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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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太祖
전주 경기전의 조선 태조 이성계 어진 청룡포본
전주 경기전의 조선 태조 이성계 어진 청룡포본
제 1대 조선 국왕
재위 1392년 8월 5일-1398년 10월 14일
전임 조선 건국 (고려 공양왕)
후임 정종
섭정 문하정승 조준 (1395.02.01.~1395.08.21.)
재상
고려 국왕
재위 1392년 7월 17일-1393년 3월 9일
즉위식 1392년 7월 28일
전임 공양왕
후임 본인 (조선 국왕)
권지고려국사
재위 1392년-1398년
전임 공양왕
후임 정종
이름
이성계(李成桂) → 이단(李旦)
별호 자는 중결(仲潔) 또는 군진(君晋)
호는 송헌(松軒)·송헌거사(松軒居士)
묘호 태조(太祖)
시호 강헌 성문신무 정의광덕 태상왕 (康獻 聖文神武 正義光德 太上王)
존호 지인계운 응천조통 광훈영명 (康獻至仁啓運應天肇通光勳永命)
능호 건원릉
신상정보
출생일 1335년 10월 11일(1335-10-11)
출생지 고려 고려 동북면 화령군 영흥 흑석리
(現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남도 금야군 순녕면 흑석리)
사망일 1408년 5월 24일(1408-05-24)(72세)
사망지 조선 한성부 창덕궁 광연루 별전
왕조 조선의 기 조선
가문 전주 이씨
부친 환조
모친 의혜왕후
배우자 신의왕후
신덕왕후
자녀 총 13명 중
대군(大君) 8명, 공주(公主) 3명, 옹주(翁主) 2명,
"§가족 관계" 참조.
기타 친인척 한경(장인)
강윤성(장인)
한성기(처남)
한창수(처남)
한금강(처남)
한융전(처남)
한검(처남)
강계권(처남)
강유권(처남)
지윤(사돈)
김천서(사돈)
최인두(사돈)
민선(사돈)
황형(사돈)
금인배(사돈)
민제(사돈)
이거이(사돈)
심덕부(사돈)
왕우(사돈)
심효생(사돈)
이인립(사돈)
조인벽(매부)
이애(사위)
심종(사위)
이제(사위)
홍해(사위)
이등(사위)
종교 불교유교(성리학) → 불교
묘소 대한민국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군사 경력
복무 고려 도평의사사
복무기간 1356년 ~ 1392년
최종계급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
지휘 고려 삼군도총제부
주요 참전 쌍성부(영흥)탈환(1356, 21세)
개경홍건적격퇴(1361년),
나하추(몽고족) 격퇴(1362년),
기황후(몽고족) 격퇴(1364년),
김삼선·김삼개(여진족) 격퇴(1364년),
동녕부(평양) 탈환(1370년),
개경왜구토벌(1377년),
지리산왜구토벌(1377년),
황산대첩 왜구토벌(1380년),
호바투(여진족) 격퇴(1383년),
길주왜구토벌(1384년),
제1차 요동 정벌(1388년),
제2차 요동 정벌(1392년)

조선 태조(朝鮮 太祖, 1335년 10월 27일(음력 10월 11일) ~ 1408년 6월 18일(음력 5월 24일)[1], )는 고려 말의 무신이며 정치가이자, 조선을 건국한 초대 국왕(재위: 1392년 8월 5일(음력 7월 17일)[2] ~ 1398년 10월 14일(음력 9월 5일)[3])이다. 또한 대한제국추존 황제이다. (姓)은 (李), 본관전주(全州), (旦), 초명은 성계(成桂), 초자는 중결(仲潔), 자는 군진(君晉), 는 송헌(松軒)·송헌거사(松軒居士)이다.

이력

이성계는 1335년(충숙왕 후4년) 고려 동북면 화령에서 출생하였다.

고려의 장수이며 공민왕우왕 시대에 홍건적왜구토벌의 공로를 인정받아 입지를 다졌다. 1388년(우왕 14년) 철령 이북의 영토문제를 두고 명나라와 갈등이 빚어지자,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명나라의 요동을 정벌할 것을 우왕으로부터 명을 받았다.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서 요동 정벌을 위하여 북진을 하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정권을 장악하였고, 공양왕으로부터 선위의 형식으로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함으로써 조선을 개국하였다.

조선을 개국한 후에 '단(旦)'으로 개명하였다. 조선 건국 후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사대부들과 전제개혁을 단행하였고, 신진세력의 경제적 토대를 구축하였으며, 도읍을 한양으로 옮겨 조선의 기틀을 다졌다.

묘호는 태조(太祖)이며, 시호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4] 이다. 이후 존호가 더해져 대한제국명나라에서 내린 시호 강헌(康獻)을 삭제하고 고황제(高皇帝)로 추존하여 정식 시호태조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太祖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이다.[5] 재위 기간은 6년 2개월이며, 퇴위 후 태상왕이 되었다.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있는 건원릉(健元陵)에 안장되었다.

가계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전주에서 삼척으로 이주하여 간도 지방에서 기반을 마련하였고, 몽고군이 쳐들어왔을 때 조씨와 함께 항복하여 다루가치가 되었다. 이후 증조부 이행리, 조부 이춘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이를 세습하였고, 실록에는 풍속을 바로잡고 개혁을 추진하여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고려 충숙왕 복위 3년(1335년) 음력 10월 11일 동북면 화령에서 태어났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원의 쌍성총관부 만호였다. 어느 날 당시 쌍성총관부 만호 이자춘이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하늘에서 오색 구름을 타고 선녀가 내려왔다. 그 선녀는 이자춘에게 절을 하고 "천계에서 그대에게 내리는 것이니, 장차 이것을 동쪽 나라를 측량할 때 쓰십시오."라며 소매 속에서 침척(바느질에 사용하는 자)을 꺼내 바쳤다. 이자춘이 그 자를 받은 뒤에 부인 최씨는 임신하였고, 13개월 만에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이성계 또한 어릴 때 꿈 속에서 신인(神人)이 나타나 금으로 된 자 즉 금척(金尺)을 주면서 "이 금척(金尺)으로 삼한 강토를 헤아려 보아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훗날 장성하여 진안 마이산에 들르게 된 이성계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산의 풍광이 어릴적 꿈 속에서 신인(神人)이 나타나 금척(金尺)을 주었던 곳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신인(神人)이 금척(金尺)을 주었던 내용과 마이산의 풍광을 읊은 내용이 태조 2년(1393년) '몽금척(夢金尺)'이라는 악장과 '금척무(金尺舞)'라는 춤으로 만들어진다.

