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크롬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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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크롬웰
Oliver Cromwell
Oliver Cromwell by Samuel Cooper.jpg
Coat of Arms of the Protectorate (1653–1659).svg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 연방호국경
임기 1653년 ~ 1658년
전임 (신설)
후임 리처드 크롬웰

신상정보
출생일 1599년 4월 25일(1599-04-25)
출생지 잉글랜드 케임브리지셔 헌팅던
사망일 1658년 9월 3일(1658-09-03)(59세)
사망지 잉글랜드 런던 화이트홀
국적 잉글랜드
학력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드니 서식스 칼리지
부모 로버트 크롬웰(부)
엘리자베스 크롬웰(모)
배우자 엘리자베스 부어치어
자녀 로버트 크롬웰
올리버 크롬웰 2세
브리짓 크롬웰
리처드 크롬웰
헨리 크롬웰
엘리자베스 크롬웰
매리 크롬웰
프랜시스 크롬웰
직업 농장주, 군인, 정치가
종교 청교도
묘소 잉글랜드 타이번
서명
군사 경력
복무 잉글랜드군
최종계급 총사령관
지휘 철기대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년 4월 25일 ~ 1658년 9월 3일)은 잉글랜드의 군사 지도자이자 정치인이었다. 영국 군주제의 전복을 지도한 후, 그는 1653년 12월 16일부터 말라리아 혹은 중독으로 믿어진 거의 5년 후 자신의 사망까지 호국경으로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아일랜드를 다스렸다.

케임브리지셔 헌팅던에서 태어난 그는 강한 청교도 정신과 함께 당시 창립된 대학이었던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도니 서식스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크롬웰은 자신의 부친의 사망 때문에 학위를 취득하지 않으면서 떠났다. 그는 지방 판사인 치안판사로 임명되었다.

잉글랜드 내전의 처음에 크롬웰은 자신의 새로운 모델의 군대의 근거가 된 철기대로 알려진 기병대를 키우면서 자신의 군사 경력을 시작하였다. 마스턴 무어 전투 (1644년)에서 크롬웰의 리더십은 그를 큰 주목으로 가져왔다. 의회 명분의 지도자와 새로운 모델 군대 (비공식적으로 원두당원)의 사령관으로서 그는 국왕 찰스 1세를 물리쳐 절대 권력으로 군주제의 종말로 가져왔다.

크롬웰은 종교적인 남성이었으며 신성한 운명의 심오한 감각을 가져 27세의 나이에 전환 경험을 가졌다. 행정장관으로서 그는 술집에서 을 마시고 있었던 남성들을 모아 그들을 강제로 찬송가를 부르는 데 시켰다. 청교도인 그는 설립된 교회의 의식, 식전과 장식을 싫어하였고, 종교적 정세에 주교들과 국왕의 권위에 반대하였으나 장로교 혹은 회중교회 계통을 따라 국교회를 지지하였다. 신앙의 자유는 그가 가톨릭 교도들을 용인하지 않았어도 그의 믿음의 자산에서 중요한 판자였다. 1656년 그는 유대인들이 잉글랜드에 재정착하는 데 공식적으로 허용하였다. 시온주의 조직이 팔레스타인에 있는 조국을 위하여 1919년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파리 강화회담을 청원했을 때 그것은 "팔레스타인의 문제로 잉글랜드의 특이한 관계"와 "유대인들의 시온으로 귀국은 영어 문학에서 놀라운 기능이었을 뿐 아니라 국정의 영역에서 그것이 그 역할을 하여 크롬웰 아리 유대인들의 재입원과 함께 시작되었기" 때문에 영국에게 임무를 위임해야 할 것을 구체적으로 요청하였다. 어떤 학자들은 크롬웰이 영국의 토지에 새로운 예루살렘이 설립될 것을 생각했다고 제안하였다. 일부는 영국이 유대인들을 크롬웰로부터 하나님의 선택된 인종으로서 승계했던 영국의 시온주의를 추적한다. 크롬웰은 조용하고 냉정한 남성이었으나 그는 자신을 섬긴 자들로부터 존경을 명령라고 잉글랜드 내전에서 왕당파들을 물리친 훈련된 군대를 창조하였다.

