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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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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중세 그리스어: Βασιλεία Ῥωμαίων
후기 라틴어: Imperium Romanum

330년~1453년
 

555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치세의 최대강역
555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치세의 최대강역
수도콘스탄티노폴리스
정치
정치체제전제군주제
황제
306년~337년
379년~395년
408년~450년
527년~565년
610년~641년
717년~741년
976년~1025년
1081년~1118년
1143년~1180년
1261년~1282년
1449년~1453년

콘스탄티누스 1세(초대)
테오도시우스 1세
테오도시우스 2세
유스티니아누스 1세
이라클리오스
레온 3세
바실리오스 2세
알렉시오스 1세
마누일 1세
미하일 8세
콘스탄티노스 11세(말대)
입법부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
역사
역사적 시대고대 후기~중세 후기
 • 콘스탄티노폴리스 설립330년 5월 11일
 • 최종 동서 분할395년 1월 17일
 • 만지케르트 전투1071년 8월 26일
 •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1204년 4월 13일
 •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1261년 7월 25일
 •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1453년 5월 29일
인문
공통어코이네 · 중세 그리스어
후기 라틴어
공통문자그리스 문자
데모님로마인
민족
인구
 년 어림약 16,000,000명
(457년 당시)

약 26,000,000명
(565년 당시)


약 7,000,000명
(775년 당시)

약 12,000,000명
(1025년 당시)

약 2,000,000명
(1320년 당시)
경제
통화데나리우스
(콘스탄티누스 1세 이전까지)

노미스마
(1092년 이전)

히페르피론
(1092년 이후)
종교
국교동방 기독교
(380년 국교화)
동방 정교회
(1054년 동서 대분열 이후)
기타 종교오리엔트 정교회
유대교
이슬람교
기타
동로마 제국의 왕조별 영토변화

동로마 제국(현대 그리스어: Ανατολική Ρωμαϊκή Αυτοκρατορία 아나톨리키 로마이키 아프토크라토리아[*]) 또는 비잔티움 제국(현대 그리스어: Βυζαντινή Αυτοκρατορία 비잔디니 아프토크라토리아[*])은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할된 395년부터 1453년까지 동방 황제의 치하에서 계속 존속한 로마 제국의 연속체이다. 수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였고, 제국의 공식 국호는 이전과 같은 로마 제국(중세 그리스어: Βασιλεία Ῥωμαίων 바실리아 로메온[*])이었다. 제국에 거주하는 주민들 역시 자국을 로마 제국 또는 로마니아(중세 그리스어: Ῥωμανία)[1]라고 불렀으며, 주민들은 자신들을 로마인(중세 그리스어: Ῥωμαῖοι 로메이[*])라고 불렀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 시대 초기부터 제국의 서부 지역은 점점 더 라틴화되었던 반면에, 동부 지역 대부분은 기존의 헬레니즘 문화를 유지했다. 이로 인해 동(東)그리스, 서(西)라틴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별이 생겨났다. 이후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로마 제국의 영역이 차츰 줄어들게 되었다. 324년부터 337년까지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1세는 제국을 재조직하여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요지인 비잔티움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명명하여 새로운 수도로 삼았고, 기독교를 공인했다. 테오도시우스 1세가 집권한 시기에 기독교는 제국의 국교가 되었고 여러 다른 종교 행위는 금지되었다. 마침내 이라클리오스 시기에 제국의 행정과 군사가 재조직되고 그리스어가 라틴어를 대체하는 공용어로 채택되었다.[2]

덕분에 '로마'라는 국가는 존속되었고 그 전통은 계속 유지되었지만, 현대 역사학자들은 동로마 제국의 중심이 콘스탄티노폴리스였다는 점과 그 문화가 라틴 문화보다는 그리스 문화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동방 정교회라는 종교적인 특징이 있기 때문에 고대 로마와 동로마 제국을 별개로 구별하고 있다.[1]

제국의 국경은 여러 차례 변화했으며 쇠퇴와 수복을 되풀이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기에 동로마 제국은 고토 수복 전쟁을 통해 역사적으로 서로마 제국의 영토였던 서지중해 일대를 회복함으로써 최대 영토를 확보했다. 이때 동로마 제국은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안달루시아, 시칠리아, 사르데냐를 점령하고 2세기 동안 이 지역을 다스렸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사후 페르시아와의 지속적인 전쟁으로 인해 동로마 제국의 국력은 상당히 소모되었는데, 이것은 7세기의 아랍 무슬림들의 침공 당시 제국이 상당한 영토를 잃어버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슬람 제국의 정복 전쟁으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이집트, 시리아와 같은 부유한 속주들을 상실했다.[3] 마케도니아 왕조 시기에 제국은 다시 팽창했고, 2세기 동안 지속되는 마케도니아 르네상스를 맞이했다. 특히 바실리오스 2세로 대표되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확장기에 동로마 제국의 영토는 발칸반도 대부분과 남이탈리아, 크레타, 키프로스, 소아시아와 아르메니아까지 넓혀져 7세기 이후 최대 강역에 달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스 8세 이후 시작된 내란과 급변하는 중동의 정세에 대처하지 못한 두카스 왕조의 황제들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튀르크에게 패배하여 소아시아를 잃게 되었다. 이후 튀르크족은 이 전투를 계기로 아나톨리아에 정착하게 될 발판을 마련하였다.

알렉시오스 1세부터 시작된 콤니노스 왕조 이후 제국은 다시 부흥했으며, 12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유럽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였다.[4] 그 정점인 마누일 1세의 치세에 동로마 제국의 경제력은 절정에 달했고 이때 제국의 영향권은 발칸반도 남부와 소아시아 대부분, 그리고 키프로스와 크레타, 안티오키아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도 절대 오래가지 못했다. 앙겔로스 왕조 황제들의 무능과 내전으로 국력이 약화된 제국은 제4차 십자군 때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약탈당하고 함락되었으며, 옛 동로마 제국의 남발칸계 국가들과 라틴 제국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1261년 미하일 8세에 의해 동로마 제국은 회복되었으나, 이미 그 영향력은 상당히 쇠퇴한 뒤였다.

미하일 8세가 개창한 팔레올로고스 왕조는 잦은 전쟁으로 국력을 손실시켜 아나톨리아의 잔존 영토로 밀려들어오는 투르크족을 막지 못했다. 또한 계속되는 내전 역시 국가 재건을 방해했다. 결국 14세기 이후 제국의 영토는 트라키아와 그리스 일부로 축소되었고, 요안니스 5세의 치세를 거치며 완전히 몰락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테살로니카, 모레아만이 영토로 남게 되었다. 마침내 제국은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이후 완전히 멸망했다.[5] 동로마 제국의 계승 국가였던 트라페준타 제국은 1461년 트라페준타 포위전으로 멸망했다.[6]

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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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7년 서유럽에서 독일인 역사가 히에로니무스 볼프가 제국의 사료를 모은 비잔티움 역사집(Corpus Historiæ Byzantinæ)을 출간하면서 칭하게 된 ‘비잔티움’란 표현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천도한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명된 비잔티온(기원전 667년에 메가라의 식민자들이 세운 그리스 도시)에서 나온 말이다. 이때부터 제국 수도의 구 명칭인 ‘비잔티움’은 사서나 시문 외에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1648년 '루브르의 비잔티움'(Byzantine du Louvre, Corpus Scriptorum Historiæ Byzantinæ)이 출판되고, 1680년 뒤 캉주의 '비잔티움 역사'(Historia Byzantina)가 출판되면서 몽테스키외를 위시해 프랑스 작가들 사이에서 '비잔티움'이라는 표현이 널리 퍼져 친숙해졌다.[7] 그이후 이 표현은 서방 세계에서 19세기에 일반 용어으로 굳어졌다.[8]

제국 사람들은 자국을 로마 제국(라틴어: Imperium Romanum, 그리스어: Βασιλ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 로마인의 제국(라틴어: Imperium Romanorum, 그리스어: Αρχη τῶν Ῥωμαίων), 로마니아[주 1](라틴어: Romania, 그리스어: Ῥωμανία), 로마 공화국(Res Publica Romana, Πολιτεία τῶν Ῥωμαίων),[10], 그라이키아(Γραικία),[11], 로마이스(Ῥωμαΐς)라고 불렀다.[12]

제국은 오랜 세월 다민족 국가이면서도[13] 그리스-로마 전통을 계승한 나라였다.[14] 당대 서방과 북방에서는 그리스인의 제국[주 2]이란 표현이 쓰였는데, 그것은 이 제국에서 점차 그리스적 요소가 우세해졌기 때문이다.[15]

서방 세계에서는 동로마 제국을 로마 제국의 연장이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의미로 해당 국가를 그리스인의 제국(Imperium Graecorum)으로 지칭하기도 하였다.[16] 적들에게서 자신을 지킬 도움이 필요했던 교황 레오 3세는 동로마 제국의 황위가 공위 상태[주 3]라고 간주하고 서기 800년 카롤루스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인정하여 대관식을 치루면서, 기존의 "로마 제국"으로서의 권위가 도전받았다.

로마 교황이나 서방 군주들이 동방 제국의 황제에게 '로마'라는 이름을 쓰려고 할 때 로마인의 황제(Imperator Romanorum) 대신 로마니아 황제(Imperator Romaniæ)라는 표현을 선호했는데, 그 이유는 전자를 서방인들은 카롤루스와 그 사람의 후계자를 일컫는 의미로만 썼기 때문이다.[17]

그러나 페르시아, 이슬람 그리고 슬라브 세계에서는 동로마 제국을 여전히 로마 그 자체로 간주하였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제국을 주로 (아랍어: روم , ‘로마’), 또는 빌라드 알 룸(Bilād al-Rūm, '로마인들의 땅')이라 불렀다.[18][19]

중국에서는 고대 로마를 불러 온 말인 대진(大秦)을 문맥에 따라 제국이나 근동 지방의 여러 나라 또는 시리아 정교회로 지칭하기도 하였다.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編)》을 보면, 북송 신종 때인 원풍 4년(1081년)에 대진국의 왕인 멸력이령개살(滅加伊靈改撒))이 사신을 보내 왔다고 기록돼 있는데, 이 대진이 로마 제국으로 추정되며, 또는 불름으로도 불렸다. 《송사(宋史)》 권490 열전 제249 외국6의〈불름(拂菻)〉에서는 위 원풍 4년의 일을 두고서 《속자치통감장편》과 달리 불름국의 왕인 멸력이령개살(滅力伊靈改撒)이 사신을 보냈다고 서술한다.

元豐四年十月, 其王滅力伊靈改撒始遣大首領你廝都令廝孟判來獻鞍馬·刀劍·眞珠, 言其國地甚寒, 土屋無瓦[...]

원풍(元豐) 4년(1081) 10월 불림국(拂菻國)의 왕(王)인 멸력이령개살(滅力伊靈改撒)이 처음으로 대수령(大首領)인 이시도령시맹판(你廝都令廝孟判)을 보내어 말과 도검(刀劍), 진주(眞珠)를 바쳤으며, 그 나라가 너무 춥고 흙으로 된 집에는 기와도 없다고 말하였다...(중략)

— 《송사(宋史)》 490제 열전 249권 외국 6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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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분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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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 사이에 일련의 연속된 사건들을 통해 로마 공화국은 점차 동부 지중해의 패권을 잡았고, 그 정부는 궁극적으로 황제의 1인 통치제로 변모했다. 로마 제국은 서기 3세기까지 상대적으로 안정된 시기를 누렸는데, 이후에는 외부 위협의 증가와 내부의 불안정과 같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군인 황제 시대가 열리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황제 중 한명이었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국가의 영토가 너무 커서 한 사람이 이것을 다 통치할 수는 없다고 보았고, 신행정 제도인 사두 체제(테트라키아)를 설립하여 제국의 영토를 동방과 서방으로 나누었다.[20] 그는 자신과 같은 공동 황제를 두어 정제라 칭하였다. 공동 황제(정제)는 각자 젊은 후계자인 부제를 두어 규칙에 따라 양위할 수 있게 했으나 실제로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퇴위하자 이 사두 체제는 무너졌으며, 뒤를 이은 콘스탄티누스 1세는 사두 체제 대신 황제 세습제를 세웠다.[21] 하지만 사두 체제의 설립은 로마 제국의 분열이 영속적으로 이어질 것임을 예고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22]

콘스탄티누스 1세의 두상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수도를 옮기면서 사회와 종교 체제에 중요한 변화를 일으켰다.[23] 기원후 330년에 그는 옛 그리스의 비잔티움을 제2의 로마(노바 로마)로 삼아 천도를 단행하였으며 이 도시를 자신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명하였다. 이전의 수도였던 로마가 중요한 동부 지방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전략적으로 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반면에,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동방과 서방 간 교역로에 위치한 요충지였다. 그리고 천도와 함께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도입한 행정 개혁을 다시 개선하였다.[24] 그는 금화[주 4]를 도입하여 화폐 변동성을 안정시켰으며 군사 조직 및 민정을 대대적으로 개혁하였다.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로마 제국은 상당한 군사력을 회복하였고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또한, 이 시대에 기독교는 더는 국가에 박해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황제가 관대한 특전을 베풂에 따라 로마 황실의 비호를 받았다. 새로운 종교의 통일된 교리를 정하고자 공의회를 소집해야 한다는 원칙을 설립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를에서 교회 회의를 소집했고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황제가 교회의 수장이라는 주장을 반영하였다.[26]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한 이후 로마 제국의 분열 양상.
  서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누스 1세의 사망 이래로 동방에서는 그의 개혁과 원칙이 꾸준히 계승되었다. 비록 콘스탄티누스 왕조사산조 페르시아와 오랜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363년 마지막 황제였던 율리아누스가 사망함으로써 단절되었지만, 이미 동방에서 세습의 원칙은 철저하게 확립된 뒤였으며 이후에도 새로운 왕조가 설립되어 계속 제국을 통치하였다. 이민족과의 전쟁 및 종교 논쟁, 그리고 반부패 운동 등으로 점철된 발렌티니아누스 왕조는 378년에 막을 내렸고 그 뒤를 이어 테오도시우스 왕조가 개창되었다. 왕조의 개창자 테오도시우스 1세는 제국 동서방 전역을 통치한 마지막 로마 황제였으며, 그의 치세는 이단으로 여겨졌던 네스토리우스파에 대한 신학적인 논쟁과 테오도시우스 법전의 편찬으로 특징지어졌다. 또한 이때 로마인들은 발칸반도를 황폐화시키고 제국으로부터 막대한 공물을 탈취해간 아틸라훈족이 유렵에 도착하는 것을 목격했다.[27]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죽자 그의 아들 아르카디우스호노리우스가 각각 동방과 서방을 맡았다. 아르카디우스의 동방 제국은 발칸반도, 소아시아, 레반트, 이집트, 그리고 동지중해의 섬들로 이루어졌다.

