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구치 다카시 (야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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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구치 다카시
山口 高志

Takashi Yamaguchi

한신 코치 시절의 야마구치 다카시
(2012년 8월 17일, 메이지 진구 야구장)

기본 정보
국적 일본
생년월일 1950년 5월 15일(1950-05-15)(73세)
출신지 효고현 고베시 나가타구
신장 169cm
체중 73kg
선수 정보
투구·타석 우투우타
수비 위치 투수
프로 입단 연도 1974년
드래프트 순위 1순위
첫 출장 1975년 4월 11일
마지막 경기 1982년
경력

선수 경력

코치 경력

  • 한큐 브레이브스
    오릭스 브레이브스
    오릭스 블루웨이브(1983 ~ 1998)
  • 한신 타이거스(2003 ~ 2004, 2009 ~ 2015)


야마구치 다카시
일본어식 한자山口 高志
가나 표기やまぐち たかし
국립국어원 표준야마구치 다카시
통용 표기야마구치 타카시
로마자Takashi Yamaguchi

야마구치 다카시(일본어: 山口 高志, 1950년 5월 15일 ~ )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지도자이다.

현역 시절 1975년부터 1982년까지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맹활약하면서 팀의 황금 시대를 이끈 선수 중의 한 명으로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속구를 주무기로 삼아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가장 빠른 공을 던진 투수로도 알려져 있다.[1]

인물[편집]

프로 입단 전[편집]

효고현 고베시 나가타구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나 당시에는 몸무게가 3500g이 많이 나올 정도의 갓난아기였다. 다카시(高志)라는 이름은 야마구치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버지가 생각하고 있던 이름이었으며 “남자라면 뜻을 높게 가질 수 있다”라는 의미로 담겨져 있다. 야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고 어깨의 힘을 살려내면서 투수외야수를 맡았다. 중학교 시절에는 투수로 뛰었는데 이 때 고시엔 대회에서 본 다키가와 고등학교의 활약하는 모습을 보며 감동을 받았고 다키가와 고등학교의 진학을 목표로 하였지만 학비가 비싸다는 이유를 들어 고베 시립 신코 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고교 입학 초기에는 뼈의 발육에 이상이 생기면서 신체적인 문제로 인해 야구 연습을 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해 언제부터인가 등교 거부를 하였고 해수욕장 인근이나 집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는 다카토리산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희망을 잃고 있던 여름 무렵에 다카기가 신코 고등학교의 감독으로 부임한 것을 계기로 이 시점에서 야마구치의 전환기가 찾아오게 되었다. 야구에 대한 의지가 생기면서 가을 무렵부터는 맹연습을 거듭한 끝에 3학년 때는 춘계와 하계 대회 연속으로 고시엔 대회에 출전했고 효고 현 대회에서는 노히트 노런도 기록하기도 했다.

고교 졸업 후 간사이 대학에 진학했고 대학 시절에는 간사이 6대학 리그에서 아래와 같은 기록을 남겼다.

  • 통산 64경기 등판, 46승 11패, 평균자책점 0.92, 497 탈삼진.
  • 노히트 노런 : vs 도시샤 대학 3차전(1971년 추계 대회)
리그 통산 기록
  • 통산 최다 승리 : 46승
  • 연간 개인 최다 승리 : 18승
  • 리그전 21연승
  • 통산 최다 완봉 승리 : 19승
  • 1시즌 최다 완봉 승리 : 6승(2회)
  • 통산 최다 탈삼진 : 497개
  • 1시즌 개인 최다 탈삼진 : 100개
  • 5경기 연속 두 자릿수 탈삼진
  • 68이닝 연속 무실점
  • 6경기 연속 완봉

4학년 때인 제1회 미일 대학야구 선수권 대회의 일본 대표팀 선수로 출전했는데 후에 메이저 리그 MVP 선수를 포함한 미국 대표팀[2]을 상대로 일본 팀의 4승 중 3승[3]을 기록하며 최고 수훈 선수상을 차지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대학 선배인 무라야마 미노루와 연관되면서 ‘무라야마 2세’라는 별명이 붙여졌다.[1]

대학 졸업을 앞둔 1972년 10월에 돌연 프로팀 입단 거부를 선언하면서 “프로 선수로 뛰는 것이 자신이 없었다”라는 이유를 들었는데 같은 해에 있은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야쿠르트 아톰스가 4순위 지명을 강행했다.

