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시마 시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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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시마 시게오
長嶋 茂雄

Shigeo Nagashima
기본 정보
국적 일본 일본
생년월일 1936년 2월 20일(1936-02-20) (78세)
출신지 지바 현 인바 군 우스이 정
(현 : 사쿠라 시)
신장 178 cm
체중 76 kg
선수 정보
투구·타석 우투우타
수비 위치 3루수
프로 입단 연도 1958년
첫 출장 1958년 4월 5일
마지막 경기 1974년 10월 14일
경력

선수 경력

감독·코치 경력

  • 요미우리 자이언츠(1972 ~ 1980, 1993 ~ 2001)
일본 야구 전당
Empty Star.svg Empty Star.svg Empty Star.svg 전당 수상자 Empty Star.svg Empty Star.svg Empty Star.svg
선출년 1988년
선출방법 경기자 표창
나가시마 시게오
일본어식 한자 표기: 長嶋 茂雄
가나 표기: ながしま しげお
외래어 표기법 표기: 나가시마 시게오
통용 표기: 나가시마 시게오
로마자: Shigeo Nagashima

나가시마 시게오(일본어: 長嶋 茂雄 (ながしま しげお), 長島 茂雄(동음),[1] 1936년 2월 20일 ~ )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지도자, 야구 해설가·평론가이다.

지바 현 인바 군 우스이 정(현재의 사쿠라 시)에서 태어나 릿쿄 대학을 졸업하고 1957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해 현역 시절 ‘불타는 남자’(燃える男)라고 불릴 정도의 투지가 흘러넘치는 플레이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V9시대에 팀 동료였던 오 사다하루와 함께 팀을 대표하는 중심 타자로 맹활약했다. 1974년에 선수 생활을 은퇴할 때까지 17년 동안 2186경기에 출전하여 2471안타, 444안타, 1522타점, 타율 3할 5리의 통산 성적을 남겼다.

은퇴 후에는 1975년 ~ 1980년, 1993년 ~ 2001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을 두 차례나 역임하면서 감독 생활 15년 동안 5차례의 센트럴 리그 우승과 두 차례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끄는 등 현역 시절과 감독 생활을 통틀어 일본 프로 야구를 대표하는 명장으로 평가받았다. 선수 시절에 착용했던 나가시마의 등번호 3번은 요미우리 자이언츠 영구 결번의 하나이며 ‘미스터 자이언츠’(ミスタージャイアンツ), ‘미스터 프로 야구’(ミスタープロ野球)라고 불렸는데 ‘미스터’(ミスター) 라고 생략한 호칭이 정착되고 있다.

인물[편집]

어린 시절[편집]

지바 현 인바 군 우스이 정(현재의 사쿠라 시)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4남매(형 1명, 누나 2명) 중 막내로 태어났다. 생가는 농가였지만 토지는 대출하였고 아버지는 동사무소의 회계 담당 책임자나 조역을 하고 있었고[2] 어머니는 의지가 강할 정도의 견실한 사람이었다.[2]

어린 시절 한신 타이거스의 소속 선수였던 후지무라 후미오의 활약상을 보면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형의 영향을 받아 야구를 시작했지만 당시에는 태평양 전쟁 직후라는 점도 있어 장비가 그다지 갖추지 못해서 어머니가 구슬로 이용한 단단한 천으로 공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또한 글러브도 어머니가 손수 만든 것이고,[3] 처음 쥐었던 방망이대나무를 깎아 만든 수제 방망이였다.[4] 초등학교 6학년 때 형이 소속되었던 지역 청년 야구단 ‘하야테 클럽’에 입단하여 형밑에서 유격수로서 활약했다.

고등학교 시절[편집]

1951년 4월, 지바 현립 사쿠라 제1 고등학교(현재의 사쿠라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2학년 때는 4번 타자를 담당했는데[3] 고교 시절에는 거의 무명이었지만 고교 시절 마지막 대회이자 지구 예선에서 승리하는 등 다음 단계로 넘어갔고 미나미칸토 대회에 지바 현 대표 학교로서 출전했다. 1차전 상대인 구마가야 고등학교와의 경기(1953년 8월 1일, 오미야 구장)에서 당시 유격수였던 나가시마는 경기 전에 부상을 당했던 3루수 스즈키 히데미를 대신해서 3루수를 맡았다.[5] 유격수로서 거듭된 실책을 범했다는 이유로 수비 위치가 변환되었지만 이후에는 3루수로서 정착했다. 이 경기에서는 패했지만 6회초에 상대 투수 후쿠시마 이쿠오로부터 나가시마 본인으로서는 고교 대회에 있어서 유일한 홈런을 때려냈다.[6] 이 날카로운 라이너성 타구의 홈런을[6] 당시 언론들은 비거리를 350ft(약 107m)라고 추정했다.

이 초대형 홈런에 의해 나가시마는 야구 관계자들의 주목을 끌었는데 당시 나가시마의 홈런 때린 모습을 지켜본 아사히 신문의 기자 구보타 다카유키가 있었고 구보타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은 호치 신문 기자 다나카 시게미쓰가, 내야수의 스카우트를 담당하고 있던 후지 제철 무로란 야구부 매니저인 오노 히데오에게 이야기를 했다.[7] 오노는 나가시마에게 후지 제철 무로란에 입사를 권했지만 나가시마의 아버지는 대학 진학을 희망했고 더욱이 상부로부터 홋카이도에서의 신인이 발탁되었다는 연락을 받아 이를 포기했다.[8] 오노는 그 대신에 자신이 다녔던 미토 상업학교(현재의 이바라키 현립 미토 상업고등학교)의 선배에 해당하는 스나오시 구니노부가 감독으로 있던 릿쿄 대학의 진학을 권했다.[8] 스나오시의 교육 방침에 감명을 받은 나가시마의 아버지가 요미우리 자이언츠로부터 입단 제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나가시마에게 알리지 않는 상태에서 대학 진학을 이유로 거절했는데 프로 입단을 희망하고 있던 나가시마는 화를 냈다고 한다. 1953년 가을, 이토 스타디움에서 열린 릿쿄 대학 야구부의 선발 시험에서는 펜스를 직격한 것을 포함한 3개의 안타를 때려내 이를 지켜본 스나오시 감독으로부터 인정받았다.

릿쿄 대학 시절[편집]

이듬해 1954년, 릿쿄 대학 경제학부에 진학했지만 같은 해 6월에는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집안의 가장을 잃은 충격으로 인해 궁핍한 생활이 계속되었지만 어머니가 행상을 하는 등 생계를 유지했다. 이 시기에 대학을 중퇴해서 프로에 입단하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어머니가 반대하여 결국 포기했다. 야구부에서는 스나오시 감독의 지휘 하에 맹연습을 하면서 주전 3루수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대학 선배 오사와 마사요시(오사와 게이지) 등이 ‘스나오시 배척 운동’을 일으켰고[9] 스나오시가 물러난 이후 쓰지 다케시의 지휘 하에서 입단 동기 스기우라 다다시 투수(난카이 호크스), 주장을 맡은 모토야시키 긴고 내야수(한큐 브레이브스, 한신 타이거스)와 함께 ‘릿쿄 3인방’이라고 불리었다. 도쿄 지역 6개 대학 야구팀으로 구성된 도쿄 6대학 야구 리그에서는 1956년 춘계 대회와 1957년 추계 대회에서 수위 타자 타이틀을 획득했고 1955년 추계 대회부터 1957년 추계 대회까지 5시즌 연속으로 리그 베스트 나인(3루수 부문)에 선정되었다. 1957년에는 도쿄 6대학 리그의 통산 기록이 되는 8호 홈런을 때려냈다.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프로 입단이 확실시돼있어 여러 구단에서 나가시마와의 접촉을 꾀하고 있었지만[10][11][12] 난카이 호크스로 가는 것이 거의 정해져 있었다. 그 때를 전후하여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나가시마의 가족과 만나는 등 설득하는 작전으로 나갔고[13] 어머니로부터 ‘최소한 수도권에 있는 구단으로’라고 간청한 것으로 마음을 결정하게 되어[14] 나가시마는 태도를 바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기로 결정, 11월 20일에 계약을 맺었다. 등번호는 지바 시게루(작년도에 은퇴)가 착용했던 3번으로 배정을 받았고(당초에는 15번을 제시했었지만 거부했다) 계약금은 당시 최고 액수인 1,800만 엔(당시 난카이 호크스는 나가시마가 난카이에 입단할 경우 2,000만 엔을 제시하고 있었다)과 연봉은 200만 엔이었다.

나가시마는 시범 경기 도중 난카이 감독인 쓰루오카 가즈토에게 직접 찾아가 난카이 입단을 거절한 것에 대해 사과했고 거기에 대해 쓰루오카 감독은 “간토 지방 사람은 간토 지방의 연고지가 있는 팀에 들어가는 것이 제일 좋다”라고 웃으며 대답했다고 한다. 스기우라는 쓰루오카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 그대로 난카이에 들어갔지만 그 후로도 나가시마와의 우정은 끊이지 않았다.

프로 야구 선수 시절[편집]

신인 시절[편집]

1958년 당시 마이니치 신문은 나가시마가 상대 투수인 가네다 마사이치로부터 4타석 연속 삼진을 당했다는 내용의 관련 기사를 실었다.

도쿄 6대학 리그에서의 맹활약했던 것을 발판 삼아 입단 당시부터 골든 보이(ゴールデンボーイ), 또는 허리케인(ハリケーン) 이라는 별명이 붙여지는 등 입단 당시부터의 활약이 크게 기대되고 있었다.[15] 1958년 4월 5일, 개막전인 고쿠테쓰 스왈로스전에서 3번 타자로 선발 출전해 개막전 데뷔를 완수하였지만 고쿠테쓰의 에이스 투수인 가네다 마사이치로부터 4타석 연속 삼진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고, 다음날의 경기에서도 역시 상대 투수였던 가네다에게 삼진을 당했다.[16] 그러나 이틀 후인 4월 7일 고쿠테쓰전에서는 미쓰바야시 세이지를 상대해 첫 안타를 때려내는 것을 시작으로 4월 10일 다이요 웨일스전에서는 곤도 마사토시로부터 첫 홈런을 기록하여 본래의 힘을 발휘했다. 시즌 도중부터 가와카미 데쓰하루를 대신하는 4번 타자가 되어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같은 해 9월 19일 히로시마전에서는 우가리 미치오로부터 신인으로서의 신기록(당시)이 되는 28호 홈런을 때렸지만 1루 베이스를 실수로 밟지 않은 바람에 결국 홈런이 취소되는 상황이 벌어졌다[17](당시 기록은 투수 땅볼이었다[18]). 만약 1루 베이스를 밟았을 경우에는 신인으로서의 ‘트리플 쓰리’(타율 3할, 홈런 30개, 30 도루)의 기록이 달성되는 순간이었다.[17] 나가시마는 다음날 9월 20일 오사카 타이거스전에서 28호 홈런을 기록하여 신인 신기록을 달성했다(현재의 신인 기록은 1959년의 구와타 다케시와 1986년 기요하라 가즈히로가 각각 기록한 31개 홈런).

최종 타격 성적은 홈런 29개, 92타점을 기록해 홈런왕타점왕 등 연달아 석권했고 타율에서는 오사카 타이거스의 다미야 겐지로와의 수위 타자 타이틀을 놓고 경쟁을 했지만 다미야가 시즌 종반에 결장한 이후 전 경기 출전을 계속하고 있던 나가시마는 타율이 떨어지면서 최종적으로는 타격 2위인 3할 5리에 끝났다. 그러나 시즌 최다 안타인 153개를 기록하였고 도루 부문에서도 리그 2위인 37개를 기록하는 등 센트럴 리그 신인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 해 나가시마는 전 이닝 출전을 달성했지만 신인으로서의 전 이닝 출전은 1956년의 사사키 신야(다카하시 유니온스)에 뒤를 이은 역대 두 번째이자 센트럴 리그에서는 처음이며 현재도 신인 선수로서의 전 이닝 출전을 기록한 선수는 이 2명 뿐이다. 또 신인으로서의 89득점은 도쿠라 가쓰키의 90득점에 뒤를 이은 역대 2위이며 신인으로서의 센트럴 리그 기록이다. 그 외에 신인 선수로서 34개의 2루타는 역대 1위, 290루타는 역대 1위, 153안타는 센트럴 리그 기록, 92 타점은 센트럴 리그 기록이며, 타율·홈런·도루도 각각 신인으로서는 역대 5위 이내에 들어가 있다.

천황 참관 경기[편집]

잡지 《슈칸 베이스볼》 1958년 4월 16일자 표지의 모습, 왼쪽은 나가시마, 오른쪽은 히로오카 다쓰로

1959년 6월 25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한신전에서는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의 천황 참관 경기(천황이 관전한 경기이며 당시는 쇼와 천황)로 치러졌다. 이 경기에서는 한신이 먼저 1점을 얻었지만, 5회에 나가시마와 5번 타자인 사카자키 가즈히코가 연속으로 홈런을 때려내며 요미우리가 역전했다. 6회에는 한신이 3점 홈런을 기록하면서 승부를 뒤집었지만 7회에 6번 타자 오 사다하루가 2점 홈런을 때려내면서 동점을 만들었다. 9회말에 한신은 선발 고야마 마사아키가 강판되면서 두 번째 투수 무라야마 미노루가 등판했다. 타석에 들어선 선두타자 나가시마는 볼카운트 2-2로부터 5구째에 몸쪽을 노려 공을 때려냈는데 타구는 좌측 관중석을 향해 극적인 끝내기 홈런이 되면서 경기는 요미우리의 승리로 끝났다.