크롬웰은 국왕을 처형하는 것에 괴로워했으나 판사가 국왕 같은 사람이었을 때 그의 관점에서 믿음을 깨뜨리거나 백성과의 언약에 국왕이 아마도 퇴임할 것을 믿었다. 장 칼뱅에게 빚을 진 이 언약적 권위 개념은 미국의 설립 문서에서 큰 영향력이었다. 실망했어도 상원과 지주들의 의회는 여태까지 국왕이 지내온 것보다 빈민들에게 더 이상 동정심이 없다. 크롬웰은 의회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기초를 놓는 데 적절하게 인정되었다. 크롬웰은 순결을 위하여 자신의 열심을 과도하게 저질렀으며 특히 아무 폐허가 된 오래된 건물의 파괴가 아직도 크롬웰에 핑계가 두어진 것이 말해졌던 가톨릭 아일랜드에 그의 반대에서였다. 1999년 가톨릭 교도들은 그의 출생의 400 주년을 잊었다. 1649년 9월 드로이다에서 남성, 여성과 어린이들의 학살 후에 그는 그것이 하나님의 의의 처벌이었다는 것을 말했다. 하지만 크롬웰의 유산, 그의 유대인들의 재입국, 그의 종교적 관용과 권위주의적 통치에 그의 반대의 조건들에 근대의 영국과 북아메리카의 민주주의가 건설된 것에 필수적인 토대를 마련하였고, 영국의 영향력의 결과로서 세계의 다른 곳에서 복제되었다. 그것은 어떤이들이 의회의 어머니로 부르는 외부에서 그의 동상이 두드러진 것을 부적절하다.

가족[편집]

올리버 크롬웰의 부인 엘리자베스 부어치어

올리버 크롬웰은 튜더가의 정치인 토머스 크롬웰의 누이 캐서린 크롬웰로부터 내려왔다. 캐서린은 윌리엄 애프 예번과 조앤 튜더의 아들 모건 애프 윌리엄스에게 결혼되었다. 거기에 조앤이 베드퍼드의 제1 백작 재스퍼 튜더의 불법 딸이었다는 사색이 있다.

캐서린이 결혼하였어도 그녀의 자녀들은 아마도 자신들의 유명한 삼촌과 자신들의 연결을 유지하는 데 그녀의 이름을 간직하였다. 가계도는 리처드 크롬웰 (1500년 ~ 1544년), 헨리 크롬웰 (1524년 ~ 1603년 1월 6일), 그녀가 그에게 아들을 낳은 날 1599년 4월 25일 당시 올리버의 부친 로버트 크롬웰에게 에스콰이어 (1560년 ~ 1617년,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에게 결혼)를 통하여 지속되었다.

크롬웰 혈통의 또 다른 흥미로운 특징은 위의 주장과 달리 그의 모친의 결혼 전 이름이 다른 목적을 위하여 성을 지켜 왔을 것인 데 토머스 크롬웰로부터 여성 쪽만 강조하기 보다는 가족 유산의 남성 쪽을 위장시키는 것이었다. 이 유산은 3개의 왕가들 - 각각 잉글랜드, 프랑스신성 로마 제국의 튜더가, 발루아가비텔스바흐가를 통하여 간다.

그의 추정되는 부계 조상 재스퍼 튜더는 제1대 리치먼드 백작 에드먼트 튜더의 동생이자 그의 아들 잉글랜드의 헨리 7세에게 삼촌이었다. 재스퍼는 1485년 8월 22일 잉글랜드의 리처드 3세를 상대로 보즈워스 전투에서 튜더가의 승리의 틀림없는 건축가였다. 그 전투의 결과는 장미 전쟁이 끝날 무렵 튜더가의 패권을 확립한 그의 조카에 의하여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성공적인 정복으로 이끌었다.

에드먼드와 재스퍼 튜더는 둘다 오언 튜더와 프랑스의 샤를 6세엘리자베트 폰 바이에른 공녀의 딸 카테린 드 발루아의 아들들이었다. 캐서린은 잉글랜드의 헨리 5세의 미망인이기도 했다. 그녀의 모친 엘리자베트는 바이에른-잉골슈타트의 공작 슈테판 3세와 타데아 비스콘티의 딸이었다.

