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불 정책
| 한국의 불교 |
|---|
억불 정책(抑佛政策) 또는 배불 정책(排佛政策) 또는 숭유억불 정책(崇儒抑佛政策)은 조선 왕조(1392-1897)가 500년 내내 불교를 탄압한 정책이다.
고려 말 및 조선 초에 정도전이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저술하여 억불론을 주장했고 조선 건국 초기에는 무학대사가 조선의 수도를 정하는 데 공헌하는 등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숭불정책이 유지되었지만 태종이 정권을 잡으면서 억불정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였다.
조선 건국 세력이 태종에게 주청하여 대대적인 불교 탄압을 전개하였다. 고려의 기반이 되었던 불교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이단으로 지목되어 이단성 비판이 억불정책 시행 근거가 되었다.[1] 고려시대 초기부터 불교 세력이 강대하고 고려의 문무(文武) 귀족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승려들에 의한 수 차례 많은 불교에 대한 개혁이 일어났었다. 고려말에는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와 역성 혁명에 방해가 되는 고려인 문무(文武)벌 귀족 세력들과 결탁하여 고려의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조선 왕조를 위협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서 비롯된[2][3][4][5][6][7]정책이었다.
정책의 폐악
[편집]조선의 유교화가 진행되면서 종교 의례인 이부승구족계를 온전하게 시행하는 것은 정치적, 사상적, 재정적으로 어려워졌을 것이다.[8] 반불교적 정서가 널리 퍼지고, 사원 경제가 피폐했던 시대에 복잡한 수계과정을 모두 시행하는 것은 상당히 무리였으리라 짐작된다.[8]
조선 후기에는 승려의 질이 전반적으로 저하되었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8]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은 19세기 말 조선에 관하여 여행가 이사벨라 버드에게 “승려들은 매우 무식하고 미신적이어서, 불교의 역사나 교의와 불교의식의 취지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로 대부분 승려들이 그저 ‘몇 마디 음절들’만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으로 보였다라고 설명하였다.[9]
고려 왕조에서 사찰 및 승려에게 주어진 혜택이 모두 철폐되었고, 사찰도 정리되었으며 남은 사찰은 모두 산으로 쫓겨들어갔다. 그러나 왕실은 개인적으로 불교를 계속 믿었고[10], 일반 민중들도 불교를 계속 믿었다.[3][4][11] 《경국대전》에는 유생(儒生) 또는 부녀자들이 절에 가면 곤장 100대라는 조항이 존재하였다.[12]
억불 정책은 유교를 숭상하는 숭유정책과 더불어 숭유억불 정책으로 진행되어 조선 사회에서 학문의 다원적인 발전을 저해하고 다른 학문을 인정하지 않는 독단, 독선의 그릇된 예를 남겼다. 새로운 시대로의 개혁에 둔감하게 만들었으며 국력을 약화시키는 문제를 낳았다.
