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부치 고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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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치 고이치
田淵 幸一

Kōichi Tabuchi
Tabuchi koichi.jpg

다부치 고이치
(라쿠텐 골든이글스 코치 시절, 2011년)

기본 정보
국적 일본 일본
생년월일 1946년 9월 24일(1946-09-24) (67세)
출신지 도쿄 도 도시마 구
신장 186 cm
체중 90 kg
선수 정보
투구·타석 우투우타
수비 위치 포수, 1루수, 지명타자
프로 입단 연도 1968년
드래프트 순위 1순위
첫 출장 1969년 4월 12일
마지막 경기 1984년 9월 29일
경력

선수 경력

감독·코치 경력


다부치 고이치
일본어식 한자 표기: 田淵 幸一
가나 표기: たぶち こういち
외래어 표기법 표기: 다부치 고이치
통용 표기: 타부치 코우이치
로마자: Kōichi Tabuchi

다부치 고이치(일본어: 田淵 幸一 (たぶち こういち), 1946년 9월 24일 ~ )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지도자, 야구 해설가·평론가이다.

현역 시절의 별명은 부치(ブチ), 붓짱(ブッちゃん), 타부타(タブタ), 옷산(オッサン, 히가시오 오사무가 사용) 등 다수의 별명이 붙여졌고, 3대째 미스터 타이거스라는 애칭이 있다.

현역 시절 한신 타이거스의 주포로서 활약을 했고 1979년에 세이부 라이온스로 이적해 2년 연속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동시에 이끌었다. 은퇴 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감독과 한신의 코치,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코치를 역임한 것 외에도 한신 타이거스 OB회 회장(제6대), 베이징 올림픽 일본 국가대표팀의 수석 코치 겸 타격 코치를 맡았다. 그 외에도 TBS스포츠 닛폰의 해설위원 등 야구 평론가로 활동했다.

인물[편집]

프로 입단 전[편집]

회사를 경영하고 있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 부모님과 누나를 포함한 4인 가족이었으며 도시마 구립 다카다 중학교 시절에 야구를 시작하여 2학년 때 5번 타자로 활약했다. 호세이 대학 제1 고등학교(현재의 호세이 대학 중학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에 포수가 되면서 4번 타자로 뛰었다. 3학년 때인 1964년에는 하계 고시엔 대회의 도쿄 도 대회에서 팀은 준준결승까지 진출했다.

고교 졸업 후 호세이 대학 경제학부에 진학하면서 1학년 봄부터는 도쿄 지역 6개 대학 야구팀으로 구성된 도쿄 6대학 야구 리그에 출전했는데 야마모토 고지, 도미타 마사루와 함께 호세이 대학에서 가장 특출난 세 명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알려질 정도로 인기가 있어 3학년 봄에는 지금까지의 리그 통산 8개의 홈런 기록을 빨리 경신하는 등 통산 홈런 갯수를 22개로 늘렸고 1997년에 다카하시 요시노부가 기록을 깰 때까지의 리그 기록이었다.

