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레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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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논
John Lennon
JohnLennonpeace.jpg
기본 정보
본명 존 윈스턴 오노 레논
(John Winston Ono Lennon)
출생 1940년 10월 9일(1940-10-09)
잉글랜드 잉글랜드 머지사이드 주 리버풀
사망 1980년 12월 8일 (40세)
미국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국적 영국 영국
직업
  • 음악가
  • 가수
  • 작곡가
  • 운동가
장르 팝 록
익스페리멘탈 록
악기 기타, 하모니카, 피아노
활동 시기 1956년 ~ 1980년
배우자 신시아 레논 (1962–1968)
오노 요코 (1969–1980)
가족 아버지 앨프렛 레논, 어머니 줄리아 스탠리 레논
아들 줄리안 레논, 션 레논
종교 가톨릭교
레이블 팔로폰
게펜
관련 활동 비틀즈
플라스틱 오노 밴드
서명
Firma de John Lennon.svg
웹사이트 존 레논 홈페이지

존 윈스턴 오노 레논(John Winston Ono Lennon, MBE, 1940년 10월 9일 ~ 1980년 12월 8일)은 영국싱어송라이터이자 대중음악 역사상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밴드인 비틀즈의 창립 멤버다. 출생명은 존 윈스턴 레논(John Winston Lennon)이다. 레논은 동료 구성원인 폴 매카트니와 함께 명성 높은 작곡 파트너십을 구축했다. 또한 음악과 영화, 책, 회견과 인터뷰 등을 통해 반항적인 성향과 통렬한 재치를 드러냈으며 평화 운동과 그림 작품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레논은 리버풀에서 나고 자랐으며, 청소년기에 대유행한 스키플에 편승하여 그의 첫 밴드인 쿼리맨을 결성했다. 1960년 이름을 비틀즈로 바꾸어 활동했고, 이 밴드는 1970년에 해체되었다. 비틀즈 해체 이후 레논은 미국으로 이주하여 《John Lennon/Plastic Ono Band》, 《Imagine》 등의 음반과 〈Imagine〉, 〈Give Peace a Chance〉, 〈Love〉 등의 곡을 통해 성공적인 솔로 경력을 쌓았다. 1975년부터 숀을 돌보기 위해 음악 경력에 공백을 낸 레논은 1980년에 《Double Fantasy》를 발표하면서 복귀했으나, 같은 해 12월 마크 채프먼이 쏜 총에 맞아 40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레논의 마지막 음반이 된 《Double Fantasy》는 1982년에 열린 제24회 그래미상에서 올해의 음반 부문에 후보로 올라 수상했다.

1965년 비틀즈의 다른 멤버들과 함께 대영 제국 훈장 5등급(MBE)을 받았는데, 이는 당시 대중음악가로서는 이례적인 서훈이었다. 그러나 레논은 영국의 베트남전 참전에 대한 비판의 의미로 후에 이 훈장을 반납한다. 레논은 사후인 1987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는 1988년 비틀즈 멤버로서, 1994년 솔로 아티스트로서 두 차례 헌액되었다.[1] 2002년, 100명의 위대한 영국인을 묻는 BBC의 설문조사에서 8위로 선정되었다. 《롤링 스톤》지는 2004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50인 중에서 레논을 38위로 선정했고, 2008년에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에 5위로 선정했다.[2]

생애[편집]

1940–1957: 유년기[편집]

레논은 영국의 전쟁 시기인 1940년 10월 9일, 리버풀 산부인과 병원에서 줄리아 레넌(1914-1958)과 상선 해병이었던 앨프리드 레넌(1912-1976)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앨프리드는 레논의 출생 당시 그 자리에 없었다.[3] 그의 부모는 레논의 이름을 그의 친할아버지 이름 존 "잭" 레논(John "Jack" Lennon)에서 따왔고, 중간 이름 윈스턴은 당시 수상이던 윈스턴 처칠에서 따왔다.[4] 레논의 아버지는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지만, 레논과 아내가 살던 리버풀의 뉴캐슬 로드로 꾸준히 일정한 생계비를 보냈다.[5] 하지만 그는 1944년 2월 실종되어 생계비 지원이 끊겼다가,[6][7] 6개월 후 집으로 돌아왔고 가족을 돌보고자 했다. 허나 당시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던 레논의 어머니 줄리아는 그를 거절했다.[8] 줄리아의 언니인 미미 스미스가 리버풀 사회복지부서에 두 번을 요청한 끝에, 줄리아는 레논의 양육권을 미미에게 넘겼다. 1946년 7월 레논의 아버지는 미미 스미스를 찾아가 레논을 블랙풀에 데려왔고, 뉴질랜드로 가서 살 계획을 몰래 세운다.[9] 줄리아는 당시 남자친구 바비 디킨즈와 함께 그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레논의 양육권을 두고 격한 언쟁을 벌였고, 아버지는 5세의 레논에게 아버지와 어머니 중 누구를 따라갈 것인지 선택하게 했다.[10] 레논은 아버지를 두 번 선택했으나, 어머니가 떠나려고 하자 울면서 그녀를 쫓아갔다. 이후 아버지와는 20년간 연락이 끊겼다.[11]

A grey two-storey building, with numerous windows visible on both levels
레논이 대부분의 유년기를 보낸 맨러브 거리 251번지

레논은 이후부터 자식이 없던 이모 미미 스미스와 이모부 조지 스미스와 함께 멘러브 거리 251번지에서 지내게 되었다.[12] 레논의 이모는 레논에게 다양한 짧은 이야기책을 사주었고, 낙농장 농부인 이모부는 레논에게 하모니카를 사줬고 같이 십자말 퍼즐을 풀기도 했다.[13] 줄리아는 주기적으로 레논을 방문했고, 존이 11살 때부터는 블롬필드 로드 1번지에 살던 줄리아를 자주 방문했다. 레논이 줄리아를 방문할 때, 그녀는 레논에게 엘비스 프레슬리 노래들을 틀어주고, 밴조를 가르쳐 주었으며, 패츠 도미노의 노래 〈Ain't That a Shame〉의 연주법을 알려주었다.[14] 1980년 9월, 레논은 자신의 가족과 자신의 반항적 본능에 대해 털어놓았다.

제 마음 한편에서는 미치광이 떠버리 시인/뮤지션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면에서 받아들여지고 싶어하는 측면도 있어요. 하지만 전 제 자신을 거스를 순 없습니다.... 저는 모든 부모님들이—폴의 부모님을 포함해서—'저 아이를 피해라'라고 할 아이였습니다.... 부모들은 제가 문제아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챘고, 자신의 아이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거라고 생각했죠, 사실 그들 말이 맞아요. 저는 다른 친구들의 가정에 최대한의 방해를 일으키려고 했어요..... 제게 진정한 집이 없다는 것에 대한 부러움도 이유 중의 하나였죠... 하지만, 사실은 저에게도 진정한 집이 있었어요. 제 가족 중에는 5명의 강인한 여성들이 있었죠. 5명의 강하고, 똑똑하고, 아름다운 자매들. 그 중의 한 명이 제 어머니였습니다. 줄리아는 자기 인생의 문제들을 잘 해결하지 못했어요. 줄리아는 막내였고, 바다로 떠나버린 남편이 있었고,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였기 때문에 정신이 없어 저를 제대로 챙길 수가 없었죠. 그리고, 전 줄리아의 언니와 살게 되었어요. 그녀들은 정말 대단했죠... 그리고, 이게 저의 첫 번째 페미니즘 교육이었습니다... 저는 다른 애들을 이런 식으로 물들이려 했어요, "부모님은 신이 아니야. 나는 내 부모님과 같이 살지 않잖아. 그래서 아는 거야."[15]