붓다의 존재를 탄생시키는 불모(佛母)로 지혜를 상징화한 탄트라에서 모존(母尊)은 불교적 속성이 있다.[13] 삼국 시대에 설총이라는 위대한 인물로 역사의 자취를 남긴 원효스님의 모습으로 고려 시대에 편찬된 《삼국유사》에는 설화로 밀교의 전승이 있었으나,
역사적으로 한국 불교의 전통에는 인도 후기 밀교가 전승되지 않았다.[13]
전개 과정
[편집]조선 태조 시기
[편집]1392년 태조 1년에 팔관회는 조선 건국과 더불어 곧바로 폐지된다.[14]
조선 태조는 도읍을 결정하고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경복궁을 창건하였는데, 당시 궁의 규모는 390여 칸으로 크지 않았다.[15] 조선 태조 3년에 종묘 개기(開基)에, 조선 태조 4년 경복궁 건설에 정부와 승려들 수만명을 부역인으로 동원하였다.[16] 부역 인원이 아예 기록되지 않은 공역도 있고, 일부만 기록된 사례도 있다.[16] 일반 백성, 승려, 군사, 품종 등의 노동 대부분은 사람의 몸을 쓰는 막노동이었다.[16]
1395년 태조 4년에 대사헌 박경(朴經)은 상소에서 "백성 가운데 승려가 3/10이고, 그 중 부역할 수 있는 자가 2/3는 될 것"이라는 추정치를 제시하였다.[16] 그는 승려를 상등, 중등, 하등으로 나누고, 그 중 하등으로 분류된 이들을 국가의 공역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16] 또한 서울 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영선하는 일이 있거나 별요에서 기와를 구울 때는 '청중(請衆)', '청승(請僧)'이라 하여 승려들을 징용하여 역사시켰다.[16] 승려는 국가의 척불정책 하에 점차 '游手(유수)'로 인식되어 가는 상황 속에서 국가가 가장 쉽게 동원할 수 있는 노동력이었다.[16]
태조 15년에 상원일의 춘(春)연등회는 혁파되었으며 사월초파일의 4․8 연등회는 근대시기까지 이어졌다.[14]
조선 태종 시기
[편집]조선 태종은 경복궁 건설에서는 궁궐 터를 닦는 데에는 승려를 동원했고, 건축에는 정부-승려-정부를 교대로 사역시켰다.[16] 태종대 도감 구성원에 대한 기록은 태조대에 비해서는 구체적인 편이다.[16]
조선 태종 1년(1401) 지합주사(知陜州事) 윤목(尹穆)이 지역내 몽계사(夢溪寺) 승려가 백종법석(百種法席)을 화려하게 베풀자 이를 철거하고 사찰의 곡식 300여 석을 탈취해 잡공(雜貢)을 보충하고 나머지는 향교(鄕校)에 지급하였다.[17]
태종 2년(1402)에 왕은 서운관(書雲觀)의 상언(上言)에 좇아 경외(京外)의 70사(寺)를 제외한 모든 사원의 토전(土田) · 조세(租稅)를 군자(軍資)에 영속케 하고 노비를 제사(諸司)에 분속(分屬)시켰다.[18]
태종 5년 11월에는 의정부(議政府) 개성(開城)과 신경(新京: 서울)에 각종(各宗)의 사원 1사(寺)씩, 목(牧)과 부(府)에는 선종사찰 하나와 교종 사찰 하나, 각(各)군현(郡縣)에는 선종 · 교종 가운데서 1사(寺)씩만 두고 다른 사원은 모두 없애게 하였으며, 노비의 수도 대폭 줄이고 토지는 국가에서 몰수하였다.[18] 그러나 연경사(衍慶寺) · 화장사(華藏寺)석왕사(釋王寺) · 낙산사(洛山寺) · 성등사(聖燈寺) · 진관사(津寬寺){}견암사(見岩寺) · 관음굴(觀音窟){회암사]](檜巖寺) · 반야사(般若寺) · 만의사(萬義寺) · 감로사(甘露寺) 등만은 노비(奴婢)와 토지를 감(減)하지 않았다.[18]
이듬해 태종 6년 3월에는 의정부(議政府)의 계청(啓請)에 좇아 전국에 남겨둘 사찰의 수를 정하였다.[18] 즉, 조계종(曹溪宗)과 총지종(摠持宗)을 합해서 70사, 천태소자종(天台疏字宗)과 법사종(法事宗)을 합해서 43사, 화엄종(華嚴宗)과 [](慈恩宗) 中道宗)과 신인종(神印宗)을 합해서 30사, 남산종(南山宗) 10사, 시흥종(始興宗) 10사를 정하였으며 이밖의 사원은 모두 폐지하도록 한 것이다.[18]
