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배우는사람/문서:인도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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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역사〔개설〕

佛敎-歷史〔槪說〕 불교는 기원전 6세기경 고타마 부다(Gautama Buddha)에 의해 현 네팔과 인도 동북부지방 마가다(Magadha) 왕국을 중심으로 발흥하였다. 고타마 부다의 출생지는 룸비니(Lumbini)였고, 그의 성장지는 가비라성(迦毘羅城:Kapilavastu)이었으나 불교가 종교로서의 요건(要件)을 갖추고 역사에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것은 마가다 왕국에서였다. 그의 종교 활동인 수도(修道)·정각(正覺)·포교(布敎)는 현 인도 비하르(Bihar) 지방에 해당되는 마가다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그의 출생지나 성장지보다는 이 마가다 왕국이 불교발생의 중심지로 생각된다. 불타는 가비라 성주(城主) 슈도다나( uddhodana)왕을 부친으로 하고 마야(Maya) 부인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다. 그의 가계(家系)는 사키야(Sakya:釋迦)족에 속하는 크샤트리아 계급이고 성(姓)은 고타마(Gautama), 이름은 싯다르타(Siddhartha)라 하였다. 후에 '깨달음(覺)'을 얻은 후 고타마 부다라 불렀다. 또 사키야족의 성자라는 데서 석가모니(釋迦牟尼: akyamuni) 혹은 석존(釋尊)이라고도 불렀다.

불교 성립의 시대적 배경

佛敎成立-時代的背景 불교가 일어날 당시 인도의 종교계는 다른 고대민족과 마찬가지로 애니미즘(animism)적 경향을 띤 원시신앙이 지배하고 있었고 베다(Veda)와 <우파니샤드(Upanisad)>에 근거를 둔 브라마니즘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개인에 내재 (內在) 하는 원리인 아트만( tman)을 상정(想定)하고, 우주의 궁극적 근원으로 브라만(Brahman)을 설정하여 이 두 원리는 동일한 것(梵我一如)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또 인간의 행위는 전생(前生)의 업(業:Karma)에 의해 지배된다고 하였고, 현재의 행위의 결과는 미래의 행위를 결정한다는 윤회사상(輪廻思想)을 지니고 있었다. 이 윤회에서 해탈(解脫)하는 것을 당시 사상가나 종교가들은 이론이나 실천수행을 통해 주장하였다. 업(業)·윤회·해탈의 사상은 후대 인도사상의 골격을 이루는 것으로 불교 역시 이러한 인도의 전통적 종교·철학사상을 근저로 하여 새로운 종교사상으로 두각을 나타냈던 것이다. 불타도 '깨달음(無上正等覺:Anuttara­samyak­sam)'을 얻기 전까지는 이러한 종교적 풍토 속에서 브라마니즘의 수행 방법을 따랐다. 그가 29세에 부인인 야수다라(耶輸陀羅:Ya odhara)와 아들 라후라(Rshula)를 버리고 출가(出家)하여 택한 길이 선정(禪定)과 고행(苦行)이라는 당시 유행되던 수행 방법이었다. 알라라 칼라마 ( lara Kalama)와 우다카 라마푸타 (Uddaka Ramaputta)에게 사사하다가 만족치 못하여 스승을 버리고 5명의 수행자와 함께 고행의 길을 떠났다. 6년의 고행 끝에 부다가야(Buddhagaya)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이 깨달음의 내용이 4체(四諦)·12연기(緣起)이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8정도(八正道)이다. 불타가 깨달은 진리를 법(法:Dharma)이라 하며 그는 이 법을 펴기 위해 비나레스(Benares)의 녹야원(鹿野園:Migadaya, 現 Sarnath)으로 가서 다섯 수행자에게 최초의 설법(說法)을 하고(初轉法輪) 그들을 제자로 삼았다. 이로써 불교는 비로소 하나의 종교로서 교조(敎祖)·교리(敎理)·교단(敎團)을 갖추고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아쇼카왕과 불교의 흥륭

A oka王-佛敎-興隆 불타는 45년간 교화(敎化) 활동을 하며 승단(僧團)을 이끌다가 80세가 되는 BC 544년 입멸(入滅)하여 열반(涅槃)에 들고 승단은 마하가섭(摩訶迦葉:Mahaka yapa) 등이 중심이 되어 불타의 율(律)과 법(法)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불멸후(佛滅後), 곧 불타의 교법(敎法)을 정리하게 되었으니 불타에 의해 수기설법(隨機說法)된 것을 결집(結集)을 통해 성전(聖典)으로 편집하였다. 이것을 '제1회 결집'이라 한다. 왕사성(王舍城)에 500명의 비구(比丘)들이 모여 마하가섭을 사회자로 하고 우바리(優波離:Upali)가 율(律)을, 아난(阿難: nanda)이 법(法)을 암송하여 불설(佛說)을 정전화(正典化)한 것이다. 그후 불교는 마가다를 근거지로 여러 도시의 왕후(王侯)와 일반 서민의 귀의를 얻으며 각지로 전파되어 갔다. BC 317년경 찬드라 굽타(Chandra Gupta)에 의해 인도 최초의 통일국가인 마우리아(Maurya) 왕조가 성립되고 이 왕조 제3대 왕 아쇼카(Aoka:阿育)가 즉위한 후 불교는 비약적인 팽창을 보아 캐시미르, 간다라 지방을 비롯한 인도 각 지역과 박트리아의 그리스인 식민지, 스리랑카(실론)·버마 등 국외로까지 전파되었다. 특히 스리랑카에는 아쇼카왕의 아들 마힌다(Mahinda)를 보내 전파했다. 아쇼카왕은 열렬한 불교 신도로서 '법(法)인 진리'에 의한 통치를 지도이념으로 삼는 등 불교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한 왕이었다.

