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크롬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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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크롬웰
Oliver Cromwell
Oliver Cromwell

올리버 크롬웰의 초상화
출생 1599년 4월 25일(1599-04-25)
영국 케임브리지셔 헌팅던
사망 1658년 9월 3일 (59세)
영국 런던 화이트홀
매장지 타이번
국적 영국 영국
학력 시드니 서식스 칼리지
직업 농장주, 정치인, 군인
종교 청교도
배우자 엘리자베스 부처
자녀 로버트 크롬웰
올리버 크롬웰
브리짓 크롬웰
리처드 크롬웰
헨리 크롬웰
엘리자베스 크롬웰
매리 크롬웰
프랜시스 크롬웰
친척 로버트 크롬웰 (아버지)
엘리자베스 크롬웰 (어머니)
서명
Oliver Cromwell Signature.svg
런던 의회 광장에 있는 올리버 크롬웰 동상, 한 손에는 검과 다른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있다. 크롬웰은 호국경에 취임할 때 검과 성경을 들고 맹세를 했다.

올리버 크롬웰(영어: Oliver Cromwell, 1599년 4월 25일 - 1658년 9월 3일)은 영국의 정치가이며 군인이다. 청교도 혁명으로 영국의 군주제를 폐한 1653년 12월 6일부터 죽을 때까지 호국경으로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다스렸다.

생애[편집]

청교도 혁명[편집]

영국 동부의 케임브리지셔 주 헌팅턴청교도이자 젠트리 계급의 지주의 집에서 태어났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1628년에 하원 의원이 된다.

청교도 혁명에서는 의회파에 속하여 1642년에 '철기군'(鐵騎軍, Ironsides)이라 불리는 기병대를 지휘하여 요크 서쪽의 마스톤무어 전투에서 활약하여 의회파가 철기대를 모델로 조직한 신모델군의 부사령관에 취임하여 1645년의 영국 중부의 네즈비 전투에서 국왕 찰스 1세스코틀랜드에 몰아내어 의회파 측을 승리로 이끌었다.

내란의 종결후 의회는 군의 해산을 요구하였으나 크롬웰은 의회파 중에서도 국왕과의 타협을 용납하지 않는 독립파에 속하여 타협을 구하는 장로파와 대립하여 결국 장로파를 추방하고 크롬웰은 독립파 의원에 의한 의회에 주도권을 잡아 1648년에 다시 궐기한 국왕 찰스 1세를 처형하고 1649년 5월에 잉글랜드의 최초이자 마지막 공화국인 '잉글랜드 연방'(또는 '잉글랜드 공화국')을 성립시켰다.

잉글랜드 공화국[편집]

군사독재[편집]

크롬웰은 잉글랜드 역사에 군사독재라는 오점을 남겼다. 실제로 잉글랜드 공화국의 지도자로서 크롬웰은 왕당파의 반(反)혁명운동의 가능성을 두려워한 중산시민의 지지를 받으며 1653년 의회를 해산하여 결국 종신호국경이 되었으며, 성문헌법인 "통치장전"에 기하여 군사독재를 행하였다. 또한 혁명군 중에서 평등한 보통선거를 요구하고, 아일랜드 침략을 양심적 병역거부로 반대하는 등 진보적 성격을 보이던 수평파를 지도자 총살과 이들의 주장에 대한 묵살(정치는 무지한 민중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엘리트주의적인 논리)로 탄압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싹을 억압하였다. 크롬웰은 자신을 지지하는 중산시민의 권익을 옹호하여 중상주의정책을 시작하였다.

네덜란드 견제[편집]

1651년에는 항해조례를 시행하여 네덜란드의 중계무역상의 활동을 제한하여 영란전쟁을 수행하였다. 또 스페인과 싸워 자메이카를 획득하기도 했다.