그리고 신 · 구 양경(兩京)교종의 각 1사(寺)에 200결(結)의 속전(屬田)과 100명의 노비로써 100명의 승려를 상양(常養)하게 하고 그외 경내(京內) 각사는 속전 100결에 노비 50인으로 50명의 승려를 상양케 했으며, 각도 수관지(首官地)에는 선 · 교 중에서 1사에 100결의 속전과 50명의 노비로써 50명의 승려를, 각 관읍내(官邑內)의 자복사(資福寺)에는 급전(給田) 20결에 노비 10명으로써 승사에는 급전 60결에 노비 30명으로써 승려 20명을 상양케 하도록 하였다.[18]
이와 같은 가혹한 정부의 처사에 석성민(釋省敏) 등이 수백 명의 승려를 이끌고 신문고(申聞鼓)를 쳐서 복구를 호소하였으나 관철되지 못하였다.[18]
조선 세종 시기
[편집]세종(世宗: 재위 1418-1450)은 즉위 직후부터 심하게 불교를 훼손하였다.[19] 세종 1년에 개성유후사 폐사(廢寺)의 재목과 기와를 걷어 오부학당 동·서재를 확장하였다.[16]
1419년인 세종 2년에 정종의 국장 때부터는 불재도감(佛齋都監)이 폐지되고 순전한 유교 의식으로 장례 행사를 행하게 되었다.[20]
세종 역시 억불정책(抑佛政策)을 강행하려 하였으나, 세종 원년과 3년에 승려들이 명나라에 가서 명제(明帝) 성조(成祖: 재위 1402-1424)에 호소한 사실에 의해서 세종의 배불은 완화되었다.[18] 그러나 세종 6년에 종단을 폐합하여 선(禪) · 교(敎) 양종(兩宗)으로 하고 태종에 의하여 전국 242개 사찰로 축소되었던 것을 다시 36개사로 줄였으며, 성외(城外) 승려에게 성내(城內) 출입을 금하였다.[18] 전국의 사찰은 토지 7,950결, 승려 3,770명으로 한정되었다.[19] 또한, 양종 사찰을 제외한 도성 내의 절이 철폐되었다.[21] 세종 6년에 종단을 폐합시키며 승록사(僧錄司)가 없어졌는데, 승록사는 승과(僧科) 및 승정(僧政)의 운영과 관련이 있는 중앙관청으로,[22] 전국적으로 불교를 보호하고 관리해 왔었다.[19]
1425년 세종 7년에는 흥천사 종을 옮겨 남문에 걸어, 흥천사의 종을 세속의 장소로 이동시켜 인정(人定)과 파루(罷漏)를 알리는 세속의 용도로 활용하고자 한다.[17] 세종 7년 되는 해부터 본격적으로 세종은 경복궁에 머물면서 전각의 수리와 건축을 이어나갔다.[23] 경복궁이 법궁(法宮: 정궁(正宮))답게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세종(世宗) 즉위 이후였다.[23] 세종은 '유교적 예치 공간'으로 궁궐을 인식하고 국가의 의례체제 정비와 병행하여 건축 공사를 진행하였다.[23]
1429년 세종 11년에 승인의복흑색금지령(僧人衣服黑色禁止令)에 의해 흑색, 회색 사용이 금지된다.[24]
1433년 세종 15년에 창덕궁 문소전을 경복궁으로 옮기면서 문소전 동쪽에는 태조를 위한 원찰(願刹)이 있었는데 7명의 승려가 거주하던 원찰은 철거되었다.[25]
세종 19년에 세종은 예조에 무도첩 승려를 단속하여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하도록 명령한다.[26] 부모 친척을 보기 위해서나 시장에 매매하는 일로 도성에 입성하는 승려만 도첩을 상고(詳考)하여 출입을 허락하게 한다.[26] 세종대 승려의 도성출입금령은 무도첩승려의 단속과 관련 된 조치로 볼 수 있다.[26]
세종 22년에 지방 군사도로의 확장 및 원관(院館)의 건립공사 등에도 승려들을 동원하였다.[27] 경복궁 교태전(景福宮 交泰殿)이 경복궁 창건 당시인 1395년 태조 4년에는 없었는데, 1443년 세종 25년에 증축되었다는 기록이 있다.[28] 경복궁에 교태전이 처음으로 지어진 것은 창건 후 50년 가량 지난 세종 22년 1440년의 일이었다.[29]: 32
세종 28년에 산릉(山陵)의 역사에 도첩이 없는 승려들을 모아 일을 시켜 도첩과 직위를 주기도 하였다.[27]
