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잭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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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
Michael Jackson in 1988.jpg
기본 정보
본명 Michael Joseph Jackson
출생 1958년 8월 29일(1958-08-29)
미국 인디애나 주 게리
사망 2009년 6월 25일 (50세)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직업 가수, 프로듀서
장르 알앤비, , 댄스 팝, 펑크, 뉴 잭 스윙
활동 시기

1963년 ~ 2009년(잭슨 파이브)

1971년 ~ 2009년 (솔로)
레이블 모타운, 에픽, MJJ Music
관련 활동 잭슨 파이브
웹사이트 www.michaeljackson.com

마이클 조셉 잭슨(영어: Michael Joseph Jackson, 1958년 8월 29일 ~ 2009년 6월 25일)은 팝의 황제(King of Pop) 라고 불리는 미국의 가수다.[1][2] 잭슨의 음악,댄스,패션,뮤직비디오는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다.[3]

역사상 가장 성공한 엔터테이너라는 기네스북 기록과 함께 잭슨의 정규앨범 《Thriller》는 6500만장의 판매고를 올려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4] 총 39개의 기네스북 기록을 남겼으며[5][6][7][8]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50년대 동안 빌보드 TOP 10 안에 든 유일한 가수다.[9]잭슨은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두 번 헌액된 몇 안되는 음악가 중 한 명이며 그래미 어워드에서는 13개의 상과 35세의 나이로 살아있는 전설상을 수상했다.[10] 4억장의 음반을 팔았으며 [11] 작사/작곡 능력을 인정받아 2002년 작사/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으며[12] 춤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국립 무용수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13] 또한, 인종차별을 부숴 유색인들의 인권신장을 이뤘다는 공로로 상을 받았다.[14] 잭슨의 음악은 시대를 앞서간 사운드로 구성되어 엔지니어들은 이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15]

AP통신은 잭슨은 비틀즈와 엘비스 프레슬리에 비견될 정도로 항상 센세이션을 불러온 팝스타였다고 평가했으며[16] 타임은 잭슨을 비틀즈엘비스 프레슬리 이후 최대의 가수라고 소개했다.[17] 뉴스위크는 잭슨의 추모 특집글에서 "잭슨 이전에는 프랭크 시나트라와 엘비스, 비틀스가 있었지만 잭슨 이후엔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며 "커트 코베인도, 머라이어 캐리도, 셀린 디온도, 비욘세도, 마돈나도 잭슨의 위상을 대신할 수 없었다"라고 보도했다.[18] 뉴욕타임즈는 " 음악의 세계에는 마이클 잭슨과 그외 모두가 있다. 전 세계적인 돌풍을 일으킨 마이클 잭슨은 대중문화 그 자체이지. 단순한 팝 뮤직이 아니다. 이런 가수는 한 시대에 한명 나올까 하는 가수이다. 그는 방송국들의 인종 차별 정책을 돌파하여 인종 간의 경계를 무너뜨렸으며 흑인 음악을 백인 관객들에게 가져왔다. 그리고 빈민가에서 탈출할 수 있으며, 에너지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라고 보도했다.[19]

잭슨의 음반 제작에 협력한 프로듀서 퀸시 존스는 "마이클 잭슨은 발소리 나지 않는 고양이 같은 우아함으로 무대를 누볐고, 기록을 갱신했으며, 세계 전역에서 문화의 장벽을 무너뜨렸고 우리는 80년대에 절정기를 누렸다. 다시는 어느 누구도 그런 수준에 도달하지 못 하리라고 장담한다" 라고 말했다.[18]

2014년 진행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뮤지션으로 잭슨을 2위로 뽑았다.[20] 빌보드에서는 2008년,2013년 각각 50주년 기념,55주년 기념으로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 가장 성공적인 상업적 성과를 올린 아티스트들을 분석한 결과 잭슨은 8위로 조사됐다. 또한, 역대 3번째로 가장 많은 빌보드 1위곡을 남긴 것으로 확인됐다.[21]

잭슨의 외적 변화, 개인적 인간 관계, 행동 등 사적인 부분은 많은 논란을 불러왔다. 1993년 아동 성추행 혐의로 민사소송을 당했고 법정 외 합의로 민사소송은 종결됐다. 형사 수사는 증거 부족으로 불기소 처분됐으며 잭슨에게 민사소송을 건 이반 챈들러는 2009년 11월 5일 자택에서 자살했다. 2005년에도 아동 성추행 혐의에 연루돼 재판을 받았지만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This Is It이라는 콘서트 시리즈를 통해 컴백을 준비하고 있던 중 2009년 6월 25일 프로포폴벤조디아제핀 중독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검사관은 잭슨의 개인 의사 콘레드 머레이를 살인 용의자로 지목했고, 머레이는 과실 치사죄로 2011년 9월 유죄 판결을 받는다. 잭슨의 죽음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으며, 추도식은 각국 방송국을 통해 생중계 되었다.[22] 'Global Language Monitor'가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마이클 잭슨의 죽음은 지난 수십년간 유명인들의 죽음 중 가장 큰 반응을 불러온 것으로 나타났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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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1978 : Jackson 5, 유년기[편집]

그의 유년 시절 미국 인디애나 주

1958년 8월 29일 미국 인디애나 주 개리에서 마이클 잭슨이 태어났다.[24]

1972년 잭슨 파이브. 가운데가 마이클이다.

1963년 잭슨은 아버지에 의해 형제 잭키, 티토, 저메인이 결성했던 잭슨 브라더스 밴드에 합류한다.

1966년 형 저메인과 함께 리드 보컬을 맡기 시작했고 밴드 이름을 잭슨 파이브로 바꿨다.[25] 같은 해 메이저 지역 탤런트 쇼에서 제임스 브라운의 〈I Got You (I Feel Good)〉를 불러 우승했다.[26]

1969년 모타운 레코드와 계약하기 전 지역 레코드사인 스틸타운에서 〈Big Boy〉 등을 포함한 몇몇 노래를 녹음하면서 전문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25] 《롤링 스톤》은 어렸을 적 마이클을 "신동이다", "압도적인 음악적 재능을 지녔다", "가장 이목을 끌면서 빨리 알려진 리드 싱어"라고 묘사했다.[27] 처음으로 발매했던 네 장의 싱글 〈I Want You Back〉, 〈ABC〉, 〈The Love You Save〉, 〈I'll Be There〉는 빌보드 핫 100 차트 진입과 함께 모두 1위를 하는 기록을 세웠다. 잭슨 파이브는 "가장 발전한 크로스오버 흑인 음악가의 본보기"라고 불렸다.[28] 이들은 지금까지도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보이밴드 1위로 평가받는다.[29]

1972년 ~ 1975년 사이 잭슨은 《Got to Be There》와 《Ben》을 포함해 네 장의 솔로 앨범을 발매했다. 상업적 성공을 거뒀으며 발매한 싱글〈Ben〉은 빌보드 핫 100차트에서 1위를 기록한다.

1973년부터 잭슨 파이브와 모타운 레코드는 갈등을 겪는다. 잭슨 형제들은 모타운 사운드에 벗어나 다채로운 사운드를 제작하여 음악을 하기 바랬으며 작사/작곡의 자유가 부여되길 원했지만 모타운은 이를 거부했다.[30] 이러한 갈등으로 인해 1975년 모타운을 떠났다.[31] 이후 CBS 레코드의 자회사 에픽 레코드와 계약했다.[31] 그룹 이름을 잭슨스(The Jacksons)로 바꿨다.

1978년 감독 시드니 루멧의 《마법사》에서 허수아비 역으로 출연했다.[32] 영화 작업을 하고 있던 중 영화에서 연주될 악보를 편집한 퀸시 존스와 만났고, 잭슨의 다음 솔로 앨범 《Off the Wall》을 같이 제작할 것을 약속했다.[33]

퀸시는 처음 잭슨을 만났을 때 "그는 지나치게 내향적이고 수줍어 하는 사람, 그가 대성공을 할 수 있을 지 확신할 수 없었다" 라며, 그러나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잭슨의 재능을 보게 됐고 "잭슨은 아티스트로서 모든 것을 갖추었다. 나는 프로젝트를 이끌고 나가는 데 익숙한 훈련교관인데 사실 마이클에게는 나같은 역할이 그닥 필요하지 않다. 그는 두 곡의 리드 보컬 부분과 세 곡의 백 보컬 부분을 단 하루 만에 해냈다. 잭슨은 열심히 작업에 임했다. 대부분의 가수들은 이용료가 비싼 스튜디오에서 모든 것 (작사/작곡 등)을 해결하려 했는데 그것들은 나를 미치게 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같은 프로듀서들이 잭슨을 원했던 이유이다. 그는 준비된 상태였으며 단 한 번의 세션에서 아주 많은 것을 마무리 했다. 내게 충격을 줄 만큼 감동적이었다." 라고 회고했다.[34]

한편 잭슨 파이브 시절 아버지 조지프 잭슨학대 사실이 논란을 불러왔다. 조지프 잭슨은 자신의 아들 마이클을 정기적으로 학대했음을 인정했다.[35] 마이클 잭슨은 1993년 오프라 윈프리쇼에 나와 유년 시절 고독을 느꼈다고 말했고 2003년에는 'Living With Michael Jackson'에 나와 아버지가 자신의 외모를 비하하여 이에 대해 큰 상처를 입었다고 말했다.

1979-1981 : Off The Wall, 첫 성인 1집[편집]

1979년Off the Wall》을 발매한다.빌보드 200에서는 3위를 기록했고 세계적으로 2,000만 장을 판매했다.[36] 빌보드 핫 100 1위에 오른 〈Don't Stop 'til You Get Enough〉와 〈Rock with You〉를 포함해 〈Off the Wall〉, 〈She’s Out of My Life〉총 네 장의 싱글을 10위권에 진입시켰다.[37][38] 앨범은 많은 평론가들에게 세련된 디스코로 구성됐다며 호평과 인정을 받았다.[39][40][41]2003년에는 롤링 스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500위에서 68위를 차지했다.[42] 2008년 《Off the Wall》 은 뛰어난 음악성을 인정 받아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다.[43]

1980년 잭슨은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에서 가장 좋아하는 소울/알앤비 앨범, 가장 좋아하는 소울 알앤비 남자 아티스트, 가장 좋아하는 소울/알앤비 싱글 부문에서 수상하며 총 3관왕에 올랐다.[44][45] 또 빌보드 연간 차트에서 탑 블랙 아티스트와 탑 블랙 앨범상을 받았고, 음악계의 아카데미로 불리는 그래미상에서는 〈Don't Stop 'Til You Get Enough〉로 최우수 남자 알앤비 보컬 퍼포먼스 상을 받았다.[37] 그러나, 잭슨은 그래미에서 상을 얻었지만 무척이나 실망했다고 자신의 자서전에서 밝혔는데 그 해 가장 많이 팔린 앨범 중 하나에다 평론가들에게도 찬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한 개의 상을 얻었다는 것은 동업자로부터 무시당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팠으며 나중에 안 사실에 의하면 업계에서도 그래미의 잭슨에 대한 대우에 놀랐다고 한다. 잭슨은 1980년 음반 도매 수익의 37%를 가져갔다. 이는 당시 음악 업계에서 가장 높은 로열티였다.[46] 잭슨은《Off the Wall》이 훨씬 더 큰 영향력을 줬어야 했다고 생각했고 다음 앨범은 기대를 뛰어넘는 것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47]

1982-1985 : Thriller, 문워크, 전성기[편집]

백악관 남쪽 현관인 사우스 포티코에서 로날드 레이건, 그의 부인 낸시 레이건과 함께 (1984년 5월 14일)

1982년Thriller》를 발매한다. 흑인은 흑인 음악을, 백인은 백인 음악을 할 당시에 인종이나 음악적 장르 구분을 완전히 무시하고 만들어진 이 앨범은 6500만장 이상이 팔린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다. 기네스북에도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등재됐다.[48] 대한민국의 경우 《Thriller》의 구체적 판매량은 조사된 적 없지만 1984년 3월 21일자 동아일보 신문을 보면 음반시장이 좁아 라이선스 음반은 5천장만 팔려도 잘 나간다고 보는 우리나라에서도 스릴러는 5만장이 팔렸다고 보도됐다.[49] 앨범은 빌보드 200에서 37주 동안 1위를 차지했고, 발매된 7개의 싱글 'Billie Jean', 'Beat It', 'Thiller', 'The Girl Is Mine', 'Wanna Be Startin' 'Somethin', 'Human Nature', 'P.Y.T.(Pretty Young Thing)' 이 모두 빌보드 핫 100의 10위 안에 올랐으며 그가 작사/작곡한 'Billie Jean'이 7주 동안 빌보드 핫 100에서 1위를 차지한 뒤, 'Beat it'이 정상을 차지했다. 한 가수의 곡이 1주일도 못돼 연속으로 차트 정상에 오른 경우는 비틀즈 이후 19년만에 처음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50] 역시나 평론가들에게 인정을 받았으며《National Association of Recording Merchandisers》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3위를 차지한다. 《Thriller》앨범은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국립 음반 기록소에 등재됐다. 2008년에는 그래미 어워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다.[51][52][53][54]