부파불교 시대

部派佛敎時代 불교의 급속한 팽창과 유통(流通)은 일면 교단 자체의 질서면에서 많은 문제를 제기하였고, 그것은 드디어 교파분열을 초래하였다. 불멸 후 100년경 계율(戒律) 해석을 놓고 전통적 보수파와 진보적 자유파가 대립되어 두 개의 부파(部派)를 낳았다. 전자를 상좌부(上座部:Theravada)라 하였고 후자를 대중부(大衆部:Mahasamghika)라 한다. 부파 발생의 원인은 불타의 교설을 받아들이는 자세와 교단질서 확립에 대한 의견 차이에서 유래되었다. 불멸 후 100년경 베샬리(Vai ali:毘舍離)에서 비구계(比丘戒)로 10사(事)를 두고 합법(合法)을 주장하는 측과 비법(非法)이라고 반대하는 측이 대립되어 분열된 것이다. 비법을 주장하는 측이 700명의 비구를 모아 집회를 열었으니 이것을 '제2회 결집'이라 한다. 크게 둘로 갈라진 부파는 계속 분열되어 서력기원을 전후하는 시기에는 각각 18∼20개 정도의 부파를 형성하였다. 부파 발생의 발단은 계율 해석의 학설상 차이에 있었지만, 학설보다는 지도적 장로(長老)를 중심으로 한 체제가 달랐거나 지리적으로 너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부파를 형성하는 일도 생겼다. 대표적 부파로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설산부(雪山部)·독자부(犢子部)·화지부(化地部)·음광부(飮光部)·경량부(經量部) 등이 존재했다. 이 시기를 부파불교 시대라고 지칭하는데 이와 같은 불교의 부파적 전개는 외적(外的) 확대와는 달리 불타 당시와 같은 순수성 내지 발랄성을 잃고 율(律)·경(經)에 대한 훈고학적인 주석학(注釋學)에 빠졌다. 곧 아비달마(阿毘達磨) 불교의 발달을 보게 되었으니 불교는 승원(僧院) 중심, 출가(出家) 중심의 학문불교(學問佛敎)로 변화하고, 따라서 대중성을 잃었다. 또 일부에서는 저급한 미신적 신앙에 친화감을 갖게 되어 불교는 본래의 탄력을 잃고 말았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 불교 본래의 모습으로 복귀하려는 운동이 일어났고 그러한 운동은 진보적 입장을 대표하던 대중부 및 재가(在家)불교도가 주동이 되었다. 이것을 대승불교(大乘佛敎)운동이라고 한다.

대승불교의 흥기

大乘佛敎-興起 대승불교가 흥기한 것은 BC 1세기경이나 이 움직임의 태동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대승불교의 대두로 인하여 이전의 6세기간에 걸친 불교를 통칭하여 소승불교(小乘佛敎)라 불러 대승불교와 함께 오늘날까지 불교의 성격을 규정하는 2대(二大) 유파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대두로 소승불교는 쇠퇴·소멸의 길을 달린 것이 아니라 서로 정통을 주장하며 계속 부파적 발전을 보았고 그러한 세력은 실론을 위시한 남방 제국(諸國)으로도 퍼져갔다. 스리랑카의 경우 4∼5세기간 부다다타(Buddhadatta)·부다고샤(Buddhaghosa)와 같은 일단(一團)의 학자들에 의해 수많은 주석서들이 만들어지고 이것이 바탕을 이루어 미얀마·타이·캄보디아·라오스 등지의 소승불교와 함께 남방불교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소승에 대해 대립적 자세를 취하며 일어난 대승불교는 종래의 관점을 혁신하였다. 수행관(修行觀)에 있어서 자기 형성을 주장하는 대신 대중의 구원을 선행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열반의 상태에 안주해 버리는 아라한(阿羅漢:Arhan) 대신에 보살(菩薩)이라는 새로운 이상적 인간상을 제시하였고 또 이미 열반에 들어간 역사적 불타 대신에 미래의 초월적 불신관(佛身觀)을 내세웠다. 이러한 변화는 자타카(Jataka:本生譚)·아바다나(Avadana:譬喩文學) 및 아비달마의 우주론의 발달과 더불어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상이 조직적으로 종합되면서 새로운 경전(經典)들이 만들어졌다. 대승경전의 성립이 그것이다. 1세기 후반에 쿠샨(Kusan:貴霜) 왕조가 성립되고 그 3대 왕인 카니시카(Kania)가 즉위한 후 불교는 또 한차례 흥왕기를 맞게 된다. 그는 푸르샤푸라(Pursapura), 현(現) 페샤와르(Peshawar)에 수도를 정하고 북인도의 대부분과 서인도 북반(北半), 중앙 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였다. 왕은 국내 각지에 불탑·사찰을 건립하고 적극적인 불교 보호정책을 썼다. 이때 불교는 파르티아(Parthia)·속디아(Sogdia) 지방에까지 보급되었고 이 시기로부터 이곳의 학승(學僧)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불전(佛典) 번역에 종사하기에 이르렀는데 쿠샨 왕조의 영토가 인도와 중국을 잇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간다라 지방에서 마투라(Mathura) 지방에 이르는 지역에는 아직 부파불교가 강력한 세력을 갖고 있어 설일체유부를 위시하여 대중부·음광부·법장부·화지부 등 여러 부파가 병립한 상태에 있었는데 그중 설일체유부가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파가 중심이 되어 아비달마 불교를 더 한층 발전시켜 그 결과 유부(有部) 학설의 총서인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이 캐시미르 지방 학승들의 손에 의해 편찬되었고 이 논서를 중심으로 한 학문 경향이 성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부파불교적 경향이 지배적인 시기에 대승운동은 계속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리하여 BC 1세기에서 기원 3세기에 이르는 사이 대승운동의 결실로 수많은 대승경전들이 출현했다. 초기 대승경전 가은데 중요한 것들은 <반야경(般若經)>·<유마경(維摩經)>·<법화경(法華經)>·<아미타경(阿彌陀經)>·<십지경(十地經)> 등이다. 이 가운데 <반야경>은 대승경전을 대표하는 경전으로, 이 경전에 실린 공사상(空思想)은 대승불교의 기본적 교리로서 불교사상의 근본 사조를 이루었다. 공사상의 기초를 닦은 대표적 인물은 남인도 출신의 용수(龍樹:Nagarjuna)로서 그의 <중론송(中論頌):Madhyamaka → karika)>은 부파불교가 지닌 오류를 결정적으로 논박하였다. 용수 이후에 <승만경>·<해심밀경(解深密經)>·<능가경> 등이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해심밀경>의 유식설(唯識說: layavij ana)은 270∼480년 사이에 미륵(彌勒:Maitreya)·무착(無着:Asanga)·세친(世親:Vasubandhu) 등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된 사상으로, 용수의 공사상과 함께 불교사상의 2대 조류를 형성하는 학설이 되었다. 중관사상(中觀思想)과 유식사상(唯識思想)은 세친 이후 유력한 학파를 형성하였고 7세기에 이르러 이 두 학파는 인도 대승불교의 주요한 학파로 군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관학파는 용수 이래 불호(佛護:Buddhapalita, 470∼540)의 계통과 청변(淸辨:Baviveka, 490∼570경) 계통으로 나뉘었고 전자는 월칭(月稱:Candrak rti, 600∼650경)과 적천(寂天: antideva, 650∼760경)이 계승하였으며, 후자는 적호(寂護: antaraksita, 680∼740경)·연화계(蓮華戒:Kamalasila, 700∼750경)가 계승하였다. 유식학파는 세친을 계승한 진나(陳那:Dinnaga, 400∼480경) 계통과 덕혜(德慧:Gunamati, 420∼500경)와 안혜(安慧:Sthiramati, 470∼550경)의 계통으로 나뉘었고 전자는 호법(護法:Dharmapala, 530∼561)·법칭(法稱:Dharmak rti, 643∼673)이 계승하였다. 이 시기는 불교사상에 있어 난숙한 발달을 보인 시기였는데 이들은 불교 내부에서 상호간에 활발한 논전을 벌였을 뿐 아니라 외부의 힌두교나 자이나(Jaina)교의 종파들과도 논쟁을 벌였다. 인도 불교는 이렇게 대승불교의 학파들을 형성하여 발전을 계속하였으며 그 학문적 전승을 위해 나란타(那爛陀:Nalanda) 사원이 국제 대학으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발라비(Valabhi) 사원도 불교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종교적 열정은 감퇴되기 시작하여 종교생활은 나란타·발라비·비크라마시라와 같은 대학으로 집중되었고 소위 승단 중심의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밀교의 성립

