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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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의 문장

예수회(라틴어: Societas Iesu, 영어: Society of Jesus, S.J., SJ, SI)는 로마 가톨릭교회 소속 수도회이다. 1534년 8월 15일에 군인 출신 수사였던 이냐시오 데 로욜라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설립[편집]

에스파냐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이냐시오 로욜라는 세속적인 욕망에 충실한 군인이었으나 스페인 팜플로나에서 프랑스군과의 전투로 중상을 입고 오랜 병상 생활을 하던 20대 후반에, 작센의 루돌프라는 카르투시오 회원이 쓴 <그리스도 전>과 자코보 데 보라지네라는 도미니코 회원이 엮은 <성인 열전>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기독교인으로서 새롭게 회심을 하고 순례자가 될 결심을 하였다.[1] 훗날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신학을 공부한 그는 1534년 8월 15일 6명의 동료들과 함께 청빈, 정결, 순명과 교황에 대한 순명을 서원하고 영혼 구원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며 예수회라는 수도 단체를 설립하였다. 당시 예수회 설립에 참여한 6명 중 한 사람이자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였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는 1549년 최초로 일본에 기독교를 전파했다. 1540년 로마에서 교황 바오로 3세를 알현한 그는 이 수도 단체를 공식적으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바오로 3세는 '예수회'라는 이름을 내려 이 수도회를 승인하였다. 교황 클레멘스 14세는 1773년 포르투갈, 에스파냐, 프랑스에서 들어온 추방 청원을 받아들여 예수회를 해산했다.

특징[편집]

예수회는 전통적인 수도회가 내세우는 삼대 서원인 청빈, 정결, 순명 외에 구원과 믿음의 전파를 위해 내려지는 교황의 명령을 지체 없이 실행에 옮겨야 한다는 네 번째 서원이 덧붙여져 있다. 이것은 예수회만의 특징으로 이와 같은 정신은 종교 개혁의 물결로부터 가톨릭교회를 지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해 주었다.이 수도회는 전통적인 수도회의 모습 중에서 불필요하다고 보는 것은 과감하게 탈피하는 개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수도자의 외적인 모습보다는 내적이고 영적인 면을 더 중시하여 수도복을 입지 않는다. 수도원의 전통적인 면은 그대로 받아들이되 선교 활동이나 형식은 시대의 흐름에 맞게 자유롭게 변형을 하고 있다. 예수회의 표어는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Ad majorem Dei gloriam)'이다.

이들의 궁극적 목적은 가톨릭 왕국의 재건이다. 이를 위해 예수회가 내건 실천 전략은 각국 왕의 고해신부가 되는 것과 엘리트 교육을 전담하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회는 프랑스에서 1604년부터 1764년까지 섭정기 6년을 제외한 모든 왕들의 고해신부직을 독점했다.[2]


선교 역사[편집]

예수회는 아직 개신교의 세력이 미치지 않은 중국 대륙아메리카에서 활발한 해외선교를 하였고, 유럽 교회 역사 최초로 일본에 선교하였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선교 지역의 전통문화를 존중하되,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Pax Christi'(주님의 평화) 등의 라틴어 전례용어와 사제가 제단쪽으로 돌아서서 미사를 집전하는 전례를 사용하였으나, 이러한 전례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당시 전례 개혁에 따라 현지용어로 미사를 집전하는 양식으로 바뀌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대부분 논리학, 라틴어, 법학 등 학식이 풍부한 지식인들이었기 때문에, 학교 설립 등의 교육 사업에도 업적을 남겼다. 미국조지타운 대학교, 대한민국서강대학교 등이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대표적인 교육기관이다.


양성 과정[편집]

  • 지원기
  • 수련기
  • 철학기
  • 중간실습기
  • 신학기
  • 특수연학과 제3수련기

예수회주의[편집]

예수회의 목적은 1517년 마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의 모든 흔적들을 파괴시키는 것이었다. 예수회원들은 이것을 반종교개혁(the Counter-Reformation)이라 불렀다. 예수회는 자신들의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을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즉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시킨다고 생각했다. 예수회원들은 철저하게 상부의 지시에 따라서만 움직이며 자신들의 최고위직인 총장(General)의 명령에 절대 복종을 맹세한다. 이러한 철저한 상관에 대한 맹목적인 절대 복종과 목적을 위해 어떠한 수단도 용인하는 행동을 예수회주의라한다. 이런 예수회주의는 세르게이 네차예프의 《혁명가의 교리문답》과 나치 히틀러의 SS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 혁명가의 교리문답

