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화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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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화사상의 화이질서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은 중국 이외의 나라에서 중화사상의 영향을 받아 발달한 자민족 중심주의 사상이다. 조선, 베트남 등에서 발달하였다.

이들은 중화사상에서 중국이 자신을 문명의 중심으로 놓고 주변국가들을 오랑캐로 본 것처럼, 자신들만이 문명국이며 주변의 "오랑캐"에 비해 문명의 수준이 높다고 자부하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족의 중국을 이상화하는 양상을 띠기도 한다. 한족국가인 명나라가 이민족인 청나라에 의해서 멸망하자. 멸망한 중화는 자신들의 국가가 계승했다는 의식으로 전환되었다. 이는 한국, 일본, 베트남에 공통적으로 나타났으며, 이것은 일면 당시의 패권국가인 청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와 상충한다. 따라서 청나라와의 교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나라별 소중화사상[편집]

한국[편집]

한국은 옛적부터 중국의 중심부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조선 시절부터 중국과의 직접적인 교류가 활발하였다. 고조선 이후 성립된 삼국 시대의 각 국은 상대방과의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중국과의 교류를 시도하였다. 특히 남북조 시대에는 고구려는 북조, 백제는 남조와의 교류를 통해 상대방보다 우월한 위치를 점하려고 하였다. 신라는 초기에 고구려의 영향권내에 있었는데, 광개토왕릉비를 보면 신라를 신민(臣民),동이(東夷)등으로 표현하는등,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볼 수 있다.

삼국이 신라를 중심으로 통일되는 과정에서 신라는 처음에 당나라에 거의 매년 조공을 하는 등, 그들의 힘을 빌어 고구려, 백제를 병합하려 하였다. 하지만 삼국 통일을 이룬 후, 당나라가 직접적인 지배야욕을 드러내자 독립을 위해 나당 전쟁을 벌였다. 고구려의 멸망 이후 만주 지역에 성립된 발해는 비교적 당나라에 대해 거리를 두고 독립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처럼 삼국 시대와 이후 남북국 시대 때 한국의 고대 국가들은 일방적 소중화사상을 추구하기보다는 중국과의 적절한 교류와 거리두기를 번갈아 보여주었다. 이후 성립된 고려 역시 당대의 강국이었던 송나라,요나라, 금나라에 대해 일방적인 사대보다는 시류의 변화를 파악하여 실리를 추구함으로써 독자적인 모습을 많이 추구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고려 말기부터 변화를 겪기 시작한다. 원의 간섭기를 겪은 이후 고려의 지배층은 친원적인 관료들로 채워졌다. 공민왕의 즉위이후, 친원파를 몰아내고 실지(失地)회복에 나섰으나 공민왕 사후 원나라가 몽골 고원으로 쫓겨나고 그 자리를 명나라가 대체하자 이성계를 비롯하여 신진사대부를 중심으로한 세력이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다.

고려말과 조선초기에는 명과 긴장관계에 있었으나 성리학 이념에 따라 사대를 추구하는 조선건국세력이 안정되자 조선은 명나라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으면서 명(중화)의 제후국을 자임한다. 명나라가 청나라로 대체된 후에도 기존의 명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조선의 지배층을 형성하였고 이는 대륙정세에 대한 오판으로 이어져 병자호란의 구실이 되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의 유교적 지배층들은 명나라의 멸망과 함께 중화 문명의 맥이 끊긴 것으로 보고, 조선이야말로 중화 문명의 정통 계승자라고 생각하여 소중화를 자처하였다. 조선에서는 청나라의 지배층인 만주족을 야만족으로 생각하여 현실관계에서는 사대하였으나 이념적으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으며 자신의 혈통을 중국에서 찾으려는 족보 제작도 조선 중기 이후 많아졌다. 이러한 소중화사상은 외국과의 교류를 중화 사상의 쇠퇴로 보았으며, 조선 후기의 쇄국 정책에도 영향을 주었다.

일본[편집]

고대 일본[편집]

일본은 비미호 때 중국으로부터 왜왕의 지위를 하사받은 기록이 보이며, 중국 사서인 송서,남제서,남사서등에는 찬(讚), 진(珍), 제(濟), 흥(興), 무(武)등 왜의 5왕이 조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쇼토쿠 태자 이전에는 비교적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나, 쇼토쿠 태자가 제도를 중국식(고대 율령제국가)으로 개혁하면서 본격적으로 중국과의 관계가 시작되었으며, 이 시기에 중국문물의 도입과 함께 중화사상도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쇼토쿠 태자 시절 일본은 자국을 형식적으로 중국과 대등한 존재로 인식하였다. (천황칭호의 사용등) 이러한 소중화사상이 엿보이는 기록이 일본서기로 일본서기는 자국(야마토 조정)을 천하의 중심으로 서쪽의 신라에 대해서는 서번국(西蕃國;서쪽의 야만국), 야마토 조정에 복속하지 않은 당시 일본열도의 이족(異族)집단인 북쪽의 에미시에게는 蝦夷(털이 많은 오랑캐의 뜻)라는 표현을 썼고, 남 큐슈의 구마소(熊襲)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들 蕃, 夷등은 중국왕조들이 주변국들에게 붙이던 멸칭들이다.