密敎-成立 7세기 중엽에서 말엽에 이르는 시기에 새로운 불교의 대두를 보게 된다. 곧 밀교(密敎)의 발흥이다. 밀교사상은 불타 당시부터 주법(呪法)으로 전해오던 것으로 주구(呪句)·진언(眞言:Mantra)·다라니(陀羅尼:Dharani)를 송지(誦持)하여 그것으로 마음을 통일하고 구경의 경지에 도달하여 불(佛)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불교의 일파였다. 7세기 중엽에 이르러 이러한 사상이 조직 종합되어 <대일경(大日經)>·<금강정경(金剛頂經)>과 같은 문헌으로 나타남으로써 밀교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이 밀교도 대승으로 분류되고 있으나 대승불교의 퇴영적 일면을 드러내는 사상으로 평가된다. 그 발생 이유는 세친 이후 대승불교가 지나친 철학적·이론적 경향으로 흘러 일반 대중과 유리되어 마치 아비달마 불교가 빠진 것과 동일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당시 인도에서 탄트라 문학이 유행되었고 그 풍조에 따라 불교의 밀교적 전개가 촉진된 것이다. 중관 사상도 밀교화되었으며 따라서 밀교는 힌두 사회에서 환영받아 급속히 보급되었다. 8세기 후반에 와서는 밀교가 대중화됨과 동시에 저급한 의례를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밀교의 대중화는 또 하나의 불교 유파를 형성시켰으니 그것을 금강승(金剛乘:Vajrayana)이라 하였는데, 이러한 운동을 일으킨 사람은 인타라부저 (因陀羅部底:Indrabhuti, 687∼717?) 였다. 그의 아들인 연화생(蓮華生:Padmasam)은 밀교를 티베트로 전했고, 이때 인도로부터 다수의 고승이 티베트에 들어가 밀교를 중심으로 한 대승불교를 전파했다. 그러나 티베트에는 중국에서 온 학승들이 있어, 이들과 인도 학승 사이에 견해 차이가 생겨 혼란을 일으켰다. 티손데첸(Khrisron­Ide­bstan)왕은 수도 라사(Lhasa)에서 회의를 열어 논쟁을 매듭지었고, 그 결과 인도측의 점문파(漸門派:Rcen­Min­pe)의 설이 인정되고 중국의 돈문파(頓門派:Ston­mun­pa)의 설은 배척되었다. 이로써 티베트 불교는 인도 후기불교의 성격을 그 주류로 삼게 되었다. 티베트로 들어간 밀교는 머지 않아 라마교로 발전하여 티베트 고유 불교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인도불교의 쇠퇴

印度佛敎-衰退 금강승(金剛乘)불교가 팔라(Pala) 왕조(750경∼1199)의 보호를 받으며 마가다 지방과 서벵골 지방에서 영향을 끼치고 있었으나 이때의 불교는 거의 힌두교나 다를 것이 없는 상태로 변질되고 말았다. 불교의 세력은 오히려 중국·한국·일본에서 흥왕을 보았다. 이와 같이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된 것은 불교 자체가 내적으로 변화를 일으켜 미륵불(彌勒佛)·관음(觀音)·대일여래(大日如來) 같은 불(佛)·보살(菩薩)들이 힌두교의 제신(諸神)들과 거의 같은 성격과 기능을 갖게 된 점에 있었고 그 위에 이슬람교의 박해에 의해 승려가 도태되고 사원이 파괴되었기 때문이었다.