1448년 세종 30년에 조정에서는 부역 승려의 요청으로 별요 혁파가 논의되기도 했지만, 별요를 없애면 사요(私窯)의 기와 가격이 비싸져서 백성들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고 하여 혁파가 무산되었다.[16] 경성(京城) 민가의 태반이 기와집이 된 것은 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언급을 보면, 별요가 도성 내 민가에 기와를 보다 싸게 공급하는 기능을 꽤 충실하게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16] 숭례문을 세종 30년에 고쳐 짓는데,[30] 이때의 공사는 중건이라기보다 새로 만든 것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측한다.[31] 숭례문은 2년 만에 지었는데, 지어진 지 50년만인 1447년 세종 29년에 2년간의 공사를 통해 대규모 개축을 하게 되는데,[32] 1447년에 추위로 숭례문의 공사를 정지한다.[33] 별요는 1454년 단종 2년에 이르러 혁파되었다.[16]
1449년 세종 31년에는 진관사(津寬寺)의 수륙사(水陸社)를 중수하기 위해 화주승(化主僧)들이 나섰다.[34] 그러자 사헌부에서는 이들이 종친의 증명서를 받아 시주(施主)를 강권(强勸)하는 등의 민폐를 일으킨다며 이를 금지할 것과, 아울러 수륙사의 중수를 풍년 뒤로 미룰 것을 청하였다.[34] 1449년에는 명나라 영종 황제가 몽골족의 에센과 싸우던 도중에 포로로 사로잡히기도 했으며, 에센에 의해 북경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도 했다.[35]
다음 문종(文宗: 재위 1450-1452)도 역시 승려의 왕성(王城) 출입을 금하고 민간인의 출가(出家)를 막았다.[18]
조선 성종 시기
[편집]성종(成宗: 재위 1469-1494)은 일반이 상(喪)을 당했을 때 불승(佛僧)에게 공재(供齋)하는 풍습을 엄금하고 국왕의 탄신일에 신하가 사원에 가서 설재(設齋)하는 일을 금하도록 하였다.[18] 이와 같은 도승법(道僧法)의 폐지와 승려의 환속으로 승려의 수가 줄어들었고,[18] 사찰을 창건하거나 출가를 일절 허용하지 않았다.[19]
성종 14년 1483년 3월에서 15년 9월 사이에 있었던 창경궁(昌慶宮) 건립공사에 4,000여 명의 부역승을 동원하고 그들에게 도첩을 주었는데, 14년에 3,000명의 승려가 동원되었고, 15년에는 1,000여 명의 승려가 부역하였다.[27] 이 때 조신들로부터 많은 반대와 항의를 받았으나, 성종은 백성들의 농사일에 지장을 주지 않고 국가에 이익이 된다는 구실로 그 밖의 공사에도 승려들을 동원하였다.[27]
연산군(燕山君: 재위 1494-1506)은 선종의 본사(本寺)인 흥천사(興天寺)와 교종의 본사인 흥덕사(興德寺) · 대원각사(大圓覺寺)를 폐하고 공해로 삼았다. 삼각산 각 사찰의 승려를 쫓아내어 빈 절로 만들고, 성내(城內)의 니사(尼寺)를 헐고 니승(尼僧)은 궁방(宮房)의 비(婢)로 삼았다.[18] 또 승려를 환속시켜 관노(官奴)로 삼거나 취처(娶妻)하게 하였으며, 사사(寺社)의 토지를 모두 관부(官府)에 몰수하였다. 이때 승과(僧科)도 중지되고 양종(兩宗) 본사(本寺)도 없애버렸다.[18]
조선 중종 시기
[편집]중종(中宗: 재위 1506-1544)은 승과를 완전히 폐지시키고 경주(慶州)의 동불상(銅佛像)을 부수어 군기(軍器)를 만드는 한편 원각사 (圓覺寺)를 헐어 그 목재를 연산군 때 헐린 민가(民家)의 재축(再築) 자재로 나누어 주었다.[18] 이리하여 불교는 겨우 그 명맥만을 유지해 오게 되었다.[18]
1515년 중종 10년에는 유생들의 강력한 요구로 수륙재가 금지된다.[36]
1516년 중종 11년에 《경국대전》의 도승조가 사문화됨으로써 도첩제는 폐지된다.[37] 1497년 연산군 3년에 도첩 발급이 다시 재개된 상태였다.[37]