레논은 플리트우드에 살고 있던 7살 더 많은 사촌 스탠리 파크스를 정기적으로 방문했고, 파크스는 레논과 함께 여행을 가거나 동네 영화관에 갔다.[16] 방학 동안, 파크스는 다른 사촌 레일라 하비와 함께 레논을 방문하여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블랙풀 타워 서커스를 보러 가거나 디키 발렌타인, 아서 에스키, 맥스 바이그레이브스 그리고 조 로스의 공연을 관람했다. 파크스는 레논이 특히 조지 폼비를 좋아했다고 말했다.[17] 파크스의 가족이 스코틀랜드로 이사를 간 후, 이 세 명은 방학 때에 함께 스코틀랜드에서 시간을 보냈다. 파크스는 "존, 사촌 레일라와 전 아주 친했습니다. 존이 9살이였을 때부터 16살이였을 때까지, 저흰 에딘버러에서 차를 타고 더네스에 있는 가족 농장으로 갔어요."라고 회고했다.[18] 1955년 6월 5일, 레논이 14살이었을 때, 이모부 조지는 간 출혈로 52세의 나이에 사망했다.[19]

레논의 우표 수집책

레논은 성공회 신자로 자랐고, 도브데일 초등학교에 다녔다.[20] 초등학교 졸업 후, 1952년 9월에서 1957년까지 레논은 리버풀에 있는 쿼리 뱅크 고등학교에 다녔다. 당시에 하비는 레논을, "태평스럽고, 유쾌하고, 마음 편하고, 활기차다"고 표현했다.[21] 레논은 가끔씩 직접 만든 학교 잡지 《더 데일리 홀》에 만화를 그리기도 했으나,[22] 그의 뛰어난 미술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는 "실패의 길의 걷고 있음이 틀림없다... 희망이 없다... 교실의 광대와 다름없다... 다른 학생들의 시간을 낭비한다..."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23] 2005년, 미국의 국립우편박물관은 레논이 소년 시절 모은 우표 수집품을 입수했다.[24]

1956년 레논의 어머니는 5파운드 10실링을 주고 값싼 개로톤 챔피언 어쿠스틱 기타를 사서 레논에게 "빌려"주었다. 대신 주문할 때에는, 누나인 미미가 레논의 음악적 포부에 반대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미 스미스의 집이 아닌 자기의 집으로 배송을 요청했다.[25] 미미는 레논이 자신이 언젠가 유명해질 거라 주장하는 걸 회의적으로 받아들였고, 언젠가 음악을 지루하게 받아들이길 원하며, 종종 "기타 치는 건 아주 좋아, 존, 하지만 그걸로 먹고 살 수는 없어"라고 말했다.[26] 1958년 7월 15일, 레논이 17살이었을 때, 그의 어머니 줄리아는 미미 스미스의 집에 방문 후, 귀가하는 길에 차에 치여 사망했다.[27]

레논은 교육 자격 검정 시험 GCE O 레벨을 통과하지 못했고, 이모와 교장이 나서서야 겨우 리버풀 예술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28] 대학에 들어간 레논은 테디보이 의류들을 입기 시작했으며, 선생님들을 괴롭히고, 수업을 방해하는 걸로 유명해졌다. 결국 레논은 회화 강의와 그래픽 아트 강좌에서 연달아 쫒겨났고, 라이프 드로잉 수업에서 누드 모델의 허벅지 위에 앉는 등의 나쁜 태도로 인해 퇴학될 수도 있다고 경고를 받았다.[29] 그는 학년말 시험에서 떨어졌고, 친구들과 미래의 아내 신시아 파월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학년을 앞두고 학교에서 퇴학당했다".[30]

1957–1970: 쿼리맨과 비틀즈[편집]

1957–1966: 결성, 상업적 성공과 투어 기간[편집]

Monochrome image of The Beatles performing on a stage wearing dark suits
비틀마니아가 절정에 다다른 1964년에 공연하는 레논(맨 오른쪽)

1956년 9월, 15살의 레논은 쿼리뱅크 고등학교에서 이름을 따와 명명된 스키플 그룹, 쿼리맨을 결성했다.[31] 1957년 여름, 쿼리맨은 스키플 반 로큰롤 반으로 이루어진 "영혼이 담겨진 세트 리스트"를 공연했다.[32] 레논은 폴 매카트니를 7월 6일 울튼의 성 베드로 교회 원유회에서 열린 쿼리맨의 두 번째 공연에서 처음으로 만났고, 레논은 매카트니에게 밴드에 들어올 것을 권했다.[33]

매카트니는 미미가 "존의 친구들이 하류층인 것에 대해 굉장히 의식했"으며, 레논을 방문하러 온 자신을 종종 아랫사람 대하듯 했다고 증언했다.[34] 폴의 형제 마이크에 의하면, 매카트니의 아버지도 아들을 "곤경에 빠뜨릴"까봐 레논과 어울리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35] 그렇지만, 나중에 폴의 아버지가 포틀린 20번가에 있는 매카트니의 집 거실에서 밴드의 리허설을 하게 도와주었다.[36][37] 이 시기 동안에, 18세 레논은 자신의 첫 노래, 〈Hello Little Girl〉을 작곡했고, 이 곡은 5년 후 더 포모스트가 불러 영국 차트 10위 안에 진입했다.[38]

매카트니는 친구였던 조지 해리슨을 리드 기타 연주자로 제안했으나,[39] 레논은 14살이었던 해리슨이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다. 매카트니는 후에 조지를 위해 리버풀 버스의 윗층에서 오디션을 잡아주었고, 해리슨은 레논 앞에서 〈Raunchy〉를 연주했다.[40] 레논의 예술학교 친구인 스튜어트 섯클리프는 후에 베이스 연주자로 밴드에 들어왔다.[41] 레논, 매카트니, 해리슨과 섯클리프는 1960년대 초 "비틀즈"가 되었다. 그 해 8월, 비틀즈는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48일간 거주하게 되었는데, 당시 공연을 위해 드럼 연주자가 급하게 필요했기 때문에 피트 베스트를 영입했다.[42] 레논은 그 당시 19살이였고, 레논의 이모는 그가 함부르크에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상당히 충격을 받았고, 여행 대신 미술 공부를 계속 하라고 설득했다.[43] 함부르크에서의 첫 체류 이후, 밴드는 1961년 4월에 두 번째로, 1962년 4월에 세 번째로 체류했다. 다른 밴드 멤버들처럼, 레논은 함부르크에서 지낼 때 프레루딘을 접했고,[44] 긴 밤 공연을 위한 각성제로 암페타민과 같은 마약을 복용했다.[45]

1962년부터 비틀즈의 매니저를 맡은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이전에 밴드 매니저 일을 해본 경험이 없었다. 하지만, 비틀즈의 초창기 복장 양식과 무대 태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46] 레논은 처음에 엡스타인이 제안한 전문가적인 용모를 강하게 거부했으나, 결국에는 "돈만 준다면 바보같은 풍선이라도 입어야지."라며 받아들였다.[47] 매카트니는 섯클리프가 함부르크에 남기로 결정하자, 대신해서 베이스 연주자를 맡기로 했고, 드러머는 베스트에서 링고 스타로 교체되었다. 비틀즈는 1970년 해산까지 4인조 체제를 형성하게 된다. 밴드의 첫 싱글 〈Love Me Do〉는 1962년 10월에 발매되었고, 영국 차트에서 17위를 기록했다. 그들은 데뷔 음반 《Please Please Me》를 1963년 2월 11일 10시간에 걸쳐 녹음했다.[48] 그 날 레논은 감기에 걸려있었고, 이는 그 날 마지막으로 녹음된 곡 〈Twist and Shout〉의 보컬에 명백히 드러난다.[49][50] 레논-매카트니는 14곡 중에서 8곡을 작곡했다. 레논은 이 때만 해도 앨범 제목 등 몇 가지를 빼곤 가사에 말장난을 넣지 않았다. 그는 "우린 그냥 노래를 썼어요 ...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 단순히 노래를 쓴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가사들은 대부분 상관없었죠."[48] 매카트니는 1987년 인터뷰에서 다른 비틀즈 멤버들이 레논을 우상으로 삼았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작은 엘비스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존을 우러러보았죠. 그는 우리보다 나이가 많았으며 또한 리더였고, 가장 재치있고 똑똑했어요.[51]

