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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삼성 라이온즈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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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삼성 라이온즈 시즌삼성 라이온즈KBO 리그에 참가한 7번째 시즌이다. 박영길 감독이 팀을 이끈 마지막 시즌으로, 장효조가 3년째 주장을 맡았다. 팀은 일본 규슈 노베오카에서 전지훈련을 실시했는데[1] 초봄과 비슷한 쌀쌀한 날씨여서 도리어 부상선수가 속출하여 계획보다 빨리 귀국했다. 그 결과 5월 12일 롯데전에서 김시진이 타구에 오른손 부상을 당한 것으로 시작으로[2] 류중일[3] 이만수[4] 허규옥[5] 장효조 이종두 등의 연쇄 부상으로 이어져 전기리그 5위에 그쳤으나 후기리그 2위를 기록한 덕에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 롯데 자이언츠보다도 통합 승률이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그러나, 방위병 2루수 김성래가 시즌 막판 당한 무릎부상, 잠수함 투수 김훈기가 허리고장으로 플레이오프에 불참한 탓인지[6] 빙그레 이글스를 상대로 3전 3패를 기록해 탈락했으며 이 과정에서 박영길 감독이 플레이오프 패퇴 후 가진 기자회견 도중 성적부진을 선수 탓으로 돌리는 발언을 했고 이 말은 선수들의 집단항명 사태를 불렀으며 결국 박영길 감독은 임기를 1년 남겨두고[7] 도중하차했다. 한편, 구단이 박영길 감독의 후임으로 정동진 수석코치를 낙점했으나 경험 부족 때문에 고사했고 이에 정동진 코치가 백인천 전 MBC 감독을 적극 추천했지만[8] 구단 측의 반대로 무산됐으며 난항 끝에 정동진 코치가 감독으로 승격했다. 아울러, 전년도에는 1984년부터 김시진과 원투펀치를 이룬 좌완 김일융의 일본 복귀 - 1986년 13선발승을 기록한 좌완 성준의 방위복무 - 원년 개막전 선발투수 황규봉의 코치 승격[9]으로 마운드가 부실해지자 김시진이 그 해(1987년) 팀내 많은 이닝(193.1이닝)을 소화했으나 해당 년도(1988년) 9선발승으로 추락했는데 5월 12일 대구 롯데전에서 유두열의 타구에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맞아 중상을 당해 한동안 결장했고[10] 전년도 10선발승을 기록한 잠수함 투수 진동한이 방위복무 때문에 2승(모두 선발)으로 추락했으며[11] 또다른 잠수함 투수 김훈기가 허리고장으로 플레이오프에 불참해[12] 투수력에서 한계를 드러냈는데 그나마 김시진 외엔[13] 믿을 만한 정통파 투수가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삼성은 1987년 해태를 떠날 때부터 삼성 이적을 희망해 온 강만식 영입을 추진했으나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강만식1989년 5월 13일이 되어서야 삼성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는데 당시 삼성은 김시진과 맞바꿔 영입시킨 최동원이 트레이드 거부 의사를 밝힌 채 연봉 재계약을 차일피일 미루면서[14] 훈련까지 불참하는 행보를 보이다 구단의 끈질긴 설득을 통하여 이 해 6월 23일 연봉 재계약을 마쳤지만 1승 2패에 그쳐 투수 확보에 비상이 걸린 상태였다. 하지만, 강만식은 삼성 이적 후 1989년 5경기 1패에 그쳐 이 해를 끝으로 은퇴했으며 삼성은 김시진1988년을 끝으로 팀을 떠난 뒤 1993년 김상엽(11선발승) 이전까지 유명선(1989년 12선발승)을 빼면 우완 정통파 투수가 두자릿수 선발승을 기록하지 못했고 그나마 삼성은 또다른 우완 정통파 투수이자 1985년 14선발승으로 커리어 유일 두자릿수 선발승을 기록한 원년 개막전 선발투수 황규봉1987년 코치로 승격했는데[15] 사생활 문제 때문에[16] 구단으로부터 미운털이 찍혔다. 이에 편송언 당시 구단 사장과 1988년 말 3년 계약으로 취임한 정동진 감독이 황규봉 코치의 2군행을 놓고 마찰을 빚었으며[17] 이 과정에서 1986년 11월 26일부터 3년 계약을 맺었던[18] 황규봉 코치가 1989년 시즌 후 전속계약 종료와 함께 외국 유학을 떠나면서 구단과 작별했고[19] 그 이후 프로야구계와 인연을 끊었으며 정동진 감독은 앞서 본 것처럼 사생활 문제로 물의를 일으킨 황규봉 1군 투수코치의 2군행을 요구한 편송언 사장과 마찰을 빚은 것 외에도[20] 1990년 한국시리즈의 패퇴 탓인지 계약기간을 1년 남겨둔 채 같은 해 시즌 후[21] 해임됐다.