3세기와 4세기에 동로마 제국은 사회 및 문화가 서로마 제국보다 발달해 있었고 재정 자원 역시 풍부하였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공물을 지불함으로써 국가의 침략자들을 회유할 수 있었으며 용병을 고용할 여력이 있어서 대개 서로마 제국이 직면한 곤란한 상황을 도와주는 역할을 맡았다.

테오도시우스 2세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을 더욱 요새화한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건설하였는데, 덕분에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막강한 방어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어지간한 공격은 대체로 막아낼 수 있게 되었다. 이 성벽은 1204년까지 한번도 적의 공격에 무너지지 않았다.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의 공격을 피하고자 테오도시우스는 그들에게 공물(300kg의 금)[28]을 바쳤고 타 이민족과 교역을 장려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는 상인들에게 혜택을 주었다.

그를 계승한 마르키아누스는 훈족에게 이런 막대한 액수의 공물을 계속 바치는 것을 거부했으나, 아틸라는 이미 무너져 가고 있던 서로마 제국으로 관심을 돌린 뒤였다.[29] 453년 아틸라가 죽자 훈족은 몰락했고 동로마 제국은 남은 훈족 무리와 평화로운 관계를 이어나갔으며, 훈족들은 결국 로마 제국 군대의 용병으로서 싸우게 된다.[30]

아틸라가 죽자 동로마 제국은 평화기를 누렸으나 서로마 제국에서는 476년에 게르만족 출신의 로마 장군 오도아케르가 유명무실한 서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켰으며, 다른 꼭두각시 황제를 세우는 대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러나 율리우스 네포스 등은 달마티아와 이탈리아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다시 로마의 황제를 자임했다. 480년, 율리우스 네포스 마저 오도아케르에게 사망함으로써 서로마 제국은 최종적으로 붕괴되었다.

서로마 붕괴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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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폐위당하는 476년 또는 율리우스 네포스가 사망하는 480년을 서로마 제국 붕괴의 해로 보지만, 동방에 남아있던 로마 제국에서는 자신들이 로마 제국을 통일한 것으로 정치적으로 해석하였는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타당한 것이였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부는 오도아케르동고트테오도리크를 이탈리아의 파트리키우스로 봉한 것을 통해 형식적으로나마 이탈리아를 자신들이 석권한 것으로 여겼다. 동로마 제국은 이후 멸망할때까지 공식 국호를 로마 제국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단순히 적의 영향력 하에 들어간 실지 영역으로 인식되었다.

서로마 제국 멸망 당시 동로마의 황제였던 제논은 이탈리아를 회복하고자 모이시아에 정착해 있던 테오도리크동고트족과 협상하여 동고트족을 이탈리아로 보냈다. 493년 오도아케르가 몰락하자 젊은 시절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머물렀던 경험이 있는 테오도리크 왕은 이탈리아를 스스로 통치하였다. 테오도리크가 동고트 왕국으로 이탈리아를 통치하자 제논 황제는 서방 영토에 최소한의 명목상 수위권만 유지하였다.[27]

491년 로마인 혈통의 관리 출신인 늙은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황제가 되었으나, 새로운 황제는 498년이 되어서야 이사우리아족의 저항을 제대로 통제했다.[27] 자신이 여전히 기운차게 활동할 힘이 넘치는 개혁가이자 유능한 행정가라는 사실을 드러낸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상품 거래에 범용되는 폴리스(follis) 동화의 무게를 최종 결정하여 콘스탄티누스 1세의 화폐 제도를 최종적으로 완성했으며,[31] 세제를 개혁하고 사람들이 싫어하던 크리사르기론 세금을 폐지하였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죽을 당시 제국의 국고에는 금이 32만 파운드나 있었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이래로 제국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사망한 첫 번째 황제였다.[32]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단행한 일련의 개혁은 이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엄청난 대사업인 고토 수복 전쟁을 벌일 수 있게 하는 기반이 되어주었다.

서방 고토 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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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모자이크. 오늘날 라벤나 산비탈레 성당에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치세는 동로마 역사의 분수령이었다. 527년에 즉위한 그는 일리리아 지방 출신으로써 숙부 유스티누스 1세(518–527) 치세 때부터 권력을 쥐고 있었다.[33] 532년에 유스티니아누스는 동부 국경을 안정시키고자 페르시아 샤한샤 호스로 1세와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사산 제국에 많은 연공을 바치기로 합의하였다. 같은 해에 니카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황제는 생존하였고 관련자들 중 3만 명이 사망하면서 봉기는 막을 내렸다. 이 성공으로 유스티니아누스의 권력은 한 층 더 공고해졌다.[34] 3년 뒤, 동고트족테오다하드교황 아가피토 1세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내어 동로마 제국과의 중재를 부탁했다. 교황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의 평화협정에 실패했으나, 그와는 별개로 당대 동로마 제국에서 단성론이 횡행했음에도 그에게서 정통 신앙을 고수한다는 고백문을 받아내는데 성공하였다.

533년 황제가 북아프리카 구 속주의 반달족을 축출하게 벨리사리우스 장군과 군대 15,000명을 파견하면서 서방 고토 정복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경이로울 정도로 쉽게 승리했으나 548년이 되어서야 주요 독립 부족들을 복종시켰다.[34] 이탈리아 동고트 왕국에서 테오도리크 대왕이 죽고 그 사람의 조카이자 후계자인 아탈라리크와 대왕의 딸 아말라순타는 권력이 약한 테오다하드를 왕위에 올렸다. 535년 소규모 로마 제국 원정대가 시칠리아로 파견되어 손쉽게 승리하였으나 고트족의 저항이 커졌으며, 벨리사리우스가 로마와 나폴리를 포위하여 함락하고 라벤나를 수복한 540년에야 겨우 승리할 수 있었다.[35]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동로마 제국 판도.

그러나 546년 12월 17일 동고트족은 토틸라의 지휘 아래 이내 규합하여 로마를 함락하였다. 549년 초 벨리사리우스는 결국 소환되었다.[36] 뒤이어 551년 말 아르메니아인 환관 나르세스가 군대 35,000여 명을 이끌고 고트족을 물리쳤다. 토틸라는 부스타 갈로룸 전투에서 패사하였다. 그 사람을 계승한 테이아스도 552년 10월 몬스 락타리우스 전투에서 패하였다. 일부 고트족 부대가 계속 저항하였고 프랑크족알레마니족이 침입하였으나 이탈리아에서 전쟁은 결국 일단락되었다.[37] 551년 히스파니아서고트족 귀족 아타나길드는 왕에 반역하고 유스티니아누스에게 도와달라고 청했다. 황제는 늙었지만, 훌륭한 군 사령관 리베리우스에게 군대를 주어 파견하여 로마 제국은 이라클리우스 시대까지 스파니아(Spania)의 일부 지역을 점유했다.[38]

동부에서는 로마와 페르시아간의 전쟁이 이어지다가 561년 유스티니아누스와 호스로의 사절들이 50년간 화평을 맺었다. 550년대 중반 유스티니아누스는 전장 대부분에서 승리했으나 발칸반도만은 예외였는데 이곳은 슬라브인의 침입이 계속되었다. 559년 황제는 쿠트리구르스클라베니의 대규모 침략에 직면하였다. 황제는 퇴역한 벨리사리우스를 불렀으나 위기가 끝나자마자 자신이 상황을 관리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가 자신의 다뉴브 함대를 강화한다는 소식에 쿠트리구르인들이 우려하였으나 제국은 이들에게 공물을 지불하고 강 사이에 안전한 통로를 확보한다는 조약을 조인했다.[34]

유스티니아누스는 입법 사업으로도 유명하다.[39] 529년 10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설치하고 카파도키아인 요한네스가 위원장으로 삼아 고대 로마 법전을 개정하게 하여 로마법 대전(Corpus Juris Civilis)을 편찬하였다. 로마법을 수합한 이 법은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동부 지역에서 자고로 이어져 내려오는 그리스-로마 문화의 영향력은 6세기까지 건재하였고, 자연철학자 요한네스 필로포노스와 같은 그리스-로마 문화를 대표할 정도로 전형이 될만한 특징이 있는 학자들도 있었으나 나중에 기독교 철학과 문화가 부상하면서 옛 문화를 압도했다. 로마노스가 쓴 성가는 성체 전례를 발전시켰고 건축가들은 니카 반란으로 파괴된 구 성당 자리에 하기아 소피아 성당을 세웠다. 하기아 소피아는 오늘날까지 건축사에서 중요한 건축물이다.[27]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치세 전반기(527~539)에 동로마 제국은 놀라운 성과를 거두어, 북아프리카의 속주들을 회복하고 이탈리아에서 중요한 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 이것은 현명한 군사 운영과 신중한 노력의 결합에서 비롯된 것이였으며, 확장된 영토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처리하는 데 융통성을 발휘하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540년대부터 시작된 유스티니아누스 치세 후반기(540~565)에 이러한 균형을 이루는 일이 점점 더 힘들어졌다. 인력의 감소와 계속되는 군사원정은 지출을 증가시켰고, 다시 이것은 줄어들고 있던 국고에 결정타를 가했다.[40]

541년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 발생했다. 흑사병으로 추정되는 이 역병은 9세기에 사그라질 때까지 수백 년간 창궐했다가 잦아들기를 반복하면서 유라시아 서부의 정치경제 지형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 역병은 중동부 아시아 스텝 지역에서 기원한 뒤 인도나 페르시아를 관통하는 비단길을 따라 전파되었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인구가 크게 감소했고, 사회적 · 재정적 안정성이 심각하게 감소하여 경제가 쇠퇴함에 따라 국력이 매우 약화되었다.[41]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통치 기간은 다른 동로마 황제들보다 더 많은 성공을 거두었지만, 확실히 그에 비례하여 더 많은 위협이 생겨난 때이기도 했다.[42]

565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죽었을 때 제국의 재정은 완전히 파탄난 상태였으므로, 유스티누스 2세는 어쩔 수 없이 사산조 페르시아에 바치는 조공을 거부해야 했다. 한편 롬바르드족은 제국이 동쪽에 관심을 돌린 틈을 타서 이탈리아를 침공하였고, 6세기 말 마우리키우스의 치세에는 로마 제국의 영토로 남은 이탈리아 영토는 반도의 1/3 정도에 불과하였다. 유스티누스 2세의 후계자 티베리우스 2세는 페르시아와 싸우면서도 북방의 아바르족은 공물로써 회유하려고 했다. 티베리우스의 장군 마우리키우스는 동부 전선에서 활약하였으나 조공만으로는 아바르족을 달래지 못하였다. 아바르족은 582년 발칸 지역의 시르미움싱기두눔 요새를 함락하였으며, 이에 맞춰 슬라브족들이 다뉴브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마우리키우스는 사산조의 호스로 2세와 화평 조약을 맺어 아르메니아에 접근할 권리를 얻었으며, 제국의 역량이 발칸반도에 집중될 수 있도록 하였다. 602년에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을 다뉴브 강 이북으로 축출하기는 했으나[27] 그 뒤에도 서방 영토에 계속 이민족이 침입하자, 마우리키우스는 라벤나와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 황제 대리로서 총독을 두어 제국의 행정 효율성 강화에도 힘썼다.

감소하는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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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클리오스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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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마우리키우스가 재정난 해결을 위해 아바르족이 잡아간 포로들의 몸값을 지불하지 않은 것은 가뜩이나 긴축 정책으로 좋지 않던 그의 인기를 곤두박질치게 하였으며, 이에 포카스라는 장교가 마우리키우스를 죽이고 황제에 오르면서 유스티니아누스 왕조는 단절되고 말았다. 포카스가 마우리키우스를 죽이자 페르시아의 호스로 2세는 이를 구실로 로마령 메소포타미아 속주를 침공했다.[43] 포카스는 로마 사료에서도 줄곧 '폭군'으로 묘사될 정도로 인기가 없는 지배자였으며 원로원에서는 포카스에 대해 줄곧 모의를 꾸몄다. 610년에 포카스는 카르타고에서 뱃머리에 이콘을 붙인 배를 타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온 이라클리오스에게 결국 폐위된다.[44] 이라클리오스가 즉위하자 사산 왕조는 소아시아로 밀고 들어왔으며 615년까지 다마스쿠스예루살렘를 포함한 레반트 전역을 점령하고 최고 성유물이었던 성십자가크테시폰으로 가져갔다.[45] 이라클리오스는 622년 말엽부터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여 페르시아 군대를 수 차례 격파하였는데, 이것은 성전으로서의 성격을 띄며, 기독교의 아케이로포이에토스 성상이 군기로 쓰였다.[46] (626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한 아바르족을 무찌를 때도 세르기오스 1세 총대주교가 성모 성상을 들고 수도 성벽을 돌았던 덕으로 간주됐다.)[47] 사산 왕조의 주요 군대는 627년 니네베에서 궤멸되었고 629년에 이라클리오스는 성십자가를 되찾아 엄숙한 의식을 치르며 예루살렘으로 다시 옮겼다.[48] 그러나 이것은 피로스의 승리에 불과했다. 이 전쟁으로 상당한 국력을 소진한 양 제국은 발흥한 아랍 무슬림 군대의 침공에 완전히 무력하게 되었다.[49] 로마인은 636년 야르무크 전투에서 아랍인에게 대패했으며 634년에 크테시폰이 함락되면서 페르시아는 아예 멸망했다.[50] 641년에 이라클리오스가 죽자 동로마 제국은 영토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심각한 쇠퇴를 겪었다. 부유한 속주의 상실로 인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부는 이전 수입의 4분의 3을 잃어버렸다.[51]

650년의 로마 제국. 이 해에 제국은 카르타고 관구를 제외한 나머지 남부 속주를 전부 잃었다.

