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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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皇帝)는 제국(帝國)의 세습군주의 존호이다. 작위 중 가장 높은 지존의 작위이다.

황제의 유래

동양에서 황제의 어원은 ‘삼황오제’에서 비롯된다. 황제라는 명칭은 의 시황제 영정이 처음 사용하였다. 춘추 전국 시대를 거치면서 각국에서 수많은 ‘왕’이 난립하여 왕보다 권위 있는 칭호를 만들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황제'의 칭호가 탄생하게 되었다. 황제의 아들은 왕이나 친왕으로 봉해졌다.

서양은 로마의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이름과 칭호에서 비롯한다. 그의 칭호인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Divi Filius Augustus)’에서 ‘임페라토르(Imperator)’와 ‘카이사르(Caesar)’가 황제를 뜻하는 영어 ‘엠퍼러(emperor)’와 독일어 ‘카이저(Kaiser)’ 및 러시아어 ‘차르(царь)’ 등의 어원이 되었다.

호칭

동아시아에서 황제(皇帝) 및 국왕(國王)의 경칭은 2인칭으로서는 폐하(陛下)이다. 이는 “높이 우러러 볼 사람이기에 뜰에서 층계 위로 우러러 뵌다.”라는 뜻이다. 제후(諸侯)의 경칭은 2인칭으로 전하(殿下)이다. 이는 “계단 아래에서 우르러 뵌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폐하전하는 둘다 중세 한국어에서는 그 뜻(버터ᇰ 아래)이 같았다 (陛下ᄂᆞᆫ 버터ᇰ 아래니 皇帝ᄅᆞᆯ 바ᄅᆞ 몯 ᄉᆞᆯᄫᅡ 버터ᇰ 아래ᄅᆞᆯ ᄉᆞᆲᄂᆞ니라월인석보 2,65》). 다만 그 품격에서 폐하가 전하보다 높았다.

이때 폐(陛)자는 ‘뜰’보다는 ‘뜰층계’라는 뜻으로 풀어야 더욱 옳고, 이는 전(殿)자도 ‘계단’보다도 ‘뜰층계단’이라 풀어야 옳다. 다만 군주가 있는 곳이 다를 뿐이며, 신하는 언제나 전하 또는 폐하의 처음 뜻이 가리키는 ‘뜰’(뜰층계의 아래)에 자리하게 된다.

황제는 1인칭으로 자칭할 때 짐(朕)이라 하는데, 본디 전국시대에는 일반적인 1인칭이었으나 시황제가 황제만이 쓸 수 있는 1인칭으로 바꾸었다.

태상황, 태황태후, 황태후 등은 황제를 폐하라 부르지 않는 대신 황상(皇上)이라 불러 황제의 본명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였다.

동아시아에서의 황제

중국은 하늘을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린다는 의미에서 황제를 '천제(天帝)'의 '아들(子)'인 '천자(天子)'라고도 하였다. '중화사상'에서는 독자적인 연호(年號)를 사용할 수 있는 국가는 오직 황제국뿐이었고, 제후국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할 수 없었다. 따라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그 군주의 호칭에 관계없이 곧 황제의 영향을 받지 않는 국가임을 선언하는 것과 같은 뜻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이때 곧 군주가 1인칭으로 짐(朕)으로 자칭함으로써 “영토”(공간)에 대한 지배권을 천명했고, 연호를 세움으로써 “시간”에 대한 지배권을 나타내면, 그 나라는 완전한 자주 독립국으로 볼 수 있다.

중국

틀:중국의 신분 중국의 황제 칭호의 시초는 진의 시황제로 볼 수 있으나, 어원의 유래와 제호(帝號) 자체는 상나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제정일치 사회였던 상 왕조의 역대 군주들은 군주의 신격화 차원에서 왕보다 한 단계 높은 제(帝)의 칭호와, 태종(太宗)과 같은 묘호를 사용하였다.

