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시노 센이치
| 호시노 센이치 星野 仙一 Senichi Hoshino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No.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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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노 센이치(201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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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정보 | |
|---|---|
| 국적 | |
| 출신지 | 오카야마 현 구라시키 시 |
| 생년월일 | 1947년 1월 22일 (66세) |
| 신장 | 180 cm |
| 체중 | 83 kg |
| 선수 정보 | |
| 투구·타석 | 우투우타 |
| 수비 위치 | 투수 |
| 프로 입단 연도 | 1968년 |
| 드래프트 순위 | 1순위 |
| 첫 출장 | 1969년 4월 13일 |
| 마지막 경기 | 1982년 10월 12일 |
| 경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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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경력
감독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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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시노 센이치 | |
|---|---|
| 일본어식 한자 표기: | 星野 仙一 |
| 가나 표기: | ほしの せんいち |
| 외래어 표기법 표기: | 호시노 센이치 |
| 통용 표기: | 호시노 센이치 |
| 로마자: | Senichi Hoshino |
호시노 센이치(일본어:
선수 시절에는 주니치 드래건스의 투수로서 활약했고 현역 은퇴 후 NHK의 야구 해설위원을 거쳐 주니치·한신 타이거스의 감독을 역임했다. 감독 시절에는 주니치 2차례, 한신에서 1차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지만 모두 일본 시리즈에서 우승을 이끄는 데는 실패했다. 2008년에는 베이징 올림픽 야구 일본 대표팀의 감독을 맡았고, 2004년부터 2010년까지 한신 타이거스의 시니어 디렉터(SD)를 역임했다.
애칭은 ‘센 상’(仙さん).
목차 |
인물[편집]
프로 입단 전[편집]
고교 재학 당시 강호였던 오카야마 현립 구라시키 상업고등학교는 고시엔 대회 진출을 목표로 두었지만 예선을 돌파할 수 없었고 마지막 하계 대회인 히가시주고쿠 지역 대회 결승전에서는 요나고미나미 고등학교한테 패했다. 오카야마 현내 1학년 후배는 후의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의 에이스로 활약한 히라마쓰 마사지가 있어 고교 시절에도 직접 맞대결했던 적도 있다. 또,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활약한 마쓰오카 히로무는 고교 후배에 해당한다.
고교 졸업 후 메이지 대학 정치경제학부 경제학과에 진학하면서 1학년 때부터는 1군 멤버로서 활약해 도쿄 6대학 리그에서 통산 63경기에 등판해 23승 25패, 평균자책점 1.91, 199개의 탈삼진을 기록했고 2학년 추계 대회인 릿쿄 대학전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다. 그러나 ‘호세이 대학 3인방’이라고 알려진 다부치 고이치, 야마모토 고지, 도미타 마사루가 소속된 호세이 대학에게 막혀 한 번도 리그 우승을 이끌지는 않았다. 대학 1년 선배이자 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활약한 다카다 시게루가 있다.
대학 시절에는 시마오카 기치로 감독의 가르침을 받아 메이지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도 ‘아버지’ 또는 ‘메이지 대학 야구학부 시마오카학과 출신’이라고 표현하여 그 후 본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받았다.
선수 시절[편집]
1968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1순위로 지명을 받아 당시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이 이끄는 주니치 드래건스에게 입단, 소년 시절부터 한신 타이거스의 투수인 무라야마 미노루를 동경하고 있어 무라야마와 같은 등번호 11번을 착용하고 싶었지만 비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대신 숫자를 배로 늘린 22번을 희망했다. 주니치의 에이스 등번호인 20번으로 변경한 후에도 매우 애착이 있는 번호였다고 한다. 입단 3년차인 1971년에는 팔꿈치에 통증이 일어나면서 속구는 자취를 감추었지만 변화구를 구사해나가면서 선발과 구원 투수로서 활약했다. 1974년에는 시즌 10세이브를 기록하면서 최다 세이브(그 해에는 타이틀이 제정됨) 타이틀을 차지함과 동시에 최고의 투수에게 주어지는 사와무라 에이지상을 차지하는 등 요미우리의 10년 연속 리그 우승을 저지하여 팀은 20년 만에 리그 우승 달성에 기여했다.
대학 4학년 때 프로 야구 드래프트를 앞두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사이에 “다부치 고이치를 1순위로 지명할 수 없는 경우에 낙첨 1순위로서 지명한다”라는 사전 약속이 있었다. 그러나 요미우리는 고교생 투수였던 시마노 오사무를 1순위로 지명하자 이 사실을 전해들은 호시노는 “호시(ホシ)와 시마(シマ)를 잘못 말한게 아닌가”라고 했다고 한다. 이 일은 현역 시절부터 지도자 시절에 이르기까지 일관하는 ‘타도 요미우리’의 기본 입장을 형성시켰다고 한다. 통산 성적에서도 나가시마 시게오, 오 사다하루 등이 활약한 V9시대를 포함하는 요미우리를 상대하면서 35승 31패의 성적을 기록하는 등 ‘요미우리 킬러’로서 그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요미우리와의 전적에서 30승 이상을 기록한 투수 중에서 히라마쓰 마사지, 가와구치 가즈히사, 호시노가 있는데 그 중 최고 승률을 기록한 선수는 호시노였다.