이제 아랍인은 시리아와 레반트를 확고히 장악했고 아나톨리아도 곧잘 급습했으며 674~678년 사이에는 심지어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도 공성전을 벌였다. 로마 제국은 그리스의 불 덕분에 아랍 함대를 겨우 무찔렀고 우마이야 왕조와 30년간의 휴전 조약을 조인했으나[52] 이슬람의 아나톨리아 공격은 계속되었고 고전기의 도시 문화는 가파르게 쇠퇴했으며, 여러 도시민들은 구 도시 성곽 내의 더욱 좁은 지역을 재요새화하거나 아예 주변 요새로 이주했다.[53]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도시 규모도 상당히 감소하였는데, 618년에 이집트를 페르시아인에게 빼앗기면서 자유롭게 이용할 곡물 생산지를 잃자 기존의 인구 500,000여 명이었던 것이 겨우 40,000~70,000여 명으로 급격히 줄었다.[주 5][54] 구 반자치 수준의 공공 제도가 무너지면서 들어선 테마 제도에 따라,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부는 아나톨리아 반도를 각 군대가 담당한 '속주'로 분할하여 민간 업무를 담당하고 제국 행정에 직접 관리받도록 하였다. 테마 제도는 이라클리오스가 임시변통으로 마련한 방책에서 기원하였으나 7세기에 이르러서는 제국 행정의 새로운 제도로서 이미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55]

그리스의 불은 로마 제국과 아랍인 간 전쟁기에 로마 제국 해군이 처음으로 썼다. (마드리드 스페인 국립 도서관, 마드리드 스킬리체스)

사산조 페르시아와 뒤이어 침입한 아랍 세력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발칸반도에서 상당한 병력을 차출한 것은 그 지역에 대한 동로마 지배력의 약화를 불러일으켰다. 슬라브족이 발칸반도 남쪽까지 세력을 점차 확장했고 아나톨리아에서는 여러 도시가 소규모 요새지로 전락했다.[56] 670년대에 불가리아인하자르 때문에 도나우 강 이남으로 밀려왔으며 680년에는 새로이 생긴 불가리아 정착지들을 해산하기 위해 파견된 로마 군대가 도리어 패배를 거듭했다. 이듬해 콘스탄티노스 4세는 불가리아의 아스파루흐 칸과 조약을 조인하였고, 그 과정에서 과거에는 명목상이나마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인정하던 수많은 슬라브 부족이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지배권 하로 대거 편입되었다.[57]

이라클리오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중과세 정책을 펼치고 '외부인들'을 행정직에 앉히면서 도시 귀족들의 권력을 분쇄하려고 했다. 687년~688년에 황제는 슬라브와 불가리아에 원정을 단행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별다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이에 그는 트라키아에서 마케도니아까지 자신이 어렵게 싸웠음에도 로마의 패권이 발칸반도 북부에서 예전같지 못한 사정을 현로했다.[58] 유스티니아노스 2세는 695년에 권력을 잃었으나 처음에는 하자르로, 그 다음에는 불가리아로 피신했다. 705년에 그는 불가리아 칸 테르벨의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 권좌를 되찾았고, 이후 남은 통치 기간을 정적 숙청과 신민 처형으로 점철된 공포 정치로 일관했다. 유스티니아노스 황제는 711년에 도시 귀족의 지원으로 결국 재차 쫓겨났으며 이라클리오스 왕조도 여기서 막을 내렸다.[59]

이사우리아 왕조에서 바실리오스 1세 즉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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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3세와 성상 파괴운동의 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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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3세 시대의 로마 제국. 717년경. 줄이 그어진 지역은 아랍에 침공받던 곳을 나타낸다.

이사우리아인 레온 3세 황제는 718년에 무슬림에게 반격을 개시하였는데, 주로 테르벨 칸이 도와준 덕분에 불가리아 군대로 하여금 아랍인 32,000여 명을 죽였다. 레온 황제는 또한 소아시아의 테마를 공고히 재조직하는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그의 후계자 콘스탄티노스 5세는 시리아 북부에서 아랍에게 대승하고 불가리아의 힘을 크게 약화시켰다.

826년 아랍인이 크레타를 점령하고 뒤이어 시칠리아까지 공격했으나 863년 9월 3일에 페트로나스 장군이 랄라카온 전투에서 멜리테네 아미르우마르 알 아크타와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크룸 칸의 지도 하에 불가리아가 제국의 큰 위협으로 떠올랐는데, 814년에 크룸의 아들 오무르타그와 평화 조약을 맺음으로써 잠시 동안이지만 숨을 고를 수 있게 되었다.[60]

8세기와 9세기는 성상파괴주의 논쟁으로 종교상 논란과 분열이 극심했던 시대였다. 레온 3세와 콘스탄티노스 5세는 이콘을 금지하고 성상을 파괴하라 명했으나 이에 제국 전역에서 이코노둘레스(성상 옹호자)가 반란했다. 이리니 황후의 노력으로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가 소집되어 이콘을 받들되 숭배하지는 않도록 정해졌다. 813년에 아르메니아인 레온 5세가 성상 파괴 정책을 재추진했지만 843년에 테오도라 황후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메토디오스 1세와 타협하여 이콘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결정됐다.[61] 성상파괴주의는 동서 교회가 더욱 멀어지는 사태에도 영향을 끼쳤으며, 이 시기의 소위 포티오스 논쟁으로 말미암아 교황 니콜라스 1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포티오스 1세가 총대주교로서 승격에 도전했다.

프랑크 제국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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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이탈리아 영토에 대한 종주권 요구를 넘어 이탈리아를 회복해야 할 실지로 여겼다. 랑고바르드 왕국의 군주들은 774년 멸망할 때까지 형식적이나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로마 황제에게 매년 조공을 바쳤다. 그러나 774년랑고바르드 왕국을 점령한 프랑크 왕국의 왕 카롤루스800년 12월 25일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서로마 황제의 제관을 받았다. 동로마 황제들은 예로부터 교황을 자신의 신하로 여겼으며 정치적으로 그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반전을 꾀한 레오 3세가 동로마 대신 새로운 파트너로 프랑크인의 군주 카롤루스를 택한 것이었다.

로마 황실에서는 카롤루스의 서로마 황제 제관 수여에 민감하게 대응하였고 그를 찬탈자, 가짜 황제로 규정하면서 반발하였다. 다만 카롤루스를 "서로마 황제"로 인정하는 것은 거부하되, 프랑크 왕국의 영토와 그 군사력을 묵살할 수는 없어 "황제"임은 일단 인정했다. 공식 문서에서 로마 제국은 카롤루스를 서로마 황제나 로마 황제가 아닌 프랑크인의 황제, 프랑크 황제라고 지칭하였다. 실제로 동로마 제국은 유일한 로마 제국으로서의 자신들의 역할이 흔들리고 있다고 여겼으며 그에 대한 반응으로 로마인의 우월성 및 정체성을 적극 강조하기 시작했다.[62]

이리니는 자신과 카롤루스와의 혼인 협상을 추진했지만, 고백자 테오파네스의 기록에 따르면 황후의 총신인 아이티오스로 말미암아 이 계획은 좌절되었다.[62][63] 이후 810년대에 와서 카롤루스의 딸 중 한 명과 콘스탄티누스 6세 사이의 결혼 동맹이 체결되기 전까지, 동로마에서는 프랑크족 출신 군주를 로마 황제로 승인하기를 거절하였다. 카롤루스가 죽은 뒤에 다시 동로마의 군주들은 그 후계자인 경건왕 루트비히이탈리아인 루트비히를 칭할 때 렉스 또는 레기움이라 칭하면서 황제 지위 인정을 거부하였다. 962년 독일 왕국오토 1세이탈리아 원정 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관을 수여받았을 때에도 역시 동로마 제국은 민감하게 대응하였다.

마케도니아 왕조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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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과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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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7년 로마 제국

867년을 전후하여 동로마 제국은 동부와 서부 양방에서 구 위상을 회복했으며, 제국을 방어하는 군사 구조의 효율성 덕분에 황제들은 동방 영토에 대한 재정복 전쟁을 개시할 수 있었다.

재정복 과정은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졌다. 크레타섬을 잠시 재정복했다가(843년) 로마 군대는 보스포로스 해협에서 패배한 와중에 황제들은 무슬림의 잇따른 시칠리아 침략을 막지 못했다(827년~902년). 무슬림은 오늘날 튀니지 땅을 발판 삼아 831년 팔레르모, 842년 메시나, 859년 엔나, 878년 시라쿠사, 900년 카타니아, 그리고 마침내 902년에 동로마의 최후 거점이었던 요새 타오르미나를 정복했다.[64]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타지에서 복수에 성공하는데, 이집트의 다미에타로 원정해 승리하고(856년), 멜라티네의 아미르를 무찔렀으며(863년 랄라카온 전투), 유프라테스강 방면으로 반격했다(870년대). 결과적으로 동로마 제국은 시칠리아를 상실하였으나, 바실리오스 1세는 남부 이탈리아 지방만은 잘 지켜내어 향후 200년간 이 땅은 동로마 제국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904년에 로마를 배반한 트리폴리의 레온이 이끄는 아랍 함대가 제국의 제2도시인 테살로니키를 약탈하면서 동로마 제국은 한 차례의 시련에 직면했다. 동로마 군대는 908년에 아랍 함대를 파괴했으며 2년 후에는 시리아의 라오디키아를 약탈하면서 이전의 굴욕을 보복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무슬림 세력이 치명타를 입을 만큼 확실하게 일격을 가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아랍인들이 911년에 크레타 수복을 시도하면서 제국 군대를 대타격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동로마 제국과 아랍 간 경계는 번갈아 반격하고 방어하는, 부단히 흘러 움직이는 상황인 일장일단의 형세에 놓이게 되었다. 한편 바랑인이 860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처음 침략하면서 제국의 새로운 위협이 되었다. 941년에 다시 그들은 보스포루스 해협의 아시아 쪽 해안에 나타났으나 금번에는 격퇴되었고, 907년에 로마 제국이 바랑인과의 외교 조약으로써 침략자를 방어하면서 제고된 제국의 군사상의 위상을 재확인만 해주었다. 바랑인을 무찌른 인물은 당대 유명한 장군이었던 요안니스 쿠르쿠아스였는데, 특히 메소포타미아에서 승리한 것(943년)에데사를 재정복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만딜리온 성물을 되찾아온 일(944년)은 그를 제국의 신민들로부터 경축받도록 만들었다.[64]

장군 출신의 황제인 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963년~969년 재위)와 요안니스 1세 치미스키스(969년~976년)는 제국의 영토를 시리아 남부까지 넓히고 이라크 북서부의 토후들을 무찔렀으며, 크레타키프로스를 아랍으로부터 재탈환하는 업적을 세웠다. 요안니스 1세의 치세에는 동로마 군대가 남으로 예루살렘까지 위협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제국 최대 위협으로 떠오른 파티마 왕조가 레반트를 거쳐 북상하면서, 알레포함단 토후령과 그 인근 지역만이 동로마 제국의 봉신국이 되었다.[65] 수차례의 전쟁 끝에, 바실리오스 1세는 로마령 시리아를 평정하고자 기병 40,000명을 급파하여 아랍의 최후 위협을 격퇴했으며 이로써 동부에서의 위협은 대부분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이후 바실리오스 2세는 불가리아와 시리아에서 승리해 얻은 잉여 자원을 동원해 아랍인이 장악하던 시칠리아를 수복할 원정을 계획한다. 1025년에 바실리오스 2세가 사망한 뒤, 1040년대가 되서야 원정대가 출정하여 당초 목적을 빈약하게나마 이루었다.[64]

불가리아와 제국 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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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록토노스(불가르인의 학살자)라는 칭호를 받은 바실리오스 2세. 그는 마케도니아 왕조에서 동로마 제국의 중흥기를 이끈 마지막 황제였다.

로마 교황청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 사이에 계속 이어졌던 장기간에 걸친 갈등은, 새롭게 기독교화한 발칸반도의 불가리아에서 양 세력의 종교상 수위권을 놓고 재대두했다. 이 일로 894년에 불가리아의 강력한 차르 시메온 1세가 동로마 제국을 침공했으며 황제는 온갖 외교 수단을 동원해 헝가리인에게 급히 부탁함으로써 이들을 겨우 물리쳤다. 그 뒤 불가로피곤 전투(896년)에서 동로마는 패배했고 불가리아인에게 연공을 바쳐야 했다. 912년에 시메온은 한술 더 떠 동로마 제국이 자신에게 불가리아 황제인 바실레프스의 관을 부여하게 하고 어린 콘스탄티노스 7세 황제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게끔 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차르의 계획은 좌절되었으나 그에 대한 보복으로 시메온은 트라키아를 재침공해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점령했다.[65]

레온 포카스로마노스 레카페노스가 이끄는 원정군이 출정했으나 917년 아켈로오스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군은 또다시 패배했으며 이듬해 불가리아인들은 코린토스까지 남하하여 북부 그리스를 유린했다. 923년 아드리아노폴리스가 불가리아 군대의 손아귀에 다시금 떨어졌고 924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양측이 공방전을 벌이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927년에 시메온이 사망하자 발칸반도의 정세는 그제서야 나아졌다. 968년에 불가리아는 키예프 루스스뱌토슬라프 1세에게 침략받았고 3년 후에 요안니스 1세 치미스키스 황제는 도로스톨론 전투에서 루스를 무찌른 뒤 트라키아 동부를 제국 영토로 되돌려 놓았다.

불가리아 제1제국 멸망전 지도

코메토풀리 왕조의 지도로 불가리아는 제국에 재저항했고 바실리오스 2세(976년~1025년)는 불가리아의 복종을 우선 과제로 삼아 몇 차례의 원정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바실리오스의 첫 불가리아 원정대는 트라야누스 관문에서 치욕스럽게 패배하였으며 황제는 몇 년 동안 아나톨리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느라 불가리아가 발칸 지역에서 자신의 영역을 넓히는 상황을 좌시할 수밖에 없었다. 양 세력 간 전쟁은 거의 20년 가까이 질질 끌렸다.

한 차례 실패를 경험했던 동로마 제국은 이후 스페르키오스 전투스코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불가리아를 확실하게 약화시켰으며, 해마다 작전을 수행함으로써 적의 유기적인 거점들을 조직의 성격을 띨 정도로 계속 줄여 나갔고 마침내 1014년 클리디온 전투에서 불가리아인들을 완벽히 패배시켰다.[66] 야사에서는 생포된 불가리아 포로들을 100명씩으로 나누어 99명은 눈을 멀게 하고 100번째 병사는 한쪽 눈만 남겨 맹인들을 고향으로 인도하게끔 하였다고 하지만,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는 현재까지 없다. 차르 사무일은 한때 용맹했던 불가리아 군대의 참상을 보고 충격으로 죽었다. 1018년, 불가리아의 마지막 요새가 항복했으며 그 지역은 동로마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이 승리 덕분에 동로마 제국은 이라클리오스 시대 이래 처음으로 다뉴브강 일대에 걸친 국경선을 확보했다.[65]

키예프 루스와 제국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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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0년부터 1100년까지 이르는 기간 동안, 동로마 제국은 흑해 북부 해안에서 일어난 키예프 루스와 이런저런 관계를 맺었다. 양국의 관계는 동슬라브족의 역사에 오랫동안 영향을 끼쳤다. 제국은 곧 키예프 루스의 무역과 문화 교류의 주요 상대가 되었으나 늘 사이좋게 관계하지는 않았다. 양 세력은 968년에서 971년에 불가리아에서 전쟁했고 루스인은 동유럽 평원의 하천들을 따라 남하하여 흑해 해안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침입하기도 했다. 대개 동로마 제국이 루스의 침공을 격퇴했음에도 불구하고 루스인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무역 조약을 조인했다.

포르피로게니타 안나 공주블라디미르 대공이 혼인하고 뒤이어 루스가 기독교화하면서 루스와 동로마의 관계는 매우 돈독해졌다. 동로마 제국의 성직자, 건축가, 예술가가 루스의 수많은 성당과 교회 건축에 초빙되면서 동유럽에도 동로마 문화가 전파되었다. 또한 수많은 바랑인들이 로마 군대에 용병으로 복무하였는데, 그중에는 유명한 바랑인 근위대도 있었다.

