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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삼성 라이온즈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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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삼성 라이온즈 시즌삼성 라이온즈KBO 리그에 참가한 6번째 시즌이다. 박영길 감독이 팀을 이끈 첫 시즌이며, 팀은 타선의 맹활약으로 전기리그와 후기리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며 한국시리즈에 직행했다. 그러나 김일융의 일본 복귀, 성준의 방위복무, 황규봉의 코치 승격 등의 이유 탓인지 투수력이 붕괴되어[1] 한국시리즈에서 해태 타이거즈에게 4전 4패를 당하며 통합 준우승에 머물렀는데 그나마 김시진을 빼면 주력투수층이[2] 사이드암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삼성은 해태 원년멤버 강만식 영입을 희망했으나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강만식1989년 5월 13일이 되어서야 삼성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는데 당시 삼성은 김시진과 맞바꿔 영입시킨 최동원이 트레이드 거부 의사를 밝힌 채 연봉 재계약을 차일피일 미루면서[3] 훈련까지 불참하는 행보를 보이다 구단의 끈질긴 설득을 통하여 이 해 6월 23일 연봉 재계약을 마쳤지만 1승 2패에 그쳐 투수 확보에 비상이 걸린 상태였다. 하지만, 강만식은 삼성 이적 후 1989년 5경기 1패에 그쳐 이 해를 끝으로 은퇴했으며 삼성은 김시진1988년을 끝으로 팀을 떠난 뒤 1993년 김상엽(11선발승) 이전까지 유명선(1989년 12선발승)을 빼면 우완 정통파 투수가 두자릿수 선발승을 기록하지 못했고 그나마 삼성은 또다른 우완 정통파 투수이자 1985년 14선발승으로 커리어 유일 두자릿수 선발승을 기록한 원년 개막전 선발투수 황규봉1987년 코치로 승격했는데[4] 사생활 문제 때문에[5] 구단으로부터 미운털이 찍혔다. 이에 편송언 당시 구단 사장과 1988년 말 3년 계약으로 취임한 정동진 감독이 황규봉 코치의 2군행을 놓고 마찰을 빚었으며[6] 이 과정에서 1986년 11월 26일부터 3년 계약을 맺었던[7] 황규봉 코치가 1989년 시즌 후 전속계약 종료와 함께 외국 유학을 떠나면서 구단과 작별했고[8] 그 이후 프로야구계와 인연을 끊었으며 정동진 감독은 앞서 본 것처럼 사생활 문제로 물의를 일으킨 황규봉 1군 투수코치의 2군행을 요구한 편송언 사장과 마찰을 빚은 것 외에도[9] 1990년 한국시리즈의 패퇴 탓인지 계약기간을 1년 남겨둔 채 같은 해 시즌 후[10] 해임됐다.

타이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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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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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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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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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87프로야구 絶對强者(절대강자)는 없다”. 동아일보. 1987년 3월 3일. 2021년 6월 24일에 확인함. 
  2. 전종구 (1987년 3월 21일). “7개 구단 아킬레스건은 어디...”. 중앙일보. 2024년 7월 2일에 확인함. 
  3. 정의길 (1989년 4월 1일). “방출시비 최동원 마운드 서나 못서나”. 한겨레신문. 2024년 7월 10일에 확인함. 
  4. '87프로야구 絕對强者(절대강자)는 없다”. 동아일보. 1987년 3월 3일. 2024년 7월 10일에 확인함. 
  5. 최영호 (1999년 3월 5일). “[삼성라이온즈18년 .4] 정동진감독”. 영남일보. 2024년 7월 10일에 확인함. 
  6. 최영호 (1999년 3월 5일). “[삼성라이온즈18년 .4] 정동진감독”. 영남일보. 2024년 7월 10일에 확인함. 
  7. “黃圭奉(황규봉) 투수코치 승격”. 동아일보. 1986년 11월 27일. 2024년 7월 10일에 확인함. 
  8. “스포츠단신”. 동아일보. 1989년 11월 22일. 2024년 7월 10일에 확인함. 
  9. 최영호 (1999년 3월 5일). “[삼성라이온즈18년 .4] 정동진감독”. 영남일보. 2024년 7월 10일에 확인함. 
  10. 최두성 (2011년 10월 3일). “[with 라이온즈 30년] (18) 옷 벗은 감독들”. 매일신문. 2024년 7월 10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