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백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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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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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대한민국 | ||||||||||||||
생년월일 | 1942년 9월 20일 | (82세)||||||||||||||
출신지 | 일제강점기 울산 | ||||||||||||||
선수 정보 | |||||||||||||||
수비 위치 | 투수 | ||||||||||||||
경력 | |||||||||||||||
선수 경력 코치 경력 감독 경력 | |||||||||||||||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 |||||||||||||||
아시아선수권 | 1969, 1971 서울 | ||||||||||||||
메달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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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백만 (兪百萬, 1942년 9월 20일 ~ )은 전 KBO 리그의 야구 감독이자, 골프 선수인데 본래 이름은 유병언(兪秉彦)이었으나[1] 나중에 개명했다. 울산 출신으로 부산상고를 졸업하였으며 초등학교 6학년 때 부산으로 이사를 했고[2] 중학교 때 야구를 시작했는데 본인(유백만)의 고등학교(부산상고) 1년 선배인 김응룡은 피란 오기 전 축구선수였던 삼촌을 따라다니면서 축구를 했고[3] 중학교(부산 개성중) 초창기 때도 축구선수로 활동했다가[4] 나중에 야구선수로 전향했다. 고등학교 시절 투수와 3루수를 번갈아 맡았다가[5] 이후 상업은행 등 실업 팀에서 투수로 활약하였다. 실업 야구 시절 노히트 노런을 4차례나 기록하는 등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였는데 최초 실업 야구 노히트 노런과[6] 실업 야구 최초 100승[7] 투수이기도 했다. 30대 초반 때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바로 상업은행 팀의 감독으로[8] 취임하였다.
KBO 리그가 출범하자 백인천 감독 아래에서 MBC 청룡의 창단 코치로 부임했다. 1983년 4월, 백인천이 간통 혐의에 따른 구속으로 MBC 청룡에서 해임되었을 때 감독 대행을 맡았다. 동년 5월 김동엽이 감독으로 부임하자 야구 철학이 다르다는 이유로 같은 해 6월 9일 팀을 떠났다가[9] 27일부터 삼성 라이온즈의 코치로 이적했으며[10] 1985년 1군-2군을 별도로 분리함에 따라 2군 투수코치로 자리를 옮겼다[11]. 한편, 삼성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유백만 투수코치가 1985년 1군-2군을 별도로 분리함에 따라 2군 투수코치로 자리를 옮겨[12] 정동진 수석코치가 투수코치까지 겸임했으며 이 같은 부담감을 덜기 위해 원년 개막전 선발투수 황규봉을 1986년 시즌 뒤 투수코치로[13] 승격시켰다. 하지만, 삼성은 황규봉의 코치 승격[14], 김일융의 일본 복귀[15], 성준의 방위복무[16] 때문에 투수진이 부실해져 1987년 한국시리즈에서 4패로 준우승에 머물렀고 이에 장명부 전 빙그레 투수를 1988년 2월 16일부터 2군 투수코치(1년 전속계약)로[17] 영입했다. 아울러, 김동엽이 1983년 한국시리즈의 부진으로 물러났다가 1986년 다시 MBC 청룡 감독으로 복귀했을 때 유백만도 청룡으로 복귀하여 코치직에 취임했다. 이후 김동엽이 1987년 성적 부진으로 다시 사임하자, 유백만이 감독 대행을 맡았고 1988년에는 정식 감독으로 승격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부산상고 후배인 강병철을 타격코치로 영입할 예정이었으나[18] 빙그레행 열차를 타는 바람에 좌절됐다. 