Thriller》는 MTV의 장벽을 무너뜨린 라는 데서 큰 의미를 갖는다.[55] MTV는 1981년 8월 개국하였는데 MTV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밥 피트먼은 방송의 구성을 로큰롤에만 제한했고, 당시만 해도 로큰롤은 백인들의 음악으로 결국 대부분의 흑인 가수들이 배제되는 상황이 초래됐다. MTV 개국 직후 뮤직비디오 750개 중 흑인 가수들의 노래는 40개가 되지 않는다. 흑인들은 이러한 MTV에 대해 인종차별 주의자라고 비난했다. 잭슨의 뮤직비디오가 제작되고 CBSBillie Jean 뮤직비디오를 MTV에게 제공하였는데 MTV는 거절했다. 그러자 CBS는 'Beat it' 뮤직비디오 영상을 제공하며 방영하지 않을 경우 다른 가수들의 모든 뮤직비디오를 빼버리겠다고 통지했다. MTV에서 방영되는 가수들의 대다수는 CBS 소속이었고 CBS가 빼버리면 MTV의 앞날이 위험해진다. MTV는 결국 CBS의 뜻을 받아들여 잭슨의 뮤직비디오를 방영한다. 이후 흑인 가수들의 돌파구가 생겨났다.[56][57][58][59]

잭슨의 영향력은 MTV에서만 통한 것이 아니다. MTV 말고도 많은 라디오들과 방송국들의 인종차별적 프로그램 정책을 돌파해냈다. 《Thriller》는 젊은 백인 청취자들의 취향에 맞추는 록 비디오 방송국들과 흑인 청취자들에게 어필하는 어반 댄스 음악 방송국에서도 틀어졌는데 《Thriller》전에는 매우 소수의 뮤지션들만이 이 미묘한 인종간의 경계를 넘을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한 일은 케이블 텔레비젼에도 일어났다. 흑인 가수들이 거의 나오지 않는 데서도 잭슨의 영상들은 방영되는 것이다. 흑인 가수들의 음악을 거의 안 튼다고 봐도 될 정도였던 Album Oriented Rock 계열의 라디오 방송국들에서도 잭슨의 노래와 영상은 방영됐다. 인종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대변화를 일으킨 것이다.[19]

영향력은 음반 업계에도 미쳤다. 70년대 후반 등장한 카세터 테이프 레코더 등의 이유로 음반업계는 장기간 불황이었고 레코드 가게는 계속해서 망해갔다. 그러나 잭슨의 음반만큼은 엄청나게 팔려나갔다. 그의 《Thriller》는 이러한 음반업계의 불황을 막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사람들이 잭슨의 음반을 사기 위해 가게로 몰리고 다른 가수들의 음반까지 사간 것이다. 레코드 판매 최호황인 78년의 총 판매수입이 41억 달러였는데 잭슨은 3천만장 이상을 팔아치우며 78년 한 해의 모든 레코드의 판매수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수입을 거뒀다.[17] A&M 레코드 사장 길 프리슨은 당시 "전체 음반산업은 잭슨의 성공으로 한 몫을 봤다" 라고 말했다.[60]

《Thriller》발매 당시 음반업계의 불황으로 인해 잭슨은 큰 고심을 겪었다. 잭슨과 함께 음반 제작에 협력한 사람들이 잭슨에게 200만장만 팔려도 요즘 음반시장에선 잘 팔린 것이라고 하자 잭슨은 불같이 화를 내며 다같이 열심히 만들었는데 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고 음반을 발매하지 않으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CBS 레코드 사장이 이같은 소식을 듣고 잭슨에게 전화로 위로를 하여 음반 발매를 하기로 결정했다.[61]

1983년 모타운 레코드 25주년 공연에서 잭슨은 'Billie jean'을 댄스로 선보인다. 잭슨의 트레이드 마크 춤 중 하나인 Moon Walk가 처음 대중 앞에 선보인 공연이다. 이 공연은 지난 50년간 미국인들이 다시 보고 싶어 하는 순간 7위로 뽑혔다.[62]

Thriller (노래)의 뮤직비디오가 11월 공개된다. 14분짜리 대작으로,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현재 미국 국회 산하 Library of Congress National Registry에 보관된 유일한 뮤직 비디오이다.[63]

잭슨의 대중적 인기와 매력이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펩시콜라는 유명인과 관련된 업계의 계약 기록을 깨고 잭슨과 500만 달러의 광고 계약을 체결한다.[64]

1984년 1월 27일 잭슨은 펩시콜라의 CF 광고를 촬영하는 도중 사고로 인하여 2도 이상의 화상을 입어 수술을 한다. 잭슨은 화상사고 책임 주체인 펩시에게 150만 달러를 받아 합의를 했다. 잭슨은 화상 치료센터에 합의금 150만 달러를 기부한다.[65]

2월 28일 음악계에서 가장 권위높으며 음악계의 아카데미라 불리는 시상식인 그래미 어워드 12개 부문 후보로 올라 8개의 상을 휩쓸어 최다 부문 후보,최다 수상이라는 기록을 세웠다.[66] 미국의 시사 주간지 "TIME"은 잭슨의 얼굴을 표지모델로 썼다. 잭슨이 흑인을 다시 음악의 주류로 올려놨다고 평가했다. 아프리카까지도 잭슨의 유명세가 떨쳤으며 일본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에서도 잭슨 따라하기가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됐다.[17]

낸시 레이건 영부인의 반마약 운동인 "Just say no" 캠페인에 자신의 자작 히트곡인 'Beat it'의 음을 빌려준 대가로 5월 14일에는 백악관에서 당시 대통령이었던 로날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초청을 받아 공개적으로 감사 인사와 상을 받는다.

1985년 'We Are The World'라는 곡을 만들었다. 이는 당시 오랜 기아로 인한 아프리카의 처참한 상황에 대한 구제 활동을 목적으로 이익금 전액이 아프리카의 구호 활동에 쓰여지도록 전해졌다. 세계적으로 약 1400만 장 이상이 팔렸다.

1986-1990 : Bad,외모,언론,Wacko Jacko,King of Pop[편집]

백반증으로 인해 얼굴이 하얘진 잭슨의 초기 모습(1988)

1986년 타블로이드 언론들은 잭슨이 노화를 늦추기 위하여 고압 산소 체임버에 자고 있다며 산소 체임버에 누워 있는 잭슨의 모습을 찍은 사진과 함께 보도한다. 이 소식은 미국의 주요 언론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였으며 세계적으로 빠르게 퍼져나간다. 여기에 잭슨이 침팬지를 키우기 위해 구매한 것도 언론에게는 기이한 행동으로 보였으며 그는 점점 일반인들에게 현실과 분리된 존재로 보였다. 또한, 잭슨이 영화에 출연한 한 남자의 시체를 사려한다는 소문도 퍼진다. 이같은 소문은 잭슨 측이 의도적으로 홍보를 위해 퍼뜨렸기 때문이다.[67] 이후 'Wacko Jacko'라는 별명이 생기는데 이는 미친 잭슨이라는 뜻이다. 타블로이드 언론들은 잭슨을 'Jackson' 으로 칭하지 않으며 'Jacko'로 칭하기 시작한다. 잭슨은 'Wacko Jacko'라는 별명을 무척이나 싫어했으며 그러한 말을 쓰지 말고 'Jackson'이라 불러달라고 말했다.[68][69][70][71][72][73]

마이클 잭슨과 타블로이드 언론과의 관계를 알기 위해 과거로 올라갈 필요가 있다. 타블로이드 언론들은 잭슨이 어렸을 때 <마이클 잭슨이 성전환 수술을 받고 남자 가수랑 결혼을 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려 큰 이미지 타격을 입힌 적이 있다. 이뿐이 아니다, 잭슨이 <Off the Wall>,<Thriller>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된 후에는 타블로이드 언론은 이전보다 더 근거없는 기사로 잭슨의 이미지에 타격을 줬다. 이에 마이클 잭슨 측은 1984년 9월 공개적으로 언론들의 루머에 대해 반박 성명을 발표한 적이 있다.[74] 이런 언론들에게 기겁한 잭슨은 자신이 "언론을 통제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갖게 되고 의도적으로 거짓된 사진과 기사를 담아 타블로이드 언론에 흘렸다. 거짓된 기사는 곧 모든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잭슨은 언론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결과물에 만족했다고 한다. 문제는 잭슨은 이런 홍보를 하는 것을 중단했지만 언론은 중단하지 않았다. 이전보다 훨씬 더 자극적이고 많은 내용의 기사들이 보도된 것이다.[75]

잭슨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나(잭슨)에 관한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믿어요. 사람들에게 당신이 화성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말해보지 그래요? 아니면 살아 있는 치킨을 먹는다거나 매일 밤 주문을 외우며 춤을 춘다고 말해보는 건? 아마 사람들은 당신 말을 믿어줄 거예요. 기자니까요. 그런데 만약 나, 마이클 잭슨이 그렇게 이야기했다고 생각해봐요. 사람들은 어떻게 말할까요. 세상에 마이클 잭슨은 완전히도 미쳤어. 저런 터무니 없는 말을 지껄이다니 믿을 수가 없어. 사람들은 나에 대해 어떤 것도 알지 못해요."

—Taraborelli, J.Randy

또한 잭슨의 피부색은 급격하기 바뀌기 시작한다. 이러한 피부색의 변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광범위한 관심을 받는다.

1987년Bad》를 발매한다. 빌보드 200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5개의 싱글이 빌보드 핫 100에서 1위를 차지했다. 이는 하나의 앨범에서 가장 많은 빌보드 1위곡이 나온 신기록이었다. 총 판매량은 3200만장 이상으로 추정되며 역사상 10번째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다.[76] 전작 《Thriller》에는 미치지는 못 했지만 다수의 평론가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5점 만점 중 올 뮤직 가이드에서는 4.5점을 《큐 매거진》에서는 만점을 받았으며 롤링 스톤에서는 4점을 줬다.뉴욕타임즈에서는 'favorable'로 평가받았다.[77][78][79][80] 뉴욕 데일리 뉴스는 1등급 작업,USA투데이는 스릴러 이후로 사람들을 춤추게 하는 최고의 패키지 워싱턴 포스트는“그의 명성을 손상시키진 않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81] VH1MTV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으로는 43위에 선정됐으며[82] 롤링 스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500개 중 202위로 선정됐다.[83]

Bad》의 대성공으로 인해 잭슨은 단 2개의 음반으로 80년대 가장 많은 음반을 팔았으며 80년대 가장 성공한 가수로서의 입지를 공고화 했다. 전작들과는 달리 모든 노래의 프로듀서에 참여하였으며 11곡 중 9개의 곡을 혼자서 만들어 아티스트로의 면모도 확고히 했다.

잭슨의 첫 솔로 투어인 Bad Tour일본을 처음으로 시작됐다. 총 123회 공연 440만명을 동원하는 큰 성공을 이루게 됐으며 영국에서 가장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구장인 웸블리 구장에서 7회 연속 매진이라는 신기록을 세워 50만 4천명의 관객들을 불러왔다.[84][85][86] 공연 도중 관객들이 기절하고 부상당하는 사태가 보고되어 안전상의 논란이 빚어졌다.[87][88] 일본에서는 암표가 논란이 됐다. 6,500엔의 좌석을 구매하여 11만엔에 다시 팔며 총 150만엔을 번 암표상이 체포됐다.[89]

"The Way You Make Me Feel"을 공연하는 마이클

1988년 첫 자서전 'Moon Walk'를 출판한다. 이 책은 4년동안 모두 200만권 넘게 팔렸고 뉴욕 타임즈에 베스트 셀러로 등극했다. 같은 해 3월, 캘리포니아 주 'Santa Ynez'에 17억을 들여,약 330만 5340평에 달하는 자신의 집인 네버랜드를 건립한다. 《Bad》는 발매 5개월 만에 1100만장이 팔려 1987년 한 해 동안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조사됐다.[90] 그러나, 앨범의 대성공과는 별개로 이 해 열린 그래미에선 한개의 상도 수상하지도 못 했다. 이에 잭슨은 크게 낙심했다고 한다. 관계자는 잭슨이 그래미에서 상을 얻지 못한 것에 대해 "그래미가 산소체임버 안에서 자는 사람에게 상을 주겠어요?" 라고 말했다고 한다.[91]

1989년 잭슨의 친한 친구이자 영화배우인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소울 트레인 시상식에서 잭슨을 'King Of Pop Rock Soul'이라고 칭했는데, 이는 대중화 되어 잭슨의 별명이 'King Of Pop (팝의 황제)' 이 된다. 미국의 대통령인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는 잭슨을 백악관으로 초청하여 세기의 아티스트상을 수여한다.[92]

잭슨이 'Bad'로 활동할 때 입었던 황금 군복 옷

1990년 당시 슈퍼스타들의 평균 로열티는 12%였는데 잭슨은 41%의 로열티를 받았으며 또한, 앨범 하나당 소속사에서 받는 돈은 500만 달러로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250만 달러,마돈나의 100만 달러보다 훨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93]

1991-1993 : Dangerous, 슈퍼볼, 전설상 수상[편집]

1991년 3월 잭슨은 소니와 6500만 달러의 재계약을 체결한다. 이는 기존 닐 다이아몬드의 기록을 갱신한 것이다.[94][95]

11월 《Dangerous》 를 발매한다. 3000만장 이상이 팔린 것으로 추정되며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 16위라는 기록을 세운다.[76] 영국 역사상 가장 빨리 많이 팔린 앨범이기도 하다.[96] 빌보드 200에서 4주 동안 1위를 차지했다. 인종 화합 메세지를 담은 첫 싱글인 'Black Or White'는 7주동안 빌보드 차트에서 1위를 했다. 대다수 평론가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Robert Christgau는 Off the wall 이후 가장 일관성 있는 앨범이라며 A-를 줬고 롤링 스톤은 《Bad》보다 훨씬 선명하다고 평가했다.[97][98][99][100][100][101]Dangerous》는 다시 잭슨 붐을 일으킨다. 1993년 대한민국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으로 1위에 뽑혔다.[102]

1992년Dangerous》는 전 세계에서 연간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조사됐다. 싱글 'Black Or White'는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서 세계적인 올해의 싱글 베스트 셀러를 수상했다.[103] 싱글 'Heal the World'는 영국유럽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영국에선 40만장의 싱글이 팔렸으며 차트에서 2주동안 2위를 차지했다.[104] 대다수의 유럽 국가에서도 5위 안에 들었다.[105] 그래미 어워드에서는 최우수 보컬 퍼포먼스 등 여러 상에 후보로 올랐고 최우수 엔지니어 앨범상을 수상한다.