1968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에서는 한신 타이거스로부터 1순위로 지명을 받아 입단했는데 드래프트 회의 직전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지명이 확실시되면서 본인도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실제로는 예상을 뒤집어 대학 동기이자 간사이 지방 출신의 도미타를 지명한다라는 소문이 날 정도였던 한신이 다부치를 1순위로 지명했다. 이것은 1958년 시즌 종료 후에 한신이 오 사다하루를 영입하는 교섭을 진행시켜 오 사다하루 본인도 한신의 입단을 일단 승낙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 요미우리에게 빼앗겼다는 일에 대한 보복이었다고 말해지고 있다. 도쿄에서 태어나 그 지역에 소재하고 있는 학교를 모두 다니고 있는 다부치로서는 효고 현 니시노미야 시를 연고지로 하는 간사이 지역 구단에 대해 “이미지조차 떠오르지 않는다”라고 심경을 토로하면서 고민을 했다고 한다. 드래프트 직전에는 요미우리 관계자들과 회식을 하면서 관계자로부터 “너에게는 등번호 2번을 준비하고 있다”라고 말해 다부치는 감격해 했지만 드래프트 지명에서 예상 외의 결과가 나오게 되어 낙담을 했다. 한편 단념하지 못할 요미우리측에서 비밀리에 어느 호텔에서 회담을 하기로 계획을 내놓았지만 같은 호텔에서는 다이요 웨일스 선수의 재계약과 관련된 기자 회견과 겹쳐 결국 열리지 못했다. 다부치는 현역 은퇴 후 골프 경기회에 참가하여 당시 요미우리 감독이었던 가와카미 데쓰하루에게 직접 따져 물어보았지만 가와카미는 “나는 모르는 일이라서 말하지 않겠다”라는 답변을 했다.

드래프트 지명된 후에 가진 기자 회견에서 모친이 다부치를 ‘보쿠짱’(ぼくちゃん)이라고 부른 것이 발각되어 기자들을 놀라게 했고 오사카로 출발하는 도쿄 역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친에게 기자들이 “마치 출정하는 병사같다”라고 말해 실소를 자아냈다.

한신 타이거스 시절[편집]

한신에 입단한 이후 강한 어깨와 강한 타격을 가진 포수로서 팀의 정포수 자리를 차지했다. 1969년 시즌에는 22개의 홈런을 때려내는 포수로서는 처음으로 신인왕을 수상했다. 그러나 프로 2년 차인 이듬해 1970년 8월 26일의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 상대 투수 소토코바 요시로가 던진 공에 왼쪽 관자놀이에 사구를 받아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귀에서 피가 나올 정도의 심각한 부상일 정도로 곧바로 병원에 이송되었다.[1] 이 부상은 “다부치의 체질이 이것으로 모두 바뀌어 버렸다”라고 말해질 정도의 큰 부상으로 알려지면서 다음 시즌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그 무렵에 타격 폼을 한발타법(一本足打法)으로 바꾸고 나서 비거리가 성장하기 시작해 1972년에는 34개의 홈런을 날릴 정도의 큰 활약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팀 동료인 에나쓰 유타카와의 콤비를 이뤄 ‘황금 배터리’(黄金バッテリー)라는 애칭이 붙게 되었다. 그러나 입단할 당시 ‘콩나물’, ‘기린’(キリン)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말라 있던 체형이 갑자기 불어나기 시작했다.

이듬해 1973년 4월부터 5월에 걸친 요미우리와의 경기에서는 한 팀에서 7타수 연속 홈런이라는 신기록을 만들었고[2] 같은 해 9월 9일 야쿠르트와의 경기(25차전)에서 연속 이닝 무사사구라는 일본 프로 야구 신기록을 계속 경신하고 있던 야쿠르트의 야스다 다케시에 의해 기록이 81이닝으로 멈췄다. 야스다는 7월 17일 한신과의 경기(15차전)에서 8회초 1사 2루에 다부치를 고의사구로 보낸 것을 마지막으로 그 경기에서의 9회부터 무사사구가 계속되면서 1950년 시라키 기이치로가 기록한 74개를 깨며 기록을 경신하고 있었지만 이 경기에서 2대 2의 동점인 상황에서 9회 2사 2루에 다부치를 고의사구로 보낸 것에 의해 그 기록이 멈췄다.

1974년에 부친이 사망하면서 그 당일에 사망 소식을 전달 받았지만 가네다 마사야스 감독은 “경기에 신경쓰지 말고 아버지한테 돌아가라”라는 말을 뿌리치며 그대로 출전해 히라마쓰 마사지로부터 2점 홈런을 기록했다.