1964년, 무대에서의 존 레논

비틀즈는 1963년 초부터 영국의 주류시장에서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레논은 4월에 태어난 첫째 아들 줄리안과 함께 투어를 돌았다. 로열 버라이어티 쇼 공연 때, 여왕과 다른 왕실 가족들이 관람했고 레논은 관객을 향해 다음과 같은 재담을 쏟아냈다. "다음 곡을 위해서는,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싼 좌석에 있는 사람들은 박수를 쳐주시고.... 나머지 분들은 보석을 흔들어주세요."[52] 1년 후, 비틀즈는 1964년 2월 《에드 설리번 쇼》를 통해 미국에서 역사적인 데뷔 공연을 펼쳤고, 머지않아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그들은 2년 동안 지속적으로 투어를 돌았고, 영화 제작과 작곡을 했다. 레논은 이 기간 동안 두 권의 책, 《In His Own Write》와 《A Spaniard in the Works》를 썼다.[53] 비틀즈는 1965년 여왕 서작식에서 대영 제국 훈장(MBE)을 받았다.[54]

레논은 공연을 보는 팬들이 지르는 함성 때문에 노래가 묻히는 것과, 밴드의 음악성이 악화될 것을 걱정하게 된다.[55] 레논은 〈Help!〉로 자기의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다. "진심이였어요... 전 '도움(help)'을 부르고 있었죠."[56] 그는 살이 불어났고(후에 이때를 '살찐 엘비스' 시기에 비유했다),[57] 무의식 중에 변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걸 느꼈다.[58] 그 해 3월, 치과 의사가 레논, 해리슨과 그들의 부인을 저녁 파티에 초대했고, 의사는 몰래 커피 속에 LSD를 담아 그들에게 권했다.[59] 그들이 떠나고자 할 때, LSD를 복용했다는 것을 밝혔고, 부작용 때문에 외출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후에, 한 나이트클럽의 엘리베이터에서, 모두 불 속에 있는 것 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우리는 소리를 막 질러댔어요... 뜨겁고 히스테리컬했죠."[60]

1966년 3월, 《이브닝 스탠더드》의 리포터 마린 클리브와의 인터뷰 중, 레논은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기독교 신앙은 없어질 거예요. 오그라들고 사라질 거란 말입니다 ... 우리는 지금 예수보다 인기가 많아요—로큰롤과 기독교 중에 어떤 게 먼저 없어질지는 잘 모르겠습니다."[61] 이 발언은 영국에서는 거의 관심을 받지 못했으나, 다섯 달 후인 8월에 미국의 한 잡지가 인터뷰를 공개하면서 큰 파급을 초래했다. 미국의 기독교 신자들은 비틀즈 음반을 불태웠고, KKK는 레논을 위협하거나 공연 중 난동을 부렸다. 이같은 활동은 비틀즈가 투어를 중지하겠다는 결정에 도화선을 당겼다.[62]

1967–1970: 스튜디오 기간, 해체, 그리고 솔로 작업[편집]

1966년 8월 29일, 마지막 상업적 콘서트가 끝나고 일상적이던 라이브 공연을 뒤로한 레논은, 상실감과 밴드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느꼈다.[63] 지난 1월 의도치 않은 LSD 복용 이후, 약물 사용이 늘어났으며 특히 1967년에는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았다.[64] 전기 작가 이안 맥도널드에 의하면, 레논은 지속적인 복용으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이 지워질 뻔"했다고 한다.[65] 1967년 〈Strawberry Fields Forever〉가 발표되었고, 《타임》 지는 이를 "놀라운 창의력"이라고 격찬했다.[66] 비틀즈의 대표 음반인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의 가사는, 레논-매카트니가 초기에 쓴 간단한 사랑 노래와는 큰 대조를 이루었다.

8월, 비틀즈는 마하리시 마헤쉬 요기를 소개받았다. 그룹은 그의 초월 명상 세미나가 진행되는 웨일스의 뱅고어에 가서 주말 개인 강습회에 참여했다.[67] 세미나 동안,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다. 레논은 후에 "우리가 위험에 직면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전 우리가 음악을 연주하는 것 외엔 다른 것을 할 수 없단 걸 알았고, 겁을 먹었습니다."라고 말했다.[68] 해리슨과 레논은 동양 종교에 대한 흥미가 컸고, 비틀즈는 나중에 인도에서 마하리시의 아시람을 방문하여 더 많은 지도를 받았다.[69] 거기에 있는 동안 《The Beatles》와 《Abbey Road》의 대부분 곡을 작곡했다.[70]

레논은 혼자서 장편 반전 영화 《하우 아이 원 더 워》에 출연했다. 영화는 1967년 10월에 상영되었다.[71] 비틀즈가 처음으로 엡스타인 없이 진행한 텔레비전 영화 프로젝트 《매지컬 미스터리 투어》는 폴 매카트니가 진행하고 비틀즈가 직접 각본 감독을 맡았다.[72] 영화는 그 해 12월에 공개되었다. 영화는 평론가로부터 비틀즈 작품 중에서는 처음으로 악평을 받았으나, 레논이 루이스 캐럴로부터 영감을 얻은 〈I Am the Walrus〉를 수록한 사운드트랙은 성공을 거뒀다.[73][74] 엡스타인의 사망 이후, 비틀즈 멤버들은 사업 활동에 점차적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1968년에 2월 애플 레코드과 몇 개의 자회사로 이루어진 멀티미디어 기업, 애플 코어를 세웠다. 레논은 기업을 "사업 구조 내에서의 예술적 자유"를 추구하기 위한 시도라고 설명했으나,[75] 그의 늘어나는 마약 실험과 오노 요코에 대한 집착, 그리고 매카트니 자신의 결혼 계획으로 인해, 애플은 전문적인 매니지먼트가 필요했다. 레논은 비칭 경에게 그 역할을 맡아달라고 부탁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했고 돌아가 음반을 만들라고 충고했다. 레논은 롤링 스톤스와 여러 밴드의 매니저를 맡아온 앨런 클라인에게 부탁했다. 클라인은 레논, 해리슨, 스타[76]에 의해 애플 최고 경영자로 임명되었지만, 매카트니는 매니지먼트 계약에 서명하지 않았다.[77]

