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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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짜 | 14세기 – 17세기 |
|---|---|
| 위치 | 이탈리아 도시국가 |
| 참여자 | 이탈리아 사회 |
| 결과 |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 |
이탈리아 르네상스(Italian Renaissance, 이탈리아어: Rinascimento [rinaʃʃiˈmento])는 이탈리아 역사 중 14세기와 16세기에 걸친 시기이다.이탈리아 르네상스는 광범위한 르네상스 문화가 이탈리아로부터 유럽 전역(및 식민 지배를 받거나 기독교 선교사 및 상인들이 활동하던 유럽 외 지역)으로 퍼저나가는 시발점으로 유명하다. 이 시기는 중세와 근대 사이의 전환기였다. "장기 르네상스(long Renaissance)"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1300년경에 시작하여 1600년경까지 지속되었다고 주장한다.[1] 미술 등 일부 분야에서는 1250년경에 시작된 원시 르네상스부터 시작된다고 본다.
프랑스어 (프랑스어: renaissance,이탈리아어 rinascimento에 해당)는 '재탄생' 또는 '부흥'을 의미하며,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암흑시대"라고 칭했던 수 세기 이후에 시작된, 문예 부흥과 고전 고대에 대한 새로운 관심으로 정의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역사가 조르조 바사리가 1550년 그의 저서 미술가 열전에서 rinascita('재탄생')라는 용어를 사용하긴 했지만, 이 개념은 쥘 미슐레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와 같은 학자들의 작업 이후인 19세기에 널리 퍼졌다.
르네상스는 이탈리아 중부의 토스카나주에서 시작되어 피렌체를 중심으로 발전했다.[2] 이탈리아반도의 여러 도시국가 중 하나인 피렌체 공화국은 유럽 군주들에게 신용을 제공하여 자본주의와 은행업의 발전을 위한 토대를 마련함으로써 경제적,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3] 이후 르네상스 문화는 베네치아로 확산되었는데, 베네치아는 십자군 참여 이후 동방과의 무역로를 통제하고 마르코 폴로가 동방을 다녀온 후(1271~1295년), 지중해 제국의 중심이 되었다. 이를 통해 이탈리아는 고대 그리스 문화의 유적과 다시 접촉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인문주의 학자들은 새로운 문헌을 접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르네상스는 교황령과 로마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며, 로마 교황 율리오 2세와 교황 레오 10세와 같이 인본주의적인 르네상스 시대의 교황들에 의해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교황들은 이탈리아 정치에 개입하고 식민 세력 간의 경쟁을 중재하며 1517년 경에 시작된 개신교 종교 개혁을 반대하고 반종교개혁 운동을 이끌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회화, 건축, 조각, 문학, 음악, 철학, 과학, 기술 및 탐험 등 다양한 분야에게 뛰어난 업적을 성취했다. 15세기 후반, 이탈리아 국가들 간에 합의된 로디 평화 조약 (1454–1494) 시대가 되자, 이탈리아는 모든 분야에서 유럽의 선두 주자가 되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국내 분쟁과 외세 침략으로 인해 이탈리아 전쟁 (1494–1559)의 격동기에 접어들면서 16세기 중반이후 내리막길을 걷는다. 그러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사상과 이상은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가 15세기 후반부터 북방 르네상스가 시작된다.
해양공화국 출신의 이탈리아 탐험가들은 유럽 군주들의 후원 아래 대항해시대를 열었다. 가장 유명한 항해는 (스페인이 지원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항해로서, 이 항해는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을 지배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기타 조반니 다 베라차노(프랑스), 아메리고 베스푸치(스페인), 존 캐벗(영국)과 같은 탐험가도 많은 업적을 쌓았다.
가브리엘레 팔로피오, 니콜로 타르탈리아,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에반젤리스타 토리첼리와 같은 이탈리아 과학자들은 과학 혁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와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와 같은 외국인들도 이탈리아 대학에서 활동했다. 역사학자들은 1648년 유럽 종교전쟁의 종결과 같은 17세기의 다양한 사건으로 르네상스가 종말을 맞은 것으로 제안했다.[4]
학계에서는 원시 르네상스 문학이 보통 14세기의 세 위대한 이탈리아 작가, 즉 단테 알리기에리(《신곡》),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칸초니에레》), 그리고 조반니 보카치오(《데카메론》)로 시작한다는데 의견을 함께 한다. 르네상스의 유명한 토착 시인으로는 서사시 작가 루이지 풀치 (《모르간테》), 마테오 마리아 보이아르도 (《사랑에 빠진 오를란도》), 루도비코 아리오스토 (《광란의 오를란도》), 그리고 토르콰토 타소 (《해방된 예루살렘》) 등이 있다. 시인 안젤로 폴리치아노와 플라톤주의 철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와 같은 15세기 작가들은 광범위한 라틴어와 그리스어 문헌을 이탈리아어로 번역 했다. 16세기 초반,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는 궁정론에서 이상적인 신사와 숙녀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제시했지만,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사물의 실제적 진실'(la verità effettuale della cosa)에 주목하며 이를 거부했다. 군주론은 주로 비르투의 고대 및 현대의 사례를 병렬적으로 구성하여 인문주의적 양식으로 쓰여졌다. 이 시기의 역사가로는 마키아벨리외에, 그의 친구이자 비평가인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와 조반니 보테로 (《국가의 이성》)가 있다. 1494년 인쇄업자 알도 마누치오가 베네치아에서 설립한 알딘 출판사는 이탤릭체와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포켓판을 개발했으며, 고대 그리스어 서적의 인쇄판을 최초로 출판했다. 베네치아는 또한 즉흥극인 콤메디아 델라르테의 발상지가 되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은 이후 수세기 동안 유럽 회화와 조각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쳤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도나텔로, 조토, 마사초, 프라 안젤리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페루지노, 보티첼리, 그리고 티치아노와 같은 예술가들이 활동을 하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도 브루넬레스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안드레아 팔라디오, 그리고 브라만테와 같은 건축가들에 의해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 이들의 작품에는 피렌체 대성당,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 리미니의 템피오 말라테스티아노등 뿐만 아니라 여러 개인 저택이 포함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음악은 조반니 피에를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와 같은 작곡가, 로마 악파와 나중에 베네치아 악파가 경쟁하였고, 피렌체의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와 같은 인물들을 통해 오페라가 탄생하게 되었다. 철학에서는 갈릴레오, 마키아벨리, 조르다노 브루노 및 피코 델라 미란돌라와 같은 사상가들이 자연주의와 인본주의를 강조하며 도그마와 스콜라주의를 거부했다.