잭슨은 'Heal The World Foundation'을 설립한다. 자선기부, 전쟁으로 인한 피해 지역, 불치병에 걸린 사람치료로 목적을 두었다. 이런 선행을 인정 받아 백악관에 가 부시 대통령에게서 상을 받는다.[106] 6월 27일부터는 'Dangerous World Tour'를 진행한다. 투어는 소련과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의 붕괴로 동구권 국가에서도 진행될 수 있었다. 그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도 공연을 개최하였는데 러시아의 라디오 PD인 블라디미르 이바넨코는 CNN에 나와 마이클 잭슨의 공연은 러시아 사람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으며 잭슨은 우리들에게는 별(미국)의 제왕이였다고 말했다.[107]

잭슨의 동구권 국가 공연은 서방이 몇 십년동안 못 했던 일을 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투어는 70회 공연 총 350만명의 관객들을 불러왔다. Dangerous World Tour의 라이브 동영상인 1992년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공연은 'HBO'라는 미국의 케이블 채널에서 2000만 달러에 구매하여 방영했다. 시청률이 21.4%로 미국 케이블 TV 역사상 가장 높은 시청률 중 하나가 됐다.[108][109]

1993년 1월 31일에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많은 스포츠인 미식축구의 결승전 하프타임에 나와 공연을 선보였다. 미식축구협회인 NFL은 결승전의 시청률 하락으로 많은 고심을 했는데 1993년 경기 중간에 잭슨이 공연을 함으로 시청률을 올리기로 계획을 세웠다. 하프타임쇼의 시청률은 1992년 보다 8.6% 높아졌으며 이후 하프타임에는 유명 가수들이 나와 공연을 하는 문화가 자리잡게 됐다.[110]

2월 10일에는 오프라 윈프리쇼에 나와 인터뷰를 했다. 시청률은 47.9%로 미국 역사상 가장 시청률 높았던 TV프로그램 8위이다.[111]

잭슨은 로스앤젤레스에서 35세의 나이로 '살아있는 전설상'을 그래미 어워드에서 수상한다.[10]

1993-1994 : 1번째 성추행 사건과 1번째 결혼[편집]

여름 잭슨 인생에서 최악의 사건이 터진다. 잭슨이 자신의 아들을 성추행 했다며 이반 챈들러가 민사소송을 건 것인데 이들의 연은 19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112] 1992년 잭슨은 도로 한복판에서 차가 고장이 나 어쩔 줄 몰라 했다. 잭슨이 차 고장으로 인해 쩔쩔매는 모습을 우연히 본 근처 카센터 직원은 그것을 사장 데이비 슈워츠에게 알렸다. 데이비 슈워츠는 훗날 잭슨이 자신을 성추행 했다며 주장한 조단 챈들러의 의붓 아버지이자 조단 챈들러의 친어머니인 준과 재혼한 사람이다. 슈워츠는 당시 아내 준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조단 챈들러는 열렬한 잭슨의 팬이고 조단은 잭슨이 펩시 CF 광고를 촬영하던 도중 화상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자 편지를 써서 빠른 쾌유를 빌기도 했다. 슈워츠는 조단을 이용하면 다시 사이가 좋아지지 않을까 잭슨에게 접근했고, 잭슨에게 차를 렌트해주는 조건으로 자기 아들과 놀아달라고 부탁했다. 잭슨은 부탁을 수락했고 조단과 그리고 조단의 어머니인 준 그리고 조단의 동생인 릴리까지 포함하여 네버랜드와 호텔 등에서 함께 놀았다.[112] 이들의 사이는 급격하게 좋아졌는데 한 타블로이드 언론에서 정보를 입수하고 마이클 잭슨의 새 가족이라는 특종으로 보도했다.[113] 한편 이혼한 남편 이반 챈들러는 이러한 잭슨과 소년의 우정에 질투를 느끼게 되고[113][114] 잭슨을 직접 대면한다. 이반 챈들러는 잭슨을 대면하고 나고선 그에 대한 악감정이 풀렸고 이반과 잭슨의 사이 또한 가깝게 된다. 잭슨은 이반을 최고의 아버지라고 칭찬했으며 이반은 잭슨에게 아예 우리 집 옆에 집을 지어 조단과 가까이 지내는 게 어떠냐고 제의를 했다.[114] 그러나 이들의 사이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한 건 조단이 잭슨과 함께 있고 싶다고 학교 친구들과 놀지도 않으며 잭슨에게만 붙어 있으려 한 시점부터다. 이반의 재정 상황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반은 치과 의사였지만 이혼으로 인해 위자료 6억원을 주며 시나리오 작가로서의 야망 때문에 거액이 필요했던 시점이다. 이반은 준에게 조단의 양육비를 줘야 하지만 줄 능력이 없는 상태였다.

이반 챈들러는 악덕 변호사로 유명한 베리 로스에게 찾아가 사건을 의뢰한 뒤 베리 로스는 잭슨에게 찾아가 2000만 달러의 합의금을 제시했다. 그들이 증거로 내세운 것은 조단의 녹음이었는데 조단은 처음에는 잭슨을 열렬히 좋아했으며 따랐으며 성추행을 당했다고 한 적이 없다. 이는 잭슨의 사립 탐정이었던 앤서니 펠리카노에 조사에서도 추가 확인된다. 그러나, 이반이 한 정신과 의사에게 조단을 데려가고 마취 전문의가 있어야만 투입할 수 있는 최면 진정제를 투입한 뒤부터는 조단의 말이 바뀌기 시작했다. 잭슨이 자신을 성추행 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때 사용된 최면 진정제'AMYTAL SODIUM'은 상당한 부작용으로 인해 비판이 심각하다. 이 약을 투여하게 되면 의식이 몽롱해지고 상대방의 말에 거역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또한 이 약을 사용하여 거짓 기억을 심어주는 것이 얼마나 쉬운 지 미국 워싱턴 대학 등에서 실험이 진행되고 입증이 되기도 했다.[113][115][116][117][118]

조단의 진술을 받아내는데 사용된 'AMYTAL SODIUM'

이때는 언론에 보도가 되지 않았으며, 이반 측과 잭슨 측 두 사이만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상태였다. 잭슨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상태였고 이반 측은 합의금 2000만 달러를 제시했지만 잭슨 측은 결코 안 된다며 거절했고 결국 둘은 합의를 이루지 못 한다. 1993년 7월 2일 조단의 의붓 아버지인 데이비 슈워츠는 이반이 왜 이러는 지 이해 할 수 없어 전화를 했고 전화의 녹음본이 공개됐는데 이반은 데이비 슈워츠에게 "일이 잘 되면 나는 대박일거야.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얻을 것이고 마이클 잭슨은 영원히 파괴될 것" 이라고 말했다.[119]

이반은 잭슨에게 민사소송을 걸었고, 아동복지국은 자체적으로 형사 수사에 착수한다. 네버랜드가 압수수색 되자 언론에서는 이러한 사건을 처음 알게됐고 잭슨을 향해 끊임없는 비난을 쏟았다. 준은 형사 조사에서 잭슨은 성추행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말했다. 12월 마이클 잭슨은 검찰에게 몸 수색을 당한다. 검찰은 마이클 잭슨의 성기 사진을 찍어, 조단 챈들러가 증언하는 잭슨의 성기 모양과 일치하는 지 확인하려 했는데 일치하지 않았다고 로이터 통신과 USA투데이가 보도했다.[120][121][122][123][124] 잭슨은 자신은 결코 죄가 없다며 결백을 호소했고 무죄 추정의 원칙을 주장했다. 그러나 극심한 스트레스와 진통제 중독 그리고 변호사들이 잭슨이 결백 하더라도 백인 중상류층 보수 지역인 산타바바라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며 끊임없이 합의를 권유하여 1500만 달러에 민사소송 사건을 합의한다. 일부는 합의를 혐의를 인정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합의안 내용을 보면 잭슨은 성추행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125][126] 민사 소송 문제는 해결됐다. 검찰청 검사 'Gil Garcetti'는 민사소송 합의가 형사 수사 건에 영향을 줄 수 없다고 말했다.[127] 증거의 부족으로 1994년 9월 22일 조사를 중단했으며[128][129] 경찰이 제시하는 증거들은 잭슨을 기소하기에는 충분한 설득력이 없었고[130][131] 이로 인해 형사 수사는 불기소 처분으로 종결됐다.

2005년 이반 챈들러는 아들 조단 챈들러의 눈에 스프레이와 후추를 뿌리며 실명을 시도했다. 또한 질식 행위로 죽이려고 한 충격적인 사실이 확인됐다. 조단은 법정에다 이반에 대한 접근금지 명령신청을 했고 법원은 받아들였다.[132] 이반 챈들러는 잭슨이 죽은 지 5개월 후인 2009년 11월 5일 권총으로 자살을 하며 생을 끝마쳤다.[133] 또한, LA DCFS(로스엔젤레스 아동복지국)가 당시 잭슨의 사건을 조사한 결과 잭슨의 혐의를 찾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134]

이 사건은 잭슨에게 큰 고통을 안겨줬으며 이후 불면증을 겪고 약물에 의존하게 된다. 불면증과 약물 중독 문제는 매우 심각했는데, 리사 마리 프레슬리는 잭슨은 잠을 거의 자지 못 했고 통증으로 인해 약물에 크게 의존했다고 한다.[135] 잭슨이 약물 중독으로 심신이 피폐해져 가자 잭슨의 주치의들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이에 대해 주치의는 "제발 살려달라고 우는 사람을 외면할 수 있겠어요?" 라며 약물 투입을 정당화 했다.[136]

1994년 5월 잭슨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결혼한다. 둘은 1975년부터 만나왔으며, 매우 긴밀한 관계였다. 둘은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결혼식을 치뤘다. 이 둘의 결혼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선사했다. 미국의 전설적 가수이자 많은 사랑을 받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이 마이클 잭슨과 결혼한다는 것은 큰 화제였다. 일각에서는 잭슨이 자신의 이미지 회복을 위해 리사 마리 프레슬리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 둘은 결코 그렇지 않다며 아주 사랑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같이 뮤직비디오 촬영을 하였으며 여러 시상식에도 동행했다.

1995-2000 : HIStory, 2번째 결혼과 자녀[편집]

1995년HIStory: Past, Present and Future, Book I》를 발매한다.

유럽에 있는 마이클 잭슨의 동상.

Disc 1에는 그의 히트 곡들이 수록돼 있고,Disc 2에는 그의 신곡이 수록됐다. 싱글 'You are not alone'은 빌보드 데뷔 첫주 만에 1위라는 '핫샷'으로 불리는 신기록을 세웠다.[137] 앨범은 2000만장 이상이 판매됐으며[76] 평론가들에게는 대체로 평균적인 수준이라는 반응을 얻었다.[100][138][139][140][141] 그래미 어워드에서는 올해의 앨범 상 후보로도 지명됐으며 1개의 상을 수상했다.[142] 미국에서는 발매되지 않았지만 유럽에서는 발매된 싱글 'Earth Song'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영국에서는 1위를 기록했고 1,160,000장의 싱글이 팔렸으며 독일에서는 최초로 잭슨이 1위를 한 싱글이다. 100만장의 싱글이 팔려 2x 플래티넘을 기록했다.[143]

한편 《HIStory: Past, Present and Future, Book I》 앨범은 유태인 비하와 우상화 논란을 겪었다. 싱글 'They Don't Care About Us'의 가사 중 'Jew'는 유태인을 비하하는 용어로 미국 내에서는 사용이 금기시 된 용어다.[144] 앨범 발매 전 6월 15일 뉴욕타임즈는 《HIStory: Past, Present and Future, Book I》에 인종차별적 요소가 들어있다고 보도했다.[145] 6월 17일 잭슨은 그 말을 선택한 것에 대해 공개적인 사과를 했다. 잭슨은 "이 가사는 오해의 소지가 있으며 이 노래는 편견과 증오에 대한 사회 정치적 문제를 끌기위한 한 방법이다. Jew라는 용어는 잘못된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선택한 용어였다" 라고 해명했다.[146] 이후 ABC와 인터뷰에서 자신의 많은 친구들이 유태인인데 왜 자신이 유태인을 비하하겠냐며 해명했다. 그러나 이런 해명에도 성급한 행동이었다며 일부 비평가들은 비판했다.[147] 공개된 'HIStory' 필름은 잭슨의 동상이 세워지고 수많은 들이 환호하는 속에 잭슨이 수많은 군사들을 이끌고 행진하는 모습이 연출된다.[148] 이 연출 때문에 잭슨이 파시즘의 영향을 받아 자기 우상화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잭슨은 ABC와의 인터뷰에서 결코 파시즘을 생각하며 제작한 것이 아니며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위해 선택한 노림수라 대답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연습도중 실신으로 인하여 병원에 입원한다.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으며 15분만 늦었어도 잭슨이 죽을 수 있었다고 의사들은 의견을 모았다.[149]

1996년 1월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이혼한다. 리사 마리 프레슬리는 2003년 인터뷰에서 잭슨과 정말 사랑을 했었고 잭슨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은 잘못됐다고 지적했다.[150] 이혼을 했지만 사이가 쭉 나쁜 것은 아니었다. 이혼 후 잭슨과 같이 식사를 하기도 했으며 잭슨의 월드 투어에 초청을 받아 공연을 보았다.