1968년 말, 레논은 더티 맥의 멤버로서 《더 롤링 스톤스 록 앤 롤 서커스》(1996년까지 발표하지 않음)에 출연했다. 이 슈퍼그룹은 레논, 에릭 클랩턴, 키스 리처즈, 그리고 미치 미첼로 이루어졌고, 오노는 영화에서 백 보컬을 담당하기도 했다.[79] 레논과 오노는 1969년 3월 20일에 결혼했으며, 자신들의 허니문 장면을 그린 14개짜리 석판화 시리즈를 선보였다.[80] 이 중 여덟은 불건전하다고 판단되었고, 대부분 금지되거나 몰수되었다. [81] 레논의 관심은 비틀즈에게서 멀어져, 1968년과 1969년 사이 오노와 작업한 세 개의 실험 음악 음반, 《Unfinished Music No.1: Two Virgins》,[82] 《Unfinished Music No.2: Life with the Lions》 그리고 《Wedding Album》에 창의성을 집중시켰다. 1969년에는 플라스틱 오노 밴드를 결성하여 《Live Peace in Toronto 1969》를 발표했다. 1969년과 1970년 사이, 레논은 1969년 베트남 전쟁 반대 노래로 널리 채택된 〈Give Peace a Chance〉,[83] 헤로인 복용 후 그의 후회하는 심정을 표현한 〈Cold Turkey〉,[84] 그리고 영국이 비아프라 전쟁에 개입한 데 항의하는 〈Instant Karma![85]를 발표했다.[86] 영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미국을 지원하는 것과, 〈Cold Turkey〉의 차트 순위가 내려간 것에 항의하는 의미에서,[87] 레논은 훈장을 여왕에게 반납하나, 포기가 불가능한 MBE 상태에는 아무 영향이 없었다.[88]

레논은 1969년 9월에 비틀즈를 떠났고,[89] 그룹이 녹음 계약을 재협상하는 동안에는 이를 매체에 발표하지 않기로 동의했다. 하지만 1970년 4월, 매카트니가 데뷔 솔로 음반 발표와 동시에, 밴드 탈퇴를 선언하자 레논은 분개했다. 레논은 "하느님 맙소사! 그가 전부 자기 걸로 만들어버렸어!"라고 반응했다.[90] 그는 후에 "내가 밴드를 시작했고, 내가 해체했다. 그렇게 단순한 거다"라고 썼다.[91] 롤링 스톤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폴이 한 것을 안 한 난 바보였다, 음반 파는데 그걸 이용한 거 말이다."라며 매카트니를 비꼬았다.[92] 다른 구성원들이 오노를 향해 느끼는 적개심을 눈치챘다는 얘기도 했으며, 자신과 해리슨과 스타가 폴을 위한 "사이드맨 취급을 당했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그는 "엡스타인의 사망 후 비틀즈는 무너졌다. 폴이 그 역할을 이어받아 우리를 이끌고자 했다. 하지만 우리는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었을 뿐인데 뭘 이끌었겠는가?"라고 말했다.[93]

1970–1980: 솔로 경력[편집]

1970–1972: 초기 솔로 성공과 행동주의[편집]

1971년 9월 18일, 빌보드의 〈Imagine〉 홍보물

1970년, 레논과 오노는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아서 야노브 의사를 통해 원초 치료를 받았다. 유년기의 감정적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고안된 치료법으로 일주일에 두 번, 4개월간 진행되었다. 의사는 더 장기적으로 치료하기를 원했으나, 커플은 더 이상 계속 치료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런던으로 돌아왔다.[94] 레논의 감정이 잘 표현된 데뷔 솔로 음반 《John Lennon/Plastic Ono Band》(1970)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비평가 그레일 마커스는 "존이 부른 〈God〉의 마지막 소절은 로큰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업적."이라고 평했다.[95] 음반은 레논이 어릴 적 직면해야 한 감정이 들어간 노래 〈Mother〉,[96] 부르주아 사회구조를 비판하는 노래 〈Working Class Hero〉("넌 아직도 망할 하류층이야"라는 가사로 인해, 방송사들로부터 비판을 샀다) 등이 수록되어 있다.[97][98] 같은 해, 타릭 알리의 혁명적 정치 견해는 레논을 인터뷰했을 때 그에게 표출되었고, 이로부터 영감을 얻어 〈People to Power〉을 썼다. 레논은 나중에 알리의 근거없는 외설 혐의로 인해 《Oz》지가 기소되자, 그는 이 기소를 "역겨운 파시즘"이라고 맹렬히 비판했고, 그와 오노(엘라스틱 오즈 밴드)는 싱글 〈God Save Us / Oz〉를 발매했으며 잡지사 지원을 위한 운동에 참여했다.[99]

레논의 다음 음반 《Imagine》(1971)은 평론가들로부터 신중한 반응을 받았다. 《롤링 스톤》은 "상당한 부분이 좋은 음악들이다."라고 평했으나, "그의 가식은 곧 단순히 따분해질 뿐만 아니라, 시시하게 되어버릴 것이다."라고 경고했다.[102] 앨범의 머릿곡 〈Imagine〉은 반전 운동을 위한 노래가 되었고,[103]How Do You Sleep?〉은 《Ram》에서 나타난 자신을 비꼬는 가사에 대한 반격으로, 매카트니는 후에 가사가 레논과 오노를 향한 공격이였다고 인정했다.[104] 레논은 1970년대 중반에 적의를 조금 누그러뜨렸고, 〈How Do You Sleep?〉을 자신을 위해 썼다고 말했다.[105] 1980년, 존은 "나는 폴을 향한 내 적개심을 이용하여 노래를 만들었다... 잔인하고 끔직하고 악한 앙갚음이 아닌가... 나는 〈How Do You Sleep?〉을 폴의 탈퇴에 대한 분노와, 그에 대한 관계를 사용해 작곡했다. 이런 생각이 머릿 속에서 떠날 생각을 않는다..."고 말했다.[106]

레논과 오노는 1971년 8월에 뉴욕으로 이사를 갔고, 12월에 〈Happy Xmas(War is Over)〉를 발매했다.[107] 새해, 닉슨 정부는 레논이 주도한 반전 운동과 반닉슨 선전에 맞서 "전략적 대응책"을 취했고, 그를 추방하려는 4년의 시도에 착수했다. 1972년, 레논은 뉴욕에서 맥거번이 닉슨에게 선거에서 패한 후, 제리 루빈에 의해 열린 선거 후 행사에 오노와 참여했다.[108][109] 이민 당국과의 계속되는 법적 전투에 집중한 레넌은 미국 영주권을 거부당했다(1976년 이후에 풀림).[110] 우울했던 레논은 술에 취해 여자 손님과 섹스를 하며 오노를 당혹스럽게 했다. 그녀의 노래 〈Death of Samantha〉은 이 사건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111]

뉴욕 밴드 엘리펀트스 메모리가 백 보컬을 맡고 오노와 공동으로 제작한 음반 《Some Time in New York City》가 1972년 발매되었다. 여성권리, 인종관계, 북아일랜드에서의 영국의 역할 그리고 레논의 영주권 획득 문제에 관한 노래가 수록되어 있으며,[112] 음반은 큰 혹평을 받았다.[113]Woman Is the Nigger of the World〉은 같은 해 미국에서 싱글로 발매되었고, 5월 11일 《딕 커뱃 쇼》를 통해 전파를 탔다. 많은 라디오 방송국들이 "깜둥이"라는 단어 때문에 방송하는 것을 거부했다.[114] 레논과 오노는 엘리펀트스 메모리와 게스트들과 함께, 윌로우브룩 주 학교 정신 시설의 환자들을 위해서 두 번의 자선공연을 열었다.[115] 1972년 8월 30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공연이 진행되었고, 그 공연이 레논의 마지막 장시간 공연이였다.[116]

1973–1975: "잃어버린 주말"[편집]

존 레논과 TV 프로그램 《투모로우》의 진행자 톰 스나이더의 홍보 사진. 1975년에 방영된 이 프로그램는 1980년 사망하기 전까지 그가 마지막으로 한 텔레비전 인터뷰였다.

레논이 《Mind Games》(1973)을 녹음하고 있었을 때, 그와 오노는 떨어져 지내기로 했다. 그들은 18개월간 떨어져 지냈고, 레논은 이 기간을 "잃어버린 주말"이라고 표현했다.[117] 레논은 그 동안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에서 개인 비서 메이 팡과 함께 지냈다. 플라스틱 U.F.오노로 표기된 《Mind Games》는 1973년 11월에 발매되었다. 레논은 같은 달에 발매된 링고의 음반 《Ringo》(1973)에도 참여했다(1973년 링고 세션에서 가이드 보컬을 제공해 주었고, 이는 《John Lennon Anthology》에 수록되어 있다).