야쿠르트로부터 드래프트 지명을 받았지만 입단을 거부하면서 이듬해 봄에는 마쓰시타 전기 산업에 입사했고 회사 내부에 있는 사회인 야구팀에 입단했다. 마쓰시타 전기 산업에 입사한 이유가 “세계의 일류 기업인 마쓰시타라면 프로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정년까지 부지런하게 일할 수 있어서 안정된 수입을 얻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샐러리맨으로 일하면서 야구를 할 때 “일도 야구도 어정쩡하게 하는 것보다 과감히 최고봉에서” 라는 기분이 야구 쪽으로 기울게 되었고 1974년에 있은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한큐 브레이브스로부터 1순위 지명을 받은 후 한큐에 입단하기로 결심했다. 등번호는 전년도까지 한큐에서 활약했던 신코 고등학교의 선배인 미야모토 유키노부가 달았던 ‘14’번으로 정했다.[4]

선수 시절[편집]

신인 시절인 1975년에는 시범 경기에서 기대 이상의 활약으로 순조로운 스타트를 끊었지만 정규 시즌에 들어가면서 2경기 연속 KO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는데 그 해에는 18차례의 완투와 시즌 12승을 기록하여 신인왕을 차지했다.[4] 그리고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6경기 중 4경기에 등판하면서 1승 1세이브를 기록하여 일본 시리즈 MVP를 석권했고[4] 3년 후인 1978년에는 중간 계투로 전향하면서 시즌 최다인 14세이브를 기록하는 등 최우수 구원 투수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러나 그 후에 열린 일본 시리즈에서 타격 연습 도중에 허리를 다쳤고[5] 1979년 이후에는 왼쪽 아킬레스건에 통증을 일으켜 성적이 침체될 정도의 뚜렷한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1980년에는 하리모토 이사오에게 통산 3000안타가 되는 홈런을 허용했고 2년 뒤인 1982년에는 8년 간의 현역 생활을 은퇴했다.

그 후[편집]

은퇴 후 1983년부터 1998년까지 친정팀인 한큐 → 오릭스에서 투수 코치를 맡았고 2003년부터는 한신 타이거스에서 투수 코치를 맡아 후지카와 규지 등을 육성했다. 2005년부터는 한신의 서일본 지구의 스카우트로 활동했고 2009년부터 2015년까지 다시 한신의 투수 코치를 맡았다.

플레이 스타일[편집]

커브도 던질 수는 있었지만 투구의 대부분은 프로 야구사에 남을 정도의[1] 속구였다. 컨트롤은 좋지 않았고 볼넷이 많은 투수였다.

구속에 관한 평가[편집]

상세 정보[편집]

출신 학교[편집]

선수 경력[편집]

사회인 시대
프로팀 경력

지도자 경력[편집]

수상·타이틀 경력[편집]

타이틀[편집]

수상[편집]

개인 기록[편집]

등번호[편집]

  • 14(1975년 ~ 1982년)
  • 74(1983년 ~ 1998년)
  • 84(2003년 ~ 2004년)
  • 85(2009년 ~ 2015년)

연도별 투수 성적[편집]














4






















4














W
H
I
P
1975년 한큐 32 22 18 4 1 12 13 1 -- .480 840 203.0 169 14 75 1 3 149 3 0 79 66 2.93 1.20
1976년 35 19 15 2 0 12 10 9 -- .545 821 197.2 156 18 91 0 6 152 4 0 68 62 2.82 1.25
1977년 42 13 10 2 0 10 12 11 -- .455 745 179.2 141 16 85 0 5 151 4 1 64 61 3.05 1.26
1978년 42 2 1 0 0 13 4 14 -- .765 519 122.2 90 11 60 1 7 95 6 0 43 38 2.78 1.22
1979년 16 0 0 0 0 1 0 6 -- 1.000 136 32.0 19 4 23 2 3 26 0 0 7 7 1.97 1.31
1980년 17 1 0 0 0 1 3 3 -- .250 136 28.0 27 5 31 1 0 12 1 0 16 16 5.14 2.07
1981년 3 0 0 0 0 0 0 0 -- ---- 42 9.0 13 2 3 0 2 4 1 0 11 11 11.00 1.78
1982년 8 1 0 0 0 1 1 0 -- .500 85 15.0 24 2 15 0 0 11 0 0 20 17 10.2 2.60
통산 : 8년 195 58 44 8 1 50 43 44 -- .538 3324 787.0 639 72 383 5 26 600 19 1 308 278 3.18 1.30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각주[편집]

  1. 특별 인터뷰 : ‘사회인 야구’와 ‘프로야구’- 야마구치 다카시씨에게 듣는다 - NTT 서일본 심볼 팀.
  2. MVP 선수는 프레드 린을 가리키며, 그 밖에 워렌 크로마티, 로이 스몰리 등이 있었다.
  3. 첫 경기에서는 크로마티를 5타수 무안타로 처리하여 13개의 탈삼진으로 완투승을 기록했고 7차전에서는 1피안타 완봉승을 거뒀다.
  4. 日めくりプロ野球09年1月 【1月26日】1975年(昭50) 222勝右腕よりスゴイ!剛速球山口高志、3球で「モノが違うで」 Archived 2012년 5월 31일 - 웨이백 머신 - Sponichi annex
  5. 실제로 1978년 10월 말 아리마 온천에서 열린 승리 축하회가 끝난 다음날에 팀 동료와 함께 골프를 하던 도중 발을 헛디뎠는데 야마구치 본인이 그 후 닛칸 스포츠에 연재되고 있는 칼럼을 통해 처음으로 밝혀졌다.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