선수단

[편집]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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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전종구 특파원 (1988년 2월 24일). “해외캠프서 막바지"지옥훈련". 중앙일보. 2022년 2월 13일에 확인함. 
  2. “부상惡夢(악몽) 주전 투수들"명예회복"선언”. 동아일보. 1988년 6월 15일. 2022년 2월 13일에 확인함. 
  3. 최성전 (1988년 4월 12일). “柳仲逸(유중일) 전기출장 어려울듯 팔꿈치 통증심해 수술키로”. 동아일보. 2022년 2월 13일에 확인함. 
  4. 최성전 (1988년 7월 15일). “李萬洙(이만수) 내일부터 본격출장”. 동아일보. 2022년 2월 13일에 확인함. 
  5. 박희송 특파원 (1988년 3월 2일). “88프로야구 5일 시범경기로 출발 해외 전지훈련 4개구단 귀국 채비 "약점 없앴다"우승장담”. 조선일보. 2022년 2월 13일에 확인함. 
  6. “프로야구 「한국시리즈」티킷을 잡아라”. 조선일보. 1988년 10월 7일. 2022년 2월 13일에 확인함. 
  7. 최영호 (1999년 3월 2일). “[삼성라이온즈 18년 . 3] 박영길 감독”. 영남일보. 2021년 6월 24일에 확인함. 
  8. 최영호 (1999년 3월 5일). “[삼성라이온즈18년 .4] 정동진감독”. 영남일보. 2021년 12월 15일에 확인함. 
  9. '87프로야구 絕對强者(절대강자)는 없다”. 동아일보. 1987년 3월 3일. 2022년 4월 12일에 확인함. 
  10. 이제훈 (1988년 6월 15일). “부상惡夢(악몽) 주전 투수들"명예회복"선언”. 동아일보. 2022년 4월 12일에 확인함. 
  11. 홍순강 (1988년 3월 29일). “프로야구 7개球團(구단) 저마다‘마운드非常(비상)'. 동아일보. 2022년 4월 12일에 확인함. 
  12. “프로야구 「한국시리즈」티킷을 잡아라”. 조선일보. 1988년 10월 7일. 2022년 4월 12일에 확인함. 
  13. 홍순강 (1988년 3월 29일). “프로야구 7개球團(구단) 저마다‘마운드非常(비상)'. 동아일보. 2022년 4월 12일에 확인함. 
  14. 정의길 (1989년 4월 1일). “방출시비 최동원 마운드 서나 못서나”. 한겨레신문. 2024년 7월 10일에 확인함. 
  15. '87프로야구 絕對强者(절대강자)는 없다”. 동아일보. 1987년 3월 3일. 2024년 7월 10일에 확인함. 
  16. 최영호 (1999년 3월 5일). “[삼성라이온즈18년 .4] 정동진감독”. 영남일보. 2024년 7월 10일에 확인함. 
  17. 최영호 (1999년 3월 5일). “[삼성라이온즈18년 .4] 정동진감독”. 영남일보. 2024년 7월 10일에 확인함. 
  18. “黃圭奉(황규봉) 투수코치 승격”. 동아일보. 1986년 11월 27일. 2024년 7월 10일에 확인함. 
  19. “스포츠단신”. 동아일보. 1989년 11월 22일. 2024년 7월 10일에 확인함. 
  20. 최영호 (1999년 3월 5일). “[삼성라이온즈18년 .4] 정동진감독”. 영남일보. 2024년 7월 10일에 확인함. 
  21. 최두성 (2011년 10월 3일). “[with 라이온즈 30년] (18) 옷 벗은 감독들”. 매일신문. 2024년 7월 10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