절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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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의 1025년 영토(가운데가 하얗게 칠해진 곳은 속국을 의미한다). 이 무렵 동로마 제국은 지중해의 강대국이었다.

마케도니아 왕조 시기의 동로마 제국 영토는 동쪽으로는 아르메니아, 서쪽으로는 남부 이탈리아칼라브리아까지 였다.[65] 동로마는 불가리아를 정복하고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의 일부 지역을 병합했으며, 안티오키아 바깥에서 아랍 이집트의 침략군을 궤멸시켰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아랍의 시칠리아 지배를 치욕으로 간주한 바실리오스 황제는 제1차 포에니 전쟁 이래 로마의 땅이었던 이 섬을 수복하기로 계획했으나 1025년에 바실리오스가 죽으면서 시칠리아 수복은 계획 상에만 그쳤다.[65]

레온 6세는 기존의 동로마 법을 그리스어로 성문화하는 업적을 남겼다. 60권에 달하는 이 기념비적인 작품은 이후의 모든 동로마 법의 기초가 되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연구되고 있다. 황제는 또한 제국의 행정을 개혁하여 각 지역의 행정 구역(테마/테마타)의 경계를 새롭게 세웠으며, 계급과 특권의 체계를 정비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다양한 무역 길드의 행동을 규제했다. 레온 6세의 개혁은 이전의 제국의 분열을 해소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동로마 정부에 대한 중앙집권화적인 정책을 가능하도록 했다. 그러나 제국의 증가하는 군사적 성공은 근본적으로 농민들을 농노소작농의 상태로 전락시켰으며 지방 귀족들의 권력을 강화하고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마케도니아 왕조 시대에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번영하여 9~10세기에 약 40만 명의 인구를 가진, 당대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부유한 도시로 거듭났다.[67] 이 기간 동안 동로마 제국은 세금 징수, 국내 행정 및 외교 정책을 감독하는 유능한 귀족과 공무원들로 구성된 관료 체계를 만들어냈다. 마케도니아 황제들은 또한 서유럽과의 무역, 특히 비단과 금속 세공품 등의 판매를 통해 제국의 부를 증가시켰다.[68]

11세기에는 종교상으로도 중요한 시기였다. 1054년에 동서 교회의 갈등은 돌이킬 수 없는 위기로 치달았다. 이미 조직 분리가 공식 선언된 바 있었으나 그 해 6월 16일 토요일 오후에 성체 의례 도중 교황이 파견한 특사 세 사람이 하기아 소피아에 들어와 제단에 파문을 내리는 교황 칙서를 놓음으로써 수백년 동안 이어져왔던 점진적인 갈등의 절정인 동서 교회의 분리, 이른바 동서 대분열이 일어났다. 그 원인은 교리적인 논쟁(특히 필리오퀘 문제)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으나 나중에 가서는 행정 및 정치 문제에 대해서까지 확대되어 수세기 동안 끓어올랐다. 동방 정교회서방 카톨릭의 공식적인 분리는 동로마의 미래에 대해 여러 결과를 가져올 것이었다.

위기와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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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동로마 제국은 수 차례의 시련을 겪는데, 테마 제도의 관리부실 및 군비 감축 등의 이유가 컸다. 니키포로스 2세와 요안니스 치미스키스, 바실리오스 2세는 기민하게 군대 단위(타그마타)를 개혁했고, 시민군을 직업군으로 개편하면서 원정군을 점차 용병으로 충원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하지만 용병은 비싼 데다가 9세기에 외부로부터의 침략 위험이 줄어들면서 대규모 진지와 값비싼 요새를 유지할 필요성이 감소했다.[69] 바실리오스 2세는 사망 당시 풍부한 재정을 확보해두었으나 후계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았다. 바실리오스의 바로 뒤를 이은 황제들은 아무도 전임자와 같은 군사·정치적 역량을 갖추지 못했으며, 제국의 행정은 점차 문민 관료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경제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물가 상승만 초래했고 금화 가치를 크게 떨어뜨린 판국에 군대는 불필요하게 재정에 부담을 줄 뿐 아니라 정치상의 위협으로도 비추어졌다. 따라서 동로마 자국 군대는 대부분 해산되었으며 대신 계약에 따라 외국인 용병을 부르는 것으로 안보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했다.[70]

이러한 상황에서 동로마 제국은 새로 등장한 야심 가득한 외적의 침략에 직면했다. 8세기 초에 이탈리아에 나타난 노르만족이 남부 이탈리아의 로마 영토를 침공했다. 1054년에 동서 교회 분열이 일단락되기까지 양 교회가 싸우는 사이에 노르만족은 느리지만 꾸준히 동로마령 이탈리아 영토로 진출했다.[71] 또한 1069년에 동로마 제국은 크로아티아의 페타르 크레시미르 4세의 침공으로 달마티아 해안 도시에서의 영향력을 잃었다.[72] 그러나 최대 재앙은 소아시아에서 일어났다. 1065~1067년 사이에, 중앙아시아에서 발흥한 셀주크 튀르크가 제국 국경을 넘어 아르메니아 및 조지아 일대로 군사 원정을 감행한 사태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아나톨리아 군사 귀족이 중시되면서 군부 출신의 로마노스 4세 디오예니스가 1068년 황제로 선출되었다.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인 1080년대 무렵 동로마 제국의 영토. 아나톨리아 영토를 거의 다 상실한 것이 보인다.

2년 뒤인 1071년 여름부터 로마노스 4세는 셀주크 세력을 소탕하기 위해 동부 지역에 대규모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 하지만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알프 아르슬란이 이끄는 셀주크 군대에게 동로마 제국군은 궤멸되었으며 로마노스 4세가 포로로 잡히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알프 아르슬란은 황제를 예우했고 동로마 제국에 가혹한 조건을 강요하지도 않았으나[70] 이미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미카일 두카스를 지지하는 정변이 일어난 뒤였으며 니키포로스 브리에니오스니키포로스 보타니아테스가 미하일 두카스에게 반발했다. 동로마 제국이 정치적으로 혼란한 사이, 셀주크족은 1081년까지 동쪽으로는 아르메니아로부터 서쪽으로는 비티니아에 이르는 아나톨리아 고원 전체를 석권하였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불과 88 km 떨어진 니케아에 도읍을 두었다.[73]

콤니노스 왕조와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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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시오스 1세와 제1차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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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지케르트에서 패배한 이후, 콤니노스 왕조의 혁혁한 노력 덕분에 동로마 제국의 국력은 어느 정도 회복될 수 있었다.[74] 콤니노스 왕조의 첫번째 황제는 이사키오스 1세(1057년~1059년 재위)였고 두번째 황제인 알렉시오스 1세는 등극하자마자 로베르 기스카르와 그 아들 보에몽 드 타란토가 이끄는 노르만족에 침략받았는데, 이들은 디라키온케르키라를 점령하고 테살리아라리사를 포위했다. 1085년에 기스카르가 죽으면서 노르만족 문제는 일시적이지만 완화되었다. 이듬해에 셀주크 술탄 역시 사망하면서 튀르크인들은 내적으로 분열되었다. 알렉시오스는 1091년 4월 28일에 레부니온 전투에서 북방을 지속적으로 위협하던 페체네그인을 자력으로 급습해 섬멸했다.[27]

테살로니케 조폐소의 첫 동전.

서부 지역의 안정을 확보한 알렉시오스는 악화된 경제 상황과 더불어 예로부터 제국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영토 방위 문제에 주목했으나,[75] 튀르크인들이 차지한 소아시아 고토를 회복하기에는 인력이 너무나도 불충분했다. 1095년 피아첸차 공의회에서 알렉시오스 1세의 사절단이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동방에서 기독교도가 겪는 곤란을 전하고, 만약 서방이 돕지 않는다면 이들이 계속 무슬림에 지배받게 되리라고 역설했다. 교황는 알렉시오스 1세의 요청이 서유럽 국가들을 결합시키면서도 자신의 권력을 강화할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76] 1095년 11월 27일, 우르바노 교황은 클레르몽 공의회를 소집하여 모든 기독교인들이 십자가의 표식하에 무기를 들고 예루살렘과 동방을 무슬림에게서 탈환하기 위해 순례적인 성격의 무장 군사 원정을 개시할 것을 촉구했다. 서유럽은 매우 흥분하여 미친 듯이 날뛰었다.[27] 이리하여 십자군 전쟁제1차 십자군 원정(1096~1099)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는 재앙이었다. 왜냐하면 프랑크인들은 동로마를 도와주기보다 소아시아에 자신의 속주들을 세우는 데에만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77] 동로마 입장에서도, 단기적으로는 안보 부담이 한층 감소하는 듯 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제국에 맞먹거나 어떤 부문에서는 오히려 제국을 능가하게 될 정도로 부쩍 성장한 카톨릭 서구권과의 충돌을 예고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주 6]

알렉시오스 1세는 서방이 용병 형태로 병력을 지원해주리라 예상했으며, 이렇게 거대하면서도 잘 훈련되지 않은 민병대 수준의 군대가 재빨르게 동로마 영토로 들어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황제는 십자군 주력군의 지휘관 8명 중 보에몽을 비롯하여 4명이 노르만족인 사실에 불만을 가졌으나,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통과하게 되는 상황이 오자 이들을 어느 정도 통제할 것이라고 다짐하였다. 알렉시오스는 자신은 십자군에게 길을 안내하고 그 사람들을 호위하도록 하는 대신, 십자군 지휘관들이 성지로 가는 도중에 튀르크인에게서 정복한 모든 도시와 영토를 동로마 제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십자군 측 대부분은 이에 서약하였다.[78] 알렉시오스 1세는 십자군의 도움에 힘입어 수많은 중요 도시와 도서를 비롯해 소아시아 서부 상당 지역을 회복할 수 있었으나, 십자군은 안티오키아 공성전 당시 알렉시오스가 자신을 돕지 않자 당초에 했던 서약이 무효라고 판단한다.[주 7][79] 보에몽은 스스로를 안티오키아의 공작이라 칭하면서 동로마 제국에 곧장 선전포고했으나, 1108년에 데아볼리스 조약을 체결한 뒤 알렉시오스 1세의 봉신이 되는 것에 합의함으로써 그의 치세에 노르만족의 위협은 일단락되었다.[80]

요안니스 2세와 마누일 1세, 그리고 제2차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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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십자군 원정 당시 예루살렘 공성전을 묘사한 중세 필사본.

1118년, 알렉시오스 1세의 아들인 요안니스 2세 콤니노스가 부친을 계승하여 제위에 올랐다. 성실하고 심신을 바침으로써 있는 힘을 다하는 황제인 요안니스 2세는 반세기 이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제국이 입은 손실의 만회에 적임자였다.[81] 경건하고 온화하며, 공정한 정치로 유명한 요안니스 2세는 잔인한 방식이 통하던 당시에는 극히 드물게도 도덕적인 지도자였는데,[82] 이러한 연유로 그는 동로마 제국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도 불렸다. 25년에 걸친 치세 동안 요안니스 2세는 서방의 신성 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었고, 베로이아 전투에서 페체네그인을 절멸에 이를만큼 확실하게 격퇴했으며[83] 소아시아에서는 튀르크인들을 상대로 수많은 전쟁을 친히 지휘했다. 그 덕분에 이 기간 동안 동방에서의 힘의 균형은 튀르크에게서 동로마 제국으로 바뀌었고, 제국의 군대는 소아시아 반도의 수많은 읍락, 요새, 도시를 수복했으며[84] 1120년대에는 헝가리인과 세르비아인의 위협을 좌절시켰을 뿐만 아니라 시칠리아 왕국의 노르만족 왕 루지에로 2세에 대항하여 독일 황제 로타르 3세와 동맹을 맺는 성과를 거두었다.[85] 치세 후반기에, 동방에서 주로 활동한 요안니스 황제는 멜라티네의 다니슈멘드 토후국을 무찌르고 킬리키아 전역을 재정복했으며, 안티오키아 공작 푸아티에의 레몽을 제압하여 동로마 제국의 우월성을 확인했다. 또한 요안니스 2세는 동로마 황제가 기독교 세계의 지도자라는 사실을 알리고자 동로마 제국 및 십자군 국가들의 연합군을 앞세워 성지로 진군하였으나, 십자군 동맹들이 배반하여 그의 희망은 좌절되고 말았다.[86] 1142년에 요안니스 황제는 안티오키아를 재압박하여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고 했지만 이듬해 봄에 사냥 도중 급작스럽게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였다. 그러자 레몽은 용기를 얻어 킬리키아를 침공했으나 패배하고 새로운 동로마 황제에게 자비를 청하고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야 했다.[87]

요안니스 2세 콤니노스(왼쪽)와 그의 황후 헝가리의 이리니(오른쪽)가 묘사된, 콘스탄티노폴리스(오늘날 이스탄불)의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서 발견된 모자이크. 가운데에는 성모 마리아예수가 보인다. 12세기의 작품.
콤니노스 시대가 막바지에 접어든 1180년경 로마 제국의 영토.

