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옹주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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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옹주
옹주
재위 1388년 음력 2월 ~ 음력 6월
이름
소매향 (小梅香)
신상정보
출생일 미상
출생지 고려
사망일 미상
국적 고려
왕조 고려
부친 미상
모친 미상
배우자 우왕
자녀 없음
묘소 미상

화순옹주(和順翁主, 생몰년 미상)는 고려의 제32대 우왕후궁으로, 이름은 소매향(小梅香)이다.

생애[편집]

출신[편집]

고려 말 우왕의 총애를 받은 구비삼옹주 중 한 명이다.[1] 본래 기생 출신으로, 그 이름은 소매향(小梅香)이다. 충렬왕의 총애를 받던 기생 적선래[2] 가 맡았던 교방에서 있던 기생으로, 역시 우왕의 후궁이 된 연쌍비(훗날의 명순옹주)과 같은 교방 출신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3]

후궁 시절[편집]

1388년(우왕 14년) 음력 2월 현비 안씨, 또 다른 기생 출신인 연쌍비(명순옹주)과 함께 책봉되어 그 작위를 화순옹주(和順翁主)라고 하였다. 이날 우왕은 동강에 가서 봉천선이라는 배에 올라타고, 음악을 연주하고 그 곳에서 머물렀다.[4] 우왕은 소매향을 옹주로 책봉한 그 달에 지밀직 김영진의 재산을 몰수하였는데, 이 재산은 모두 소매향의 차지가 되었다.[5]

한편 우왕은 현비와 명순옹주, 화순옹주를 책봉한 지 한 달 만에 영비 최씨, 정비 신씨, 선비 왕씨 등을 왕비로 또 책봉하였다. 당시 우왕의 왕비들에게 들어가는 물자로 인해 나라의 창고에 재물이 고갈되고, 이것도 모자라 공물을 3년분을 미리 징수하였는데도 부족하여 불법으로 세금을 더 거두는 바람에 그 폐단이 매우 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6]

우왕 폐위 후[편집]

이러한 우왕의 후비들의 화려한 생활은 1388년(우왕 14년) 음력 6월 우왕이 폐위되면서 모두 막을 내려야 했다. 소매향이 후궁으로 책봉된 지 불과 4개월 만에 이성계 일파에 의해 우왕이 폐위되고 근비 이씨 소생의 창왕이 옹립되었다. 이때 우왕의 정비인 근비 이씨만이 창왕의 모후로서 왕대비로 궁에 남게 되고, 소매향을 포함한 우왕의 후비들은 모두 사가로 쫓겨나고, 그 아버지들은 모두 유배를 가게 되었다. 또 그녀들에 대한 국가의 물자 지급도 모두 중단되었다.[7]

이후 그녀의 행적뿐 아니라 그녀의 생몰년이나 묘소에 대한 기록조차도 남아있는 것이 없어 알 수 없다. 우왕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다.

가족 관계[편집]

  • 남편 : 제32대 우왕(禑王, 1365~1389, 재위:1374~1388)

출처[편집]

  1. 네이버 백과사전 〈구비삼옹주〉항목[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2. 《동국통감》권40 고려기 1296년 가을 7월
  3. 최범서 (2005년 3월 25일). 《야사로 보는 고려의 역사 2》. 가람기획. 310쪽. ISBN 89-8435-215-2. 
  4. 《고려사》권137〈열전〉권50 - 우왕 14년 2월 - 안숙로의 딸을 현비로 책봉하고 소매향과 연쌍비를 옹주로 삼다
  5. 《고려사》권137〈열전〉권50 - 우왕 14년 2월 - 몰수한 김영진의 재산을 기생 소매향에게 주다
  6. 《동국통감》권53 고려기 1388년
  7. 《고려사》권137〈열전〉권50 - 창왕 즉위년 6월 - 왕의 어머니 근비를 왕대비로 높여 책봉하고 전 왕의 왕비와 옹주를 모두 쫓아내다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