9월에는 HIStory World Tour를 개최하는데 5개 대륙 35개국에서 총 82회 공연으로 450만명의 관객들을 불러 온다. 관객 수치로 판단하면 잭슨의 투어 중 가장 성공적인 투어다.[151] 11월에는 '데비 로우' 라는 간호사와 재혼한다. 데비 로우는 1980년대 초반부터 마이클 잭슨과 아는 사이였다. 잭슨은 백반증으로 인해 피부과를 방문했는데 당시 잭슨을 돌 본 간호사가 데비이다. 데비는 잭슨의 열렬한 팬이었고 잭슨에게 싸인을 받기도 했으며 자주 통화를 하며 둘은 가까워 졌다. 리사 마리 프레슬리도 데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150][152][153][154]

1997년 칸 영화제에 참여한 마이클 잭슨

1997년 2월 13일 잭슨의 첫번 째 자녀 마이클 조셉 잭슨 주니어가 태어난다. 5월 20일 리믹스 앨범 Blood on the Dance Floor: HIStory in the Mix를 발매한다. 200만장 이상이 팔린 것으로 집계됐다. 이 앨범에 수록된 Blood on the Dance Floor (노래)는 미국 빌보드 핫 100에서는 42위에 그쳤지만 영국에서는 1위를 유럽의 대부분 지역에선 10위 안에 드는 히트를 쳤다.

1998년 잭슨의 두번 째 자녀. 패리스 마이클 캐서린 잭슨이 태어난다.

1999년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이라는 공연을 한국 서울독일 뮌헨에서 개최한다. 10월 8일에는 '데비 로우'와 이혼을 한다.

2001-2002 : Invincible, 9.11 자선, 발코니 논란[편집]

2001년 9월에는 1984년 이후 처음으로 형제들과 다시 모여 뉴욕에서 마이클 잭슨 30주년 기념 공연을 열었다. 10월 잭슨의 6번째 앨범 《Invincible》이 발매된다. 유일하게 잭슨의 성인 시절 앨범 중에서 빌보드 핫 100 1위곡이 나오지 않았다. 또한 9.11 테러로 인하여 판매량에서 피해를 입었고 소속사 소니와 불화로 싸우게 된다.

2002년 3번째 자녀 프린스 마이클 잭슨 2세가 태어난다. 어머니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았으며 잭슨은 'Living With Michael Jackson'에서 대리모에게 자신의 정자를 인공 주입하여 낳은 것이라고 말했다. 11월 20일 잭슨은 독일 베를린호텔에서 아기를 보고 싶다며 환호하는 팬들을 향해 창가에서 프린스 마이클 잭슨 2세를 보여줬는데 창가에서 아기를 흔드는 것 같은 모습으로 비춰졌다. 언론에서는 잭슨을 향해 엄청난 비난을 퍼부었다. 잭슨은 이에 대해 끔찍한 실수였다며 인정했고 팬들이 아기를 보고 싶어하길래 손으로 꽉 잡고 보여준 것이라며 결코 흔든 게 아니라고 해명했다.[155]

10월 27일에는 9.11 테러를 추모하기 위해 잭슨이 주도하여 가수들을 모아 What More Can I Give 라는 노래를 만들고 자선 공연을 개최했다.

11월 18일에는 잭슨의 히트곡을 모은 'Number ones' 앨범이 발매된다. 전 세계에서 1000만장 이상이 팔렸다.

11월 20일에는 'One more chance' 라는 잭슨의 싱글이 발매된다. 경찰의 수사로 인해 뮤직비디오는 완성된 지 못한 채 발표됐다. 미국 빌보드 핫 100에서는 83위를 기록했지만 영국 차트에서는 5위를 기록했다.

2003-2005 : Living With Michael Jackson , 성추행 재판, 무죄[편집]

2003년 2월 영국기자 마틴 바시르가 240일 동안 마이클을 동행하며 찍은 'Living With Michael Jackson'이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된다. 영국의 'ITV' 방송국이 최초로 방영했다. 영국에서는 1400만 가구 시청. 총 시청자 수는 3800만명으로 53.9%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156] 2월 4일에는 네덜란드에서 방영되어 140만 가구가 시청하여 20.4%의 시청률을 2월 6일에는 미국 ABC 방송국이 방영하였는데 18.7%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157] 2월 13일에는 이스라엘에서 방영되어 28.4%의 시청률을 일본에서는 2월 24일 방영되었는데 관동 지역에서 22.6% 간사이 지역에서 25.9% 순간 최고 시청률은 27.8%를 기록했다. 이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잭슨 측은 큰 배신감과 분노를 느끼고 있다며 성명을 발표했다.[158][159] 잭슨은 자신의 행동을 악의적인 편집으로 왜곡한 것이라며 'The Michael Jackson Interview : The Footage You Were Never Meant To See' 이라는 비디오를 제작하여 반박했다. 미디어는 마틴 바시르에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잭슨을 왜곡했다며 옐로 저널리즘이라며 비판했다.[156] 그의 전 아내 리사 마리 프레슬리는 2010년 오프라 윈프리쇼에 나와 실제 잭슨의 모습은 'Living With Michael Jackson'에 나오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Living With Michael Jackson' 은 대한민국에서는 온스타일이 '마이클 잭슨의 잔인한 진실' 이라는 이름으로 2009년 방영했다.

'Living With Michael Jackson'은 큰 후폭풍을 몰고 온다. 다큐 후반부 장면에서 잭슨은 개빈 아르비조라는 암에 걸린 13살 소년과 함께 출연했다. 개빈 아르비조는 암에 걸렸지만 치료비가 없어 치료를 하지 못 했다. 개빈은 한 코미디 클럽에 들렸는데 코미디 클럽의 사장이 개빈이라는 소년이 암에 걸려 곧 죽게 생겼다는 딱한 사정을 듣자 원하는 소원을 말해보라고 했다. 그러자, 개빈은 자신이 만나고 싶어하는 유명인이라며 3명을 적었는데 그 중 2순위가 마이클 잭슨이었다. 마이클은 이 사실을 알게 되고 개빈에게 치료비를 대줘 암을 이겨내는데 도움을 줬으며 개빈은 이후 잭슨의 집인 네버랜드에 놀러오는 등 개빈과 마이클의 사이는 가까워 졌다. 다큐에서 논란이 됐던 장면은 잭슨이 개빈과 상당히 친밀했으며 같이 한 방에서 논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잭슨은 기자에게 항변했다. "왜 아이들과 같이 놀고 자는 것이 문제인가? 그것을 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이상하다. 아이들과 함께 난로 앞에 앉아 따뜻한 우유와 쿠키를 먹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다큐를 본 일부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들은 잭슨과 개빈의 관계가 부적절 해 보인다며 산타바버라의 어린이보호당국과 로스엔젤레스의 아동복지국에 자체적으로 조사에 착수해야 한다며 서신을 보냈다.[160] 산타바버라 보안관 부서와 아동복지국은 비밀 리에 조사에 착수했다. 이들은 아르비조 가족들과 접촉하여 잭슨과 어떤 관계인지 물었다. 개빈의 어머니인 재닛 아르비조는 잭슨은 우리들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이며 다정한 사람이라고 칭찬하며 눈물을 흘렸다. 개빈은 결코 성적인 행위같은 건 없다며 말했으며, 개빈의 누나 데블린은 잭슨은 우리에게 축복이나 마찬가지였다며 울었다. 개빈의 아버지인 데이비드 아비조는 잭슨덕분에 자신의 아이들과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161]

아동복지국은 이같은 조사 결과와 함께 모든 가능성을 검토한 후 성추행 혐의가 없음을 밝히면서 사건을 종결했다. 로스엔젤레스 경찰당국과 산타바버라 카운티 보안국 또한 잭슨에게는 죄가 없다며 사건을 공식적으로 종결했다.[162] 그러나, 훗날 이번 사건으로 잭슨을 기소한 검사인 톰 스네던은 아동복지국과 경찰당국의 조사 결과를 엉터리라며 무시하고 은폐했다. 톰 스네던 검사는 개빈 가족들과 인터뷰를 하지도 않았다.[162]

이같은 소식이 잭슨 측에도 들려오자 잭슨 측근들은 1993년의 일처럼 또 다시 안 좋은 일이 터질까 엄청난 긴장을 했다. 잭슨의 변호사인 마크 제라고스는 이번 사건에 정보를 얻기 위해 이리저리 발을 움직였다. 측근들은 잭슨에게 자칫하면 위험해질 수 있으니 개빈 가족들과 거리를 두라고 충고했고 잭슨도 이에 동의하여 개빈 가족과 서서히 거리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잭슨이 거리를 두기 시작하자 개빈 아르비조의 어머니인 제닛 아르비조는 레리 펠드먼이라는 1993년 잭슨에게 소송을 건 이반 챈들러의 아들 조단 챈들러를 변호한 변호사를 찾아갔다.[163]

레리 펠드먼은 개빈을 데리고 스탄 캐츠라는 한 정신과 의사를 찾아간다. 스탄 캐츠는 그 자리를 통해 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잭슨이 개빈에게 술을 먹였으며 자위 행위를 하도록 강요했다는 것이다. 아동복지국의 조사에서 성추행을 당한 적이 없다고 한 것은 잭슨 측의 협박 때문이였다고 한 것이다. 또한, 스탄은 잭슨에 대해 그러나 소아성애자는 아닌 걸로 보인다. 다만 정신 연령이 10살에 멈췄을 뿐이라고 소견을 내렸다.[164] 스탄은 이같은 보고서를 캘리포니아 법에 따라 경찰에 제출했다.[165]

개빈 가족들의 과거 전력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1998년 8월 개빈 가족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J.C 페니 백화점에서 절도 혐의로 구금된 적이 있다. 구금에서 풀려난 뒤 개빈의 어머니인 재닛은 백화점을 상대로 경찰에게 폭행을 당했다며 300만 달러의 민사소송을 걸었다. 백화점 측에서 고용한 정신과 의사는 재닛이 정신분열증과 망상증을 앓고있다며 진단했다. 재닛을 직접 치료했던 다른 의사는 그녀는 불안감과 우울증을 앓고있지만 망상증은 없었다고 했다. 재닛은 2년 후 백화점을 상대로 구금 당시에 경찰들에게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다며 또 다시 민사소송을 걸었다. 백화점 측을 변호했던 톰 그리핀 변호사는 재닛은 끔찍한 이야기를 지어내서 그냥 지껄이며 개빈 가족이 잭슨에게 고소를 한 것에 대해선 이번에는 아예 홈런을 치려는 작정인 것 같다며 갈취사건 제2부라고 말했다. 백화점은 재판이 열리기 전인 2001년 13만 달러의 합의금을 주고 사건은 종결된다.[166]

11월 20일 경찰은 잭슨에 대해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 21일 경찰에 자진 출두하여 구속당한 뒤 300만 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 난다.[167]

2004년 검찰은 네버랜드를 압수수색 하고 4월 톰 스네던 검사는 잭슨을 기소한다.

2005년 재판이 시작되고 4월 13일 재닛 아르비조는 첫 증언을 했다. 잭슨이 열기구로 자신과 아이들을 납치하려 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외에도 수많은 증언들을 했다. 그런데 주장들이 너무나도 황당해 당시 공판을 직접 본 기자들의 대다수는 잭슨이 무죄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168] 재판이 진행되면서 잭슨을 방어하기 위해 네버랜드에서 잭슨과 같이 있던 아이들이 나와 잭슨에게 결코 성적인 일을 당한 적이 없다며 잭슨을 방어했다. 또한, 잭슨에게 납치를 당할 뻔 했다는 주장과 달리 재닛 아르비조가 주장한 납치 시기에 아르비조 가족들은 고급 식당에서 무단으로 한화 700만원 이상의 식사를 하고 잭슨에게 이를 대신 내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 드러났으며 검찰의 주장과는 달리 성추행 증거를 입증할 DNA가 발견되지도 않았다.[169] 재닛이 잭슨에게 합의금을 요구한 것도 잭슨이 무죄 판결을 받은 이유 중 하나이다. 자신의 아이가 성추행 당했는데 어째서 합의금을 먼저 요구한 것이냐는 배심원들의 생각이었다.