의원 시절[편집]

버지니아로 자신의 삼촌을 따라가지 않기로 결정한 그는 대신 1628년 ~ 1629년의 잉글랜드 의회에서 헌팅던을 위한 의원이 되었다. 그의 첫 연설은 모든 남성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에 찬성하여 승인되지 않은 팜플렛에서 주장한 급진적 민주주의자의 방어였다. 그는 또한 자신들의 땅에서 그들을 몰아내고자 했던 부유한 지주들로부터 더 펜스의 주민들을 방어하는 것에 현저했다.

찰스 1세는 다음 11년 동안 의회 없이 다스렸으며 의회 외의 세금을 올리고 잉글랜드 성공회개신교의 가톨릭적인 전망을 강요하는 것에 관한 그의 정책들에 의하여 국민들을 소외시켰다. 1640년 그가 의회를 다시 소집하는 데 자금 부족에 의하여 강요되었을 때 올리버 크롬웰은 국왕이 시민 및 종교 둘다의 문제에 의회의 동의하에 다스리는 데 국왕이 동의했을 때까지 아무 새로운 세금에 격렬하게 반대한 많은 의원들 중의 하나였다. 이 위기를 해결하는 데 실패는 의회파 (의회의 권력의 지지자들)와 왕당파 (국왕의 지지자들) 사이에 터진 내전으로 직접 이끌었다.

크롬웰은 의회의 열정적인 후원자로 주로 종교적인 이유였다. 비록 뛰어난 연설자는 아니지만 크롬웰은 처음부터 의회적 대의에 뛰어났다. 그는 혈통 혹은 결혼 생활에 의한 의원들의 상당한 수와 함께 관련이 있었으며 그의 전망들은 영향적이었다. 간첩들이 그를 국왕 찰스 1세에 대항하는 반란으로 내부자로서 식별하고 그를 체포하는 데 군인들이 보내졌을 때 크롬웰은 결석한 몇몇 의원들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군사 능력이 자신을 유명하게 만들었을 때 내전이 시작될 때까지 의회의 지도자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후에 국왕의 전복과 처형에 연루되었어도 크롬웰은 급진적 공화주의자로서 내전을 시작하지 않았으나 의회의 동의하에 그리고 더 많은 합의로 개신교의 종교적 정책과 함께 다스리는 데 찰스를 강요하는 의도와 함께였다.

종교적 신념[편집]

크롬웰의 종교적과 정치적 이해들은 매우 밀접하게 얽혀있다. 그는 헌신적인 청교도로 구원은 성경의 가르침을 순종하고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했던 자들에게 전부 열렸다는 것을 믿었다. 그는 교황과 사무적 권위의 호위에 성경의 우선권을 부정한 것으로 보고 유럽에서 개신교도들의 폭정과 박해에 대하여 자신이 비난을 했던 가톨릭 교회에 열정적으로 반대하였다. 이 이유로 그는 성경 공부의 장소에 가톨릭 형식의 주교들과 공공 기도서를 소개한 찰스 1세의 잉글랜드 성공회 개혁들을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크롬웰의 보호 기간 동안 성공회 기도서는 예배 규칙서와 대체되었고 주교들은 폐지되었다. 크롬웰은 성인의 축일 혹은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것에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의 군대는 교황 우상 숭배, 장식품, 상들로서 그들이 여긴 아무 징후들을 없애거나 성인의 착색 유리 묘사들을 파괴하면서 가끔 크롬웰을 모독하였다. 크롬웰의 가톨릭과 박해와 관계들은 아일랜드 가톨릭 교도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개신교 정착자들에 의하여 학살로 표시된 1641년 아일랜드 반란과 함께 깊어졌다. 이 일은 왜 크롬웰이 아일랜드에서 자신의 군사 캠페인에서 너무 가혹하게 행동했던 이유들 중의 하나가 될 것이었다.

크롬웰은 또한 내전에서 개신교 편에 더욱 급진적인 종교 단체들에 반대되었다. 자신이 퀘이커교도와 장로교도들과 협동했어도 그는 다른 개신교도들에 그들의 신념들의 권위주의적 부과에 반대하였다. 그는 전쟁 이후의 정착에 전체의 개신교도들을 위하여 신앙의 자유를 주장했던 "독립파"와 연관되었다. 그는 로버트 브라운이 자발적으로 지방적으로 진실한 교회를 구성하고 통치자가 아니라 그리스도 아래 언약 공동체를 자신이 말했던 신자들을 모았을 때 노리치에서 1581년에 처음에 시작했던 회중교회에 호의를 가졌다. 회중교회들은 자치로 자신들 소유의 목사와 장로들을 선택하였다.