1974년 초, 레논은 술을 심하게 마셨으며, 해리 닐슨과의 알코올 중독 사건으로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두 사건은 트루바두르 클럽에서 3월에 일어난 일이다. 첫 번째는 레논이 이마에 생리대를 놓고 웨이트리스와 실랑이를 벌인 것이고, 두 번째는, 2주 후 레논과 닐슨이 같은 클럽에서 스모더스 브라더스를 괴롭히다 퇴장한 것이다.[118] 레논은 닐슨의 음반 《Pussy Cats》의 프로듀서를 맡기로 하고, 메이 팡은 음악가를 위해 로스앤젤레스 해안가에 위치한 집을 빌렸다.[119] 하지만 한 달이 지나자 녹음 세션은 엉망이 되었고, 레논은 팡과 함께 음반 작업을 마무리짓기 위해 뉴욕으로 이사를 간다. 4월, 레논은 믹 재거의 노래 〈Too Many Cooks(Spoil the Soup)〉를 프로듀싱했으나, 계약상의 이유로 30년이 넘게 미발매되었다. 최종적으로 팡이 노래를 제공했고, 믹 재거의 《The Very Best of Mick Jagger》(2007)에 수록되었다.[120]

뉴욕에 다시 돌아온 후, 레논은 《Walls and Bridges》를 녹음했고, 이는 1974년 10월에 발매됐다. 수록곡 〈Whatever Gets You Thru the Night〉는 엘튼 존이 백 보컬과 피아노를 담당했고, 이 싱글은 레논이 솔로 경력 때 발표한 것 중 유일하게 빌보드 핫 100 1위를 차지했다.[121]b 음반에서 나온 두 번째 싱글 〈#9 Dream〉은 연말 전에 발매됐다. 링고의 《Goodnight Vienna》(1974)에서 레논은 타이틀 트랙을 작사하고, 피아노를 연주했다.[122] 11월 28일, 레논은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엘튼 존의 추수감사절 콘서트에 특별 게스트로 참여했다. 엘튼과 〈Whatever Gets You Thru the Night〉가 1위에 오르면 공연에 참가할 것이라고 서로 내기했고, 레논은 이 약속을 지켰다. 레논은 공연에서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과 〈I Saw Her Standing There〉를 연주했으며, "폴이라고 불리는 나의 오랜, 떨어져 있는 약혼자의 노래."라고 소개했다.[123]

레논은 데이비드 보위의 미국 첫 1위 곡 〈Fame〉을 함께 작곡했으며, 1975년 1월에 이루어졌던 녹음에서 기타 연주와 백 보컬을 맡아줬다.[124] 같은 달에, 엘튼 존은 자신이 커버한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로 차트 1위를 차지했으며, 레논이 기타 연주와 백 보컬을 담당했다(레논은 여기서 "닥터 윈스턴 오'부기"라는 가명으로 참여했다). 그와 오노는 곧 다시 만났다. 레논은 커버 음반 《Rock 'n' Roll》(1975)을 발매했으며, 2월에 나온 싱글 〈Stand by Me〉는 미국과 영국에서 히트했고, 이후 5년 동안은 싱글을 발매하지 않았다.[125] 그는 자신의 마지막 무대 출연을 ATV 스페셜 방송 《A Salute to Lew Grade》에서 했으며, 4월 18에 녹음하여 6월에 방송되었다.[126] 어쿠스틱 기타와 반주를 담당한 8인조 밴드와, 레논은 《Rock 'n' Roll》의 두 곡(〈Stand by Me〉, 〈Slippin' and Slidin'〉이며 두 곡 모두 방송되지 않았다)과 〈Imagine〉을 공연했다.[126] Etc.라고 알려진 밴드는 머리 뒤에 가면을 썼고, 이는 《Grade》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레논의 아이디어에서 착상한 것이다.[127]

1975–1980: 은퇴와 복귀[편집]

둘째 아들 이 1975년 10월 9일에 출생했고, 레논은 육아에 전념하기 위해 5년간 경력에 공백을 냈다.[128] 그 달에, 그는 EMI/캐피틀과 한 계약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이전에 녹음된 노래를 담은 컴필레이션 음반 《Shaved Fish》을 발매했다.[128] 레논은 매일 6시에 일어나 숀의 밥을 준비하고, 그와 시간을 보냈다.[129] 그는 링고의 음반 《Ringo's Rotogravure》(1976)의 수록곡 〈Cookin' (In the Kitchen of Love)〉를 썼고, 6월에 녹음했다. 이는 1980년까지 그의 마지막 녹음 세션이 된다.[130] 1977년 6월, 레논은 도쿄에서 "우리는 이보다 좋을 수 없을 결정을 내렸다. 우리는 아기에게 최대한 전념할 것이고, 충분한 시간을 보냈다고 느끼면 그 때 무언가 만들 시간을 할애하겠다."며 음악을 그만두겠다 선언했다.[131] 이 공백기에 그는 일련의 그림을 그렸고, 자서전 요소와 그가 "미친 것"이라고 부르는 것을 혼합하여 책을 저술했다.[132] 이 책들은 모두 사후에 출판되었다.

레논은 1980년 10월에 싱글 〈(Just Like)Starting Over〉을 발표하며 복귀했고, 그 다음 달에 정규 음반 《Double Fantasy》를 발표했다. 이 음반에는 6월에 43피트 크기의 항해선을 타고서 버뮤다를 여행하는 동안 쓴 곡들이 수록되어 있다.[133] 수록곡은 레논이 새롭게 안정된 가족을 가짐으로서 느끼는 만족감을 반영하고 있다.[134] 충분한 곡들이 다음 음반 《Milk and Honey》를 위해 녹음됐다(사후인 1984년에 발표됨).[135] 오노와 함께 공동으로 발표한 음반 《Double Fantasy》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멜로디 메이커》는 "정말 의미없다... 심하게 하품나온다"고 평했다.[136]

1980년 12월 8일: 죽음[편집]

센트럴 파크 안의 스트로베리 필즈. 뒤는 다코타 빌딩이다.

1980년 12월 8일, 오후 10시 50분경(EST) 레논과 오노는 뉴욕에 위치한 다코타 아파트에 돌아왔다.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은 아파트의 아치에서 레논을 등을 향해 총으로 네 발을 쐈다. 레논은 근처에 있는 루즈벨트 병원 응급실로 급히 이송되었으나, 도착 시간인 11시경에 사망했다.[137] 그 날 저녁, 레논은 채프먼을 위해 《Double Fantasy》에 싸인을 해 주었다.[138]

오노는 그 날 "존을 위한 장례식은 없다"고 말했고, "존은 사람들을 사랑했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부디 그를 위해 똑같이 기도해주세요."라고 끝맺었다.[139] 레논의 시신은 뉴욕 시 하츠데일 펀클리프 묘지에서 화장되었다. 오노는 레논의 재를 뉴욕 센트럴 파크에 흩뿌렸으며, 그곳에는 후에 스트로베리 필즈 기념비가 만들어졌다.[140] 채프먼은 2급 살인죄로 유죄를 인정받고, 20년형을 선고받았다.[141] 2016년, 그의 9번째 가석방이 거부됐다.[142]

인간 관계[편집]

신시아 레논[편집]