시황제가 황제의 칭호와 황제용어를 정립한 이후 중국의 여러 왕조들은 모두 자국의 최고 군주(君主)의 칭호를 황제라 하였다. 이는 중국인(한족)이 세운 왕조뿐만 아니라 중국을 정복한 몽골과 만주의 기마민족들이 세운 나라들(요나라·금나라·원나라·청나라 등)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기존에 (Khan)등의 고유의 칭호를 사용하였지만, 중국을 정복하고 그 땅에 정착하게 되면 여지없이 칭제건원하여 중국식 황제의 칭호를 채용하였다.

당나라고종은 황제 칭호 대신에 ‘천황(天皇)’이라는 칭호를 쓰기도 하였다.[1]

한국

한국에서는 황제국을 지향한 경우는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 중심의 동아시아 문화권과 국제질서가 형성된 시기인 신라 중대, 즉 통일신라 이후로 볼 수있다. 일찍이 천손의식(天孫意識)을 가지고 있었던 고구려는 태왕(太王)이라는 독자적 제호(帝號)를 사용하여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 되는 [제국(帝國)]임을 천명했지만 고구려가 황제국이었던 것은 아니다. 신라 역시 신라 국왕이 근친(近親)에게 갈문왕(葛文王)의 작위를 주고 독자 연호를 사용하여 제국을 지향 했지만 마찬가지로 황제국은 아니었다.

종전에 고구려에 종속되어 있었던 신라는 6C 법흥왕 때에 고구려의 제호(帝號)인 태왕(太王)을 사용하면서 건원(建元) 이라는 독자 연호를 선포하는데 이는 신라가 고구려의 속국에서 벗어나 대등한 위치의 자주독립국이 되고자 했음을 의미한다. 7C 이 후 고구려가 패망하고 당나라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가 확립되자 통일신라는 점차 황제국을 지향하였다. 왕비는 빈번히 황후(皇后)라 칭해졌고 무열왕 김춘추는 태종(太宗)이라는 묘호(廟號)를 받은 것 등이 그 예이다. 하지만 중국에 대한 모화사대사상을 극복하지 못한 신라의 황제국 체제는 다소 소극적이고 미흡했다.

반면 발해를 거쳐 고려에 이르러 황제국[제국(帝國)] 체제는 점차 자리를 잡게 된다. 발해는 황제의 존호(尊號)인 묘호(廟號)와 폐하(陛下)라는 경칭 대신 독창적 제호(帝號)인 가독부(可毒夫)와 기하(基下)를 사용하였는데,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기하(基下)가 중국 황제의 경칭인 폐하(陛下)보다 높은 수준의 칭호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발해의 금석문에서는 황상(皇上), 황후(皇后)등 황제격 호칭이 사용이 확인된 바 있어, 발해가 황제국 제도의 용어 또한 사용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2] 신라 진덕왕 때부터 폐지된 독자 연호를 꾸준히 사용했으며 일본에 보낸 국서에는 천손을 자처하여 발해가 여러 번국(藩國)을 통합한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밝혔다. 특히 허왕부(許王府)의 존재는 발해 가독 역시 제후왕을 봉했음을 알려준다. 중앙 관제인 3성 6부는 당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명칭 등에 있어 실정에 맞게 변용하였다.