결국 크롬웰은 또한 하나님이 선택된 사람들의 활동들을 통하여 세계 정세를 활동적으로 지시하고 있었던 신념인 섭리주의에 확고한 신자였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도구로 믿었고 내전이 일어난 동안 자신이 승리들을 자신의 활동들의 하나님의 찬성의 승인 표시로, 그리고 패배들을 하나님이 자신을 다른 방향으로 지시하고 있었다는 징후들로서 번역하였다. 하지만 그는 또한 자신의 군대를 신용하였다.

군 사령관[편집]

네이즈비 전투에서 (1645년)

잉글랜드 내전이 일어난 동안 군 사령관과 정치인으로서 크롬웰의 영향력은 극적으로 영국 제도의 군사와 정치 지형을 바꾸었다.

43세의 나이에 아무 군사 경험 없이 의회군에 가입한 그는 기병 부대를 모집하고 이스트앵글리아에서 전투의 연속에서 경험과 승리들을 얻었다. 그는 유명하게 고귀한 출생을 기반으로 하기 보다는 장점을 기반으로 한 자신의 장교들을 모집하여 "난 차라리 자신이 무엇을 위하여 싸우는 것을 알고 당신이 신사로 불리고 다른 것이 아닌 것보다 사랑들을 아는 일반 적갈색의 코트를 입은 대위를 가지고 싶다."고 말하였다. 결과로서 크롬웰의 명령에 따라 새로운 모델의 군대는 수평파 같이 정치적 급진파와 제5왕국파 같은 무수히 많은 급진적 종파들을 위한 중심이 되었다.

크롬웰은 군사 전술에서 정식으로 훈련을 받지 않았으나 명령을 위한 본능적 선물을 가졌다. 그는 압도적으로 유럽 전쟁의 베테랑이었던 컴벌랜드 공작 루퍼트에 여러번 성공하였다. 그의 군대는 매우 훈련되었다. 욕설과 만취는 벌금과 함께 만나졌다. 그의 군대는 시편을 포함하여 찬송가를 부르며 전투로 들어갔다. 다시 이 일은 크롬웰이 성경의 구절들에 의식적으로 모델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제안한다.

반면에 프레이저 (2001)는 그가 자신의 부하들과 또한 농담을 할 것이며 그가 그들과 함께 했을 때 그들의 열정과 농담들 마저 자연스럽게 구현한 인생 특색보다 컸다는 것을 말한다.

크롬웰의 군대는 그의 용기와 자신들의 안녕에 대한 그의 관심을 존중하는 데 왔다. 새로운 모델의 군대를 위하여 기병 총사령관으로 진급된 그는 자신의 군대의 일부에 매우 높은 수준의 훈련과 동기 부여를 보여준네이즈비 전투에서 거대한 성공과 함께 공격과 자신이 처음 사용한 전술 후에 자신의 부하들을 빠르게 재편성으로 훈련시켰다. 성공적인 군사 승리들과 함께 크롬웰은 그 시간의 지도적인 정치인이 됐을 때까지 정치적 권력을 얻었다. 1646년 첫 내전이 끝날 무렵 국왕은 의회의 죄수였다. 하지만 크롬웰은 이 승리를 거둔 군대를 명령하였고 결과로서 잉글랜드의 미래를 지시하는 입장에 있었다.

크롬웰은 잉글랜드 내전에서 자신이 용감하고 대담한 기병 사령관이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앞으로 몇년 동안 그는 또한 전체 군대의 예외적인 사령관으로 인정될 것이었다. 자신의 성공적인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정복들은 적대적인 영토에서 공급 및 물류를 결성하는 것에 관한 훌륭한 숙달을 보여주었다.

국왕의 처형[편집]

찰스 1세의 재판 (1649년 1월 4일)

크롬웰을 포함한 의회파들은 찰스 1세와 타협 합의에 도달하는 데 희망을 두었다. 하지만 국왕은 자신의 신성한 권리 교리와 함께 엇갈린 해결책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찰스 1세의 교도소 탈출 후 1648년에 터진 이른바 "제2차 내전"은 국왕과 타협이 불가능할 것을 크롬웰에게 제안하였다. 1649년 반역죄로 재판을 받은 찰스 1세는 화이트홀에서 잔부의회에 의하여 처형을 당했다. 크롬웰은 그들이 "찰스 스튜어트, 그 피의 남자"로 불렀던 국왕을 처형하는 데 자신의 장교들과 더불어 급진파로부터 압력을 받았다. 사망 영장으로 59명의 서명인들이 있었어도 많은이들은 그해 1월 찰스 1세의 처형을 위하여 크롬웰에게 책임을 물었다. 하지맞 크롬웰은 그의 군대가 국회의사당에 침입하고 그 문제에 투표하는 데 찰스의 처형에 호의를 가진 "군주 시역자"들 만을 허용하면서 많은 책임을 진다.

