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유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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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和柔翁主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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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 | |
조선 영조의 옹주 | |
이름 | |
별호 | 화유귀주(和柔貴主) |
신상정보 | |
출생일 | 1740년 9월 29일 (음력) |
사망일 | 1777년 5월 21일 (음력) |
부친 | 영조 |
모친 | 귀인 조씨 |
배우자 |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 |
자녀 | 1남 1녀 황기옥(黃基玉), 황씨(黃氏) |
화유옹주(和柔翁主, 1740년 음력 9월 29일 ~ 1777년 음력 5월 21일)는 조선의 왕족으로, 영조의 10녀이며, 어머니는 귀인 조씨이다.
생애[편집]
1740년(영조 16년) 9월 29일, 영조와 숙원 조씨(淑媛 趙氏, 귀인 조씨)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1752년(영조 28년) 10월 5일, 호조참판(戶曹參判) 황자(黃梓)의 아들인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과의 혼인이 결정되었지만 그해 11월 화협옹주가 사망하자 영조는 화유옹주의 길례를 중지할것을 명하였다.[1]
1753년(영조 29년) 2월 27일, 황인점과 혼인하였고, 2년 후에 출궁하였다. 이후에도 영조는 여러차례 화유옹주의 저택에 친림하였다.
1777년(정조 1년) 5월 21일에 졸하였으며, 정조는 이에 관곽, 단주(鍛紬), 미두(米豆), 전포(錢布)를 부조하고 3년간 녹봉을 그대로 지급하라고 명하였다.[2] 또한 친히 화유옹주의 제문을 지어 위로하였다.
묘는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여월동 산 32번지에 있다. 1791년(정조 15년) 정조는 화유옹주의 아들 황기옥을 의성 현령(義城縣令)으로 봉했다.
가족 관계[편집]
- 부군 : 창성위 황인점 (昌城尉 黃仁點, 1732 ~ 1802)
- 장남 : 황기옥(黃基玉, 생몰년 미상)
- 장녀 : 황씨(黃氏, 생몰년 미상)
- 사위 : 참봉 김제만(金濟萬, 생몰년 미상)
각주[편집]
- ↑ 《영조실록》 78권, 영조 28년(1752년 청 건륭(乾隆) 17년) 11월 27일(갑신)
- ↑ 《정조실록》 3권, 정조 1년(1777년 청 건륭(乾隆) 42년) 5월 21일 (을유)
화유옹주의 졸기
화유 옹주(和柔翁主)가 졸(卒)하였다. 옹주는 영묘(英廟)의 귀인(貴人)인 조씨(趙氏)의 소출로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에게 하가(下嫁)하였다. 하교하기를,"선조(先朝)의 옹주 가운데 금달(禁闥, 궁중)을 출입한 사람은 단지 이 옹주하나 뿐이었는데 뜻밖에 상사(喪事)가 났으니, 나의 슬픈 마음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하고, 동원 비기(東園秘器)와 단주(鍛紬)·미두(米豆)·전포(錢布)로 상구(喪具)를 돕고 녹봉(祿俸)은 3년을 한정하여 그대로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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