기원과 배경
[편집]중세 후기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
[편집]중세 후기 (1300년경 이후)에 들어, 로마 제국의 옛 중심지였던 라티움과 이탈리아 남부는 일반적으로 북부보다 가난했다. 로마는 고대 유적 도시였고, 교황령은 느슨하게 통치되었으며, 외세(특히 프랑스, 나중에는 스페인)의 간섭에 취약했다. 프랑스의 필리프 4세의 압력으로 아비뇽 유수가 프랑스 남부에 세워지면서 교황권은 모욕을 당했다.[5] 남쪽에서는 시칠리아가 한동안 아랍인들과 노르만인 들에게 지배를 받았다. 시칠리아는 시칠리아 토후국 시대에 150년 동안 번성했고, 나중에 노르만 왕국과 호엔슈타우펜 왕국 시대에 200년 동안 번성했지만, 중세 후기에 이르러 쇠퇴했다.[6]
반면에 이탈리아 북부는 훨씬 더 번성하여,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 십자군은 레반트(동지중해)와 무역 관계를 구축했으며, 제4차 십자군은 베네치아인과 제노바인의 상업적 경쟁자인 동로마 제국을 파괴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7] 동방에서 오는 주요 무역로는 동로마 제국이나 아랍 지역을 거쳐 제노바, 피사, 베네치아 항구로 이어졌다. 향신료, 염료, 비단과 같은 레반트에서 구입한 고급 상품은, 이탈리아로 수입된 후 유럽 전역으로 재판매되었다. 더욱이 내륙 도시국가들은 포강 계곡의 비옥한 농경지로부터 많은 수익을 거두었다. 프랑스, 독일, 플랑드르 국가에서 양모, 밀, 귀금속과 같은 상품들이 샹파뉴 정기시장(Champagne fairs)와 육상 및 수로 무역로를 통해 이탈리아로 들어왔다. 이집트에서 발트해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무역을 통해 상당한 이익을 창출하였고, 이는 광업과 농업에 대한 투자로 이어졌다. 14세기에는 베네치아시가 키프로스까지 이르는 지역의 상업 중심이 되었다. 베네치아는 병기창(arsenal) 덕분에 5000척 이상의 해군 함대를 보유했다(병기창은 상업용 및 군사용 선박을 대량 생산하는 최초의 유럽 시설이었다). 제노바 또한 해양 강국이 되었다. 따라서 북부 이탈리아가 유럽는 다른 많은 지역보다 자원이 풍부한 건 아니었지만, 무역을 기반으로 번성하게 되었다.[8] 피렌체는 주로 최대 무역 길드인 아르테 델라 라나의 감독 아래 발전한 양모 직물 생산 덕분에 북부 이탈리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양모는 북유럽에서 (16세기에는 스페인에서)[9] 수입되었고, 동방에서 온 염료을 사용하여 고품질 직물을 생산하였다.
지중해 및 그 너머를 아우르는 이탈리아 무역로는 문화와 지식의 주요 통로이기도 했다. 15세기에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 제국을 정복함에 따라 동로마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이주해 왔고, 이들이 가져온 "잃어버린 그리스 고전"은 피렌체와 베네치아에 새로 설립된 학술원에서 르네상스의 새로운 연구를 촉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문주의 학자들은 수도원 도서관에서 고대 필사본을 찾아 타키투스 등의 고대 라틴 작가들 작품을 회복했다. 비트루비우스 재발견을 통해 고대 건축 원리를 다시 알아낼 수 있게 되었으며,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그들이 읽은 아펠레스와 같은 고대인의 업적을 능가할 수 있다는 인문주의적 낙관론적 분위기에 고무되었다.
종교적 배경
[편집]서기 5세기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가 그 공백을 메웠다.[10] 중세 시대에 교회는 하느님의 뜻으로 여겨졌고, 삶의 행동 기준을 규제했다. 문맹률이 높고 성경 번역이 금지되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 윤리와 법을 사제들의 설명을 통해야만 알 수 있었다.[11]
11세기에 교회는 사회의 불규칙성을 제거하고 교회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교도, 유대인, 나병 환자 등 많은 집단을 박해했다.[12] 평신도들이 교회 권위에 도전함에 따라 주교들은 세속 권력에 대한 통제력을 점차 잃게 되었고, 권력을 되찾기 위해 이단자 박해와 같은 극단적인 통제 방법을 채택했다.[13]
교회는 또한 중세에 신자들로부터 면죄부 판매 등을 통해 많은 부를 거두었다. 또한 세금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의 부는 일부 왕보다 많았다.[14]
13세기
[편집]13세기에 유럽의 상당 부분이 강력한 경제 성장을 경험했다. 이탈리아 국가들의 무역로는 지중해 항구와 연결되었고, 결국 발트해 및 북유럽 지역의 한자동맹과 연결되어 4세기 이래 처음으로 유럽 전역에 걸친 네트워크 경제가 생성되었다. 이 시기에 이탈리아 도시국가는 크게 확장되었고,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사실상 완전히 독립할 정도로 권력이 커졌다. 그리고 나폴리 왕국을 제외하고는 외세는 이탈리아에 군대를 주둔시킬 수 없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이 시기에 기독교인들은 돈을 빌려줄 수 없었고 유대인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었기 때문에, 유대인 공동체는 복식부기, 합명회사, 국제 은행 시스템, 체계화된 외환시장, 보험, 국가채무와 같은 현대적인 상업 인프라를 개발했다.[15] 피렌체는 이 금융 산업의 중심지가 되었고, 플로린 금화는 국제 무역의 주요 통화가 되었다.
반복되는 역병으로 서유럽 인구의 3분의 2가 사망한 결과로 심각한 노동력 부족이 발생하자, 새로운 상업 지배층은 더 높은 임금과 심지어 사유지 소유권을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인구 감소는 궁극적으로 중세 유럽을 지배했던 봉건제 귀족 모델을 대체했다.
북이탈리아 전성기 중세의 특징 중 하나는 주교와 지역 백작의 통제에서 벗어난 도시 자치 공동체의 부상이었다. 이 지역의 대부분에서 토지를 소유한 귀족은 화폐 경제내의 도시 가문보다 경제력이 떨어졌고,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토지를 소유한 귀족은 더욱 가난해졌다. 초기 르네상스 동안 무역이 증가하자 이러한 특성이 더욱 강화되었다. 인구의 급격한 감소는 봉건제의 농노를 대체하는 새로운 계급을 낳았고 도시의 성장은 시너지 효과를 냈다. 예를 들어, 고급 상품에 대한 수요로 무역이 증가하게 되었고,더 많은 상인들이 부유하게 되었으며, 그들은 다시 향신료 등 고급 상품에 대한 수요를 창출했다. 이러한 변화는 상인들이 이탈리아 도시국가 정부를 거의 완전히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다시 무역을 촉진시켰다. 이렇게 부를 확보한 계층은 그를 과시할 수단이 필요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중산층이 탄생한 것이다.
정치적 통제의 가장 중요한 효과 중 하나는 안보였다. 봉건 국가의 부자들은 프랑스의 자크 쾨르 사건처럼 군주의 비위를 거슬러 영토를 몰수 당할 위험을 안고 있었다. 북부 국가들은 또한 고리대금에 대한 금지 조항이나 비기독교인과의 무역 금지 조항과 같이 상업을 심각하게 방해하는 많은 중세 법률이 존재했다.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에서는 이러한 법률이 폐지되거나 개정되었다.[16]
14세기의 붕괴
[편집]14세기 들어 유럽 경제는 일련의 재앙을 겪고 침체에 빠지게 되었다. 중세 온난기가 끝나고 소빙기가 시작되면서 기후 변화가 시작되었다.[17] 추워진 기후로 농업 생산량이 크게 감소하자 반복적인 기근이 발생했으며, 이전 시대의 급격한 인구 증가와 결합하여 더욱 상황이 악화되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백년 전쟁은 북서유럽 전역의 무역을 방해했고, 특히 1345년 에드워드 3세가 빚을 탕감하여 바르디와 페루치의 두 가문이 운영하는 가장 큰 피렌체 은행이 붕괴하는 데 기여했다.