불교의 전파

佛敎-傳播 인도에서 불교가 소멸된 대신 불교는 스리랑카·미얀마·타이와 중앙 아시아 제국(諸國)을 비롯해 티베트·중국·한국·일본 등 광범한 지역으로 전파되어 각 지역의 민족문화와 융합하여 다채로운 종교문화를 이룩하였다. 특히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1세기경이라고 추정되지만 불교 경전의 한역(漢譯)은 2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행해지고 그 후 위진(魏晋)·남북조(南北朝) 시대에서 수(隋)·당(唐)을 거쳐 송(宋)·원(元)·명(明)까지 중국 불교는 크게 번창하여 독특한 불교문화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현실주의적 성격을 지닌 중국인에게 불교가 처음 전해질 때 충돌을 면치 못했다. 그 전래 시기는 전한(前漢)경으로 소급되고 경전이 본격적으로 번역되는 것은 후한(後漢)에 들어와서였으나, 현실을 떠나는 것을 주장하는 불교의 교의가 현세주의적 사상풍토를 조성하고 있던 당시에 쉽게 수용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불교는 도교적 신앙과 결부되어 신선방술(神仙方術)의 하나로 수용되었다. 중국불교의 초기 수용시기는 대체로 전한말(前漢末)에서 4세기 말까지 400년간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후 5세기 초에서 6세기 말까지 200년간 불교는 착실히 뿌리를 뻗게 되었다. 경전의 전래가 격증되고 번역기술이 발달을 보인 이외에 많은 인도승(僧)들이 들어왔다. 구마라습(鳩摩羅什, 350∼409)·담무참(曇無讖, 385∼433)·보리유지(菩提流支, 5세기말∼6세기초)·진체(眞諦, 499∼569) 등이 나타나 본격적 번역을 행하여 학문상·신앙상의 기초를 이룩했다. 후대에 이르자 당시의 조류에 대해 비담종(毘曇宗) 등의 명칭을 부여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아비담(阿毘曇)>·<성실론(成實論)>·<열반경(涅槃經)>·<십지경론(十地經論)>·<섭대승론(攝大乘論)> 등이 경론(經論)을 연구 대상으로 한 학파에 대한 명칭이었고, 또 이 학파들은 단순한 학파를 넘어 종파(宗派)로까지 되었다. 수(隋)가 천하를 통일하면서 문화의 남북대립이 통합·해소되고 불교계에도 발랄한 신기풍이 일어났다. 6세기 말부터 8세기 전반에 이르는 150년간 전대(前代)의 연구와 신앙을 기초로 중국 독자(獨自)의 불교 종파를 일으켰다. 가상(嘉祥) 길장(吉藏, 549∼623)의 삼론종(三論宗), 천태(天台) 지의(538∼597)의 천태종(天台宗), 신행(信行, 541∼594)의 삼계교(三階敎), 도작(道綽, 562∼645)의 정토종(淨土宗), 도선(道宣, 596∼667)의 율종(律宗), 자은(慈恩) 규기(窺基, 632∼682)의 법상종(法相宗), 현수(贅首) 법장(法藏, 643∼712)의 화엄종(華嚴宗), 대감(大鑑) 혜능(慧能, 638∼713)의 선종(禪宗), 일행(一行, 683∼727)의 밀교 등의 종파가 발생된 것이다. 특히 선종은 중국 불교의 두드러진 특징을 나타내는 종파로서 보리달마(菩提達摩, ?∼528)에 의해 중국에 전해진 이래 혜능에 이르러 불교계에 일대 변혁을 일으켰다. 선종은 그후 임제(臨濟)·위앙·조동(曹洞)·운문(雲門)·법안(法眼) 등 종파의 성립을 보게 되었고 그것은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을 풍미하였다. 이렇게 수·당 송대를 거쳐 중국 특유의 종파불교가 형성되었고 그에 따라 한국·일본도 대체적으로 중국의 중파적인 불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372)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에 의해 불교가 전래된 이래 고구려·백제·신라는 수용한 종파불교를 종합불교(綜合佛敎)로 지향시키면서 난만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李 珉 容>

원시불교의 성립

원시불교

原始佛敎 불교는 불타(佛陀:Buddha)의 가르침을 근본으로 하면서 그것이 계승·전파되어 가는 과정에 있어서 시대와 더불어 발전하여 온 것이다. 인도에서 발생하여 아시아의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퍼져나간 불교를 모두 똑같은 한가지의 것으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각기 다른 특색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불타가 도(道)를 깨닫고 전도를 시작한 때로부터 그의 입적(入寂) 후 제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정리하여 성립된 불교를 일반적으로 원시불교라 한다. 그 기간은 불타의 제자들 사이에 분파가 생겨날 때까지의 약 2,300년간을 말하는데 북방불교와 남방불교의 자료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원시불교의 특색은 불타의 가르침이 직접화법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 점에 있으나 실은 제자들에 의하여 구전(口傳)된 것이 불타의 입적 후 정리된 것으로 그 확실성의 한계점을 긋기는 어려운 것이다. 불타 및 그의 직제자(直弟子) 시대의 불교를 근본불교(根本佛敎)라 하고 그 후의 것을 협의의 원시불교라 하는 설도 있다.

불타의 전기

佛陀-傳記 불타는 역사적 실재인물이다. 그의 생애를 기록한 불전(佛傳)은 많이 있으나 거의가 불타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쓰여진 것으로 거기에는 당연히 신앙적 욕구에 의한 신비적이고 영험적(靈驗的)인 여러 가지 윤색(潤色)이 가해지게 되었다. 가령 불전경전(佛傳經典)은 서력기원 전후에 많이 제작되었는데 아습박구사(馬鳴) 작이라 하는 <부다차리타(Buddhacarita)>(漢譯<佛所行讚>)는 불타의 생애를 서사시풍으로 노래한 것이고, 한역으로 된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은 60권에 달하는 불전의 집대성이다. 이들은 모두 신앙적 전기물로서 객관적인 기술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불전에는 전기와 전설이 혼재(混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실재로서의 불타의 생애는 이와 같은 다분히 전설적인 자료를 비판적으로 고찰하여 이와 관련된 다른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이를 실증적으로 재구성하는 수밖에 없다.

탄생

誕生 불타가 탄생한 연대에 관하여는 여러 설이 있어서 모두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불타는 대략 서력 기원전 486년부터 483년경에 네팔 지방의 소왕국(小王國)의 왕자로 태어났다. 탄생일은 북방불교에서는 4월 8일이고 남방불교에서는 5월 보름날(이날을 베사카 제일로서 축하한다)로 되어 있다. 불전에는 이날 불타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을 외치면서 태어났다고 하여 이 불세출의 종교적 거인의 탄생을 축하한다.

석가족

釋迦族 불교의 창시조 고타마 부다의 존칭인 석가모니(釋迦牟尼:Sakya­muni)가 석가족 출신의 성자(聖者)를 의미하는 것과 같이 불타는 석가족에서 태어났다. 전설에 의하면 석가족은 아리아계통의 코살라 종족의 일파라고 하나 분명치 않다. 석가족은 불타가 이세상에 나올 무렵 이미 북인도의 가비라성(迦毘羅城)을 중심으로 하여 소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의 인도는 오랜 귀족 공화정치로부터 왕족이 지배하게 되는 정치체제로 옮아가는 도중이었는데 불타가 세상에 나올 무렵에는 아직 강력한 전제국가는 출현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석가족의 주위에는 코살라국(國), 마가다국, 쿠시나가라국과 기타 왕국 또는 공화국이 병립하여 있어서 이들 사이에 낀 석가족의 정정(政情)은 불안하였다. 석가족은 무사계급에 속하고 농경과 교역에 종사하며 수공업도 발달한 편이었지만 군사적으로는 약체를 면치 못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뒤에 코살라 왕국의 공격을 받아 전멸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에 의하여 상징되는 석가족의 국가적 불안은 왕자로 태어난 젊은 날의 불타가 출가하게 되는 동기와 조금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반왕

淨飯王 가비라성의 왕. 싯다르타의 아버지인 수도다나(Suddhodana)를 말함. 그는 라자(왕)의 지위에 있었으나 실제로는 조그마한 나라의 공화정치의 대표자였다. 싯다르타를 깊이 사랑하여 그가 출가(出家)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이를 막아보려 여러 가지로 애를 썼으나 뒤에 싯다르타가 정각(正覺)에 도달하여 불교를 펴게 되자 스스로 나아가 독실한 귀의자(歸依者)가 되었다. 76세 혹은 97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마야부인

摩耶夫人 싯다르타의 생모(生母)인 마하마야(Mahamaya)를 말한다. 구리성(拘利城)의 집정관 선각장자(善覺長者)의 딸로 태어나 이웃 나라 정반왕의 왕비가 되었다. 오랫동안 자식을 낳지 못하다가 45세에 싯다르타를 잉태하여 당시 인도의 습관에 따라 친정에 가서 해산하기 위하여 구리성으로 가는 도중 룸비니의 숲속에서 싯다르타를 낳았다고 한다. 싯다르타의 출산 후 7일 만에 죽었다.