요미우리 킬러와는 동시에 한신에게도 강한 면모를 보일 정도로 ‘한신 킬러’로서도 활약했는데 요미우리와의 전적을 웃도는 통산 36승을 한신전에서 기록했다. 1973년 10월 20일, 9년 만의 우승을 목표로 하는 한신과 상대하여 완투승을 따냈다.
진기한 플레이로 유명한 우노 마사루 헤딩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호시노가 마운드에 서있었는데[1] 우노 마사루의 실책에 의해서 득점을 허용했기 때문에 호시노는 홈베이스 후방에서 글러브를 내팽개쳤다. 그 당시 요미우리는 전년 시즌인 1980년부터 연속 경기 득점 기록을 계속 경신하고 있어 이 때 호시노는 후배인 고마쓰 다쓰오에게 “어느 쪽이 먼저 요미우리를 완봉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내걸었다(당시 포수였던 나카오 다카요시의 발언).
1982년, 본인에게 있어 두 번째의 리그 우승한 것을 계기로 현역 은퇴를 결심했고 이듬해 1983년 4월 3일, 나고야 구장에서 열린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시범 경기가 은퇴 경기로 치루면서 선발로서 등판했다. 선두 타자 후쿠모토 유타카에게 좌익수 앞에 떨어진 안타를 허용하여 마운드를 떠났고 통산 성적은 146승 121패 34세이브를 기록했다. 은퇴할 당시 마운드에 꽃다발을 건네준 사람은 친구이자 가수인 오다 가즈마사였다.
주니치 감독 시절[편집]
1983년부터 1986년까지 NHK에서 야구 해설위원을 맡았고, 1986년 시즌 도중에 성적 부진으로 경질된 야마우치 가즈히로의 후임으로 1986년 시즌 종료 후 주니치의 감독으로 부임했는데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로 전후 태생(1947년생)의 감독이 되었다.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에는 롯데 오리온스로부터 오치아이 히로미쓰를 트레이드로 영입하는 등 대대적인 전력 보강을 실시했고 드래프트에서도 1986년 곤도 신이치, 1987년 다쓰나미 가즈요시 등과 같은 즉시 전력감으로 될 수 있는 고교생 출신들을 타 구단과의 경합 끝에 1순위로 영입했다. 부진에 시달리고 있는 나카무라 다케시, 히코노 도시카쓰에게는 철권 제재로,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야마모토 마사를 에이스 투수로, 선발 투수 가쿠 겐지를 구원 에이스로, 유격수 우노를 2루수로, 포수 나카오 다카요시를 외야수로 배치 전환시키는 등 팀 색깔에 일신한 결과 1988년에 팀을 6년 만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지만 일본 시리즈인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맞대결에서는 패했다. 주니치 구단 역사상 우승으로 이끈 토박이 감독은 호시노가 유일하다.[2]
1991년 시즌 종료 후 ‘건강상의 이유’[3]를 들어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1992년에는 1년간 주부닛폰 방송의 객원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는 것 외에도 1993년부터는 다시 NHK와 닛칸 스포츠의 해설위원을 맡았다. 1996년에는 감독으로 다시 복귀했고 이후 아이코 다케시를 무상 트레이드로 영입, 그리고 마에다 유키나가를 맞트레이드로 영입했다.
1997년 1월 30일에 부인과 사별했고 그 해 봄에는 나고야 돔이 완공되면서 구장이 넓어지게 되자 팀의 체질 개선이 요구되었지만 늦지 않았고 호시노 자신도 “최하위로 떨어질 각오로 우승을 노린다”라고 장래를 걱정하는 발언을 했다. 예상대로 개막 이후부터 침체에 빠졌고 다카기 감독 시절인 1992년 이후 5년 만에 최하위로 떨어졌다. 같은 해 시즌 종료 후에는 세키카와 고이치, 구지 데루요시를 맞트레이드로 영입했고 니노미야 이타루가 외야 수비 코치로 부임했다. 이듬해 1998년에는 2위로 올라서며 최하위권에서 벗어났고 1999년에는 1954년의 니시테쓰 라이온스 이래 45년 만이 되는 개막 11연승을 기록하면서 무서운 기세로 그대로 선두 자리를 유지하는 등 자신의 두 번째로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지만 일본 시리즈에서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한테 패했다.