크롬웰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남아있는 왕당파의 요새들을 부수는 데 자신이 즉시 국가를 떠나면서 잉글랜드에서 미래의 정부 형성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찰스 2세 아래 1660년 왕정복고 후에 군주 시역자는 하나님에 대한 반항으로 동일시되는 범죄가 되었고 1월 30일 엄숙한 잔치로 순교자로서 국왕의 살인을 표시하는 성공회 기도서로 편입되었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편집]

크롬웰의 활동들은 이전적으로 독립 국가들로서 내전 동안 잉글랜드의 군대에 의하여 효과적으로 정복된 아일랜드스코틀랜드에서 그를 매우 인기없게 만들었다. 특히 1649년 동안 아일랜드에서 왕당파들에 크롬웰의 잔인한 억압은 아직도 많은 아일랜드 국민들을 위하여 강한 공명을 가지도 있다. 이 잔혹함의 가장 오래 지속되는 상징은 1649년 9월 드로이다의 포위이다. 그 포획 후에 2700명 가량의 왕당파 군대와 어떤 민간인, 죄수와 가톨릭 성직자들을 포함한 도시에서 무기를 들고 있던 모든 남성들로 구성된 드로이다에서 3500명에 가까운 주민들의 학살은 3개의 세기에 아일랜드-잉글랜드와 가톨릭-개신교 투쟁을 촉발한 역사적 기억들 중의 하나이다.

아일랜드[편집]

크롬웰의 의도의 정도는 강력하게 논의되었다. 예를 들어 크롬웰은 일반적으로 아일랜드인들을 적으로 보았다는 것이 명확하여 그는 1641년의 아일랜드 반란에서 얼스터에서 개신교 정착자들의 학살에 대한 복수로서 자신의 드로이다의 약탈을 정당화하여 학살을 "무고한 피를 많이 흘리며 자신들의 손을 물들인 이 야만적인 놈들에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으로 불렀고 킬케니 성당 같은 많은 교회들의 기록들은 교회들을 손상시키고 신성을 더럽히고 들을 안정시킨 것에 크롬웰의 군대를 비난한다. 반면에 또한 아일랜드에 입국에 그가 주민들로부터 어떤 물품도 압수되지 않았고 모든 것이 공정하게 구매되어야 할 것을 그가 수요했던 것이 명확하게 나왔다. 드로이다에서 그의 사실상 명령들은 마을이나 수비대가 항복하고, 정당한 대우와 침입 군대의 보호를 받는 선택권을 처음으로 받았던 하루의 군사 의정서를 따랐다는 것으로 주장되었다. 벽이 무너진 후에도 이것을 하는 데 거절은 무장의 남성들의 대우에서 자비를 베풀지 말라는 크롬웰의 명령이 당시의 기준으로 불가피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 보기는 역사가들에 의하여 논쟁되었다. 크롬웰의 부하들은 그들이 항복 협상들이 있던 동안 마을로 침입하여 2000명 이상의 아일랜드의 군대와 민간인들을 살해했을 때 웩스퍼드에서 또다른 악명높은 학살을 일으켰다. 그 자체로 끔찍하면서 이 두가지의 잔학 행위들은 1641년 그 시작 이래 아일랜드에서 전쟁에 예외가 아니었으나 크롬웰이 어디를 가던 그를 무차별로 민간인들을 학살한 괴물로 묘사한 왕당파들에 의한 합동 선전 캠페인 때문에 오늘날 마저 잘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크롬웰은 아일랜드에서 민간인들의 살해를 위하여 자신이 책임지어야 했던 것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아 자신이 무기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가혹하게 행동했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사실 크롬웰이 잉글랜드로 떠난 후에 집단 퇴거, 살해와 바베이도스로 노예 노동을 위한 국외 추방 같은 그 국가에서 최악의 잔악 행위들이 그의 부하 직원들에 의하여 수행되었다. 크롬웰의 아일랜드 정복의 여파로 전체의 가톨릭 소유의 대지는 1652년 합의 행위에서 압수되었고, 가톨릭의 실천은 금지되어고 성직자들에게 현상금이 주어졌다. 관계없이 아일랜드는 대부분의 아일랜드 가톨릭 교도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버리는 것을 거부하면서 가톨릭 국가로 남아있었다.