요안니스의 후계자는 그의 넷째 아들 마누일 1세 콤니노스였다. 마누일 1세는 동부와 서부 양면을 오가면서 이웃한 국가들을 상대로 공격적이고 확장주의적인 정책을 펼쳤다. 특히 팔레스타인에서 그는 예루살렘 왕국과 동맹을 맺고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여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를 침공했다. 또한 마누일은 안티오키아의 공작 르노 드 샤티용 및 예루살렘 왕 아모리 1세과 협정을 조인해 십자군에게서 우위를 확보했고 이를 바탕으로 십자군 국가의 지배자로서 국제 사회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강화하였다.[88] 1155년에 마누일 1세는 남부 이탈리아에 있는 여러 항구를 재장악하고자 이탈리아로 원정대를 보냈으나 내부 분열 때문에 원정은 결국 실패했다. 1167년 마누일은 헝가리 왕국을 침공하여 시르미움 전투에서 헝가리를 대파했다. 1168년에 아드리아해 동안 대부분을 장악한[89] 마누일 황제는 교황을 포함한 여타 서방 기독교 왕국의 통치자들과 수차례 동맹을 맺었으며 이러한 외교적 노력을 통해 제2차 십자군의 위협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90] 동부에서, 마누일 1세는 1176년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튀르크인에게 대패했지만, 패배로 입은 손실은 이내 금방 만회되었고 다음 해에 마누일의 동로마 군대는 튀르크인들을 무찔렀다.[91] 히엘리온-리모키르 전투에서 튀르크 침략군을 섬멸한 로마 군대 사령관 요안니스 바타체스는 수도에서 군대와 함께 진군했을 뿐만 아니라 현지에서 군대를 추가로 모집할 수 있었는데, 이는 동로마 제국의 군대가 여전히 강력하며 소아시아 서부의 방어 제도가 아직 건재하다는 신호였다.[92]

12세기의 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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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안니스 2세와 마누일 1세는 활발한 군사 원정을 단행하여 도시 및 주요 거점들을 공격하고 방어하는 활동에 상당한 자원을 동원하면서도, 공격적인 요새화 정책을 제국 군사 정책의 핵심 기조로 삼았다.[93] 비록 동로마 제국이 미리오케팔론에서 한 차례 패배를 겪었지만, 알렉시오스 1세, 요안니스 2세, 마누일 1세의 정책 덕에 광대한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소아시아 및 유럽 양방 국경의 안정성을 높였다. 1081년부터 1180년까지 콤니노스 왕조 치하의 동로마 군대는 제국의 안보를 확립하고 동로마 문명이 번영을 구가하도록 하였다.[94]

이를 통해 서방 속주는 12세기 말까지 지속된 경제 부흥을 이룰 수 있었다. 7세기에 페르시아의 침입을 받은 이래로 콤니노스 시대의 동로마 제국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그 어느때보다 가장 번성했다.[출처 필요] 12세기 내내 제국의 인구는 급격히 증가했고, 농지 면적이 확대되면서 생산력 역시 매우 증대되었다. 유럽과 소아시아의 고고학적 증거는 이 무렵에 도시 및 정착지의 규모가 상당히 커진데다가 새로운 도시 수가 눈에 띄게 증가했음을 보여준다. 무역도 번성하였는데, 특히 베네치아제노바의 상인들은 에게해에 있는 항구에서 출발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계 거점으로 삼아 십자군 왕국을 거쳐 파티마 왕조의 이집트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당대 무역을 주도하였다.[95]

예술 분야에서도 모자이크화가 부흥하고 지역적인 건축 학파들이 여러 독특한 양식을 창조해냄으로써 각지에 문화상 영향을 전파했다.[96] 12세기 로마 제국에서는 고전 시대 저자들에 대해 관심이 되살아나면서 초기 인본주의의 모델을 창출했다. 테살로니케의 에우스타티오스는 동로마 제국의 다른 것보다 가장 특별히 눈에 띄는 인본주의를 언급한다.[97]

쇠퇴와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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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겔로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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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겔로스 왕조 후반기의 동로마 제국

1180년 9월 24일에 마누일 1세가 사망하자, 당시 11살이었던 아들 알렉시오스 2세 콤니노스가 제위에 올랐다. 알렉시오스는 정치에 무능했고, 프랑크계 세력을 등에 업은 안티오키아의 마리아 탓에 섭정은 인기가 없었다.[98] 결국 알렉시오스 1세의 손자 안드로니코스 1세 콤니노스가 어린 황제에게 반기를 들고 정변을 일으켰다. 1182년에 수도로 진군하여 라틴인들을 학살한[99] 안드로니코스는 잠재적인 정적이 될지도 모를 세력들을 제거하고서 1183년 9월에 공동 황제로 즉위했고, 곧 알렉시오스 2세를 처단한 뒤 12살 난 프랑스의 아녜스를 자신의 황후로 맞이했다.[99][주 8]

제3차 십자군이 이코니온을 점령했다.

안드로니코스 1세의 출발은 괜찮았다. 특히 그가 제국 행정부를 개혁하고자 쓴 수단은 역사가들에게 높이 평가받았다. 안드로니코스는 부패를 근절하려고 시도했는데 그의 시대에 매관매직이 없어지고 편향이 없이 능력과 공로에 따라 관리를 선발했으며, 뇌물의 유혹을 막고자 관리에게 충분한 봉급을 지불했다. 지방 관구에서 안드로니코스의 개혁은 신속하고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였다.[100] 하지만 귀족들은 안드로니코스에게 분노했으며 상황이 나빠지자 균형을 잃어 처형과 폭력을 일삼는 공포정치로 선회한[101] 안드로니코스는 귀족 세력을 아예 절멸하려고 했다. 귀족과 황제의 권력투쟁은 대규모 살육으로 이어졌고 황제는 정권을 유지하고자 더욱 무자비한 수단을 휘둘렀다.[100]

당시 이사키오스 콤니노스가 키프로스를 장악하고 헝가리의 벨러 3세가 크로아티아 영토를 병합했으며, 세르비아의 스테판 네마냐는 동로마 제국에 독립을 선언한 상황이었는데, 1185년에는 시칠리아의 굴리엘모 2세가 배 300척에 병력 80,000 명을 이끌고 동로마 제국을 대대적으로 침략했다.[102] 안드로니코스는 수도를 방어하고자 100척 규모 소함대를 동원했으나 황제가 보낸 암살자를 도로 죽인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가 시민에게 지지받아 권력을 잡고 안드로니코스 황제를 죽였다.[103]

이사키오스 2세와 그의 동생 알렉시오스 3세 시대에 동로마인들은 중앙집권적인 제국 행정부와 방어 체계가 붕괴되는 것을 보았다. 노르만족은 그리스 일대를 약탈했고 1186년에 블라흐족과 불가르족이 반란을 일으켜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을 세웠다. 그러는 사이에 앙겔로스 왕조는 막대한 국고를 탕진했으며 재정적으로는 부정 부패에 시달렸다. 이제 동로마 제국의 권위는 심각하게 손상되었고 제국 중심에 권력의 공백이 커지면서 나라의 분열을 부채질했다. 1204년 이전에 이미 트라페준타에 일부 콤니노스 왕조 귀족들이 세운 반독립 국가가 있었다는 사료도 있다.[104] 알렉산드르 바실리예프는 "그리스계 출신의 앙겔로스 왕조는 이미 쇠약해졌으며, 분열되고 있던 제국의 파멸을 가속화했다."라고 기록했다.[105]

제4차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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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입성》, 외젠 들라크루아, 1840년작.

1198년에, 교황 인노첸시오 3세교황 특사회칙서를 통해 새로운 십자군 창설을 제의했다.[106] 당초 이 십자군은 레반트 무슬림 세력의 중심지였던 이집트를 목표로 했다. 1202년 여름에 베네치아에 당도한 십자군은 예상보다 규모가 작았고 이집트로 가고자 고용한 베네치아 함대에 지불할 비용도 불충분했으며, 도제 엔리코 단돌로가 이끄는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집트와 밀접하게 교역하는 관계였으므로, 교황과 십자군 양측은 서로 이해관계가 상이했다.[107] 베네치아는 십자군에게 함대 사용료를 지불하는 대신에 달마티아차라 항구를 장악해 달라고 요구했고 곧 승낙을 받았다.[주 9] 1202년 11월 짧은 공성전 끝에 차라 시는 함락되었다.[109] 인노첸시오 교황은 베네치아의 이러한 계획을 알고 서신을 보내어 이들을 파문했지만, 그들을 곤경에 빠뜨리고 싶어하지는 않았으며 이듬해 2월에 이들의 파문을 조건부로 면제했다[주 10][107]

제4차 십자군의 침공 이후 동로마 제국의 분열.

샹파뉴 백작 테오발드 3세가 죽자 십자군의 지휘권은 호엔슈타우펜 왕가 출신의 슈바벤의 필리프의 친구인 몬페라토의 보니파치오에게 넘어갔다. 보니파치오와 필리프는 모두 동로마 제국 황족과 혼인했다. 필리프의 이복형제이자 폐위된 장님 황제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의 아들인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는 자신을 도와줄 세력을 찾던 와중에 십자군과 접촉했다. 알렉시오스는 동로마제국과 로마의 양 교회를 통합하고 십자군에게 은화 200,000 마르크를 지불하며, 그들에게 합세하여 이집트에 가는데 필요한 모든 물자 및 일정한 수의 병력을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110] 인노첸시오는 십자군이 기존 목표였던 이집트가 아닌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한다는 계획을 알아챈 뒤 이 도시를 공격하지 말도록 명령했지만, 그의 칙서는 십자군 함대가 차라를 떠나고서야 도착했다.

1203년 여름,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당도했고 알렉시오스 3세는 수도를 탈출했으며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는 아버지 이사키오스 2세와 함께 공동 황제가 됐으나 그들은 당초에 약속했던 보상을 지급할 수 없었고 얼마 뒤에 알렉시오스 5세에게 폐위당했다. 1204년 4월 13일, 도시를 다시 점령한 십자군은 사흘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약탈과 학살을 벌였다.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수많은 이콘과 유물 그리고 다른 보물들이 사라졌는데, 후일 이것들은 서유럽과 베네치아에 대거 등장했다. 연대기 작가 니케타스 코니아테스는 심지어 매춘부가 총대주교좌에 앉혀지기도 했다고 말한다.[111] 인노첸시오 교황는 십자군이 자행한 일을 듣고 실망과 분노를 금치 못해 분명한 말로 이 사람들을 비난했으나, 상황은 이미 교황의 손을 떠난 뒤였으며 교황 사절이 직접 십자군에게 성지로 진격하겠다는 맹세를 면제시켜 준 이후로는 더욱 그러했다.[65][107] 질서가 회복되자 십자군과 베네치아는 전에 맺은 합의를 실행했다. 플랑드르의 보두앵은 황제로 선출되고 베네치아인 토마스 모로시니가 총대주교로 임명되었다. 특히 베네치아는 영토보다는 상업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콘스탄티노플의 주요 지역을 차지했으며 그 도제는 '로마 제국 전체의 1/4를 다스리는 군주'[주 11]라는 칭호를 획득할 수 있었다. 한편 십자군 지도자들은 제국의 영토를 분할하여 라틴 제국을 세웠으나 니케아, 트라페준타, 에페이로스에선 동로마 제국 세력이 건재했다.[107]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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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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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4년 라틴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한 뒤, 그 잔재에서는 동로마 제국의 후계국인 니케아 제국에페이로스 공국이 들어섰으며 트라페준타의 알렉시오스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하기 몇 주 전에 트라페준타 제국을 건국했다. 세 후계국 중에 에페이로스와 니케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을 만한 기회가 있었으나 니케아 제국은 이후 몇십 년간 생존에 급급했고 13세기 중엽에 이르면 아나톨리아 남부 영토 상당수를 잃었다.[112] 1242년~1243년의 몽골의 침입으로 룸 술탄국이 쇠퇴하자 아나톨리아 각지에는 튀르크 토후들가지들이 각자 공국을 이루며 할거하면서 이 지방에서 동로마 제국의 세력도 약화되었다.[113] 이때 토후 중 한 사람이었던 오스만 1세가 후일 로마 제국을 멸망시킬 오스만 제국을 세우나, 몽골이 침입하여 니케아 정부는 셀주크 세력의 공격을 잠시나마 받지 않게 됨으로써 라틴 제국의 공격에 역량을 집중할 수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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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직후의 동로마 제국

라스카리스 왕조가 세운 니케아 제국은 1261년에 라틴인으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했고 에페이로스 역시 격파하는데 성공했다. 그 덕분에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 치세에 동로마 제국은 짧게나마 부흥했으나 전쟁으로 피폐해진 제국은 당시 주변을 둘러싼 적들을 막을 준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못했다. 미카엘 황제는 라틴인과 계속 전쟁을 이어가기 위해 소아시아 영토에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중과세 정책을 펼쳐 농민들의 분노를 샀다.[114] 제4차 십자군에 의해 황폐해진 수도를 복구하고자 대규모 건설 사업이 벌어졌지만, 이러한 것들 중 그 아무것도 튀르크인들 및 무슬림들의 침략에 시달리던 소아시아의 농민에게는 전혀 위안이 되지 못했다.

미하일 8세는 소아시아의 영토를 지키기보다는 유럽 방면으로 영토를 넓히는 쪽을 택했는데, 얼마 동안은 성과를 얻었다. 라틴인에게 수도가 재약탈되는 사태를 피하고자 황제는 교회로 하여금 동로마에 복종하게 강제했으나 이것은 미하일 및 제국 행정부를 증오하는 농민들을 향한 임시방편책일 뿐이었다.[115] 안드로니코스 2세와 그의 손자 안드로니코스 3세는 동로마 제국을 이전의 영광으로 회복시키기 위한 최후의 노력을 행했다. 그러나 이들의 용병 사용은 종종 역효과를 낳았는데, 특히 카탈루냐 용병대가 농촌 지역을 황폐화시키고 약탈을 일삼으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부는 민심을 상실했다.[116]

오스만 제국의 발흥과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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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 15세기의 프랑스 세밀화.

안드로니코스 3세가 죽고 내전이 발발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했다. 6년간 이어진 내전으로 인하여 제국은 황폐화되었고 그 와중에 스테판 두샨이 동로마 제국의 잔존 영토들을 점령한 뒤 세르비아 제국을 건국했다. 또한 1354년에 갈리폴리에서 지진이 일어났는데, 이 틈을 타 오스만 제국[주 12]이 그곳을 점령하고 이를 기반으로 유럽에 진출하였다.[117] 동로마 제국이 내전을 끝낼 즈음에 오스만 제국은 이미 세르비아를 패퇴시켜 봉신국으로 삼은 뒤였다. 마침내 코소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오스만 제국은 발칸반도의 패자로 떠올랐으며 그 지역 대부분을 점령하였다.[118]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직전의 동지중해 지도.