1535년 중종 30년에 계획을 세운 안행량(安行梁)(충남 태안반도 서쪽) 운하(運河)공사의 시행공역(試行工役)으로 한강 상류의 견항(犬項) 방쇄(防塞)공사를 시작하여 동왕 31년 7월 준공하였는데, 거기에 동원된 3,000여 명의 부역승들에게 호패(號牌, 戶牌)를 주었다.[27] 호패는 국민의 신분증이었으므로 승려에게는 도첩을 주어야 하는데 당시는 이미 《경국대전》에 도승조가 삭제되어 승려이면서도 도첩을 지닐 수 없었으므로, 신분상 국가로부터 보장받을 근거가 없어진 승려들에게 도첩 대신에 노역의 대가로 호패를 주었다.[27]
1553년 명종 8년 이후 승도를 부역에 동원하면서도 도첩을 발급하지 않기 시작하는 도승제 운용의 중요한 변화가 나타났다.[38]: 188 하층의 승도는 백성과 마찬가지로 국역을 담당하게 되었지만, 일반 백성으로서가 아니라 승도로서 국역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38]: 188
1623년 인조 원년에 도성출입이 다시 금지된다.[39]: 40 임진왜란때 휴정(休靜)과 유정(惟政)을 중심으로 한 의승군이 활약을 펼치면서 한동안 탑압이 완화되었으나 이 역시 일시적인 완화책에 불과하였다.[39]: 40
1860년 철종 11년에 흥선대원군이 절의 터가 왕손을 낳게 한다는 풍수설에 따라 가야사를 불사르고 아버지인 남원군의 묘를 썼다.[40]
조선 고종 시기
[편집]1865년 고종 시기를 처음으로 경복궁 공역의 자원군으로 승군이 참여한다.[41] 역사에 동원된 이들을 《영건일기》에서는 자원군(自願軍)으로 기록하였다.[41] 대원군이 임진왜란 당시 불탄 경복궁을 중건하여 왕실의 존엄을 과시하려는데 기술인력이 모자라자 강제적으로 승려중의 장인들에 대한 동원령을 내렸다.[42] 1866년에 병인양요가 발생하여 프랑스 함대는 상륙하여 강화부를 점령하였고, 경기 연강(沿江)주변과 한성부 방민은 크게 동요하였고 한성부의 도성 안 창고가 비어 곡물가가 등귀하고 피난민이 줄을 이어 빈집이 많았다.[41]
1884년 고종 시기에는 승려의 도성 출입 허락이 군국기무처에 의해 각의에 까지 제출되었지만 대원군의 반대로 보류된다.[39]: 45 그리고 1895년 사노이 스님의 승려의 도성 출입 허락 요청 견백서가 김홍집 내각에 제출되고 수백 년간 억불정책의 기저를 이루던 입성금지는 견백서를 올린 후 불과 이틀 뒤에 관보(官報)를 통해 해제가 발표된다.[39]: 45 하지만 도성해금은 불교사상에 입각해 개혁을 추진했던 개화파의 자발적 의지로 단행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39]: 50 사노의 역할로 도성해금이 철폐된 것이 아니라는 또 다른 반증은 1895년 사노의 건백서가 제출되기 전에 이미 해금정책이 입안되었다는 점과 사노의 건백서 이후에도 입성금지와 해금이 반복됐다는 점이다.[39]: 50 1896년에도 금족령이 내려진 바 있고, 1898년에도 금지령이 내려졌다.[39]: 50 승려의 도성출입이 완전히 자유로워진 시점에 대해 이능화는 단발이 보편화되면서 승려와 일반인들의 구별이 모호해진 이후라고 밝히고 있다.[39]: 50
평가
[편집]긍정적 평가
[편집]부정적 평가
[편집]- 조선 사상 연구의 제1인자였던 다카하시 도루 교수는 조선조 중엽 이후 승려가 팔천(八賤)의 하나로 취급되어 도성 출입이 금지되었다고 주장하였고,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까지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 왔다.[43]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구지현 (2014). “對明使行과 對日使行에 보이는 異端 論爭의 樣相”. 《南冥學硏究》 (경상국립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43: 229–256. UCI I410-ECN-0102-2015-100-000203449
- ↑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선바위 (禪岩)”.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8월 5일에 확인함.