유년기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태어날 때 부터 우뚝한 콧마루와 임금다운 얼굴로서, 신체는 영특하고 준수하며, 지략과 용맹은 월등하게 뛰어났다고 한다.[6]

어린 시절 고향인 화령에서 살았다. 북방 민족들이 를 구하러 주로 내려왔는데, 흔히 말하길 "이성계와 같이 걸출한 매를 얻고 싶다"라고 하였다.

고려의 무신 가문 출신인 이성계는 어릴 때부터 영웅의 기질을 타고나서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며, 용맹하여 수많은 전쟁터에서 전공을 세웠다. 특히 활을 잘 쏘아서 '신궁(神弓)'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천하의 명궁으로 알려졌다. 훗날 그의 눈부신 활약상에 관해서는 여러 영웅담이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으며, 이성계는 30 여년 동안 전장에 나아가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성계의 군대가 전장에 나아갈 때는 대라(大螺)를 부는 특유의 의식이 있었는데, 적들이 멀리서 그 소리만 듣고도 바로 이성계가 왔다는걸 알고 두려워했다고 한다.

원나라와 홍건적 격퇴

고려 공민왕 5년(1356년) 유인우가 이끄는 고려군이 원의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공민왕은 원나라에 부역하던 조씨와 이씨에게 조상의 죄를 씻을 기회를 준다고 하여 공민왕에 투항하였고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공을 세웠고, 5년 뒤에 이자춘이 죽자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 · 동북면상만호(東北面上萬戶)가 되었다.

1361년(공민왕 10년) 음력 10월에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 박의(樸儀)의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같은 달에 다시 압록강의 결빙을 이용하여 홍건적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의 영내에 침입하여 삽시간에 수도가 함락되자 이성계는 휘하의 고려인 및 여진족으로 구성된 강력한 친병 조직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하였다. 또한 이들 대부분은 기병이였다. 개인 병력으로만 수많은 전장에서 단련된 수천의 기병을 거느린 이성계의 군사력은 위협적이였다. 팔준(八駿)이라 불리는 이성계의 여덟 마리 애마 이름들은 다음과 같다. 유린청(遊麟靑), 횡운골(橫雲鶻), 추풍오(追風烏), 발전자(發電赭), 용등자(龍騰紫), 응상백(凝霜白), 사자황(獅子黃), 현표(玄豹).

1362년(공민왕 11년) 심양행성승상(審陽行省丞相)을 자처한 원 장수 나하추가 수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함경도 홍원 지방으로 쳐들어와 기세를 올리자, 고려에서는 이성계를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아 적을 막게 하였다.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마침내 함흥 평야에서 원 군대를 격퇴시켜 명성을 크게 떨쳤다. 적장인 나하추마저 이성계의 뛰어난 용맹과 탁월한 군사적 재능에 감탄하며 깊이 존경할 정도였다.

1364년(공민왕 13년) 원나라기황후최유를 시켜 원의 군사를 이끌고 공민왕을 몰아내고 덕흥군을 세우려고 압록강을 넘어 침입하자 이를 막았고, 함주를 침공한 여진족 김삼선·김삼개(金三介) 형제를 격퇴하여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임명되었으며, 1370년(공민왕 19년) 평양의 원의 동녕부를 원정하여 국토를 확장하였다. 이성계는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사흘에 걸쳐 도강한 후, 진군하여 요동성을 점령한다.


왜구 격퇴

고려 말기에는 왜구의 약탈이 각지에서 빈번하였다. 공민왕 대에만 14년간 무려 314회의 왜구의 침략이 발생하였다. 이 시기의 왜구는 규모도 커지고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우왕 6년(1380년) 진포 해전으로 퇴로가 차단된 왜구는 육지에 있던 왜구들과 합세하여 큰 세력을 이루게 되니,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의 대규모 군단이 내륙으로 들어와 옥천, 금산, 상주, 선산, 성주, 함양 등을 미친듯이 휘젓고 다니며 노략질하다가 마침내 지리산 운봉에서 진을 치고 북상을 준비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삼도도원수(楊廣全羅慶尙三道都元帥)로 임명하니 드디어 이성계가 출전하게 되었다. 전라도 운봉(남원)에 도착한 이성계는 운봉을 넘다가 길 오른쪽의 험한 길을 보고 "적이 반드시 이 길로 우리를 갑자기 습격하려 올 것이니, 우리도 이 길로 들어가야 한다"라고 말하고는 험한 곳에 들어갔는데, 과연 이성계의 예측대로 왜구가 습격해 왔다. 이에 이성계는 화살 70여 발을 쏘아 모두 얼굴을 맞히니, 왜구들이 활시위 소리를 따라 모두 쓰러졌다. 마침내 이성계의 군대가 황산에 진을 치고 왜구와 대치하게 되었다.

아지발도는 고려군이 토벌에 나선 것을 알았지만 자신의 힘만을 믿고 교만을 부리다가 이성계가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에 왜구의 기세는 크게 꺾여져서 물러났다. 당시 이성계는 아키바츠의 투구를 활로 쏘아 맞히어 벗긴 뒤 벗겨진 이마를 향해 다시 활을 쏘아 죽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화살 두 대를 연사하여 투구가 벗겨지자마자 다시 화살이 날아와, 맞아 죽었다고도 한다. 이에 왜구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고려군의 공격은 더욱 맹렬해져서 왜구의 정예부대가 모두 죽었다. 기록에 따르면 "죽임을 당하는 왜구의 곡성이 마치 만 마리의 의 울음소리 같았고, 냇물이 모두 그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라고 한다. 이 전투를 '황산대첩(荒山大捷)'이라고 한다. 이때 이색, 김구용, 권근이 시를 지어 승리를 하례하였다.

한 고조 유방(劉邦)이 반란을 평정하고 돌아가는 길에 패군(沛郡) 풍현(豊縣) 즉 풍패(豊沛)에 들러 승리를 기념하며 고향 사람들을 모은 자리에서 대풍가(大風歌)를 읊었듯, 이성계는 왜구를 평정하고 돌아가는 길에 전주(全州)에 들러 황산대첩의 대승을 기념하며 전주 이씨 종친들을 모은 자리에서 대풍가(大風歌)를 읊으며 드디어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포부를 드러냈다.

이렇듯 고려 말기의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상황은 이성계를 변방의 무명 장수에서 일약 고려 제일의 장수이자 영웅으로 만들었다. 계속되는 승전은 이성계의 무장으로서의 진가를 확실하게 보여주어 고려에서 입지를 굳히게 만들었다. 백성들의 신망을 받게 되었고, 그에 따라 벼슬도 올라갔다. 군사력을 갖춘 신망받는 이성계에게는 자연히 신진 사대부들이 몰려들었다.

