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트리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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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몬트리올(영어: Montreal /ˌmʌntɹiˈɒːl/듣기 ) 또는 몽레알(프랑스어: Montréal /mɔ̃ʀeal/듣기 , 퀘벡 프랑스어: /mɒ̃ɾeal/)은 캐나다에서 토론토에 이어 두번째로 큰 도시이다. 인구는 2001년 기준으로 180만명이며, 부근 대도시권까지 치면 360만명이다.

프랑스어를 쓰는 도시 중에서는 파리에 이어 두번째로 큰 도시이다. 몬트리올이 북미의 파리라고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영어 사용자도 소수이지만 꽤 많으며 두 가지 언어를 모두 사용하는 사람들도 점점 늘고 있다.

퀘벡 주의 주도인 퀘벡 시에서 남서쪽으로 250km 떨어져 있으며, 수도인 오타와의 동쪽 200km에 자리잡고 있다.

도시 이름은 프랑스어로 "왕의 산"(Mont Réal)에서 유래했으며, 도심에 위치한 산의 이름과 같다. 세인트로렌스 강오타와 강이 합쳐지는 지점에 있는 몬트리올 섬에 자리하고 있다. 시는 총 74개의 섬이 있으며, 도시 중앙부, 몬트리올 섬의 몽루아얄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편집] 몬트리올의 발전 과정 (Histoire de Montréal)

호켈라가(Hochelaga)에서 모피무역까지

1535년 10월 Jacques Cartier의 방문을 통해 섬 위의 Saint-Laurent 지방의 이로쿼이족(Iroquois[1])의 호켈라가 마을이 발견되었다. 이 마을은 « Mons realis » (라틴어로 왕의 산, Mont royal)이란 이름을 받았다. 20세기에 고고학자들은 현대로부터 3000~4000년 전의 인간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물을 발견했다. 그러나 (약 70년 뒤, 프랑스 탐험가) Samuel de Champlain이 퀘벡 도시를 세운 시기인 1608년 7월 3일에는 Hochelaga 마을의 흔적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고 (이는 부족간 전쟁, 유럽 전염병 그리고 이주 같은 이유로 추측된다.) 그들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1615년 Samuel de Champlain이 누벨 프랑스(Nouvelle-France, New France)의 인디언들에게 카톨릭교를 전파하는 비전을 갖고 Saint-Laurent 강 위에 새로운 도시를 세우는 생각을 했다.

프랑스인들은 1642년 5월 17일, 종교적 및 식민주의인 몬트리올 노트르담 형제회(Sociéte Notre-Dame de Montreal)의 Paul Chomeday de Maisonneueve가 데려온 몇 명의 수도사들이 Ville-Marie 마을을 세울 때에야 도시에 정착했다. 식민주의자들 가운데, 몬트리올의 공동설립자이며 북미 최초 병원 중 하나인 몬트리올의 Hôtel-Dieu 병원을 설립한 Jeanne Mance에 주목할 수 있다.

1680년, 몬트리올에는 493명이 거주하였다. 이들은: 파리 지역 출신 75명, 노르망디 출신 68명, 오니스 출신 54명, 앙쥬 출신 35명, 쁘와뚜 출신 34명, 망스 출신 28명, 생통쥐 출신 23명, 부르타뉴 출신 17명, 뻬르쉬 출신 16명, 앙굴렘 출신 13명, 샹빠뉴 출신 12명, 그리고 피카르디 출신 10명으로 구성되었다.

1701년 8월, 아메리카 북동쪽의 1,300명의 미주 인디언들이 몬트리올과 통합하여 (이에 따라 1200여명의 거주민 구성) 각각 다른 부족 및 프랑스인들과 평화 조약을 세우기 위해 왔다. ‘몬트리올의 위대한 평화(La Grande Paix de Montreal)’는 그 명칭의 모습처럼 누벨 프랑스의 모피 무역을 저지했던 적대감의 막을 내렸다. 이 시대의 도시에는 2000명이 넘는 주민이 있었다.

이 도시는 또한 모피 무역(La traite de fourrures, fur trade[2])에 중요한 중심지로 성장했다. 이는 또한 Louis Jolliet, La Salle, La Vérendrye와 Duluth같은 프랑스 탐험가의 내지 탐험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목재 성벽은 1725년부터 세워졌다. 1732년 9월 16일의 매우 강력한 지진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계속 번성하여 1740년 성벽을 재건축하였고 1760년 9월 8일, Lévis 백작이 Jeffrey Amherst경의 지휘 하의 영국군을 불러오기 까지 프랑스령으로 유지된다.

영국 식민지 지배와 산업화

1759년 불어권 도시 몬트리올은 거주민 5000명이 넘게 된다. 1760년 영국 침공 이후, 몬트리올은 프랑스 지방의 도시들과 상당히 유사했다. 인구의 중심과 대다수가 모두 프랑스인이었다. 하지만 프랑스계 사람들은 침략 하에 있었고, 부유 계층은 대다수 영국계였다. 프랑스어가 거의 보편적으로 쓰이는 언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문, 포스터와 프랑스 상인의 간판까지 영어로 쓰여졌다.

도시의 빠른 성장은 1824년 Lachine 운하의 건설로 항해선이 섬 남부의 ‘Lachine 급류’를 탈수 있게 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장인 수공업은 더 발전된 산업화에 조금씩 자리를 내어주었다. 19세기 후반부는 철도 산업의 빠른 성장과 더불어 철도 회사 Canadien Pacifique가 1880년도에 이 도시에 본부를 두면서 캐나다의 철도 중심 도시가 된다.

각종 전염병과 대형 화재를 겪는 동안, 광활한 오지의 중심지인 몬트리올에서 견고한 상업, 차후 산업 및 대다수 영국계 부르주아 계층이 성장한다. 한편, 1837-1838년 ‘애국자의 저항 (rébellion des Patriotes)’ 시기에 정치적인 위기를 겪는다. 1843년부터 The Gazette(영문 시사지)지의 반감적인 기사에 선동된 영국인 반역자들의 방화 이전의 1849년까지 캐나다 연합 국회(Parlement du Canada-Uni)가 이 도시에 있었다. 이 화재는 국립도서관까지 확산되어 누벨 프랑스의 수많은 서재를 파손시켰다.

동시대의 은행 및 다른 금융기관의 강력한 성장은 몬트리올이 20세기 초반부에 캐나다 금융의 중심지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퀘벡 연방주의자 간 확산된 생각은 20세기 후반부 몬트리올의 독립주의자(분리주의자)들의 힘의 종착점에서 캐나다의 대표적 경제적 대도시라는 명의를 실추하여 토론토에 유리하게 되기를 바랬다. (Paul-André Linteau, Montréal, Boréal, 1992, science politique). 한편, 퀘벡 주 독립주의자들에 따르면 이러한 전환의 원인은 Saint-Laurent의 수로(Voie maritime) 건설로 오대호 근방 온타리오 주에 폭발적 경제 성장 및 토론토의 급성장에 유리한 일부 연방 정치경제적 요소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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