그러나 2001년에는 5위로 떨어지면서 4년 만에 B클래스(4위 ~ 6위, 하위권을 지칭하는 일본 언론의 표현)로 추락했고 그 해에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투수 코치 겸 수석 코치였던 야마다 히사시에게 감독 자리를 넘겨준 뒤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한편, 당시 호시노는 같은 해 요미우리 감독직에서 물러난 나가시마 시게오로부터 “그만두는 것은 아직 이르기 때문에 그만두면 안된다!!!” 라고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주니치의 제2차 감독 시절부터 선수 보강에 관해서는 상당히 적극적이어서 특히 당시에는 FA제도나 역지명 제도를 이용해 보강을 하고 있었던 요미우리에 대해서 대항하는 의식을 갖고있었다. 선동열, 이상훈, 이종범 등의 한국인 선수를 비롯해 레오 고메스 등 유력 외국인 선수와 메이지 대학 후배인 다케다 가즈히로, 가와사키 겐지로 등 타 구단에서 활약했던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는 실적을 남겼다.[4]
대대적인 보강을 단행하는 한편 토박이 선수를 방출하는 경우도 많았다. 제1차 감독 시절에는 나카오, 오시마 야스노리나 우시지마 가즈히코,[5] 히라노 겐, 야마다 가즈토시, 오토 시게키(제2차 감독 시절에는 주니치에 복귀), 제2차 감독 시절에는 사카이 다다하루, 니무라 도루, 마에하라 히로유키, 시미즈 마사지, 다이호 야스아키(앞에서 말한 구지 데루요시와의 맞트레이드 상대였지만 3년 뒤에 복귀), 야노 아키히로, 가도쿠라 겐, 쓰루타 야스시, 다네다 히토시 등을 타 구단에 방출했다. 이러한 방출에 의해, 특히 제1차 감독 시절의 주력 선수는 야자와 겐이치, 우노 마사루, 가와마타 요네토시를 제외하고는 거의 방출되었고 그 중 야자와는 호시노의 감독 부임한 것과 동시에 은퇴했으며(부임 1년째의 시범 경기에서 은퇴 경기로 치뤄졌다) 우노가 방출된 것은 다카기 모리미치가 감독으로 있을 때였다.
다케다 가즈히로나 가와카미 겐신, 오가사와라 다카시 등 메이지 대학 후배들을 자신의 구단에서 이끌고 있었지만 도리고에 유스케는 호시노의 대학 후배임에도 불구하고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 방출당했다.[6] 도리고에는 1999년 다이에 우승 축하회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호시노에 대해 “당신이 방출해주신 것으로 팀이 우승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발언해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선수에게 타이틀을 잡게하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일면도 있었다. 1987년 고마쓰 다쓰오가 최다승 타이틀을 놓고 경쟁했을 당시에는 소화시합 3경기에 5회부터 던지게 하고 승수를 벌어 타이틀을 획득시켰다. 1991년에는 최고 평균자책점 타이틀이 걸려 있던 이마나카 신지를 이미 우승이 확정되어 있던 히로시마와의 더블헤더 1차전에 완투시켜 2차전에도 등판시켰다. 1999년은 이미 주니치의 우승이 결정되면서 일본 시리즈 진출이 정해져 있었지만 최다승까지 앞으로 1개를 남겨놓고 있었던 노구치 시게키를 시즌 최종전(대 야쿠르트 전)에 등판시켰다. 또 ‘MVP는 우승 구단에서’라는 기자에게 어필하고 투수 부문에서 우수한 성적에서 남긴 우에하라 고지에게의 투표를 견제했다. 그리고 야마사키 다케시에게는 마쓰이 히데키와의 홈런 갯수가 1개 차로 앞서고 있었기 때문에 마쓰이를 모든 타석에 고의 사구로 내주면서 마치 고교 시절의 4타석 연속 고의 사구를 연상케하는 행동으로 비치게 되자 요미우리팬 뿐만 아니라 주니치 팬에게서 “승부를 피하고 있는 호시노 감독답지 않다”라는 비판도 있었다.
1987년 6월 11일, 구마모토 현 후지사키다이 현영 야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전에서 미야시타 마사미가 상대 타자였던 워렌 크로마티에게 몸에 맞는 볼을 던지자 이에 격분한 크로마티가 미야시타의 얼굴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는 난투극이 일어났다. 당시 호시노가 요미우리 감독이었던 오 사다하루에게 항의하던 도중 주먹을 내미는 행동을 취하면서 싸움을 걸었다는 비판을 받았는데 그 후 TV 프로에 출연하면서 그 때의 일에 대해 ‘항의의 의미’였다고 해명했다.
2000년 5월 6일, 나고야 돔에서 열린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전에서 당시 구심을 맡고 있던 깃타카 아쓰시에게 판정에 불만을 품고 항의하던 도중 폭력을 휘두르다 퇴장 명령을 받았는데 이 외에도 다쓰나미 가즈요시, 오니시 다카유키도 심판에게 폭력을 휘두른 것에 의해 호시노와 함께 퇴장을 당했고 후일 호시노, 다쓰나미, 오니시에 대해서는 제3자로부터 이례적으로 형사 고발이 이루어졌다(기소 유예 처분).
한신 감독 시절[편집]
주니치 감독에서 물러난 직후인 2001년 오프에는 한신 타이거스의 감독으로 부임해 주니치 감독 시절부터 오른팔같은 존재였던 시마노 이쿠오를 수석 코치로 부임시켜 팀 개혁에 임했다.
