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슬라비아 해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유고슬라비아 연방 해체란 유고슬라비아가 8개 나라로 쪼개져 분열된 사건을 말한다.

유고슬라비아는 1945년 나치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후, 티토에 의해 35년간 안정적으로 통치되었다. 그러나 1980년 5월 그가 사망한 뒤, 유고슬라비아는 집단지도체제로 바뀌어 각 공화국에서 차례로 대통령을 뽑게 되었고, 1989년 공산 정권들의 도미노 붕괴를 계기로 본격적인 분리 독립 운동의 막이 오른다.

유고 내란[편집]

1991년 6월 25일,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하자, 세르비아 주도의 유고연방은 독립 무효를 선언, 6월 28일 슬로베니아에 연방군을 진격시킴으로써 유고내란이 발발하였다. 처음 3개월간은 유럽 강대국들의 개입으로 휴전하였으나, 8월에 연방군의 크로아티아 진격으로 전투는 재개되었고, 내란은 유고 전역으로 확대되기에 이른다.

1992년 1월, 크로아티아군은 전열을 정비하며 반격을 시작하였고, 크로아티아에 거주하던 세르비아인들이 세르비아로 탈출하던 가운데 남아 있던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군에게 혹독한 보복을 당해 인권침해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1992년 3월에는 보스니아까지 내란이 확대되었다. 애초에 보스니아 정부는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이미 독립파(보스니아인)와 연방 잔류파(세르비아인)로 갈려 분쟁이 시작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결국 보스니아는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연방군은 즉각 보스니아를 공격하면서 보스니아내란을 일으킨다.

한편, 계속된 내란으로 유고연방의 붕괴를 피할 수 없게 되자, 1992년 4월에 세르비아는 몬테네그로와 함께 신유고연방을 선언한다.

내란 말기에는 결국 나토가 개입하여 세르비아 폭격, 경제 제재 등을 동원하였고, 1995년 12월 14일 데이턴 합의서의 체결로 3년 반에 걸친 민족내란은 그 막을 내린다.

코소보 사태[편집]

코소보는 1971년에 구 유고연방의 자치주가 되었으나, 1989년에는 공산권 붕괴로 알바니아인들의 독립요구가 커지고 있었다. 이에 대해 세르비아 정부는 자치권을 빼앗고, 이에 알바니아인들은 1995년 코소보해방군을 조직, 세르비아 경찰에 대한 무장저항을 시작한다.

이윽고 1998년 2월, 코소보를 순찰하던 세르비아 경찰 4명이 알바니아 민병대에 살해되면서 급기야 전쟁으로 치달았으며, 이어진 세르비아 경찰의 보복 및 진압, 이에 대한 알바니아 민병대의 저항과 보복이 거듭되었다.

1999년 초, 코소보는 전면적인 전쟁상태에 빠졌으며, 평화를 위해 개입한 서방 6나라(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러시아)가 평화안 (1.휴전 후 3년 뒤에 독립 논의/2.코소보에 나토 평화유지군 주둔)을 내놓는다. 그러나 알바니아계는 독립시기 문제로, 세르비아는 주권문제로 거부한다.

이에 미국은 1999년 3월 24일 나토군에게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와 코소보의 세르비아군 기지에 대대적인 공습을 지시, 결국 6월 9일 세르비아의 평화안 수용으로 79일간의 전쟁이 정리되었다.

1990년대 이후[편집]

이후 구 유고연방은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로 쪼개졌고,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는 2006년 6월 각각 세르비아몬테네그로로 분리되었으며, 2008년에는 코소보가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코소보는 거의 대부분의 국가가 인정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더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