고려는 건국 이래 묘호(廟號)를 사용하여 황제국을 표방했는데 이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하여 사분오열된 삼한을 재통합하고(삼한일통의식) 옛조선과 부여,발해와 말갈(여진), 탐라 등을 아우르는(해동천하의식) 천자국(天子國)이라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태조는 천자(天子)를 자처하여 연호를 하늘로부터 부여 받았다는 의미인 천수(天授)라 하고 광종 또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개경을 황제의 수도인 황도(皇都)라 지칭하여 고려가 천하의 중심이 되는 천자국임을 선포했다. 고려의 왕족은 용의 후손으로 여겨 졌으며 임금은 원구단에서 천자의 자격으로 하늘에 제사를 올려 하늘의 유일한 대리자로서 신성시되었다. 문종조에 이르러서는 봉작제를 비롯한 각종 제도와 문물이 완비되었는데 체제와 명칭이 사실상 황제국의 그것과 동일하였다. 제후로 봉작된 왕자 내지 왕실의 종친은 제왕(諸王) 또는 친왕(親王)으로 불리어 제왕부(諸王府)를 설치하게 했으며 각 부에는 관료와 궁전을 소속시켰다. [:: 계림부 => 계림공의 부를 뜻함. 특히 이들이 소유했던 궁전들은 부여궁(扶餘宮), 조선궁(朝鮮宮)등 고대 한국에 존재 했던 여러 나라의 국명과 지명으로 이루어져 고려의 천하관을 반영하고 있다.] 호칭에 있어서는 국왕을 성상폐하(聖上陛下)로, 보위를 이을 적자는 태자전하(太子殿下)로, 제왕(諸王)은 영공전하(令公殿下)로 칭했는데, 성상이란 곧 황제를 높여 이르는 말이다.


한편 고려가 임금의 왕호(王號)를 공식적으로 황제(皇帝)라 칭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당대의 사료들을 검토해보면 고려 임금을 지칭하는 용어로 해동천자(海東天子) / 대왕(大王) / 성황(聖皇) / 황제(皇帝)등이 혼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임금의 사후에 추증하는 시호는 정작 대왕으로 올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고려가 고구려의 정통성뿐 아니라 천하관 또한 계승한 나라였기 때문에 중화의 왕호인 황제(皇帝)를 공식적으로 칭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 근본적 이유였다. 다시 말해 고려는 삼한일통과 해동천하 의식에 따라 독자적인 천하를 운영하였으며 시대의 흐름에 따라 묘호와 제도등을 통해 고려의 국왕이 중화의 황제와 대등한 위상을 지녔음을 표방했던 것이다. 즉 본래 천자를 상징하는 왕(王)의 상위 통치자를 정의하는 제호(帝號)로 황제(皇帝)가 생겨나자 중화와 구별된 해동(고대 한국)에서는 왕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임금을 태왕(太王) 또는 대왕(大王)이라 칭하게 되었던 것이며 고구려의 천손(天孫)사상과 해동천하(海東天下)를 계승한 고려 역시 이를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고려대왕(高麗大王)은 곧 해동의 천자를 의미했으며 해동의 천자는 본래 황제가 아니었기에 해동천자는 있어도 해동황제는 없는 것이다.