룸비니원

Lumbini園 중인도 카필라바스트(Kapilavastu:迦毘羅城)에 있었던 임원(林園). 불타가 탄생한 성지로 되어 있으며 오랫동안 그 소재가 알려지지 않았으나 1897년 네팔국의 남쪽 룸민디에서 아쇼카왕이 룸비니를 방문한 기념석주(記念石柱)가 발견되어 그 위치가 판명되었다.

출가 이전의 불타

出家以前-佛陀 불타는 가비라성의 왕자로 태어났다. 경전에 의하면 그는 생후 7일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이모인 마하파사파뎨의 손에 자랐다고 한다. 그는 성을 고타마(Gautama), 이름을 싯다르타(Siddhartha)라고 하였는데 이는 '소원성취'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부왕(父王)의 한없는 애정이 담긴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작은 나라이긴 하지만 왕자였던 그의 소년시절은 물심양면에 걸쳐 행복하였다. 어릴 때부터 그는 무예에 관한 교육을 받았으나 명상을 즐기는 폭넓은 성격의 주인공이었다고 한다. 커서 외사촌인 야쇼다라 공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후라를 얻었는데 그는 이때부터 끊임없이 출가하기를 희구하게 되었다. 그 동기는 일찍부터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고 하나 주요한 원인은 궁정생활의 형식적 행복에 젊고 순수한 불타가 견디지 못하였던 데에 있었던 듯하다. 아울러 일찍 생모를 여읜 일과 나아가서는 생(生)에 대한 보다 원초적인 회의가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불전에는 젊은 날의 불타가 인생의 무상함에 눈떠가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전해주고 있다.

출가

出家 불타의 출가에는 여러 가지 동기가 중첩되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불타의 마음을 가장 강력하게 움직여 그로 하여금 끝내 가족의 애정과 유대관계를 단절하고 왕국을 떠나가게 한 것은 무상한 이 세상의 괴로움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도(道)를 추구하려는 끊임없는 정열이었다. 불전에 있는 사문유관(四門遊觀)의 이야기는 노(老)·병(病)·사(死)·사문(四門)의 무상고(無常苦)에 대한 그의 강렬한 자각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불타는 인생문제에 관한 한 조금도 허술하게 생각하지 않고 진지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당시 인도에는 도를 닦으려 하는 자는 출가하는 풍습도 있어서 아들 라후라를 얻어 후계자에 대해 근심하지 않아도 된 불타는 29세가 된 어느날 밤에 시종 차닉(車匿)을 데리고 백마를 타고 성문을 빠져나갔다고 한다.

고행

苦行 시종과 헤어진 불타는 정발(淨髮)을 하고 옷을 갈아 입은 다음 구걸을 하면서 남쪽의 마가다국(Magadha國)을 향하여 갔다. 불타가 찾아간 이 나라 수도 라자 그리하(Raja­grha:王舍城)는 당시 정치·경제의 중심지였고 많은 수도자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여기에서 불타는 바라문교의 행자(行者)로부터 요가를 배웠으나 정신적인 만족이 없었으므로 다시 계속하여 마지막으로는 네란쟈나강(Nairanjananati江:尼連禪河) 부근에서 단식과 불면의 고행을 계속하였다. 이 기간이 6년 동안이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육체적인 고행도 효험이 없음을 알고 이를 그만두었다. 이때에, 지금까지 고행을 같이하던 다섯 사람의 수도자가 떠나갔으나 그는 목욕을 하고 심신을 맑게 하여 마을 처녀가 갖다 준 젖과 죽을 마시고 체력을 회복한 다음 다시 부다가야 근처에 있는 나무 아래에 앉아 조용히 내관(內觀)의 고행을 계속하였다. 이 고행은 일체의 공리적 관념을 버리고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욕망을 끊어 없애며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하는 입장이다. 이 길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불타의 도를 닦는 마음을 좌절시키려고 달려드는 마왕(魔王)들과의 싸움을 그린 불전에 잘 나타나 있다.

성도

成道 불전에 따르면 불타는 35세의 해 12월 8일 이른 새벽(남방불교의 전설에는 바이샤카月의 만월이 된 밤)에 드디어 '대각(大覺)'을 이루고 생·노·병·사의 본원을 단멸(斷滅)하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어떠한 번뇌(煩惱)에도 흔들리지 않는 절대정적(絶對靜寂), 즉 열반(涅槃)의 세계를 체현(體現)한 것이며 올바른 자각, 즉 정각(正覺)을 얻어 눈을 뜨게 된 자, 즉 불타(佛陀)가 되었다는 자기혁신의 일대 전환이었다. 불교는 이 자각을 얻은 자, 즉 불타의 체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보리수

菩提樹 필발라나무 또는 아슈바타라고도 한다. 불타가 이 나무 아래에 좌선(坐禪)을 하여 정각(正覺:菩提=보리수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다. 불타가 깨우침을 얻은 보리수는 네란쟈나강의 물가에 있었다고 하며, 불타 정각(正覺)의 고사에 관련되어 이 땅을 부다가야라고도 하였다. '보대수'라고도 발음한다.