신진사대부와 연대

정치적 연대가 필요하던 그는 개혁성향이되 무장능력이 없던 신진사대부와 연대하여 손을 잡게 되었다. 동북면에 있을 때 정몽주가 그를 수시로 찾아왔고, 그를 통해 정도전이 함주 막사의 그를 수시로 방문하여 그와 정사와 현안을 논하기도 하였다.

정몽주와 정도전을 통해 이색, 우현보, 권근, 성석린, 설장수, 이숭인 등의 인사들과 만나서 친분을 형성해 나갔다. 또한 친명 세력이자 반원 정책을 하던 신진사대부에 대한 압력과 위협에서 이들을 지켜주고 보호함으로써 신진사대부와 결속력을 다져나가게 되었다. 한편 최영, 조민수와도 친분관계를 유지하였고, 최영이 임견미, 염흥방 세력을 숙청할 때는 최영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성계와 비교되던 최영은 유서 깊은 권문세족 가문의 출신으로 그 딸은 우왕의 왕비이다. 이성계가 신흥 무인세력의 대표라면 반대로는 최영이 구 권문세족 세력의 대표라고 할 수 있었다.

황산대첩에서 승리를 거둔후 이성계가 대풍가(大風歌)를 읊으며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뜻을 드러낸 때는 1380년, 이성계가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로 임명된 때는 1382년, 정도전이 이성계를 찾아가서 처음 만났을 때는 1383년, 즉 정도전이 이성계를 부추겼다는건 근거도 없고 억지스럽다.


요동 정벌 반대와 위화도 회군

1388년(우왕 14년) 2월 명나라철령 이북의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였다.[7] 본래는 원나라쌍성총관부가 있던 지역이니, 이제는 원을 계승한 명나라의 땅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철령위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했다.[7][8]

4월, 최영우왕은 이 기회에 요동을 공격해서 명나라의 야심을 꺾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반대하면서 그 이유로 4가지를 들었다.

  1. 소(小)로서 대(大)를 거역하는 것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공격하는 것).
  2. 농번기인 여름철에 군대를 동원하는 것.
  3. 온 나라의 군대를 동원하여 북쪽으로 원정하러 간 사이 왜구가 그 틈을 노릴 소지가 있는 것.
  4. 바야흐로 여름철이라 비가 자주 내리므로 아교가 녹아 활이 녹고 군사들은 질병을 앓게 될 것.[7]

이것이 이른바 '4불가론'이다. 그러나 요동정벌은 단행되었다.

최영과 협력하여 전횡을 일삼던 임견미, 염흥방 등 은퇴한 이인임의 남은 잔당들을 제거하고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이르렀다. 병력 4만, 최영이 8도 도통사로 총지휘관이 되고, 이성계는 우군도통사, 조민수는 좌군도통사로 임명되었다.[9]

5월에 고려군은 압록강 어귀의 작은 섬 위화도에 이르렀다. 장맛비가 계속 내렸으므로 회군을 청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침내 좌군도통사 조민수를 설득하여 회군하였다.

회군한 이성계는 개경을 점령하여 우왕을 폐위하고 9세의 창왕을 옹립하여 섭정을 전담, 최영을 제거하여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고 한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이때 길가의 어린 아이들이 "십팔자위왕(十八子爲王)" 이(李)를 파자(破字)하면 十八子가 되니 즉 "이씨(李)성을 가진 자가 왕(王)이 된다."라는 동요(참요)를 부르자 백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따라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훨씬 이전부터 이씨(李)성을 가진 자가 왕(王)이 된다는 도참이 전해져서 고려 왕실에서는 오얏나무(李)를 심고 베기를 반복하며 이씨(李氏)의 기를 누른다는 의식을 행하기도 하였다.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의 신흥 무인세력과 신진사대부가 결탁하여 구세력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자, 조선왕조가 개창되는 단초를 이룬 사건이다. 그의 위화도 회군에는 정도전, 정몽주 등의 적극적인 찬성과 지지가 있어 내부 반발을 무마할 수 있었다. 손쉽게 개경을 손에 넣은 이성계 일파는 구세력의 대표 최영을 유배보냈다가 두 달 후 유배지에서 처형시켰다.

새로운 왕조 건국과 정적 숙청

포은 정몽주(후에 역성혁명과 온건혁명의 방법 차이로 정적이 된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가 되어 조준 등과 결탁하여 사전(私田)을 개혁하고 특권층의 세력을 좌절시키는 한편 신흥세력의 기반을 굳게 하였다. 우왕 때에 정치 일선에서 배제되었던 신진 사대부도 속속 정계에 복귀하여 본격적인 개혁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신진 사대부 사이에는 사회의 모순에 대한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서로 대립하였다. 이색, 정몽주 등 온건 개혁파는 고려 왕실을 보존하여 그 틀 안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 반면 정도전 등 급진 개혁파는 고려 왕조를 부정하는 쿠데타를 주장하였다. 점차 쿠데타가 시작되고 있었다.

1392년(공양왕 4년) 정몽주는 명나라에 갔다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하기 위해 황주로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중에 낙마하여 크게 다치는 바람에 한동안 은신해 있자, 이성계가 없는 틈을 이용하여 측근들과 함께 역성혁명파의 핵심 세력인 정도전, 남은, 조준 등과 그들의 측근 윤소종, 남재, 조박 등을 탄핵하여 유배를 보냈다. 황주에서 이 소식을 접한 이성계는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한밤중에 부랴부랴 가마에 몸을 싣고 개경으로 향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다. 그 이유는 이성계가 낙마로 인해 크게 다쳤기 때문에 불편한 몸이 되어 있어서 왕의 어전으로 입궐할 수 없는 입장인 데다가, 설사 입궐한다고 해도 이성계의 측근 핵심들이 모두 탄핵받아 유배된 상태였기 때문에 정몽주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을 불러 정몽주에게 찾아가 자기 자신들과 함께 새로운 왕조를 주창할 것을 권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래서 이방원은 그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정몽주를 만나 정자에 둘러 앉아 시조를 한 수 지어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았다. 이 시조가 그 유명한 '하여가'와 '단심가'다. '하여가'는 이방원이 지은 시조로, 내용은 이렇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엵혀진들 그 어떠리, 우리도 이 같이 얽혀 천년만년 살고지고