부임 1년째인 2002년에는 4년 연속 최하위였던 팀을 밀어내면서 개막 이후부터 7연승을 기록했지만 결과적으로 4위에 머물렀다. 같은 해 오프에는 선수의 대량 방출과 트레이드를 단행했는데 그 결과 야마다 가쓰히코, 쓰보이 도모치카 등이 닛폰햄 파이터스 등 타 구단에 트레이드로 나왔다. 동시에 히로시마로부터 FA선언한 가네모토 도모아키,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활약한 이라부 히데키, 주니치에서 자유 계약이 된 구지 데루요시, 닛폰햄으로부터 시모야나기 쓰요시, 나카무라 유타카 등을 끌어들여 투타의 대대적인 보강을 실시했다.
다음해인 2003년은 가네모토, 이라부, 시모야나기, 야노 아키히로, 가타오카 아쓰시, 이가와 게이, 조지 아리아스 등 주력 선수들의 활약에 의해 선두를 독주했고 7월 8일에는 센트럴 리그 역대 최고 속도가 되는 우승 매직 넘버 49를 점등시켰다. 결국 그 해에는 압도적인 힘으로 팀을 18년만에, 본인으로서는 세 번째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지만 일본 시리즈에서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 상대했지만 3승 4패를 기록하여 우승 달성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평소에 고혈압과 같은 지병이 있어 2002년 시즌 개막전이었던 요미우리전이 끝난 직후 컨디션이 저하되면서 벤치 뒤에 기자를 기다리게 한 뒤 누워있던 적이 있거나 2003년 7월 27일의 주니치전에서는 경기 도중 컨디션 저하와 속이 메스꺼운 증상이 일어나자 1시간 정도의 지휘를 시마노 수석 코치에게 맡긴 후 벤치 뒤에서 누운 적도 있었다. 평상시 72에서 135까지 안정돼 있던 혈압 수치가 165에서 210까지 상승하기도 했다.
2003년 일본 시리즈 전날, 언론에서는 ‘호시노 감독, 일본 시리즈 종료 후에 용퇴’라는 내용이 보도되면서 일본 시리즈가 끝난 후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감독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정식 발표를 했다. 후임에는 수비 주루 코치였던 오카다 아키노부가 발탁되었고 이후에 있은 한신 팬들을 상대로 한 ‘한신의 명감독은 누구인가’라는 주제의 설문조사에서 2위인 오카다 아키노부를 누르고 1위로 선정되었다.
한신 감독 퇴임 후[편집]
2004년 1월 1일에는 한신의 시니어 디렉터로 부임했고 같은 해 5월 31일에는 효고 현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그 외에 CF에도 출연한 것 외에도 탤런트로도 활동했고 모교인 메이지 대학의 평의원이 된 인연도 있어 메이지 대학의 이미지 캐릭터도 맡고 있다. 2004년 10월부터는 오사카 인간 과학 대학의 객원 교수로 부임해 활동하고 있으며 야구 해설자로서는 방송국에 계약하지 않는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등 각 방송국의 TV 중계에 출연하고 있다. 2005년 7월, 자신을 원장으로 하는 ‘꿈·호시노 스포츠 학원’을 설립했지만 2008년에 폐쇄되었다.
2005년 8월, 요미우리의 유력한 차기 감독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고 언론에서 보도되었는데 이것에 대해 에나쓰 유타카는 “한신에 적을 두는 신분이면서 호시노 측으로부터의 협상이 있었다”라고 주간지에 폭로하기도 했다. 요미우리 OB와 팬 등의 반발이 커지자 호시노는 9월 10일에 요미우리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겠다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베이징 올림픽 대표팀 감독[편집]
2007년 1월 25일, 베이징 올림픽 일본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부임했고 그 다음날에는 ‘호시노 JAPAN’(星野JAPAN)을 자신의 개인 명의로 상표 등록을 출원했다. 그러나 “금메달 외에는 필요없다”라고 공언한 뒤에 임한 이듬해 올림픽 본선에서는 4위에 그쳐 동메달마저 획득하지 못하고 상위 3개 팀에게는 5전 전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4위에 그친데 대해서는 대회가 끝난 후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선수가 불쌍했다”라고 말해 뚜렷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던 선수들을 옹호하는 한편 자신의 지휘봉에 대한 발언이 많은 언론이나 인터넷상에서 책임을 전가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대한민국전에서는 당시 4강전을 앞두고 상대였던 대한민국 대표팀, 특히 부진에 시달리고 있던 이승엽을 향해 “이승엽? 그게 누구야?” 라고 발언을 했다. 그러나 이승엽은 일본과의 4강전에서 8회에 일본 대표팀의 투수 이와세 히토키를 상대로 역전 홈런을 때려내면서 팀의 승리를 이끌었고, 일본 대표팀은 이 때의 충격 때문인지 3·4위전에서도 미국에게 패하여 메달도 따지 못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베이징 올림픽 이후인 2008년 10월 15일, 호시노도 참석한 제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체제 검토회의에서 호시노가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대표팀의 차기 감독으로 결정되었다. 이 시점에서 이미 가토리 요시타카, 다케다 가즈히로 등도 코치를 맡기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베이징 올림픽에서 뚜렷한 결과를 남길 수 없었던 호시노의 감독 취임에 대해 야구계 일각에서도 반대 여론이 많아지자 10월 22일에 호시노는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WBC 대표팀 감독을 맡지 않겠다고 밝혔고 결국 대표팀 감독은 요미우리 감독인 하라 다쓰노리가 발탁되었다.