아마추어식의 강압적인 지도가 대세였던 당시 선수들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등의 시대를 앞선 면모를 보였으나 세이브전문투수 김용수를 개막전에 선발등판시켰다가 0-3으로 무너진 후[19] 마운드 전체가 앞뒤를 가릴 수 없을 만큼 흔들려 시즌개막 5연패를 당하는 등 전기리그 최하위, 후기리그 5위에 그쳐 성적 부진으로 1년 만에 경질되었는데 에이스 김건우의 부상결장으로 투수력이 붕괴된 데다[20] 이광은의 부상으로 인한 부진, 2루수와 포수 자리에서 취약점을 드러낸 게 컸다. 하지만 그의 지도 스타일에 비해 극과 극으로 강압적이었던 후임자 배성서가 감독을 맡은 해에는 선수들이 잘 적응하지 못해 전지훈련 때 투수 정삼흠이 배성서 감독에게 항명한 사건이 있을 정도로 대조적이었다. 이후 야구계를 떠났다가 1990년 삼성 라이온즈 코치로 프로야구 복귀를 했는데[21] 같은 해 골프계에 입문하여 1999년에는 한국프로골프 시니어 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골퍼로서 활약했으며 1993년 시즌 뒤 삼성과의 계약이 종료된 후 같은 팀에서 인스트럭터(94~95년)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1989년 시즌 후 고향 팀인 롯데 자이언츠 감독 물망에[22] 한때 거론됐다. 한편, 삼성은 원년 선수 출신의 코칭스태프가 경험 부족 때문에 1989년 부임한 정동진 감독을 보필하기 어렵다고 구단 측에서 판단하여[23] 본인(유백만)을 수석코치로 영입했으며 이 과정에서 원년멤버이자 1987년 선수에서 승격한 황규봉 1군 투수코치가 일본 야구 연수를 위해[24] 삼성에서 재계약을 포기했고 그 이후 프로야구계와 작별했다. 그를 거친 골프 선수 중 대표적인 선수가 배상문이다[25]. 이와 함께, 상업은행 농구선수 출신 박신자가 본인(유백만)과 마찬가지로 14번을 달았으며[26] 유백만이 한국화장품 감독을 맡았을 때 당시 투수이자 본인(유백만)의 삼성 코치(1차) 시절 선수였던 황규봉은 대학(고려대) 1학년 때인 1973년 필리핀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로 발탁됐지만 대회 도중 숙소에서 불이 나 3층에서 뛰어내리다 부상을 입은 뒤 한동안 성인 국가대표팀을 떠났다가 1976년 콜롬비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통해 성인 국가대표팀에 복귀했으나[27] 1977년 8월 고소공포증으로 쓰러져 또다시 국가대표팀을 떠났다가[28] 1979년 9월 다시 마운드에 섰고 1980년 8월 세계야구선수권대회부터 성인 국가대표팀에 복귀했으며[29] 1976년 콜롬비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와 1980년 이후 성인 국가대표팀에서 뛸 당시에는 자신의 고유번호였던 1번을 이해창이 달고 있었던 터라[30] 유백만의 등번호인 14번을 달기도 했다.
출신학교
[편집]각주
[편집]- ↑ 유백만 (1981년 4월 5일). “아내의疑心(의심)산「29962」숫자”. 조선일보. 2020년 10월 19일에 확인함.
- ↑ 신수건 (2001년 6월 19일). “인물로 보는 부산야구 <10> 유백만(상)”. 국제신문. 2019년 10월 18일에 확인함.
- ↑ 박동근 (1996년 10월 25일). “「불패의 승부사」 김응룡 감독(국민 초대석)”. 국민일보. 2020년 7월 24일에 확인함.
- ↑ 김창근 (2000년 8월 23일). “신문선의 도발! 이사람/올림픽 야구 드림팀 김응용 감독”. 한겨레신문. 2020년 7월 24일에 확인함.[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박병헌 기획위원 (2006년 9월 17일). “"에이지 슈터가 남은 인생의 목표””. 세계일보. 2019년 10월 22일에 확인함.
- ↑ “상은(商銀),홍군(紅軍)서 5연승(連勝)”. 조선일보. 1963년 11월 13일. 2020년 9월 15일에 확인함.
- ↑ “첫百勝投手(백승투수)—兪百萬(유백만)”. 동아일보. 1969년 7월 7일. 2020년 9월 15일에 확인함.