라는 시조 한 수를 남겨 같이 새 나라, 왕조를 세우는 데에 같이 이루어 보자는 이방원의 뜻이었고, 그리고 '단심가'는 정몽주가 지은 시조로 내용은 이렇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라는 시조를 내어 정몽주 자신은 자신의 몸이 백번 천번 죽어도 고려의 왕만을 섬긴다는 것이 정몽주의 뜻이었다. 그래서 이방원은 정몽주가 있는 한 역성혁명(새 나라 새 왕조를 세우는 것)을 이룰 수가 없다고 판단이 되자 자신의 수하 조영규를 시켜 밤중에 집에 돌아가는 정몽주을 쫓아가 선죽교에서 제거하였다. 정몽주가 살해되자 고려 조정은 다시 이성계 일파가 득세하였다. 정몽주의 측근들인 온건 개혁파들을 대거 축출되어 유배길에 올랐고, 정몽주에 의해 탄핵되었던 이성계 일파의 급진개혁파들이 정계에 속속 복직하여 세력을 결집하였다. 이후 나머지 온건개혁파들에 대한 척결이 이루어졌고, 정도전이 정계에 복귀하면서 사실상 역성혁명이 구체화되어 1392년 7월에 정도전, 남은, 조준, 배극렴 등은 공양왕을 왕위에서 폐위시키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할 것을 결정한다. 그들은 이를 위해 정비 안씨를 찾아가 공양왕의 폐위와 이성계의 옹위를 명령하는 교지를 요청하였고, 정비가 이를 수용함으로써 공양왕이 비로소 정식으로 폐위되고 이성계가 신하들의 계속된 추대와 간청으로 이성계는 마침내 1392년 7월 17일, 수창궁에 나아가 왕위를 계승하여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였다. 이로써 고려 왕조는 왕건이 개국한 지 474년 만에 제34대 공양왕을 끝으로 하여 멸망하였다.

고려왕조를 멸망시킨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왕족 후손들인 왕씨들을 위험요소로 간주하여 왕씨들과 그 동조 세력들을 강화도와 거제도 두 곳에 살도록 제한했으나 곧 왕씨들을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성계의 측근들은 왕씨를 살려두면 큰 화가 미칠 것이므로 조선의 앞날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니 모두 죽이자고 주장하였다. 곧 명령을 내어 강화도에 있던 왕씨들을 강화나루에 던져 수장하였고, 거제도에 있던 왕씨들 또한 바다에 던져 죽여버렸다. 그리고 원주로 유배갔다가 삼척으로 유배된 공양왕은 공양군으로 강등되어 살다가 이성계의 명령에 의해 1394년 4월 17일(태조 2년), 공양군 부자는 사사되었다. 공양군은 나중 태종 이방원에 의해 공양왕 실록이 편찬되고, 공양왕으로 다시 추봉 되었다. 이로 인해 남아있는 왕씨들은 곧 죽게 될 것이라고 알고 '왕(王)'성에서 어머니 성을 따르거나 '전(全)'씨, '옥(玉)'씨, '용(龍)'씨, '전(田)'씨 등으로 성을 바꾸고 비참하게 살아가야 했다. 이로써 고려 왕족인 왕씨일가와 조선 건국에 반대했던 정적들을 숙청하여 왕권을 강화하여 조선 왕조 500년이 시작이 된다.

뒤이어 이성계는 정도전 등의 추대를 받아 1392년 8월 5일(음력 7월 17일)에 송경(松京) 수창궁(壽昌宮)에서 공양왕으로부터 선위(禪位)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라 개국하였다.[10] 즉위한 다음날 개경 거리와 궁궐에 단비가 내렸다. 오랜 가뭄 끝에 모처럼 비가 내리자 사람들은 천지신명이 새 임금을 축복하여 내리는 비라고 떠들며 기뻐하였다.[11] 처음에는 민심의 동요를 염려하여 국호는 그대로 고려로 두었으나, 1393년 3월 27일(음력 2월 15일) 조선(朝鮮)이라 고쳤다.[12]

한편 명나라에 책봉을 청하는 사신을 보냈지만 명나라 홍무제는 그를 정식 국왕으로 봉하지 않고 권지고려국사라는 직책을 내린다. 즉위 초반의 집권기반은 취약하였고, 정도전무학대사에게 명하여 민심을 수습할 방안을 마련케 한다.

고려 구신들의 반발

새로운 나라를 만들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유능한 관리들로 하여금 벼슬길을 버리고 은둔생활을 하게 만들었다.[13]

이때 두문동의 72현을 비롯하여 고려의 유신들에게 개국공신과 그에 상응하는 개국원종공신의 지위를 내렸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거절하고, 낙향하거나 산으로 숨어버린다. 두문동(경기도 개풍군)에 모여 있던 고려의 옛 신하들이 마을에 불을 질렀는데도 한 사람도 나오지 않고 모두 타죽었다는 이야기는 당시 새 왕조에 대한 반감이 어느 정도로 심했는가를 알게 해주는 일화이기도 했다.[13] 결국 태조는 새로운 도읍지를 정할 것을 명한다. 바로 그는 지역의 민심과 사상적 기반을 달리 해야 될 필요가 있다는 정도전의 건의를 받아들여 도읍지 천도와 국교(國敎)를 불교에서 유교로 개정할 결심을 한다.

고려 구신들에 대한 회유책

태조는 즉위 초, 민심을 두려워하여 나라 이름을 그대로 고려라고 했으며, 모든 법제를 고려의 예에 따르게 했다.[13] 개국 직후 그는 길재, 이색 등의 구신들을 방문하여 협력을 요청했다. 권근, 하륜, 심덕부, 설장수 등은 그의 요청에 협력하여 새 조정에 참여하였지만 길재, 신호 등은 그가 보낸 사자들의 면담을 거절하였다. 신진사대부의 스승격인 이색 역시 의 조선 조정 참여 요청을 거절하였다.

이색은 한양의 왕궁에 온 뒤에도 그를 임금이라 하지 않고 '그대, 송헌'이라 불러서 남은, 정도전, 조준 등이 반발하기도 했다. 개국공신인 남은의 동생 남재와 숙부 남을진 역시 태조의 협력 요청을 거부하고 은둔생활을 한다. 개국공신을 책록하면서 고려의 구신들에게도 원종공신의 칭호를 내려 회유, 포섭하려 하였으나 일부만이 협력하고 대부분 고려의 구신으로 남겠다며 요청을 거절하여 조선 초기에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다.

한양 천도와 조선 선포

태조 어진.