스코틀랜드[편집]

1650년 ~ 1651년 스코트인들이 찰스 1세의 아들을 찰스 2세로서 왕관을 씌우고 잉글랜드에 군주제를 다시 시행하면서 크롬웰은 또한 스코틀랜드를 침입하였다. 크롬웰은 독립적 스코틀랜드를 관대하게 다루는 데 준비되었으나 스코트인들이 잉글랜드를 침입한 후 반응해야 했다. 크롬웰은 아일랜드 가톨릭 교도들에게 보다 스코틀랜드 장로교도들에게 훨씬 덜 적대적이었으며 그들을 "비록 속았지만 그의 (하나님의) 국민들"로 보았다. 그럼에 불구하고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무자비하게 행동하였다. 열세에도 불구하고 그의 베테랑 군대는 던바와 우스터 전투들에서 스코틀랜드 군대를 격파하여 국가를 점령하였다. 크롬웰은 이 캠페인에서 자신이 데려간 수천명의 전쟁 포로들을 매우 나쁘게 대우하여 수천명의 그들을 병으로 사망하도록 내버려 두고 다른이들을 바베이도스에 있는 형벌 식민지들로 국외 추방하였다. 제1대 앨버말 공작 조지 멍크 아래 크롬웰의 부하들은 드로이다의 방식으로 던디를 약탈하였다. 잉글랜드 공화국 동안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로부터 다스려졌고 국가의 나머지로부터 하이랜드 지방을 봉쇄하는 요새 라인과 함께 군사적 점령하에 있었다. 장로교는 전에 같이 실천하는 데 허용되었으나 그 교회는 이전과 같이 그 판결을 강요하는 데 민사 법원의 지원을 가지지 않았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둘다에서 크롬웰은 잔인하고 무자비한 원수로 기억되었다. 하지만 특히 아일랜드인들이 전통적으로 크롬웰의 기억을 위해 보유했던 특유의 쓰라린 이유는 그의 전시 활동들과 같이 그의 부하들의 손들로 가톨릭 소유의 재산의 집단 양도와 함께 관련이 있다.

정치적 지배[편집]

웨스트민스터궁에 있는 크롬웰의 동상

군대의 1648년 국왕의 탈환의 여파로 국왕은 폐지되었고 1694년과 1653년 사이에 국가는 당시 유럽에서 희귀였던 공화국이 되었다. 공화국은 잉글랜드 연방으로 알려졌다. "연방"의 개념은 몇몇의 미국의 주들에서 나중에 사용될 것이었다.

권력을 얻는 것에 많은 크롬웰의 활동들은 일부 평론가들에 의하여 가혹하고 현명하지 못하며 폭군으로 비판을 받았다. 그는 전쟁의 종말 (군대에 지불하지 않음으로써 때때로 촉진되었던)을 향한 자신의 군대 안에 일어난 반란 진압에 가끔 무자비했다. 그는 의회의 명분에 거대하게 공헌한 평등주의 운동 수평파에 대하여 약간의 동정을 보였다. (수평파의 관점은 국왕의 탈출 직전에 1647년 군대의 다양한 파벌 사이에 개최된 퍼트니 토론에 강하게 대표되었다. 하지만 좌익에 있던 자들을 포함한 많은 역사가들은 현대 청중에게 매력적이지만 수평파의 견해가 정부의 안정적인 기반이 되도록 시대를 너무 앞섰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크롬웰은 급진민주주의를 원조하는 데 준비되지 않았으나 이벤트들이 보여주기 위하여 안정적인 과두제 의회 공화국을 꾀할 수도 없었다.