이 경기는 대학 야구 시절부터 슈퍼스타였던 나가시마가 때려낸 끝내기 홈런이었던 점도 있고 그 드라마성도 더해져서 크게 보도돼 나가시마의 강한 승부 감각이 일본 내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19] 그 때까지는 대학 야구가 가장 인기여서 돈으로 야구를 하는 프로 야구는 경멸하는 면이 있었는데 이후에는 일본 국내에서 프로 야구의 인기가 높아져 갔다. “이 경기에서 프로 야구의 융성은 시작되었다”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다.[20]

당시 나가시마의 끝내기 홈런은 좌측 폴대 상단에 꽂힌 것이어서 무라야마는 1998년에 사망할 때까지 이 에피소드에 대해서는 “그 홈런은 원래 파울볼이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참고로 이 경기에서는 당시 신인이었던 오 사다하루도 홈런을 기록했다.

2년째가 된 1959년 시즌에는 2위 이이다 도쿠지(2할 9푼 6리)와의 격차가 크게 벌어진 타율 3할 3푼 4리를 기록해 본인에게 있어서는 처음으로 수위 타자 타이틀를 차지했다. 홈런은 리그 3위인 27홈런, 타점은 리그 4위인 82타점을 기록했다. 다음 해인 1960년에도 타율 3할 3푼 4리를 기록하여 수위 타자를 차지했고 4번 타자이면서도 31개의 도루를 기록했다. 1961년에는 타율 3할 5푼 3리로 2위 곤도 가즈히코(3할 1푼 6리)와의 큰 격차를 내면서 3년 연속이 되는 수위 타자를 석권했다. 시즌 28홈런을 기록하면서 홈런왕까지 차지했지만 타점은 리그 2위에 해당되는 86타점을 기록하여 그 해에 타점왕을 차지한 구와타 다케시와는 8개 차이를 나타냈다.

ON포[편집]

1962년에는 타율 2할 8푼 8리를 남겨 리그 5위(수위 타자는 모리나가 가쓰하루의 3할 7리)로 끝났지만 홈런과 타점 부문은 리그 2위를 기록했다. 그 해 팀내 절친한 사이이자 동고동락을 하며 지내온 오 사다하루가 홈런왕과 타점왕 등 연거푸 타이틀을 기록하여 오 사다하루와 함께 팀 타선의 주축이 된 일명 ON포(오 사다하루와 나가시마의 영문 이니셜)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것은 메이저 리그뉴욕 양키스미키 맨틀로저 매리스MM포에 비유했다. 나가시마는 이 애칭의 표현대로 요미우리의 간판 4번 타자로 맹활약을 했는데 타순은 통상적으로 3번 오 사다하루·4번 나가시마였지만 두 선수의 컨디션에 따라 나가시마는 3번·오 사다하루는 4번으로 자주 바뀌기도 했다. 요미우리는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일본 시리즈를 9연패를 달성하여(V9) 이들 두 사람은 당시의 팀을 대표하는 선수였다.

1963년은 타율 3할 4푼 1리, 37홈런, 112타점으로 수위 타자와 타점왕을 동시에 석권했고 홈런은 오 사다하루의 40홈런에 뒤를 이은 리그 2위를 차지하면서 오 사다하루의 타점도 나가시마에 뒤를 잇는 리그 2위였다. 이듬해 1964년에는 리그 3위가 되는 31개의 홈런을 기록해 타율과 타점은 모두 리그 4위를 기록했다. 1965년에는 오 사다하루의 104타점에 뒤를 잇는 80타점(리그 2위)을 남기는 등의 맹활약을 했다.

숙적·무라야마[편집]

한신의 무라야마 미노루와는 천황 참관 경기를 비롯한 몇 차례나 명승부를 펼칠 정도의 라이벌 관계를 맺었다. 1966년 6월 8일, 무라야마는 앞으로 4개만 달성하면 통산 1500탈삼진 기록을 앞둔 시점에 “1500개의 탈삼진은 나가시마로부터 잡겠다”라고 선언했다. 한편, 나가시마는 경기를 앞두고 “번트를 해서라도 삼진은 하지 않는다”라고 보도진에게 말하기도 했다.[21] 무라야마는 5이닝까지 3개의 삼진을 뺏어냈고 6회초에 나가시마는 무라야마와 상대하여 2스트라이크 1볼의 볼카운트에서 4구째인 포크볼을 헛스윙 삼진을 당해 2구째와 4구째에 두 차례나 스윙을 했지만 삼진을 당한 4구째의 스윙을 하다가 헬멧이 벗겨졌다. 나가시마는 경기 종료 후 “저것은 칠 수 없어도 어쩔 수 없다”라고 말해 기록을 달성한 무라야마에 대해서 경의를 나타냈다. 그 후 무라야마는 1969년 8월 1일 통산 2000탈삼진을 달성해 이 기록은 나가시마로부터 삼진을 빼앗았다.

두 사람은 은퇴 후에도 의기 투합해 ‘조-씨’(チョーさん), ‘무라 상’(ムラさん)이라고 서로 불릴 정도로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 무라야마가 사망(1998년)한 이후 나가시마는 “그(무라야마)는 단 1개의 불공평한 공(빈볼)을 던지지 않았다”라고 말했다.[22] 1966년 나가시마의 시즌 타율은 3할 4푼 4리를 남겨 통산 5번째의 수위 타자를 획득했고 26홈런과 105타점은 각각 오 사다하루에 뒤를 이은 리그 2위였다. 그러나 이듬해 1967년에는 요미우리 입단 이후 처음으로 타율이 10위권에서 벗어나는 등 불안한 시즌을 보냈다.

난투극이 일어난 직후의 홈런[편집]

잡지 《소년》 1962년 4월호의 표지를 장식한 나가시마 시게오

1968년 9월 18일 한신과의 더블헤더 2차전에서는 요미우리가 초반부터 리드를 했고 5대 0이 된 4회초에 3번 타자였던 오 사다하루를 한신 투수인 진 바크가 2구 연속으로 위협구 수준의 공을 던졌다. 오 사다하루는 마운드로 다가가 항의했고 덕아웃에 있던 선수와 코칭 스태프들도 뛰쳐나와 난투극이 일어났다. 이 난투극으로 바크와 요미우리의 아라카와 히로시 코치는 퇴장당했다. 그리고 바크를 대신해 곤도 마사토시가 등판했지만 오 사다하루의 머리 뒷부분을 직격하는 사구를 던져 그 충격으로 인해 오 사다하루가 들것에 옮겨지는 등 경기가 20분 동안 중단되었다. 이 광경을 지켜본 나가시마는 그 직후에 곤도가 던진 커브를 노려 3점 홈런(35호)을 때려냈을 뿐만 아니라 8회에도 2점 홈런을 때려내는 등 혼자서 팀 승리에 기여하는 역할을 했다.

1968년 시즌에는 오 사다하루에 이은 타율 3할 1푼 8리(리그 2위), 오 사다하루와 데이브 로버츠에 이어 39개의 홈런(리그 3위)과 리그 최다인 125타점을 기록해 타점왕을 석권했다. 1969년에는 오 사다하루와 로버츠에 이은 타율 3할 1푼 1리(리그 3위)와 32홈런(리그 4위), 그리고 시즌 최다인 115타점을 기록하면서 타점왕을 차지했다. 1970년에는 타율이 리그 10위에 머물면서 침체되었지만 한편으론 리그 5위의 타이 기록인 22홈런과 리그 최다인 105타점을 기록해 3년 연속 타점왕을 차지했다.

고의사구의 대항[편집]

특별히 잘치지 못하는 코스나 구질이 없던 나가시마는 고의사구를 당한 경우가 많았다. 신인 시절인 1958년에는 6경기 연속 고의사구를 기록했고 1961년에는 연간 고의사구 갯수가 35개에 달하면서 8월 29일의 한신전에서는 고야마 마사아키로부터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의 고의사구로 출루했다. 1960년 고쿠테쓰와의 개막전에서는 5회 2사 1루의 상황에서 1스트라이크 2볼이 되었을 때 포수 히라이와 쓰구오가 일어서서 나가시마를 고의사구로 보낼려고 했다. 무라타 겐이치 투수는 포수가 지시한 코스로 던졌지만 나가시마는 억지로 방망이를 휘둘러 좌측 관중석 중간에 홈런을 날렸다. 같은해 7월 16일에는 투수가 고의사구로 던진 공을 가까스로 쳐서 2루타를 기록했다. 또한 1962년 7월 12일의 주니치 드래곤스전에서도 9회초 2사 2·3루의 타석에서 가와무라 야스히코가 던진 고의사구성 공을 좌익수 앞에 떨어진 역전 적시타를 때려냈다.

고의사구에 대한 항의로써 나가시마는 맨손으로 타석에 들어선 적도 있다. 1968년 5월 1일의 주니치전에서는 2사 2루의 상황에서 야마나카 다쓰미 투수는 고의사구를 던졌다. 나가시마는 여기에서 3구째부터 방망이를 들지 않은 채 타석에 들어서 맨손만으로 자세를 취하는 등의 행동으로 항의를 표했다. 경기장 안은 술렁거렸지만 공을 절대로 칠 수 있을리 없는 나가시마를 야마나카는 그대로 볼을 2개 연속으로 던져서 볼넷으로 내보냈다. 게다가 1971년 6월 17일의 히로시마전에서는 7회 2사의 주자 3루 상황에서 히로시마의 이노우에 요시오 - 미즈누마 시로 배터리는 고의사구로 승부를 피하려고 했다. 3구 연속 볼을 던진 시점에서 나가시마는 방망이를 버리고 맨손으로 타격 제스처를 취했다. 관중석이 떠들썩해지는 와중에 결코 공을 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4구째는 고의사구가 되면서 1루로 출루했다.[23]

1971년 5월 25일의 야쿠르트전에서는 상대 투수 아사노 게이시로부터 역대 5번째가 되는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 1708경기에서의 2000안타 달성은 가와카미 데쓰하루에 이어 가장 빠른 기록(역대 2위)이며 우타자로서는 역대 최고 속도 기록이다. 1971년 시즌에는 2위 기누가사 사치오와의(2할 8푼 5리) 격차가 크게 벌어진 3할 2푼의 타율을 남기는 등 통산 6번째의 수위타자가 되었다. 34홈런과 86타점은 각각 오 사다하루에 뒤를 이은 리그 2위였다.

부진과 은퇴 선언[편집]

1972년은 92타점(리그 3위)과 27홈런(리그 4위)을 기록한 반면 타율은 10위권에서 벗어났다. 1972년부터는 코치를 겸임하였고 이듬해 1973년에도 성적이 점점 떨어지면서 타격 부진에 시달렸다. 1973년 시즌 종료 후 가와카미 감독으로부터 “타율 3할이 채 안되기 전에 은퇴하는 것이 좋다”라는 은퇴를 권유받았지만 나가시마는 거부해 다음 시즌에도 현역 생활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24]

1974년 10월 12일, 주니치 드래곤스의 리그 우승이 확정되면서 요미우리의 리그 10연패 달성이 무산된 날에 나가시마는 현역 은퇴를 표명했다. 다음날 주요 스포츠 신문들은 나가시마의 현역 은퇴 관련 기사를 1면 머릿기사로 실을 정도로 도배된 반면 주니치의 우승은 묻혀 버렸다고 한다.[25] 은퇴 기자회견에서 나가시마는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주니치와의 나머지 2경기에 출전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엉망진창이 될 때까지 (야구를)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마지막까지 경기에 나가겠습니다.

또한 다른 인터뷰에서는 “‘내일은 분명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그 날 최선을 다해도 잘 안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믿고 그저 열심히 방망이를 휘둘러 왔다. 후회는 없다”라고 말하는 등 자신의 현역시절에 대해 되돌아 보기도 했다.[4]

은퇴 경기[편집]

은퇴 기자회견 다음날인 10월 13일에는 주니치와의 더블헤더가 나가시마의 은퇴 경기로 치를 예정이었지만 우천으로 인한 14일에 순차 연기되었다. 그 날은 주니치의 리그 우승 기념 퍼레이드와 같은 날이었으며 요나미네 가나메 감독을 포함한 호시노 센이치, 다카기 모리미치 등의 주력 선수들은 강제로 퍼레이드의 참가하면서 주니치 측은 힘이 쇠약해진 선수나 1군에 절반이나 머물렀던 선수들이 출전하게 되었다. 요나미네 감독, 호시노, 다카기 등은 나가시마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들의 무례함에 대해 사과를 했고 나가시마는 이에 대해 “(주니치에 있어서는 1954년 이후)20년 만의 리그 우승을 마음껏 축하해 달라”라고 대답했다.[25]

은퇴 경기를 앞둔 미팅에서 나가시마는 팀 동료들에게 “미련은 없다. 모두들 언젠가는 은퇴하는 날이 오겠지만 그것까지 최선을 다해 후회해가 없는 플레이를 해주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이 경기에서는 나가시마의 팬으로 알려진 테리 이토와 프로 입단을 앞두고 있던 오치아이 히로미쓰가 급히 찾아와 경기를 관전했다.

이틀 후인 10월 14일, 주니치와의 더블헤더 1차전에서 3번·3루수로 선발 출전했고 두 번째 타석에서는 무라카미 요시노리로부터 홈런을 때려냈는데 이 홈런이 현역 생활에 있어서는 마지막 홈런(통산 444호)이었다. 이 경기에서는 오 사다하루도 홈런을 때려냈다. 오 사다하루의 말대로 마지막(106개째)의 ‘ON 동반 홈런’을 기록했다. 1차전 종료 직후 나가시마는 외야 펜스를 따라 눈물 흘리면서 팬들에게 인사를 했고 애초에는 2차전 종료 후 장내를 일주할 예정이었는데 예상 외의 행동을 한 것이다. 나가시마는 이 때의 행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만큼 관중석에서 흘러나온 박수가 가슴에 와닿은 적은 없었다. 1차전이 끝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외야에 발길이 향하고 있었다.[25]

계속되는 더블헤더 2차전에서는 4번·3루수로 출전하여 나가시마는 이 경기의 세 번째 타석에서 중견수 앞에 안타를 때려냈다. 이것은 현역 생활에 있어서의 마지막 안타이자 통산 2471번째의 안타였고 이것은 지금도 대졸 출신 선수로서의 최다 기록이다. 8회말 1사의 주자 1, 3루 상황에서의 마지막 타석에서는 사토 마사오와 상대하였지만 유격수 앞에 병살타를 때려냈고(나가시마의 257개 병살타는 기누가사 사치오가 경신할 때까지의 센트럴 리그 기록이었다) 경기는 10 대 0으로 요미우리가 승리했다. 2차전 종료 후 나가시마는 이별이 정말 아쉬웠던지 선수 한 사람 한 사람과 악수를 나눴고 마지막에는 오 사다하루와 함께 허리에다가 손을 서로 맞대면서 벤치에 돌아왔다.