새 왕조를 연 태조는 즉위 한 달 만에 수도를 옮길 결심을 했다.[14] 처음에는 나라 이름도 고치지 않고 수도도 그대로 개경으로 할 생각이었으나 무슨 까닭에서인지 천도를 결심, 후보지를 고르기 시작했다.[14] 백성의 생활이 채 안정되기도 전에 큰 역사를 벌임은 옳지 않다는 천도 반대론을 물리치고 재위 3년(1394년) 8월 태조는 마침내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새 수도의 도시 계획을 구상, 천도를 명령했다.[15][16]

처음 후보지로 지목된 곳은 계룡산이었으나[15] 하륜이 계룡산은 땅이 좁고 토지가 비옥하지 않으며 금강과도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를 들어 천도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17][15] 계룡산 대신 하륜이 거론한 무악(지금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 일대)은 "예로부터 제왕은 모두 남면하여 나라를 다스려왔고, 동향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정도전의 반대로 중지되었다.[15][17] 다음날, 태조는 왕사 무학, 정도전, 하륜 등과 함께 새 도읍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 곳은 바로 고려의 남경 터였다.

《연려실기술》에는 한양을 새로운 왕조의 수도로 추천한 것은 승려 무학으로, 삼각산에 이어 목멱산(木覓山)을 거쳐 백악산 아래의 땅(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에 도착한 무학은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백악산남산으로 좌우 용호(龍虎)를 삼는 이곳을 궁궐터로 정하고 태조에게 아뢰었다.[15] 무학은 이곳이 적당하다고 생각했지만, 한 노인이 소를 타고 지나가다가 "이놈의 소! 미련하기가 무학과 꼭 같구나. 바른 길을 버리고 굽은 길을 찾아가다니, 이럇!"라고 소리질렀다고 한다. 무학은 노인을 쫓아가 길지를 알려달라고 간청했고, 노인은 "여기서 서쪽으로 십리를 더 가면 알 일이다.[15]"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무학은 그대로 태조에게 길지를 보고하였고 정도전 등이 찬성하자, 태조는 그곳으로 도읍지를 정했다. 그곳이 북악산 밑 경복궁 자리였다고 한다. 하지만 실록에는 태조 본인이 한양으로의 천도를 결정한 주체였다고 되어 있다. 새 도읍지 한양이 '조운이 잘 통하고 사방의 이수도 고르니 사람들에게 편리하다.'는 이유였다.[15]

10월 태조는 각 관청당 2명씩만 남겨두고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개경을 출발, 한양으로 들어왔다.[18] 그리고 새 수도의 이름을 한성부로 고쳤다. 12월부터 본격적인 역사에 들어갔다.[15] 이는 왕씨의 본거지인 개경을 버리고 한양(漢陽)으로 천도하여 도성을 신축하는 등으로 국가의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재위 4년(1395년)에는 도성축조도감이라는 관청을 설치, 성을 쌓기 위한 기초측량을 하게 했다.[19] 총책임자는 정도전을 임명했다. 태조 5년(1396년) 쌓기 시작한 한양 성곽은 1년여 만에 완성되었다.[19]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운 (이성계)은 명나라로 가서 국명을 지어주길 부탁했다. '화령'과 '조선'중 하나로 이름을 지어주길 부탁하자 명의 홍무제는 국명을 "조선"으로 최종 결정하였다. 이는 단군 이래로 내려오는 우리 역사에서 나라의 이름을 중국에 정해달라고 부탁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고, 이 일 때문에 태조는 자주적인 태도를 버렸다는 오명을 남기게 되었다.

논공행상으로 창업에 공을 세운 이에게 개국공신의 호를 주고 전지(田地)와 노비를 내리어 왕권을 튼튼히 하였으며 관제(官制)를 비롯한 국가의 시설을 정비하고 정도전 등으로 하여금 《조선경국전》,《경제육전》 등을 찬집(纂輯)하게 하여 반포하는 등 여러 가지 정책에 힘썼다.

퇴위

태조에게는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여섯 왕자와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두 왕자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강씨 소생의 막내아들 방석을 몹시 사랑하여 세자로 책봉했다. 한편 조선 개국에 공이 컸던 한씨 소생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의 불만이 갈수록 쌓여갔다. 이방원은 정도전 일파가 방석을 끼고 자신들을 해치려 한다는 이유를 들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 일파와 강씨 소생 왕자들을 살해하였다.

태조는 이 사건에 몹시 상심하여 왕위를 둘째 아들 방과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방과가 정종으로 즉위하고 아우 방원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400년에는 왕위계승을 두고 넷째 아들인 방간과 다섯째 아들인 방원이 대립하여 제2차 왕자의 난이 발발하였다. 두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해 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였다.

태종은 즉위하자 성석린을 보내 태조를 서울로 모셔 왔다. 그러나 1402년(태종 2년)에 다시 함경도로 들어간 채 돌아오지 않으므로 태종이 차사(差使)를 보내어 돌아오기를 권유하니, 차사마저 돌려보내지 않고 활에 화살을 넣고 족족 오는 차사마다 죽였다는 전설이 있어 함흥차사란 말이 생겨났다. 뒤에 무학대사가 가서 겨우 서울로 오게 하였다.

1401년 한성부로 돌아온 태조는 태상왕으로 7년을 더 살며 염불삼매로 조용한 나날을 보내다가 1408년 음력 5월 24일에 지병으로 있던 중풍이 악화되어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승하하였다.

묘호 및 시호

새로운 왕조의 개창자로서 묘호태조(太祖), 존시(尊諡)는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다.

광무 원년(1898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에 의해 개국시조로서 고황제(高皇帝)로 추존되었다. 동시에 명에서 내린 시호인 '강헌'을 삭제하고 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라 하였다.

능원

태조의 건원릉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건원릉(建元陵)이다.

생전에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곁에 묻히고자 하였으나, 아들 태종에 의해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현재의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 터에 최초로 안장되었다. 능호는 건원릉(健元陵)이다. 태종은 부왕이 수시로 찾기 위해 마련한 신덕왕후의 능을 바로 도성 밖으로 이장하고, 능의 석물과 문인, 무인석은 청계천 광통교 교량의 난간과 받침돌로 훼철해버렸으며,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태조는 신덕왕후의 무덤이 태종에 의해 훼철된 뒤, 태종에게 자신을 선산이 있는 함흥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태종은 왕조의 개창자이기도 한 아버지의 무덤을 한양과 멀리 떨어진 함흥에 묻는 대신 한양 근교의 양주에 모시고, 함흥의 흙과 억새풀을 가져다 무덤을 덮었다고 한다.