굳이 이러한 명분론적 관점을 벗어나서 보더라도 고려가 황제 칭호를 고집하지 않은 까닭을 알 수 있다. 농경사회였던 고려는 거란,여진,몽골등과 달리 생존 문제상 중화로 뻗어나갈 수 밖에 없었던 현실적 문제를 앓지 않았으며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지도 않았다. 중원을 지배하고자 했던 북방민족은 통치의 명분상 황제를 선포함이 마땅했으나 고려에게는 황제 칭호가 별 의미가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괜한 외교마찰을 일으킬 수 있는 민감한 문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황제 칭호에 집착할 필요가 없었던 고려였으나 12c가 지나면서 현실적인 문제가 겹치게 된다. 고구려 이래로 해동천하의 일원이었던 여진족이 부족을 통합하고 금나라를 세워 세력을 팽창해 감에 따라 고려를 중심으로하는 천하관이 와해되어 고려국왕이 해동천자를 자처해 오던 것이 더 이상 온전한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는 곧 영역의 축소라는 단편적 문제를 넘어 국가운영의 근간이 되었던 통치 명분의 상실로 이어졌다. 고려 정부는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여 17만7천/ 약 20만의(30만이라는 설도 있음) 별무반(別武班)을 동원하여 여진을 선제 공격했지만 승부를 보지 못하였고, 그들로부터 사대의 맹약을 받아 들이는 선에서 전선을 유지하여 미봉책에 그치고 말았다. 급기야 금나라가 강성해져 거꾸로 고려에 사대를 요구하자 윤언이(윤관의 아들), 묘청, 정지상 등은 연호를 세우고 임금이 황제를 칭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는 곧 고려가 해동 뿐 아니라 금나라를 비롯 천하 36개 나라와 더불어 중화의 주인이 되어야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고려의 황제국 체제는 시대에 따른 전통의식과, 국제상황 등이 맞물린 중의적이고 유기적인 성격을 띄었다. 이러한 맥락으로 볼때 고려가 중국과의 외교에서 왕을 칭하였던 것 역시 중화를 상국으로 받드는 맹목적 사대가 아니었다. 그 보다는 전통적 관습과 현실의 이해(利害)문제를 국가 위상에 직결시켰던 것이며, 때문에 고려의 체제를 겉으로는 중화를 사대하면서 내부로는 황제를 지향했다는 외왕내제(外王內帝)의 개념으로 제한하기에는 무리가 있어보인다. 당시의 외교관례는 지극히 형식적 관계였을 뿐, 그 실체는 자주국 간의 상호 대등 관계였다. 주변 제국이 하나같이 중원의 패자를 자처하여 충돌하였던 것과 달리 고려가 불간섭 주의(不干涉主義)를 고수하여 독자적인 세력권을 유지함과 동시에 외교적 실익을 취하였고, 고려,요,금,송이 공존할 당시 각국은 팽팽한 세력균형에 의해 고려의 황제국 체제를 묵인할 수 밖에 없었다.


금나라에 의해 번국(藩國)들을 상실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 고려의 제국 체제는 원 간섭기를 기점으로 막을 내리게 되는데[3]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전락한 충렬왕 이후 관제와 황실의 호칭이 모두 제후국 체제의 그것으로 격하되어 조선 시대까지 이어진다. 비록 조선에 와서 조종(祖宗)의 묘호를 회복하고 국왕과 왕비의 사후 대왕(大王)과 후(后)의 존호(尊號)를 올리는 등 부분적으로 황제국의 제도를 상용하기도 하지만 전조(고려)의 제도를 답습한 정도였고, 대국에 대한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유교성리학 이념과 중국을 섬기고 여진 및 일본과는 대등한 입장에서 사귄다는 사대교린(事大交隣)의 대외정책을 내세웠던 조선은 제후국의 체제로 운영되었다. 고려의 해동천하의식은 조선이 중화의 첫번째 계승국이자 문명국임을 자부하는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으로 전환되었는데 이는 곧 고구려 이래로 독자적으로 운영해오던 천하를 버리고 중화 속의 중화로서 주변을 교화하겠다는 의미를 내포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소중화사상은 조선이 문화강국의 자부심을 지녔다는 긍정적 의미를 지니기도 했으나, 시대에 흐름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해 조선조 500년의 발목을 잡는 올가미가 되기도했다. 청(淸)이 발흥할 당시 오랑캐를 중화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일방적 적대 끝에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민족사적 치욕을 남기게 되었고, 영조대에는 조선이 중화의 유일한 계승자이니 황제를 칭해야 한다는 극단적 주장까지 거론되었으며 중기 이후에는 자신의 혈통을 중국에서 찾으려는 족보 제작까지 횡횡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소중화의식은 급속도로 발달하던 서양의 문물을 인정하지 않고 외국과의 교류 역시 중화의 쇠퇴로 보았는데 이는 곧 조선 후기의 쇄국정책(鎖國政策) 으로 이어졌다.