재판 결과 배심원들의 만장일치 무죄로 잭슨이 승리했다. 잭슨이 죽고나서 2009년 잭슨의 성추행 혐의에 대한 FBI 파일이 공개됐는데 FBI는 마이클 잭슨에게 혐의점을 찾을 수 없었고 아동복지국 조사 결과에서도 개빈 아르비조와 가족들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증언을 못 얻어 불기소 처분을 할 것을 권유했지만 검찰은 FBI와 아동복지국의 의견을 무시하고 마이클 잭슨을 기소한 것으로 확인됐다. FBI는 네버랜드와 마이클 잭슨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수사에서도 성추행에 대한 단서를 찾지 못 하자, 루머로 마이클 잭슨을 괴롭혔던 타블로이드들의 보도가 사실일 지 모른다는 하나의 가정을 갖고 이들 보도에 대한 수사까지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타블로이드 언론들의 보도는 개연성과 증거가 없었다.[170]

잭슨과의 재판 이후 재닛 아르비조는 2007년 공문서 위조를 통해 최저생계비용을 부당으로 취득한 사실이 드러나 기소당하여 벌금과 사회봉사명령을 받았다.[171]

불미스러운 일이 계속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잭슨을 비난했다. 가장 바보스러운 미국인으로 수년간 뽑히는 등 명예가 크게 실추됐다.[172]

2006-2009 : 마지막[편집]

2006년 재판 이후 은둔 생활을 하던 잭슨은 MTV 재팬과 런던 뮤직 어워드에서 상을 받기 위해 모습을 드러냈으며, 6월달엔 일본의 방송 프로그램인 SMAP×SMAP에 출연했다. 한편 마이클 잭슨이 거주했던 집인 네버랜드는 돈의 문제로 인해 안채가 폐쇄되었다. 잭슨은 당시 재정적으로 위태로운 상황에 있었다고 한다.[173]

2006년, 프랑스 파리에 있는 디즈니랜드로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가는 잭슨

2008년Thriller 25》라는 기념 앨범을 발매한다. 앨범에는 기존의 《Thriller》 곡들이 수록됐고,새롭게 리믹스 시킨 곡과 미공개 곡이 함께 추가됐다. 발매 작업을 위해 힙합&알엔비 프로듀서이자 유명랩퍼인 카니예 웨스트에이콘, 퍼기, 윌 아이 엠이 참여했다. 또한 일본판에는 그의 라이브곡을 여러개 수록했다. 전 세계에서 300만장이 팔렸고, 벨기에, 콜롬비아, 유럽, 인도 차트에서 1위를 했다. 또한 같은 해 King of Pop이라는 베스트 앨범이 발매된다.

2009년 마이클 잭슨은 3월 영국 런던에서 복귀를 선언했다. 그는 이번 공연이 마지막이 될 것이며 팬들이 원하는 노래를 부를 것이라고 했다. 처음 10회의 공연이 계획됐는데 표가 빠르게 매진되자 40회의 공연이 더 추가됐다. 공연은 2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O2 아레나에서 7월 13일부터 2010년 3월 6일까지 열릴 것으로 계획되었고, 75만 개의 티켓은 전부 매진되었다.[174][175]

죽음[편집]

사망[편집]

잭슨의 사망 소식이 보도되고 많은 팬들은 그의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꽃을 두고 갔다.

2009년 6월 25일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그의 저택에서 콘레드 머레이에 의한 정맥 주사 투입으로 인한 급성 프로포폴 중독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50세(한국 나이로는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2시 22분 911을 부르고 의료진과 구급대원들이 3분 만에 잭슨의 맨션으로 출동했다. 주치의는 마이클 잭슨에게 법정에서 2.5ml의 프로포폴을 주입했다고 말했으나, 그의 집에서 다쓴 프로포폴 100ml 병이 발견되었다.

1시 13분 인근 병원인 Ronald Reagan UCLA Medical Center로 이송된다. 2시 26분 병원관계자는 잭슨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주치의 콘래드 머레이는 여자친구와 지인에게 약 40분가량 통화한 뒤 911에 신고한 것으로 확인되었다.[176] 대한민국의 15대 대통령이었던 김대중은 6월 26일 외신을 통해 "우리는 세계의 한 영웅을 잃었다. 또한 우리는 한국의 통일에 부단한 관심을 가지고 성원해 준 사랑스러운 벗을 잃었다. 한국 국민은 슬프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우정을 나눠온 좋은 친구를 잃어 슬프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라며 마이클 잭슨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177] 한국의 민주당은 26일 한국의 통일을 기원한 잭슨의 사망을 애도한다고 성명을 발표했다.[178]

마이클 잭슨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보도되고 언론에서는 잭슨의 죽음에 대해 근거없는 추측을 했다. 타블로이드지의 주사바늘,자살,슈퍼 박테리아,피부암,성형 후유증 보도 등이 이어졌지만 부검 결과 마이클 잭슨은 사망 당시 50세 미국인의 건강에 비춰봤을 때 건강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179]

잭슨의 사망 소식이 보도되고 뉴스 웹사이트는 사용자 폭주로 빠르게 과부하에 걸린다. 잭슨의 사망 소식을 최초 보도한 TMZ와 뉴욕타임즈는 서버 폭파 현상을 겪었으며, 구글은 마이클 잭슨 검색어 량이 수백만씩 폭등하자 DDoS 공격으로 간주하고 30분동안 마이클 잭슨 관련 검색을 차단했다.[180]

7월 7일 로스앤젤레스스테이플스 센터에서 그의 장례식이 거행됐다. 장례식에는 자넷 잭슨, 스티비 원더, 스모키 로빈슨, 어셔, 라이오넬 리치, 제니퍼 허드슨, 저메인 잭슨 등이 참석했으며, 잭슨의 딸인 패리스 잭슨이 모습을 드러냈다. 또한 미국 내에서 실시간 중계됐으며 총 시청자 수는 3110만명으로 로널드 레이건웨일스 공작부인 다이애나 다음으로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장례식이 됐다.[181] 또한 잭슨의 딸인 패리스 마이클 캐서린 잭슨은 아빠는 최고였으며 정말 사랑한다고 추도사를 읽었다. 9월 13일에는 마돈나가 'VMA'에서 황제여 영원하라며 잭슨을 추모했다.[182]

9월 3일, 사망 70일 만에 글렌데일의 포리스트론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183]

12월 28일 AP통신미국 기자들을 대상으로 2009년 10대 연예뉴스를 선정한 결과 잭슨의 죽음은 1위를 차지했다. AP는 "팝의 역사에서 가장 중대하고 충격적인 죽음"이라고 뒷붙였다.[184]

2010년 1월 11일, LA카운티 검시소에서 마이클 잭슨에 대한 검시기록의 일부를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마이클 잭슨의 사인이 타인에 의해 주사 된 정맥내의 과량의 프로포폴 및 약물에 의한 살인 (Homicide) 으로 명시됐다.[185]

2011년 1월 25일 LA지방검사보 데이비드 월그렌은 마이클 잭슨의 주치의 콘래드 머레이를 과실치사죄로 기소했다. 2011년 11월 7일 콘레드 머레이는 유죄 판결을 받는다.[186]

2014년 'YouGov'라는 유명 여론조사 업체에서 미국인에게 마이클 잭슨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응답자의 61%가 잭슨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며 응답했다. 32%는 비호감을 표시했다. 이는 11년 전인 2003년 갤럽의 여론조사인 호감 18% 비호감 65%와는 상반되는 결과다.[29]

사후[편집]

10월 28일 영화 마이클 잭슨의 디스 이즈 잇이 2주동안 개봉되었다. 영화는 빠른 속도로 매진됐으며 특히, 영국에선 티켓 판매 역사상 가장 빨리 많이 팔린 기록을 세웠다.[187] 동명의 앨범인 This Is It이 같은 해 10월 26일에 발매됐다. 또, 이 앨범에 실린 싱글인 'This Is It'이 발매됐으며, 빌보드차트에서 앨범은 1위, 싱글은 43위에 머물렀다. 2009년 12월 24일 미국 FBI는 마이클 잭슨에 대한 수사 파일들을 공개했다. 여기에는 살해 협박 편지등을 포함해 마이클 잭슨의 아동 성추행 수사 파일들도 들어있다. 이 정보 공개를 통해 그가 아동 성추행에 혐의가 없음을 다시 확인하게 됐다.[188]

2010년 2월 52번째 그래미 어워드에서 '평생 공로상'을 아들과 딸이 대리수상 받는다. 2010년 11월, 에픽 레코드와 마이클 잭슨 재단은 그의 첫 사후앨범인 《Michael》를 발매한다. 첫 싱글은 지난 2007년과 2008년에 R&B 가수인 에이콘과 작업했으나, 유출됐던《Hold My Hand》가 첫 싱글이다. 빌보드 200 3위를 기록했다. 수록된 몇몇 곡은 마이클 잭슨의 목소리가 맞는 지에 대한 논란 또한 벌어졌다.

2013년 5월 '웨이드 롭슨(Wade Robson)'이라는 댄서가 마이클 잭슨의 1조 이상 부동산에 대해 보상 청구권을 냈다. 롭슨은 2011년 신경쇠약으로 쓰러진 뒤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도중 억압된 기억이 해방돼 잭슨에게 성추행 당한 기억이 생각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2015년 5월 26일 미국 LA 대법원이 근거가 없다고 기각함으로 사건은 종결됐다.[189] 이 시기를 틈타 타블로이드 언론들은 사실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퍼뜨렸다. 타블로이드 언론들의 기사에 마이클 잭슨 유산 관리원 측은 '당신들이 본 타블로이드 기사는 사실이 아니며 마이클로 이익을 얻기 위한 타블로이드 언론들의 보도를 매우 혐오한다. 팬들이 우리와 함께 마이클의 업적을 보호하는데 함께 했으면 좋겠다' 고 성명을 발표했다.[190] 또한, CNN에서는 타블로이드 언론들의 보도를 직접 반박했다.[191]

2014년 5월 사후 잭슨의 미발표곡을 모은 앨범《Xscape》가 발매된다. 잭슨의 미공개 작업물에 자유 열람 권한을 가진 에픽 레코드의 대표이자 CEO인 엘 에이 리드(L.A. Reid)를 통해 1983년부터 1993년 사이에 녹음된 총 8곡이 수록된다. 그 중 5월 2일 아이튠즈를 통해 선공개된 첫 싱글 《Love Never Felt So Good》은 공개 24시간만에 차트 5위권에 올랐을 뿐 아니라, 17개국에서 1위를 석권하고 67개국에서 5위권 안에 진입했다. 이로써 이 싱글은 잭슨의 통산 49번째 HOT 100 차트 진입곡이 됐다.[192] 앨범은 발매와 동시에 49개국 아이튠즈에서 앨범 차트 1위에 올랐으며 빌보드 200에서 2위를 기록했다. 《Love Never Felt So Good》은 빌보드 9위에 올라 마이클 잭슨은 50년대에 걸쳐 빌보드 TOP 10에 진입한 유일한 가수가 됐다. 2015년 1월 11일 기준으로 이 앨범은 1,523,000장이 팔린 것으로 집계됐으며 이는 2014년 판매된 앨범 중에서 14위에 해당되는 판매량이다.

5월 19일 열린 2014 빌보드 뮤직 어워즈에서는 마이클 잭슨의 홀로그램 퍼포먼스를 공개했다.[193] 컴퓨터 그래픽으로 돌아온 마이클 잭슨은 16명의 댄서들과 춤을 선보였으며 문워크를 선보인다. 1년이 넘는 준비기간과 100여 명의 스태프들이 동원됐다.

