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골과 진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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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골진골(聖骨—眞骨)은 신라시대의 신분제인 골품 제도(骨品制度)의 등급으로, 신라 사회의 최고 신분층이다. 신라 왕족인 성골(聖骨)은 경주 김씨 진흥왕의 장자계열이 진덕여왕 대에 끊어 지고, 진흥왕 차남 계열 후손인 태종무열왕과 532년 신라로 항복해 온 금관가야김해 김씨와 한반도 남부 통일 과정에 항복해온 일부 가야 왕족들이 진골의 등급에 해당된다.

개설[편집]

원래는 성골만이 왕이 될 자격이 있었으나, 선덕여왕 때가 되어 성골 출신의 남자가 하나도 없게 되자, 진골 출신도 왕이 될 수 있게 되었다. 《삼국유사》는 이때의 상황을 "성골남진(聖骨男盡)"이라고 표현했다.

진골과 성골의 차이나 구분은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고 여러가지 가설만 존재한다.

  1. 진흥왕의 직계(성골) 및 방계(진골)를 구별하기 위한 표현이다.
  2. 성골은 왕족 내부의 혼인[1]으로 태어난 집단이고, 진골은 왕족과 다른 귀족의 혼인[2]으로 태어난 집단이다.
  3. 같은 왕족이면서도 성골과 진골로 구별되는 것은 모계(母系)에 의한 것인 듯하다.
  4. 정치적인 면에서 구분하여 왕실 직계의 왕위 계승자 및 왕위 계승을 보유할 수 있는 제한된 근친자를 포함하여 성골이라 칭하고, 그 외 왕위 계승에서 소외된 왕족을 진골이라 하였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일반적으로 시조 박혁거세부터 진덕여왕까지의 왕족은 성골, 무열왕 이후의 왕족을 진골이라고 해석하나, 성골은 불교가 들어와 신라의 사상 통일에 있어서 이념이 된 법흥왕 때부터 형성된 듯하며, 불교에서 종교적 신성 개념을 받아들여 왕실 자신이 신성 가족으로 자처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한다. 또한 무열왕부터 왕족의 신분이 성골에서 진골로 전환된 것은 신라 왕족의 혼인 관계의 변천, 즉 새로운 왕비족의 대두에 따라 일어난 현상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신라와 당(唐) 사이의 정치·외교적인 관계가 중요시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화랑세기》는 진골과 성골이 등장하지 않고 대신 대원신통, 진골정통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전자는 진흥왕의 왕비인 사도왕후 박씨 계통을, 후자는 진흥왕의 모후인 지소태후 김씨 계통을 일컫는다. 그러나 이 역시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지는 않으며,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이 진골, 성골과 바로 일치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신라가 태종 무열왕 이래로 국세를 신장하게 되면서, 진골은 기존의 왕족뿐 아니라, 정복지의 왕족까지 흡수하는 표현이 된다. 한 예로, 가야의 왕족 김씨의 후손인 김유신은 진골 대접을 받았으며,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부흥운동의 지도자였던 안승도 김씨 성을 하사받고 진골 대접을 받았다.

신라 관직 상에서 1등급부터 5등급까지는 진골 이상의 출신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

신분의 탈락[편집]

골품제 내의 귀족들 중 진골 귀족들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대로 신분이 유지됐지만, 성골의 경우 진평왕에 의해 폐위되는 진지왕과 왕자인 김용수, 김용춘, 또 그 아들인 김춘추는 왕궁에서 쫓겨나면서 진골 귀족으로 격하되었다. 또한 귀천상혼(貴賤相婚)의 혼인 과정에서 그 자손들이 낮은 배우자의 신분을 따라가게 되는 원칙에 따라 신분 탈락 현상이 발생하였으며, 신라 후대에 이르러 잦은 반란이 발생함에 따라 그에 대한 처벌로 신분이 격하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편집]

같이 읽기[편집]

참고 문헌[편집]

  •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신라왕조실록》, 웅진, 2004

각주[편집]

  1. 족내혼(族內婚), 즉 근친혼
  2. 족외혼(族外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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