다음해인 1975년에는 오 사다하루의 14년 연속 홈런왕 타이틀을 저지하는 43개의 최다 홈런을 기록하면서 홈런왕 타이틀을 석권했다.[3] 다부치는 전년도에 개인 최다인 45개의 홈런을 기록한 것과 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시즌 40개의 홈런을 기록하면서도 4개 차이로 홈런왕 타이틀을 놓쳤지만 1975년에는 개막 이후부터 연달아 홈런을 때려냈다. 그 한편으로 오 사다하루는 부상 때문에 개막 이후부터 출발이 늦어지면서 최종적으로는 오 사다하루와의 10개 차로 홈런왕을 차지했다. 그러나 다음 시즌부터 다시 오 사다하루에게 홈런왕 타이틀이 탈환되면서 결국에는 무관으로 끝났다.

세이부 라이온스 시절[편집]

1978년 시즌 종료 후 쓰쓰미 요시아키를 그룹 총수로 하는 세이부 그룹에 의한 매각으로 후쿠오카 시에서 사이타마 현 도코로자와 시로 이전한 세이부 라이온스의 얼굴로서 입단했다. 그 전에 한신으로부터 다부치와 후루사와 겐지,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스(세이부 라이온스라는 팀명이 바뀌기 전의 예전 팀 이름)으로부터 마유미 아키노부, 다케노우치 마사시, 와카나 요시하루, 다케다 마사후미와의 대형 트레이드(2대 4 방식)였다.

이 트레이드에서는 심야에 불려가서 통보되는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이번에 가는 세이부의 네모토 감독은 좋은 감독이니까 가서 잘 공부해 와라”는 세이부 구단 측의 설득에 대해 다부치는 “(한신의)블레이저 감독은 좋은 감독 아닙니까?”라는 말을 되받아쳤다.

트레이드 자체가 우여곡절 끝에 이뤄진 일이었지만 세이부에 이적한 이후 몸을 다시 단련하는 등 1980년에는 1루수로 전향함과 동시에 지명타자로서 활약을 했고 5년 만에 40홈런 이상(43홈런)을 기록했다.[4] 1982년과 1983년에는 한신 시절에 경험할 수 없었던 팀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동시에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1983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우수 선수상을 수상했고 같은 해 일본 야구계의 최고상인 쇼리키 마쓰타로상을 수상했다. 다음 해인 1984년에는 16년 간의 현역 생활을 은퇴했다.

해설가·평론가 시절[편집]

현역 은퇴 후 이듬해인 1985년부터 5년 간 TBS의 야구 해설위원을 맡았고 1987년 시즌 종료 후 요시다 요시오 감독이 사임하면서 후임 감독이 된 무라야마 미노루로부터 타격 코치를 맡아달라는 요청이 있었지만 과거에 트레이드로 내놓았을 당시에 구단의 실수도 있어 결국은 거절했다(무라야마의 희망과는 정반대로 한신 구단이 복귀를 바라지 않았었다).

다이에 감독 시절[편집]

1990년, 스기우라 다다시의 후임으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감독 시절에 연고지인 후쿠오카 시의회의 어느 의원이 “시장을 주축으로 다이에를 응원하자” 라고 주장하면서 이에 동조하는 의원들과 시민들이 많았다. 그러나 다이에는 약소 구단에서 A클래스(1위~3위, 상위권을 지칭하는 일본 언론의 표현)에 진입 조차 뜻대로 되지 않은 채 1990년 시즌에는 당시 팀 평균자책점이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면서 결국 최하위권에 머물렀다. 그 때문에 당시 다이에를 응원하자고 주장했던 그 의원에게는 “이렇게 약한 것 같아서는 다부치 감독을 증인 환문을 해야 한다”라고까지 발언했다. 같은 해 시즌 종료 후에는 “히로시마의 나가시마오사나이가 트레이드로 내놓을 것 같다”라는 선택 회의 내용을 외부로 흘려 보낸 것이 발각되어 구단으로부터 감봉 처분을 받았다.