네차예프가 쓴 《혁명가의 교리문답》은 혁명가를 "현재의 질서를 파괴할 수 만 있다면 어떠한 범죄도 배신도 사기도 거리낌 없이 저지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목적을 위한 수단의 정당화는 예수회주의를 그대로 따라한 것이다.[3] 이 혁명가의 교리문답을 함께 쓴 것으로 알려진 러시아의 혁명가 바쿠닌은 "네차예프가 예수회주의에 빠져 있음이 분명하다"고 말했다.[4]

  • 예수회와 SS

히틀러는 SS를 만든 히믈러를 예수회의 창시자 로욜라에 빗대어 극찬하며 이렇게 말했다."나는 특히 예수회로부터 배웠다...지금까지 가톨릭 교회의 교권 조직보다 더 인상적인 것을 지상에서 보지 못했다. 그 조직의 좋은 부분은 나의 당에 직접적으로 옮겨 왔다. ..여러분에게 비밀을 한가지 알려 주겠다. 나는 하나의 결사를 창설하는 중인데...나는 히믈러에게서 우리의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의 특성을 본다".[5] 또 히틀러의 고위 측근으로 독일 방첩대장이었던 발터 쉘렌베르크(Walter Schellenberg)는 구체적으로 SS와 예수회의 관계를 밝혔다. "SS는 예수회를 본받아 히믈러가 조직했다. 이미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만들어 사용한 영적 훈련과 예수회의 규칙들이 모델이 되었다. 독일 친위대의 총사령관으로서 히믈러의 호칭은 '라이히스퓨러 에스에스(Reichsfuhrer SS)'인데 예수회의 총장(General)과 동일하며 그 전체적인 조직은 가톨릭 교회의 성직제와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베스트팔리아의 파데르본 근처의 '베벨스보르크(Webelsbourg)라고 불리는 중세의 한 성을 본부로 사용하였으며 그 성은 곧 SS 수도원으로 불리게 되었다." [6] 예수회의 이론가 미카엘레 슈마우스(Michaele Schmaus)는 국가사회주의 즉 나치즘이 가톨릭 교회의 사상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렇게 말했다. "국가 사회주의 운동은 19,20세기 사상의 가장 거대하고 강력한 항거였다. 가톨릭 신앙과 자유사상의 절충은 불가능한 것이다. 가톨릭 제도에 민주주의만큼 반대되는 것도 없다. 엄격한 권위에 대한 재각성의 의미는 성직자 권위에 도전하는 길을 열어 놓는다는 것이다. 자유에 대한 불신은 원죄론이라는 가톨릭 교리에서도 발견된다... 국가사회주의의 계율과 가톨릭 교회의 계율은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또 예수회의 총장이었던 프란츠 베른쯔는 "교회는 이교도들을 처형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진 어떠한 권리도 교회의 관용으로 받은 것이며 따라서 그러한 권리는 실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7]

독일 청년들은 예수회로부터 SS에 가담하라는 권유를 받게되는데 1942년 예수회원 베르샤에브(Verschaeve)는 그의 'Jong Europa'에서 다음 내용을 기술했다. "이 투쟁에서 우리는 독일의 편이 되어야한다: 그 것이 젊은이들이 SS에 가담한 이유이다.[8]

또 SS 고위 관리인 발터 하겐(Walter Hagen)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예수회 수장인 레도촙스키(Halke von Ledochowski)백작은 반공산주의라는 공통적인 토대 위에서 독일의 SS와 예수회 사이에 특정 수준의 협력을 맺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레도촙스키는 러시아와 독일 사이의 다가오고 있는 호전적 빚의 청산이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하였으며 그와 같은 이유로 그는 독일군에 의해 점령될 가능성이 있는 지역에서 러시컴(Russicum)대학의 예수회 신부들이 그들의 활동에서 방해받지 않도록 독일의 보증을 얻으려고 전력을 다했다.".[9]