종교개혁가 크롬웰[편집]

영국의 청교도는 영국국교회 내에 남아 있던 교황주의의 잔재인 주교제도, 성직자 의 제복과 각종 성구(聖具), 예전(禮典)에 대해 폐기를 요구했다. 그들은 영국 교회의 사도적 계승권자라고 칭하던 주교직을 불필요한 것으로 여겼다. 가톨릭 교회의 부패와 비 성경적 요소들을 제거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크롬웰은 교황주의에 반대했고 1641년 5월3일 하원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로마 가톨릭을 공고히 하려는 사제단과 예수회의 구상에 대해 경계하고 이들의 참된 종교개혁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저지해야 할 것이다"

또한 "온 힘을 다해 전능하신 하나님을 예배 하고 교황주의와 교황주의자들의 변신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황주의와 가톨릭에 대한 경계는 호국경이 된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1656년 9월 17일 의회에서 크롬웰은

"진실로 스페인은 위협적인 적입니다. 그들은 자연적인(natural) 적입니다. 본인이 이전부터 지적해 왔던 것처럼 그들 안에 하나님에 대해 적대감을 가 진 자들입니다. 그들은 미신과 맹목적인 추종에 있어서 로마의 눈에 복종하는 자들입니다" 라고 말함으로 교황주의와 로마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크롬웰은 교황주의와 국교에 대하여는 선명하고도 단호한 선을 그었고 교황주의와 국교회의 제도들을 개혁했다.

1643년에 크롬웰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의회는 회의를 소집하여 신앙고백서의 작성을 결의했고 마침내 1648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의회의 승인으로 확정되었다. 당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5조 '교회에 대하여' 6항은 명백하게 로마 가톨릭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규정하고 있다.

크롬웰은 또한 사회윤리의 확립, 풍기단속법 등의 제정을 통한 기독교 이상사회의 구현을 위한 노력, 성직제도의 개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채택 등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하여 영국에서의 종교개혁에 광범위하게 기여했다.[1]

프로테스탄트의 보호자[편집]

피에몬테 학살의 종식[편집]

그는 평생을 로마 가톨릭 교회에 탄압받는 프로테스탄트를 보호하는데 바쳤다. 특히 그가 가톨릭 교회가 이탈리아 북부지방서 자행한 피에몬테 학살 사건 때 교황청에 항의한 것은 유명하다. 그해 6월에 피에몬테 계곡의 박해에 관한 소식이 전해졌다. 가톨릭의 여섯 연대들이 그들 중 셋은 아일랜드인들이였는데, 한 겨울에 주거지로부터 왈덴시스(프로테스탄트)들을 쫓아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불쌍한 프로테스탄트들에게 취해진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만행은 아주 유명하다. '마을들은 철저히 불태워졌고, 남자들은 도끼로 베어졌다, 아이들의 머리가 바위 위로 던져졌고, 여자들은 벌거벗겨진 체 창에 찔렸다- 150 명의 여자들이 교수형 되었고, 그들의 머리는 볼게임에 사용되었다.' 그 잔악한 만행에 관한 소식이 크롬웰에게 전해졌을 때 그는 울음을 터트렸다. 그 날 1655년 1월 3일 그는 프랑스와 조약을 조인하고자 했는데, 그는 즉시 거절하고, 그 국왕(루이 14세)과 마자렝 추기경 겸 수상이 왈덴시스 프로테스탄트들을 구하는데 그를 원조하겠다고 스스로 서약할 때까지 협상은 진행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알프스로 배를 몰고가서라도 그 박해를 중지시킬 것이다.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이 박해를 중지시킬수 있다면 프랑스와의 전쟁, 아니 전 세계와의 전쟁이라도 치를 것이다."[2]

루이 14세는 결국 양보하였고, 사보이의 공작이 왈덴시스에 대한 사면을 보장하고 그들의 이전의 권리들을 회복시킨다는 전언이 전달되었고 학살은 중단되었다. 이는 마쟈랭 추기경이 크롬웰을 너무나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크롬웰의 이름만 들어도 창백해졌다고 한다.

아일랜드 대학살에서 프로테스탄트 보호[편집]