동쪽에서는 오스만 제국이 지역 전역으로 확장됨에 따라 이슬람과의 전쟁이 발발해 무역을 방해했다. 그러나 가장 파괴적인 것은 흑사병으로, 인구 밀집 지역인 북부 이탈리아 도시의 인구를 황폐화시켰고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재발했다. 예를 들어, 역병 이전 인구가 45,000명이었던 피렌체는 다음 47년 동안 25~50% 감소했다.[18] 이어서 광범위한 무질서가 발생하였다. 1378년 피렌체 직물 노동자들의 치옴피의 난이 그러한 예이다.

단테와 페트라르카와 같은 최초의 세속 작가들이 책을 발간하고, 조토의 사실주의와 같은 르네상스 예술의 초기 움직임이 나타난 것은 바로 이러한 불안정한 시대였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재앙들은 르네상스를 가져오는 데 도움이 되었다. 흑사병이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쓸어버리면서 결과적으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임금을 인상되고, 남아있는 인구는 훨씬 더 부유해지고, 더 잘 먹고, 사치품에 쓸 여유 돈이 생기게 된 것이다.
15세기 초 흑사병 발생률이 감소하기 시작하자, 유럽의 황폐화된 인구는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새로이 발생하게 되어, 은행가, 상인, 숙련된 장인 계층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흑사병의 공포와 이 과정에서 교회가 보인 무능력은 교회의 영향력 감소에 기여하였다. 또한 바르디와 페루치 은행의 붕괴로 메디치가가 피렌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로베르토 사바티노 로페스는 이러한 경제적 붕괴가 르네상스의 주요 원인이었다고 주장한다.[19] 이 관점에 따르면, 번성하는 시대라면 사업가들이 투자에 유리한 환경에서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수익을 빠르게 재투자했을 것이지만, 14세기와 같이 어려운 시기에는 부유한 사람들이 유망한 투자 기회를 거의 찾지 못했고, 대신 문화와 예술에 더 많은 돈을 쓰기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고대 후기 이후 서유럽에서 보존되고 연구되어 온 로마 문헌과 달리, 중세 이탈리아의 고대 그리스 문헌 연구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과학, 수학, 철학 작품은 서유럽의 전성기 중세와 이슬람의 황금기 이후 (대개 번역본으로) 연구되어 왔지만, 그리스 문학, 웅변 및 역사 작품 (예: 호메로스, 그리스 극작가, 데모스테네스, 투키디데스)은 라틴어권이나 중세 이슬람 세계에서 연구되지 않았다. 중세에 이러한 종류의 문헌은 동로마 학자들만이 연구했다. 일부 학자는 사마르칸트의 티무르 르네상스가 오스만 제국과 관련되어 있었고, 그들의 정복이 그리스 학자들을 이탈리아로 이주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20][21][22][23]
이탈리아 르네상스 학자들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는 고대 후기 이후 처음으로 이 모든 그리스 문화 작품을 서유럽으로 다시 가져온 것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또 다른 인기 있는 설명은 역사가 한스 바론이 처음 제기한 주장이다.[24] 이 주장에 따르면 초기 르네상스의 주요 동력이 피렌체와 밀라노 사이의 오랜 전쟁이었다고 말한다. 14세기 후반까지 밀라노는 비스콘티 가문의 통제 아래 중앙집권적 군주국이 되었다. 1378년부터 1402년까지 도시를 통치했던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는 그의 잔혹함과 능력으로 유명했는데, 북이탈리아에 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는 오랜 전쟁을 시작하여 밀라노는 이웃 국가들을 꾸준히 정복하고, 전진을 막으려던 피렌체 연합군을 패배시켰다. 이는 1402년 피렌체 포위전에서 절정에 달했는데, 도시가 함락될 운명에 처하기 직전 잔 갈레아초가 갑자기 사망하고 그의 제국이 붕괴되었다.
한스 바론은 피렌체의 주요 인물들이 이 오랜 전쟁을 자유 공화국과 전제 군주정, 이상적인 그리스와 로마 공화국과 중세 왕국 사이의 전쟁이라고 선동하여 사람들을 결집시켰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사상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은 한 인물은 레오나르도 브루니였다. 피렌체의 이러한 위기 시기는 기베르티, 도나텔로, 마솔리노, 그리고 브루넬레스키와 같은 초기 르네상스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성숙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러한 공화주의 이데올로기로 물든 인물들이 공화주의 사상을 옹호함으로써 르네상스와 서구의 부흥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발전
[편집]국제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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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 이탈리아와 중북부 이탈리아는 여러 도시국가들로 나뉘어 있었는데, 가장 강력했던 도시국가들로는 밀라노, 피렌체, 피사, 시에나, 제노바, 페라라, 만토바, 베로나, 베네치아 등이 있었다. 중세 전성기의 북이탈리아는 교황권과 신성 로마 제국 간의 오랜 패권 다툼으로 더욱 분열되어 있었다. 각 도시는 필요에 따라 다른 파벌들과 동맹을 맺었지만, 내부적으로는 구엘프와 기벨린이라는 두 경쟁 파벌로 나뉘어 있었다. 국가 간의 전쟁은 흔했으며, 신성 로마 황제가 간헐적으로 침략하기도 했다. 르네상스 정치는 이러한 배경에서 발전했다. 13세기 이후, 군대가 주로 용병으로 구성되면서 번성하는 도시국가들은 적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다. 15세기 동안, 가장 강력한 도시 국가들은 작은 이웃 국가들을 합병했다. 피렌체는 1406년에 피사를 차지했고,[25] 베네치아는 파도바와 베로나를 점령했으며, 밀라노 공국은 파비아와 파르마를 포함한 여러 인근 지역을 합병했다.