은퇴식에서의 고별 인사에서는 “우리 교진군은 영구히 불멸입니다!”(我が巨人軍は永久に不滅です!)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 말에 대해 자주 “영원히 불멸입니다” 라고 잘못 인용되는 경우도 있다.[26][27]

나가시마의 은퇴는 요미우리 신문이 선정한 1974년 10대 뉴스에 4위로 선정되는 등 스포츠에 머무르지 않는 사회적인 사건이었다. 같은해 11월 21일에는 선수 시절에 착용했던 등번호 3번은 영구 결번으로 제정되었다.[28]

제1기 감독 시대[편집]

1974년 11월 21일, 요미우리의 제9대 감독으로 취임한 나가시마는 ‘클린 베이스볼’(クリーン・ベースボール)을 표방했다. 전임 감독이던 가와카미가 구축한 확률 야구(스스로의 실책을 줄이면서 상대방의 실책을 권한 뒤 거기를 이용해서 승리하는 스타일)를 버리고 투타의 역량 차이가 그대로 승패로 연결된다는 신념 하에서 팀을 재편했다. 그 때문인지 수석 코치로 세키네 준조, 투수 코치에는 미야타 유키노리, 수비·주루 코치 보좌에는 구로에 유키노부 등을 각각 초빙하여 가와카미 감독 시절의 코치진은 거의 일소되었다. 새로운 등번호를 ‘90’번으로 정했는데 이 ‘90’번은 당시 초등학생이던 아들 가즈시게의 아이디어라고 알려져 있는데 “현역으로 있을 때 3이라는 숫자가 세 개가 있었다는(타순은 3번, 등번호는 3번, 수비 포지션은 3루수) 것으로부터 3을 3개 더하면 9. 이것을 0을 붙여서 90번으로 하면?” 이라는 가즈시게의 발언이 계기가 되었다(당시 등번호 9번은 요시다 다카시가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에).[29]

요미우리 구단으로서는 최초로 비일본계의 외국인 선수인[30] 내야수 데이비 존슨을 영입해 나가시마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3루수에 기용했다. 참고로 존슨은 메이저 리그 관련 정보를 나가시마에게 전달한 적도 있어 종종 나가시마 가족들에게 메이저 리그 경기를 녹화한 것을 추려서 나가시마 가족들과 함께 감상하고 있었다. 당시 현장에 같이 있었던 가즈시게는 메이저 리그를 동경해 야구(리틀 리그)나 독학으로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그러나 감독으로 부임한 첫 해(1975년)에 주력 선수들의 성적 부진과 신통치 않은 팀 성적으로 악재가 겹치면서 결국 팀 창단 이후 처음으로 센트럴 리그 최하위(6위, 47승 7무 76패)로 추락하는 불명예를 안게되었다. 구단 내부에서도 감독 경질설이 나돌았을 정도로 어수선한 분위기에 휩싸였는데 요미우리 구단은 명예회복 차원에서 나가시마를 계속 감독으로 기용했다.

1975년 시즌 종료 후 ‘그린 베이스볼’(グリーン・ベースボール), ‘챌린지 베이스볼’(チャレンジ・ベースボール)을 표방하여 이기는 야구에의 변화를 도모했다. 닛폰햄 파이터스로부터 투수 다카하시 가즈미와 내야수 도미타 마사루와의 맞트레이드로 일명 ‘안타 제조기’라는 별명이 알려질 정도로 닛폰햄의 간판 타자였던 하리모토 이사오를 영입했고, 한층 더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로부터 선발도 마무리도 모두 할 수 있는 가토 하지메도 영입했다(이 때 히가시오 오사무도 트레이드 후보였지만 ‘공이 빠른 선수’ 가토를 선택했다는 관계자의 증언도 있었다). 팀내에서는 외야수 다카다 시게루를 3루수로 변환되었는데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변환하면서 존슨을 본래의 2루로 이동하는 등 팀 전력 강화에 착수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이듬해 1976년에는 작년 시즌에서의 최악의 부진을 뒤집어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1977년에는 야쿠르트 스왈로스로부터 구라타 마코토와의 맞트레이드로 아사노 게이시를 영입했다(아사노는 당시 ‘요미우리 킬러’라는 별명이 불리기도 했다). 1977년에는 센트럴 리그 우승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지만 1976년 일본 시리즈1977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퍼시픽 리그 우승 팀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맞대결에서 2년 연속 완패를 당하는 등 우승 달성에 실패했다. 1977년 시즌 종료 후에는 다이요 웨일스로부터 존 시핀을 영입해 주전 2루수로 기용했다.

그러나 이듬해 1978년에는 시즌 초부터 침체가 계속되면서 8월 후반에는 한때 팀이 선두 자리에 들어섰지만 결국 히로오카 다쓰로 감독이 이끄는 야쿠르트 스왈로스에게 정규 시즌 우승을 빼앗겼다. 1978년 시즌 종료 직후 에가와 스구루의 거취 문제와 요미우리 입단을 둘러싼 소동(통칭 에가와 사건)이 일어나면서 팀내 에이스인 고바야시 시게루가 에가와의 맞트레이드로 한신 타이거스에 이적했다.

1979년 시즌에는 5위로 끝나면서 나가시마는 젊은 선수들을 이끌고 시즈오카 현 이토 시에서 추계 스프링 캠프를 실시했다. 이 캠프에서는 나카하타 기요시·시노즈카 도시오·사다오카 쇼지 등과 같은 젊은 선수들의 결속력이 높아졌다. 캠프에서 열린 연습 경기에서 젊은 선수들이 전혀 활약하지 않았던 반면 베테랑 선수들만이 활약한 적도 있었는데 후에 젊은 선수들이 후지타 모토시 감독 시절의 주력 선수가 된다.

또 1979년 시즌 종료 후에는 하리모토가 롯데 오리온스로 이적하였고 뉴욕 양키스에서 활약한 로이 화이트를 영입해 화이트는 하리모토를 대신해서 1980년 시즌 도중 40세가 되는 오 사다하루와 함께 팀 타선의 주축을 담당하는 간판 선수로서 기대되었다. 코칭 스태프 쪽에서는 나가시마의 이해 당사자이자 요미우리의 선배인 아오타 노보루를 수석 코치로 임명하는 등 팀의 재건을 시도했다. 그러나 아오타 수석 코치는 유력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폭력단과 자신의 교제를 인정하는 발언을 하면서 이 발언으로 인한 파문이 일파만파로 번졌다(아오타 코치의 문제성 발언 사건).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아오타는 시즌 개막을 앞두고 코치직에서 사임했다.

해임[편집]

야구 매스컴이나 팬들 사이에서는 영광의 V9 시대를 그리워하는 가운데 가와카미 데쓰하루 전 감독의 대망론이 서서히 급부상하고 있었다. 실제로 ‘가와카미파’라 불리는 요미우리 OB가 나가시마의 팀 꾸리기에 간섭(앞에서 말한 1976년 오프 당시 시바타의 트레이드 실패 등)하면서[31] 1976년 오프 시즌 훈련 당시 파트너이자 자신이 감독이 될 당시 코치로 발탁했던 오고 히로시하라 다쓰노리 드래프트 소동으로 잃는가 하면(하라의 자택에서 나가시마의 비밀편지를 갖고 갔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 1979년 오프 시즌에는 앞에서 말한 소동으로 아오타 노보루를 잃는 등 1975년부터 1979년 사이 무려 11명의 코치가 해임되었다.

나가시마의 비판에 대한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있는 와중에 1980년 8월 가와카미 본인이 아오타 노보루, 마키노 시게루, 후지타 모토시, 구니마쓰 아키라 등이 참석한 슈칸 분슌의 좌담회를 열어 취재를 담당하던 다키 야스하루에게 오프 더 레코드라는 조건으로 나가시마의 후임 감독에 대해서 다양하게 의견을 교환했다. 그런데 몇일 후에 그 기사가 게재되면서 나가시마에 대한 비판 또는 자신의 하차를 요구하는 움직임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구단주인 쇼리키 도루가 아닌 요미우리 신문사 무타이 미쓰오 사장이 1980년 시즌 종료에 앞서 나가시마 감독을 해임시키기로 결정했다. 구단이 A급을 확보하면 연임하겠다고 공언했던 것이 완전히 뒤집히게 되자 이를 ‘음모’라며 한바탕 시끄러워졌다. 가와카미파의 거듭된 비난에 시달리던 나가시마는 이를 가와카미(와 그 일파들)에 의한 수 년간 꾸민 뒷공작의 결과로 간주해 가와카미에 대한 나가시마의 악감정을 갖게 된 것이 결정적이었다.[32] 가와카미가 OB회 회장이 된 뒤로는 OB회에 연속으로 불참하다가 ‘1990년에 올해도 참석하지 않으면 제적된다’는 OB회의 권고를 받고서야 마지못해 얼굴을 내비쳤는데[33] 이를 계기로 가와카미와 전격으로 ‘화해’했다. 나가시마는 사임이라는 명목의 ‘실질적 해임’ 이후 쇼리키 도루한테서 프런트 입문 권유를 받았지만 프런트는 자신하고 맞지 않는다며 거절했고 이후 개인 사무소 ‘오피스엔’을 설립해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떠돌이 시대’를 시작했다.

후임 감독은 후지타 모토시가 맡았는데 후지타는 앞에서 언급한 좌담회에도 참석했고 그 좌담회에서 가와카미가 후임 감독 이름을 언급한 탓에 ‘나가시마파’의 언론으로부터 공격 대상이 됐다. 1981년에 팀이 일본 시리즈 우승을 제패한 이후에도 ‘후지타 때리기’는 계속되었다.

제1기 감독 퇴임 이후[편집]

한국 야구의 현재 여건은 일본 프로 야구가 생긴 34년보다 여러모로 좋은 것 같다. … 초창기의 일본 프로 야구가 역사깊은 미국 프로 야구와 잦은 친선 경기를 가져 빠른 발전을 이룩한 것처럼 한국 프로 야구도 일본과 깊은 유대관계를 갖는 것이 발전을 촉진하는 길이 될 것이다.
— 나가시마 시게오, 한국야구위원회 초청 강연에서(1982년 1월)[34]

요미우리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 야구 뿐만 아니라 스포츠 전반의 지도자적 역할, 스포츠 외교관적 역할을 보여주었다. 특히 요미우리 감독에서 물러난 이듬해 1981년 2월에는 쿠바 문화 시찰, 같은 해 6월 중국봉루협회에서의 야구 지도, 10월에는 월드 시리즈 관전 등을 했고 이듬해 1982년 1월에는 한국야구위원회 초청으로 대한민국을 방문, 세미나의 강연자로 나서기도 했다.[34]

그 외에도 스포츠 프로그램 뿐만 아니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다수 출연했는데 독특한 캐릭터로 호평을 받아 재미있는 아저씨 이미지를 가질 정도였다. 이듬해 1982년 1월에는 호치 신문의 객원 평론가로 부임했고 그 후 1984년 11월에 기네스북 재팬 대표로 취임했다. 1985년 10월에는 일본 트라이애슬론 연맹 회장으로 취임했고[35] 1986년 11월, 꽃과 초록의 농예 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1988년 12월에 국제 아동 교류 재단 웨이브 2천(WAVE2000)을 설립하여 회장으로 취임하는 등 야구 이외의 사회 공헌 활동도 전개해 나갔다.

제2기 감독 시대[편집]

1990년에는 요미우리 감독에서 사임할 당시 갈등을 일으켰던 가와카미 데쓰하루와 화해했고 1991년에 무타이 미쓰오가 사망하면서 와타나베 쓰네오가 요미우리 신문의 사장으로 취임하는 등 나가시마의 감독 복귀가 기정사실화 되었다. 1992년 오프에는 호치 신문 객원 해설위원직을 사임했고 같은 해 10월 12일에 제13대 감독으로서 기자회견을 열어 등번호를 ‘33’(3을 두 개로 합친 것을 의미함)번으로 결정했다. 같은 해에 열린 드래프트 회의에서는 세이료 고등학교의 마쓰이 히데키를 드래프트 1순위로 지명했다. 감독으로 복귀한 나가시마는 오랫동안 ‘스피드 & 충전’(‘スピード&チャージ’, 후에 ‘충전 & 충전’)을 표방했고 낭인 시대에 감명을 받은 쿠바 야구의 실천을 목표로 했다. 뉴욕 양키스에서 활약했던 제시 바필드를 입단시켰고 또 아들인 가즈시게를 야쿠르트로부터 맞트레이드로 영입, 부자지간에 요미우리의 일원이 되었다. 이듬해 1993년 시즌에는 3위를 기록했고, 시즌 종료 후 프로 야구에 자유계약선수 제도가 도입되면서 주니치의 간판 타자로 맹활약한 오치아이 히로미쓰를 영입에 성공했다.