가족 관계

조선의 초대 국왕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출생

1335년 10월 27일(음력 10월 11일)
고려 고려 동북면 화령부 사제


사망 1408년 6월 18일(음력 5월 24일) (72세)
조선 조선 한성부 창덕궁 광연루
태조 고황제
太祖 高皇帝


태조의 직계조상

 
 
 
 
 
 
 
 
 
 
 
 
 
 
 
 
 
 
목조 이안사
 
 
 
 
 
 
 
익조 이행리
 
 
 
 
 
 
 
 
 
 
 
효공왕후 이씨
 
 
 
 
 
 
 
도조 이춘
 
 
 
 
 
 
 
 
 
 
 
 
 
 
최기열
 
 
 
 
 
 
 
정숙왕후 최씨
 
 
 
 
 
 
 
 
 
 
 
환조 이자춘
 
 
 
 
 
 
 
 
 
 
 
 
 
 
 
 
 
안변부원군 박광
 
 
 
 
 
 
 
 
 
 
 
경순왕후 박씨
 
 
 
 
 
 
 
 
 
 
 
 
 
 
  태조 이성계  
 
 
 
 
 
 
 
 
 
 
 
 
 
 
 
 
 
 
 
 
영흥백 최천보
 
 
 
 
 
 
 
영흥백 최종대
 
 
 
 
 
 
 
 
 
 
 
조선국대부인 김씨
 
 
 
 
 
 
 
영흥부원군 최한기
 
 
 
 
 
 
 
 
 
 
 
 
 
 
조선국대부인 김씨
 
 
 
 
 
 
 
 
 
 
 
의혜왕후 최씨
 
 
 
 
 
 
 
 
 
 
 
 
 
 
 
 
 
조선국대부인 이씨
 
 
 
 
 
 
 
 
 
 
 
 
 


부모

본관 생몰년 부모 비고
환조대왕 이자춘 桓祖大王 李子春 전주 1315년 - 1361년   도조대왕 이춘 度祖大王 李椿
  경순왕후 박씨 敬順王后 朴氏
태종 11년(1411년) 추존
 의혜왕후 최씨 懿惠王后 崔氏 영흥  생몰년 미상 영흥부원군 최한기 永興府院君 崔閑奇
조선국대부인 이씨 朝鮮國大夫人 李氏

형제

작호 이름 생몰년 생모 비고
이복 형 완풍대군 完豊大君 원계 元桂 1330년 - 1388년 한산 이씨 韓山 李氏
영성대군 永城大君 천계 天桂 1333년 - 1392년
이복 누이  이씨 李氏[20]   생몰년 미상 
동복 누나 정화공주 貞和公主  의혜왕후 최씨
이복 동생 의안대군 義安大君  화 和 1348년 - 1408년[21] 정빈 김씨 定嬪 金氏
  정윤 正尹  영 英   ?   - 1394년[22]    미상

왕비

시호 본관 생몰년 부모 비고
정비 신의고황후 한씨 神懿高皇后 韓氏
    신의왕후 神懿王后
안변 1337년 ~ 1391년     안천부원군 한경 安川府院君 韓卿
삼한국대부인 삭녕 신씨 三韓國大夫人 朔寧 申氏
광무 3년 (1899년) 황후로 추존
계비 신덕고황후 강씨 神德高皇后 康氏
    신덕왕후 神德王后
곡산 1356년 ~ 1396년    상산부원군 강윤성 象山府院君 康允成
 진산부부인 진주 강씨 晉山府夫人 晉州 姜氏
현종 10년(1669년) 복권
광무 3년 (1899년) 황후로 추존

후궁

작호 본관 이름 생몰년도 비고
  성비 원씨 誠妃 元氏 원주   ?   ~ 1449년
정경궁주 유씨 貞慶宮主 柳氏 고흥  생몰년 미상 태조 7년(1398년) 정경옹주로 책봉[23]
화의옹주 김씨 和義翁主 金氏 미상 칠점선 七點仙[23]   ?   ~ 1428년 태조 7년(1398년) 화의옹주로 책봉[23]
  찬덕 주씨 贊德 周氏   ?   ~ 1436년
  궁인 김씨 宮人 金氏  생몰년 미상
무협아 巫俠兒[24] 기생 출신

왕자

군호 이름 생몰년도 생모 배우자 비고
1 진안대군 鎭安大君 방우 芳雨 1354년 - 1393년 신의왕후 한씨 삼한국대부인 충주 지씨 三韓國大夫人 忠州 池氏
2 정종대왕 定宗大王
영안대군 永安大君
방과 芳果 1357년 - 1419년     정안왕후 김씨 定安王后 金氏     제2대 국왕
3 익안대군 益安大君 방의 芳毅 1360년 - 1404년 삼한국대부인 동주 최씨 三韓國大夫人 東州 崔氏
4 회안대군 懷安大君 방간 芳幹 1364년 - 1421년 삼한국대부인 여흥 민씨 三韓國大夫人 驪興 閔氏
삼한국대부인 밀양 황씨 三韓國大夫人 密陽 黃氏
 금릉부부인 김포 금씨 金陵府夫人 金浦 琴氏
5 태종대왕 太宗大王
정안대군 靖安大君
방원 芳遠 1367년 - 1422년     원경왕후 민씨 元敬王后 閔氏 제3대 국왕
6 덕안대군 德安大君 방연 芳衍  생몰년 미상     군부인 여흥 민씨 驪興 閔氏[25]
7 무안대군 撫安大君 방번 芳蕃 1381년 - 1398년 신덕왕후 강씨  개성부부인 개성 왕씨 開城府夫人 開城 王氏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사망
8 의안대군 宜安大君
  폐세자 廢世子
방석 芳碩 1382년 - 1398년     폐세자빈 현빈 유씨 賢嬪 柳氏[26]
삼한국대부인 부유 심씨 三韓國大夫人 富有 沈氏

왕녀

작호 이름 생몰년도 생모 배우자 비고
1 경신공주 慶愼公主   ?   ~ 1426년 신의왕후 한씨 상당부원군 上黨府院君 이애 李薆
2 경선공주 慶善公主  생몰년 미상   청원군 靑原君 심종 沈悰
3 경순공주 慶順公主   ?   ~ 1407년 신덕왕후 강씨   흥안군 興安君 이제 李濟[27]
4 의령옹주 義寧翁主   ?   ~ 1466년  찬덕 주씨   계천위 啓川尉 이등 李䔲
5 숙신옹주 淑愼翁主 며치 旀致[28]   ?   ~ 1453년 화의옹주 김씨   당성위 唐城尉 홍해 洪海