마이클 잭슨의 네버랜드가 콜로니 캐피털에 의해 매각될 것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마이클 잭슨의 유산 관리원은 이같은 소식에 매우 낙담스럽고 슬프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마이클 잭슨은 2008년 콜로니 캐피털과 네버랜드 합작투자를 위해 계약을 체결하였는데 콜로니 캐피털이 투자를 하면 할수록 콜로니 캐피털이 소유하는 지분은 늘어난다. 지난 6년 동안 콜로니는 네버랜드의 500억 이상을 투자한 것으로 추정되며 네버랜드를 매각할 수 있는 권리 또한 가지게 됐다.[194]

마이클 잭슨의 사후 소득이 1억 달러 이상이라는 뉴스가 보도됐다. 이는 생존 가수들보다 훨 높은 것으로 그의 인기와 상업성이 죽어서도 끝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195]

성과와 기록[편집]

영향력[편집]

빌리 진을 추는 마이클 잭슨

대중음악계의 혁명을 불러왔다. 영국 연구진이 빌보드 핫 100에 오른 1만 7천개의 곡을 분석한 결과 대중음악계는 1964년,1983년,1991년 총 3차례의 혁명을 맞이했으며 잭슨은 1983년 혁명기를 수놓은 대표적 팝스타로 조사됐다.[196]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연 주역이다.[3] 달에서 유영하는 것 같은 브레이크 댄스와 문워크 그리고 200개의 영화 장면을 응용하여 만든 안무인 'Dangerous' 빌리 진과 'Beat it' 스릴러 뮤직비디오 등은 [15] 많은 사람들의 눈을 사로 잡았으며[197] 이는 현대 가수들에게 교과서적인 역할을 했다. 잭슨은 음반산업에서 독립적인 상품으로 뮤직비디오를 여는 첫 신호탄이었으며[198] 대중음악을 '연예사업'으로 물꼬를 돌린 주인공이자 스타 이미지의 중요성을 알렸다.[199] 잭슨의 공연은 항상 새로운 시도들로 가득했으며, 투어 공연에는 처음으로 뮤지컬 개념을 도입했다. 메이저 가수로서 아시아 주요 국가에서 투어 공연을 한 것도 잭슨이 처음이며 새로운 장비도 집으로 끌어들여와 사용하는 혁신적 시도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러한 시도들은 많은 가수들에게 영감을 줬다.[200] 'Off the Wall'은 모타운의 훵크 사운드를 하드록 기타로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증명했고 'Thriller'와 'Bad (음반)'는 MTV가 팝시장의 주류 매체가 되도록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 이런 흐름은 지금 21세기에도 유효하며 한국의 주류 댄스 가요는 마이클 잭슨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한다.[198][201]

댄스대중화에 공헌을 했다. 1974년 'Soul Train'에서 J5의 일원으로 출연해 로봇춤을 유행시켰으며, 뒷골목에서 흑인들을 중심으로 유행하던 브레이킹 댄스를 공중파에서 선보여 전국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끈다.[202][203] 'Thriller'와 'Beat it'의 뮤직비디오에서 최초의 집단군무를 선보였고 이는 뮤직비디오의 고전이자 원형으로 자리 잡았다.[200] 뛰어난 노래에 몸을 맞춰 추는 그의 모습은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으며 잭슨의 춤을 본 많은 사람들이 춤을 추기 위해 댄서에 도전했다. 잭슨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린 후 많은 유명 댄서들은 잭슨에게 큰 영향을 받았으며 춤의 아버지를 잃었다고 애도를 표했다.[204]

음악계의 흑백 장벽을 허물었다. 방송국들의 인종차별 정책을 돌파했고 잭슨의 성공으로 흑인 뮤지션들의 음악계 진출에 활로가 생겼다.[19][56] 잭슨의 성과는 흑인을 포함한 유색 인종들에게 자신감과 긍지를 부여했다. 잭슨은 'Thriller' 로 대성공을 거두고 당당히 타임지의 표지 모델을 장식했다. 타임은 잭슨이 흑인을 음악의 주류로 올려놨다고 평가했다.[17] 잭슨은 20세기 미국의 영웅이라는 소리도 들었으며[205] 유색인들의 인권신장에 기여했다는 공로로 유색인 지위향상협회(NACCP Image Award)에서 상을 받는다.[14] 유명 농구 선수 매직 존슨은 흑인을 위해 수많은 문을 열어줘서 감사하다고 애도를 표했으며 마틴 루터 킹 2세의 아들 마틴 루터 킹 3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훌륭히 해낸 최고의 엔터테이너라고 마지막 인사를 했다.[206]

팝 레코딩의 교과서,팝 사운드의 새 기준을 제시했다고 평가를 받는다. 정일영 음악평론가는 잭슨의 음반 사운드는 현대음악의 기준으로 불려도 될 만큼 충실하며 스테레오 효과를 극한까지 올린 팝 레코딩의 교과서이며 엄청난 완성도를 보여주는 그의 음악 세계는 그냥 팝이라고 흘리기에는 음향 엔지니어로서 배울 점이 너무나 많다고 평가했다.[207] 유명 음악 평론가인 임진모는 잭슨의 앨범은 사운드가 뛰어나 옛날 스튜디오 엔지니어 책상에는 항상 잭슨의 앨범이 꽂혀있었다고 한다.[15] 또한 "비트 감각이 없으면 댄스음악을 소화하기 어렵다. 타고난 비트감각을 소유하고 있었고 소리에 대한 민감성이 사상 최고라고 할 정도로 사운드에 완벽성을 추구한 가수였다" 라고 평가했다.[208]

패션에도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다. 마이클 잭슨은 스키니 진 페도라 썬글라스 장갑과 재킷 팔찌 암밴드 한쪽을 자른 티셔츠 등 다양한 패션을 유행시켰다. 이런 영향력은 그 어떤 톱스타도 잭슨을 따라올 수 없었다.[209] 일부 학교에서는 잭슨의 패션을 따라하지 못 하게 하려고 규칙까지 제정했다.[209] 패션의 황제라는 평가도 받았다.[210]

평가[편집]

한상철 팝 칼럼니스트는 “가장 거대한 임팩트(impact)를 가진 지구상 가장 완벽한 팝 뮤지션”이라고 평가했으며 팝 DJ 김광한 씨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로큰롤의 제왕이라면 마이클 잭슨은 장르를 초월한 황제이다" 라고 평가했다.[211] 뉴욕 록 라디오 방송국 WNEW-FM의 피디인 찰리 캔달씨는“그가 굉장한 목소리와 다양한 스타일을 가졌으며, 귀신같이 춤을 잘 춘다는 걸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는 모든 연령대와 모든 종류의 팝 청취자들에게 어필하죠. 이런 가수는 한 시대에 한 명 나올까 하는 가수죠.”라고 평가했다.[212] <빌리지 보이스>는“지금까지 스스로 작사, 작곡, 프로듀싱, 어레인지먼트, 의상, 스타일, 안무, 퍼포먼스, 영상, 자신의 이미지 로고 등을 직접 소화해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고독하겠지만 팝은 천재를 만난 것이다.”라고 평가했다.[200]

유명 음악매체 《VH1》에서는 잭슨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로 비틀즈 밥 딜런 롤링스톤즈 레드 제플린과 함께 공동 1위로 뽑았다.[213]《NME》에서는 독자 대상 조사 결과 역사상 가장 위대한 뮤지션 1위로 선정됐으며[214] 2004년《롤링 스톤》에서는 로큰롤 탄생 50주년을 기념하여 특집기사를 내보내는 가운데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로 잭슨을 35위에 선정한다.[215] 현대 솔로 아티스트 중에서는 최고의 반열로 평가받는다.

빌보드 1위곡 상당 수를 잭슨이 직접 만들었으며 공로를 인정받아 작사/작곡가 명예의 전당 그리고 춤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국립 무용수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됐다.[12][13]

최고의 댄서로 평가받는 프레드 아스테어모타운 레코드 25주년 공연에서 잭슨의 춤을 보고 감격하여 후계자를 찾았다며 잭슨의 전화번호를 조사하여 전화를 걸었다. 잭슨의 보컬 트레이너였던 세스 릭스는 아침 식사 도중 프레드 아스테어가 전화를 했는데 마이클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병이 날 지경이었다고 회고했다.[216] 퀸시 존스는 자신이 필요없을 정도로 잭슨은 재능이 많았으며 8090년대 대스타가 될 것이라고 예감했다고 한다.[217]

1984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오른 잭슨

잭슨은 활동하던 동안 뮤직비디오 예술 형태의 변형, 현대 팝 음악의 길을 닦아 놓는 등의 성과로 미디어에서 흔히 팝의 황제(King Of Pop) 로 불린다.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작가 톰 유틀리는 2003년 잭슨을 "극도로 중요한 인물", "천재"라고 묘사했다.[218] 잭슨의 음악과 인도주의적인 공헌은 신세대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쳐 그 누구와도 "비할 데 없는" 수준이다.[219] 《Thriller》와 같은 음악과 뮤직비디오, 당시 비교적 새로운 채널이었던 MTV의 대중적 인식을 높였고, 직원의 다양한 인종 조성, 채널의 중심을 록에서 팝 음악과 알앤비로 이동시키며 형태를 마련했다. 잭슨의 작품은 수 많은 힙합, 록, 팝, 알앤비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BET에서는 "간단하게 말해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예인" 또한 "뮤직비디오의 대변혁을 일으켰고 세계에 문워크같은 춤을 가져다줬다. 잭슨의 사운드, 스타일, 움직임, 유산은 장르를 불문하고 모든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줬다"고 말했다.[220]

《올뮤직》의 스티브 휴이는 잭슨을 "바로 알 수 있는 목소리, 깜짝 놀랄만한 댄스, 굉장한 음악적 다재다능, 순전한 스타로서의 무게감 등 차트를 지배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을 가진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힘이다"라고 묘사했다.[221] 1980년대 중반 《타임》지의 음악 평론가 제이 콕스는 "잭슨은 비틀즈 이후로 가장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엘비스 프레슬리 이후로 가장 인기 있는 단일 현상이다. 정확히 가장 인기가 많은 흑인 가수이다"라고 썼다.[222] 1990년 《배너티 페어》에서는 연예 공연업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음악가로 잭슨을 꼽았다.[223] 2007년 잭슨은 "음악은 나의 발산 수단이며, 세계의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나의 선물이다. 내 음악은 영원히 남을 것이란걸 안다"고 말했다.[224]

유니버설시티 하드 록 카페에 전시되어 있는 《Thriller》 플래티넘 레코드

잭슨이 죽고나서 얼마 후 2009년 6월 25일 MTV는 작품에 경의를 표하고 기념하기 위해 원래 뮤직비디오 형식을 간략하게 돌아봤다.[225] 또한 MTV 유명인과 기타 유명 인사들의 반응을 포함한 실시간 뉴스 특별 방송과 함께 대부분의 시간에 잭슨의 뮤직비디오를 방영했다. MTV 프로그램 방송 시간도 임시적으로 변경되었고, 잭슨의 추도식 생중계가 끝난 다음 주 원래대로 돌아왔다.[226] 2009년 7월 7일 열린 추도식에서 모타운 레코드 설립자 베리 고디는 "지금까지 없었던 가장 위대한 엔터테이너"라고 말했다.[227][228][229] 2009년 12월 29일 AFI는 "6월 50세이던 마이클 잭슨의 갑작스런 죽음은 세계적 관심을 받았고 사후 콘서트 리허설 영화 《This Is It》는 전례없는 국제적 찬사를 받았다"라고 말하며 잭슨의 죽음을 "중요한 순간"으로 기록했다.[230] 마이클 잭슨은 미국흑인대학펀드로부터 인문학박사와[231] 피스크대학교로부터 명예 인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232]

수상 경력[편집]

1988년 Bad Tour에서 잭슨

마이클 잭슨은 1980년 더 잭슨스의 멤버로서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올랐고, 1984년에는 솔로 경력으로 올랐다. 잭슨은 경력 동안 월드 뮤직 어워드의 베스트 셀링 팝 남자 아티스트 오브 더 밀레니엄,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의 아티스트 오브 더 센트리 어워드, 밤비상의 팝 아티스트 오브 더 밀레니엄 어워드를 포함해 수 많은 영예와 상을 받았다.[233][234]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두 번 입성했는데, 1997년에는 잭슨 파이브의 멤버로서 2001년에는 솔로 경력으로 올랐다. 이 외에 1999년 보컬 그룹 명예의 전당(잭슨 파이브의 멤버로), 2002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233] 잭슨은 13번의 그래미상(뿐만 아니라 그래미 레전드상과 그래미 평생 공로상도 수상) 수상, 26번의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세기의 아티스트"와 "1980년대 아티스트" 포함) 수상하였는데 이는 그 어떤 남성 음악가보다도 많은 기록이다.[235] 또한 세계적으로 4억장으로 추정되는 음반 판매량[236][237][238] 을 기록하면서 비틀즈엘비스 프레슬리 다음으로 역사상 가장 많은 음반을 판 음악가가 되었다.[239][240][241][242][243]

세계적 인기[편집]

대한민국에서는 1984년 신문 기사를 보면 "한창 인기가 절정이던 조용필의 이름은 몰라도 마이클 잭슨의 이름을 모르는 젊은이는 없다던가. 국민학교 어린이까지도 그의 노래에 열광한다"라고 보도했다.[244] 초등학교 5학년-중학교 2학년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로 유일하게 외국인으로 마이클 잭슨이 뽑혔다.[245] 또한, 국민학교 어린이 2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세계적으로 존경하는 인물 조사에서 링컨,레이건,에디슨에 이어 4위로 뽑혔다.[246] 전라남도 다도해라는 먼 시골에서도 섬사람들이 청바지 차림을 하고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불렀다.[247] 북한의 최고 권력자인 김정은유학 시절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즐겨 들었다.[248] 북한은 자신들의 체제 선전용 동영상에다 잭슨과 라이어넬 리치가 작사/작곡한 'We Are the World'의 음을 무단으로 도용했다.[249] 잭슨 열풍은 옆 국가인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에서는 잭슨이 '태풍 마이클' 로 불렸으며, 켄 오타케 소니 뮤직 일본 사장은 "마이클 잭슨은 비틀즈 이후로 일본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엔터테이너이며 일본 사람들의 마음에 항상 남아있는 존재" 라고 말했다.[250] 아프리카에 까지도 잭슨의 이름이 알려져 인종차별을 해소하고 있다고 보도됐다.[17] 아프리카의 흑인 빈민촌 소년인 제이콥은 제 2의 마이클 잭슨이 되기 위해 연습 중이라고 한다.[251] 1984년 이라크이란의 전쟁 당시 이라크에서는 '마이클 잭슨 작전'을 세워, 이란 전선을 향해 밤낮으로 쉴틈없이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트는 심리 작전을 펼쳤다고 한다.[252][253] 인도에서도 잭슨의 인기는 엄청 나다. 가장 유명한 서양 아티스트로 잭슨의 인기는 인도 전 지역에 퍼져있으며 어떤 마을로 가도 마이클 잭슨의 이름을 안다고 한다. 'Ahir Bhairab Borthakur'씨는 잭슨을 대체할 뮤지션은 없다고 말했다.[254] 잭슨이 공연을 한번도 하지 않은 파키스탄에서도 마찬가지로, 파키스탄 사람들에게 마이클 잭슨은 코카콜라유비쿼터스 같은 존재라고 한다.[255] 폐쇄적인 기조를 유지한 중국에서도 마이클은 많은 인기가 있었다.[256]