그제서야 황제들은 서방에 지원을 호소했지만, 교황은 오직 로마 교회와 동방 정교회의 재통합을 조건으로 지원을 고려할 뿐이었다. 제국 행정부는 진지하게 교회 통합을 고려하여 때로는 칙령으로 통합을 명령하기도 했으나, 정교도를 믿었던 주민과 성직자들은 로마의 서방 교회 및 라틴 전례의 권위에 격렬하게 반발했다.[119]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기독교를 수호하고자 일부 서방 군대가 오기도 했으나 서방 지배자 대부분은 자신들의 일로 말미암아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 제국의 잔여 영토를 잠식하는데도 아무도 돕지 않았다.[120] 이 시기에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인구가 급감하여 벌판에 마을 군집이 모인 정도 밖에 안 되는 초라한 도시로 전락했다. 1453년 4월 2일, 오스만 술탄 메흐메트 2세의 군대 80,000여 명과 대규모 비정규군이 도시를 포위했다.[121] 병력 수를 기준으로 열세였던 기독교도 군대[주 13]가 필사적으로 성벽을 방어했음에도 불구하고[120] 2개월간 벌인 공성전 끝에 1453년 5월 29일에 오스만 제국은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켰다. 동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레올로고스는 적군이 도시 성벽을 장악하자 황제의 예복을 벗고 전투에 뛰어들어 장렬히 전사했다고 전해진다.[122]

멸망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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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흐메트 2세는 1460년 미스트라를, 1461년에 트라페준타 제국을 정복함으로써 동로마 제국의 잔재를 모두 소멸시켰다. 다만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조카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는 이미 소멸된 동로마 황제의 칭호를 물려받아 1465년부터 1503년 죽을 때까지 그것을 지녔다.[17] 15세기 말엽에서 16세기 중반까지, 메흐메트 2세의 후계자들의 치하에서 오스만 제국은 소아시아와 발칸반도 전역, 헝가리, 레반트와 이집트, 이란 서부 지역 및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마그레브에 그들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또한 오스만 술탄들은 20세기 초 제국이 공식적으로 멸망할 때까지 자신들이 동로마 제국의 적법한 후계자라고 간주하였다.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죽자 모스크바 대공국이반 3세동방 정교회의 보호자로서 황제의 역할을 자처하였다. 그는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의 누이 소피아 팔레올로기나와 혼인했고 그 손자 이반 4세는 처음으로 러시아차르가 되었다.[주 14] 이반 4세의 후계자들 역시 오스만 술탄처럼 자신들이야말로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적법한 후계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모스크바 대공국이 러시아 제국으로 변모한 이래로도 이러한 생각은 계속되었으며,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제국이 무너질 때까지 존재했다.[123]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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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기독교 제국으로의 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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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년, 제국 전역의 신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안토니누스 칙령이 반포되었다. 이것은 로마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던 사람들에게까지 권리가 주어졌다는 점에서 로마 국가의 가장 큰 혁신 중 하나였으며,[124] 제국 인구의 3분의 2에 영향을 미쳐 제국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었다. 그 후인 249년에 데키우스는 기존의 로마 다신교를 부흥시키기 위해 모든 신들에게 공개적으로 제물을 바칠 것을 요구했는데, 212년의 선례를 따르는 것들 중에는 전례가 없는 규모였으며 제국이 획일적인 종교적 실천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했다.[125]

디오클레티아누스의 284년 헌법 개혁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왕조 전통을 완전히 종식시키는 것이었다.[126] 국가는 신민들의 사적인 문제에 점점 더 많이 개입하기 시작했다.[127]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를 지지하고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버리면서 권력 구조는 영구적으로 바뀌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의 구성은 동방 지역의 정치적인 독립을 가져왔다.[126]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이교도의 종교를 본질적으로 금지하는 일련의 칙령들을 공표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제국 전역에서 이교도들의 희생, 의식, 그리고 예배 장소에 대한 접근이 일체 제한되었다.[128] 올림픽 경기 역시 393년을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129]

서기 5세기까지 헬레니즘 문화는 로마의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130] 기독교 교회에서의 신학적인 논쟁은 그리스어의 중요성을 크게 높였고, 이에 따라 그리스어는 헬레니즘 철학 등의 사상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131] 이것은 신플라톤주의와 같은 철학들이 기독교 신학을 거대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다만 앤서니 칼델리스(Anthony Kaldellis)는 로마의 기독교를 두고 "국가에 더 깊이 통합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정치적, 사회적, 정치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라고 생각한다.[132]

노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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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이 이루어질 무렵, 로마 영내의 노예는 약 3백만 명(전체 인구의 15%)에 달했다.[133] 유발 로트만(Youval Rotman)은 이 기간 동안 노예제가 변화한 것을 두고 "다양한 정도의 부자유"라고 묘사한다.[134] 이전의 노예들이 했던 역할은 곧 자유민들 사이에서 수요가 많은 직업(가정교사와 같은)으로 대체되었고, 국가는 토지에 묶인 세입자 즉 속주인들을 자유민과 노예 사이의 어딘가로 규정하여 새로운 법적 범주로서 이를 장려했다.[135] 294년, 어린아이들의 노예화는 금지되었고 호노리우스는 전투 포로였던 노예들을 해방시켜 주었다. 후대의 황제들 역시 노예들을 점점 해방시켜주기 시작했다.[136][137] 제도적인 측면에서 기독교의 영향은 별로 없었지만, 국가 정책은 기독교인들이 노예가 되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노예 거래에 규제를 매기고 만약 그들이 포로나 노예가 된다면 몸값을 지불하는 것을 의무로 삼게 되었다.[138]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제는 안정적이고 꾸준하게 비기독교인들이 공급됨에 따라 지속되었다.[139][140]

사회경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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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이 조세의 주요 기반이었으며, 국가는 생산성 향상을 위해 신민들을 한 토지에 영구히 묶으려고 시도했다.[141] 황제는 가장 많은 토지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고 그 뒤에는 원로의원들이 있었다. 비록 소도시와 대도시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었겠지만, 지역의 총독들은 보통 각각의 지역에서 가장 부유했다.[142] 경제적인 의미에서는 상인, 소지주, 장인으로 구성된 중산층이 존재했으나 그것이 결코 별개의 계층으로 구별되지는 않았다.[135] 대부분의 토지는 중소 규모의 필지로 구성되어 있었을 것이고, 가족들이 경영하는 농장은 농업의 주요 기반 역할을 했다.[143] 속주인들(원시 농노라고도 불림) 중 일부는 자유인이었으나 오늘날 이것은 역사적인 논쟁의 소지가 있다. 7세기 이후 노예는 도시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으나 사회경제적인 지위에서는 주인에게 여전히 종속되어 있는 관계였다.[144]

741년, 결혼이 기독교의 제도가 되면서 더 이상 사적인 계약이 아니게 되었다.[145] 일부일처제는 이미 그 전부터 로마인들 사이에 결혼의 정의로서 널리 퍼져있었지만, 기독교는 이혼과 결혼 이외의 모든 성적 관계를 범죄로 규정하고 이를 금지시키면서 노예제도에서의 권력 관계에 변화를 가져왔다.[146] 결혼은 인구를 유지하고 재산권을 이전하며 노인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방법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특히 테오도라 황후는 성적 쾌락주의를 어느정도는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147] 여성들은 보통 15세에서 20세 사이에 결혼을 했고, 남성들을 연결시키고 가족들 사이에 경제적인 이익을 창출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148] 당대의 사회적인 규범에 따르면 여성은 최대 6명의 자녀를 낳아야 하지만, 이 중에서 건강하게 생존하는 것은 불과 2~3명 밖에 되지 못했다.[149] 이혼은 상호 동의를 하면 가능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강제로 수녀원에 들어가게 하는 등 점차 제한되었다.[150]

모든 여성들에게는 상속권이 주어졌다.[151] 이것은 아마도 국가를 위협할 수 있는 거대한 부를 축적한 부호와 세습귀족들의 출현을 막으려고 시도한 조치 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144] 과부의 성행(전체 여성의 약 20%)은 여성이 가계와 개인 기업체의 가장으로서 종종 가족 자산을 통제하여 여성들, 특히 일부 황후들의 권력 상승에 조금이나마 기여했음을 의미한다.[152] 여성들은 주로 재산과 관련된 분쟁에 대한 해결을 요구하는 주요 납세자, 토지 소유자, 그리고 제국 법원의 청원인이었다.[153]

교육은 헬레니즘 시대와 고대 로마 시대, 그리고 동로마 시대까지 표준과 연속을 유지했다.[154] 교육의 참여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이를 위해서는 재정적인 수단이 필요했다.[155]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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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여성들은 공식적으로는 남성과 같은 사회경제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법적인 차별에 직면했으나 가질 수 있는 경제적 기회에 직업에 한계가 있었다.[156] 7세기부터는 군인으로 복무하거나 정규직을 맡는 것마저 금지되었고, 교회에서도 부제로 일하는 것이 제한된 여성들은 대부분 '노동집약적'인 가사 책임을 맡게 되었다.[157] 그들은 요리나 섬유 산업과 같은 직종에서 일했는데, 의학, 공중보건, 소매업 등에서 많은 존재감을 드러냈고, 심지어 장인길드에서도 이따금 연습하기도 했다.[158] 일부는 연예인, 숙소 관리인, 매춘부와 같이 사회적으로 평판이 좋지 않은 직업에 종사했다.[159][160][161]

여성들은 축제, 행렬, 시위, 히포드롬과 같은 사회 행사에 나가는 등 공공 생활에 참여했다.[144] 그들은 제국의 상징적인 정책에 저항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62] 이때의 여성 권리는 19세기의 서유럽이나 미국과 별 차이가 없었다.[163]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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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콥트어로 쓰여진 가장 오래된 시편인 무딜 시편. 현재 이집트 콥트 카이로콥트 박물관 소장.
오른쪽: 10세기에 제작된 그리스어 필사본인 조슈아 두루마리. 콘스탄티노플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로마 바티칸 도서관 소장.)
1923년까지 조사된 아나톨리아 반도에서의 그리스어 사용 분포. 노란색은 현대 그리스어이고, 주황색은 폰틱 그리스어이며, 녹색은 카파도키아 그리스어이다.(녹색 점은 1910년 당시 카파도키아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마을 공동체를 표시한 것이다.[164])

제국의 공식적인 공용어는 없었지만 라틴어그리스어가 주요 언어였다..[165] 그리스어에 대한 지식은 교육받은 귀족이 되기 위한 요건을 통과하는 데 유용했고, 라틴어에 대한 지식은 군대, 행정, 또는 법률 분야에서 경력을 쌓는 데 유용했다.[166] 라틴어는 기원전 2세기부터, 특히 서부 지방에서 확산되는 시기를 경험했지만 동부 지방에서는 그러지 못했다.[167] 동쪽에서는 그리스어가 헬레니즘 시대의 유산으로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168] 그리스어는 또한 기독교 교회와 무역에서 널리 사용되기도 했다.[169] 대부분의 황제들은 두 언어 다 구사를 할 수 있었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공적인 자리에서는 라틴어를 선호했는데, 이것은 포에니 전쟁 도중에 처음 시작된 관습이었다.[170]

기원후 3세기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 이후, 서부에서는 그리스어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감소했으며 라틴어가 동부에서 일시적으로 대두되었다.[171] 그러나 397년 아르카디우스가 판사들이 그리스어로 판결을 내리는 것을 허용하면서 다시 그리스어의 영향력이 증대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439년 테오도시우스 2세가 법적 절차에서의 그리스어 사용 확대를 승인한 것과 더불어 및 448년의 그리스어로 된 첫번째 법 발효, 그리고 최종적으로 460년대에 레오 1세가 그 법을 제정함으로써 동부에서는 확실하게 지배적인 언어가 되었다.[172][173] 로마 법학자들이 참여하여 만들어진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로마법 대전》은 거의 대부분이 라틴어로 쓰였지만, 《노벨라 헌법》을 포함하여 534년 이후에 발표된 법률들은 그리스어와 라틴어가 병용되었는데, 이것은 이 시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부가 공식적으로 언어를 전환했다는 것을 시사한다.[174] 그리스어는 코이네(후에 데모틱 그리스어)로 알려진 구어와 함께 양층언어가 되었고, 코이네가 구어와 신어 표준이 될때까지 더 오래된 문자 형태(아틱 그리스어)와 함께 사용되었다.[175]

라틴어는 4세기에 들어 진화를 거듭해 나갔다. 이후 8세기 즈음에 서부의 붕괴와 함께 아랍 무슬림들의 침입이 이어지면서, 라틴어는 초기 로망스어로 분화하기 시작했다.[176][177]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통치 이래로, 라틴어는 이라클리오스 시대까지 군대에 남아 있었지만, 결국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동부에서 아예 사라지게 되었다.[178][179] 10세기가 되서야 서유럽과의 접촉이 이루어지면서 라틴어에 대한 연구가 점차 되살아났고, 11세기 즈음이 되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라틴어에 대한 지식은 특별하지 않게 되었다..[180]

몇몇 증거는 콘스탄티노폴리스뿐만 아니라 제국 국경에서도 수많은 다른 언어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181] 시리아어, 콥트어, 슬라브어, 아르메니아어, 조지아어, 일리리아어, 트라키아어, 켈트어가 대부분을 차지했다.[182] 동로마 제국은 다언어 국가였지만, 그리스어가 장려됨에 따라 대부분이 동화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언어의 다양성을 줄여나갔다.[183]

행정과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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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p of Byzantine Empire showing the themes in circa 750
750년 당시 동로마의 테마
Map of Byzantine Empire showing the themes in circa 950
950년 당시 동로마의 테마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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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의 정부는 오늘날 보편화되어있는 삼권 분립에 대한 현대적인 이해와 일치하지 않게, "법 위에 있고, 법의 안에 있으며, 법 자체인" 황제에 의해 운영되었다.[184] 콘스탄티노폴리스 군중들의 선언과 457년 총대주교의 취임이 동부에서의 황제의 통치를 합법화시켜 주었다.[185] 동로마 제국이 형성된 이래로 원로원은 독자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황제의 궁정이 확장됨에 따라 서서히 희석되었으며 결국에는 콤니노스 귀족들에게 대체되었다.[186] 중앙 정부는 572년의 이전 10년 동안 정점에 다다른 권력을 쥐고 있었다.[187]

새로운 황제의 등극이 항상 평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포카스(602~610)는 3세기 이래 최초로 군사 쿠데타를 통해 즉위한 황제이며, 그의 통치 기간은 또한 폭력과 반란 그리고 외적의 침략으로 점철되었다. 이후 그는 43명의 다른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비참하고 잔인하게 살해되었다.[188]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부분적으로 군대가 수도에 가까이 주둔해 있을 때 정치적인 혼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189] 610년에 개창된 이라클리오스 왕조 이래로 1453년까지 약 9개의 왕조가 있었지만, 그 843년 중 30년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간이 혈연이나 친족적으로 연결된 남성 황제들에 의해 통치받았다.(공동 황제의 관행 때문)[190]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 1세 시기에 이루어진 개혁의 결과로, 군대는 민정으로부터 분리되었다.[191] 이것은 7세기에 들어 황제가 임명한 민간 총독에 의해 통치되었지만 인접한 군대가 그곳을 지키도록 하는 제도가 만들어질때까지 유지되었다.[192] 각 지역은 4개의 현으로 묶여 있었고, 군대는 별도로 조직되어 편성되었다.[192] 8세기 말에는 민군 행정을 감독하는, "스트라테고스"라 칭해진 군사 지휘관에 의해 테마라 불리는 여러 행정 구역으로 나뉘어졌다.[192] 레온 6세(886~912)의 통치 기간은 농민과 군인이 더욱 밀접하게 연결된 시기였으며, 군비를 목적으로 세금 체계가 새롭게 짜여진 때이기도 했다.[193]

