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부주
정신부주
貞信府主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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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태자비 | |
재위 | 1260년 8월 2일 ~ 1274년 6월 18일 |
전임 | 태자비 유씨 |
이름 | |
이칭 | 정화궁주(貞和宮主) · 정화원비(貞和院妃) |
신상정보 | |
출생일 | 미상 |
사망일 | 1319년 4월 14일(음력) |
부친 | 시안공 왕인 |
모친 | 미상 |
배우자 | 충렬왕 |
자녀 | 1남 2녀
강양공 · 정녕원비 · 명순원비 |
정신부주 왕씨(貞信府主 王氏, ? ~ 1319년 5월 4일(음력 4월 14일)[1]) 또는 정화궁주(貞和宮主), 정화원비[2](貞和院妃)는 고려의 제25대 왕 충렬왕의 왕비이다.
생애
[편집]가계
[편집]신종의 손자[3]인 시안공 왕인의 딸로, 본관은 개성이다. 남편 충렬왕은 정신부주에게 친계로 9촌 조카뻘이 된다[4].
왕비 책봉
[편집]충렬왕이 태자로 있던 1260년(원종 원년) 음력 11월 28일 태자비가 되었고[5], 1274년(충렬왕 즉위년) 음력 6월 충렬왕 즉위 후 정화궁주(貞和宮主)에 봉해졌다. 정화궁주는 충렬왕과 가장 먼저 혼인한 왕비였으나, 1274년(원종 15년) 음력 5월 원나라 세조의 딸인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하면서[6] 제2비로 밀려났고, 약 40여 년간[2]을 별궁에서 거처해야 했다.
왕비 시절
[편집]1275년(충렬왕 원년) 음력 12월, 제국대장공주가 아들(충선왕)을 낳은 것을 축하하는 연회가 벌어졌다. 이 연회에서 충렬왕은 명령을 내려 제국대장공주와 정화궁주의 자리가 같은 위치에 놓이게 했는데, 제국대장공주는 이를 자신과 정화궁주를 동격으로 취급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크게 분노하여 기어이 정화궁주의 자리를 옮기게 만들었다. 잠시 후 정화궁주가 무릎을 꿇고 제국대장공주에게 술잔을 올리자 충렬왕이 돌아보면서 눈짓을 하였는데, 제국대장공주는 이를 두고 "어째서 나를 흘겨보십니까? 정화궁주가 나에게 꿇어 앉아 그러는 것입니까?"라며 쏘아붙이기도 하였다. 결국 연회는 곧바로 끝나고 말았다[7].
1276년(충렬왕 2년) 음력 12월에는 어떤 이가 당시 고려에 다루가치[8]으로 와 있던 석말천구의 관사에 익명서를 투입하는 일이 있었다. 익명서를 투입한 자는 익명서를 투입한 후 곧 "옷이 있거든 입고 밥이 있거든 먹어 다른 이의 소득이 되게 하지 말라."고 외쳤다. 다음날 석말천구가 이 사실을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에게 고하였는데, 그 익명서에는 "정화궁주가 왕의 총애를 잃자 여자 무당을 시켜 공주(제국대장공주)를 저주하게 하고 있다. 또 제안공을 비롯한 43명이 불궤한 짓을 도모하여 다시 강화도로 들어가려고 한다." 라고 적혀 있었다. 이에 분개한 제국대장공주는 정화궁주를 나장에 가두고 그녀의 부고[9]를 봉쇄하였는데, 정화궁주는 유경의 도움으로 겨우 석방될 수 있었다.
1284년(충렬왕 10년) 음력 7월에는 정화궁주가 일반 백성을 잘못 알고 종으로 삼아 이 백성이 소송을 제기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를 압량사건(壓良事件)이라고 한다. 당시 충렬왕의 명으로 정화궁주에게 유리하게 판결이 났다. 그런데 이 사건을 판결한 전법판서 김서가 판결 다음날 등창으로 갑자기 사망하고, 사건의 부당함을 간했던 이행검만이 홀로 목숨을 건지는 일이 있었다.[10][11].