- 1 2 레포트월드. “조선시대의 집의 역사”. 2020년 3월 24일에 확인함.
- 1 2 “억불 정책”. 2020년 3월 24일에 확인함.
- ↑ 고동민 (2014년 12월 10일). “조선시대의 숭유억불 정책과 훼불”. 2020년 3월 2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0년 3월 24일에 확인함.
- ↑ https://wordsimilarity.com/ko/%EC%A0%95%EC%B1%85%5B깨진+링크(과거+내용+찾기)%5D
- ↑ “목 잘린 불상들 무슨 사연있을까?”. 2011년 6월 5일. 2020년 3월 24일에 확인함.
- 1 2 3 이향순 (Mar 2010). “감로도에 나타난 조선의 비구니승가”. 《한국문화》 (규장각한국학연구원) 49: 51–72. UCI G704-001253.2010..49.007
- ↑ “2. 19세기 말 금강산의 사찰들”. 법보신문. 2017년 1월 10일.
- ↑ “조선 4대문 안에 유일한 사찰 숭유억불 속에도 선종맥 이어”. 법보신문. 2017년 5월 22일.
- ↑ “5월 26일 박영제 교수님 강의”. 20090527095906. 2018년 12월 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0년 3월 24일에 확인함.
- ↑ “불교 감싼 두 대비의 ‘시위’”. 중앙일보. 2008년 5월 4일.
- 1 2 “밀교와 성에 대한 이해”. 불교평론. 2008년 6월 7일.
- 1 2 이종수 (2012). “조선시대 연등회의 存廢와 불교사적 의미”. 《불교연구》 (한국불교연구원) 37: 113–145. UCI G704-001849.2012..37.002
- ↑ “조선 > 경복궁”. 《우리역사넷》. 한국사 연대기. 국사편찬위원회. 2026년 3월 1일에 확인함.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김윤주 (2018). “조선 태조~태종대 한양 건설 공역의인력 동원과 물자 수급”. 《조선시대사학보》 (조선시대사학회) 86: 7–39. doi:10.21568/CDHA.2018.09.86.7. UCI I410-ECN-0102-2023-900-000592308
- 1 2 이병희 (2011). “조선전기(朝鮮前期) 사찰(寺刹)의 망폐(亡廢)와 유물(遺物)의 소실(消失)”. 《불교학보》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59: 175–205. UCI G704-001567.2011..59.009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종교·철학 > 한국의 종교 > 한국의 불교 > 한국불교의 역사 > 조선시대의 불교 > 배불정책,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 1 2 3 4 박혜란 (2019). 《조선시대의 차문화산업 육성정책 연구》 (학위논문). 조선대학교 대학원. UCI I804:24011-200000267514
- ↑ “국장도감 (國葬都監)”.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년 2월 8일에 확인함.
- ↑ “11권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 제4장 유교 사회의 불교 전통 계승 > 1. 조선시대 불교 정책의 시대적 추이 > 억불 정책과 폐불”. 《우리역사넷》. 한국문화사. 국사편찬위원회. 2026년 3월 3일에 확인함.
- ↑ “승록사 (僧錄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년 1월 23일에 확인함.
- 1 2 3 “조선 > 경복궁”. 《우리역사넷》. 한국사 연대기. 국사편찬위원회. 2026년 3월 1일에 확인함.