대중 문화속에 나타난 태조

드라마

연도 방송사 제목 배우
1967년 TBC 이성계 김성원
1976년 MBC 예성강 이대근
1983년 KBS 개국 임동진
1983년 MBC 추동궁 마마 김무생
1996년~1998년 KBS 용의 눈물 김무생
2005년~2006년 MBC 신돈 이진우
2012년 SBS 신의 오재무
2012년~2013년 SBS 대풍수 지진희
2014년 KBS 정도전 유동근
2014년~2015년 JTBC 하녀들 이도경
2015년 SBS 육룡이 나르샤 천호진
2016년 KBS 장영실 김기현
2019년 JTBC 나의 나라 김영철

영화

연도 제목 배우
1965년 태조 이성계 신영균
2014년 해적 이대연
2015년 순수의 시대 손병호
2016년 봉이 김선달 임종윤

외모

즉위 초기의 태조 퇴위 후 노년의 태조

태조 이성계는 조선 왕조의 개창자로서 조선 왕조가 존속하던 기간 내내 존숭과 추앙의 대상이었다. 태조의 모습을 그린 진영(眞影)은 다른 국왕들의 어진이 한곳에 봉안되었던 것과 달리, 고향인 함경도 영흥의 준원전(濬源殿) 및 전주의 경기전(慶基殿), 경주의 집경전(集慶殿), 개성의 목청전(穆淸殿) 등에 분산되어 소장되었다. 1832년(순조 32년) 도둑이 들어 어진이 훼손되어 여러 개의 모사본이 그려졌는데 1872년(고종 10년) 제작된 전주 경기전에 남은 것만이 전해져왔다. 그후 2006년 5월, 모사본 초상화가 발견되었는데 1832년작으로 영흥 준원전에 봉안한 모사본 초상화이다.[29] 남아 있는 어진을 보면 태조는 검은 수염에 귀가 크고 광대뼈가 도드라진 모습을 하고 있다.

기타

태조 이성계에 대한 설화는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와 관련한 설화는 『조선왕조실록』과 『대동야승』·『동사강목』·『연려실기술』·『성호사설』·『용비어천가』 등의 자료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왕씨 몰살

왕건이 세운 고려는 1392년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혁명세력에 의해 멸망하였는데, 이때부터 왕씨들에게 대대적인 수난이 시작되었다. 이성계는 당초 고려조의 왕씨의 후예에 대해 구세력의 유화(宥和)하는 뜻에서도 비교적 온건책을 썼으나 왕손인 왕씨가 한 사람이라도 살아 있다면 고려왕조의 복위를 기도할 수 있으므로 후환을 없애려고 했던 개국공신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왕씨 일족을 몰살시켰다. 왕씨들이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단편적으로만 찾아 볼 수 있다.

남효온의 한문 수필집인 《추강냉화(秋江冷話)》 별지에도 "조선조 태조 3년 갑술(1394년) 여름에 모든 왕씨를 바다 가운데 잠궈 죽이고 밖으로 명령하여 크게 왕씨의 남은 겨레를 찾아서 다 죽이다"라고 한 문장으로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살아 남은 왕씨도 물론 있었다.[30] 전국에 방이 나붙었으나 은둔하여 보지 못한 사람이 있고, 조선 조정의 왕씨 멸족계획을 눈치 채고 피신한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살아 남은 왕씨들은 이때부터 변성명(變姓名)을 하며 근근이 목숨을 부지했다. 이때 왕씨들이 변성명한 이야기는 '일토초가자(一土草家者)가 왕이 된다'는 기자조선시대의 고사(古事)와 중첩된다. 전씨(田, 全), 옥씨(玉), 차씨(車), 신씨(申) 등으로 '임금 왕(王)'자를 숨기거나 아예 다른 성씨를 사용하며 살아 남았다고 한다.[31] 태종 시대에 이르러 왕씨 멸족령은 해제되었다.[32]

회룡사 전설

1401년(태종 1년) 함흥에 은거한 태조를 모시고자 태종무학대사를 시켜 태조를 회유하여 양주까지 내려오게 했다. 이때 태종은 아버지를 뵙고자 찾아갔지만 태조는 만나주지 않았는데, 이때 태조와 태종이 머물던 곳을 회룡(回龍)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한다.

다른 전설에 의하면 1398년(태조 7년) 태조가 함흥에서 한양의 궁성으로 되돌아오던 길에 왕사인 무학대사를 방문했는데, 무학대사1394년, 정도전에게 미움을 받아 이곳 토굴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중 태조의 방문을 받았던 것이다. 태조는 여기서 며칠을 머물렀고, 이에 절을 짓고는 임금이 환궁한다는 뜻으로 그 이름을 회룡(回龍)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후자의 전설은 후일 1881년(고종 18년) 구한 말의 승려 우송(友松)이 쓴 '회룡사중창기'(回龍寺重倉記)에도 실려 있다.

성계탕 설화

돼지고기와 관련해서 경기도 개성 지역에는 돼지고기를 가리켜 성계라고 부르는 전설이 있다. 태조가 직접 지시한 것의 여부는 불확실하나 고려 멸망 후 수많은 고려의 왕족들이 개성강화도 앞바다에서 실족사와 익사 등으로 살해당했다. 그리하여 고려 말부터 개성 사람들은 이성계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개성 왕씨와 고려의 절신들을 무수히 죽였으며 수도 역시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겼다. 개성 사람과 평안도 사람들은 '위화도 회군'으로 억울하게 죽은 최영 장군을 기리기 위해 제사를 지냈는데, 이때부터 최영 장군은 무속의 신이 된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최영 장군 제사 때는 집돼지 혹은 멧돼지를 통으로 삶아서 제물로 바쳤다. 이때 제물로 바쳐진 통 돼지를 '성계육'이라 했는데 제사가 끝나고 음복을 할 때 통 돼지를 칼로 도려냈다. 또한 개성과 평안도 지역 전설에는 돼지고기를 썰어 국을 끓여 먹었는데 이때의 돼지탕을 돼지탕이라 부르지 않고 '성계탕'이라 불렀다. 이는 바로 이성계가 을해년생(乙亥年生) 돼지띠였기 때문이다.