국왕 (그리고 그와 함께 그들의 공통 원인)이 사라지면서 크롬웰의 만장일치의 지지는 해산되었고 의회에서 다양한 파벌들이 내전에 휘말리게 되었다. 내전으로 공헌한 전직 국왕이 취한 행동을 반복하면서 크롬웰은 결국적으로 1653년 공화주의 잔부의회를 해고하였고 대신 군사 독재자로서 효과적으로 개인적으로 통제하였다. 그는 대지주 신사 계급으로 이루어진 의회가 사람들의 것이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통치한 것에 환멸을 느꼈고, 그것은 성인 보통 선거의 아이디어가 아무의 마음에 당시 없었다는 것이 말해져야 했다. 크롬웰의 권력은 내전 동안 그가 쌓은 군대 사이에 자신의 지속적인 인기에 의하여 지지를 받았다.

크롬웰의 외교 정책은 네덜란드 공화국을 상대로 1651년에 일어난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으로 그를 이끌어 1654년 로버트 블레이크 제독에 의하여 결국적으로 이겼다. 1655년 스페인과 싸워 자메이카를 획득하기도 했다.[1]

전체의 가톨릭 교도들을 제외하고 신앙의 자유에 크롬웰의 절대적인 주장은 에드워드 1세에 의하여 그들의 추방의 350년 후에 유대인들을 잉글랜드로 돌아오도록 격려하였다. 이 일의 결과는 영국이 "유대인들의 마음에 시온주의와 함께 확실히 관련이 있었다"는 것을 해설한 시온주의자들 자신에 의하여 호의를 가졌던 제1차 세계 대전 후에 팔레스타인에서 영국의 위임통치령의 설립이었다. 1657년 크롬웰은 자신이 군주제 폐지에서 수단으로 지내왔던 이래 2개의 제안과 함께 자신에게 수여된 왕관이 재구성된 의회에 의하여 제공되었다. 심의의 6주 후에 그는 자신이 받아들였다면 자신의 군대의 상급 장교들이 사임하도록 위협했기 때문에 제공을 크게 거절하였으나 또한 자신의 지배에 존재하는 헌법적 제약을 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호국경으로서 의식적으로 임명되어 전 국왕의 왕좌에 앉았다. 이벤트는 사실상 대관식이었고 실질적으로 그를 국왕으로 만들었다. 쓰여진 헌법 마저 그가 곧 전직 국왕들과 같은 유행에 거의 이용하는 데 놓을 장치인 왕실과 고귀한 칭호를 발행하는 권리를 그에게 주었다.

사망과 사후의 처형[편집]

크롬웰의 사면 (워릭 성 소재)

크롬웰은 말라리아, 그리고 요로감염증을 위한 일반적인 용어 결석으로부터 고통을 겪었으며 아직 그는 일반적으로 좋은 건강에 있었다. 그는 갑자기 말라리아에 걸렸으며 요로감염증의 공격에 의하여 직접 따라졌다. 약해졌지만 그는 자신의 수행자들과 마찬가지로 미래에 관하여 낙관적이었다. 내과 의사이기도 했던 베네치아 공화국의 외교관이 당시 방문하고 있었고 크롬웰의 마지막 병을 추적하였다. 그것은 호국경의 개인적 의사들이 그의 건강을 잘못 관리하고 있었다는 그의 의견이었으며 빠른 쇠퇴와 사망으로 이끌었다.

1658년 9월 3일 크롬웰 사망의 2년 세월 안에 의회는 크롬웰의 아들 리처드 크롬웰이 가치 없는 계승자로 증명하면서 의회는 찰스 2세를 국왕으로서 복직시켰다. 더욱 나가서 그의 야망들로 종교를 이용한 위선자로 비방한 크롬웰은 다음 세대에 의하여 차례로 변호와 비판을 받았다.

이것이 이야기의 종식일 것이나 1661년 올리버 크롬웰의 시신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부터 발굴되어 찰스 1세가 처형된 같은 날짜 1월 30일 사후 처형의 의식을 거쳤다. 그는 그는 실제로 교수형을 당하고, 끌렸고 사지가 찢어졌다. 끝에 그의 시신은 구덩이에 던져 버려졌다. 그의 잘린 머리는 1685년까지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밖에 기둥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때 이래 1960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드니 서식스 칼리지의 땅바닥에 결국적으로 묻히기 전에 몇번이나 손을 바꾸었다고 한다.

각주[편집]

외부 링크[편집]

전임
잉글랜드 호국경 추밀원에 의한 통치기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공화국의 호국경
1653년~1658년
후임
리처드 크롬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