레논과 신시아 파월(1939–2015)은 1957년 리버풀 예술대학에서 학교 친구로 처음 만났다.[143] 신시아는 레논의 태도와 모습에 겁먹기도 했으나, 그가 프랑스 배우 브리지트 바르도에 빠져있다는 얘기를 듣고 머리를 금색으로 염색하기도 했다. 레논은 신시아에게 데이트를 제안했으나, 그녀는 자신이 약혼한 상태라고 대답했고, 레논은 "누가 언제 결혼하자고 했어, 앙?"이라며 언성을 높혔다.[144] 그녀는 쿼리맨 공연에 존과 곧잘 같이 다녔으며, 매카트니의 여자친구와 함께 존과 폴을 방문하기 위해 함부르크까지 찾아가기도 했다.[145] 레논은 신시아에게 집착했고, 그로 인한 분노와 육체적 폭력을 표출하여 그녀를 겁주었다.[146] 레논은 오노와 만나기 이전까지, 자신이 여성에 대해 광신적인 집착이 있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레논은 비틀즈의 〈Getting Better〉이 자신의 이야기라고 말했으며, "전 여성에게 못되게 굴었고, 폭력을 쓰기도 했습니다—아무 여자에게나 말이에요. 전 폭력배였어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질 못했고, 때리기만 했습니다. 남자하곤 싸우고, 여자에겐 주먹질을 했죠. 이것이 제가 항상 평화를 생각하는 이유입니다."라고 말했다.[128]

레논은 1962년 7월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알고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야, 신. 우리 둘은 결혼해야 해"라고 말했다.[147] 커플은 8월 23일 리버풀에 있는 마운트 플레즌트 등기소에서 결혼했다. 레논의 결혼과 동시에 비틀마니아가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자신의 결혼식 오후에 공연을 했고, 그 이후에도 거의 매일 공연을 하러 다녔다.[148] 엡스타인은 그가 결혼한 사실을 팬들이 알면 인기가 식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레논에게 결혼을 비밀로 유지하도록 요청했다. 그의 첫 자식인 줄리안은 1963년 4월 8일에 출생했다. 레논은 당시 투어 중이였고, 3일이 지난 후에야 그를 보았다.[149]

신시아는 파경의 원인을 LSD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그로 인해 레논의 관심을 서서히 잃었다고 느꼈다.[150] 비틀즈가 1967년 마하라시 요기의 초월 명상 세미나를 위해 웨일스의 뱅고어로 떠날 때, 경찰이 신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기차에 탑승하는 걸 막았다. 그녀는 이 일이 파혼하게 될 것임을 예고한 일이었다고 회상했다.[151] 어느 날, 켄우드에 있는 집으로 돌아오자 레논과 오노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고, 신시아는 집을 떠나 친구과 함께 지냈다. 후에 알렉시스 마다스와 밤을 함께 했으며, 몇 주 뒤, 레논이 그녀의 간통을 이유로 이혼과 줄리안의 양육권을 원하고 있다고 통보했다. 협상 이후, 레논은 항복하면서 같은 이유로 이혼했다. 이 사건은 1968년 11월 법정에서 해결되었으며, 레논은 그녀에게 연불과 줄리안에 대한 양육비로 10만 파운드를 지급했다.[152]

브라이언 엡스타인[편집]

1965년의 브라이언 엡스타인

1962년 11월, 비틀즈는 리버풀의 캐번 클럽에서 공연했고, 한낮의 콘서트 이후 엡스타인을 만나게 되었다. 엡스타인은 동성애자였다. 전기 저자 필립 노먼에 의하면, 그가 그룹의 매니저를 하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가, 레논의 외모에 끌려서였다고 한다. 줄리안이 태어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레논은 엡스타인과 함께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났고, 그들의 관계에 대한 추측에 난무했다. 이후 이에 대해 질문받은 레논은, "뭐, 거의 연애와도 같았는데, 완전 그렇지는 않았어요. 첫날밤 따윈 없었죠. 하지만 꽤 강렬한 관계였습니다. 동성애자라고 인식한 사람과 함께 보낸 건 처음이었어요. 우리는 토레몰리노스에 있는 카페에 앉아 소년들을 보았고, 전 그에게 '얘가 좋니? 아니면 쟤가 좋니?'라고 물었습니다. 함께 있는 경험이 재밌었고, 내내 제가 작가라는 상상을 하면서 지냈어요."[153] 스페인에서 돌아온 뒤, 레논은 1963년 6월에 열린 매카트니의 21번째 생일 파티에 참석했다. 캐번 클럽의 MC 밥 울러는 말장난과 애정 어리지만 가슴을 찌르는 말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고, 그 날 레논에게 "그래서 허니문은 어땠어, 존?"이라고 농담삼아 물었다.[154] 존은 결혼한지 10개월 밖에 되지 않았고, 부인과는 2개월이나 허니문이 연기되어 있었다.[155] 당시 알코올에 취했던 레논에게 이 문제는 간단했다: "밥은 날 퀴어라고 불렀고, 그래서 나는 그의 갈비뼈를 피나도록 때렸다".[156]

레논은 엡스타인이 동성애자인 점과 유대인이라는 점을 놀리는 것을 즐거워했다.[157] 엡스타인이 레논에게 자신의 자서전 제목을 제안해보라고 묻자, 그는 《퀴어 유대인》(Queer Jew)이란 제목을 제시했다. 최종적으로 《음악이 가득찬 저장고》(A Cellarful of Noise)라는 제목이 되자, 레논은 이를 《소년들로 가득찬 저장고》(More like A cellarful of Boys)로 바꿔 패러디했다.[158] 또, 엡스타인의 방문객에게는 "그를 협박하러 왔나? 아니라면, 런던에서 안 해본 놈은 네가 유일하겠군"이라고 말했다.[157] 그는 〈Baby, You're a Rich Man〉를 녹음하던 중 코러스를 "Baby, you're a rich fag Jew(당신은 부자 게이 유대인이야)"로 바꾸기도 했다.[159][160]

줄리언 레넌[편집]

2010년 10월, 존 레논 평화 기념비 제막식의 줄리언 레넌

레논의 첫째 아들 줄리언은 그와 신시아의 결혼 도중 출생했고, 당시는 비틀마니아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다. 레논은 줄리언이 출생한 1963년 4월 8일에 투어 중이었다. 엡스타인은 그가 비틀즈의 상업적 성공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대중에게 줄리언의 출생을 포함하여, 신시아와의 결혼에 대해 비밀로 지켜달라고 요청했다. 줄리언은 그로부터 4년 뒤의 꼬마일 적 일을 회상했다, "전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고, 제가 그린 수채화 그림 중 하나로 다가갔어요. 거기엔 그냥 무수한 별과 학교에서 알고 있던 금발 여자애가 그려져 있었죠. 그리고 아버지가 와선, '이게 뭐니'라고 물었고, 전 '다이아몬드와 함께 있는 하늘 속 루시에요(It's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라고 대답했어요."[161] 레논은 이를 비틀즈 노래의 제목으로 사용했고, 후에 LSD의 머리 글자에서 따온 이름이라는 얘기가 퍼지자, 레논은 "마약에 관련된 곡이 아닙니다"라고 주장했다.[162] 매카트니는 줄리언이 이름을 아무 의도없이 정한 거라며 레논의 주장을 지지했다.[162] 레논은 줄리언과 거리를 두었고, 줄리언은 아버지보다 폴과 더 가깝게 지냈다. 레논이 이혼 절차를 밟던 중, 매카트니는 신시아와 줄리언을 방문하기 위해 차를 타고 가던 중에 줄리언을 위하여 〈Hey Jules〉라는 곡을 작곡했고, 후에 제목이 〈Hey Jude〉로 바뀌었다. 레논이 나중에 말하길, "그건 정말 좋은 노래입니다. 처음에는 제 아들 줄리언에 관한 곡이였죠 ... 그는 후에 'Hey Jude'로 바꾸었어요. 전 항상 그 곡이 저와 오노에 대힌 곡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아니라고 하더군요."[163]