르네상스 초기에는 도시국가들이 패권을 다투면서 육상과 해상에서 거의 끊임없이 전쟁이 벌어졌다. 육상에서는 이러한 전쟁이 주로 콘도티에로로 알려진 용병 군대에 의해 치러졌는데, 이들은 유럽 전역, 특히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에서 온 병사들로 구성되었으며, 주로 이탈리아인 지휘관들이 이끌었다. 용병들은 불필요하게 목숨을 걸려 하지 않았고, 전쟁은 주로 공성전과 기동전이 되었으며, 대규모 전투는 거의 없었다. 양측 용병들에게도 고용을 지속하기 위해 분쟁을 연장하는 것이 이익이었다. 용병들은 또한 고용주에게도 위협이 되었는데, 돈을 받지 못하면 종종 고용주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한 국가가 전적으로 용병에 의존하는 것이 명백해지면 용병들이 직접 통치권을 장악하려는 시도도 여러 차례 발생했다.[26] 프랑스는 스페인이 샤를 8세의 나폴리 왕국에 대한 권리 주장을 반대하면서 적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이 되자 중립을 유지했다. 하지만 프랑스와의 평화는 샤를 8세가 나폴리를 차지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침략하면서 끝났다.[27]
해상에서는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많은 함대를 전투에 파견했다. 주요 경쟁자들은 피사, 제노바, 베네치아였지만, 오랜 갈등 끝에 제노바는 피사를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베네치아는 더 강력한 적수로 등장하여, 15세기에 제노바의 해군력을 패퇴시키고 베네치아가 해상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육지에서의 위협에 대응하여 15세기 초부터 베네치아는 베네치아 르네상스 시작과 함께 테라페르마(육지 영토) 통제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육지에서는 수십 년간의 전투 끝에 피렌체, 밀라노, 베네치아가 지배적인 세력으로 부상했으며, 이 세 강대국은 마침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1454년 로디 평화 조약에 합의하여 수세기 만에 처음으로 평화를 가져왔다. 이 평화는 이후 40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베네치아가 해상에서 패권을 장악하면서 15세기 대부분 동안 전례 없는 평화가 유지되었다. 15세기 초, 니콜로 다 콘티 (1395–1469)와 같은 모험가와 상인들은 동남아시아까지 여행하고 돌아와 세계의 상황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가져왔으며, 이는 앞으로 유럽의 탐험 항해를 예고했다.
메디치가의 피렌체
[편집]14세기 후반까지, 메디치 가문 이전의 피렌체 주요 가문은 알비치가였다. 1293년에 정의 조례(Ordinances of Justice)가 제정되어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내내 사실상 피렌체 공화국의 헌법이 되었다.[28] 피렌체의 여러 호화로운 궁전들은 번성하는 상인 계급이 지은 타운하우스로 둘러싸이게 되었다.[29] 1298년, 유럽의 주요 은행 가문 중 하나인 본시뇨리가가 파산하면서 시에나는 유럽의 은행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피렌체에 넘기게 되었다.[30]

알비치가의 주요 경쟁자는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와 그의 아들 코시모 데 메디치가 지휘한 메디치가였다. 메디치가는 당시 유럽 최대의 은행인 메디치 은행과 피렌체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다양한 사업을 통제했다. 1433년, 알비치가가 코시모를 추방하는 데 성공했지만,[31] 다음 해에 친 메디치파인 시뇨리아가 선출되면서 코시모가 돌아왔다. 메디치가는 도시의 주요 가문이 되었고, 이후 3세기 동안 이 지위를 유지했다. 피렌체는 영국과 네덜란드, 프랑스, 이탈리아 간에 향신료, 양모, 비단 등의 상품 무역로를 만들었다. 1400년대 중반이 되자 피렌체는 유럽 은행의 수도가 되었고, 그 결과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32]
1439년,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8세는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를 통합하기 위해 피렌체 공의회에 참석했다. 이때 그는 많은 책을 가져왔고, 특히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많은 학자들이 피렌체로 유입된 계기가 되었다.[33] 이를 통해 고대 그리스가 새로운 관심을 끌게 되었고, 특히 신플라톤주의 사조가 집중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는데,[33] 이는 메디치 가문에 의해 설립된 피렌체 플라톤 아카데미의 핵심 주제였다.
피렌체는 1532년까지 공화국으로 남아 있었고(→ 피렌체 공국), 전통적으로 이 때를 피렌체 전성기 르네상스의 종말로 잡지만, 공화정 정부는 1494년부터 1527년 사이를 제외하고는 메디치가와 그들의 동맹자들의 통제 아래 있었다. 코시모와 로렌초 데 메디치는 거의 공식 직책을 맡지 않았지만 능력 있는 지도자였다. 코시모는 주로 도시에 안정과 번영의 시대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시민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있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밀라노와의 수십 년간의 전쟁을 종식시키고 북이탈리아의 대부분에 안정을 가져온 로디 평화 조약을 성공시킨 것이었다. 코시모는 또한 직간접적으로 수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하였고, 그가 보인 모범은 후대 메디치가의 예술가 후원에 영향을 미쳤다.
1464년 코시모가 죽은 후 병약한 아들 피에로 데 메디치가 계승했는데, 그는 도시를 5년 동안 다스리다가 죽었다. 1469년에 권력은 당시 21세 였고 후일 "위대한 로렌초"로 알려지게 되는 코시모의 손자 로렌초에게 넘어갔다. 로렌초는 가문 최초로 어린 시절부터 인문주의 전통에서 교육 받았으며,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중요한 예술 후원자로 잘 알려져 있다. 로렌초는 피렌체의 통치 평의회 구성을 100명에서 70명으로 개혁하여[34] 메디치 통치를 공식화했다. 공화정 기관은 계속되었지만 모든 권력을 잃었다. 로렌초는 사업에서는 성공적이지 못했고, 메디치의 상업 제국은 서서히 침식되었다. 로렌초는 밀라노와의 동맹을 계속했지만, 교황청과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1478년 교황청 요원들이 파치가와 동맹을 맺고 로렌초를 암살하려 했다. 파치 음모는 실패했지만, 로렌초의 어린 동생 줄리아노가 피렌체 대성당에서 부활절 주일 미사 중 살해 당했다.[35] 암살 실패는 교황청과의 전쟁으로 이어졌고, 로렌초의 손에 권력을 더욱 집중시키는 명분이 되었다.[36][37]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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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이상은 처음에는 피렌체에서 시에나와 루카와 같은 이웃 토스카나주 국가로 퍼져나갔다. 토스카나 문화는 곧 북이탈리아 모든 국가들의 모범이 되었고, 특히 문학 분야에서 토스카나 방언이 이탈리아 전역에서 우세하게 되었다. 1447년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밀라노에서 권력을 잡았고, 그는 여전히 중세적이었던 도시를 주요 예술 및 학문의 중심지로 빠르게 탈바꿈시켰다. 아드리아 해를 통제하여 부유한 도시가 된 베네치아 또한 르네상스 문화, 특히 베네치아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되었다. 작은 도시들도 르네상스 후원에 앞장서면서, 독특한 예술을 발전시켰다. 페라라, 곤차가가 통치하의 만토바,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통치하의 우르비노가 그 예이다. 나폴리에서는 알리폰소 5세의 후원 아래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는데, 그는 1443년 나폴리를 정복하고 프란체스코 라우라나와 안토넬로 다 메시나와 같은 미술가들과 시인 야코포 산나차로와 인문주의 학자 안젤로 폴리치아노와 같은 작가들을 후원하였다.