잭슨은 공산주의 국가들에게는 엄청난 골칫거리였다. 1988년 서독베를린 Bad Tour를 앞두고 동독의 비밀경찰인 슈타지가 바짝 긴장했었다는 비밀문서가 공개됐다. 당시 독일은 분단국가로 베를린 장벽을 사이에 두고 자유진영인 서독과 공산진영인 동독으로 나뉘었는데 슈타지는 장벽 인근에서 열릴 잭슨의 공연으로 인한 사회 혼란을 우려했다. 잭슨의 공연을 보기 위해 동독 청년들이 장벽 쪽으로 몰려가면 수습하기 힘든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판단이다. 슈타지는 고민 끝에 대형 스크린으로 잭슨의 공연을 중계하여 동독 청년들이 장벽 쪽으로 몰려가는 것을 막는 계획을 세웠으나 정작 공연이 열리는 날 이 계획은 시행되지 않았다. 결국 청년들은 잭슨의 노래를 듣기 위해 장벽으로 몰려 동독의 경찰들은 이를 막기 위해 진입하는 등 유혈사태가 일어났다.[257] 독일의 통일 현장을 경험했던 탈북자 김영일 씨에 의하면 당시 동독의 한 중학생이 서독에 마이클 잭슨이 공연을 하러 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서독이 동독보다 잘 산다는 글을 썼는데 이게 슈타지에 적발됐다. 잭슨은 공산주의 체제를 위협한 가수이다.[258] 소련은 엄청난 인기를 몰고 오는 마이클 잭슨을 악마라며 강력히 비난했다.[259] 러시아 사람들은 마이클 잭슨의 사망 소식에 큰 충격에 빠졌다.[260] 한편 러시아에 대항하여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체첸공화국의 지도자 'Salman Raduyev' 은 체첸 사람들에게 'Michael Jackson' 으로 불렸다. 체첸인들은 그가 마이클 잭슨의 노래인 'Heal the World'의 독립투사 버전이라고 믿었다.[261] 멕시코에서는 마이클 잭슨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하여 멕시코시티 광장으로 1만 4천명이 집결하여 잭슨의 노래에 맞춰 춤을 선보였는데 이는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플래쉬몹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262]

잭슨 월드 투어가 열린 나라마다 지도자를 만났던 유일한 가수다. 25개국 국가 수장들과 만났으며 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에서는 5개의 부족장들과도 만났다. 특수부대까지 출동한 대통령경호 대접을 받았다.

빌보드 차트[편집]

빌보드에서는 55주년 기념으로 지난 55년간 빌보드 차트를 분석한 결과 빌보드 핫 100에 잭슨은 8번 째로 가장 상업적으로 좋은 성적을 거둔 가수로 조사됐다. 또한 빌보드 1위에 가장 많은 노래를 올린 가수 3위로 조사됐다.[263]

1위 곡
연도 곡명 수록 음반
1972 Ben Ben[264]
1979 Don't Stop 'til You Get Enough Off the Wall[264]
1980 Rock with You Off the Wall[264]
1983 Billie Jean Thriller[264]
1983 Beat It Thriller[264]
1983 Say Say Say (폴 매카트니의 음반에 수록된 듀엣 곡) 'Pipes of Peace'[264]
1987 I Just Can't Stop Loving You

Bad[264]

1987 Bad

Bad[264]

1987 The Way You Make Me Feel

Bad[264]

1988 Man in the Mirror

Bad[264]

1988 Dirty Diana

Bad[264]

1991 Black or White Dangerous[264]
1995 You Are Not Alone HIStory: Past, Present and Future, Book I[264]
2위 곡
연도 곡명 수록 음반
1972 Rockin' Robin Ben[264]
1982 The Girl Is Mine Thriller[264]
3-10위 곡
연도 곡명 수록 음반
1971 Got to Be There Got to Be There[264]
1980 Off the Wall Off the Wall[264]
1980 She's Out of My Life Off the Wall[264]
1983 Wanna Be Startin' Somethin' Thriller[264]
1983 Human Nature Thriller[264]
1983 P.Y.T. (Pretty Young Thing) Thriller[264]
1984 Thriller Thriller[264]
1988 Smooth Criminal

Bad[264]

1992 Remember the Time

Dangerous[264]

1992 In the Closet Dangerous[264]
1993 Will You Be There Dangerous[264]
1995 Scream HIStory: Past, Present and Future, Book I[264]
2001 You Rock My World Invincible[264]
2014 Love Never Felt So Good Xscape[264]

사생활[편집]

언론과 루머[편집]

잭슨은 평소 팬들에게나 사람들에게 자주 타블로이드 신문을 읽지도 말 것이고 믿지도 말라고 강조했다. 정규앨범 5집 《HIStory: Past, Present and Future, Book I》에 수록된 'Tabloid Junkie'라는 노래에서 특히 이런 입장을 강조하고 있다. 마이클 잭슨의 높은 하이톤의 목소리는 70년대 타블로이드 언론을 통해 잭슨이 게이가 아니냐는 소문이 퍼지게 되는 원인 중 하나였고 80년대 타블로이드 언론은 잭슨을 'Wacko Jacko'로 칭하면서 잭슨의 대중적 이미지를 크게 망쳤다. 1993년 1차 성추행 사건이 터지고 나서 이들의 관계는 완전히 악화 된다.

타블로이드 언론들은 잭슨이 죽고나서도 여전히 거짓된 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이에 대해 마이클 잭슨 유산 관리원 측은 '당신들이 본 타블로이드 기사는 사실이 아니며 마이클로 이익을 얻기 위한 타블로이드 언론들의 보도를 매우 혐오한다. 팬들이 우리와 함께 마이클의 업적을 보호하는데 함께 했으면 좋겠다' 라고 성명을 발표했다.[265] 또한, CNN에서는 타블로이드 언론들의 보도를 직접 반박했다.[266]

타블로이드 언론에서 기사를 생성하는 과정은 브로커가 개입돼 막대한 돈이 오고간다고 한다. 바레시라는 브로커는 필립 르마르크(1991년 잭슨의 집에서 10개월간 일했다.)에게 접근하여 10만 달러를 줄 테니 타블로이드 언론에게 잭슨이 맥컬리 컬킨의 성기를 만졌다고 말하라고 강요했다.[267] 컬킨은 재판에서 르마르크의 주장을 부정하고 잭슨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268]

"내가 르마르크 부부와 거래를 했던 이유는 .. 그들이 받을 돈의 일부를 내게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정의를 이끄는 사람이 아니에요. 잭슨이 유죄이건 무죄이건 그건 저와 상관없으며 제 관심은 오로지 돈이었죠. "

 
— 바레시, 1994 PBS "Frontline"

재산과 빚[편집]

잭슨은 인생에서 약 7억 5천만 달러를 벌어들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뮤직비디오콘서트 등으로 4억 달러를 더 벌어들였을 가능성이 있다. 잭슨의 순자산에 대한 추정은 긍정적인 3억 5천만 달러에서 부채로 인한 마이너스 2억 8500만 달러까지 그 범위가 다양하다. 마이클 잭슨의 상당한 빚 때문에 파산한 것이 아니냐 혹은 비틀즈의 판권을 판 것이 아니냐는 루머가 돌게 되는 원인이기도 했다.

지난 몇년 동안의 마이클 잭슨의 순 자산 추정

년도 자산 순 가치 출처
2002 1억 3000만 달러 4억 1500만 달러 - 2억 8500만 달러 Forensic accountant in 2005 recalling Jackson's 2002 balance sheet under oath[269]
2003 5억 5000만 달러 2억 달러 3억 5000만 달러 Forbes magazine 2003년 11월 21일[270]
2007 5억 6760만 달러 3억 3100만 달러 2억 3600만 달러 Michael Jackson's March 2007 statement of financial condition prepared by Washington-based accounting firm Thompson, Cobb, Bazilio & Associates; described by CBS News as the clearest account yet of Jackson's finances.[271]

2014년 2월 12일 미국 국세청은 마이클 잭슨의 재산을 11억 2500만 달러 이상 (대한민국 기준으로 1조 2000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했으며, 잭슨의 유가족들에게 7억 200만달러의 세금을 납부하라고 명령했다.[272]

성격[편집]

무대 모습과는 다르게 아주 내성적이고 소심하고 부끄러움을 많이 탄다고 한다.[158] "마이클은 너무 수줍음을 타서 등을 돌리고 노래를 불렀다" 라고 시드니 루멧이 증언했으며 프로듀서 퀸시 존스도 잭슨의 내성적인 성격을 보고 걱정을 많이 했다. 2003년 비행기 승객 프로필에 잭슨에 관해 "매우 소심함" 이라고 명시된 것이 확인됐다. 1984년 백악관에 갔을 때 정부 관료들이 한데 모여있는 것을 보고 겁이 나 화장실로 도망갔다는 일화도 전해진다.[34] 또한, 마이클 잭슨의 어머니 캐서린 잭슨은 마이클은 심할 때는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않을 만큼 부끄러움을 탔으며 집에서 고독을 즐기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마이클의 지인은 마이클이 가수를 안 했으면 사탕가게를 운영하며 골방에 박혀 늙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외모,피부색,성형[편집]

마이클과 그의 형제들은 아버지 조지프 잭슨에게 가혹한 학대를 지속적으로 당했음을 주장했고, 조지프는 폭력을 했음을 인정했다.[273] 조지프는 마이클이 잠든 밤 창실 창을 통해 공포 마스크를 착용하여 비명 소리를 질러 놀라게 했다. 이 후유증으로 잭슨은 납치에 대한 두려움과 악몽을 겪었다.[274] 2003년 잭슨은 Living with Michael Jackson에서 아버지 조지프가 자신에게 큰 코(Big nose)를 가졌다고 놀렸고 그러한 얼굴은 자신의 유전자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고 말하여 큰 상처를 입었다고 말했다. 지속적 학대로 외모에 컴플렉스를 가지고 됐고 의사들은 마이클이 신체이형장애를 앓고있다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275]

잭슨은 코에 대한 컴플렉스를 가져 성형을 고민했지만 수술 사고를 두려워 해 망설이다 1979년 복잡한 안무 도중 코가 깨지는 사고가 발생해 이로인해 코 성형수술을 하게 된다. 성공적인 수술은 아니였고 후유증으로 자신의 경력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호흡 곤란을 앓는다. 이후 의사 스티븐 호플린을 찾아 코 성형수술을 다시 받았다.[276] 잭슨은 자신의 자서전 'Moonwalk' 에서 2번의 코 수술과 턱에 홈을 팠다고 인정했으며 2003년 인터뷰에서도 이같은 입장을 고수했는데 10번의 성형 수술을 더 했다는 주위 증언이 있다. 갑작스런 외모 변화는 나이를 먹어감에 인한 노화 현상도 있었으며 심한 체중 감량도 요인이었다. 심할 때는 몸무게가 48kg이었다.[277]

마이클 잭슨의 피부색이 변화한 이유로 흔히 언급되는 백반증은 1986년 공식적으로 진단을 받았으며, 사후 부검 결과에도 이같은 사실이 공개적으로 확인됐다.[278] 잭슨은 백반증으로 인해 피부가 얼룩달룩 해져 화이트 메이크업으로 이를 가리고 다녔다.[279]

1988년 마이클 잭슨은 사진작가 'William Pecchi Jr'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나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배웠고 항상 그렇게 믿는다. 난 모든 사람들이 피부 색깔로 인해 증오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지구상의 모든 인종을 사랑해요."[280]

잭슨은 자신의 자서전 'Moonwalk'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젊은 시절 많은 여드름으로 인해 무척이나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사람들의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 했다고 한다. 이를 고치기 위해 식단을 채식으로 바꿨다고 한다.

가족 관계[편집]

아버지인 조지프 잭슨과 사이가 좋지 않다.[281] 조지프 잭슨은 2010년 그의 아내인 캐서린 잭슨이혼을 한다. 이혼 이유는 조지프 잭슨이 마이클 잭산의 유산 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282] 잭슨은 총 3명의 자식을 낳았다. 마이클 조셉 잭슨 주니어 패리스 마이클 캐서린 잭슨 프린스 마이클 잭슨 2세 이중 마이클 조셉 잭슨 주니어는 백반증에 걸린 듯한 사진이 보도되어 화제를 모았다.[283] 형제들과도 문제가 많았는데 친형 저메인 잭슨1991년 발표한 음반 'You Said'에 수록된 곡 'Word To Badd'는 마이클 잭슨의 변화하는 외모를 비난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큰 충격과 논쟁을 불렀다.[284] 친누나 라토야 잭슨플레이보이 잡지에 나오기 위하여 잭슨의 스릴러 분장을 한 뒤 누드 사진을 찍었는데 이 또한 큰 파장을 몰고왔으며 잭슨이 1993년 아동 성추행 혐의로 힘들어 할 때 거짓 증언을 함으로 잭슨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라토야는 50만 달러를 제시하면 성추행 사건의 결정적 증거를 제시하겠다는 발언도 했다.[285][286] 당시 이 거짓 증언으로 잭슨은 엄청난 분노를 토로했다고 'The Life of an Icon' 에서 측근이 회고했다. 후 라토야 잭슨은 자신의 남편이었던 '잭 고든'의 협박으로 인해 자신은 노예같은 삶을 살았으며 어쩔 수 없이 누드 사진을 찍었고 돈을 얻기 위해 거짓 증언을 했었다고 뉘우쳤다. 잭슨의 팬들에게 잭슨의 형제는 이러한 일들 때문에 크게 비난당하고 있다.