통일신라와 일본의 외교문서를 보면 이런 일본식 중화사상(大和사상)에 의거하여 일본은 신라의 상국인 듯한 자존적 표현을 썼고 신라는 이들 외교문서의 수리를 거부하거나, 답변을 않는 등의 신경전을 볼 수 있다.

반면에, 일본서기에 따르면 중국 사신의 일본 파견에 대해서는 한국 측의 사신과 달리 객(客)이라 표현하고, 국호 역시 대당(大唐)으로 칭하는 등,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1] 이는 수서에서 수나라가 왜나라를 만이(蠻夷)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후 중국 정권에서 일본 천황을 '왜국왕'으로 봉한 것과 비교된다.

이처럼 왜나라는 중국 국가들에 대해서는 우월한 인식을 가지지 않았고, '황제'보다 격이 낮은 '왜국왕'이라는 칭호 역시 받아들였다. 반면에, 한국 국가들에 대해서는 우월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것은 전형적인 소중화사상으로 볼 수 있다.

소중화에서 탈중화로[편집]

5~6세기 일본은 중국의 책봉체제에 어느 정도 편입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7세기 들어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정효운은 2006년 논문에서 일본서기가 편찬된 덴무 천황(天武天皇) 무렵부터 서서히 일본의 독자적인 세계관이 형성되었다고 보고 있다. 당시 일본은 왜나라라는 국호를 '일본'으로 변경하였으며(삼국사기 문무왕조에 따르면 670년, 구당서에 따르면 702년 이전), 중국의 황제와 대등한 격인 천황이라는 호칭도 이 무렵부터 사용되었다[2].

정효운은 이어 일본서기 이후에 만들어진 속일본기가 일본식 소중화사상에도 계승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몬무 천황(文武天皇)과 쇼무 천황(聖武天皇) 대의 기사에는 야마토 정권에 편입되지 않은 일본 열도 내의 국가들이나, 신라발해를 자신들의 번국(蕃國)으로 인식하는 표현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무로마치 막부 시절에는 무역교류의 필요성에 의해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1368~1394 재위)가 중국과 끊어진 공식적 교류를 회복하면서 명황제로부터 일본국왕 원도의(日本国王源道義)라는 칭호를 하사받기도 했다. 이 관계는 150년 가량 지속되었으나, 1547년 양국 관계는 단절됐다. 이후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공(임진왜란)할 때 명나라 침략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일본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에서 완전히 이탈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 집권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아 동아시아 국제질서 재편입을 시도하는 한편, 대내적인 정권의 안정을 확보하려 했지만, 명나라의 거부로 이 시도는 좌절됐다.[3] 박홍규는 이후 도쿠가와 일본이 조선의 소중화사상과 다른 '탈중화'의 길을 걸었다고 분석했다.

베트남[편집]

베트남 지역은 중국의 중심부와는 떨어져 있지만, 한나라 때부터 중국과 밀접한 교류를 나눈 지역이다. 베트남이라는 국명 역시 사마천의 사기 등에 나오는 월(越. 비엣)에서 비롯한 것이다. 중국의 중화사상이 베트남에 전파됨에 따라 베트남에서도 소중화사상이 발전하게 되었다.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한 이후 베트남의 여씨 왕조 역시 자신들이 중화 사상의 계승자가 되었다고 자부하였다. 여씨 왕조의 군주들은 자신들이 청나라와 대등한 위치에 있다고 자부하면서, 주변 국가들에게 자신의 '문명'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베트남의 후기군주들은 대내적으로 황제의 호칭을 썼다.

참고 문헌[편집]

  • 정효운, 《고대 한·일 국가와 타자인식》, 신라문화 28집, 2006 - 한국과 일본의 소중화사상의 기원 연구

주석[편집]

  1. 夏四月 小野臣妹子至自大唐 唐國號妹子臣曰蘇因高 卽大唐使人裴世淸.下客十 二人 從妹子臣至於筑紫 遣難波吉士雄成 召大唐客裴世淸等 爲唐客更造新?於難 波高麗?之上 《일본서기》, 스이코 천황 16년조, 정효운, 2006에서 재인용. 참고로 당시 사신을 파견한 국가는 당나라가 아닌 수나라였으나, 일본서기에는 당나라로 표기되어 있다.
  2. 정효운, 2006에 따르면 천황이라는 호칭이 최초로 사용된 때는 682년이다.
  3. 박홍규, 17세기 도쿠가와 일본에 있어서 화이문제,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