1417년 교황청이 로마로 돌아왔지만, 한때 제국의 도시였던 로마는 르네상스 초기에는 가난하고 폐허에 가까운 도시로 남아 있었다.[38] 위대한 변화는 1447년에 교황이 된 교황 니콜라오 5세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결국 도시 재건의 시발점이 되는 드라마틱한 도시 재건 사업을 시작했다. 1458년, 인문주의 학자였던 아이네아스 실비우스 피콜로미니가 교황 비오 2세가 되었다. 교황청이 메디치 가문과 보르자가와 같은 부유한 가문의 통제 아래 놓이면서, 르네상스 예술과 철학의 정신이 바티칸을 지배하게 되었다. 교황 식스토 4세는 니콜라오 5세의 사업을 계속 추진하여, 가장 유명하게는 시스티나 경당의 건설을 명령했다. 또한 일련의 "전사 교황"(warrior popes)에 의해 교황령이 중앙집권적 권력을 형성하면서, 교황들은 점점 더 세속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르네상스의 본질 또한 15세기 후반에 변화했다. 르네상스 이상은 지배 계층과 귀족 계층에 의해 완전히 받아들여졌다. 초기 르네상스 시대에는 예술가들이 명성이나 인정이 거의 없는 장인으로 여겨졌다. 후기 르네상스 시대가 되면서 최고 실력자들은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많은 보수를 받을 수 있었다. 초기 르네상스 시대에는 많은 선도적인 예술가들이 하층 또는 중산층 출신이었지만, 점차 그들은 귀족이 되었다.[38]
저변 확대
[편집]문화 운동으로서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일부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미쳤다.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가장 도시화된 지역이었지만, 사람들의 4분의 3은 여전히 농촌 농민이었다.[39] 이 인구층에게 삶은 중세와 본질적으로 변함이 없었다.[40] 북이탈리아에서는 고전적인 봉건제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의 농민들은 사유 농장에서 일하거나 소작농으로 일했다. 일부 학자들은 후기 르네상스 시대에 도시 엘리트들이 토지 귀족으로 변모하면서 재봉건화되는 경향이 생겼다고 생각한다.[41]
도시의 상황은 달랐다. 도시는 상업 엘리트에 의해 지배되었고 그들은 어떤 중세 귀족만큼이나 배타적이었다. 이 집단은 르네상스 문화의 주요 후원자이자 향유자가 되었다. 그 아래에는 편안한 삶을 살면서 공화정 정부에서 상당한 권력을 가졌던 많은 장인과 길드원 계층이 있었다. 이는 장인들이 하층 계급에 속했던 유럽의 다른 지역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교육 받고 글을 읽을 수 있었던 장인 집단은 르네상스 문화의 주체가 되었다.[42] 도시 인구의 대부분은 반숙련 노동자와 실업자로 구성된 도시 빈민이었다. 농민들과 마찬가지로르네상스는 이들에게 거의 영향이 없었다. 역사가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이러한 집단 간의 이동이 얼마나 쉬웠는지에 대해 논쟁한다. 미천한 계급에서 출발해 성공한 개인들의 사례는 있지만, 역사가인 피터 버크는 두가지 연구에서 사회 이동성의 증가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언급한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르네상스 초기에는 사회 이동성이 상당히 높았지만, 15세기를 거치면서 정체되었다고 생각한다.[43] 사회의 불평등 수준은 매우 높았다. 상류층 인물은 하인이나 노동자보다 수백 배 더 많은 수입을 가졌을 것이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러한 불평등한 부의 분배가 르네상스에 중요하다고 보는데, 예술 후원이 매우 부유한 사람들에게 의존하기 때문이다.[44]
르네상스는 위대한 사회적 또는 경제적 변화의 시기가 아니라, 단지 문화적, 예술적, 이념적 발전의 시기였다. 그것은 매우 작은 인구에게만 영향을 미쳤고, 이는 역사적 유물론을 따르는 현재의 많은 역사가들이 인간 역사에 대한 르네상스의 중요성을 축소시키게 만들었다. 이러한 역사가들은 "르네상스 시대" 대신 "초기 근세 유럽"(Early modern Europe)이라는 용어로 대체하는 경향이 있다. 로저 오스본[45]은 "르네상스는 역사가들에게 어려운 개념이다. 왜냐하면 유럽의 역사가 갑자기 이탈리아 회화, 조각, 건축의 역사로 변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쇠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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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종말은 시작점만큼이나 불분명하다. 많은 이들에게 1494년에서 1498년에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라는 엄격한 수도승이 피렌체에서 권력을 장악한 것이 도시의 번영의 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1512년 메디치 가문이 권력을 되찾음으로써 르네상스 예술의 후기 단계인 매너리즘의 시작을 알린다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또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종말이 16세기 초 프랑스의 침략과, 이탈리아 영토를 통제하기 위한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갈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46] 도미니쿠스회의 수도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는 르네상스의 세속주의와 방종에 대한 광범위한 반발을 힘입어 피렌체의 권력을 잡았다.[47] 그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피렌체 중심부에서 "허영의 소각"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예술 작품들이 파괴되었다. 메디치 가문이 토스카나 대공으로서 권력을 되찾았지만, 교회 내부의 반대는 계속되었다. 1542년 로마 종교재판이 설립되었고, 몇 년 후 금서 목록에 많은 르네상스 문학 작품이 등록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줄리오 클로비오와 채식필사본이 종말을 맞게 된다. 줄리오 클로비오는 이탈리아 전성기 르네상스의 가장 위대한 채색가이자, 현대에 들어 몇몇 예술가가 부흥시키기 전까지 채식필사본의 오랜 전통에서 마지막 주목할 만한 예술가로 여겨진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탄압과 전쟁의 황폐함 속에서 인문주의는 "이단에 가까운 것"이 되었다.[48]
르네상스 종말에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수십 년 동안 일련의 외세 침략으로 인한 이탈리아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1494년 프랑스의 침략으로 시작되어, 북 이탈리아를 광범위하게 파괴하고 많은 독립 도시 국가들을 멸망시켰다. 가장 피해가 컸던 것은 1527년 5월 6일 스페인과 독일 군대의 로마 약탈로서, 이로 인해 교황청의 르네상스 예술과 건축의 가장 큰 후원자로서의 역할은 20년간 거의 중단되었다.[38]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쇠퇴하는 동안, 북유럽 르네상스는 르네상스의 이상을 받아들이고 그 양식을 변화시켰다. 많은 이탈리아의 위대한 예술가들이 북유럽으로의 이주를 선택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예는 1516년 프랑스로 떠난 레오나르도 다 빈치였지만, 퐁텐블로궁을 변모시키기 위해 초청된 소규모 예술가 그룹이 퐁텐블로 화파를 형성해 프랑스에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을 주입하였다. 매너리즘에 의해 변형된 새로운 양식이 퐁텐블로에서 저지대 국가로, 그리고 북유럽 전역으로 르네상스를 퍼뜨렸다.
이 북방 르네상스의 확산은 또한 더 큰 추세를 대표했다. 더 이상 지중해는 유럽의 가장 중요한 무역로가 아니었다. 1498년 바스쿠 다 가마가 인도에 도착했고, 그때부터 동양 상품은 리스본, 세비야, 낭트, 브리스톨, 런던의 대서양 항구를 통하는 경로로 운송되기 시작하였다.