초전법륜

初轉法輪 성도 후의 불타는 한동안 스스로 깨달음의 경지를 즐기고 있었으나 얼마 후에 이러한 법락(法樂)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주고자 우선 지난날에 같이 고행을 하던 다섯 사람의 수행자(修行者)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바나레스 교외의 녹야원(鹿野苑)을 방문하였다. 그들 다섯 사람은 고행을 그만둔 불타를 경멸하였으나 드디어 불타의 설법에 감화되었다. 이때에 불타는 쾌락과 금욕의 양극단을 배제한 중도의 입장에서 설교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불타가 성도를 한 후 최초로 행한 설법(說法)을 초전법륜이라고 한다. 법륜을 전(轉)한다 함은 법을 설파하고 그 실현에 노력한다는 뜻이다. 이 초전법륜에 의하여 불타의 제자인 5인의 비구(比丘)가 나타나게 되어 불(佛)·법(法)·승(僧)의 불교 교단 성립조건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전도

傳道 초전법륜은 불교 전도의 제일성이었으며 동시에 불타의 입멸(入滅)에 이르기까지의 45년간에 걸친 부단한 설법의 시작이었다. 불타는 왕사성(王舍城)과 사위성(舍衛城)을 중심으로 비교적 넓은 범위에 걸쳐 설법(說法)을 해나갔다. 불타의 가르침은 심원한 것이었으며 상대에 따라서 문답 형식과 비유·인연설화(因緣說話)를 활용하고 평이한 말로 친절을 다하여 설법하였으므로 차차 제자가 불어나서 경제적으로 불타를 돕는 독실한 귀의자도 나타나게 되었다.

입멸

入滅 80세의 고령이 될 때까지 불타는 설법을 그치지 않았는데 파바시(市)에서 받은 공양(供養)이 잘못되어 심한 이질을 앓더니 드디어 쿠시나가라의 땅에서 입멸하였다. 병이 위독함을 깨달은 불타는 최후의 목욕을 마치고 사라(沙羅)나무의 숲속으로 들어가 머리를 북쪽에 향하고 오른쪽으로 누워 발을 포갠 다음 밤중에 제자들에게 최후의 가르침을 편 후 조용히 입멸하였다 한다. 이 날은 기원전 383년 2월 15일(남방불교에서는 베사카月의 만월의 밤)이었다고 한다.

교단의 발달

승가의 발생

僧迦-發生 불교의 교단(敎團)을 승가(Sa­maha)라고 한다. 이를 약해서 승(僧)이라고도 하고 또 화합중(和合衆)이라고도 하며, 불타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모이게 된 사람들의 집단을 말한다. 여기에는 당연히 한 집단을 유지하고 통제하는 제도와 방식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나 불교 교단의 경우 처음부터 어떠한 제도가 이루어지고 조직된 것은 아니었다. 녹야원(鹿野苑)에서의 초전법륜(初轉法輪)에 의하여 다섯 사람의 비구를 제자로 삼은 이래 불타에 귀의하는 사람들이 뒤를 이어 자연히 불타를 중심으로 하여 하나의 집단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가게 되었다. 그들은 수도를 위하여 청빈과 검소를 근본으로 하고 우계(雨季) 때의 옥내생활을 제하고는 여러 곳을 편력하면서 탁발생활을 하였으므로 그 가운데 자연히 그들의 생활을 규제하는 규약이 생기게 되었다. 불타의 가르침에는 교리로서의 법(法)과 개인이나 집단을 규제하는 율(律)이 있다. 원시승가에는 그리 많은 계율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차차 교단의 통제가 이루어지고 조직화가 진행되었다. 또 승가 밑에는 교단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재가신자(在家信者)가 증대되어갔음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이들 중에는 불타에게 죽림정사(竹林精舍)를 헌정한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과 기원정사(祈園精舍)를 시주한 사위성(舍衛城)의 수다타 장자(長者) 등이 있었다. 원시불교 교단은 수도자인 비구와 비구니(比丘尼)를 중심으로 이와 같은 재가신자를 주위에 갖고서 점차 발달하여 갔다. 여기에 대하여 이교도의 방해와 내부로부터의 배반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불타의 사촌동생 테바다타는 교단의 분열을 획책하다가 실패하였다고 전한다.

10대제자

十大弟子 불타의 제자들 중에는 개별적으로 뛰어난 인물이 많았다. 지혜가 제일이었던 사리불(舍利佛:Sariputra), 신통력(神通力)의 목건련(Maudgalyayana), 무집착(無執着)에 투철한 마하가섭(摩訶迦葉:Mahakasyapa). 천안력(天眼力)을 가졌었다고 하는 아나률(阿那律:Aniruddha), 제법개공(諸法皆空)을 잘 깨우쳤다는 수보뎨(須菩提:Subbuti), 설법에 능한 부루나(富樓那:Purnamaitrayaniputra), 토론을 잘하는 가전연(Katyayana), 지율(持律)의 우바리(優婆離:Upali), 다문(多聞) 제일의 아난(阿難: nanda), 행지(行持)가 면밀한 라후라(羅候羅:Rahula)는 특히 10대 제자로 손꼽혀 전해지고 있다.

마하가섭

摩訶迦葉 마하카샤파(Mahahasyapa), 대가섭(大迦葉)이라고도 불린다. 왕사성 부근 브라만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불타의 제자가 되었다. 집착에 사로잡히지 않는 청결한 인물로서 불타의 신임을 받아 문하생들 중에서 상위를 차지하였다. 불타가 입적한 후에는 비탄과 동요하는 제자들을 통솔하여 교단의 분열을 막았다. 영취산(靈鷲山)에서 불타가 꽃을 꺾어 보였을 때 오직 마하가섭만이 그 뜻을 이심전심으로 이해하고 미소지었다는 점화미소(拈華微笑)의 고사(故事)는 유명하다.

제1결집

第一結集 불타의 설법은 주로 구화(口話)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불타가 입적하게 되자 그의 가르침의 내용이 올바르게 후대에 전해질 것인가가 의심스러워졌다. 이에 불타의 교법(敎法)을 옳게 파악해 놓지 않으면 사이비 설법이 세상에 나돌아 결국에는 정법정률(正法正律)이 없어지게 될 것임을 두려워한 마하가섭은 불타의 입멸 이듬해의 우계(雨季)에 왕사성 밖의 칠엽굴(七葉窟)에 500명의 비구를 모아놓고 불타의 가르침에 대한 결집(結集)을 거행하였다. 결집이라 함은 여러 사람이 모여서 각자가 이해하고 파악한 불타의 가르침으로서 다시 교단이 확인하는 일이다. 이것은 불타가 남긴 가르침의 산일(散逸)을 막고 교단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었다. 이때의 결집을 오백결집(五白結集)이라 하며, 다문제일(多聞第一)의 아난(阿難)이 경(經)을 독송하고 계율을 보지(保持)함에 으뜸인 우바리(優婆離)가 율(律)을 송출(誦出)하였다. 경이라 함은 교리와 사문에 관한 설법이며, 율은 행위와 교단에 관한 규정이다. 그러나 이 결집으로 경과 율이 완성된 것은 아니고 제3회 후에도 몇회의 결집이 있었다.