- ↑ “大邱商高(대구상고)는白大三(백대삼)씨가 商銀野球(상은야구)감독에兪百萬(유백만)”. 동아일보. 1974년 3월 2일. 2020년 9월 15일에 확인함.
- ↑ “청룡팀 감독대행 유백만씨 사표내”. 중앙일보. 1983년 6월 10일. 2020년 7월 26일에 확인함.
- ↑ “삼성의 투수코치로 유백만 전청룡코치”. 중앙일보. 1983년 6월 28일. 2020년 7월 26일에 확인함.
- ↑ “「타석」에 들어선'85프로야구 國內外(국내외)서 힘찬「스윙」”. 동아일보. 1985년 2월 13일. 2020년 7월 26일에 확인함.
- ↑ “「타석」에 들어선'85프로야구 國內外(국내외)서 힘찬「스윙」”. 동아일보. 1985년 2월 13일. 2020년 7월 26일에 확인함.
- ↑ “삼성 황규봉, 코치로”. 중앙일보. 1986년 11월 27일. 2020년 7월 26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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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종구 (1987년 2월 27일). “프로야구 '87전훈을가다<2>-저공마운드 삼성 "야망의 계절"선언”. 중앙일보. 2020년 7월 26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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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張明夫(장명부) 삼성2군 투수코치로”. 동아일보. 1988년 2월 17일. 2020년 7월 26일에 확인함.
- ↑ 신임호 (1987년 11월 17일). “프로야구 코너”. 매일경제. 2020년 10월 1일에 확인함.
- ↑ “프로야구 張(장)호연 노히트 노런”. 조선일보. 1988년 4월 3일. 2020년 11월 4일에 확인함.
- ↑ “MBC球團(구단)사장 선수가정 방문 팀분위기 쇄신 노력”. 동아일보. 1988년 5월 26일. 2020년 11월 4일에 확인함.
- ↑ “兪(유)백만·禹(우)용득 코치로 三星(삼성) 프로야구단”. 매일경제. 1989년 12월 5일. 2018년 7월 13일에 확인함.
- ↑ “青龍(청룡)-巨人(거인) 名(명)감독을 찾습니다”. 동아일보. 1989년 10월 20일. 2019년 10월 18일에 확인함.
- ↑ 권오중 (1989년 11월 14일). “90년대 승리 향한 포석 끝냈다... 8개 구단 지휘부 개편 거의 완료”. 중앙일보. 2020년 8월 17일에 확인함.
- ↑ “스포츠단신”. 동아일보. 1989년 11월 22일. 2020년 8월 17일에 확인함.
- ↑ 이강래 (2017년 10월 19일). “배상문 키운 야구인 유백만 감독 "상문이 곧 잘 칠 겁니다!"”. 헤럴드경제. 2018년 7월 13일에 확인함.
- ↑ 김학순 (1983년 3월 12일). “선수들의 간판 백넘버 그由來(유래)와 얽힌 事緣(사연)들”. 경향신문. 2020년 8월 2일에 확인함.
- ↑ “세계 野球選手權(야구선수권)대회 出戰(출전) 韓國(한국)선수단 向發(향발)”. 경향신문. 1976년 11월 26일. 2020년 8월 2일에 확인함.
- ↑ 芳(방) (1980년 4월 1일). “"야구에의 매력·自信(자신)잃어"黃圭奉(황규봉) 돌연 은퇴고집”. 경향신문. 2020년 8월 2일에 확인함.
- ↑ “8월 東京(동경) 세계野球(야구)에 출전 崔東原(최동원)등 20명 선발”. 경향신문. 1980년 7월 15일. 2020년 8월 2일에 확인함.
- ↑ 김건일 (2018년 1월 18일). “"에이스 될래요" 투수들의 '워너비' 등번호 1번”. 스포티비뉴스. 2020년 8월 2일에 확인함.
전임 백인천 |
제2대 MBC 청룡 (감독 대행) 1983.4-1983.5 |
후임 김동엽 |
전임 김동엽 |
제6대 MBC 청룡 감독 1987.7-1988.12 |
후임 배성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