라쿠텐 감독[편집]
감독으로 취임하기까지[편집]
2010년 10월, 퍼시픽 리그 팀인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가 호시노에게 감독으로 맡아달라는 제의를 하면서 이후 라쿠텐과의 교섭 끝에 합의했고 10월 19일에는 2004년부터 맡았던 한신 타이거스 시니어 디렉터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힘과 동시에 한신을 퇴단했다. 10월 27일, 센다이 시내에서 라쿠텐 감독 취임 기자회견을 실시했고 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퍼시픽 리그 구단의 유니폼을 입게되었다. 등번호는 주니치, 한신 감독 시절과 똑같은 ‘77’번으로 결정했다.
2011년[편집]
이듬해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면서 일본 야구 기구 관계자에게 직접 설득하여 지진 재해 부흥을 명목으로 한 올스타전 3차전이 라쿠텐의 홈구장인 클리넥스 스타디움에서 개최하게 되었다.
라쿠텐 감독으로서의 취임 1년째인 2011년에는 후반기에서 7연승을 기록하는 등 3위로 올라섰지만 최종적으로는 5위에 끝난다. 같은 해 오프에는 한신 시절과는 동일하게 선수들의 무더기 방출과 트레이드를 단행했는데 그 결과 현금 트레이드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이적한 고사이 유스케를 포함해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로부터 가와시마 료, 주니치로부터 오야마 게이지를 영입했다. 구단으로부터 자유 계약이 공시된 이나다 나오토, 가토 다이스케, 사다오카 다쿠마, 호세 페르난데스, 그리고 트레이드로 하시모토 요시타카, 우에조노 게이지, 입단 테스트에서는 시모야나기 쓰요시를 각각 획득하는 등 투타의 대대적인 보강을 실시했다.
2012년[편집]
5월 11일 오릭스전(7차전, 교세라 돔)에서는 투수 출신 감독[7] 및 전후 태생의 감독으로서는 처음으로 감독 통산 1000승(42무 876패, 2012년 5월 11일 당시)을 달성했다.[8][9] 2004년 오 사다하루 이래 역대 12번째의 기록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12일에도 승리하면서 자신의 이름 ‘센이치’와 같은 1001승째가 되었을 때 “오, 2000승까지 앞으로 999승인가”라고 말하면서 현장에 있던 기자들을 웃겼다.[10]
작년 시즌 종료 후 이와쿠마 히사시, 야마사키 다케시가 라쿠텐을 퇴단하였고 전반기에는 다나카 마사히로, 마쓰이 가즈오, 시마 모토히로, 루이스 가르시아 등 주력 선수들이 이탈하는 등 전력 저하가 우려되는 상황에 몰려있었다. 그러나 가마타 요시나오, 히지리사와 료, 가라시마 와타루, 마스다 신타로, 긴지 등과 같은 젊은 선수들을 기용하면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냈다. 5월 20일 소프트뱅크와의 순위가 바뀌면서 3위로 올라섰고 그 후에도 상위권 진입을 위한 경쟁을 계속하여 7월 18일에 구단 창설 8년만에 처음으로 전반기를 5할 이상의 승률을 기록해 A클래스에 해당되는 3위로 전반기를 마감했다. 후반기에는 복귀한 베테랑 선수들이 부진하면서 8연패를 당하는 등 5위에 떨어졌고 8월 중순에 열린 세이부전에서는 개막전 이후 내리 3연패를 당했다. 그러나 9월에 들어가면서 무서운 기세를 되찾아 7일부터 열린 세이부전에서는 3연승을 기록하면서 4위로 올랐고 최종적으로 3위 소프트뱅크와의 1경기차가 되는 4위가 되었다. 팀은 최종전에서 승리하여 승률은 정확히 5할이 되었다.
인간 관계[편집]
- 야구계에서는 주니치 시절의 선배에 해당하는 반도 에이지, 대학 시절 동기였던 다부치 고이치, 야마모토 고지 등과 친분을 쌓고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베이징 올림픽 일본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있을 당시에는 다부치, 야마모토가 코치로서도 활동한 것 외에도 2010년에 호시노가 라쿠텐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에는 다부치를 수석 코치로 초빙했다.
- 예능계에서는 주로 와다 아키코, 아카시야 산마와는 1년에 1차례 정도 골프를 함께하는 등의 가까운 사이였고 가수 오다 가즈마사, 야시키 다카진과도 친분이 깊다.
- 전 스미토모 미쓰이 파이낸셜 그룹·일본우정 사장이었던 니시카와 요시후미, 패션 디자이너 고시노 히로코 등과 친분이 있고 호시노의 오사카 후원회에서는 니시카와가 회장, 고시노가 부회장(부인부 부장)을 맡고 있다.