레논과 줄리언의 관계는 이미 소원해진 상태였고, 1971년 레논이 오노와 함께 뉴욕으로 이사를 가면서 그는 1973년까지 아빠를 만나지 못했다.[164] 팡의 격려에 힘입어, 줄리언은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보러 로스앤젤레스의 디즈니랜드로 갔다.[165] 줄리언은 이 때부터 아버지를 정기적으로 방문했고, 레논은 그에게 《Walls and Bridges》의 드럼 파트를 맡겼다.[166] 그는 줄리언에게 깁슨 레스폴 기타와 여러 악기를 사줬고, 기타 코드 몇 개를 연주하여 그가 음악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유도했다.[166] 줄리안은 뉴욕에서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가 "훨씬 나아졌다"고 회고했다. "저희는 즐겁게 지냈죠, 웃으면서 좋은 시간을 보냈어요"[167]

《플레이보이》의 데이비드 셰프와 한 인터뷰에서 레논은 "숀은 계획된 아이였고, 거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줄리언이라고 해서 조금이라도 덜한 사랑을 준 건 아닙니다. 그가 위스키 한 병에서 나왔든, 그 날에 약들이 없었든 여전히 제 아들이에요. 그는 여기에, 제 안에 존재해요. 그리고 언제나 함께할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17살 자식과 다시 관계를 맺으려 하고 있으며, "줄리언과 전 미래의 관계를 맺을 거예요"라고 장담했다.[128] 레논의 사후, 아주 적은 유산이 줄리언에게 남겨졌음이 확인되었다.[168]

오노 요코[편집]

1980년의 레논과 요코

존이 어떻게 오노를 만났는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로 레논에 말에 의하면, 1966년 11월 9일에 그는 런던에 있는 인디카 갤러리에 갔고, 거기서 개념 예술 전시회를 준비하던 오노를 갤러리 주인이던 존 던바에게 소개받았다.[169] 레논은 오노의 작품인 〈Hammer A Nail〉(나무 판자에 성인을 못으로 박아놓은 예술 작품)에 큰 흥미를 가졌다. 전시회가 아직 시작되지 않았으나, 레논이 판자에 못을 박고 싶어하자 오노가 제지했다. 던바는 그녀에게 "이 분이 누군지 몰라요? 그는 백만장자에요! 이걸 살지도 모른다고요."라고 말했다. 오노는 비틀즈에 대해서 들어보지 못했지만, 레논이 "제가 상상의 5실링을 드릴테니, 상상의 못을 망치질하게 해줘요"라고 말하자 마음이 풀렸다.[128]

매카트니가 증언한 두 번째 설은, 1965년 말 오노는 런던에서 존 케이지가 작업하고 있던 책 《Notations》를 위해 창작 뮤지컬 곡을 편찬하고 있었고, 매카트니는 그녀가 악보 원고의 기증을 부탁하자 거절했다. 오노가 레논에게 부탁하자, 그는 직접 손으로 쓴 〈The Word〉의 가사를 줬다.[170]

오노는 이후 레논의 집에 계속 전화를 걸었고, 신시아가 레논에게 이에 대해 따졌다. 레논은 그녀에게 오노는 그저 "멍청한 아방가르드 예술"로 돈을 벌려고 하는 것 뿐이라고 말했다.[171] 1968년 5월, 부인이 그리스에서 휴가를 보내는 동안, 레논은 오노를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둘은 밤에 음반 《Two Virgins》이 될 곡을 녹음했고, 레논은 이후 "새벽에 사랑을 나누었다."고 증언했다.[172] 집으로 돌아온 신시아는 오노가 자신의 목욕 가운을 입은 상태에서 레논과 차를 마시는 장면을 목격했고, 레논은 간단하게 "오, 안녕."이라고 인사했다.[173] 오노는 1968년에 임신했고 그들이 존 오노 레논 2세라고 이름 지은 아이를 1968년 11월 21일에 유산했다.[140] 몇 주 뒤 레논과 신시아는 이혼했다.[174]

레논이 비틀즈에서 활동했던 마지막 2년 동안, 그와 오노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공개 시위를 시작했다. 둘은 1969년 3월 20일 지브롤터에서 결혼했고,[175] 허니문을 암스테르담 힐튼 호텔에서 1주일간 베드 인 시위를 하며 보냈다. 둘은 미국에서도 이 시위를 할 계획이였으나, 입국을 거부당해서,[176] 대신 몬트리올의 퀸 엘리자베스 호텔에서 시위했고, 여기서 〈Give Peace a Chance〉를 녹음했다.[177] 둘은 종종 함께 행위 예술을 하기도 했다. 한 예로 빈에서 처음 선보여진 배기즘 운동이 있다. 레논은 이 시기를 비틀즈의 노래 〈The Ballad of John and Yoko〉에 상세히 담았다.[178] 레논은 1969년 4월 22일 중간 이름에 오노를 추가했다. 이를 축하하는 의미로 세 달 전에 루프탑 콘서트가 열렸던 애플 코어 건물에서 소소한 파티를 열었다. 그가 비록 존 오노 레논이란 이름을 사용하긴 했지만, 출생시 주어진 이름은 취소할 수 없기 때문에 공식 문서에는 존 윈스턴 오노 레논이라고 표기되었다.[179] 부부는 버크셔의 수닝힐에 있는 티텐 허스트 공원에 정착했다.[180] 오노가 자동차 사고로 부상당하자, 레논은 비틀즈의 마지막 음반인 《Abbey Road》를 녹음하던 중 킹 사이즈 침대를 마련하여 스튜디오에 가져다 놓았다.[181] 밴드의 해체로 인해 쏟아질 악담을 피하기 위해, 레논은 오노의 제안으로 1971년 8월 31일 뉴욕으로 이주했다.

둘은 처음에 5번가에 있는 세인트 레지스 호텔에서 지내다가 1971년 10월 16일 그리니치빌리지의 뱅크로 105번지로 이사갔다. 강도 사건 이후, 보다 안전한 웨스트 72번가의 더 다코타로 이사갔다.[182]

메이 팡[편집]

Profile picture of a bespectacled Asian woman in her early fifties. She has long red hair, and shows a toothy smile.
2002년의 메이 팡

앨런 클라인은 1968년에 ABKCO 레코드로부터 파생된 엄브렐라 회사인 ABKCO 산업을 세웠다. 메이팡은 1969년부터 여기서 접수원으로 일했다. 다음 해, 레논과 오노는 ABKCO의 프로젝트 일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둘의 개인 비서가 되었다. 그녀가 그들을 위해 3년간 일한 뒤, 오노는 팡에게 자신과 레논의 사이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오노는 그녀에게 레논과 육체적 관계를 가질 것을 제안하면서, "그는 널 굉장히 좋아해"라고 말했다. 당시 22살이던 팡은 오노의 말에 굉장히 놀랐고, 최종적으로 오노의 제안에 수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논과 팡은 캘리포니아로 이사갔고, 레논이 "잃어버린 주말"이라고 부른 18개월 동안 동거했다.[117] 로스 앤젤레스에 있던 팡은 레논에게 2년 동안 보지 못한 줄리언과 정기적으로 만날 것을 제안했다. 레논은 그녀 덕에 스타, 매카트니, 말 에번스, 해리 닐슨과도 다시 친해졌다. 닐슨과 술을 마시던 중, 레논은 팡이 한 말을 잘못 알아듣고 그녀의 목을 조르려고 했고, 닐슨이 저지하자 그만두었다.[183]

