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백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유백만
기본 정보
국적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생년월일 1942년 9월 20일(1942-09-20) (77세)
출신지 일제 강점기의 기 일제 강점기 울산
선수 정보
수비 위치 투수
경력

선수 경력

코치 경력

감독 경력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아시아선수권 1969, 1971 서울
메달 기록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의 선수
남자 야구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1971 서울 야구

유백만 (兪百萬, 1942년 9월 20일 ~ )은 전 KBO 리그의 야구 감독이자, 골프 선수이다.

울산 출신으로 부산상고를 졸업하였는데 초등학교 6학년 때 부산으로 이사를 했고[1] 중학교 때 야구를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 투수와 3루수를 번갈아 맡았다가[2] 이후 상업은행 등 실업 팀에서 투수로 활약하였다. 실업 야구 시절 노히트 노런을 4차례나 기록하는 등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였다. 30세 때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바로 상업은행 팀의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KBO 리그가 출범하자 백인천 감독 아래에서 MBC 청룡의 창단 코치로 부임했다. 1983년 4월, 백인천이 간통 혐의에 따른 구속으로 MBC 청룡에서 해임되었을 때 감독 대행을 맡았다. 동년 5월 김동엽이 감독으로 부임하자 야구 철학이 다르다는 이유로 팀을 떠나 삼성 라이온즈의 코치로 이적했다. 김동엽1983년 한국시리즈의 부진으로 물러났다가 1986년 다시 MBC 청룡 감독으로 복귀했을 때, 유백만도 청룡으로 복귀하여 코치직에 취임했다. 이후 김동엽1987년 성적 부진으로 다시 사임하자, 유백만이 감독 대행을 맡았고 1988년에는 정식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아마추어식의 강압적인 지도가 대세였던 당시 선수들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등의 시대를 앞선 면모를 보였으나, 성적 부진으로 1년 만에 경질되었다. 하지만 그의 지도 스타일에 비해 극과 극으로 강압적이었던 후임자 배성서가 감독을 맡은 해에는 선수들이 잘 적응하지 못해 전지훈련 때 투수 정삼흠배성서 감독에게 항명한 사건이 있을 정도로 대조적이었다. 이후 야구계를 떠났다가 1990년 삼성 라이온즈 코치로 프로야구 복귀를 했는데[3] 같은 해 골프계에 입문하여 1999년에는 한국프로골프 시니어 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골퍼로서 활약했으며 1993년 시즌 뒤 삼성과의 계약이 종료된 후 같은 팀에서 인스트럭터(94~95년)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1989년 시즌 후 고향 팀인 롯데 자이언츠 감독 물망에[4] 한때 거론됐다. 그를 거친 골프 선수 중 대표적인 선수가 배상문이다[5].

출신학교[편집]

각주[편집]

  1. 신수건 (2001년 6월 19일). “인물로 보는 부산야구 <10> 유백만(상)”. 국제신문. 2019년 10월 18일에 확인함. 
  2. 박병헌 기획위원 (2006년 9월 17일). "에이지 슈터가 남은 인생의 목표””. 세계일보. 2019년 10월 22일에 확인함. 
  3. “兪(유)백만·禹(우)용득 코치로 三星(삼성) 프로야구단”. 매일경제. 1989년 12월 5일. 2018년 7월 13일에 확인함. 
  4. “青龍(청룡)-巨人(거인) 名(명)감독을 찾습니다”. 동아일보. 1989년 10월 20일. 2019년 10월 18일에 확인함. 
  5. 이강래 (2017년 10월 19일). “배상문 키운 야구인 유백만 감독 "상문이 곧 잘 칠 겁니다!". 헤럴드경제. 2018년 7월 13일에 확인함. 
전임
백인천
제2대 MBC 청룡 (감독 대행)
1983.4-1983.5
후임
김동엽
전임
김동엽
제6대 MBC 청룡 감독
1987.7-1988.12
후임
배성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