- ↑ “불교와 한국문화-의(옷)”. 불교신문. 1997년 4월 22일.
- ↑ “창덕궁 후원 (昌德宮 後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년 3월 2일에 확인함.
- 1 2 3 최경환 (2021). 《세조대 刊經都監 설치와 佛書 간행》 (학위논문). 서울대학교 대학원.
- 1 2 3 4 5 6 “조선 시대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 불교 > 2) 도첩제와 부역승 > (2) 승려의 부역과 그 신분 하락”. 《우리역사넷》. 신편 한국사. 국사편찬위원회. 2026년 3월 2일에 확인함.
- ↑ “경복궁 교태전 (景福宮 交泰殿)”.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년 3월 2일에 확인함.
- ↑ 홍석주 (2003년 6월). “仁慶宮 寢殿의 건축 형태에 관한 硏究”. 《한국실내디자인학회 논문집》 (한국실내디자인학회) 38: 30–37. ISSN 1229-7992. UCI G704-000249.2003.38..023
- ↑ “서울 숭례문”. 《국가유산 디지털 서비스》. 국가유산청. 2026년 3월 2일에 확인함.
- ↑ “조선 > 숭례문”. 《우리역사넷》. 한국사 연대기. 국사편찬위원회. 2026년 3월 2일에 확인함.
- ↑ “숭례문”.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문화·예술. 국가기록원. 2026년 3월 2일에 확인함.
- ↑ “세종 29년 11월 13일 辛丑 1/1 기사 사헌부에서 추위로 숭례문의 역사 정지를 청하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국사편찬위원회. 2026년 3월 2일에 확인함.
- 1 2 “화주승(化主僧)”. 《조선왕조실록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년 3월 3일에 확인함.
- ↑ 박현모 (2012년 6월).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에 나타난 리더십 모멘트 연구”. 《한국정치연구》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21 (2): 223–246. ISSN 1738-7477. UCI G704-001880.2012.21.2.008
- ↑ 최정동 (2007). 《濯纓 金馹孫의 師友와 政治活動》 (학위논문). 《조선대학교 리포지터리》 (조선대학교 중앙도서관).
- 1 2 “도첩제 (度牒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년 3월 5일에 확인함.
- 1 2 손성필 (2018). “조선시대 불교정책의 실제: 승정체제, 사찰, 승도에 대한 정책의 성격과 변천”. 《한국문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83: 171–196. doi:10.22943/han.2018..83.006.
- 1 2 3 4 5 6 7 8 9 서재영 (2006). “승려의 입성금지 해제와 근대불교의 전개”. 《불교학보》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45: 37–65. ISSN 1226-1386. UCI G704-001567.2006.45..002
- ↑ “보덕사극락전”. 《국가유산 디지털 서비스》. 국가유산청. 2026년 3월 5일에 확인함.
- 1 2 3 유승희 (2019). “『景福宮營建日記』에 나타난 ‘自願軍’의 실상과 활동”. 《서울과 역사》 (서울역사편찬원) 103: 117–157. doi:10.22827/seoul.2019..103.003.
- ↑ “근대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2. 대원군의 내정 개혁 > 2) 서원 철폐와 경복궁 중건”. 《우리역사넷》. 신편 한국사. 국사편찬위원회. 2026년 3월 5일에 확인함.
- 1 2 손성필 (2013). “조선시대 승려 賤人身分說의 재검토 -高橋亨의 주장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보조사상》 (보조사상연구원) 40: 51–81. doi:10.22859/bojoss.2013..40.002. UCI G704-001097.2013..40.005 이 논문은 같은 저자의 책 《조선 전기 국가와 사찰》, 씨아이알, 2024년에도 실려 있다.
- ↑ ““조선시대 승려, 천민 신분 아니었다””. 법보신문. 2013년 3월 20일.
- 1 2 신문수 (2009년 6월). “동방의 타자 :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한국문화》 (규장각한국학연구원) 46: 119–138. doi:10.22943/han.2009..46.005. ISSN 1226-835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