1641년 예수회의 창시자 이그나티우스 축제일인 10월 23일 아일랜드의 예수회원들, 신부들 그리고 수사들은 아일랜드의 모든 프로테스탄트들을 학살하기로 마음 먹었다. 프로테스탄트 남자들, 여자들 그리고 아이들이 가톨릭 주의자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가톨릭주의자들은 그들을 발가벗긴 후, 돌, 자루도끼, 검 그리고 다른 도구들로 살해했다. 이한 학살로 희생된 사람들의 수가 약 15만명에 달했다.[3] 이 학살 이후 프로테스탄트들과 가톨릭 교도들 사이에 영원한 전쟁이 계속되어 왔다. 찰스1세는 생전에 자신의 세력을 이용해서 가톨릭 주의자들 편을 도와줌으로써 이를 조장했다. 1641년부터 1649년까지 예수회원들의 학살이 계속되었는데 이 학살은 크롬웰이 아일랜드에 상륙하여 가톨릭 주의자들을 물리치고서야 멈추었다. [4] 크롬웰은 1649년에서 51년에 걸쳐 반의회파의 거점이기도 했던 켈트인의 땅인 아일랜드스코틀랜드에 대한 침공했다. 특히, 아일랜드는 항복한 크롬웰의 전쟁으로 영국식민지가 되는데, 당시 아일랜드 민중들은 가톨릭을 믿는 자신들과는 달리 개신교(장로교)를 믿는 영국인 지주들에게 받는 종교적 사유의 차별착취 등으로 고난의 길을 걸었다. 결국 이들 중 일부는 영국의 착취아일랜드 대기근으로 인한 굶주림을 피해 캐나다, 미국 등으로 이민한다.[5]

신앙인 크롬웰[편집]

크롬웰은 1658년에 올린 한 기도문에서 그 자신이 비록 부족하고 허물 많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언약안에 거하기를 원했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부름받아 쓰임받게 되기를 간구했다.

""하나님 저를 주의 백성들을 선하게 하는 일에 배치하여 주시고 지속적으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그들에게 한결같은 판단력을 주시고 같은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들을 개혁주의 사역으로 인도하여 주시고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써 주시옵소서. 당신의 도구인 주의 백성들을 지도하여 주시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하여 주시옵소서"

크롬웰의 사적 메모 형식의 일지의 끝에는 "하나님이 나의 힘이시다"(God is our Strength)라고 적혀있다. 또 전장의 동료 부하들에게 보낸 짧은 서신들의 끝에도 ”저는 당신의 겸손한 보잘 것 없는 종입니다“(Your Humble Servant)라고 표기하는 예가 대부분 이었다. 그는 곤경에 처하거나 어려운 일이 닥칠 때면 참모들과 모여 함께 기도를 했다. 해답이 나올 때까지 그 기도는 계속됐다. 하루 이틀 어떤 때는 몇날 며칠을 해답이 나올 때까지 기도했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독실한 신앙이 바로 청교도 혁명의 근원이 되었다.[6]

철기군[편집]

청교도혁명이 시작되자 크롬웰은 잘 훈련된 왕의 기병을 상대하기 위해 직업군인으로 구성된 기병대 조직 및 훈련에 착수했다. 그는 전쟁초기에 의회군에게 "도시 출신의 바텐더나 천박하고 분방한 사람들을 버리고, 그 일을 감당할 정신력이 있는 착실한 자작농으로 군대를 편성하라"고 충고했다. 이렇게 하여 엄격한 선발과정을 거쳐 기병대를 모집했는데 이들이 철기군(鐵騎軍Ironsides)이다. 그들은 오직 신만을 두려워하고 그 어느 것도 두려워 하지 않았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신앙심으로 무장하고 청교도주의에 입각한 기율과 맹렬한 훈련을 받은 크롬웰의 군대는 곧 영국에서 가장 잘 싸우는 '철기병'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크롬웰의 철기병은 1644년 마스턴 무어(Marston Moore) 전투에서 기고만장한 왕당파 군대를 깨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의회는 크롬웰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고 철기병 방식을 도입하여 전군을 개편 하였는데 이를 신모델군(New Model Army)이라 한다. [7]


죽음[편집]

올리버 크롬웰의 데스 마스크. 워윅 성소재.

크롬웰은 더 나아가 국왕의 자리를 넘보았다고 일부 가톨릭 역사학자들이 주장하고 있으나 그에게는 그런 야심이 없었다. 토머스 칼라일은 《영웅숭배론》에서 그에 대한 후대 사가들의 부당한 역사적 오류들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그와 같은 영웅은 단지 껍대기나 우상의 모습에 불과한 왕위나 왕들의 금마차 따위는 영웅에게는 안중에도 없는 사소한 것들이었다고 주장했다. 크롬웰은 1658년에 병사하였다. 크롬웰이 죽음을 기다리고 누워 있을 때 한 마지막 기도는 크리스천 영웅의 말이었다. 그는

"나와 나의 대의를 신은 심판하소서, 사람은 할 수 없으니 신께서 정의와 자비로 하소서.[8]"