결국 A클래스에 진입조차 하지 못한 채 팀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물어 1992년에 감독직에서 물러났고 1993년부터 2001년까지는 다시 TBS에서 야구 해설위원을 맡았다.

그 후[편집]

2002년에는 절친한 사이인 호시노 센이치의 지휘 하에 현역 시절 친정팀인 한신 타이거스의 수석 겸 타격 코치로 발탁되었고 이듬해 2003년에는 팀의 센트럴 리그 우승을 이끌면서 타격을 지도하는 면에서 큰 기여를 주었다. ‘너울 타법’(うねり打法)이라고 불린 타격 이론으로 하마나카 오사무, 세키모토 겐타로 등을 키웠고 그 반면에 성적이 부진한 선수나 전망이 없는 선수에 대해서는 일찌감치 출전시키지 못하는 일도 있어 엄격한 선수 지도를 하였다. 데릭 화이트가 타격 부진한 것에 대해서는 “이제 (그 놈에게)직접 가르치는 일은 없다. 나머지 일은 본인 스스로 열심히 하게 하는 것 뿐이다”라고 말하는 등 후에 화이트를 방출되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다만 자신의 저서에서는 이런 내용을 남겼다.

화이트에게 골절상을 입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경기하러 나올 수 있는 상태는 아닌데도 벤치에 들어가서 큰 소리를 내고 있던 모습에 감격했고 아마 방출될 것 같은 화이트의 행운을 기원했다.

전임 코치의 활동 경험이 없는 감독 경험자가 감독 퇴임 후에 수석 코치 이외의 코치로 종사한 예는 나카니시 후토시, 스기시타 시게루 등 겸임 감독이었던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다부치의 경우는 드문 사례였다.[5] 다부치 본인은 호시노 감독의 지휘 하에서 코치를 맡고 있을 무렵부터 “나는 감독에게 적합하지 않고 있는 수석 코치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2003년 시즌 종료 후 호시노 감독이 건강상의 이유로부터 감독직에서 용퇴했을 당시에는 “나는 감독과 일련탁생(一蓮托生)”이라고 말해 결국 코치직에서 그만뒀다.

2004년부터는 TBS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다시 복귀했고 TBS에서 활동할 당시에는 모두 스포츠 닛폰의 평론가로서도 같이 활동했다. 2007년 1월 29일에 호시노가 베이징 올림픽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다시 호시노 감독의 지휘 하에 수석 겸 타격 코치로 발탁되었고 2009년에는 한신 타이거스에서 뛰었던 전직 선수들의 모임인 한신 타이거스 OB회의 신임 회장으로 선출되어 2009년 가을 경에 제6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2011년부터는 호시노가 감독으로 취임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수석 코치 겸 타격 코치로 부임했고(호시노가 라쿠텐 구단에게 다부치의 코치 초빙을 요청) 한신 타이거스와 베이징 올림픽 일본 국가대표팀 시절에 이어 라쿠텐에서도 호시노를 지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팀이 극도의 타격 부진으로 침체를 겪는 등 6월 5일자로 타격 코치직에서 수석 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고 이듬해 2012년에도 수석 코치를 맡았지만 2012년 시즌 종료 후 라쿠텐을 퇴단했다.

플레이 스타일[편집]

타격[편집]

비거리의 길이와 크고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는 홈런의 궤도로부터 ‘홈런 아티스트’(ホームラン・アーチスト)[6]라고 불리고 있었다. 특히 바깥쪽 공에는 강했지만 이 장타력은 다부치의 왼팔이 오른팔보다 3cm가 너무 길었다는 것이 크다고 여겨진다. 이것을 발견하게 된 것은 신인 시절에 다부치의 슈트를 지은 양복점이었다. 다만 만년에는 이 팔의 길이의 차이가 생각되는 타격에 연결되지 않는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타석에서는 어디까지나 냉정해지면서 매년 시즌마다 많은 볼넷을 선택하는 선구안도 주특기 중의 하나였고 통산 홈런 474개는 역대 10위(2009년 시즌 종료 기준)의 기록이지만 다부치가 장거리 타자로서의 특필해야 할 점은 홈런 1개를 때려내는데 필요로 하는 타수의 적음이었다. 2009년 시즌 종료 기준으로 통산 300홈런을 기록한 선수는 35명이 있었지만 다부치의 홈런률(타수/홈런)은 오 사다하루, 알렉스 카브레라에 뒤를 이은 역대 세 번째였다.