이연계와 이원계

그의 이복 형 이원계조선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부정적이었고, 고려에 충성을 바칠 것을 애써 설득하기도 하였으나 끝내 그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했다. 이원계1388년 죽으면서 아들들에게 자신과는 다르니 숙부를 따를 것을 유언하며 죽었다. 그의 6촌 형 대흥군(大興君) 이연계(李連桂)는 고려말기에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과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했다. 이연계 역시 사람을 보내 그의 새 왕조 수립을 만류하였으나, 조선 태조는 듣지 않았다. 실망한 이연계는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으로 낙향하였고, 이후 이연계의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여 대흥 이씨로 분관하였다.[33]

최영과의 비교

이성계는 당시 신흥 무인의 대표이자 신진사대부의 일원이었다. 이성계의 조상은 본래 전주에서 살다가 강원도를 거쳐 함경도 지방으로 옮겨가 그 지역의 유력자로 성장했다. 원나라가 그 자리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면서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원나라의 다루가치를 지냈다. 그러나 공민왕쌍성총관부를 공격 할 때 이에 동조, 왕의 신임을 얻었다. 그리고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출정하여 여진족 토벌과 고려군을 지원함으로써 이성계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최영은 권문세족의 후예였다. 이성계와 비교되던 최영은 유서깊은 가문 출신으로 그 딸은 우왕의 왕비이다. 이성계가 신흥 무인세력의 대표라면 최영은 구세력의 대표라고 할 수 있었다. 또한 요동정벌 실패 후 최영의 최후가 너무도 당당해서 뭇 사람들이 감동한 나머지 그의 시체가 버려진 곳을 지나는 사람마다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최영의 의연한 죽음은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와 좋은 대조를 이루며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9]

함흥차사

태종은 자주 차사(差使)를 함흥으로 보내어 아버지와 아들 간의 불화를 풀고 태조를 환궁시켜 옥새를 얻고자 하였으나, 태조는 차사로 오는 이들을 보는 족족 활을 쏘아 맞추어 죽였고, 그로 말미암아 보낸 사람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의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같이 보기

참고

각주

  1. 《太宗實錄》《태종실록》 15권
  2. 《太祖實錄》《태조실록》 1권
  3. 《太祖實錄》《태조실록》 15권
  4. 조선왕조실록》〈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총서〉첫 번째 기사 "태조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의 성(姓)은 이씨(李氏), 휘(諱)는 단(旦), 자(字)는 군진(君晉)이다."
  5. 조선왕조실록 고종 36년 12월 23일(양력) 첫 번째기사[하례를 받고 사령을 반포하다.]
  6.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7. 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153페이지
  8. 당시 중국이 원나라와 명나라 교체기에 있어 고려에 친원파와 친명파 사이의 대립이 확대되었다. 이에 고려에서는 우왕을 비롯한 구신들이 요동 정벌을 논하였는데 이는 진정 요동을 고려 영토로 복속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전쟁을 명목으로 반대세력을 억압하고 정국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바꾸기 위한 정치적 행위에 가까웠다. 또한 당시 원이 몰락하고 명이 중국대륙의 강자로 부상하던 시점에서 이는 국제정세를 거스르는 도발적 행위였으며 당시 전란으로 피폐해진 고려의 현실상 대규모 원정을 단행하는 것은 무리였기에 이성계를 비롯한 여러 신료들은 탐탁지 않게 여겼다.
  9. 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154페이지
  10. 태조실록 (1413) 1권, 태조 1년 7월 17일 병신 1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1년〉7월 17일, 태조가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하였다.
  11. 태조실록 (1413) 1권, 태조 1년 7월 18일 정유 1번째기사
  12. 태조실록 (1413) 3권, 태조 2년 2월 15일 경인 1번째기사
  13. 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155페이지
  14. 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160페이지
  15. 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161페이지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chung161"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16. 일설에 의하면, 그가 고려의 왕족 왕씨를 가혹하게 몰살시킨 후 악몽에 시달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태조는 고려 왕족들에게 살기 좋은 섬으로 보내 살게 해준다는 구실로 왕씨들을 배에 태운 다음 바다 한가운데서 배 밑바닥에 구멍을 뚫어 모두 물귀신으로 만들었는데, 그날 밤 고려 태조 왕건이 꿈에 나타나 보복을 선언했다는 것이다.
  17. 박시백,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휴머니스트, 2005) 2권 2장
  18. 태조실록 (1413) 6권, 태조 3년 10월 25일 신묘 1번째기사
  19. 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162페이지
  20. 태조실록》 1권, 총서 59번째기사
  21. 태종실록》 16권, 태종 8년(1408년 명 영락(永樂) 6년) 10월 6일 경진 7번째기사
    의안대군 이화의 졸기
  22.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 4월 28일 정유 3번째기사
    정윤(正尹) 영(英)이 졸(卒)하니, 3일 동안 조회와 저자[市]를 정지하였다. 영(英)은 임금의 서제(庶弟)이다. 여러 신하들이 모여서 조문하였다.
  23. 태조실록》 13권, 태조 7년(1398년 명 홍무(洪武) 31년) 1월 7일 을묘 1번째기사
    손흥종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빈 유씨를 정경 옹주로, 김씨를 화의 옹주로 삼다
  24. 정종실록 5권, 정종 2년 8월 21일 계축 3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ba_10208021_003
  25. 원경왕후의 여동생
  26.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1393년 명 홍무(洪武) 26년) 6월 19일 계사 1번째기사
    내시 이만을 죽이고, 세자의 현빈 유씨를 내치다
  27.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사망
  28. 《선원록》
  29. 태조 이성계는 광대뼈 도드라진 무골상 한겨레 2006년 03월 13일자
  30. 추강냉화(秋江冷話ㆍ남효온의 한문 수필집)
  31. 개성 왕씨,고려조 500년 간 왕족으로 군림 충청타임스
  32. "금후로는 왕씨의 후손이 혹은 스스로 나타나거나, 혹은 남에게 고발을 당하는 자는 아울러 자원(自願)하여 거처(居處)하는 것을 들어주어서 그 삶을 평안하게 하라."(今後王氏之裔, 或自現, 或爲人見告者, 竝聽自願居處, 以安其生.) 태종실록 26권, 태종 13년 11월 26일 임인 3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311026_003
  33. 시조 이연계, 태조 이성계와 6촌지간 디트뉴스

참고 문헌

외부 링크

전임
최영
고려의 수문하시중
1388년 ~ 1390년
후임
이성계
정몽주
전임
이성계
고려의 수문하시중
(정몽주와 공동)
1390년 ~ 1392년 7월
후임
(조선 건국)
조선 영의정 이서
전임
고려 공양왕
권지고려국사
1392년 ~ 1398년
후임
이방과
전임
공양왕
명목상의
고려의 군주
1392년 ~ 1393년
후임
(국호를 조선으로 고쳐 왕국 멸망)
전임
공양왕
한반도의 국가 원수
1392년 ~ 1393년
후임
정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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