그러나 크롬웰의 군사독재에는 반발도 강하여, 그의 사후 일단 호국경으로서의 권력은 그의 아들인 리처드 크롬웰에게 넘어가나 장로파가 1660년찰스 2세를 국왕으로 맞이하면서 왕정복고가 일어난다. 1661년, 왕정복고 후 왕을 시해했다는 명목으로 크롬웰의 는 파헤쳐진 후 시신에 부관참시가 행해졌으며, 그의 추종자들 중 주요 인사들도 교수형을 당한다.
상징적으로, 찰스 1세 가 죽은 1월 30일에 시행되었다.

지금도 런던웨스트민스터 궁전(국회의사당) 정문 앞에 갑옷차림으로 검과 성서를 들고 있는 크롬웰의 동상이 서 있다.

사후 부관참시[편집]

올리버 크롬웰은 찰스 2세에게 부관참시를 당하고 계속 효수되었다. 그 이후 여기저기 굴러다니다가 결국 그의 모교에 안장되었다. 크롬웰에게 깊은 원한이 있는 많은 사람들의 자손을 의식해서 그 수급이 파묻힌 장소는 현재까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또한 예수회원들은 그를 독재자 찬탈자로 낙인찍으며 비방해왔고, 잉글랜드의 역사에서 그의 기억들을 파괴시키고자 모든 짓을 다해왔다.[9]

업적[편집]

올리버 크롬웰의 업적은 우선 왕당파와의 전투 당시 직업 군인 대신 신앙심 깊은 농민들을 소집했는데 이들을 철기군(鐵騎軍Ironsides)이라고 했다.이들은 비록 정규 병사는 아니었지만 깊은 신앙심으로 똘똘 뭉쳐 있어서 상대 군사들은 이들의 용맹함 앞에 겁을 먹고 달아나기 바빴다. 이처럼 크롬웰은 정치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전장에서도 기독교 전파와 가톨릭주의 배격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크리스마스 금지[편집]

크롬웰은 청교도 정신 곧 성서주의에 근거하여 성탄절을 금지하였다. 마태복음서, 누가복음서에 예수의 탄생설화가 나오기는 하지만, 예수12월 25일에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크롬웰의 종교원리주의는 사람들이 크롬웰에게서 등을 돌리는 원인들 중 하나로 작용했다.

같이 보기[편집]

바깥 고리[편집]

주석[편집]

  1. 주연종《영국혁명과 올리버 크롬웰의 상관성 고찰 : 그의 신앙관을 중심으로》(총신대학교 대학원)
  2. 에릭 펠프스 《바티칸 암살단》P181
  3. 존 폭스<<폭스의 순교사>>
  4. 에릭 펠프스 <<바티칸 암살단>>
  5. 1882년 캐나다 밴쿠버를 배경으로 만든 범죄 수사 드라마 머독 미스터리 에피소드 중에는 개신교를 믿는 영국계와 가톨릭을 믿는 아일랜드계 간의 종교적, 민족적 갈등과 차별이 나오고 있으며 오스트레일리아 작가 콜린 맥컬로소설가시나무새들》에서도 대영 제국착취폭력을 경험한 아일랜드 이민인 패디가 정당한 전쟁론 [1]을 주장하는 아들 프랭크에게 대영제국제국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군복무를 거부함으로써 폭력에 반대할 것을 요구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아일랜드의 이러한 역사적 상처에 근거한다.
  6. 주연종《영국혁명과 올리버 크롬웰의 상관성 고찰 : 그의 신앙관을 중심으로》(총신대학교 대학원)
  7. 정토웅《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가람기획)
  8. 토머스 칼라일《영웅숭배론》(한길사, P346)
  9. 에릭 펠프스 <<바티칸 암살단>>P178
전 대
찰스 1세
영국의 통치자
1649년 - 1658년
후 대
리처드 크롬웰
전 대
찰스 1세
스코틀랜드의 통치자
1649년 - 1658년
후 대
리처드 크롬웰


  1. 리처드 호슬리. 김준우 옮김, 편집. 《예수와 제국》. 한국기독교연구소. 전쟁에 대한 응징으로 생각하는 전쟁 옹호 논리, 제국에서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 하고, 대중을 선동하기 위해 사용하는 정치선전 논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