문화
[편집]문학과 시
[편집]13세기 이탈리아 문학 혁명은 르네상스를 위한 발판이 되었다. 르네상스 이전에는 이탈리아어가 이탈리아의 문학 언어가 아니었다. 13세기에 이르러서야 이탈리아 작가들이 라틴어, 프랑스어, 프로방스어 대신 이탈리아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1250년대에는 이탈리아 시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돌체 스틸 노보 (새로운 달콤한 스타일, 궁정연애보다는 플라토닉 러브를 강조)가 구이토네 다레초와 구이도 구이니첼리와 같은 시인들의 선구적인 노력을 통해 절정을 맞이했다. 특히 시 분야에서는 르네상스가 진정으로 시작되기 수십 년 전부터 이탈리아 문학에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알도 마누치오가 베네치아에서 시작한 서적 인쇄와 함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주류를 이루었던 라틴어와 그리스어 서적 외에도 이탈리아어로 출판되는 작품의 수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작품들의 원천은 신학 작품을 넘어 제정 로마와 고대 그리스 등 기독교 이전 시대로 확장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기에 종교적인 작품이 전혀 출판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은 뚜렷하게 중세적인 세계관을 반영한다.[49] 기독교는 예술가와 작가에게 여전히 강력한 영향을 미쳤으며, 고전도 두 번째 중요한 영향으로 자리 잡았다.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는 주로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고전 작품을 번역하고 연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작가들은 고대 작가들의 명성에만 안주하지 않았다. 많은 작가들이 고대 그리스인들의 방법론과 스타일을 자신의 작품에 통합하려고 시도했다. 가장 많이 모방된 로마인들로는 키케로, 호라티우스, 살루스티우스, 그리고 베르길리우스가 있었다. 그리스인들 중에는 아리스토텔레스, 호메로스, 그리고 플라톤이 4세기 이래 처음으로 원문으로 읽히고 있었지만, 그리스어 작품은 흔하지 않았다.
르네상스 시대의 문학과 시는 발전하는 과학과 철학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새로운 학문의 핵심 인물이었던 인문주의자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는 또한 뛰어난 시인이었으며, 여러 중요한 시 작품을 발표했다. 그는 라틴어로 시를 썼는데, 특히 제2차 포에니 전쟁에 관한 서사시 《아프리카》가 유명하다. 그러나 오늘날 그는 이탈리아어 작품, 특히 그가 짝사랑했던 라우라에게 바친 연애 소네트 모음집인 《칸초니에레》로 기억된다. 그는 페트라르카식 소네트의 선도적인 작가로서, 그의 작품을 토머스 와이어트가 영어로 번역함으로써 소네트 형식이 영국에 자리 잡았고,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수많은 시인들이 이 형식을 사용했다.
페트라르카의 제자 조반니 보카치오는 그 자체로 중요한 작가이다. 그의 주요 작품은 흑사병을 피해 피렌체 외곽으로 도망친 열 명의 이야기꾼들이 10일 간밤마다 들려주는 100가지 이야기 모음집인 《데카메론》이었다. 《데카메론》, 특히 보카치오의 작품은 제프리 초서와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포함한 많은 르네상스 시대 영국 작가들에게 영감의 주요 원천이 되었다.
기독교, 고전 고대, 그리고 학문 외에 르네상스 문학에 영향을 미친 네 번째 요인은 정치였다. 정치 철학자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로마사 논고》, 《피렌체 연대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군주론》으로, 군주론은 현대 사회에서 매우 유명해져 '마키아벨리적'이라는 단어가 교활하고 무자비한 행동을 지칭하게 되었다.[50] 다른 많은 르네상스 작품과 마찬가지로, 군주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관련성이 높고 영향력 있는 문학 작품으로 남아 있다.
많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인본주의자들은 시와 문학에서 인간의 신체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고 확인하기도 했다.[51] 발다사레 라시누스의 프란체스코 스포르차 찬가에서 라시누스는 아름다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미덕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52] 북이탈리아에서 인본주의자들은 신체적 아름다움과 내면의 미덕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논의했다. 르네상스 이탈리아에서는 남성을 칭찬하기 위한 목적으로 종종 미덕과 아름다움을 연결시켰다.[51]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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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시인이자 인문주의자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의 업적중 하나는 새로운 학문 방법인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창시한 것이다.
페트라르카는 라틴어 고전 연구를 장려했으며, 그리스어를 읽는 방법을 가르쳐줄 사람을 찾지 못해 호메로스 사본을 가지고 다녔다. 피코 델라 미란돌라와 같은 학자들은 이름만 알려진 잃어버리거나 잊혀진 필사본을 찾아내는 것이 고전 인문주의 교육의 필수적인 단계라고 주장하였다. 잊혀진 필사본을 찾아내는 것은 이탈리아 귀족, 상인 대공, 독재자들의 도움으로 가능하였다. 또 이들은 도서관을 짓는데 상당한 자금을 지출했다. 과거를 발견하는 것은 유행이 되었고, 사회 상류층에 열정적으로 퍼져나갔다. 키리아크 드 안코나는 "나는 간다. 나는 죽은 자들을 깨우러 간다."고 말했다. 그리스 작품들이 수집되고, 필사본이 발견되고, 도서관과 박물관이 세워지고, 인쇄기 시대가 도래하였다. 고대 작품들은 그리스어와 라틴어에서 유럽어로 번역되었고, 셰익스피어 같은 "라틴어는 조금, 그리스어는 덜 아는" 중산층 독자들이 고객이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철학, 예술, 문학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했지만, 과학 분야에서는 보통 후퇴의 시기로 간주된다. 고전 자료를 존경한 결과 아리스토텔레스적이고 프톨레마이오스적 우주관이 더욱 확고해 졌다. 인본주의가 확산되자, 자연은 "법이나 수학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살아있는 영적 창조물"로 여겨지게 되었다. 동시에, 논리학과 연역법이 직관과 감정보다 못한 것으로 간주되면서 철학이 엄밀함을 많이 잃어버렸다.