도시에는 그들만의 통치 조직이 있었는데, 특히 지방 의회, 중앙 정부의 대표단, 그리고 주교가 대표적이었다.[194] 롬바르드족의 침입과 아랍의 파괴는 이러한 양상을 변화시켰다. 7세기부터 시의회는 점차 줄어드는 모습을 보였다.[195]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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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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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에, 동부에는 고정된 국경 부대(리미타네이)와 기동 부대(코미타텐세스)가 배치되었으며 각 부대에는 약 10만 명의 병사가 복무했다.[주 15][196] 앤서니 칼델리스는 "재정적으로 확장된 제국이 한 번에 하나의 주요한 적들을 없앨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197] 634년에서 642년 사이의 이슬람 정복은 제국의 군대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4~7세기에 걸쳐 동로마 제국의 야전군은 전문 군대의 핵심을 가진, 일종의 지방화된 민병대와 같은 부대로 변모했다.[198] 정부는 군대에 소모되는 비용과 부담을 그 지역의 주민들에게 전가함으로써 새로운 세금 체계로 그들을 엮었고, 따라서 각 지방은 '테마' 또는 '테마타'로 알려진 군관구로 발전했다.[199] 비록 그들은 수 세기 동안 수많은 도전을 받아 왔지만, 워렌 트레드골드(Warren Treadgold)는 284년에서 602년 간의 동로마 야전군이 서구 세계에서 최강이었다고 언급하며, 앤서니 칼델리스(Anthony Kaldellis)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정복 기간 동안 이들이 동로마 제국의 전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최고의 군대였다고 믿는다.[200]

육군 구조는 지방 민병대와 같은 군대, 전문 테마군(투르마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기반을 둔 제국 직속 부대(타그마타) 등으로 다양화되어 있었다.[201] 또한 황제의 호위병이던 타그마 연대도 잘 알려져 있는데, 개중에는 바랑인 근위대와 같이 외국 용병들도 있었으며, 이들의 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늘어났다.[202] 방어지향적인 테마 민병대는 점차 더 전문화된 공격 야전군으로 대체되었지만, 스스로 들고 일어나서 황제에게 반란을 일으킨 장군들에게 대항하기도 했다.[203] 그들이 팽창하고 있을 무렵, 동로마 제국은 현금 지불로 고용한 6,000명의 바랑인, 또 다른 3,000명의 외국 용병들, 그리고 유급/무급을 가리지 않고 복무하는 시민군을 포함하여 (문서상으로) 약 14만 명의 군대를 운용하고 있었다.[주 16][204]

테마군은 정부가 대신 타그마타, 용병, 동맹국 군대에 의존하면서 점차 무의미한 것으로 변했고, 이로 인해 제국의 방어력은 크게 약화되었다.[205] 용병 부대는 정치적 분열과 내전을 더욱 악화시켜 제국의 방어 체계를 붕괴시켰을 뿐만 아니라, 11세기 이탈리아 영토의 상실 및 아나톨리아 심장부의 공격과 같이 심각한 손실을 초래했다.[206] 1081년 이후 콤니노스 왕조의 황제들에 의한 주요 군사 및 재정 개혁은 규모가 작지만 보상이 충분하며 유능한 군대를 다시 설립하도록 했다.[207] 그러나 비용은 여전히 많이 들었으며, 콤니노스 황제들의 접근법인 프로니아 제도로 일컬어지는 재정 면제에 대한 의존도는 마누일 1세(1143~1180)의 통치가 끝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주요한 문제로 남아 있었다. [208]

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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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해군은 지중해 동부를 지배했으며 흑해, 마르마라해, 에게해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했다.[209] 7세기에 아랍 해군의 도전에 직면하면서, 제국의 해군은 대대적으로 재편되었으며 11세기에 베네치아제노바에게 넘어갈 때까지 그 지역의 해상 패권을 유지했다.[210] 해군 순찰대는 주민들에게 위협을 알려주는 망루 및 화재 신호 사슬과 더불어 제국의 해안 방어 체계를 구성했으며, 3개의 테마 지역(키비르하오톤과 여타 부속 섬)을 담당하고 훗날 바랑인이 된 노르만인 및 루스인과 같은 용병으로 구성된 제국 함대의 일부였다.[211]

6세기 초에 등장한 드로몬,[212] 유스티니아누스 2세 시기에 등장한 첼란디온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갤리선은 기병을 수송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213] 한편 다른 갤리선들은 노를 몰아 해안 항해를 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3~4동안은 버틸 수 있는 식량 및 식수를 저장할 수 있었다.[214] 이들은 670년대에 그리스의 불을 분사할 수 있는 장치를 갖추고 있었고, 바실리오스 1세(867~886)가 전문적인 해병을 만들어냈을 때 해적질이나 약탈 등을 통해 무슬림들의 습격을 견제하였다.[215] 드로몬 및 첼란디온은 10세기에 그들을 대체할 '갈레아이galeai'가 개발되고 12세기에 '카테르곤Katergon'이 전쟁용 갤리선의 표준 단어가 될때까지 지중해에서 가장 진보된 갤리선이었다.[214]

후기 (1204–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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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ulers of the Empire of Nicaea that retook the capital and the Palaiologos that ruled until 1453, built on the Komnenian foundation initially with four types of military units—the Thelematarii (volunteer soldiers), Gasmouloi and the Southern Peloponnese Tzacones/Lakones (marines), and Proselontes/Prosalentai (oarsmen)—but similarly could not sustain funding a standing force, largely relying on mercenaries for soldiers and fiscal exemptions to pronoiars who provided a small force of mostly cavalry.[216] The Fleet was disbanded in 1284 and attempts were made to build it back later but Italian sea states sabotaged the effort.[217] Over time, the distinction between field troops and garrison units eventually disappeared as resources were strained.[218] The frequent civil wars further drained the Empire, now increasingly instigated by foreigners such as the Serbs and Turks to win concessions, and the emperors were dependent on mercenaries to keep control all the while dealing with the impact of the Black Death.[219] The strategy of employing mercenary Turks to fight civil wars was repeatedly used by emperors and led to the same outcome: subordination to the Turks.[220]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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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우의적 묘사. 11세기경

로마 제국의 경제는 수백년간 지중해와 유럽에서 단계가 가장 발전되어 앞서 있었다. 특히 유럽은 중세 후기까지 로마 제국의 경제력을 따라가지 못했고 로마 제국에서는 서유럽과 달리 화폐 경제 제도가 발달하였다. 제국 행정부에서 발행한 금화 노미스마11세기 전반까지 높은 순도를 유지해 후세에 ‘중세의 달러’라고 불릴 정도로 여러 나라에서 화폐로 유통되었다. 특히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업종마다 길드를 이용한 국가에 의거한 보호와 통제가 두루 미쳤으므로, 국영 공장에서 독점으로 제조된 견직물이나 귀금속 공예품, 타국과 한 무역이 제국에 많은 부를 가져와,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세계의 부의 3분의 2가 모이는 곳’이라고 칭해질 만큼 크게 번영하였다. 오랫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유라시아북아프리카 거의 모든 지역을 포괄하는 무역망의 중심지였으며, 비단길의 서측 관문이기도 하였다. 어떤 학자들은 7세기에 아랍인이 쳐들어오기까지 제국은 세계에서 최강한 경제력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하나[출처 필요] 아랍인의 정복으로 부는 역전되어 로마 제국은 한동안 침체기를 맞았다. 콘스탄티노스 5세의 개혁(765년경)으로 제국은 부흥해 1204년까지 발전하였다. 10세기에서 12세기 말까지 로마 제국은 화려를 과시했고 여행자들은 수도의 부에 깊이 인상받았으나 경제상 재앙이었던 제4차 십자군으로 일체가 달라졌다.[221] 팔레올로고스 왕조는 경제를 회생하고자 노력하였으나 후기 로마 제국은 국내외 경제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다. 12세기 이후로 이탈리아 여러 도시국가의 상공업 발전에 밀려나 제국 내 산업은 쇠퇴해 해군력 제공을 담보로 이탈리아 여러 도시국가에 무역 특권 부여로 무역 이익도 잃은 제국은 쇠퇴일로에 들어섰다. 점차 제국은 교역과 가격, 귀금속 유통에 영향력을 잃었고 어떤 학자들은 화폐 주조권도 통제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판단하기도 한다.[222]

교역은 제국의 경제 기반이었다. 섬유는 최요한 수출품이었을 텐데 특히 비단은 이집트에 수출됐고 불가리아나 서방에서도 유통되었다.[223] 국가는 국내외 무역을 강력하게 통제했으며, 화폐 주조를 독점하였다. 행정부는 금리도 직접 통제하였고 길드나 조합의 활동도 제한했다. 황제와 제국 관리들은 수도의 물자 공급을 확실히 하고 곡물 가격을 억제하고자 위기 상황에 때때로 개입하기도 하였으며, 행정부는 세금을 이용해 잉여량을 저장했다가 공무원 급료나 공공 사업 투자로 재유통하기도 하였다.[224]

주요 산업인 농업은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이래 별로 기술의 진보가 없었다. 고대에서 중세까지는 서유럽보다 고도 농업 기술이 있었고 유럽의 농업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12세기부터는 서유럽이나 중동에서도 농업 기술이 개선되면서 제국의 농업 기술이 눈에 띄게 낙후되었다.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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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아 소피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의 두루 널리 미치는 명성을 표현하는 상징이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대에 4년 반이라는 짧은 시간(532년~537년)에 완성된 건물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문장

조지프 라야는 "로마 문화와 동방 정교회는 같은 하나다."라고 말한 바 있다.[225] 동방에서 제국이 존속하면서, 황제는 교회의 일에 적극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로마 국가는 고대 종교 시대에서 일상으로 종교와 관련한 행정ㆍ재정 업무를 수행하였으며, 이는 기독교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카이사레이아의 에우세비우스가 고안한 모범에 따라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를 그리스도의 대리자나 전령으로 간주했으며, 황제는 타 종교인에게 기독교를 선교하고 행정이나 재정을 위시해 종교 "외부상" 일을 맡는다고 보았으나 황제가 교회에서 수행하는 역할은 고정된 형태로 법에 따라 정해진 제도로 발전되지는 않았다.[226]

로마 제국의 기독교도는 제국사를 통틀어 통일된 상태였다는 주장은 기독교를 향한 일반인의 오해이다. 제국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동방 정교회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들은 절대로 제국 전체의 모든 기독교도를 대표한 적이 없었다. 5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였던 네스토리우스가 보급한 네스토리우스주의는 제국 교회를 분열시켜 오늘날 아시리아 동방 교회로 이어졌다. 6세기에 교회의 대분열 당시 오리엔트 정교회칼케돈 공의회의 선언에 반대하여 제국 교회에서 떨어져나갔다. 5세기에 로마가 몰락한 당시 아리우스주의는 대개 서유럽 게르만족에 국한되어 있었으나 초기 제국에는 이들 종파와 더불어 아리우스주의나 타 기독교 분파도 있었으나 제국이 후기로 접어들면서 동방 정교회는 제국에 남은 기독교도 대부분을 대표하게 되었다. 유대교도 제국사에서 중요한 소수 종교였다. 이들은 박해받는 시기도 있었으나 대부분 시기에는 보통 용인되었다.

로마가 붕괴하고 여타 동방 총대주교들의 내부 불화를 겪으면서 6세기에서 11세기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는 기독교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중심지가 되었다[227] 제국이 허울만 남으면서 쇠퇴한 때에도 교회는 제국 국경 안팎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로마 제국의 활발한 선교로 동구권(세르비아, 불가리아, 러시아를 위시해 슬라브 민족) 대부분과 일부 중동권에 기독교 문화가 형성되었고 로마 제국은 자연스레 정교회의 본산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슬라브 민족은 동방 정교회와 함께 키릴 문자동방정교회의 교회 헌법을 수용했다.[228] 게오르기예 오스트로고르스키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정교 세계의 중심지로 남았으며, 소아시아와 발칸 영토의 대주교는 그 예하에 있었으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잃은 지금에도 카프카스와 러시아, 리투아니아도 이에 종속되어 있다. 정교회는 로마 제국에서 가장 바뀌어 달라지지 아니하고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게 되는 요소였다.[229]

로마 사회에서는 교회가 중추 역할을 하였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세례, 결혼, 장례를 위시해 개인 생활의 중요한 순간에 교회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신학, 예술, 경제, 정치, 외교를 비롯해 국가와 사회의 모든 부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정부와 관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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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행정부에서 황제는 유일한 절대 군주였고 그 권력은 신에게서 비롯되었다고 간주됐다.[17] 8세기 말에 궁정에 집중된 민간 행정부는 수도의 대규모 권력 집중의 일환으로 형성되었다.(사켈라리오스 직위의 상승은 이런 변화와 유관하다).[230]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개혁은 테마 제도를 설치한 일로서 테마는 스트라테고스 한 사람이 민간과 군사 행정을 전담하였다.[17]

"비잔티움다운"이라는 말은 깔보아 업신여기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로마 제국의 관료제는 제국의 상황에 맞게 개혁하는 탁월한 역량이 있었다. 로마의 직위 체계와 서열 제도는 오늘날 시각으로 볼 때 제국 행정이 질서 정연한 관료제로 보인다. 관리들은 황제를 중심으로 엄격한 질서에 따라 배치되었고 각자 직위를 대상으로 한 황제의 뜻에 따랐다. 실제로 있는 본바탕에 근거하는 행정직이 있었으나 권위는 관직이 아닌 개인에게 주어질 수 있었다.[231] 8세기와 9세기에 민간 업무는 귀족의 지위에 오르는 첩경이었으나 9세기부터 민간 귀족은 혈통 귀족과 대립하였다. 로마 제국 행정부를 주제로 한 어떤 연구를 보면, 11세기의 정치는 민간 귀족과 군사 귀족 간 대립으로 점철되어 있었다.[출처 필요] 이 시기에 알렉시오스 1세는 새로운 궁정의 작위와 관직을 신설하는 등 중요한 행정 개혁을 추진하였다.[232]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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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가 몰락하고서 제국의 최대 난관은 제국과 주변 세력의 관계 유지였다. 주변 여러 민족이 공식 정치 제도를 이룰 때 그들은 로마 제국을 본뜨기도 하였다. 로마 제국의 외교는 주변 여러 세력을 국제와 국가 내부의 관계망으로 끌어들이게 되었다.[233] 로마의 외교망 사이에서는 조약이 주기로 조인되었고 새로운 지배자가 왕가 형성에 기꺼이 수용됐으며, 로마 사회의 의견, 가치, 제도로 포섭하였다.[234] 고전 저자들은 평화와 전쟁을 도덕상ㆍ법상 구분하길 좋아하지만, 로마 제국에서는 외교를 다른 형태의 전쟁 수단으로 보았다.[235] 가령 불가르족이 제국을 위협하자, 이에 대응하여 키이우 공국에 돈을 주어 반격하는 식이었다.[235] 야만족 담당국은 최초의 대외 정보 기관으로, 제국의 적에 관한 모든 정보를 수합하였다.[235]

로마 사람들은 여러 가지 외교 제도를 두었다. 가령 수도에는 여러 대사관이 수년간 상주하기도 하였다. 타국의 왕가 일원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무르도록 요청하기도 하였는데 이들은 정치 상황에 따라 유용한 볼모가 될 수 있었으며, 중요한 관습으로 방문자들을 호화로운 모습으로 압도하기도 하였다.[233] 디미트리 오볼렌스키는 노련하고 책략을 갖춘 로마 제국의 외교 덕분에 동유럽에서 보전된 문명은 오랫동안 유럽사에 기여하였다고 주장한다.[236]=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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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문화는 고대 그리스의 고전 문화인 헬레니즘 문화를 계승한 토대에 기독교다운 요소를 결합하여 천년 간에 걸쳐 중세 서유럽의 라틴-게르만 문화권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발달하였다. 중세를 이용해 유지한 로마 문화는 근세 서유럽에는 그리스 정신을 전해주었고 발칸과 러시아에 거주하는 슬라브계 민족의 문화상 수준을 한 단계 제고했다. 특히 6세기와 9세기~10세기, 14세기에는 절정에 이르렀다.