  • 300개의 홈런 이상으로 홈런률이 15 이하의 선수(2009년 시즌 종료 기준)
성명 홈런 홈런률
오 사다하루 868 10.66
알렉스 카브레라 322 11.68
다부치 고이치 474 12.41
터피 로즈 464 13.52
마쓰이 히데키 332 13.77
나가이케 도쿠지 338 14.41
기요하라 가즈히로 525 14.88
오치아이 히로미쓰 510 14.95

특히 1983년은 타격 부진의 영향으로 82경기에 출전하면서 30개의 홈런을 치는 등 프로 야구계에서는 처음으로 ‘규정 타석에 채우지는 못했는데도 30홈런’을 기록한 선수가 되었다. 이 기록은 2009년 시즌 종료 시점으로 다부치를 포함한 5명이 기록하고 있지만 다부치 이외는 모두 외국인 선수에 의한 것이다. 프로 데뷔 경기는 다이요 웨일스전에서 에나쓰 유타카의 대타로 출전해 히라마쓰 마사지와 상대했지만 슈트에 손이 나오지 않는 삼진을 기록했다.

다부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상대하면서 강한 면모를 보여주었는데 요미우리가 전인미답의 ‘V9’을 달성한 1973년에는 다부치가 그 해 시즌 37개의 홈런 중 요미우리전에서만 16개를 기록하고 있었다. 같은 해 1경기에서 3개의 홈런을 두 차례 기록하고 있지만 이것도 모두 요미우리전에서의 기록이었다. 또, 요미우리전에서 5경기 연속 9개 홈런과 7타수 연속 홈런을 기록했고 우승 경쟁을 하고 있던 10월 10일 역시 요미우리전에서는 2대 5의 열세를 뒤집는 결정적인 역전 만루 홈런을 때려냈다. 이것은 다부치로서는 프로 데뷔 첫 만루 홈런이었지만 본인의 기억에 의하면 프로 뿐만 아니라 “야구 인생에 있어서의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음 날에 있은 요미우리전에서 한 번은 7대 0으로 리드하면서 에나쓰가 KO를 당해 10대 10으로 비겼고, 나머지 3경기에서는 매직 넘버가 ‘1’로 남긴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 주니치 드래건스에게 잇달아 연패, 마지막에 요미우리와의 최종전(10월 22일,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도 패하는 등 우승을 놓치게 되었다. 후에 다부치 본인도 “이 때 우승을 했더라면 자신의 야구 인생은 변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현역 시절 삼진의 갯수는 적었고 한 시즌에서 100개 이상의 삼진을 기록한 것은 한 번도 없었다. 정규 경기에서의 희생타는 한 개도 없었고[7] 통산 400홈런 이상을 기록하면서도 2000안타에 도달하지 못한 유일한 선수였다.