제2결집

第二結集 제1결집에 있어서도 이미 신구(新舊) 사상의 대립이 엿보이게 되었는데 불타의 입멸 후 약 100년이 지나게 되자 계율에 대한 새로운 설을 제창하는 자가 있어서 여러가지로 의문점이 발생하여 분규를 일으키게 되었다. 이에 베샬리(Vaisali:吠舍離)에서 야사(耶舍)가 중심이 되어 700명의 상좌부장로(上座部長老)를 모아 주로 율장(律藏)을 편집하고 교단의 통제에 힘썼다. 이를 칠백결집이라고도 한다. 그후에 일설(南傳島史 등)에 따르면 이에 불복한 진보적인 비구들이 1만명의 다수인을 모아 독자적인 결집을 열었다고 한다. 이를 대결집(大結集)이라 부르는데 이들은 보수적인 상좌로부터 이탈하여 대중부(大衆部)를 형성하게 되었다.

제3결집

第三結集 남방에 전해진 불교에 의하면 아쇼카왕대(代), 불멸후(佛滅後) 200년경에 1000명의 비구들이 모여 율(律)·경(經)·논(論)의 삼장(三藏)을 결집하였다고 하며 이를 천인(千人)결집이라고 부른다.

아쇼카왕

Asoka王 구(舊) 마가다국의 왕통을 이은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왕으로서 인도에 처음으로 이상적인 통일국가를 건설하였다. 왕의 사적에 관하여는 왕이 각지에 건립한 비의 비문 외에도 전설적 형식으로 된 아육왕전(阿育王傳)이나 아육왕경(阿育王經)에 의하여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서력 기원전 271년경 왕위에 오른 지 얼마 후 불교에 귀의하여 우바색(優婆塞:남성의 재가신도)이 되었는데 가릉가국 정복의 무자비한 전쟁을 체험한 뒤에는 더욱 깊이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즉위 후 약 10년이 되어 '삼보리(三菩提)'의 정각(正覺)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며 이후 한층 더 불교에 정진하여 불교를 정치에 구현해보려고 노력하였다. 불교를 널리 펴기 위하여 불법의 대관을 두어 각지를 순회시키고 소아시아·그리스·스리랑카 등의 먼 곳에는 사자(使者)를 보냈다. 또한 불교적 생활도덕을 설포하는 법칙(法勅)을 마애(磨崖)와 석주(石柱)에 새기고 병원과 사탑(寺塔)을 건립하였으며 약초를 재배케 하기도 하였다. 남방불교에서는 왕의 통치하에 제3회결집이 있었다고 하나 북전(北傳)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미 왕의 시대에 불교 교단은 분열상을 보이고 있었고 왕이 귀의한 것은 상좌부 계통의 불교였다. 왕은 많은 국고금을 불교의 보호에 사용하였으므로 만년에는 국가경제가 궁핍해지고 왕 자신도 별로 행복스럽지 못하였으나 최후까지 불교에 대한 원죄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단지 불교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종교에 대하여도 관용을 베풀었으며, 불교는 이 시대에 왕의 전영토와 주변에 확대되었다.

부파불교의 전개

근본2부의 분열과 부파불교의 성립

根本二部-分裂-部派佛敎-成立 불타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정립하기 위하여 행한 제1회결집이 불타의 가르침에 충실하려 하였기 때문에 보수적 경향을 지니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보수적 경향을 가진 장로비구(長老比丘)에 대하여 진보적인 생각을 가졌던 비구들은 불만을 품게 되었다. 제1회의 칠엽굴(七葉窟)에서의 결집에 대하여 부루나(富樓那)가 굴외결집(窟外結集)이라는 것을 열어 이의를 기하였던 것과 같이 불교 교단의 밑바닥에서는 신구의 두 경향이 대립하게 되었다. 불타입멸 후 110년경 진보파의 비구 발도자(Vajjiputtaka)는 계율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내세웠으나 상좌장로들은 이를 배척하였다. 이리하여 양자간의 틈은 더욱 벌어져서 진보파의 비구들은 마침내 자파들만의 결집을 행하게 되었다. 여기에 많은 비구들이 모이게 되어 이를 대결집(大結集)이라 하였으며, 여기에 참가한 사람들을 대중부(大衆部)라고 하여 상좌장로의 상좌부(上座部)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것을 근본2부의 분열이라고 하며, 이로써 불교 교단은 표면상 2대(二大)파로 분열되었다. 이어서 여러 갈래의 분열이 일어나 부파불교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소승20부

小乘二十部 근본2부의 분열이 가져온 분열의 기운은 교리상의 견해, 지도자간의 대립, 지리적 조건 등으로 인하여 더욱 심화되어 불타 입멸 후 약 200년 뒤에는 대중부 계통으로부터, 그리고 그 뒤에 이어서 상좌부 계통으로부터 교단의 파생적인 분열이 촉진되었다. 이 여러 갈래로 분열하는 모습과 파의 이름 그리고 분파의 수에 관하여는 여러 설이 있다. 일반적으로 소승20부로서는 대중부 계통으로서 대중부(大衆部)·일설부(一說部)·설출세부(說出世部)·계윤부(鷄胤部)·다문부(多聞部)·설가부(說假部)·제다산부(制多山部)·북산주부(北山住部)의 9부와 상좌부 계통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설산부(雪山部)·독자부(犢子部)·법상부(法上部)·현주부(贅胄部)·정량부(正量部)·밀림산부(密林山部)·화지부(化地部)·법장부(法藏部)·음광부(飮光部)·경량부(輕量部)의 11부, 합계 20부를 들 수 있다. 이들의 성립 시기는 대략 서력 기원 전후였을 것으로 보인다.

아비달마

阿毘達磨 아비달마(Abhidharma)라고 함은 논(論)이라고도 불리는 것처럼 경전의 설명과 주석을 의미한다. 성전으로서의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은 불교가 여러 부파로 분열되기 이전에 일단 성립되어 있었으나 이것에 대한 설명과 주석이 하나의 독립된 형식으로 논장(論藏)으로서 정리된 것은 부파불교의 시대에 들어가서부터였다. 각부파는 자파의 권위를 주장하기 위하여 각각 독자적인 성전을 편찬하게 되었으나 이들은 불타시대의 볼교의 순수성으로부터 멀어진 것으로 되었으며 동시에 종래의 경전에 대하여 쓸데없는 해석학적 경향을 더욱 심회시키기에 이르렀다. 이 아비달마적 경향은 불교를 출가 중심의 은둔적 학문불교로 만들어 불타 재세시에 있었던 율동적인 힘을 잃게 하였다. 이러한 것에 대한 반성으로서 대두한 것이 대승불교인데 이 대승불교도 뒤이어 논이 만들어지게 되었으며 이를 부파불교의 소승론에 대한 대승론이라고 한다.