뉴욕으로 돌아온 둘은 줄리언의 방문을 위해 새롭게 객실을 빌렸다.[183] 레논은 오노 때문에 억제한 감정을 풀었고, 친척들과 친구들과 관계를 다시 갖기 시작했다. 12월, 그와 팡은 집을 매입할 계획을 세웠고, 오노의 전화를 거부했다. 1975년 1월, 레논은 금연이 가능한 방법을 찾았다고 말한 오노의 말을 계기로 그녀와 다시 만났다. 그녀와 해후한 레논은 귀가하거나 팡과 연락을 취하지 못하게 됐다. 다음 날 팡이 전화를 걸자, 오노는 레논이 최면 요법으로 인해 피곤해서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틀 뒤, 레논은 팡과 함께 예약한 치과에서 그녀를 만났고, 그녀는 그가 세뇌를 당했다고 의심될 정도로 몽롱하며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레논은 팡에게 오노와의 분가는 이제 끝났지만, 오노가 그녀를 정부로서 계속 만날 수 있게 해줬다고 말했다.[184]

숀 레논[편집]

레논과 오노가 재결합하려 할 때, 그녀는 임신을 했다. 하지만 이전에 아이를 가지려는 시도로 세 번을 임신했으나, 모두 유산되는 고통을 겪었기에 그녀는 낙태를 원했다. 오노는 레논에게 전업 남편으로 지낼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계속 임신하기로 했다.[185] 숀은 레논의 35번째 생일이었던 1975년 10월 9일 제왕 절개를 통해 출생했다. 이로서 레논의 음악 활동은 5년동안 멈추게 됐다. 그는 사진 작가를 고용해 1살인 숀의 매일을 찍게했고, 그를 위해 수많은 그림들을 그렸다. 사후에 이 그림들은 《Real Love: The Drawings for Sean》으로 출간되었다. 레논은 후에 "내 뱃속에서 나오진 않았지만, 하나님께 맹세코, 난 그의 뼈를 창조했다. 왜냐면 그의 매 식사를 챙겨줬고 잠을 재우기도 해왔으니까, 물고기처럼 수영한다는 것도 안다."[186]

비틀즈 멤버[편집]

Black-and-white picture of four young men outdoors in front of a staircase, surrounded by a large assembled crowd. All four are waving to the crowd.
1964년, 뉴욕 시에 도착한 레논(맨 왼쪽)과 비틀즈의 멤버들

레논와 링고 스타는 1970년 비틀즈 해체 이후로도 쭉 우호적으로 지냈지만, 매카트니와 해리슨과의 관계는 다양했다. 그는 처음에 해리슨과 가까웠지만, 레논이 미국으로 이주한 후에는 관계가 벌어졌다. 해리슨이 1974년 12월 《다크호스 투어》를 위해 뉴욕에 왔을 때, 레논도 그와 함께 무대에 서기로 했으나, 레논이 비틀즈의 법적 파트너십 해체 서류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한 것에 대해 다투다 결국 무산되었다. (레논은 결국 팡과 줄리언과 함께 플로리다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서명했다.)[187] 해리슨은 1980년에 자신을 아주 조금만 언급한 자서전을 발표하면서 레논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188] 레논은 《플레이보이》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그것 때문에 상처받았습니다 ... 그의 인생에서 내게 받은 영향은 아예 없나보군요 ... 그는 수년간 만나온 별 볼일 없는 색소폰 연주자나 기타 연주자라도 전부 기억하던데, 전 책에 없었어요."[189]

레논의 가장 격렬한 감정은 매카트니에게 향했다. 레논은 〈How Do You Sleep?〉의 가사를 통해 그를 공격하는 것 외에도, 그룹의 해체 후 3년 동안 언론을 통해 그와 다투었다. 이 두 사람은 예전에 그랬듯 친밀한 관계를 다시 시작했으며, 1974년에는 함께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다. 1976년 4월, 매카트니가 레논을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의 에피소드를 시청했는데, 진행자인 론 마이클스가 이 쇼에서 비틀즈가 재결성하면 3,000 달러를 제공하겠다고 했다.[190] 둘은 스튜디오를 방문하여, 돈을 받아내 나누는 것도 고려하였으나, 너무 피곤해서 그만두었다.[128] 레논은 죽기 3일 전에 한 인터뷰에서 매카트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축약했다. "내 경력 전반에 걸쳐 폴 매카트니와 오노 요코 두 명과만 작업하기로 했다 ... 나쁜 선택은 아니지."[191]

매카트니와 소원해짐과 같이, 레논은 그와 음악적인 경쟁심을 느꼈고 그의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레논은 5년간 경력에 공백을 냈고, 그가 별 볼일 없는 음악을 제작하는 동안에는 편히 지켜만 보았다.[192] 매카트니가 1980년에 〈Coming Up〉을 발표하자, 레논은 스튜디오로 돌아왔다. 생애 마지막 해에 그 노래가 머리에서 계속 맴돌자 "그건 날 미친놈으로 몰고가!"라며 농담삼아 불평했다.[192] 같은 해, 비틀즈가 두려운 적이거나, 아니면 가장 좋은 친구인가를 물었을 때, 레논은 둘 다 해당하지 않으며 오랫동안 그들 중 누구도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그는 또한 "여전히 그 녀석들을 좋아한다. 비틀즈는 끝났지만 존, 폴, 조지와 링고는 계속된다."고 말했다.[128]

음반 목록[편집]

각주[편집]

^ Note a: Lennon was responsible for 25 Billboard Hot 100 number one singles as performer, writer or co-writer.

^ Note b: "Imagine" topped the US singles chart compiled by Record World magazine, however, in 1971.[198]

출처[편집]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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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Spitz 2005, 24: "Julia offered the name in honour of ... Winston Churchill"쪽.
  5. Spitz 2005, 24: "The entire Stanley clan gathered nightly at Newcastle Road"쪽.
  6. Lennon 2005, 54: "Until then he had sent her money each month from his wages, but now it stopped"쪽.
  7. Spitz 2005, 26: "In February 1944 ... he was arrested and imprisoned. Freddie subsequently disappeared for six months"쪽.
  8. Spitz 2005, 27쪽.
  9. Lennon 2005, 56: "Alf admitted to her that he had planned to take John to live in New Zealand"쪽.
  10. Spitz 2005, 30: "Julia went out of the door ... John ran after her"쪽.
  11. Spitz 2005, 497쪽.
  12. Lennon 2005, 56: "Hard to see why Mimi wanted John, as she had always said she didn't want children"쪽.
  13. Spitz 2005, 32: "When he was old enough, taught John how to solve crossword puzzles"쪽.
  14. Spitz 2005, 48: "To get them started, she applied the triad to 'Ain't That a Shame'"쪽.
  15. Sheff 1981, 134–136쪽.
  16. Spitz 2005, 32: "Parkes recalled ... Leila and John to the cinema as often as three times a day"쪽.
  17. Harry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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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Miles 1997, 47, 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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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Lennon 2005, 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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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 Frankel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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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 Lewisohn 1988, 24–26: "Twist and Shout, which had to be recorded last because John Lennon had a particularly bad cold"쪽.
  50. Spitz 2005, 376: "He had been struggling all day to reach notes, but this was different, this hurt"쪽.
  51. Doggett 2010,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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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3. Harry 2000a, 232쪽.
  154. Harry 2000a, 1165, 1169쪽.
  155. Lennon 2005, 94, 119–120쪽.
  156. Harry 2000a, 1169쪽.
  157. Harry 2000b, 232쪽.
  158. Coleman 1992, 298–299쪽.
  159. Norman 2008, 503쪽.
  160. MacDonald 2005, 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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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2. Two Virgins liner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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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3. Harry 2000b, 7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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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5. Harry 2000b, 535, 690쪽.
  186. Harry 2000b, 5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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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s

참고 문헌[편집]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