이듬해 1994년에는 주니치와 리그 동률을 이루면서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는 주니치와 상대하여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또한 경기 직전에 나가시마는 이 경기를 “국민적 행사”라고 발언하여 후에 ‘10월 8일 결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질 정도의 명승부가 되었다. 일본 시리즈세이부 라이온스[36]와의 맞대결에서는 감독 부임 이후 처음으로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시즌 종료 후 일본 야구계의 최고상인 쇼리키 마쓰타로상을 수상했다.

2년 후인 1996년에는 최대 11.5경기차로 벌어졌던 히로시마를 제치고 선두 자리를 탈환하면서 리그 우승을 달성했는데 작년에 달성할 수 없었던 2년 넘는 ‘메이크도라마’(メークドラマ)를 완성시켰다(1999년은 ‘메이크 미라클’(メークミラクル), 2001년에 ‘미라클 어게인’(ミラクルアゲイン)이라는 표어를 각각 내걸었지만 우승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 시리즈에서는 오기 아키라 감독이 이끄는 오릭스 블루웨이브에게 오릭스의 홈구장인 그린 스타디움 고베에서 1승 4패의 성적을 기록하여 일본 시리즈 우승 달성에는 실패했다. 1996년 시즌 종료 후 아들 가즈시게에게 스스로 방출 통보를 전하면서 현역을 은퇴시켰다. 그동안 나가시마는 감독을 계속 맡으면서 시즌이 종료될 때마다 후임 감독 후보로서 호리우치 쓰네오모리 마사아키, 에가와 스구루 등 요미우리 OB의 이름이 유력하게 거론되었다. 그 중, 후임으로 지도하기 위해 1998년부터 하라 다쓰노리를 1군 코치로 초빙시켰다.

1998년 7월 31일 한신전(한신 고시엔 구장)에서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은 발비노 갈베스깃타카 아쓰시 주심을 향해 공을 내던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가시마는 자신의 저서인 《야구는 인생 그 자체다》에서 감독으로서의 책임으로 구단 사장 와타나베 쓰네오에게 사표를 제출했지만 구단 측의 만류로 한신전이 종료된 다음날에 머리를 깎았다고 밝혔다.[37]

2000년에는 FA로 입단한 에토 아키라에게 등번호 33번을 양보하고 나가시마는 현역 시절 등번호였던 3번으로 변경했다. 당초에 이 등번호 3번을 나가시마는 유니폼 위에 옷을 덧입어 언론과 팬에게는 숨기고 있었다. 여론의 등번호 3번을 착용한 나가시마가 보고 싶다고 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었을 무렵에 유니폼을 공개하여 당시에 화제성이 결여되어 있던 팀의 화제몰이에 크게 기여했다. 그 해 나가시마가 이끄는 요미우리는 일본 시리즈에서 오 사다하루가 감독으로 있는 퍼시픽 리그 우승 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를 누르고 자신으로서는 통산 두 번째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끄는데 성공했다.

2001년 시즌 종료 후 요미우리의 감독에서 물러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9년 간의 감독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나가시마의 용퇴 및 수석 코치로 맡을 예정이던 하라 다쓰노리를 차기 감독으로 부임했다는 내용의 발표가 이루어진 기자 회견장에서 니혼 TV의 아나운서인 요시다 신이치로가 “나가시마에게 있어서 야구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야구라는 스포츠는 인생 그 자체입니다.[38]

이후 감독을 사임함과 동시에 요미우리의 종신 명예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 후[편집]

2002년 3월, 사쿠라 시 명예시민으로 선정되었고 7월에는 릿쿄 학원 영예상(제1호)을 수상했다. 같은 해 아테네 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하는 일본 야국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정식 부임하여 이듬해 2003년 11월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서 대한민국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등 아시아 각국들을 상대로 연달아 승리하는 등 올림픽 본선 진출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2004년 3월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39][40][41] 한때는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지만 우반신에 마비가 남아있어 언어 능력에도 영향을 미쳤다. 나가시마 본인과 주변에서는 아테네 올림픽으로의 복귀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단기간으로의 병상 회복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판단되어 가즈시게가 “(아테네에는)가지 않는다”라고 기자 회견을 통해서 이렇게 밝혔고[42] 직함은 그대로이지만 나가시마가 현지 아테네에서 대표팀 지휘를 맡을 수 없게 되었다. 나가시마를 대신해서 수석 코치인 나카하타 기요시가 대표팀의 지휘를 맡았지만 결과는 3위(동메달 획득)에 끝났다.

2005년 7월 3일, 나가시마는 도쿄 돔에서 열린 요미우리 vs 히로시마전을 관전하면서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약 1년 4개월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경기에서의 관전에는 같은 해 1월 1일부터 ‘구단 대표 특별 보좌’가 된 장남 가즈시게가 동행했다. 이 때는 사실상 요미우리 그룹의 독점 취재가 되면서 나가시마의 육성은 전해지지 않았지만 같은 해 11월 4일 고쿄에서 열린 아키히토·미치코 황후와의 간담회에 참석하여 가벼운 대화에 응하는 나가시마의 모습이 전해졌다.

2005년 11월 3일에는 2005년도의 문화공로자(스포츠 진흥)로 선정되었고 이듬해 2006년에는 소년 야구 교실에 참여하는 것 외에도 재활훈련의 성과도 있어 조금씩 활동을 재개했다. 또, 아테네 올림픽 대표팀 선수들을 중심으로 2005년부터 시작된 ‘나가시마 시게오 드림 프로젝트’[43]에 특별 게스트로서 참여하는 등 어린이들을 상대로 야구 지도를 했다.

2007년 7월, 니혼케이자이 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인기 코너 ‘나의 이력서’에 등장했으며 같은 해 9월 18일에는 부인이 병으로 사망했다. 2009년 9월에 방송된 NHK 스페셜 ‘ON의 시대’(전2회)에 출연하여 뇌졸중의 후유증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인터뷰에 응했는데 텔레비전에서의 장시간동안 가진 인터뷰는 뇌졸중이 발병된 이후 처음이었다. 그 프로그램에서의 나가시마는 “주변에서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는 것이 좋다’라는 말도 있었다”라고 밝히는 등 자택 주변에서의 보행하는 훈련이나 근력 트레이닝 등의 재활훈련을 공개했다.

2010년에는 《슈칸 분슌》에서 방송인이자 수필가인 아가와 사와코와 대담하는 모습을 게재해 발병 당시의 모습을 되돌아보기도 했고[44] 이듬해 2012년 11월에는 쿠바 정부로부터 우호 훈장이 수여되었다.[45]

2013년 4월 1일 오후, 일본 정부 대변인 스가 요시히데 내각관방장관은 기자회견에서 국민영예상 수여와 관련해 마쓰이 히데키와 함께 국민영예상 수여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고[46][47][48] 같은 달 16일에 일본 정부는 나가시마와 마쓰이를 국민영예상 공동 수상자로 결정했다.[49] 5월 5일 도쿄 돔에서 열린 요미우리 대 히로시마전의 경기에 앞서 마쓰이 히데키의 은퇴식과 더해 국민영예상 시상식이 거행돼 나가시마는 이 자리에서 도쿄 돔을 찾은 관중들에게 “국민영예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경기 전에 열린 시구식에서는 나가시마가 한 손 치는 것으로 타석에 들어섰고 투수에는 마쓰이, 포수는 하라 다쓰노리 요미우리 감독, 주심은 아베 신조 총리가 맡았다.[50][51][52]

2013년 4월, 지바 현 현민 영예상의 수상자로 결정되어[53] 5월 31일에 시상식에 참석했고[54] 2013년 6월에는 사쿠라 시민 영예상의 수상자로 결정되면서[55] 7월 12일 사쿠라 시 이와나 운동 공원 제1 야구장에서 시상식이 거행되었다.[56] 또 사쿠라 시 이와나 운동 공원 제1 야구장의 명칭이 같은 날부터 ‘나가시마 시게오 기념 이와나 구장’(長嶋茂雄記念岩名球場)으로 변경되었다.[56]

플레이 스타일[편집]

타격[편집]

가네다 마사이치, 무라야마 미노루, 곤도 히로시, 아다치 미쓰히로, 에나쓰 유타카, 반도 에이지, 이나오 가즈히사 등의 투수, 또 포수로서 올스타전이나 일본 시리즈에서 상대했던 노무라 가쓰야가 나가시마를 ‘계산 할 수 없는 타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곤도나 아다치는 “나가시마는 칠 수 없을 것 같은 코스라도 방망이를 내던지거나 순간적으로 팔을 굽히거나 해서 때려내는 타자였다”라고 평가하고 있으며 “칠 수 있는 공을 확실히 친다. 잠재력이 높아 대부분의 스트라이크 존에 오는 볼은 오 사다하루에게 있어서 ‘칠 수 있는 공’이 되어버리지만, 칠 수 없는 공까지 왠지 친다고 할 타입은 아니었다”라고 평가하는 오 사다하루와 비교하고 있다.[57][58] 에나쓰는 “타석마다 왜 쳤었던 것인지 전혀 모르겠다”라고 나가시마에 관해서 이야기 했고, 노무라는 자신의 저서 《교진군론》중에서 나가시마를 “날아오는 공을 칠 수 있는 천재”라고 극찬했다.

극단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아웃 스탭이 특징이었다. 가와카미 데쓰하루는 “보통 타자라면 1할도 확실하지 않은 폼, 나가시마는 타고난 능력으로 방망이의 머리를 마지막까지 남겨두었기 때문에 그런 폼이라도 여러가지 볼에 대응할 수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이 점은 가네다 마사이치도 언급하였고, “나가시마는 아무리 자세가 무너져 있어도 방망이의 머리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남겨져 있어서 마지막 순간까지 방심할 수 없었다. 매우 박력있었다”라고 말했다.

히로시마 카프의 ‘오 시프트’(王シフト)를 만들어낸 계기가 된 도요 공업컴퓨터는 당연하게 나가시마에 대해서도 같은 데이터를 분석했지만 나가시마에 관해선 전혀 특징적인 경향이 보이지 않고 ‘나가시마 시프트’를 만드는 일은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오카자키 미쓰요시는 “오 시프트를 만들게 해서 그걸 신경쓰지 않고 홈런을 계속쳤던 오 사다하루는 정말로 위대하다. 그러나 동시에 나가시마 시프트를 만들어 주지 않았던 나가시마도 대단하다”라고 평가했다.

나가시마의 헛스윙은 벗겨졌던 헬멧이 3루 벤치 쪽으로 날아갔다고 할 정도로 호쾌한 헛스윙으로 팬들을 들끓게 했다. 이러한 호쾌한 헛스윙이나 데뷔 당시의 4타석 연속 삼진 등을 기록할 정도로 삼진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로 슬러거로서는 삼진은 적은 편이었다. 삼진 갯수의 타수에 대한 비율 0.090는 통산 400홈런 이상을 기록한 15명(2011년 현재) 중에서는 하리모토 이사오, 도이 마사히로에 이어 가장 낮다. 또 400홈런 이상을 기록한 타자 중에서 삼진률이 1할을 끊고 있는건 이 3명 뿐이다.

수위 타자를 획득한 시즌에서는 모두 안타 갯수에서도 리그 1위였다. 시즌 최다 안타 10회는 현재에도 프로 야구 기록(6년 연속을 포함하지만 이것도 프로 야구 기록)이며 6차례를 석권한 수위 타자 중 가장 큰 2위와의 차이가 적었던건 1963년에 고바 다케시와는 2리차로 그 외의 5차례는 모두 1푼 5리 이상의 차이를 보였다. 6차례의 수위 타자 중 2차례(1959년, 1971년)는 나가시마가 센트럴 리그에서 유일한 3할 타자이다.

나가시마가 전성기였던 시대에는 리그 평균 타율이 2할 3푼 등 극단적인 타저투고의 환경아래인데다 게다가 은퇴 후에는 타자에게 유리한 래빗 이 보급되었다. 그 때문에 걸출값[59]을 측정하는 세이버매트릭스(RC 관련, XR 관련, 장타율 걸출도와 OPS 걸출도 등)에 있어서 대부분의 통산 기록 지표에서의 나가시마는 프로 야구 역대 3위 이내에 위치하고 있다. 타율걸출도(RBA)에서도 우타자로서는 역대 1위이며 그 시대에 걸출한 타자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치러졌던 미일 야구에서는 다른 많은 선수들이 통산 타율 1할대에서 2할 전후인데 나가시마는 69경기에서 타율 2할 9푼 5리(200타수 59안타)라는 높은 타율을 기록했고, 통산으로 장외 홈런을 포함한 6개 홈런과 27타점, 4사구 26개, 도루 5개 등을 남겼다.

오 사다하루가 홈런 타자로서 각성한 이후에는 홈런왕 타이틀을 획득할 순 없었지만 특히 타율과 타점에서 2관왕이었던 1963년에 오 사다하루와는 불과 3개 차이로 홈런왕 타이틀을 놓쳤고 타율과 홈런으로 2관왕을 석권했던 1961년에도 구와타 다케시에게 8타점 차이로 타점왕 타이틀을 빼앗겨 3관왕을 놓쳤다. 한편으론 1968년부터 1970년까지 3년 동안 오 사다하루가 수위 타자·홈런왕·타점 2위를 기록하여 타점왕은 나가시마가 석권해 3년 연속으로 오 사다하루의 타격 부문 3관왕을 저지하기도 했다. 타율·홈런·타점 부문에 있어서 ‘2관왕, 남은 한 부문이 리그 2위’인 시즌을 1958년, 1961년, 1963년 통산 3차례나 남겼지만 이것은 오 사다하루의 5차례와 나카니시 후토시의 4차례에 이은 역대 3위의 기록이다.