과학과 기술
[편집]르네상스 기간 동안 지리학, 천문학, 화학, 물리학, 수학, 제조업, 해부학 및 공학 분야에서 큰 발전이 이루어졌다. 15세기 초부터 고대 과학 문헌의 수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까지 이어졌고, 인쇄술의 발명으로 학문이 민주화되고 새로운 사상이 빠르게 전파될 수 있었다.[53] 인본주의자들은 종종 자연철학이나 응용수학 연구보다 정치와 역사와 같은 인간 중심적인 주제를 선호했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관심을 넘어 잃어버리거나 사라진 문헌을 재발견하고 원어 연구와 정확한 문헌 독해를 강조함으로써 수학과 과학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54][55][56]
파도바, 볼로냐, 피사 등 이탈리아 대학들은 저명한 과학 연구의 중심지였다. 이들 대학의 르네상스 과학은 수많은 북유럽 유학생들을 통해 전 유럽으로도 퍼져나갔다. 코페르니쿠스, 프랜시스 베이컨, 데카르트, 그리고 갈릴레오와 같은 인물들은 과학적 사고와 실험에 기여하여 나중에 북유럽에서 번성한 과학 혁명의 길을 닦았다.[57] 해부학 교수인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와 같은 많은 사람들은 교수대에서 시체를 훔쳐내 검사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동물을 해부했던 갈레노스의 연구에 200가지 이상을 수정하여 더 정확한 골격 모델을 만들 수 있었다.[58]
수학
[편집]수학 분야에서는 유럽, 특히 이탈리아 전역에 걸쳐 대수학 발견 확산을 비롯한 여러가지 혁신이 이루어졌다.[59] 루카 파치올리는 15세기 말에 수학 책을 출판했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양수와 음수 부호를 발표했다. 기본적인 수학 기호는 16세기와 17세기 초에 시몬 스테빈에 의해 도입되었다. 16세기 프랑스 수학자 프랑수아 비에트는 기호 대수학을 확립하였다. 그는 1591년에 "해석적 방법 입문"을 출판하여 대수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처음으로 기지수와 미지수를 문자를 사용해 나타내는 방법을 고안했다. 비에트는 그의 다른 책 "방정식의 인식과 수정에 관하여"에서 3차 및 4차 방정식의 해법을 개선하고, 2차 및 3차 방정식의 근과 계수 사이의 관계를 확립했는데, 이는 현재 "비에트의 공식"이라고 불린다. 삼각법 또한 르네상스 시대에 큰 발전을 이루었다. 독일 수학자 레기오몬타누스의 "모든 종류의 삼각형에 관하여"는 유럽 최초로 천문학으로부터 삼각법을 독립시킨 저작이었다. 이 책은 평면 삼각형과 구면 삼각형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매우 정밀한 삼각함수 표를 포함했다.[60]
회화와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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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 분야에서, 중세 후기의 화가 조토 디 본도네는 나중에 르네상스 미술을 정의하는 예술적 개념을 형성하는 기초를 마련했다. 그가 탐구한 핵심 사상들, 즉 고전주의, 삼차원 공간의 환상, 그리고 현실적인 감정 표현은 마사초,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은 르네상스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61] 그러나 조토가 이러한 사상을 발전시킨 유일한 중세 예술가는 아니었다. 화가 피에트로 카발리니와 치마부에는 모두 조토의 조각상 같은 인물과 현실적인 장면 표현에 영향을 미쳤다.[62][63]
피렌체 화가 마사초의 프레스코화는 일반적으로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예술 작품 중 하나로 간주된다. 마사초는 조토, 도나텔로, 브루넬레스키의 사상을 자신의 그림에 통합하여 삼차원 공간을 재현하는 듯한, 수학적으로 정밀한 장면들을 창조했다.[64] 예를 들어, 피렌체 교회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성 삼위일체 프레스코화는 극적인 각도로 어두운 배경 속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며, 단일 광원 조명과 원근법을 사용해 그리스도 상이 보는 사람의 공간 앞으로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65]
로마와 피렌체의 화가들은 수학적 정확성과 고전적 이상주의에 매료되었지만, 베네치아, 밀라노, 파르마 지역의 많은 북부 예술가들은 자연 세계의 매우 환상적인 장면을 선호했다.[66] 이 시기에는 최초의 세속적인(비종교적인) 주제도 등장했다. 초기 20세기 작가인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와 같은 사람들은, 비교적 적은 수의 신화적 그림이 존재하는 것을 근거로, 르네상스 시대에 어느 정도의 세속주의가 있었는지에 대해 많은 논쟁을 하였다. 보티첼리의 그림, 특히 《비너스의 탄생》과 《프리마베라》는 현재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서, 그는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작품의 대다수는 전통적인 종교화나 초상화였다.[67]

조각 분야에서는 피렌체 예술가 도나텔로가 고전적 요소를 대리석과 청동으로 구현한 최초의 조각가 중 한 명이었다.[68] 그의 두 번째 《다비드》 조각은 로마 제국 이후 유럽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독립형 청동 누드 조각이었다.[69]
회화에서 전성기 르네상스로 알려진 시기는 다양한 표현 수단[70]과 원근법,[71] 물리적[72] 및 심리적 특징의 사실적 묘사,[73] 그리고 색조 대비, 스푸마토 (부드러운 색상 전환), 키아로스쿠로 (명암 대비)를 포함한 빛과 어둠의 조작[74]과 같은 다양한 회화 기법이 발전하여 통일된 스타일[75]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으며, 이는 완전한 구성적 질서, 균형 및 조화를 표현했다.[76] 특히 이러한 구성에서는 그림의 개별 부분들도 전체와 균형 잡히고 서로 잘 연관되었다.[77] 이 시기의 가장 유명한 화가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그리고 미켈란젤로로서,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과 《모나리자》,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경당 천장화》를 포함한 그들의 그림들은 이 시기의 걸작이자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예술 작품 중 하나이다.[67]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는 특히 피렌체에서 매너리즘으로 발전했다. 전성기 르네상스의 원리에 의식적으로 반항했던 매너리즘 예술가들은 비논리적인 공간에 길쭉한 인물을 표현하는 경향이 있었다. 현대 학문은 매너리즘 예술이 전성기 르네상스 예술이 이루지 못했던 강렬한 (종종 종교적인) 감정을 전달하는 능력을 인정했다. 이 시기의 주요 예술가들 중 일부는 폰토르모, 브론치노, 로소 피오렌티노, 파르미자니노 그리고 라파엘로의 제자 줄리오 로마노 등이 있다.[78]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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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에서는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에 의해, 혁신적이지만 미완성인 기념물을 통해 르네상스 양식이 도입되었다. 르네상스적 특징을 보여주는 가장 초기 건물로는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의 산 로렌초 성당와 파치 예배당이 있다. 또 "산토 스피리토" 내부에는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형인 새로운 빛, 명료함, 공간감이 표현되어 있다. 이 건축물은 중세의 어둠과 영성에 대비되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철학, 즉 깨달음과 정신의 명료함을 잘 드러낸다. 고전 고대의 부활은 루첼라이 궁전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이 건물의 필라스터(벽 기둥)에는 여러 고전주의적 건축 양식을 중첩시켰다. 즉, 1층에는 도리스식 주두, 피아노 노빌레(가장 중요한 층)에는 이오니아식 주두, 최상층에는 코린토스식 주두가 있다. 르네상스 건축가들은 이전 시대의 고딕 양식의 높고 웅장한 첨탑 대신 웅장하고 큰 돔을 선호했다.
