 0 4 42 13 0 0 8 1 4 0 0 19 3 .214 .238 .359 .597
1963년 49 83 76 8 18 5 0 3 32 8 0 0 3 0 4 0 0 12 2 .237 .275 .421 .696
1964년 29 39 38 3 7 2 0 1 12 4 0 0 0 0 1 0 0 5 1 .184 .205 .316 .521
1965년 81 212 196 28 39 11 0 3 59 18 3 3 2 0 14 0 0 24 3 .199 .252 .301 .553
1966년 54 198 179 17 32 7 1 1 44 7 2 5 4 1 12 0 2 28 0 .179 .237 .246 .483
1967년 107 331 288 34 62 8 3 5 91 27 6 6 26 4 11 0 2 50 3 .215 .246 .316 .562
1968년 12 3 3 1 0 0 0 0 0 0 0 0 0 0 0 0 0 1 1 .000 .000 .000 .000
통산 : 8년 463 1159 1041 119 214 45 4 18 321 85 12 14 56 6 52 0 4 163 17 .206 .245 .308 .553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감독으로서의 팀 성적[편집]

연도 소속 순위 경기 승리 패전 무승부 승률 승차 팀 홈런 팀 타율 팀 평균자책점 연령
1998년 요코하마 1위 136 79 56 1 .585 - 100 .277 3.49 60세
1999년 3위 135 71 64 0 .526 10.0 140 .294 4.44 61세
2000년 3위 136 69 66 1 .511 9.0 103 .277 3.92 62세
통산 : 3년 407 219 186 2 .541 A클래스 : 3회
  • 순위에서 굵은 글씨는 일본 시리즈 우승.
  • 1998년부터 2000년까지는 135경기제.

저서[편집]

  • 《가르치지 않는 가르침(教えない教え)》(슈에이샤, 2010년 11월 17일)

주석[편집]

  1. 《스포츠 20세기》, 베이스볼 매거진사, 2000년 7월, p.126
  2. ‘신·가정의 이력서’ - 곤도 히로시, 《슈칸 분슌》, 2010년 10월 14일자
  3. 연도별 성적 - 1961년 센트럴 리그 - 일본 야구 기구 홈페이지
  4. 연도별 성적 - 1962년 센트럴 리그 - 일본 야구 기구 홈페이지
  5. 이것은 자신의 성격에서 팀에 대동한다면 선수에게 코치를 해 버려서 현직에 있는 코치에 대한 월권행위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6. 《슈칸 분슌》, 2010년 10월 14일자, ‘신·가정의 이력서’ - 곤도 히로시
  7. 2002년부터 요미우리의 투수 코치로 들어갈 예정이었지만 곤도와 친분이 있는 나가시마 시게오가 2001년 시즌 종료 후 감독에서 물러난 것에 따라 무산됐다.
  8. ‘유유자적한 야구론(곤도 히로시), 다카기 신임 감독과 나, 70대 콤비가 이끄는 다음 시즌의 주니치는 …’ - 니혼케이자이 신문, 2011년 10월 17일자
  9. 【中日】権藤コーチ退団 - 닛칸 스포츠, 2012년 10월 24일자
  10. 분슌 비주얼 문고 《히어로 열전》
  11. 《프로 야구 역대 감독의 ‘용병술과 인간의 의지력’》, 다카라지마샤, 2012년, p.44 ~ 45
  12. 아카사카 에이이치, ‘Sports Graphic Number’790, 분게이슌주, p.36
  13. 오기 아키라 저 《타오르는 승리》, 각슈켄큐샤, 1990년 3월, ISBN 978-4051045821, p.207
  14. 73歳権藤コーチが70歳高木監督に説教’ - 스포츠 호치
  15. わずか1年で退団することになった 中日 権藤投手コーチを直撃 - 겐다이넷
  16. 《에나쓰 유타카의 아우트로 야구론》721회, 주간 플레이보이, 2012년 10월 22일자
  17. 《에나쓰 유타카의 아우트로 야구론》721회, 주간 플레이보이, 2012년 11월 12일자
  18. 연재 칼럼 《체인지업》, 니혼케이자이 신문, 2012년 10월 25일
  19. 나가타니 오사무(number 816호), ‘「悔いはない」と退団した、73歳、権藤博の“性分”。~中日でも起きた指揮官との衝突~’ - 분게이슌주
  20. 中日・権藤コーチ、1年で退団の必然 - 니혼케이자이 신문
  21. 곤도 히로시 저 《가르치지 않는 가르침》(슈에이샤), 2010년
  22. 그 일례로 1번과 2번 타자를 주로 맡았던 이시이 다쿠로, 하루 도시오에게는 번트나 히트 앤드 런 등과 같은 지시를 내리지 않고 노 사인으로 콤비플레이를 맡겼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23. 《프로 야구 역대 감독의 ‘용병술과 인간의 의지력’》, 다카라지마샤, 2012년, p.79
  24. 다만 다이에 코치 시절에 시모야나기 쓰요시에게만은 ‘저 친구는 아무리 던져도 지치질 않는다’라고 예외로 취급했으며 제구력을 길러주기 위해 매일 같이 연습과 경기에 등판시켰다.
  25. あと30本 駒田徳広 職場放棄「2軍でも何でもいいや!」 - Sponichi Annex, 2000년 6월 18일
  26. ‘신·가정의 이력서’ - 곤도 히로시, 《슈칸 분슌》, 2010년 10월 14일자
  27. 관련 내용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