마이클과 형제들끼리의 문제는 마이클이 죽고나서도 이어지고 있다. 마이클 잭슨의 엄청난 유산과 마이클 잭슨의 이름으로 발생하는 향후 수입 때문이다. 2002년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유서 내용은 잭슨의 형제자매들에게 있어서 큰 충격과 같았다. 유서에는 자신들에게 지급하는 돈이 없기 때문이다. 형제들은 잭슨의 유산을 담당하는 변호사를 비난하며 유서가 조작됐으니 유산집행 변호사가 퇴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87][288]

마이클 잭슨의 자녀 패리스 마이클 캐서린 잭슨이 약물을 과다 복용하고 칼로 손목을 베어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었다. 잭슨의 유가족들이 그의 소속사였던 'AEG라이브'를 상대로 건 배상 청구 소송에서 증언을 하기로 한 데 따른 중압감이라고 언론들은 추측했다.[289]

기부[편집]

39개의 자선단체를 도와 기네스북에 등재됐다.[290] 노숙자들을 보면 내버려 둘 수 없어 차를 멈추고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제공했다.[291] 'Heal The World' 재단을 통해 전쟁 난민들을 위해 막대한 돈을 투자했다. 그 외에 많은 자선콘서트에 참가하여 불우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활동했다.

아티스트적 면모[편집]

음악스타일[편집]

잭슨은 주로 R&B,소울,을 다뤘다. 그는 제임스 브라운,다이애나 로스,재키 윌슨,프레드 아스테어의 영향을 받았다.[292] 또한 그 가창력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윌 아이 엠에 의하면 잭슨은 5초 파트를 녹음하는데 1시간의 워밍업을 했다. 잭슨이 스스로 밝힌 바에 의하면 작곡을 할 때 악보를 쓰지 않고, 떠오르는 멜로디를 녹음한 뒤 작업한다. 대표곡인 'Billie Jean'에서 선보이는 문워크는 흑인 빈민가 소년들에게서 힌트를 얻은 것이며 'Smooth Criminal'에서 45도의 기울기를 선보이는 '린댄스'는 신발에 특정 기능을 장착하여 선보이는 것으로 특허를 취득했다. 마임 배우 마르셀 마르소는 잭슨은 타고난 마임 아티스트라고 말했다.[293] 그의 잭슨 파이브 시절부터 솔로 마지막 정규 음반까지의 음악적 스타일은 조금씩 다르다. 모타운 시절에는 댄스, 소프트 락, 재즈, 발라드를 주 장르로 했지만,Off the Wall을 발매하면서, 펑크, 팝 발라드, 재즈, 소울 등의 성숙한 음악을 장르로 했다.80 ~ 90년대에는 거기에다 R&B, 뉴 잭스 윙 적인 음악을 했으며, 2001년에 발매한 Invincible에서는 마이클 잭슨 스타일로 알려진 독특한 어번 R&B 음악에에 그가 지향하던 미래적인 사운드를 첨가했다. 그는 장르 뿐 아니라 그는 그의 음악에 여러 메시지를 두고 제작했다. 'Beat it'은 싸움이 날 것 같으면 도망쳐서 화를 피하라는 메세지를 담고 있는데 잭슨은 이 곡을 만들 때 자신이 그러한 상황에 있으면 어떻게 행동할 지 생각했다고 한다. 'Man in the Mirror'는 세상을 바꾸고 싶으면 자신부터 바뀌어야 하며 불우 이웃들을 도와야 한다는 메세지를 담고 있으며, 'Smooth Criminal'은 성폭행과 살인 같은 범죄를 환기시키고 있다. 'Bad'는 나쁜 길로 빠지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Leave Me Alone'은 자신을 향한 언론들의 공격적 보도에 그만 둘 것을 권유하고 있다.

잭슨의 사회 비판적 메세지는 Dangerous 음반부터 강해졌다. 'Heal the World', 'We Are The World' 는 전쟁 반대, 화합과 자선을 강조하고 있으며 'They Don't Care About Us'는 극우주의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비난 기사를 담고 있다. 이 노래는 'Jew'라는 가사로 유태인 비하 논란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잭슨은 결코 유태인을 비하하는 게 아니라고 해명했다. Gone Too Soon에이즈로 사망한 라이언 화이트를 추모하기 위한 곡이다. 'Earth Song'은 지구환경에 대한 경고, 'Childhood'는 그의 어린시절에 대해 만든 곡이다. 'Stranger in Moscow'는 모스크바에서 고독함을 느낀 자신의 처지에 대한 것이며, 'D.S'는 1993년 자신을 수사한 검사 톰 스네던을 인종차별 주의자라고 비판하고 있다. 'Tabloid Junkie'는 자신을 공격하는 타블로이드 언론에게 분노를 표출했으며 그런 신문을 사는 것은 그들을 정당화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You are not alone'과 'Will you be there'는 사랑과 고독의 의미를 강조한다. 또한 잭슨의 노래에는 여자들이 자주 나오는데 그의 자작곡 'Billie Jean'은 잭슨 본인과 관련된 이야기라고 한다. 잭슨의 아이를 가졌다며 협박하는 한 여자 정신병 환자 때문에 잭슨은 무척이나 두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보컬스타일[편집]

음역은 4 옥타브까지 이른다.[294] 한편 남자답지 않게 높은 목소리는 잭슨이 여성호르몬 주사를 맞으며 목소리를 조절한다는 루머가 퍼지게 된 원인이었는데 그의 보컬 트레이너인 세스 릭스는 잭슨의 목소리는 원래 높지만 더 높게 부르기 위해 훈련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Invincible에 수록된 '2000 Watts'는 지금까지 보여준 적 없는 낮은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기에 디지털 방식으로 가공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가공되지 않았다고 한다.[295] 특유의 딸꾹질을 사용하며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뮤직비디오 및 안무[편집]

잭슨은 자신의 노래와 춤답게 뛰어난 뮤직비디오도 선보였다.[296] 복잡한 스토리 라인과 특유의 댄스 효과 등이 돋보인다. 'Thriller' 뮤직비디오는 지금까지 가장 성공적인 뮤직비디오로 선정돼 기네스북에 등재됐다.[297] 그의 뮤직비디오 안무는 필리핀의 한 교도소에서 죄수들이 춤을 추며 패러디 하여 5400만이라는 조회수를 기록했다."Thriller" 만화 영화인 슈렉에도 응용됐다.'Billie Jean'의 안무는 그가 존경하는 많은 댄서들의 안무를 응용하여 만들었으며,'Beat it'은 맨 처음 잭슨이 소리를 지르며 장치를 통해 관중들 위로 올라와 봉을 잡고 위험한 동작을 연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처음에는 독무로 후반부는 군무로 진행된다.'Thriller'는 HIStory World Tour부터는 마술을 활용했다.'Human Nature'는 발라드로 공연마다 안무가 계속해서 바뀌었다. Dangerous World Tour때부터는 한 여성팬을 추첨하여 무대 위로 올라오게 하여 잭슨과 껴안는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마틴 스콜세지와 협력하여 만든 'Bad'의 뮤직비디오는 총 19분으로 그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성적 이미지와 안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I Just Can’t Stop Lovin’ You' 에서는 잭슨은 때때로 여자의 신체 부위를 직접적으로 만지는 장면을 보여줬다. 또한 그는 자신의 가랑이를 잡는 특유의 행동을 보였는데 1993년 오프라 윈프리쇼에서 그런 행동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며 계획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Man in the Mirror'에서는 스핀 동작이 자주 활용됐다.'Smooth criminal'의 뮤직비디오는 45도 각도로 기울어지는 춤을 선보이며 단편영화 'Moonwalk'에서도 제작돼 뛰어난 안무를 보여줬다. 'Leave Me Alone'은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단편 뮤직비디오 상을 수상했다. 그 외에도 여러 시상식에서 많은 상을 수상했다.

1991년 11월 14일 27개국에서 공개된 그의 싱글 'Black or White' 뮤직비디오는 후반부 성적인 이미지와 폭력적인 장면이 묘사되어 논란을 불러왔다. 12분 가량의 뮤직비디오인데 문제의 후반부 장면은 짤리게 됐고, 잭슨은 이에 대해 사과를 했다. 이 뮤직비디오에서 주목할 또 하나의 부분은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바뀌는 모핑 기법이 사용됐다. 안무로는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오며 그 위에서 잭슨이 몸을 흔드는 것이 화재가 됐다. 'Remember the time'은 총 9분으로 이집트에서 촬영했으며 잭슨이 가루에서 사람으로 변하는 획기적인 시각적 효과를 사용하고 있다.'In The Closet'은 잭슨의 뮤직비디오 중 가장 성적으로 도발적인 작품이다. 슈퍼 모델인 나오미 캠벨도 출연했다. Dangerous 음반의 첫번 째 트랙인 'Jam'은 잭슨의 공연에서 오프닝을 차지했으며 일명 '토스트 기법'으로 불리는 아래서 위로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것은 잭슨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1995년 'Scream'은 700만 달러를 투자하여 제작하였는데 이는 역사상 가장 많은 비용이 든 뮤직비디오이다. 이로 인해 기네스북에도 등재됐으며[298] 그래미에서도 최우수 뮤직비디오로 수상을 한다. 또한 히스토리 월드 투어에서 그의 오프닝 곡이었다. 'Earth Song'은 환경 테마를 가진 최고의 뮤직비디오를 보여줬다. 또한, 투어에서는 탱크가 동원됐고 전쟁과 관련된 스토리 텔링을 응용해서 보여준다. 'Ghost'의 뮤직비디오는 총 38분으로 가장 긴 뮤직비디오로 기네스북 기록에도 등재됐다. 'They Don't Care About Us'는 교도소에서 촬영한 것과 브라질 빈민촌에서 촬영한 것 총 두가지의 뮤직비디오가 있다. 투어에서 안무는 군인들이 경례하는 것 같은 포즈를 보여준다. 'You are not alone'은 그의 전 아내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상의를 벗은 채 함께 등장한다.

한국과의 인연[편집]

1988년 대한민국의 특정 종교서울에서 마이클 잭슨의 공연을 열기 위해 잭슨의 가족들과 접촉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그 종교는 서울올림픽 주 경기장에서 4차례 공연을 갖는 조건으로 잭슨의 형제와 부모들에게 750만 달러를 지불하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형제들과 부모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제안에는 잭슨이 한국에서 한복을 입고 애국가를 불르며 한국어 노래를 몇 곡 부르는 것도 포함됐다. 잭슨은 공연을 하기 싫었지만 형제들과 부모의 끈질긴 회유 끝에 공연을 하기로 결심하고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애국가와 한국 가요는 부르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1988년 그는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었고 그 사진은 현재 공개되어 인터넷 등에 많이 퍼져있다. 그런데 공연은 잭슨에게 지급해야 할 출연료 부족으로 무산되고 만다. 이 사실을 밝힌 그의 전기 작가 'J 랜디 타라보렐리'는 이로 인해 잭슨이 한국에 대해 특별한 감정이 생긴 것 같다며 분석했다. 실제로 잭슨의 마지막 세계투어를 했던 곳은 한국 서울과 독일 뮌헨이었다.[299][300] 당시 일로 고소까지 했던 것이 80년대 한국 언론의 보도에 확인됐다.[301]

1993년 한국에서 공연을 열기 위해 김영삼 정부에게 허가 신청을 했지만 근검절약 등의 이유로 거절된 바 있다.[302]

1996년 10월 11일 잭슨은 서울에서 첫 내한공연을 개최했다. 내한공연은 많은 진통을 겪었는데 기독교 단체들이 중심으로 뭉쳐 시민단체들과 함께 '마이클 잭슨 내한공연반대 공동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마이클 잭슨의 공연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대대적인 비난을 쏟자 자칫하면 취소될 뻔 했다.[303] 무산위기까지 갔으나 가까스로 공연이 성사됐다.[304] 그러나, 반대 시위로 인해 공연은 청소년 관람 금지가 됐으며 시민단체들이 예매처를 봉쇄시켜버려 표를 판매하지 못 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로 인해 잭슨의 공연을 주관한 태원예능이 수작업으로 표를 판매했다.[305]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린 이 공연은 매진에는 실패했지만 총 좌석 수의 70%를 판매했으며[306] 총 2회 동안 76,881명의 관중들을 동원했다.[307]

1999년에는 마이클 잭슨의 생전 마지막 해외 투어가 한국 서울에서 개최된다.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이라는 이름으로 공연이 열렸고 이는 SBS에서 생중계를 해줬으며 최고 42.3%의 시청률을 기록한다.[308] 잭슨은 공연 중 통일이 되면 반드시 또 다시 와서 공연을 개최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사망함으로 끝내 그 약속은 지키지 못 했다.[309]

음반 목록[편집]

투어[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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