신인이었던 1958년에는 3루타를 하나만 더 쳤으면 다미야 겐지로(8개)와 나란히 리그 최다가 되어, ‘1루타(83), 2루타(34), 3루타, 홈런(29)의 전부가 리그 최다’라는 대기록을 달성하려고 했다. 현재도 일본에서는 이 기록을 달성한 선수는 한 명도 없다. 또한, 현역 시절에는 많은 타이틀을 휩쓸고 있었지만 예외적으로 사이클링 안타는 단 한 번도 달성하지 못했다. 1경기 4안타 이상을 통산 26경기, 5안타를 1경기 기록하고 있지만 그 중 26경기에서는 3루타를 때려내지 못했다. 유일하게 3루타를 때려냈던 경기에서는 2루타 하나, 3루타 두 개, 홈런 하나로 단타가 없어 사이클링 안타를 놓쳤다.

통산 고의사구 205개, 타율 10위권 진입이 통산 13회 등은 우타자 역대 1위의 기록이며 통산 2471안타는 가네모토 도모아키에 의해 경신될 때까지 오랫동안 대졸 선수로서의 역대 최다 기록이었다. 센트럴 리그 외곬수로 활약하면서 통산 기록에서는 2루타, 3루타, 장타, 타점, 희생 플라이 갯수 모든 우타자의 센트럴 리그 기록을 갖고 있다. 또, 통산 안타를 실제 프로생활 기간으로 나눈 평균 안타 갯수는 145개에 이르러 동 시대에 활약한 하리모토 이사오, 134개, 에노모토 기하치 128개, 후쿠모토 유타카 127개, 오 사다하루 126개, 노무라 가쓰야 111개, 기누가사 사치오 110개, 가도타 히로미쓰 106개 등 다른 일류 타자의 평균 갯수와 비교해도 내밀고 있어 현역 시절에는 우타자이면서도 나름대로 안타를 겹쳐 쌓았다. 통산 타율 3할 5리는 7000타수 이상을 기록한 선수 중에서는 역대 4위이며, 8000타수 이상의 선수 중에서는 역대 2위(우타자에서는 역대 1위)이다.

큰 무대에서도 잘 치고, 승부욕이 강한 인상이 남아 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통산 68경기에 출전하여 출루율 4할 2리, 장타율 6할 9푼 4리, OPS 1.096의 성적을 남겼고 일본 시리즈 첫 출전에서는 통산 12경기에서 타율 4할 2푼 9리(49타수 21안타 4홈런)을 기록했다. 또 일본 시리즈 MVP 통산 4차례 획득은 사상 최다 기록이다. 2개의 홈런을 때린 천황 참관 경기에 대해 팀 동료인 히로오카 다쓰로는 “천황 참관 경기는 나가시마를 위해 있었던 것과 같은 것”라고 말해 “그가 그런 무대에서 힘을 확실하게 발휘할 수 있는 건 실력이 있는 것도 그렇지만 사고방식(큰 시합에서 겁먹지 않고, 오히려 즐긴다)이 굉장한 것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크다”라고 평가했다.[60] 1966년 11월 6일의 미일 야구·천황 참관 경기에서도 장외 홈런을 때려내 황실 관람 경기에서는 통산 10경기에서 타율 5할 1푼 4리(35타수 18안타 7홈런)를 기록했다.

포수에 의한 ‘속삭임 전술’이 전혀 통하지 않았던 선수이기도 하며 노무라 가쓰야는 몇 번을 해 봐도 나가시마에게는 통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한 쓰지 야스히코에게는 “어이, 단푸(ダンプ, 쓰지의 별명), 시끄러! 야구를 하라고. 야구를!” 하고 소리치며 방귀를 이용해서 공격했던 적이 있다.

주루[편집]

젊은 시절에는 뛰어난 준족과 과감하고 좋은 주루가 장점 중의 하나였다. 러닝 홈런이 많고, 1958년 일본 시리즈에서도 기록하고 있으며 1960년 7월 17일의 다이요 웨일스전에서는 고의사구성 공을 치고 나서 러닝 홈런을 기록했다. 또한 같은해 8월 21일 고쿠테쓰 스왈로스전에서는 1사 1·2루에서 오 사다하루가 때린 좌익수 플라이에서 1루 주자였던 나가시마는 기세좋게 스타트를 시작하여 2루에 되돌아오려고 했던 후지오 시게루를 따라잡으며 아웃이 되었다.

신인 시절에는 4번 타자로 활약하면서 37개의 도루를 기록하는 등 젊은 시절에는 도루가 많았다. 하지만 나가시마 본인은 “달리는 것이 너무 좋다”라고 말하면서도 “1루에서 2루로의 도루에는 별 흥미가 없었다. 1루에서 3루까지의 거리감이 너무 좋았다”라고 말했다. 나가시마의 3루타는 통산 74개(역대 8위, 우타자에서는 히로세 요시노리에 이어 역대 2위)로 많았고 1960년 5월에는 4경기 연속 3루타라는 일본 기록도 세웠다. “관객들에게 가장 어필해서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은 3루타라고 하는 이유에서, 나 자신이 프로로서의 가치는 3루타라고 생각했었다”라고 말했다.[61] 신인 시절 항목에서 언급한 ‘홈런 취소 사건’은 유격수 머리 위 아슬아슬하게 라인 드라이브할 듯한 타구였기 때문에 “좋아, 3루타다!”라고 생각하여 전력질주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한다.[61]

30세 전후가 되기까지는 단타성 타구라도 틈이 있으면 적극적인 주루로 과감하게 다음 루를 노려 3루타가 많은 한편으론 2루타도 많았다(통산 418개는 역대 7위이며, 우타자에서는 야마우치 가즈히로에 이어 역대 2위). 리그 최다 2루타 통산 3차례라는 센트럴 리그 타이 기록도 갖고 있다.

홈스틸을 6차례 시도해서 2번 성공시켰고 그 외에 1루 주자로서 후속 타자의 외야 플라이에 의해 2루를 돌아간 지점에서 되돌아올 때 2루를 통과하면서 2루를 밟지 않고 통과하여 1루로 되돌아 왔다고 하는 ‘삼각 베이스 사건’을 1960년, 1964년, 1968년에 세 차례 일으켰다.

수비[편집]

평범한 3루수보다 1.5미터 정도 뒤에서 수비하고, 특히 좌우(1루쪽으로 향하는 라인) 수비 범위가 넓고 유격수와 투수의 수비범위에 있는 타구도 대신 처리해 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이것은 히로오카 다쓰로호리우치 쓰네오가 증언했는데 나가시마의 말에 따르면 “저 범위의 타구는 3루수 최대의 멋진 장면”이라고 한다. 또한 송구 후에 오른손을 팔랑팔랑거리는 독특한 움직임이 있어 이것은 가부키의 움직임에서 따온 것이다.

별 것 아닌 땅볼을 알까기하는 진기한 플레이가 TV에 잡히는 등 실책하는 장면이 자주 방송돼 수비의 명수로서 언급된 경우는 적다. 하지만 실제로 수치상으로는 수비 능력이 높은 선수로서 통산 수비율 9할 6푼 5리는 스미 후지오의 9할 7푼 5리에 이은 3루수로서의 센트럴 리그 역대 2위(1000경기 이상의 선수가 대상이며 스미는 통산 1350경기·3296차례 수비 기회)를 기록하고 있어 1500경기 이상 및 4200차례 수비 기회를 대상으로 했을 경우에는 3루수로서의 프로 야구 역대 1위가 된다. 데뷔한 때부터 은퇴할 때까지 계속 경기에 출전하여 7353차례 수비 기회를 시작으로 경기수·플라이 아웃·(1루)송구 아웃·병살 등, 실책 수를 제외한 모든 통산 수비 기록에서 다른 3루수들을 압도하고 있다(모두 3루수로서의 프로 야구 역대 1위).

시즌에 있어서도 수비 지표의 RRF(레인지 팩터)로 데뷔 이후 7년 연속을 포함하여 3루수로서의 리그 1위를 통산 8차례(1958년 ~ 1964년, 1967년)를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다른 3루수와 비교하여 뛰어난 수치를 남겼다. 1968년부터 (RRF가)플러스인 수치가 적어지고 1970년 이후에는 1973년 이후의 4시즌에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어 34세 이후부터 수비에 대한 쇠퇴가 보였다. 리그 1위를 7년 연속·통산 8차례는 모두 3루수 역대 1위의 성적이며 플러스였던 시즌의 합계치도 3루수 역대 1위이다. 수치에서 봤을 때 전성기 때는 타구를 아웃시키는 능력이 아주 높고, 수비 범위가 넓은 3루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즌 214차례 수비 기회 연속 무실책이라는 3루수 프로 야구 기록도 보유하고 있으며(연속 시즌에서는 2012년에 미야모토 신야가 경신) 젊은 시절엔 짧기는 하지만 유격수외야수로서도 출전했다.

에피소드[편집]

나가시마는 천진난만하고 대범한 성격으로 묘사되며, 진지하고 신경질적인 오 사다하루와는 대조적이라고 얘기되는 경우가 많지만 가까운 지인들의 말에 따르면 실은 정반대라고 한다.[62] 평범한 사람에게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독특한 감각을 지녔기에 이와 관련되는 에피소드가 가장 많다. 이러한 에피소드에는 신빙성이 다소 부정확한 것들도 포함된다.[63]

대화에 있어서는 화법도 상당히 독특해서 현역 시절에는 이미 한 문장 안에 주어와 술어가 몇 번씩 되풀이되고 이야기가 끊어지는 곳 없이 줄줄 이어지는 화법을 구사했는데 취재 기자들은 이를 두고 ‘나가시마 화법’(長嶋話法)이라고 칭했다. 감독 시절에는 ‘으응’(うーん), ‘그래’(ええ), ‘이른바’(いわゆる), ‘하나의’(ひとつの) 등의 말을 즐겨 사용했고 말과 말 사이에 틈을 두게 되었다. 1981년 오토모 고헤이에게 한 말에 따르면 “무심코 한 발언으로 여러 사람한테 상처를 줘서는 안 된다. 오해를 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말을 자꾸 고르다 보니 이런 식으로 말하게 됐다”라고 말했다.[64]

일본어영어가 부자연스럽게 섞인, 혹은 굳이 영어로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영어로 하는 습관 때문에 ‘미스터 잉글리시’(ミスターイングリッシュ)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유명하다(예를 들면 ‘실패는 성공의 마더’(失敗は成功のマザー), 고등어를 ‘물고기 변에 블루’(さかなへんにブルー)[65]). 일설에 의하면 결혼 후에 집안에서는 영어로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에 이러한 말투가 되었다고 한다.[66]

남의 이름을 기억하는 게 불안정(친한 사람의 이름도 잊어버리는 한편, 딱 한 번 만났을 뿐인 사람의 이름은 기억하는 식)한가 하면 속담을 잘못 인용하거나 이중 표현 등을 자주 쓰는 통에 처음 들어서는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많다. 다만 대화 자체보다는 바디랭귀지로 커뮤니케이션을 취하는 유형이기도 하다.

취미가 다양한데 릿쿄 대학 4학년 때 요도가와 나가하루가 편집장으로 있는 《영화의 벗》과의 인터뷰를 한 적 있다. 그 인터뷰에서는 ‘최근에 본 영화’로 엘리아 카잔 감독의 《군중 속의 얼굴》,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저항》 등을 꼽았다. 특히 《저항》은 심리 묘사가 철저한 이색작으로 요도가와가 “스포츠 선수가 이런 영화를 선택하다니”라고 놀라움을 표하기도 했다. 더욱이 영화 취향에 대해서는 “달달한 영화는 꼭 낮은 아웃 코스로 들어오는 볼 같아서 나로서는 힘들다. 천성에 맞지 않다”라고 말했다.[67] 그 밖의 취미로는 독서(현역 시절에는 역사 소설이나 전기 소설, 감독 시절에는 관리학 관련 서적과 확률론 서적 등), 그림 감상(아메데오 모딜리아니를 좋아함), 쇼기 등이 있는데 장기에 관해서는 나카하라 마코토로부터 명예 3단 증서를 수여받았다.

좌우명은 ‘쾌타세심’(快打洗心)인데, 도비타 스이슈의 ‘일구입혼, 쾌타세심’(一球入魂、快打洗心)에서 빌려온 것으로 현역 시절에는 사인을 내릴 때 이 말을 덧붙이는 때가 많았지만 감독 시절의 사인에는 ‘쾌타’를 떼고 ‘세심’ 또는 ‘세’까지 떼고 ‘심’이라는 말을 사인에 덧붙이곤 했다. 현역 시절에는 화가인 하야시 다케시와 교류하면서 여러 차례 하야시의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배웠고 하야시의 ‘아카후지’(赤富士)를 여러 장 갖고 자기 집에 장식품으로 걸어 뒀다. 화가 기누타니 고지와도 친분이 있어 2001년에 ‘신세기 생명 후지’(新世紀生命富士)라는 그림을 합작으로 그린 바 있다.

1961년 10월 3일자 아사히 신문의 ‘내가 기자라면’이라는 인터뷰 기사에 다음과 같은 한 구절이 실리면서 물의를 빚었다.

뭐니뭐니해도 저희는 보수당 편이니까요. 사회당 천하가 되면 야구, 야구하면서 그쪽에 신경 쏟을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니까요. (진심으로 그렇게 여기는 말투)하지만 이쪽만 활성화된다고 완전 틀려먹었다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죠?[68]

1982년 9월, 바티칸 시국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했고 1988년 3월에 바티칸 유공 십자훈장을 수여했다. 현역 시절부터 언론에 드러나지 않는 형태로 사회복지활동에 참여했던 것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또 대학 시절에는 기타하라 사토코와도 친분을 맺었다.