카니시카왕

Kanishka王 중앙 아시아 대월지족(大月氏族)으로부터 일어났던 쿠샨족은 서력 1세기 중반에 서북인도에 진입하여 세력을 확대하고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카니시카왕은 이 나라의 3대째 왕으로 2세기 전반의 사람이다. 그는 처음에 조로아스터교의 신도였다고 전해지나 후에 불교에 귀의하여 아쇼카왕을 이은 불교보호자가 되었다. 왕의 주변에는 아습박구사(馬鳴)왕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장로 파르슈바(脇尊者)가 있어서 이들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국내 각지에 많은 불탑과 사원을 건립하였다. 쿠샨 왕조 시대의 문화는 그리스·로마·이란 등으로부터 들어온 서방문화와, 중앙과 중앙 아시아에서 온 동방문화의 영향을 융합하게 되었으므로 카니시카왕으로부터 그의 아들인 후비슈카왕 시대에 걸쳐, 문화사상 간다라 미술이라고 불리는, 후세의 아시아 미술에 커다란 영향을 준 불교예술을 형성하였다.

대승불교의 성립

대승불교의 대두

大乘佛敎-擡頭 대승(Mahayana)이라 함은 열반(涅槃)의 피안(彼岸)에 중생을 운반하는 커다란 탈것을 의미한다. 당시 상좌부 계통의 불교는 경전의 훈고·주석에 치우쳐 형식화되었고 승원(僧院)에 있어서의 출가 중심의 고답적인 독선주의에 빠져 있었다. 이를 반성한 혁신적인 비구들과 당시에 성불(成佛)을 이상으로 보살행(菩薩行)에 정진하고 있던 재가(在家) 신자들 사이에 형식보다도 내용을 중시하고 출가와 재가의 구별을 초월하여 널리 사회를 구제하려는 실천적 신앙운동이 대두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타행(利他行)의 실천을 강조하고 출세간적(出世間的)인 자기본위의 전통적 불교를 소승(Hinayana)이라 낮춰 부르고 자기들의 입장을 대승불교라고 불렀다. 대승불교는 불타시대의 근본정신 회복을 지향하고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려는 것으로서 형식화된 부파불교의 자기반성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밀교의 대두

밀교의 대두

密敎-擡頭 인도는 본래 다신교의 나라였다. 불교가 성립되기 이전에 이미 바라문교(婆羅門敎)의 제신(諸神)을 숭배하였으며, 재앙을 막고 복을 받기 위한 요가수행과 성구(聖句)·만트라(眞言)의 구송(口誦), 불속에 물건을 던져넣으면서 하는 여러 종류의 기원 따위가 행해지고 있었다. 노력에 의하여 정각(正覺)에 이를 것을 이상으로 하는 불타의 가르침은 이들과는 배치되는 것이었으나 꽤 오래 전부터 불교 속에 바라문교의 여러 신들이 수호신으로서 받아들여졌고 또 수호주(守護呪) 따위가 독송되고 있었다. 7세기에 들어와서 화엄경(華嚴經) 등 대승불교의 경전을 기반으로 하여 바라문교와 기타 민간종교의 주법(呪法)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밀교가 성립되었다. 밀교라 함은 다라니나 만트라를 욈으로써 마음을 통일하여 정각에 이르고자 하는 실천적인 가르침이며 그 심오한 경지는 외부에서 들여다보아서는 알 수가 없다는 비밀교라는 뜻의 약칭이다. 여기에는 범신론적인 불타관은 나타나지 않고 만다라(曼茶羅)와, 외면 영험을 얻게 된다는 다라니(陀羅尼), 식재(息災)·조복(調伏)·증익(增益)을 위한 호마법(護摩法) 등 제법(諸法)의 채용이 그 특색이다.

잡밀·순밀

雜密·純密 초기의 밀교사상에는 제존(諸尊)도 정리되어 있지 않았으나, 7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대일경(大日經)과 금강정경(金剛頂經)이 성립하여 밀교의 이론적 근거가 정비되자 밀교교리의 실천에 의한 성도(成道)가 강조되었다. 이것을 순밀교라 칭하고 그밖의 것을 잡밀이라고 하여 구별한다. 순밀은 금강승(金剛乘)이라고도 한다.

좌도밀교

左道密敎 밀교는 바라문교 혹은 힌두교의 지반을 이용하여 퍼지게 되었는데 뒤에는 힌두교의 일파인 시바의 여신 샤크티(性力)를 숭배하는 샤크티파 따위와 결부되어 윤좌예배(輪坐禮拜)와 성적 황홀경 속에서 해탈을 얻으려는 좌도밀교(탄트라 불교)라고 하는 것으로 기울게 되었다. 이것은 인간의 애욕과 쾌락을 긍정하고 즉신성불(卽身成佛)을 가르치려 한 것이었으나 인도의 민중 사이에 잠재해 있었던 성(性) 숭배의 신앙과 겹쳐서 비외(卑猥)스러운 성적비의(性的秘儀)에 떨어지는 수가 많았다.

인도불교의 멸망

印度佛敎-滅亡 굽타 왕조(270∼470년경)를 중심으로 하여 최성기를 맞았던 대승불교는 뒤이어 고원(高遠)한 학문과 사상체계로 이론화되어 종교로서 민중으로부터 멀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한편 밀교는 민중의 현실적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었으나 힌두교적 색채가 강해짐에 따라서 불교 본래의 모습은 희박해지고 다시 좌도화(左道化)되어 타락의 길을 걸음으로써 당시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고 있던 인도 제왕(諸王)의 민족의식과 결부되어 부흥기에 있었던 전통 바라문교-힌두교 앞에서 후퇴를 당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있었다. 특히 12세기말부터 13세기초에 걸쳐 배타적 일신주의를 내건 이슬람 세력이 침입하여 불교의 중심지였던 비하르지 방을 점령하고 밀교의 본거지였던 비크라마시라 사원을 비롯하여 많은 불교사원을 파괴하고 많은 승려를 죽였다. 이렇게 하여 불교는 내외적으로 쇠퇴가 촉진되어 인도 땅에서 쇠망하게 되었다. 오늘날 아샘이나 벵골 지방에서 소수의 불교도가 잔존해 있으며 또한 일부에서는 부흥운동도 일어나고 있다.

참고 문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