  • 파스칼의 비판

블래즈 파스칼은 《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책에서 예수회주의를 비판했다. 그는 당시 예수회와 교황청에게 공격받는 얀세니즘을 옹호하기 위해 이책을 썼다. 이 책에서 예수회는 자신들의 명예나 재산를 지키기 위해서는 살인도 용납하고 특히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는 살인을 해도 무방하다는 예수회에 대해 이렇게 충고한다.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는데도 명예나 재산의 상실을 두려워하여 살인을 허용하거나 묵인하는 법률은 결코 없습니다. 신부님,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그렇게는 하지 않습니다."[10]

암살 사건의 배후[편집]

오렌지공 윌리엄[편집]

예수회의 역사적 암살 사건을 기록한 에릭 펠프스의 《바티칸 암살단》에는 오렌지공 윌리엄의 암살 배후에 예수회가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은 John Lothrop Motley의 《The Rise of the Dutch Republic》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분명하게, 예수회오렌지공 윌리엄을 너무도 증오했다. 그들은 당시 한명의 로마 가톨릭교도로 양육받고 있던 그의 장남을 유괴했고, 그 상심한 아버지는 결코 아들을 다시 보지 못했다. 윌리암을 암살하려는 몇 차례 시도 후에, 1584년 어느 슬픈 날 그들은 마침내 성공을 거뒀다. 그들의 도구는 발타자르 제라르(Balthazar Gerard)였고, 그는 다시 한번 예수회의 서약을 이행한 것이다. 네덜란드 공화국의 아버지를 피스톨로 3번 쏘고, 총알의 독이 혈관을 통해 퍼지는 동안, 윌리암은 마지막으로 말했다."오, 나의 하나님 이 불쌍한 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11]

영국왕 제임스 1세[편집]

1605년에는 가이 포크스(Guy Fawkes, Guido Fawkes라고도 함) 등이 제임스 1세를 암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화약음모사건(Gunpowder Plot)이 일어났다. 가이 포크스가 다닌 성 베드로 학교(St. Peter's School)친구들 중에 존 라이트(John Wrigt)와 그의 형제인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Wrigt) 로버트 케이츠비,토마스 윈투어(Thomas Wintour) 등 음모에 가담한 모든 이들이 가톨릭 신자들이었다. 특히 가이 포크스의 외가 쪽 친척들은 모두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로 사촌 중에는 이름난 예수회 신부도 있었다. 이들은 대범하게도 의회 개원식에 맞춰 의사당을 폭파시켜 제임스 1세와 왕비 및 큰 아들, 대신들, 그리고 의원들 모두를 일거에 사라지게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먼저 토마스 퍼시(Thomas Persy)가 의사당과 인접한 가정집을 임대하고, 그 곳에서 의사당 바로 아래까지 터널을 파 그곳에 화약을 설치하기로 했다. 그리고 화약의 보관 장소로는 램버스 지역에서 임대한 집을 사용하기로 했다. 1604년 12월부터 시추작업이 시작되었고, 1605년 5월과 7월, 화약통은 어둠을 틈타 램버스로부터 맨 처음 20개, 그 다음 16개의 총 1,800 파운드(800kg)에 이르는 36개가 옮겨졌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으나, 갑자기 전염병이 창궐하는 바람에 의회 개원일이 원래인 10월 3일 보다 한 달여 늦은 11월 5일로 연기되었다. 18개월 동안 주도면밀하게 진행된 계획은 10월 26일 저녁 가톨릭 신자이면서 상원의원인 몬트이글 경(Lord Monteagle)이 받은 익명의 편지 한 통으로 수포로 돌아간다. 가톨릭 신자인 의원까지 살해한다는 것을 염려한 공모자의 한 사람이 그에게 의회 개원식에 참석하지 말라고 편지를 보낸 것이다. 몬트이글은 그 편지를 왕에게 보여주었다. 왕은 치안판사인 토마스 니베트(Thomas Knyvet)에게 의사당 주변을 샅샅이 뒤질 것을 지시했고, 그는 11월 4일 자정 무렵 의사당 지하에서 포크스를 발견한다. 포크스를 비롯한 화약음모사건의 공모자들은 모두 체포 도중 사살당하거나 아니면 이듬해 1월 27일부터 시작된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12]

프랑스왕 앙리 4세[편집]