1894년 조선이 청나라의 연호를 폐지하고, 임금을 대군주폐하(大君主陛下) 또는 성상폐하(聖上陛下)로 격상해 부르면서, 세조 때에 일시적으로 신설되었다가 폐지한 원구단을 다시 세워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고종아관파천 이후인 1897년대한제국을 수립하여 황제국을 선포하였고, 연호를 광무로 하여 외형상의 완전한 황제국이 되었지만 다스리는 번국은 물론 온전히 독립된 주권조차 갖지 못했던 반쪽 짜리 황제국에 불과했으며 세계역사의 흐름이 새로운 물결을 따라 요동치던 20c초, "황제"라는 단어는 폐쇄적이고 고립된 구시대적 유물을 상징할 뿐이었다.

1907년 제위에 오른 순종 또한 황제의 칭호를 유지하고 연호를 융희로 하였으나, 1910년 한일 합병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일본 제국이 모두 강탈하자, 황제의 칭호와 연호도 함께 폐지되고 이왕가로 격하되었다.

일본

일본야마토 시대부터 대왕(大王)의 칭호를 사용했고 이후 제 41대 지토 천황이 이 칭호를 당 고종이 사용한 황제의 별호인 천황대제(天皇大帝)에서 따온 천황(天皇)으로 개칭하였으나, 그들의 제호는 메이지 유신 전에는 중화질서의 동아시아에서 인정받지 못하였고, 국제적으로는 실권이 없는 천황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던 쇼군을 중국 황조에서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는 형태의 조공외교였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 왕정복고가 이루어지면서, 일본 전통의 막부가 폐지되고 천황 중심의 근대적 내각제를 바탕으로 강국으로 성장한 일본은, 중화적 질서를 거부하고 자주적인 의미의 제호를 사용할 수 있었다. 천황은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행위를 선도한 군국주의자들에 의해 맹목적 충성의 대상으로 악용되었고, 혹은 천황 그 자신도 전범으로써 책임을 피해갈 수 없는 행적을 보이기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국명이 대일본제국에서 일본국으로 변경되었지만, 현재도 일본인들은 천황을 덴노(天皇)라고 부르며, 영어로는 'Emperor'로 표기하여 국제적으로 통용된다. 에티오피아의 제정 폐지로 인하여, 21세기에 들어 현재까지 존재하는 황제는 일본의 천황이 유일하다.

베트남

베트남은 대외적으로는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아 ‘’의 칭호를 썼다. 그러나 대내적으로는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독자적인 묘호연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베트남이 독립을 상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연방의 일원으로 편입되고 난 19세기 말 이후부터는, 프랑스 등지에서 베트남 내부의 제호를 인정하지 않고 Roi d'Annam (안남 국왕) 등으로 낮추어 부르기도 했다.

유럽에서의 황제

서구에서 황제는 기본적으로 로마 제국의 황제를 일컫는 말이었으며, 아무리 강대한 나라라도 로마 제국의 전통을 물려받지 못한다면 유럽 대륙 안에서는 황제의 칭호를 사용할 수 없었다.

서구 제호(帝號)의 총칭인 카이사르 임페라투스(Caesar Imperatus)는 로마 제국을 건국한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사용한 명칭에서 유래하였으며, 서구의 모든 제반 국가들에게 이 칭호가 자국식으로 변형되어 통용되었다. 로마 제국이 동서로 갈라지게 되자, 그 제위 역시 동서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 중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그 제위(帝位)는 비어 있다가, 프랑크인샤를마뉴가 서기 800년 12월에 로마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황제의 관을 받아 그 정통을 이어나갔고, 이후 오토 대제의 신성 로마제국으로 이어져, 16세기부터 제위를 세습하기 시작한 합스부르크 왕조의 세습 신성로마제국은 19세기초 나폴레옹에게 멸망하기 전까지 지속된다.

동쪽의 또다른 로마 제국의 후예인 비잔티움 제국 역시 황제 칭호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비잔티움 제국은 아우구스투스나 카이사르, 임페라토르 등의 로마식 칭호와 별도로 헤라클리우스황제 때부터 그리스식 칭호인 '바실레우스(Βασιλεύς)'도 사용하였다.