니우라 히사오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할 당시 적극 힘을 보탰다는 감사의 뜻으로 삼성 구단주로부터 진돗개를 선물받았다. 진돗개는 수입 금지 품목이었지만 초법규적 조치 덕분에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교우 관계[편집]

  • 나가시마는 자택 외에도 여러 곳에 부동산을 소유(이러한 부동산 관리가 나가시마의 개인 사무소인 ‘오피스 N’의 주요 업무)하고 있다. 정치가들 사이에 “세타가야에 살면 출세한다”라는 말이 나돌았던 탓에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나가시마 소유의 세타가야 구 가미키타자와의 집(현역 시절 덴엔초후로 이사하기 전에 살던 집)을 빌려 1980년대 초부터 2001년까지 거주하고 있었다(내각총리대신 시절에는 총리대신 공관에 일시적으로 이사). 나카소네가 내각총리대신으로 지명됐던 날 아침에 이 집 현관에 나카소네와 나가시마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뉴스에도 보도되었다.
  • 대학 4학년 때 기후 현립 기후 상업고등학교 야구부에 코치로 발탁돼 당시 1학년이었던 다카기 모리미치를 지도했다. 나가시마는 다카기의 재능을 간파하고 감독에게 다카기를 주전 선수로 기용할 것을 감독에게 추천하였는데 그 결과 다카기는 곧바로 주전 선수로 발탁하여 팀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69] 또 원래 유격수였던 다카기를 2루수 전향도 감독에게 제안했다고 한다. 후에 다카기와는 ‘10월 8일 결전’에서 같은 감독으로서 맞대결을 펼쳤다.
  • 이시하라 유지로와는 친구 사이이며 1962년 1월에 미국으로 여행을 함께 떠났다. 그 때 나가시마가 기내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승무원으로부터 ‘No Smoking!’이라는 주의를 받자마자 자신의 팔에 담배꽁초를 눌러 불을 끄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시하라는 곧잘 이 일을 이야깃거리로 삼았다.[70] 또 이시하라와 같이 부업으로 요쓰야에 레스토랑을 개업했던 적도 있다. 이시하라는 1959년에 나가시마의 응원가 ‘남자의 우정 등번호 3’을 발표했는데 2000년에 ‘밀레니엄 버전’으로서 재발매됐다.
  • 빌리 마틴과도 막역한 사이로 그가 쓴 저서에도 자주 등장했다.
  • 나가시마에게 따라붙었던 유명한 담당기자로 사토 야스히로와 신구 마사하루가 있다.
  • 나가시마의 제2차 감독 시절에는 나가시마를 후원하는 모임인 ‘반짝반짝회’가 설립되었다. 대변인은 와타나베 쓰네오이며, 회원은 도쿄전력히라이와 가이시, 아사히 맥주히구치 히로타로, 소니모리타 아키오 등이다.
  • 독특한 캐릭터를 지닌 나가시마의 성대모사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세키네 쓰토무는 지금까지도 나가시마의 성대모사를 단골 소재로 삼고 있다. 그리고 나가시마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현지 지바 현의 수도국을 퇴사하여 탤런트로 변신한 프리티 나가시마는 예능 활동 덕분에 이치카와 시에 집을 장만한 데 이어 2007년에는 시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심지어 2011년에는 지바 현의회 의원직에까지 올랐다.

사인 파기에서부터 사인 없음까지[편집]

대우가 언제쯤 달라졌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1964년 8월 6일에 발생한 히로오카 다쓰로의 경기 도중 귀가 사건(히로오카가 타석에 들어섰을 때 나가시마가 홈스틸을 감행했는데 이를 사인 플레이로 착각한 히로오카가 당시 감독이던 가와카미 데쓰하루에게 비난을 한 뒤 경기 중에도 불구하고 돌연 귀가한 사건) 이전에 이미 대우가 바뀌었다.

히로오카는 훗날 자신의 저서 《감독론》에서 당시의 플레이를 사인 플레이로 오해했다는 점, 예전에도 나가시마가 홈스틸을 하는 바람에 화가 났다는 점 등을 이야기하면서 나가시마의 특별 대우 건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나가시마 시게오 구장[편집]

1985년 10월부터 일본 트라이애슬론 연맹의 회장을 맡아 매년 구마모토 현 아마쿠사에서 열리고 있던 트라이애슬론 국제 대회의 스타터를 맡고 있었다. 그 인연으로 대회의 스타트 지점인 혼도 시(현재의 아마쿠사 시)에 있는 시영 히로세 구장(1989년 완공)을, 1991년에 나가시마 시게오 구장(長嶋茂雄球場)으로 변경해 나가시마의 업적을 기리게 되었다.

나가시마 게이트[편집]

1980년에 감독직에서 물러났지만 선수 시절의 업적과 활약상을 기려 그 후 고라쿠엔 구장이 폐장되는 1987년까지 3번 게이트는 ‘나가시마 게이트’(長嶋ゲート)라고 불리었다. 또한 고라쿠엔 구장이 폐장할 때는 선수 시절에 요미우리의 3루수로서 활약한 것에 것에서 고라쿠엔 구장의 3루 베이스도 기증되었다. 도쿄 돔이 완공된 후 이 게이트의 이름은 잠시 없어졌지만, 1998년에 개장 10주년을 기념하여 3번 게이트는‘나가시마 게이트’로서 부활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골프 대회의 관명[편집]

나가시마는 프로 야구를 시작으로 일본 스포츠계의 활성화에 주력해왔지만 ‘나가시마 재팬 드림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세가 새미 홀딩스에서 이 회사가 주최하는 세가 새미컵 골프 토너먼트 대회의 명예회장 취임 요청을 받아 2007년부터 대회를 ‘나가시마 시게오 Invitational 세가 새미컵 골프 대회’로서 열리게 되었다. 나가시마는 시상식을 시작으로 한 기간 중의 이벤트에 매년 참석하고 있다. 지금까지 일본의 남자 골프 대회에서는 나카무라 도라키치를 기리는 ‘닛케이컵 나카무라 도라키치 메모리얼’이 있었지만 골퍼 이외의 저명인사가 들어간 대회명에 들어가는 것은 처음이다.

인품·성격[편집]

자신의 성격에 대해 나가시마는 “성급하긴 하지만 일을 내팽개치지는 않는다.[2]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씩 꾸준히 계속하는 게 나의 습성이다.[2] 매일 조금씩이라도 쌓아 올려가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2]” 라고 말했다.

그 외[편집]

인간어뢰 가이텐 관련 자료 등이 전시돼 있는 야마구치 현 슈난 시에 위치한 ‘가이텐 기념관’의 부지 내에는 나가시마 시게오의 휘호가 들어간 영령 진혼비가 세워져 있다.[71]

좋아하는 역사적 인물은 니노미야 손토쿠(긴지로)[2]인데 나가시마가의 마당에는 니노미야 긴지로의 석상이 있다.[2] 나가시마에 따르면 “호우 피해 관련 뉴스를 신문과 TV에서 보고 한숨 지으며 집 마당에 눈길을 주면 긴지로의 석상이 눈에 들어온다.[2] 그 모습을 보고 분발하고 있다[2]”라고 말했다.

가족·친족[편집]

생가는 농가였고[2] 아버지는 우스이 정 사무소의 회계 담당 책임자나 조역을 맡고 있었지만 1954년에 급사했다. 당시 아버지의 사인을 두고 심장병으로 사망했는지, 뇌일혈로 사망했는지에 대한 관련 문헌이 나오기도 했다. 어머니는 1994년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1964년 10월, 호치 신문이 ‘ON 올림픽을 간다’라는 기획으로 도쿄 올림픽의 컴패니언 몇 사람과 대담을 나누고 있을 때 그 중 나가시마 아키코(본명 니시무라 아키코)에게 첫 눈에 반하여 같은 해 1964년 11월 26일에 약혼, 이듬해인 1965년 1월 26일에 결혼해 2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야생아 교육’이라고 불리는 극도의 방임주의로 아이들을 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남은 나가시마 가즈시게(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 대표 특별 보좌), 둘째 딸은 나가시마 미나(전 TV 아사히 스포츠국 기자), 차남은 나가시마 마사오키(카레이서)이다. 가정을 교육면에서 칸막이 역할을 하고 있던 아키코는 2007년에 만성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상세 정보[편집]

출신 학교[편집]

선수 경력[편집]

지도자·기타 경력[편집]

  • 요미우리 자이언츠 코치 겸임(1972년 ~ 1974년)
  •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1975년 ~ 1980년, 1993년 ~ 2001년)
  • 호치 신문 객원 해설위원(1981년 ~ 1992년)
  • 요미우리 자이언츠 종신 명예감독(2001년 9월 ~ )
  • 아테네 올림픽 일본 국가대표팀 감독(2003년 ~ 2004년)

수상·타이틀 경력[편집]

타이틀[편집]

  • 수위 타자 : 6회(1959년 ~ 1961년, 1963년, 1966년, 1971년)[72]
  • 홈런왕 : 2회(1958년, 1961년)
  • 타점왕 : 5회(1958년, 1963년, 1968년 ~ 1970년)
  • 최다 안타(당시는 타이틀이 아님) : 10회(1958년 ~ 1963년, 1966년, 1968년, 1969년, 1971년)[73]

수상[편집]

개인 기록[편집]

첫 기록[편집]

  • 첫 출장·첫 선발 출장 : 1958년 4월 5일, 대 고쿠테쓰 스왈로스 1차전(고라쿠엔 구장), 3번·3루수로서 선발 출장
  • 첫 안타 : 1958년 4월 6일, 대 고쿠테쓰 스왈로스 3차전(고라쿠엔 구장), 4회말에 미쓰바야시 세이지로부터 중월 2루타
  • 첫 타점 : 1958년 4월 9일, 대 다이요 웨일스 2차전(고라쿠엔 구장), 8회말에 아키야마 노보루로부터 우중간에 2점 적시 2루타
  • 첫 홈런 : 1958년 4월 10일, 대 다이요 웨일스 3차전(고라쿠엔 구장), 3회말에 곤도 마사토시로부터 좌월 2점 홈런

기록 달성 경력[편집]

  • 통산 100홈런 : 1961년 10월 6일, 대 고쿠테쓰 스왈로스 26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9회초에 다쓰미 하지무로부터 좌월 솔로 홈런 ※역대 23번째
  • 통산 150홈런 : 1963년 8월 4일, 대 다이요 웨일스 18차전(가와사키 구장), 3회초에 스즈키 다카시로부터 좌월 선제 솔로 홈런 ※역대 15번째
  • 통산 1000안타 : 1964년 6월 20일, 대 고쿠테쓰 스왈로스 18차전(고라쿠엔 구장), 4회말에 사토 스스무로부터 우전 안타 ※역대 50번째
  • 통산 200홈런 : 1965년 5월 31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8차전(주니치 스타디움), 1회초에 나카야마 도시타케로부터 좌중간에 선제 2점 홈런 ※역대 11번째
  • 통산 1000경기 출장 : 1965년 8월 18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20차전(주니치 스타디움), 3번·3루수로서 선발 출장 ※역대 102번째
  • 통산 250홈런 : 1967년 8월 14일, 대 산케이 아톰스 19차전(고라쿠엔 구장), 1회말에 시부타니 세이지로부터 좌월 선제 결승 3점 홈런 ※역대 6번째
  • 통산 1500안타 : 1967년 9월 17일, 대 산케이 아톰스 25차전(고라쿠엔 구장), 6회말에 이시도 시로쿠로부터 우중간에 2점 적시 3루타 ※역대 20번째
  • 통산 300개의 2루타 : 1968년 8월 14일, 대 한신 타이거스 18차전(고라쿠엔 구장), 6회말에 진 바크로부터 우중간 2루타 ※역대 7번째
  • 통산 3000루타 : 1969년 4월 27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2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7회초에 오바 스스무로부터 우중간 2루타 ※역대 6번째
  • 통산 1000타점 : 1969년 5월 4일, 대 다이요 웨일스 5차전(고라쿠엔 구장), 9회말에 히라마쓰 마사지로부터 우월 동점 희생 플라이 ※역대 6번째
  • 통산 300홈런 : 1969년 5월 22일, 대 산케이 아톰스 9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1회초에 후지와라 마코토로부터 우중간 솔로 홈런 ※역대 4번째
  • 통산 1500경기 출장 : 1969년 8월 17일, 대 다이요 웨일스 16차전(고라쿠엔 구장), 4번·3루수로서 선발 출장 ※역대 29번째
  • 통산 1000득점 : 1970년 10월 6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21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7회초에 도이 쇼조의 중전 결승 적시타로 홈인 ※역대 8번째
  • 통산 350개의 2루타 : 1970년 10월 18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25차전(고라쿠엔 구장), 7회말에 소토코바 요시로로부터 좌중간 2루타 ※역대 5번째
  • 통산 3500루타 : 1971년 4월 11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2차전(고라쿠엔 구장), 3회말에 소토코바 요시로로부터 좌전 안타 ※역대 4번째
  • 통산 350홈런 : 1971년 4월 14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3차전(주니치 스타디움), 9회초에 쓰치야 히로시로부터 좌월 솔로 홈런 ※역대 3번째
  • 통산 2000안타 : 1971년 5월 25일, 대 야쿠르트 아톰스 9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8회초에 아사노 게이지로부터 좌전 안타 ※역대 5번째
  • 통산 400홈런 : 1972년 6월 22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15차전(주니치 스타디움), 8회초에 와코 가즈야로부터 좌월 2점 홈런 ※역대 3번째
  • 통산 4000루타 : 1973년 4월 17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1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2회초에 시라이시 시즈오로부터 좌중간 펜스를 직격한 2루타 ※역대 3번째
  • 통산 400개의 2루타 : 1973년 9월 8일, 대 다이요 웨일스 22차전(가와사키 구장), 4회초에 야마시타 리쓰오로부터 좌중간 2루타 ※역대 4번째
  • 통산 2000경기 출장 : 1973년 9월 16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17차전(고라쿠엔 구장), 4번·3루수로서 선발 출장 ※역대 6번째
  • 통산 1500타점 : 1974년 8월 6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14차전(주니치 스타디움), 5회초에 시부야 유키하루로부터 우전 2점 적시타 ※역대 3번째