수비[편집]

젊은 시절에는 거구한 체격을 갖고 있었지만 포수로서의 움직임은 민첩했으며 대학 시절에 빠른 발을 가진 다카다 시게루와의 대결이 볼만했다. 프로에 입문하고 나서도 공을 받고난 다음 2루로 던질 때까지의 동작은 최상급이었고 강한 어깨를 가지면서 20대 무렵에는 도루 저지율이 4할대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소토코바 요시로로부터 받은 사구의 영향에 의해 청력의 저하나 체질 변화(비만)를 위해서 플레이가 완만하게 되어갔다고 말해질 정도였다. 흔한 예를 들 수 있는 것은 한신 시절에 아무것도 아닐 정도의 포수 플라이를 놓치면서 낙구를 한 플레이였다. 당시 한신에서 수비에 정평이 나 있는 쓰지 요시노리, 쓰지 야스히코 등과 같은 포수가 있었는데 일찍부터 1루수로의 전향이 시도되면서 1루수나 외야수로서도 자주 출전하기도 했다. 에나쓰 유타카의 말에 의하면 “포수로서 대성 할 수 없었던 요인은 대략적인 신경에 있다”라고 말한다.

그 밖에[편집]

일반적으로 ‘수상한 놈’을 갖추어진 것으로 여겨진 간판 포수 중에서는 드물게 털털하면서 인품이 좋은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다. 에나쓰 유타카도 다부치의 인간성에 대해 “‘부치’ 정도는 순수해서 안과 겉이 없는 사람은 없다”라고 말했다. 눈이 마주쳐서 한마디라도 인사를 해버리면 순간 상대가 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착실한 승부를 할 수 없어져버리기 위해서 경기 직전에는 상대 팀의 선수와 눈을 마주치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홈런만이 인생이다’), “맞으면 아프다”이며 인코스를 아슬아슬하게 던져서 타자를 위협할 것 같은 사인은 절대로 내지 않았다(에모토 다케노리에 의한)는 등 사람의 장점을 가리키는 일화는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또, 사인 훔친 것을 ‘비겁한 손’이라고 생각하면서 절대로 사용하지 않아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는 것을 습관으로 하고 있었다.

등번호 ‘22’[편집]

등번호 ‘22’번은 호세이 대학 시절에도 부착했고(주장이 된 1968년은 ‘10’번) 대학 시절에서의 통산 홈런도 22개를 기록했다. 한신에서의 등번호도 22번, 신인 시절의 홈런 갯수도 22개였는데 22라고 하는 숫자에는 이상한 인연이 있었다.

한신으로부터 세이부에 이적한 이후인 1983년에는 한신은 다부치의 공적을 인정하여 이적 후 비어있는 등번호가 되고 있던 등번호 22번을 호세이 대학 출신의 포수인 기도 가쓰히코에게 주었다. 그 후 세키카와 고이치(21번으로부터 변경), 나카타니 진(그 후 66번으로 변경)까지는 포수가 계속 되었지만 기다 고(외야수였지만 대학 시절에는 포수였으며 그 후 55번으로 변경), 마이크 킨케이드(내야수이지만 미국에서 포수로 활약한 경험이 있음)와 포수를 경험했던 야수가 계속 이어지면서 2005년부터는 투수인 후지카와 규지의 등번호가 되었다.

세이부에서는 다부치 이후의 22번을 부착한 포수가 많았는데 포수 외에도 유키자와 히사타카(현역 은퇴 연도인 1988년에만), 시미즈 요시유키 등 2명 뿐이며 2010년 현재도 포수 노다 고스케의 등번호가 되고 있다. 외야에만 전념하여 주전으로서 활약하기 이전의 와다 가즈히로(그 후 5번으로 변경)도 포수와 겸임해서 22번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이부의 전신인 니시테쓰·다이헤이요 클럽·크라운라이터 시대의 포수는 1950년의 가사이시 도쿠고로와 1951년의 고토 히로유키 등 두 명 뿐이었고 투수가 부착하고 있었던 시기도 있었는데 주력 투수로는 다마쓰쿠리 요지(외야수, 그 후 17번으로 변경), 히가시다 마사요시(외야수)나 요시오카 사토루(내야수였으며 다부치에게 22번을 양보한 다음에 8번으로 변경)등이 붙이고 있었다. 야구 선수로 뛰다가 후에 프로 골퍼가 된 오자키 마사시(투수 → 내야수)도 부착했었다.