15세기 중반 비잔티움 제국터키에게 멸망당하자, 러시아를 통일한 이반 3세는 동방정교 국가로써 비잔티움 제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았음을 천명하고, 부제(Caesar :: Tsar, 3세기말 로마의 혼란기에 제정의 분위에서, 동방정제/동방부제 등으로 나뉘었던 칭호에서 유래한다) 에 즉위함을 선포하였다. 이는 1721년에 러시아를 반석위에 올려 놓은 표트르 대제 가, 러시아 제국의 출범을 선포하고 자신의 칭호를 부제를 의미하는 짜르에서, 전 러시아의 황제(Imperator)임을 선포하게 됨으로써, 서 로마 제국을 이어받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신성 로마 제국에 대응하는 동로마의 후계자 러시아 제국이 탄생, 유럽의 제위가 다시 2위(二位)로 정립되기에 이른다.

한편,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터키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자신이야말로 로마의 수도를 정복하였으니 로마의 황제라고 주장하여, 술탄국이었던 오스만 터키를 터키 제국으로 격상시키고, 터키 제국 역시 제 3의 로마임을 천명하게 되어 러시아에 맞서기도 하였으나, 유럽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제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1804년 프랑스나폴레옹의 위협을 받은 합스부르크 왕가는 신성 로마 제국과는 별도로 그동안 대공국으로 지속되었던 오스트리아를 격상시켜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선포하였고, 1806년 나폴레옹은 신성 로마 제국을 붕괴시키고 만다. 나폴레옹은 서 로마제국의 정통 후계자인 신성 로마 제국을 무너트린 자신이야말로 서로마의 후계자가 될 자격이 있다고 여겨, 프랑스 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는 유럽의 군주들에게 공분을 샀는데, 로마 황제의 정통성은 커녕 자신의 가문 역시 왕가가 아닌 하급귀족에 불과한 나폴레옹이 제위를 선포하는 것을 오만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페인카스티야 왕국에서도 알폰소 7세가 전 이베리아 반도의 황제임을 선포했다가 이를 오만하게 여긴 그 아들 산초 3세가 이 칭호를 폐지하였던 적이 있으며, 18세기 영국조지 3세는 의회가 제안한 황제 칭호를 거절하였다. 이는 유럽인들의 생각에 로마 제국의 정통을 잇지 못한 채 제위를 참칭하는 것은 불손한 태도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은 비난을 받았으며, 오스트리아 제국이야말로 진정한 서 로마 제국의 정통이라고 여겨졌다.

한편, 독일을 통일한 빌헬름 1세는 1870년 스당에서 프랑스 제국의 나폴레옹 3세를 포위하고 그를 망명시킨 뒤, 프랑스 파리에 진군하여 베르사유 궁전에서 제위에 올라 독일 제국을 선포한다. 이는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 나폴레옹 1세가 빼앗은 황제의 권리가, 다시 1870년 나폴레옹 3세의 패배로 인해 호엔촐레른 왕가에 다시 빼앗긴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유럽의 제위는 오스만 제국을 포함하여 4개의 제위로 굳어졌고, 이 외에 다른 왕가에서는 아무리 부강한 왕가라고 해도 로마제국의 정통이 없는 이상 유럽 내에서는 황제를 칭할 수가 없었다.