정규 시즌[편집]

  • 시즌 타율 3할대 이상 : 11회(1958년 ~ 1961년, 1963년 ~ 1966년, 1968년, 1969년, 1971년) ※역대 5위 타이 기록이며 우타자로서는 역대 1위 타이 기록
  • 시즌 150안타 이상 : 11회(1958년 ~ 1963년, 1965년, 1966년, 1968년, 1969년, 1971년) ※일본 기록
  • 타격 10위권 진입 : 13회(1958년 ~ 1966년, 1968년 ~ 1971년) ※역대 4위이며, 우타자로서는 역대 1위이다.
  • 시즌 2루타 갯수 리그 1위 : 3회(1958년, 1961년, 1962년) ※센트럴 리그 타이 기록
  • 시즌 20홈런을 도달한 경기수 : 42경기(1968년) ※역대 4위이며, 2001년 알렉스 카브레라(38경기)에 의해 경신될 때까지는 역대 1위
  • 6년 연속 시즌 150안타 이상(1958년 ~ 1963년) ※역대 4위 타이 기록이며, 2003년 마쓰이 가즈오에 의해 경신될 때까지는 역대 1위
  • 17년 연속 시즌 100안타 이상(1958년 ~ 1974년) ※역대 4위 타이 기록 수립, 입단 1년차부터의 기록에서는 센트럴 리그 기록(역대로는 하리모토 이사오에 이어 2위)
  • 2년 연속 시즌 30개의 고의사구 이상(1960년 ~ 1961년) ※일본 타이 기록
  • 6경기 연속 고의사구 : 2회(1958년 9월 7일 ~ 9월 15일, 1961년 8월 16일 ~ 8월 22일) ※일본 기록
  • 4경기 연속 3루타(1960년 5월 8일 ~ 5월 14일) ※일본 기록
  • 시즌 수비 기회 연속 무실책 : 214차례(1969년 7월 17일 ~ 10월 9일) ※3루수로서의 일본 기록
  • 5년 연속 개막전 홈런(1970년 ~ 1974년) ※일본 기록
  • 통산 개막전 홈런 : 10개(1959년, 1960년, 1963년 2개, 1968년, 1970년 ~ 1974년) ※일본 기록
  • 통산 끝내기 안타 : 14개 ※역대 4위 타이 기록이며, 센트럴 리그에서의 우타자 기록
  • 통산 끝내기 홈런 : 7개(1959년, 1961년, 1962년, 1963년, 1966년, 1973년) ※역대 6위 타이 기록이며, 센트럴 리그에서의 우타자 기록
  • 통산 맹타상 : 186회 ※센트럴 리그 기록
  • 통산 2000안타 도달 속도 : 1708경기(1971년 5월 25일) ※역대 2위이며, 우타자로서는 역대 1위

일본 시리즈[편집]

  • 통산 경기 출장 : 68경기(1958년, 1959년, 1961년, 1963년, 1965년 ~ 1972년) ※역대 5위
  • 통산 타율 : .343(265타수 91안타) ※100타수 이상에서는 역대 2위이며, 160타수 이상에서는 역대 1위
  • 통산 타수 : 265타수 ※역대 1위
  • 통산 득점 : 49득점 ※역대 2위
  • 통산 안타 : 91안타 ※역대 1위
  • 통산 2루타 : 14개 ※역대 1위
  • 통산 3루타 : 2개 ※역대 5위 타이 기록
  • 통산 홈런 : 25홈런 ※역대 2위
  • 통산 루타 : 184루타 ※역대 1위
  • 통산 장타 : 41개 ※역대 1위
  • 통산 타점 : 66타점 ※역대 1위
  • 통산 볼넷 : 27개 ※역대 5위
  • 시리즈 타율 4할대 이상 : 4회(1966년, 1968년 ~ 1970년) ※시리즈 기록
  • 시리즈 4개 홈런(1969년, 1970년) [75]
  • 연속 타석 홈런 : 3개(1970년) ※시리즈 기록

올스타전[편집]

  • 입단 첫 해부터 은퇴할 때까지 현역 선수로서는 17년 연속 팬 투표 1위로 선정
  • 출장 횟수 : 16회(1958년 ~ 1963년, 1965년 ~ 1974년) [76]
  • 통산 타율 : .313(150타수 47안타) ※100타수 이상에서는 역대 5위, 130타수 이상에서는 역대 1위
  • 통산 안타 : 47개 ※역대 2위 타이
  • 통산 2루타 : 10개 ※역대 2위
  • 통산 볼넷 : 17개 ※역대 2위
  • 통산 도루 : 8개 ※역대 3위

기타[편집]

  • 정규 시즌, 일본 시리즈, 올스타전 모두 통산 3할대 이상의 타율을 기록하였음(가장 유일).

등번호[편집]

  • 3(1958년 ~ 1974년, 2000년 ~ 2001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영구 결번.
  • 90(1975년 ~ 1980년)
  • 33(1993년 ~ 1999년)

연도별 타격 성적[편집]

연도 소속




2

3





도루
실패
희생
번트
희생
플라이

고의
사구
몸에
맞는 볼








O
P
S
1958년 요미우리 130 550 502 89 153 34 8 29 290 92 37 10 1 6 36 15 5 53 3 .305 .353 .578 .931
1959년 124 526 449 88 150 32 6 27 275 82 21 6 0 3 70 17 4 40 9 .334 .426 .612 1.038
1960년 126 524 452 71 151 22 12 16 245 64 31 12 0 2 70 32 0 28 8 .334 .422 .542 .964
1961년 130 543 448 84 158 32 9 28 292 86 14 11 1 5 88 35 1 34 14 .353 .456 .652 1.108
1962년 134 584 525 69 151 38 5 25 274 80 18 7 0 3 51 7 5 61 14 .288 .354 .522 .876
1963년 134 577 478 99 163 28 6 37 314 112 16 3 0 10 86 18 3 30 14 .341 .437 .657 1.094
1964년 133 566 459 81 144 19 6 31 268 90 13 2 0 6 96 15 5 34 8 .314 .433 .584 1.017
1965년 131 560 503 70 151 23 5 17 235 80 2 6 0 5 50 12 2 42 16 .300 .363 .467 .830
1966년 128 543 474 83 163 31 3 26 278 105 14 7 0 8 58 14 3 39 17 .344 .413 .586 .999
1967년 122 515 474 65 134 25 3 19 222 77 2 3 0 3 37 4 1 37 24 .283 .334 .468 .802
1968년 131 569 494 80 157 21 4 39 303 125 8 3 1 5 66 12 3 74 19 .318 .398 .613 1.011
1969년 126 546 502 71 156 23 2 32 279 115 1 1 0 4 38 1 2 58 15 .311 .359 .556 .915
1970년 127 525 476 56 128 22 2 22 220 105 1 2 0 9 40 1 0 52 15 .269 .320 .462 .782
1971년 130 547 485 84 155 21 2 34 282 86 4 3 0 1 59 8 2 45 20 .320 .395 .581 .976
1972년 125 520 448 64 119 17 0 27 217 92 3 2 0 8 63 11 1 34 23 .266 .352 .484 .836
1973년 127 530 483 60 130 14 0 20 204 76 3 2 1 8 37 3 1 35 20 .269 .318 .422 .740
1974년 128 476 442 56 108 16 1 15 171 55 2 1 1 4 24 0 5 33 18 .244 .288 .387 .675
통산 : 17년 2186 9201 8094 1270 2471 418 74 444 4369 1522 190 81 5 90 969 205 43 729 257 .305 .379 .540 .919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연도별 타격 성적 소속 리그내에서의 순위[편집]

연도 연령 소속 리그 타격 타이틀 횟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도루 출루율 장타율 OPS
1958 22 센트럴 리그 2 2위 1위 1위 2위 1위 1위 2위 5위 1위 2위
1959 23 1 1위 1위 2위 11위 3위 4위 7위 1위 1위 1위
1960 24 1 1위 1위 8위 1위 7위 6위 2위 1위 1위 1위
1961 25 2 1위 1위 1위 2위 1위 2위 8위 1위 1위 1위
1962 26 0 6위 1위 1위 3위 2위 2위 3위 6위 2위 2위
1963 27 2 1위 1위 2위 1위 2위 1위 9위 2위 1위 1위
1964 28 0 4위 6위 19위 4위 3위 4위 12위 2위 2위 2위
1965 29 0 5위 2위 4위 3위 8위 2위 - 4위 7위 5위
1966 30 1 1위 1위 2위 10위 2위 2위 7위 2위 2위 2위
1967 31 0 12위 6위 6위 11위 9위 6위 - 14위 11위 13위
1968 32 1 2위 1위 13위 10위 3위 1위 16위 2위 2위 2위
1969 33 1 3위 1위 5위 11위 4위 1위 - 5위 4위 3위
1970 34 1 10위 5위 6위 15위 5위 1위 - 12위 4위 5위
1971 35 1 1위 1위 4위 15위 2위 2위 - 2위 2위 2위
1972 36 0 - 16위 19위 - 5위 3위 - 11위 7위 8위
1973 37 0 12위 9위 20위 - 6위 4위 - 19위 11위 13위
1974 38 0 - - 18위 - 18위 14위 - - - -
  • ‘-’는 20위 미만

연도별 수비 성적[편집]

연도 3루 유격 외야
경기 척살 보살 실책 병살 수비율 경기 척살 보살 실책 병살 수비율 경기 척살 보살 실책 병살 수비율
1958 130 129 385 25 31 .954 - -
1959 123 103 370 15 25 .969 - -
1960 123 92 362 19 30 .960 10 14 24 2 4 .950 -
1961 129 125 369 16 30 .969 8 12 17 1 4 .967 -
1962 134 120 341 15 29 .968 - 1 0 0 0 0 -
1963 132 114 374 13 33 .974 - -
1964 133 118 385 16 30 .969 - -
1965 131 117 317 14 24 .969 - -
1966 127 109 314 14 20 .968 - -
1967 121 88 274 13 29 .965 - -
1968 131 111 285 19 31 .954 - -
1969 126 109 305 12 22 .972 - -
1970 127 88 256 19 8 .948 - -
1971 129 79 262 14 21 .961 - -
1972 124 103 237 10 28 .971 - -
1973 127 96 279 12 25 .969 - -
1974 125 66 210 15 18 .948 - -
통산 2172 1767 5325 261 434 .965 18 26 41 3 8 .957 1 0 0 0 0 -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올스타전 통산 타격 성적[편집]

경기 타수 득점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루타 타점 도루 도루실패 희생번트 희생플라이 볼넷 고의사구 死구 삼진 병살타 타율
43 150 21 47 10 0 7 78 21 8 3 0 1 17 0 0 13 6 .313

일본 시리즈 통산 타격 성적[편집]

경기 타수 득점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루타 타점 도루 도루실패 희생번트 희생플라이 볼넷 고의사구 死구 삼진 병살타 타율
68 265 49 91 14 2 25 184 66 3 6 0 3 27 1 1 21 5 .343
  • 굵은 글씨는 일본 시리즈 역대 최고 성적.

감독으로서의 팀 성적[편집]

연도 소속 순위 경기 승리 패전 무승부 승률 승차 팀 홈런 팀 타율 팀 평균자책점 연령
1975년 요미우리 6위 130 47 76 7 .382 27 117 .236 3.53 39세
1976년 1위 130 76 45 9 .628 - 167 .280 3.58 40세
1977년 1위 130 80 46 4 .635 - 181 .280 3.48 41세
1978년 2위 130 65 49 16 .570 3 136 .270 3.61 42세
1979년 5위 130 58 62 10 .483 10.5 154 .259 3.85 43세
1980년 3위 130 61 60 9 .504 14 153 .243 2.95 44세
1993년 3위 131 64 66 1 .492 16 105 .238 3.22 57세
1994년 1위 130 70 60 0 .538 - 122 .258 3.41 58세
1995년 3위 131 72 58 1 .554 10 139 .252 3.40 59세
1996년 1위 130 77 53 0 .592 - 147 .253 3.47 60세
1997년 4위 135 63 72 0 .467 20 150 .251 3.69 61세
1998년 3위 135 73 62 0 .541 6 148 .267 3.74 62세
1999년 2위 135 75 60 0 .556 6 182 .265 3.84 63세
2000년 1위 135 78 57 0 .578 - 203 .263 3.34 64세
2001년 2위 140 75 63 2 .543 3 196 .271 4.45 65세
통산 : 15년 1982 1034 889 59 .538 A클래스 : 12회, B클래스 : 3회
  1. 1975년부터 1996년까지는 130경기제.
  2. 1997년부터 2000년까지는 135경기제.
  3. 2001년부터 2004년까지는 140경기제.
  • 순위에서 굵은 글씨는 일본 시리즈 우승.

저서[편집]

그 외 다수.