상세 정보[편집]
출신 학교[편집]
- 오카야마 현립 구라시키 상업고등학교
- 메이지 대학
선수 경력[편집]
- 주니치 드래건스(1969년 ~ 1982년)
지도자·기타 경력[편집]
- NHK 야구 해설위원(1983년 ~ 1986년, 1992년 ~ 1995년)
- 주니치 드래건스 감독(1987년 ~ 1991년, 1996년 ~ 2001년)
- 한신 타이거스 감독(2002년 ~ 2003년)
- 한신 타이거스 시니어 디렉터(2004년 ~ 2010년)
- 베이징 올림픽 일본 대표팀 감독(2007년 ~ 2008년)
-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2011년 ~ )
수상·타이틀 경력[편집]
타이틀[편집]
- 최다 세이브 : 1회(1974년) ※센트럴 리그의 최다 세이브 부문을 획득한 최초의 투수.
- 최고 승률(당시는 타이틀이 아님) : 1회(1975년) ※센트럴 리그에서는 1972년까지 타이틀로 제정됨.
수상[편집]
- 사와무라 에이지상 : 1회(1974년)
- 월간 MVP : 2회(1975년 9월, 1977년 8월)
- 쇼리키 마쓰타로상 : 1회(2003년)
- 호치 프로 스포츠 대상 특별공로상(2003년)
개인 기록[편집]
첫 기록[편집]
- 첫 등판·첫 선발 : 1969년 4월 13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3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 첫 승리 : 1969년 5월 5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6차전(후쿠이 현영 구장)
기록 달성 경력[편집]
기타[편집]
- 올스타전 출장 : 6회(1969년, 1974년 ~ 1976년, 1979년, 1981년)
등번호[편집]
- 22(1969년 ~ 1970년)
- 20(1971년 ~ 1982년)
- 77(1987년 ~ 1991년, 1996년 ~ 2003년, 2011년 ~ )
연도별 투수 성적[편집]
| 연도 | 소속 | 등 판 |
선 발 |
완 투 |
완 봉 |
무 볼 넷 |
승 리 |
패 전 |
세 이 브 |
홀 드 |
승 률 |
상대 타자 |
투구 이닝 |
피 안 타 |
피 홈 런 |
볼 넷 |
고의 사구 |
몸에 맞는 볼 |
탈 삼 진 |
폭 투 |
보 크 |
실 점 |
자 책 점 |
평균 자책점 |
WHIP |
|---|---|---|---|---|---|---|---|---|---|---|---|---|---|---|---|---|---|---|---|---|---|---|---|---|---|
| 1969년 | 주니치 | 49 | 16 | 6 | 1 | 1 | 8 | 9 | -- | -- | .471 | 754 | 187.2 | 157 | 24 | 45 | 3 | 9 | 99 | 0 | 1 | 72 | 65 | 3.12 | 1.08 |
| 1970년 | 41 | 24 | 6 | 1 | 0 | 10 | 14 | -- | -- | .417 | 835 | 205.0 | 172 | 19 | 63 | 4 | 4 | 146 | 3 | 0 | 90 | 83 | 3.64 | 1.15 | |
| 1971년 | 35 | 6 | 0 | 0 | 0 | 9 | 5 | -- | -- | .643 | 419 | 103.2 | 99 | 11 | 20 | 2 | 1 | 72 | 0 | 0 | 46 | 40 | 3.47 | 1.15 | |
| 1972년 | 48 | 0 | 0 | 0 | 0 | 9 | 8 | -- | -- | .529 | 404 | 98.2 | 71 | 12 | 39 | 9 | 5 | 70 | 1 | 0 | 33 | 22 | 2.01 | 1.11 | |
| 1973년 | 44 | 15 | 7 | 1 | 3 | 16 | 11 | -- | -- | .593 | 676 | 166.0 | 134 | 16 | 55 | 9 | 3 | 96 | 2 | 1 | 57 | 56 | 3.04 | 1.14 | |
| 1974년 | 49 | 17 | 7 | 1 | 1 | 15 | 9 | 10 | -- | .625 | 758 | 188.0 | 149 | 19 | 50 | 8 | 7 | 137 | 3 | 0 | 67 | 60 | 2.87 | 1.06 | |
| 1975년 | 40 | 26 | 6 | 3 | 1 | 17 | 5 | 4 | -- | .773 | 883 | 217.2 | 208 | 20 | 48 | 9 | 11 | 112 | 2 | 0 | 71 | 67 | 2.77 | 1.18 | |
| 1976년 | 20 | 20 | 6 | 3 | 1 | 10 | 6 | 0 | -- | .625 | 557 | 132.2 | 141 | 20 | 26 | 0 | 8 | 60 | 1 | 1 | 64 | 58 | 3.93 | 1.26 | |
| 1977년 | 42 | 30 | 13 | 3 | 1 | 18 | 13 | 5 | -- | .581 | 1029 | 245.1 | 245 | 26 | 71 | 2 | 12 | 125 | 4 | 0 | 105 | 96 | 3.52 | 1.29 | |
| 1978년 | 34 | 9 | 2 | 0 | 0 | 5 | 8 | 14 | -- | .385 | 404 | 92.0 | 106 | 10 | 36 | 6 | 2 | 47 | 0 | 0 | 55 | 50 | 4.89 | 1.54 | |
