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광주원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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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의 제15비인 광주원부인에 대해서는 광주원부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태조의 제16비인 소광주원부인에 대해서는 소광주원부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후광주원부인
後廣州院夫人 | |
---|---|
고려 혜종의 왕비 | |
재위 | 미상 |
대관식 | 후광주원부인(後廣州院夫人) |
전임 | 의화왕후(義和王后) |
후임 | 청주원부인(淸州院夫人) |
이름 | |
휘 | 미상 |
이칭 | 미상 |
별호 | 미상 |
묘호 | 미상 |
시호 | 미상 |
신상정보 | |
출생일 | 생년 미상(生年 未詳) |
출생지 | 경기도 광주(京畿道 廣州) |
사망일 | 몰년 미상(沒年 未詳) |
사망지 | 경기도 광주(京畿道 廣州) |
왕조 | 고려(高麗) |
가문 | 개성(開城) |
부친 | 왕규(王規) |
모친 | 미상 |
배우자 | 혜종(惠宗) |
자녀 | 미상 |
종교 | 불교(佛敎) |
묘소 | 미상 |
후광주원부인 왕씨(後廣州院夫人 王氏, 생몰년 미상)는 고려의 제2대 왕 혜종의 제2비이다.
생애
[편집]경기도 광주 출신으로, 대광 왕규의 딸이다[1]. 태조의 제15비 광주원부인과 제16비인 소광주원부인은 그녀와 자매간이다. 왕규는 후진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2], 태조가 사망할 때 그의 유명을 받들고 내외에 선포하는 중요한 일을 맡기도 한 인물이었다[3]. 태조는 혜종을 태자로 책봉하면서 이러한 왕규의 능력이 외가의 출신이 미약한 혜종에게 큰 보탬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왕규의 딸을 그의 부인으로 맺어주었고, 실제로 왕규는 태조가 사망할 때 혜종을 잘 보필하라는 유명을 받들었다[4].
그러나 왕규는 자신의 외손자이자 소광주원부인 소생인 광주원군을 보위에 올리기 위해 혜종을 암살하려고 했다가 실패하여, 945년(정종 즉위년) 음력 9월 처형당하였다[5]. 단 왕규의 역모에 대해서는 그 해석이 엇갈리기도 한다[3].
후광주원부인의 생애는 《고려사》에 자세히 전하는 것이 없다[1]. 현대 일부 학자들은 반역자의 딸들도 폐출되거나 함께 살해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후광주원부인과 그 자매들 역시 이와 같은 운명을 맞이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4]. 호는 후광주원부인(後廣州院夫人)이며, 능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혜종과의 사이에서 소생은 없었다.
가계
[편집]- 아버지 : 왕규 (王規, ? ~945)
- 시아버지, 형부 : 태조(太祖, 877~943 재위:918~943)
- 시어머니 : 장화왕후(莊和王后) 오다련(吳多憐)의 딸
- 남편 : 혜종 (惠宗, 912~945 재위:943~945)
출처
[편집]- ↑ 가 나 《고려사》권88〈열전〉권1
- ↑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광주원부인〉항목”. 2014년 8월 1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6월 8일에 확인함.
- ↑ 가 나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왕규〉항목”. 2014년 8월 1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6월 8일에 확인함.
- ↑ 가 나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후광주원부인〉항목”. 2015년 12월 2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6월 8일에 확인함.
- ↑ 《고려사》권2〈세가〉권2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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