주석[편집]

  1. 1993년 경에 요미우리의 감독 취임(두 번째) 이전까지는 신문이나 매스컴의 상용 한자가 아닌 다른 자체의 ‘시마’() 라는 글자가 별로 사용되지 않고 ‘나가시마’(長島) 라는 성의 표기가 사용되었된 적도 있었다.
  2. 第13回災害の年に向き合う日本の心は - 세콤, 2011년 10월 3일, ‘어른의 안심 클럽’중에서
  3. 《100인의 20세기(하)》- (61)나가시마 시게오(니시무라 긴야 저), 2001년, 아사히 분코, p.111
  4. 사와키 고타로 저 《3인의 3루수》(《지지 않는 사람들》 수록)
  5. 《100인의 20세기(하)》- (61)나가시마 시게오(니시무라 긴야 저), 2001년, 아사히 분코, p.107
  6. 《100인의 20세기(하)》- (61)나가시마 시게오(니시무라 긴야 저), 2001년, 아사히 분코, p.107 ~ 108
  7. 《100인의 20세기(하)》- (61)나가시마 시게오(니시무라 긴야 저), 2001년, 아사히 분코, p.108
  8. 《100인의 20세기(하)》- (61)나가시마 시게오(니시무라 긴야 저), 2001년, 아사히 분코, p.109
  9. 스나오시에게서 특별 대우를 받고 있던 나가시마는 선배들한테서 미움을 받아 사사건건 ‘지도’라는 이름의 폭력을 당하고 있었다. 연대 책임이라는 방식으로 나가시마와 같이 입단했던 동기생 전원에게 피해가 갔던 적도 적지 않았다.
  10. 다이에이 스타스 구단주인 나가타 마사이치가 졸업 후의 스카웃을 노리고 대학 1학년 때의 나가시마와 집에서 면회하여 “우승할 팀에서 야구하고 싶다”라고 말한 사실을 NHK TV의 《그 때 역사가 움직였다》(2005년 2월 9일 방송)에서 소개된 적이 있었다.
  11. 한신 타이거스의 스카우트였던 아오키 이치조는 대학을 중퇴시키고서의 스카웃을 바라고 본인과 가족에게 교섭했지만(《여기만의 이야기 프로 야구 이놈이나 저놈이나…》북맨샤, 1989년, p.176 ~ 178) 후지무라 배척 사건 때문에 실패하였다.
  12. 히로시마 카프도 나가시마를 히로시마 관광에 초대하기도 하였다.
  13. 《난카이 호크스 40년사》(1978년) p.163
  14. 나가시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행상을 하는 등의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어머니를 매우 존경하고 있어 어머니의 간절한 바램을 거절할 수 없었다고 한다.
  15. 주위에서 붙여준 별명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를 자칭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6. 그 후 나가시마는 가네다와 여러 차례 상대하면서 통산 전적은 타율 3할 1푼 3리, 18홈런을 기록했다.
  17. 【9月19日】1958年(昭33) ミスター、幻の28号本塁打でトリプルスリーを逃す - 스포츠 닛폰, 2007년 9월 19일
  18. 이 경우에서의 나가시마는 2루를 밟은 순간에 1루를 다시 밟는 것이 허용되지 않게 되면서(공인야구규칙 7.10(b)(2)) 투수가 공을 가진 채로 플레이가 시작된 후 투수가 초구를 던지기 전에 1루수 후지이 히로무가 송구를 요구하여 투수 우가리 미치오에게서 송구를 받아 누상에 터치하고 심판에게 어필해 1루심 다케모토 가쓰오가 아웃을 선언했다. 이 경우, 투수에게는 보살, 1루수에게 척살이 기록돼 기록상 투수앞 땅볼과는 똑같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 소년 시절에 이 천황 참관 경기를 TV로 관전하고 있던 사와키 고타로는 자신의 저서 《3인의 삼루수》(1975년)에서 “(나가시마는)어린이에게도 즉석에서 이해할 수 있는 영웅이었다”라고 적고 있다.
  20. 마쓰시타 시게노리 저 《그 날, 야구의 신은 ‘등번호 3’을 선택한 - 천황 참관 경기 쇼와 34년 6월 25일》
  21. 《Sports Graphic Number》, 명승부 열전
  22. 《Sports Graphic Number》, 명승부 열전
  23. 이하라 히데오 저 《올바른 기술 이기는 작전의 요령 야구 규칙》 (유키쇼보, 1987년) p64 ~ 65. 공인야구규칙의 6·02a(타자의 의무)에서는 타자는 자신의 타순이 오면 즉시 타석으로 들어가 타격 자세를 취해야만 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방망이를 들고” 라는 표현이 명기되어 있지 않았다. 이 때 당시 주심은 나가시마가 방망이를 들지 않고 있어도 맨손으로 자세를 취했기 때문에 타격 자세를 취한 것으로 간주하여 볼넷 판정을 내렸지만 방망이를 들고 있지 않으면 투수의 투구를 치는 것은 불가능하여 이하라는 나가시마의 이러한 행위에 대해 주심에 따라서는 타격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고 간주될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을 위의 책에서 지적하고 있다. 또한 타자가 타격 자세를 취하려고 하지 않는 경우 주심은 투수에게 투수를 지시하고, 어떠한 투구가 오더라도 스트라이크를 선언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만약 주심이 타격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고 간주했을 경우 맨손으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상 투구는 전부 스트라이크가 되어, 스트라이크를 3회 선언될 때까지 타자가 타격자세를 취하지 않았을 때는 아웃이 선언된다.
  24. 《야구는 인생 그 자체다》(나가시마 시게오 저)의 내용 중 ‘은퇴 권고’에서 이렇게 밝혀졌다.
  25. 《분슌 비주얼 문고 - ‘열투! 프로 야구 30번 승부’》, 분게이슌주
  26. [1] 은퇴 경기 다음날 호치 신문에서는 기사 내용 중에 “영원히”라고 잘못 인용되었다(‘我が巨人軍は永久に不滅です’, 2010년 7월 29일)
  27. 관련 내용
  28. 2000년 ~ 2001년에는 나가시마 본인의 사용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해제되었다.
  29. 당시 90번이라는 등번호가 일본 프로 야구 선수(지배하 등록자) 및 감독·코치 중에서는 가장 큰 숫자이며 이 번호를 붙인 것은 나가시마가 처음이었다. 이 때문인지 제1기 감독 시절에는 나가시마를 가리키는 말로서 언론에서는 이 ‘90번’을 신문 기사나 TV의 제목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30. 전쟁 전에 요미우리에서 활약한(당시 구단명은 도쿄 교진군) 빅토르 스타루힌은 러시아계 일본인이지만 일본에서 학교를 다닌 적이 있었다. 여기에는 ‘학력까지 포함하고 외국에서 자란 비일본계의 외국인 선수’로서 처음으로 말하는 의미이다.
  31. 《프로야구당》(일본 스포츠사, 1977년), 히로오카와의 인터뷰에서
  32. 오다 준타로 저 《20세기 완전판 나가시마 시게오 대사전》(2001년 신초 출판사 OH! 문고)
  33. 오다 준타로 저 《20세기 완전판 나가시마 시게오 대사전》(2001년 신초 출판사 OH! 문고)
  34. 日本프로야구 영웅 나가시마 한국 프로야구 앞길밝다 - 경향신문, 1982년 1월 27일
  35. 당시 일본 국내에 여러 있던 트라이애슬론 단체의 하나로 후에 일본 트라이애슬론 연합에 통폐합되었다.
  36. 1963년 가와카미 데쓰하루가 감독으로서 라이온스를 누르고 일본 시리즈 우승 달성에 성공했는데 당시 세이부의 전신은 ‘니시테쓰 라이온스’였다.
  37. 나가시마 시게오 저 《야구는 인생 그 자체다》(니혼케이자이 신문 출판사)
  38. 현역 은퇴 전후 즈음에도 같은 발언을 한 적이 있어 “야구라는 스포츠는 인생 그 자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실의와 득의, 성공과 실패가 항상 마주하고 있습니다. 승자가 웃고있는 그 그림자 뒤에는 항상 패자가 있습니다. 영광의 그늘에는 수많은 좌절이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사와키 고타로 저 《3인의 3루수》).
  39. 《베이스볼 매거진》 2005년 동계호, p.130
  40. 올림픽 본선을 위한 팀 편성을 추진하여 정식 경기가 된 이후 아직도 이루지 못한 우승(금메달)으로의 기대와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도중에 발병했다. 2007년 베이징 올림픽 일본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써 본 대회의 출전권을 따낸 호시노 센이치가 나가시마를 방문했을 때 나가시마는 “다른 대회랑은 승패의 무게가 다르다. 역시 히노마루(일본의 국기)의 무게겠지” 라고 말해 대표감독의 중압감을 위로했다(관련 출처 : 요미우리 신문 2007년 12월 5일자, ‘호시노 감독 등 나가시마 아테네 올림픽 대표팀 감독에게 올림픽 출전권 획득을 보고’).
  41. 후에 나가시마는 아가와 사와코와의 대담에서 “(의식은)없었다. 이미 (상태는)상중하 중의 하로 제일 안 좋았으니까 그 아래는 죽음이었다”라고 말했다(아가와 사와코, 2011년).
  42. 나가시마는 가즈시게의 판단에 대해 “제일 상태가 안 좋을 때였으니까요”라고 이해한다는 뜻을 표하면서도 누가 뭐라고 하든 아테네에 가려고 했던 결심이 무산된 것에 대한 충격과 고독감을 토로했다(아가와 사와코, 2011년)
  43. 2010년까지 매년 1월에 개최되고 있었다.
  44. 이 내용은 2011년에 단행본으로 발간하였다(아가와 사와코, 2011년)
  45. 관련 기사 - 스포니치
  46. 長嶋茂雄、松井秀喜両氏に国民栄誉賞 「社会に夢と希望与えた」 - 스포츠 닛폰, 2013년 4월 1일
  47. 長嶋茂雄、松井秀喜氏に国民栄誉賞 政府方針 (1/2ページ) - SankeiBiz, 2013년 4월 1일
  48. 内閣官房長官記者会見(平成25年4月1日(月)午後) - 수상 관저 홈페이지, 2013년 4월 1일
  49. 長嶋、松井両氏 5月5日に東京Dで栄誉賞授与式 - 스포츠 닛폰, 2013년 4월 16일
  50. 松井秀喜氏引退式 ドームに立つことは「もう2度と許されないと思っていた」 - 스포츠 닛폰, 2013년 5월 5일
  51. 松井秀喜氏 国民栄誉賞受与式「光栄だが、同時に恐縮」 - 스포츠 닛폰, 2013년 5월 5일
  52. 松井カモン!長嶋さんがフルスイング披露へ 国民栄誉賞授与式 - 스포츠 닛폰, 2013년 5월 5일
  53. 長嶋茂雄氏への千葉県県民栄誉賞の授与について - 지바 현 공식 홈페이지, 2013년 4월 25일
  54. 長嶋茂雄さんへの県民栄誉賞表彰式を行いました - 지바 현 공식 홈페이지, 2013년 5월 31일
  55. 長嶋茂雄さん市民栄誉賞表彰式について - 지바 현 사쿠라 시 공식 홈페이지, 2013년 6월 15일
  56. 長嶋氏、市民栄誉賞を受賞「感謝します」 - 닛칸 스포츠, 2013년 7월 12일
  57. 분슌 비주얼 문고 《호구 열전》, 아다치 미쓰히로의 내용 중에서
  58. 분슌 비주얼 문고 《히어로 열전》, 곤도 히로시의 관련 내용 중에서
  59. 타자의 타율을 절대적인 수치가 아닌 상대적인 값으로 비교하기 위해 산출하는 값을 일컫는다.
  60. 분슌 Number 비디오 ‘열투! 한신 vs 요미우리 1200경기’
  61. 《다마키 마사유키 스포츠 저널리즘을 말한다》(고쿠시칸 대학 체육스포츠 과학학회 2003년)
  62. 《나가시마 시게오-영원 불멸의 100 전설》(테미스, 2000년)
  63. 다마키 마사유키의 저서 《프로 야구 대사전》(1990년, 신초분코)에서는 도큐 플라이어스히토코토 다주가 영화 《7인의 사무라이》에서 ‘사무라이’()라는 한자를 잘못 보고 ‘7인의 기다림’(七人のマチ)이라고 말한 적 있는데 여러 칼럼니스트가 다른 프로 야구 선수들한테까지 이런 실수를 억지로 끌어다 붙여 에피소드를 ‘창작’하여 그런 ‘피해’를 가장 많이 당한 사람이 나가시마일 것으로 짐작된다(p.470). 이 책에는 나가시마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들개》를 ‘노요시켄’(ノヨシケン)이라 읽었다는 얘기가 1979년의 어느 에세이에 실렸다는 예가 소개돼 있다(p.441).
  64. 관련 내용
  65. ミスターがTHEを「てへ」と読んだ伝説はウソと元報知記者 - NEWS 포스트세븐, 2013년 2월 25일
  66. 네지메 쇼이치 저 《나가시마가의 수수께끼》(1999년)
  67. 사토 유이치 저 《우리 스승 요도가와 나가하루와의 50년》(세이류 출판)
  68. 인용 중 괄호 안의 부분은 기자가 한 묘사였다. 당시는 전년도 1960년에 일어난 안보투쟁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던 시기로(나가시마도 인터뷰에서 “작년의 안보투쟁 때부터(인용자 주: 정치면에) 흥미를 가지게 됐습니다”라고 말했다) 정권 교체를 암시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69. 長嶋茂雄、引退 その日のミスターと周囲の人々 - 스포니치
  70. 나가시마의 편저 《야구는 격투기다》에서도 같은 내용의 발언이 게재되었다. 이 이야기는 이시하라를 통해서 배우들 사이에도 퍼져나가 가쓰 신타로도 역시 같은 책에서 이에 관한 발언을 하였다.
  71. 「人間魚雷」の回天記念館 - 2006년 9월호 Vol.394, 일본 자치체 노동조합 총연합
  72. 6차례는 센트럴 리그 기록이며, 3년 연속은 센트럴 리그 타이 기록이다.
  73. 6년 연속, 통산 10회 기록은 각각 일본 기록이며, 1994년부터 타이틀로 제정됨.
  74. 신인 때부터 은퇴할 때까지 현역 생활 모든 시즌에서의 베스트 나인 선정은 가장 유일하다.
  75. 시리즈 타이 기록, 1970년은 5경기 시리즈 기록이며, 2회 기록한 것은 나가시마 외에도 조지마 겐지(2000년, 2003년)가 기록하였다.
  76. 1964년에는 팬 투표로 선출되었지만, 갑작스런 부상으로 인해 출전을 포기했다.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