| 1979년 | 28 | 25 | 4 | 1 | 0 | 10 | 7 | 0 | -- | .588 | 665 | 154.1 | 168 | 29 | 51 | 3 | 7 | 85 | 1 | 0 | 90 | 80 | 4.67 | 1.42 | |
| 1980년 | 29 | 22 | 4 | 1 | 0 | 6 | 12 | 1 | -- | .333 | 573 | 129.2 | 143 | 25 | 44 | 3 | 6 | 70 | 2 | 1 | 79 | 73 | 5.07 | 1.44 | |
| 1981년 | 23 | 23 | 4 | 0 | 0 | 10 | 9 | 0 | -- | .526 | 602 | 142.0 | 152 | 20 | 37 | 4 | 4 | 69 | 3 | 0 | 67 | 62 | 3.93 | 1.33 | |
| 1982년 | 18 | 10 | 1 | 0 | 0 | 3 | 5 | 0 | -- | .375 | 303 | 66.0 | 77 | 15 | 21 | 0 | 3 | 37 | 0 | 0 | 43 | 39 | 5.32 | 1.48 | |
| 통산 : 14년 | 500 | 243 | 66 | 15 | 8 | 146 | 121 | 34 | -- | .547 | 8862 | 2128.2 | 2022 | 266 | 606 | 62 | 82 | 1225 | 22 | 4 | 939 | 851 | 3.60 | 1.23 | |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감독으로서의 팀 성적[편집]
| 연도 | 소속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승차 | 팀 홈런 | 팀 타율 | 팀 평균자책점 | 연령 |
|---|---|---|---|---|---|---|---|---|---|---|---|---|
| 1987년 | 주니치 | 2위 | 130 | 68 | 51 | 11 | .571 | 8.0 | 168 | .265 | 3.64 | 40세 |
| 1988년 | 1위 | 130 | 79 | 46 | 5 | .632 | - | 131 | .258 | 3.20 | 41세 | |
| 1989년 | 3위 | 130 | 68 | 59 | 3 | .535 | 15.5 | 149 | .256 | 3.68 | 42세 | |
| 1990년 | 4위 | 131 | 62 | 68 | 1 | .477 | 26.0 | 162 | .264 | 4.26 | 43세 | |
| 1991년 | 2위 | 131 | 71 | 59 | 1 | .546 | 3.0 | 178 | .262 | 3.59 | 44세 | |
| 1996년 | 2위 | 130 | 72 | 58 | 0 | .554 | 5.0 | 179 | .278 | 4.01 | 49세 | |
| 1997년 | 6위 | 136 | 59 | 76 | 1 | .437 | 24.0 | 115 | .243 | 4.33 | 50세 | |
| 1998년 | 2위 | 136 | 75 | 60 | 1 | .556 | 4.0 | 100 | .248 | 3.14 | 51세 | |
| 1999년 | 1위 | 135 | 81 | 54 | 0 | .600 | - | 120 | .263 | 3.39 | 52세 | |
| 2000년 | 2위 | 135 | 70 | 65 | 0 | .519 | 8.0 | 111 | .266 | 4.19 | 53세 | |
| 2001년 | 5위 | 140 | 62 | 74 | 4 | .456 | 15.0 | 98 | .253 | 3.48 | 54세 | |
| 2002년 | 한신 | 4위 | 140 | 66 | 70 | 4 | .485 | 19.0 | 122 | .253 | 3.41 | 55세 |
| 2003년 | 1위 | 140 | 87 | 51 | 2 | .630 | - | 141 | .287 | 3.53 | 56세 | |
| 2011년 | 라쿠텐 | 5위 | 144 | 66 | 71 | 7 | .482 | 23.5 | 53 | .245 | 2.85 | 64세 |
| 2012년 | 4위 | 144 | 67 | 67 | 10 | .500 | 7.5 | 52 | .252 | 2.99 | 65세 | |
| 통산 : 15년 | 2029 | 1052 | 927 | 50 | .532 | A클래스 : 9회, B클래스 : 6회 | ||||||
- 1987년부터 1996년은 130경기제.
- 1997년부터 2000년은 135경기제(무승부는 재경기).
- 2001년부터 2004년은 140경기제.
- 2000년에는 출장 정지 기간 중 5일 간에 있었던 3경기(1승 2패)는 통산 성적에 포함되지 않음.
저서[편집]
주석[편집]
- ↑ 1981년 8월 26일 대 요미우리 전(고라쿠엔 구장), 상대 타자는 야마모토 고지였다.
- ↑ 주니치 외에도 프로 구단에서 뛰었던 경험은 없지만 아마추어 지도자 출신이자 주니치의 첫 우승을 이끈 감독이었던 아마치 슌이치가 있다.
- ↑ 표면적인 이유이며 실제로는 부인의 백혈병 발병이 크게 연관되어 있었다.
- ↑ 스포츠 춘추 - 2010년 10월 박동희의 칼럼 "더 강력해진 SUN의 마운드 운용"
- ↑ 정식 취임시였는데 이 때문인지 우시지마는 호시노가 감독으로 있을 당시에는 주니치에서 활약하지 않았다.
- ↑ 다만 이것은 당시 다이에 감독이었던 오 사다하루가 도리고에의 영입을 희망했기 때문에 쫓겨난 것은 아니다.