만토바에서 알베르티는 새로운 고풍 양식을 도입했지만, 그의 최고 걸작인 산탄드레아 성당은 건축가의 사망 이후인 1472년이 되어서야 착공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이라고 하는 방식은 브라만테가 지은 로마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성당의 템피에토 (1502년)와 중앙 집중식 성 베드로 대성전 (1506년)을 통해 로마에 도입되었는데, 이는 미켈란젤로와 자코모 델라 포르타를 포함한 거의 모든 저명한 르네상스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친, 이 시대의 가장 주목할 만한 건축이었다. 1550년 후기 르네상스양식은 안드레아 팔라디오가 주도한 새로운 기둥 양식의 개발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양식은 2층 이상의 높이를 가진 거대 주범(Giant order) 기둥이 파사드를 장식하는 특징이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에는 수학이 발전하고 널리 퍼졌다. 그 결과, 발다사레 페루치 등의 일부 르네상스 건축가들은 건축 도면에 수학적 지식을 활용했다.[79]
음악
[편집]14세기 이탈리아의 음악 분야에서도 다른 예술 분야의 활동과 혁신 수준에 상응하는 폭발적인 혁신이 일어났다. 비록 음악학자들은 일반적으로 트레첸토 (14세기)의 음악을 후기 서양 중세 음악 시기로 분류하지만, 이 시기의 음악에는 초기 르네상스와 일치하는 특징들이 일부 나타난다. 즉, 교회 기관에서 귀족, 심지어 일반 대중에게까지 문화가 확산되고, 완전히 새로운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는 등, 세속적 소재와 양식, 형태가 강조되었다. 주요 형식으로는 트레첸토 마드리갈, 카논, 그리고 발라타가 있었다. 전반적으로 이 시기의 음악 스타일은 "이탈리아 아르스 노바(새 음악)"라고 불린다. 15세기 초부터 16세기 중반까지 저지대 국가가 종교 음악 혁신을 이끌었고, 이 지역에서 수많은 재능 있는 작곡가들이 이탈리아로 왔다. 그들 중 다수는 로마의 교황 합창단이나 로마,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 페라라 등의 여러 귀족 예배당의 합창단에서 노래했으며, 그들이 가져온 다성음악 양식은 많은 이탈리아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의 성악곡의 지배적인 형식은 미사곡과 모테트였다. 16세기 이탈리아 교회 음악 작곡가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조반니 피에를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로, 로마 악파의 가장 저명한 구성원이었으며, 그의 부드럽고 감정적으로 냉정한 다성음악 양식은 적어도 19세기와 20세기 음악학자들의 관점에서 16세기 후반의 결정적인 음악이 되었다. 16세기 후반의 다른 이탈리아 작곡가들은 당시의 주요 세속가곡 형식인 마드리갈 작곡에 집중했다. 거의 100년 동안 이러한 다성 가수들을 위한 세속곡들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마드리갈 작곡가로는 자크 아르카델트, 치프리아노 데 로레, 루카 마렌치오, 필리프 드 몬테, 카를로 제수알도,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등이 있었다. 이탈리아는 또한 기악곡 혁신의 중심지였다. 16세기 초에 건반 즉흥 연주가 높이 평가되었고, 수많은 명인 건반 음악 작곡가들이 등장했다. 바이올린과 같은 많은 친숙한 악기들이 르네상스 후기 이탈리아에서 발명되고 완성되었는데, 그 초기 형태는 1550년대 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16세기 후반에 들자 이탈리아는 유럽 음악의 중심지가 되었다. 바로크 시대를 정의하게 될 거의 모든 혁신이 16세기 마지막 수십 년 동안 북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베네치아에서는 베네치아 악파의 다성 음악 작품과 관련 기악곡이 북쪽 독일로 이동했다. 피렌체에서는 카메라타가 모노디를 개발했는데, 이는 오페라의 중요한 전신으로서, 오페라 자체는 1600년경에 처음 등장했다. 그리고 카를로 제수알도의 음악을 통해 나폴리 등으로 전파된 페라라 학파의 아방가르드하고 매너리즘적인 양식은 르네상스 다성 성악곡의 마지막 정점을 찍었다.
역사학적 평가
[편집]유럽 근세 초기에는 르네상스, 즉 문예 대변혁에 대한 통일된 이론이 존재하였으나, 이후 엄청난 양의 다양한 역사학적 접근 방식이 등장하였다.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1818–1897)와 같은 역사가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작가들이 중세를 무익했다고 비난하고 자신들의 계몽된 비전을 선포하는 것을 낭만화하곤 했다. 르네상스를 "정체된" 중세의 종말로 홍보함으로써, 르네상스가 진보 및 번영의 상징으로 만든 것은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사》가 가장 큰 책임이다.[80] 현대 학자들은 중세 시대의 활력과 중세와 르네상스를 분리하기보다는 연속성을 강조하며 이러한 지배적인 서사에 이의를 제기한다.
엘리자베스 레펠트(Elizabeth Lehfeldt, 2005)는 흑사병을 유럽의 전환점으로 지목하며, 그 전 몇 년 동안 추진력을 얻고 있던 여러 움직임을 촉발시켜, 종교 개혁과 같은 서양 문명의 많은 후속 사건을 일으켰다고 설명했다. 이와 같은 르네상스를 연구하는 새로운 접근 방식은, 르네상스를 역사 시대 간의 뚜렷한 단절로 보기보다는, 이를 이미 잘 발전되어 있던 예술과 과학의 경향을 가속화한 촉매제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 죽음을 초점으로 삼는 예술 운동인 죽음의 무도는 종종 르네상스 경향으로 여겨지지만, 레펠트는 중세 시대의 고딕 미술이 흑사병이 유럽을 휩쓴 후 죽음의 무도로 변형되었다고 주장한다.[81]
찰스 해스킨스 (1860–1933)와 같이 보다 수정주의적인 관점을 취하는 최근 역사가들은, 이탈리아 정치인, 사상가, 작가들의 오만과 민족주의적 관점이 근세 시대에 대한 태도 왜곡의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해스킨스는 《12세기 르네상스》 (1927)에서 과거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역사에 뚜렷한 경계를 긋는 것이 인간 본성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역사는 연속적이고 과거에 기반을 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해스킨스는 이 사조의 선도적인 학자 중 한 명이었으며, 그(와 몇몇 다른 학자들)의 믿음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구성 요소가 모두 중세 시대에 마련되었고, 11세기 후반의 도시와 관료 국가의 부상이 이러한 "원(原)르네상스"에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그가 묘사하는 역사의 흐름은 르네상스를 중세의 연속으로 그리는데, 이는 대중적으로 상상하는 것만큼 긍정적인 변화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82] 부르크하르트 이후 많은 역사가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라틴어의 퇴보, 경제 침체, 사회 불평등이 이전 역사가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은폐되어 이 시대의 신비주의를 고취했다고 주장해왔다.
부르크하르트는 중세 시대를 "이상한 색조로 치장된 시기"라고 유명하게 묘사하며, 이 시대가 본질적으로 어둡고 혼란스러웠으며 진보적이지 않았다는 생각을 조장했다. 중세라는 용어는 15세기 후반에 인문주의자들인 페트라르카와 비온도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는데, 중요한 시작점과 끝점을 연결하는 시기이자, 그 양측 사이에 존재하는 역사의 임시적인 이름으로 묘사하였다. 이 시기는 결국 19세기에 영국 역사가들에 의해 "암흑시대"로 지칭되었고, 이는 르네상스에서 비롯된 개인주의와 인본주의에 대한 긍정적인 감정을 조장하기 위해 중세 시대의 서사를 더욱 오염시켰다.[83]
같이 보기
[편집]내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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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편집]- 피렌체의 전성기 르네상스 – 비디오
-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 르네상스 하우스 보관됨 2013-04-23 - 웨이백 머신
-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보관됨 2017-05-01 - 웨이백 머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