인간 관계[편집]

  • 에모토 다케노리와는 호세이 대학의 1년 후배로 에모토가 한신으로 이적한 이후에는 학생 시절 이후의 배터리를 짰다. 후루자와 겐지를 포함해 세 명과 함께 행동하였고 다부치가 세이부에 트레이드와 관련하여 구단 측으로부터 불려간 날에도 3명이서 골프를 같이하는 등 장소를 옮기면서 구단의 재건책에 대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고 한다.
  • 세이부 시절의 팀메이트였던 히가시오 오사무와는 친구 사이였는데 히가시오는 다부치보다 4살 연하였지만 히가시오는 다부치와의 친밀감을 담아 ‘옷산’(オッサン)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상세 정보[편집]

출신 학교[편집]

  • 호세이 대학 제1 고등학교(현재의 호세이 대학 중학 고등학교)
  • 호세이 대학

선수 경력[편집]

지도자·기타 경력[편집]

수상·타이틀 경력[편집]

타이틀[편집]

  • 홈런왕 : 1회(1975년)

수상[편집]

개인 기록[편집]

  • 첫 타석: 1969년 4월 12일, 대 다이요 웨일스 1차전(한신 고시엔 구장), 9회말 에나쓰 유타카의 대타로 출전.
  • 올스타전 출장 : 11회(1969년 ~ 1976년, 1978년, 1979년, 1984년)
  • 4타수 연속 홈런(1973년 5월 9일 ~ 5월 10일)
  • 13타석 연속 출루(1974년 8월 6일 ~ 8월 8일)

등번호[편집]

  • 22(1969년 ~ 1984년)-그의 팀후배인 후지카와 큐지가 한신시절에 달았고, 지금은 오승환이 달고 있다.
  • 81(1990년 ~ 1992년)
  • 88(2002년 ~ 2003년, 2011년 ~ 2012년)

연도별 타격 성적[편집]

연도 소속




2

3





도루
실패
희생
번트
희생
플라이

고의
사구
몸에
맞는 볼








O
P
S
1969년 한신 117 412 359 47 81 15 1 22 164 56 1 6 0 2 42 1 9 98 12 .226 .320 .457 .777
1970년 89 355 316 40 77 11 0 21 151 40 1 2 0 0 32 3 7 74 6 .244 .327 .478 .805
1971년 80 329 276 34 63 5 0 18 122 45 2 2 0 2 45 3 6 68 8 .228 .347 .442 .789
1972년 128 533 469 71 121 16 2 34 243 82 2 1 0 3 55 14 6 91 12 .258 .341 .518 .860
1973년 119 499 398 77 102 6 0 37 219 90 0 2 0 7 85 24 9 69 16 .256 .393 .550 .943
1974년 129 529 407 83 113 14 0 45 262 95 2 2 0 4 102 28 16 67 13 .278 .437 .644 1.080
1975년 130 531 426 79 129 14 4 43 280 90 2 2 0 2 88 25 15 64 18 .303 .437 .657 1.094
1976년 130 515 440 82 122 14 0 39 253 89 1 0 0 2 65 8 8 56 12 .277 .379 .575 .954
1977년 102 381 341 48 89 11 0 23 169 59 2 0 0 2 32 4 6 40 11 .261 .333 .496 .829
1978년 117 467 413 64 119 8 0 38 241 89 1 2 0 2 44 5 8 50 9 .288 .366 .584 .950
1979년 세이부 107 429 382 59 100 14 2 27 199 69 0 1 0 4 33 1 10 54 9 .262 .333 .521 .854
1980년 123 507 440 75 117 9 1 43 257 97 3 3 0 5 49 3 13 79 13 .266 .353 .584 .937
1981년 86 330 283 31 70 3 1 15 120 49 0 0 0 3 40 2 4 39 11 .247 .345 .424 .769
1982년 114 386 340 43 74 8 0 25 157 59 0 1 0 3 40 1 3 51 6 .218 .303 .462 .765
1983년 82 349 300 56 88 11 0 30 189 71 1 0 0 1 43 2 5 31 5 .293 .390 .630 1.020
1984년 86 323 291 20 67 8 1 14 119 55 0 0 0 1 28 1 3 41 15 .230 .303 .409 .712
통산 : 16년 1739 6875 5881 909 1532 167 12 474 3145 1135 18 24 0 43 823 125 128 972 176 .260 .361 .535 .896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연도별 수비 성적[편집]