- ↑ 현역 시절에 투수로 활약했다는 의미이고 투수 경험이 있으면서도 통산 1000승 이상을 달성한 감독은 가와카미 데쓰하루 등 그 외에 4명이 있다.
- ↑ 1000勝は通過点…星野監督2000勝まで燃え続ける 스포츠 닛폰, 2012년 5월 12일
- ↑ 첫 승리는 주니치 시절인 1987년 4월 12일(요미우리전), 그리고 25년 후에 1918경기째에서 달성했다.
- ↑ 슈칸 베이스볼, 2012년 6월 18일자
바깥 고리[편집]
- (일본어) 호시노 센이치 기념관
- (일본어) 호시노 센이치 후원회
- (일본어) 호시노 드림즈 프로젝트
- (영어) 일본 프로 야구 경력 통계 - Japanesebaseball.com
|
사와무라 에이지상 수상자 |
|
|---|---|
| 1940년대 | |
| 1950년대 | |
| 1960년대 | |
| 1970년대 | |
| 1980년대 | |
| 1990년대 | |
| 2000년대 | |
| 2010년대 | |
|
※상기 이외의 연도는 수상자 없음
|
|
|
쇼리키 마쓰타로상 수상자 |
|
|---|---|
| 1970년대 | |
| 1980년대 | |
| 1990년대 | |
| 2000년대 | |
| 2010년대 | |
|
주니치 드래건스 감독 (1987년 ~ 1991년, 1996년 ~ 2001년) |
|---|
|
1936: 이케다 유타카 | 1937: 마스 가이치 | 1938 - 1939: 네모토 유키사토 | 1940 - 1941: 고니시 도쿠로 | 1941 - 1942: 혼다 지카키 | 1942 - 1943: 마스 가이치 | 1944: 미야케 다이스케 | 1946: 다케우치 아이이치 | 1946 - 1948: 스기우라 기요시 | 1949 - 1951: 아마치 슌이치 | 1952 - 1953: 쓰보우치 미치노리 | 1954: 아마치 슌이치 | 1955 - 1956: 노구치 아키라 | 1957 - 1958: 아마치 슌이치 | 1959 - 1960: 스기시타 시게루 | 1961 - 1962: 노닌 다카미 | 1963 - 1964: 스기우라 기요시 | 1964 - 1967: 니시자와 미치오 | 1968: 스기시타 시게루 | 1968: 혼다 이쓰로 (대행) | 1969 - 1971: 미즈하라 시게루 | 1972 - 1977: 요나미네 가나메 | 1978 - 1980: 나카 도시오 | 1981 - 1983: 곤도 사다오 | 1984 - 1986: 야마우치 가즈히로 | 1986: 다카기 모리미치 (대행) | 1987 - 1991: 호시노 센이치 | 1992 - 1995: 다카기 모리미치 | 1995: 도쿠타케 사다유키 (대행) | 1995: 시마노 이쿠오 (대행) | 1996 - 2001: 호시노 센이치 | 2002 - 2003: 야마다 히사시 | 2003: 사사키 교스케 (대행) | 2004 - 2011: 오치아이 히로미쓰 | 2012 - 현재: 다카기 모리미치
|
|
한신 타이거스 감독 (2002년 ~ 2003년) |
|---|
|
1936: 모리 시게오 | 1936 - 1939: 이시모토 히데이치 | 1940 - 1941: 마쓰키 겐지로 | 1942 - 1944: 와카바야시 다다시 | 1946: 후지무라 후미오 | 1947 - 1949: 와카바야시 다다시 | 1950 - 1954: 마쓰키 겐지로 | 1955: 기시 이치로 | 1955 - 1957: 후지무라 후미오 | 1958 - 1959: 다나카 요시오 | 1960 - 1961: 가네다 마사야스 | 1961 - 1965: 후지모토 사다요시 | 1966: 스기시타 시게루 | 1966 - 1968: 후지모토 사다요시 | 1969: 고토 쓰구오 | 1970 - 1972: 무라야마 미노루 | 1972 - 1974: 가네다 마사야스 | 1975 - 1977: 요시다 요시오 | 1978: 고토 쓰구오 | 1979 - 1980: 돈 블레이저 | 1980 - 1981: 나카니시 후토시 | 1982 - 1984: 안도 모토오 | 1984: 사토 다카오 (대행) | 1985 - 1987: 요시다 요시오 | 1988 - 1989: 무라야마 미노루 | 1990 - 1995: 나카무라 가쓰히로 | 1995 - 1996: 후지타 다이라 | 1996: 시바타 다케시 (대행) | 1997 - 1998: 요시다 요시오 | 1999 - 2001: 노무라 가쓰야 | 2002 - 2003: 호시노 센이치 | 2004 - 2008: 오카다 아키노부 | 2009 - 2011: 마유미 아키노부 | 2012 - 현재: 와다 유타카
|
|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 (2011년 ~ ) |
|---|
|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 2008년 하계 올림픽 |
|
|---|---|
| 감독 |
77 호시노 센이치
|
| 코치 | |
| 투수 | |
| 포수 | |
| 내야수 | |
| 외야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