로마 문화는 일반적으로 보수적이면서 신비적인 분위기가 두드러지는 점이 있으며, 로마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외면적 요소보다는 정신적인 요소에 더 가치를 두고 있었다.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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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저작들은 로마 시대에도 계속 장려되어 로마의 학문은 고대 철학형이상학과 긴밀하게 이어졌다.[237] 로마 제국에서는 과학을 응용하는 면에서 여러 번 중요한 업적을 이루었으나(유명한 사례로 아야 소피아를 들 수 있다), 6세기 이후 로마의 학자들은 고대 저술가의 사상을 확대하거나 새로운 이론을 발전하는 측면에서는 거의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238]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 역병이 창궐한 후 아랍인이 침략하는 등 특히 혼란기에 학문은 정체되었으나 제국이 천 년을 넘긴 시점에서 소위 "로마 르네상스"로 로마의 학자들은 특히 천문학수학 등 아랍과 페르시아의 과학 발전에서 전문가 역할을 자임하였다.[239]

제국의 마지막 세기에 로마의 문법학자들은 개인으로서나 저술로서나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고대 그리스어 문법과 문학 연구에 주되게 기여하였다.[240] 이 시대에 트라페주스에서 천문학과 여타 수리 과학 교육이 이루어졌고 약학은 거의 모든 학자들이 관심하였다.[241]

법 분야에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개혁은 법리학의 발전에 분명한 영향을 끼쳤으며, 레온 3세에클로가(Ecloga)는 슬라브 세계의 법 체제 성립에 영향을 끼쳤다.[242]

무딜 시편(Mudil Psalter). 콥트어로 된 최고인 완전한 시편이다. (이집트 카이로 콥트 박물관)
아르메니아 칙답서(Codex Armenicus Rescriptus). 아르메니아와 시리아의 전례식문을 담는 6세기·10세기 양피지 문서.
여호수아 두루마리. 10세기에 그리스어 필사본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된 제작으로 추정된다.(바티칸 도서관)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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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로마의 언어는 고대 로마에 기원을 두는 라틴어였으나 기원후 7세기경 이라클리오스 황제가 그리스어를 공식 언어로 삼았다. 학술 분야에 쓰이던 라틴어는 교양 계층 간에서도 급속히 쓰이지 않았고로 로마 문화에서 의례 부분으로 때때로 나타나는 정도였다.[243] 더불어 민중 라틴어는 제국의 소수 언어고 여러 학자들은 이것이 남부 블라크 언어의 시초가 된다고 주장한다.[244]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서부 지중해 속주를 일시로 회복하면서 라틴어는 학술 언어 뿐만 아니라 일상 구어로 제국에서 계속 쓰였다.

궁정, 행정부, 군대를 떠나 동부 로마 속주에서는 그리스어서방 제국이 멸망하기 훨씬 전, 라틴어 이전부터 이 지역에서 수백년간 쓰인 주요 언어였다.[245] 그리스어는 기독교 교회, 학술, 예술 분야의 보통 언어로 자리잡았으며, 다른 민족이나 여러 속주간 교역에서 링구아 프랑카로 주로 쓰였다.[246] 라틴어는 한동안 주요 구어인 코이네 그리스어양층언어로 남았고 코이네는 더 이전 문어와 공존하다가 표준 방언으로 결국 발전하였다.[247]

다민족으로 이루어졌던 로마 제국에서는 다른 언어도 널리 쓰였고 시대마다 이들 중 일부 언어는 각지에서 일정한 한도를 넘지 못하게 막는 공용어로 인정되기도 하였다. 유명한 예로, 중세 시대 초입에 시리아어아람어는 동부 접경 속주에서 교양 있는 계층 간에서 더욱 범용되는 언어였다.[248] 비슷한 사례로 콥트어, 아르메니아어, 조지아어도 해당 지역에서 식자 계층에게 중요한 언어였으며,[249] 나중에는 외국과 접촉하면서 고대 교회 슬라브어, 블라크어, 아랍어도 각 영향권과 제국 내에서 중요해졌다.[250]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지중해 지역과 배후지를 통틀어 중요한 교역 중심지였으므로, 중세 시대에 알려진 언어 거의 대부분이 제국에서 씌었는데 심지어 중국어도 씐 때가 있다.[251] 로마 제국이 결국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제국의 시민은 문화상 동질화했고 그리스 언어는 그들의 정체성 및 종교와 같은 의미를 띤다.[252]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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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과 거기서 영향받은 여러 지역에서는 독특한 건축, 회화를 비롯한 여러 예술을 남겼다. 로마 예술은 거의 전체에 걸쳐 종교상 표현과 유관하며, 더욱 구체로 보면, 면밀하게 정해진 교회 신학의 비인격다운 특성을 예술로 표현하였다. 로마의 예술 양식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정복하고 무역으로써 교류하면서 퍼졌고 이곳에서 그 양식은 12세기경 변형된 형태로 남아있다가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 형성에 영향을 준다. 동방 정교가 확산하면서, 로마 양식은 동유럽의 중심지, 특히 러시아로 확산되었다.[253] 종교 건축을 위시해 로마 건축의 영향은 이집트에서 아랍, 러시아, 루마니아를 위시해 다양한 지역에서 노정한다.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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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문학에서는 네 가지 요소를 꼽을 수 있는데 그리스어, 기독교, 로마, 동방이 바로 그것이다. 로마 문학은 역사, 연대기, 백과사전(포티오스 총대주교, 미카엘 프셀로스, 미카엘 코니아테스는 로마의 위대한 백과사전 저자로 간주된다), 수필, 세속 시문{로마에서 유일한 진짜 영웅 서사시는 디게니스 아크리타스(Digenis Acritas)이다.}으로 이렇게 다섯 가지로 분류하기도 하며 기타 교회와 신학 문학과 민중 시가가 있다. 현존하는 로마의 두루마리 서적 2천에서 3천여 권 중에 세속 시가, 역사, 과학, 의사과학(pseudo-science)을 다룬 책은 330권에 불과하다.[254] 로마 제국의 세속 문학이 가장 발달한 시기는 9세기에서 12세기경이고 종교 문학(설교문, 전례문, 시, 신학, 신앙 논문 등)은 훨씬 이전인 로마노스 시대에 발달하였다.[255]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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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시대에까지 존재했던 동로마 제국은 천년 제국 또는 중세 로마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후에 그리스나 동로마를 정복한 오스만 투르크 조차도 자신들을 로마의 후계자, 로마 황제를 칭하기도 했다. 러시아 제국의 차르 역시 동로마 제국의 황녀와 결혼한 것을 근거로 자신들을 제3의 로마, 근대 로마라 칭하기도 했다.

중세 시대에 유일하게 오랫동안 안정을 유지한 나라인 동로마 제국은 서유럽과 동떨어져 있었다. 끊임없이 이민족에게 공격받은 동로마 제국이 방파제 역할을 하여 서유럽은 페르시아, 아랍, 셀주크 투르크, 그리고 한동안 오스만 제국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었다. 어떤 학자들은 가령 동로마와 아랍의 전쟁 덕분에 카롤루스가 부상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하며[256], 카를 마르텔투르-푸아티에에서 사라센 족을 격파한 것도 동로마가 방패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또한 동로마 제국이 유지한 고대 로마 제국의 각지역 속주와 지방 파견한 파트리키우스 등은 봉건 제도와 자급자족 경제를 크게 자극했다고도 주장한다.

수백년간 서방 사가들은 '비잔티움다운', '비잔티움주의'라는 말을 '쇠퇴, 믿을 수 없는 정치, 복잡한 관료제'를 뜻하는 말로 썼으며, 이 말 속에는 로마 문명과 남동부 유럽의 로마가 남긴 유산에 대하여 대단히 부정적인 평가를 담고 있다.[257] 비잔티움주의(Byzantinism)이라는 말은 일반으로 종교ㆍ정치ㆍ철학 등에서 서방의 것과 반대되는 태도를 정의하는 표현이나[258] 20세기와 21세기에는 서방 사가들이 로마 제국이 서방에 끼친 영향을 위시해 더 균형잡히고 정확한 방법으로 이것들을 이해하려는 듯하여 로마 문화의 복잡한 성격이 더욱 관심받으면서 전보다 더욱 객관으로 평가된다.[258]

역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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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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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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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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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공식명으로 ‘로마인들의 땅’을 뜻하는‘로마니아'[9]도 범용됐다. 이 용어는 오늘날 루마니아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2. ‘임페리움 그라이코룸’(Imperium Graecorum), ‘그라이키아’(Graecia), ‘유나스탄’(Yunastan) 등을 이르는 말이다. 기타 서방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제국(imperium Constantinopolitanum), 로마니아 제국(imperium Romaniae)으로 부르기도 했다.
  3. 당시 동로마에서는 이리니 황후가 여제로서 통치하고 있었다
  4. 그가 도입한 솔리두스 금화는 매우 가치있고 바뀌어 달라지지 아니하고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통화였다.[25]
  5. 629년에 일시적으로 이집트 속주를 되찾았으나 642년에 아랍인의 침공으로 다시 잃었다
  6. 동로마 제국의 대표적인 혼란기였던 11세기는 서유럽이 정치적인 안정과 더불어 농경지의 확대 등으로 상당한 수준의 성장을 이룬 세기기도 했다. 바로 이전 세기가 동로마 제국의 전성기이자 서유럽의 상대적 혼란기였던 것과 매우 대비된다.
  7. 알렉시오스 1세는 안티오키아로 출정했으나, 블루아의 에티엔이 와서 십자군은 모두 패배했고 원정이 이미 실패했다면서 그에게 귀환하자고 설득했다
  8. 아녜스는 알렉시오스 2세의 황후이기도 했다.
  9. 이곳은 원래 베네치아의 종속 도시였으나 반란해 1186년에 헝가리의 보호하에 스스로 들어갔다.[108]
  10. 다만 베네치아인들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11. Dominator quartae partis et dimidiae totius imperii Romaniae
  12. 이들은 내전 당시 요한네스 6세 칸타쿠제노스가 용병으로 부린 바 있었다
  13. 약 7,000여 명으로, 이 중 2,000여 명은 외국인이었다.
  14. 이 칭호는 카이사르를 뜻하는데, 옛 키예프 루스 시대부터 슬라브인들이 동로마 제국의 황제를 일컫는 말이었다.
  15. 20,000명씩 나누어 각각 5개의 군대가 배치되었다.
  16. 다만 군사 원정을 감행할 때 15,000명의 군사와 야전군을 포함하여 4만 명을 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참조주

[편집]
  1. Millar 2006, pp. 2, 15; James 2010, p. 5; Freeman 1999, pp. 431, 435–37, 459–62; Baynes & Moss 1948, p. xx; Ostrogorsky 1969, p. 27; Kaldellis 2007, pp. 2–3; Kazhdan & Constable 1982, p. 12; Norwich 1998, p. 383.
  2. Ostrogorsky 1969, pp. 105–07, 109; Norwich 1998, p. 97; Haywood 2001, pp. 2.17, 3.06, 3.15.
  3. Haldon, John; Haldon, Shelby Cullom Davis 3.0. Professor of European History Professor of History Hellenic Studies John (2002). 《Warfare, State And Society in the Byzantine World 560–1204》. 47쪽. ISBN 978-1-135-36437-3. 
  4. Pounds, Norman John Greville. An Historical Geography of Europe, 1500–1840, p. 124. CUP Archive, 1979. ISBN 0-521-22379-2.
  5. “The End of the Byzantine Empire, 1081–1453”. 24 September 2015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6. William Miller, Trebizond: The last Greek Empire of the Byzantine Era: 1204–1461, 1926 (Chicago: Argonaut, 1969), pp. 100–06
  7. Fox, What, If Anything, Is a Byzantine?
  8. University of Chile: Center of Byzantine and Neohellenic Studies 1971, 69쪽.
  9. Fossier & Sondheimer 1997, 104쪽.
  10. “Nation and Liberty: the Byzantine Example”. Dio.sagepub.com. doi:10.1177/039219218303112403. 2010년 8월 7일에 확인함. 
  11. Theodore the Studite. Epistulae, 145, Line 19 ("ή ταπεινή Γραικία") and 458, Line 28 ("έν Αρμενία καί Γραικία").
  12. Cinnamus 1976, 240쪽.
  13. Ahrweiler & Laiou 1998, 3쪽; Mango 2002, 13쪽.
  14. Gabriel 2002, 277쪽.
  15. Ahrweiler & Laiou 1998, vii쪽; Davies 1996, 245쪽; Moravcsik 1970, 11–12쪽; Ostrogorsky 1969, 28, 146쪽; Lapidge, Blair & Keynes 1998, 79쪽; Winnifrith & Murray 1983, 113쪽; Gross 1999, 45쪽; Hidryma Meletōn Chersonēsou tou Haimou 1973, 331쪽.
  16. Fouracre & Gerberding 1996, 345쪽: "The Frankish court no longer regarded the Byzantine Empire as holding valid claims to universality; instead it was now termed the 'Empire of the Greeks'."
  17. 〈Hellas, Byzantium〉. 《Encyclopaedia The Helios》. 
  18. Tarasov 2004, 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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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Greatrex 2008, pp. 233–255; kaldellis 2023, pp. 17–18; Treadgold 1997, pp. 14–18.
  23. Gibbon, 1906, III, 168 Archived 2007년 6월 14일 - 웨이백 머신
  24. Bury, 1923, 1}}
    *Esler, 2000, p.1081.
  25. Esler, 2000, p.1081.
  26. Bury, 1923, 163
  27. 〈Byzantine Empire〉. 《Encyclopaedia Britannica》. 
  28. Nathan, {http://www.roman-emperors.org/theo2.htm Theodosius II (408–450 AD)}
  29. Treadgold, 1995, p.193.
  30. Alemany, 2000, p.207.
    *Treadgold, 1997, p.184.
  31. Grierson, 1999, p.17.
  32. Greatrex 2008, p. 244; Kaldellis 2023, pp. 223–226; Treadgolad 1997, pp. 164–173.
  33. 〈Byzantine Empire〉. 《Encyclopaedia Britannica》. 
    * Evans, Justinian (AD 527–565)
  34. Evans, Justinian (AD 527–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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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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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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