연도 경기 도루 시도 도루 허용 도루 실패 저지율
1969 82 58 27 31 .534
1970 88 67 30 37 .552
1971 1 0 0 0 -
1972 114 109 50 59 .541
1973 114 79 38 41 .519
1974 123 96 60 36 .375
1975 128 109 65 44 .376
1976 118 74 46 28 .378
1977 71 65 49 16 .246
1978 79 65 44 21 .323
1979 25 45 34 11 .244
1984 1 0 0 0 -
통산 944 767 443 324 .422

감독으로서의 팀 성적[편집]

연도 소속 순위 경기 승리 패전 무승부 승률 승차 팀 홈런 팀 타율 팀 평균자책점 연령
1990년 다이에 6위 130 41 85 4 .325 40.0 116 .251 5.56 44세
1991년 5위 130 53 73 4 .421 29.0 152 .253 4.74 45세
1992년 4위 130 57 72 1 .442 24.0 139 .258 4.60 46세
통산 : 3년 390 151 230 9 .396 B클래스 : 3회
  • 1990년부터 1996년까지는 130경기제.

주석[편집]

  1. 이 사건으로 인해 충격을 받은 야구계에서는 이후 귀를 보호하는 헬멧을 사용하게 되었다.
  2. 1973년 4월 26일 고라쿠엔 구장의 6회에 세키모토 시토시로부터 좌측 관중석을 향해 3호 홈런을 때려냈고 8회에 스가와라 가쓰야로부터 좌측 관중석에 4호 홈런(2점 홈런), 불방망이는 기세를 한층 더 늘어나게 되면서 9회에는 역시 스가와라로부터 5호 홈런(3점 홈런)을 기록했다. 그리고 계속된 5월 9일 요미우리(한신 고시엔 구장)와의 경기에서도 2회에 상대 투수인 다카하시 요시마사로부터 좌측 관중석에 9호 홈런(솔로 홈런), 다음 타석에서는 몸에 맞는 볼로 끝났지만 7회에는 다카하시로부터 좌측 관중석에 10호 홈런(2점 홈런)과 9회에도 역시 다카하시로부터 중견수 쪽에 11호 홈런(솔로 홈런)을 때려내는 등 6타수 연속 홈런 기록을 세웠다. 다음 날인 5월 10일에는 1회에 다카하시 가즈미로부터 좌측 관중석에 12호 홈런(2점 홈런)을 때려냈다.
  3. 현재에 이르기까지 포수로서는 마지막 홈런왕을 획득한 선수였다.
  4. 세이부 구단 역사상 최초로 40홈런이기도 하다.
  5. 다부치 이전의 예로서는 한신 등에서 감독을 역임한 후에 니시테쓰 라이온스의 투수 코치를 맡은 이시모토 히데이치가 있지만 이시모토는 프로 야구에서의 선수 경험이 없는 점이 다부치와는 다르다.
  6. ‘아티스트’와 홈런을 나타내는 ‘아치’를 결합한 조어이다.
  7. 한 번에 시도한 희생타가 실패로 끝났고 그 타석에서 홈런을 쳤기 때문에 주루 플레이가 느려서 병살타가 되면 감독들이 생각한 가능성이 있다.
     
    — 2008년 1월 17일에 방송된 NHK 라디오 프로그램 ‘우리 인생에 건배’에서의 본인의 발언.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