이후 1297년(충렬왕 23년) 제국대장공주가 죽고, 이듬해인 1298년(충렬왕 24년) 충렬왕이 충선왕에게 선위한 후에 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때 작호도 정신부주(貞信府主)로 고쳤다[12]. 이후 충렬왕과 정화궁주는 거처를 상수궁으로 옮겨 함께 지냈으며[13], 충선왕은 충렬왕과 정화궁주를 봉영(奉迎)하는 의식을 올리기도 하였다[14].
사망
[편집]1319년(충숙왕 6년) 음력 4월 14일 사망하였으며[1], 그 해 음력 11월에 장사지냈다[15]. 시호는 정화궁주(貞和宮主), 또는 정신부주(貞信府主)이며, 능호와 그 위치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후손
[편집]충렬왕과의 사이에서 1남 2녀를 낳았다. 그녀의 소생인 강양공 왕자는 원래 충렬왕의 장남이나, 제국대장공주 소생인 충선왕에게 밀려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 그러나 강양공의 차남 왕고는 충선왕의 총애를 받아 나중에 심양왕의 자리에 오를 뿐 아니라[16], 이를 기반으로 하여 충선왕의 아들인 충숙왕의 왕위를 넘보거나 원나라에 충숙왕을 무고하여 곤란하게 하기도 하였다[17]. 또 그녀와 남매간인 서원후 왕영의 딸은 충선왕의 제4비 정비 왕씨이다[18].
기타
[편집]-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에 있는 사찰 전등사는 정화궁주가 이 절에 옥등을 전했다 한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19]. 전등사는 정화궁주의 원찰이기도 하였으며[20], 고려의 문학자 이색이 전등사 대조루에서 지은 시에는 그녀의 이름이 등장하기도 한다[21].
가족 관계
[편집]- 조부 : 양양공 왕서(襄陽公 王恕, 생몰년 미상) - 신종의 아들
정신부주가 등장하는 작품
[편집]각주
[편집]- ↑ 가 나 《고려사》 권34 〈세가〉 권34 - 충숙왕 6년 4월 기해(己亥) 기사 - 정신부주 왕씨가 죽다
- ↑ 가 나 《동국통감》 권 42 고려기 1319년
- ↑ 가 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강양공〉항목
- ↑ 정신부주 ← 시안공 ← 양양공 ← 신종 ← 인종 → 명종 → 강종 → 고종 → 원종 → 충렬왕
- ↑ 《고려사》권25〈세가〉권25 - 원종 원년 11월 - 왕인의 딸을 태자비로 삼다
- ↑ 《동국통감》 권 36 고려기 1274년
- ↑ 《동국통감》 권 37 고려기 1275년
- ↑ 원나라에서 총독이나 지사 등을 일컫는 단어로, 고려에도 내정간섭을 위해 1231년(고종 18년)부터 파견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백과사전[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참고
- ↑ 물건을 보관하던 창고를 말하며, 곳집 또는 곳간과 같은 말이다. 네이버 어학사전 참고
- ↑ 네이버 백과사전 - 〈김서〉항목[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동국통감》 권 38 고려기 1284년
- ↑ 네이버 백과사전 - 〈정화궁주〉항목[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박영규 (2000년 3월 25일).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415쪽. ISBN 89-7527-154-4.
- ↑ 《고려사》권89〈열전〉권2 - 정신부주 왕씨
- ↑ 《고려사》권35〈세가〉권35 - 충숙왕 7년 11월 - 정신부주를 장사지내다
- ↑ 《고려사》권91〈열전〉권4 - 강양공
- ↑ 박영규 (2000년 3월 25일).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416쪽. ISBN 89-7527-154-4.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왕영〉항목
- ↑ 조병용 (2012년 2월 23일). “전등사, 유구한 역사 생으로 번지다”. 기호일보. 2012년 5월 31일에 확인함.
- ↑ 김정봉 (2005년 3월 23일). “1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전등사”. 오마이뉴스. 2012년 6월 1일에 확인함.
- ↑ 네이버 책 -〈전등사〉
- ↑ 《고려사》권28〈세가〉권28 - 충렬왕 원년 2월 - 시안공 왕인이 죽다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왕고〉항목
- ↑ 《고려사》권35〈세가〉권35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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