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신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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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신공주
淑愼公主
조선 효종의 공주
신상정보
출생일 1634년
사망일 1645년 8월 2일 (음력)
부친 효종
모친 인선왕후 장씨
능묘 숙신공주묘(淑愼公主墓)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숙신공주(淑愼公主, 1634년[1] ~ 1645년 8월 2일)는 조선의 왕족으로 효종인선왕후의 장녀이다.

생애[편집]

출생[편집]

1634년(인조 12년), 인조의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효종)과 어머니 풍안부부인 장씨(인선왕후)의 장녀로 태어났다.

1637년(인조 15년), 아버지 봉림대군과 어머니 장씨가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끌려가게 되었는데[2], 당시 1살의 불과했던 동생 숙안공주가 청나라로 가지 않고 궁중에서 양육된 점을 미루어[3] 숙신공주 또한 숙안공주와 함께 궁중에서 양육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김상헌이 지은 〈숙신공주에 대한 만사〉 중 '깊은 궁궐에서 생장한 지 십이 년의 세월 동안 지존(인조)께서 예뻐하여 총애 유독 깊었었네' 라는 부분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사망[편집]

1645년(인조 23년) 8월 2일, 사망하였다.[4][5] 사망 당시 12살이었으며, 계례(笄禮)를 하지 못한 미성년자로서, 12세~15세 사이에 죽은 중상(中殤)이었다. 장례는 왕세자의 적녀인 군주(郡主)의 예에 따라 치르고, 상의 제반은 《경국대전》의 정2품의 예에 따라 행하였다.[5]

1646년(인조 24년),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은 딸을 잃은 슬픔을 시(詩)로 썼는데, 효종 또한 1년전에 죽은 숙신공주의 죽음을 떠올리며 인평대군을 위로하는 답시를 지었다.[6]

추증[편집]

1675년(숙종 1년) 숙종이 교지를 내려 숙신공주(淑愼公主)로 추증하였다.[7] 현재 묘역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 내 왕자 공주 묘역에 있다.

가족 관계[편집]

  • 조부 : 인조(仁祖, 1595~1649)
  • 조모 : 인열왕후 한씨(仁烈王后 韓氏, 1594~1635)
    • 아버지 : 효종(孝宗, 1619~1659)
  • 외조부 :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 1587∼1638)
  • 외조모 : 영가부부인 김씨(永嘉府夫人 金氏, ?~1654)

각주[편집]

  1. 《청음집(淸陰集) 권6, 김상헌(金尙憲) 지음
    군주(郡主)에 대한 만사

    깊은 궁궐에서 생장한 지 십이 년의 세월 동안
    지존께서 예뻐하여 총애 유독 깊었었네
    지혜로움 일찍부터 모두 칭송하였건만
    신의 이치 모를레라 수명 길지 못하였네
    슬픈 해로 노래 속에 살던 곳을 떠나가고
    패옥 소리 끊어져서 서쪽 무덤 파묻히네
    산 감돌고 물 멈추어 주위 둘러 있거니와
    땅 신령께 부탁노니 단단히 잘 지켜 주소서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6
  2.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1637년 명 숭정(崇禎) 10년) 2월 8일 (무인)
    구왕이 철군하면서 왕세자와 빈궁, 봉림대군과 부인을 데려가자 전송하다
  3. 돌아가신 할머니 숙안공주 가장(祖妣淑安公主家狀)》
    공주는 효종대왕의 첫째딸로,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자호란을 만나 험난한 순간에 겨우 온전할 수 있었습니다.

    효묘(孝廟, 효종)께서는 대군으로 심양(瀋陽)에 나가셨고, 공주는 부모와 헤어져 의지할 곳을 잃었습니다.

    인묘(인조)께서는 이를 가엾게 여기시어 궁중에서 거두어 기르셨습니다.

  4. 승정원일기》 92책 (탈초본 5책) 인조 23년(1645년 청 순치(順治) 2년) 8월 2일 (신사)
    전교하기를,

    “세자의 장녀가 병으로 죽었으니, 군주(郡主)의 예에 따라 해사(該司)로 하여금 염장(斂葬)하게 하라.”

    하였다.

  5. 인조실록》 46권, 인조 23년(1645년 청 순치(順治) 2년) 8월 2일 (신사)
    병으로 죽은 세자의 장녀를 염장하도록 하교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세자(효종)의 장녀(長女)가 병으로 죽었으니, 해사로 하여금 군주(群主)의 예에 따라 염장(斂葬)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예조가 아뢰기를,

    "군주를 염장하는 예(禮)를 근거할 만한 전례가 전혀 없으니, 치상(治喪)에 관한 모든 일을 《대전(大典)》에 기재된 정2품 관원 치상의 예에 따라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6. 《송계집(松溪集 권1, 시(詩), 인평대군(麟坪大君) 문집
    병술년(1646년) 7월 사랑하는 딸(愛女)을 잃었다. 세자(春宮, 효종)께서 시를 내려 화답하시고 마음을 위로해주셨다.


    효종 답시(御韻)


    지난해 나는 사랑하는 딸을 잃었는데, 올해 그대의 집 또한 사랑하는 아이를 잃었다.
    우리 양가(兩家)의 딸들은 비범한 아이들이건만, 지금 홀로 된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중략)

    이미 엎질러진 물은 되돌릴 수 없고, 이 가련한 이별은 또다시 일어나선 안될 것이다.

  7. “네이트 한국학 〈숙신공주 증직교지〉”. 2013년 4월 2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3월 2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