페르시아와 터키의 황제

로마 제국과는 별도로 기원전 550년 키루스 대제의 통일부터 제호를 유지해온 최초의 통일 국가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는 전통적으로 파디샤(Padishah) 혹은 샤한샤(Shahanshah)라 하였다. 이는 고대 페르시아어 흐샤야티야 흐샤아티야남, 즉 '왕 중의 왕' 이 축약된 형태이다. 이 칭호는 최근래의 팔레비 왕조까지 페르시아의 모든 왕조에 걸쳐서 사용이 되었다. 이는 외래계 왕조인 일 칸국 역시 해당된다. 사파비 왕조카자르 왕조 에서는 페르시아의 황제가 회교 시아파의 우두머리를 겸했기 때문에, 질룰라(Zill'ul'lah) 라는 호칭이 황제의 휘(諱) 앞에 붙기도 하였다. 페르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황후를 샤흐바누(Shahbanu)라 불렀으나, 사파비 왕조 이후에는 마흐돌리야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친왕은 샤흐자드(Shahzade)라고 불리고, 미르자(Mirza)라는 존칭이 붙었다. 내친왕은 샤흐자데(Shahzadeh)라고 불렸으며 베곰(Begom)이라는 존칭이 붙었다.

오스만 제국무굴 제국의 황제도 파디샤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여타의 이슬람 국가에서 사용되는 술탄이라는 칭호는 자주 황제로 오역되곤 하지만 오스만 제국과 무굴 제국, 페르시아 제국 등지에서는 친왕(Grand Duke)에 해당하여 황자들에게 붙여졌던 칭호로써 황제에 해당하지 못한다. 단, 오스만 제국에서 메흐메트 2세를 존칭할 때에 사용 되었던 술타네스 셀라틴(Sultanes Selatin)만이 술탄 중의 술탄의 뜻으로, 황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페르시아계 인도 왕조인 무굴 제국이 멸망한 뒤에, 영국의 국왕이 인도 황제를 겸하는 인도 제국이 무굴제국의 후계 왕조로써 탄생하였다. 하지만 이는 영국의 국왕이 황제로 격상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영국의 국왕과 인도 황제라는 2개의 신분을 한 사람이 겸하는 형태에 불과했다.

에티오피아의 황제

솔로몬 대왕으로부터 이어지는 세계 최장수 왕조인 에티오피아솔로몬왕조는 A.D. 3세기에 재위한 엘라 아메다 1세로부터 별도의 황제 칭호를 사용하여, 1975년에 사망한 최후의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 1세까지 그 황통이 하나로 연원함을 주장하였다. 에티오피아의 황제는 네구사 네게스트(Negusa Negest)라고 불리며 왕 중의 왕이라는 뜻이고, 그 상징은 예수를 나타내는 왕관을 쓴 사자로, '유다의 사자' 라고 불린다.

아메리카 대륙의 황제

아메리카 대륙의 경우 잉카 제국아즈텍 제국이 있었으나, 이들은 모두 스페인콘키스타도르에 의해 정복당하고 만다.

북아메리카에는 멕시코 제국이 있었는데, 1822년 독립을 획득한 멕시코는 독립 영웅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가 멕시코 제국의 이투르비데 황조를 선포하고 제위에 올랐으나, 이듬해에 살해당하여 황통이 끊어지게 되었다가, 1863년 미합중국 내부의 남북전쟁의 혼란을 틈타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의 지원을 받은 합스부르크가의 막시밀리안 1세가 합스부르크-이투르비데 왕조의 제2제정으로 3년여간 부활시켰던 것을 제외하면 제정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남아메리카의 브라질의 경우, 포르투갈페드루 4세가 나폴레옹 전쟁으로 본국이 황폐화되자 브라질로 망명하여 브라질을 식민지에서 독립국으로 격상시켜 주면서, 자신을 브라질 황제 페드루 1세로 선포한 브라질 제국이 1889년까지 지속되었다가 공화정으로 전환되어 폐지되었다.

주석

  1. 구양수 외. 《新唐書(신당서)》 〈本紀第三 高宗(본기 제3 고종)〉. “上元元年 ~(중략)~ 八月壬辰,皇帝稱天皇,皇后稱天后。” (상원 원년 팔월 임진일(역주:율리우스력 674년 9월 20일), 황제가 천황이라 칭하고 황후를 천후라 칭했다.)
  2. ‘발해는 고구려 계승한 황제국’ 증거유물 나와
  3. 광종,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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