나바르의 헨리로 잘 알려진 앙리 4세는 부르봉 왕조의 첫 번째 국왕이었다. 그는 낭트 칙령으로 프랑스에 종교 자유를 가져왔는데, 이 것이 예수회 조직을 모독 시켰다. 프랑스 개신교도들의 지도자로서 그는 로마의 정치적 음모들에 대항하여 다른 프로테스탄트 왕자들과 연합을 추구했다. 몇 번의 시도 후에 예수회는 드디어 그들의 피의 서약과 트렌트 공의회를 실행하는데 있어서 그들의 치명적인 도구들 중 하나인 라바일락(Ravaillac)을 이용하여 그를 암살했다.[13]

앙리 4세는 예수회가 보낸 암살자에 의해 부상당한 후 말했다. "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예수회를 소환시키고 그들이 쓰고 있는 오명과 수치에서 그들을 자유케 하거나 아니면 보다 강권적인 태도로 그들을 추방하고 내 국민들과 내 왕국에 그들이 접근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우리는 그들을 자포자기로 몰아넣어, 다시 내 생명을 노리기로 결심케 할 것이다. 그 것은 나에게는 너무나도 비참한 일이어서, 나는 항상 살해당하거나 동살당할 것을 염려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든 곳에서 공조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매우 뛰어나기 때문에 나는 내가 이미 죽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610년 예수회에 의해 앙리 4세는 친구인 설리(후에 이 비극의 전모를 그의 회고록에 기술했다.)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왕의 마차는 도로 한 가운데 멈춰섰다. 예수회의 암살자인 라바일락은 바퀴 위로 뛰어올라 앙리 4세를 암살했따. 체포되었을 때 여전히 그는 자신의 피묻은 칼을 꽉 쥐고 있었다. [14]


포르투갈 왕 주제 1세[편집]

교황 클레멘스 13세[편집]

1758년 선출된 교황 클레멘스 13세는 오랫동안 예수회 탄압을 요구하는 여러 국가의 강력한 압력을 거부해 왔었다. 그러나 1769년 2월 3일 드디어 추기경단 회의를 소집하여 그 결과에 따라 대처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바로 그 전날 밤에 클레멘스 13세는 잠자리에서 갑자기 통증을 느끼며 외쳤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목숨을 잃었다. "나는 죽어가고 있다. 예수회를 탄압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짓이야" [15]

교황 클레멘스 14세[편집]

교황 클레멘스 14세는 1773년 6월 9일에 서명한 예수회의 해산 칙서 (라틴어: Dominus ac Redemptor 도미누스 레뎀프토르)에 서명했다. 그의 해산명령으로 유럽의 예수회는 해산하고 예수회 총장은 바티칸의 성에 감금되었다. 클레멘스 14세는 역사적으로 성전 기사단 등이 교황청에 의해 해산된 것처럼 예수회를 해산한다고 발표하였다. 예수회를 변호하는 어떤 변론이나 반대도 금지되었다. 예수회의 해산 칙명에 서명한 교황 클레멘스 14세는 칙명에 서명하는 순간 그의 죽음을 예언하며 늘 암살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 클레멘스 14세가 칙명에 서명하고 1년후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데 예수회의 소행이라는 설이 유력하다.[16]

아브라함 링컨[편집]

예수회는 개신교 국가인 미국의 정치적 혼란을 위해 남북전쟁을 일으키는 음모를 꾸몄다. 전쟁이 북군의 승리로 끝나며 개신교인 이었던 링컨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자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였던 존 윌크스 부스, 존 수랏 등을 고용하여 그를 암살한다. 암살 주범인 부쓰는 도주도중 기병대에게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존 수랏은 예수회의 보호하에 유럽으로 도주하는데 성공한다. 예수회는 그를 교황청 보병으로 근무시켜주는 등 은신처를 제공해 주었다. 또 그가 발각되었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체포되지만 최고의 변호사 서비스를 제공하고 석방되도록 음양으로 지원하여 끝내 처벌받지 않도록 도왔다.[17]

전쟁과 학살의 배후[편집]

세계 각국서 추방[편집]

영국[편집]

  • 1571년 영국에서 개신교인인 엘리자베스 여왕 암살 사건이 적발되었다. 이탈리아의 은행가였던 로베르토 리돌피가 꾸민 음모인데 구체적으로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암살하고 가톨릭 신자인 메리 스튜어트를 노포크의 공작과 결혼시키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음모는 실패로 돌아갔고 영국에 있던 주모자들은 사형을 당하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반란과 암살 위협에 시달리는 사이 가톨릭 교회에서는 프로테스탄화 된 영국 땅에 가톨릭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음모가 일어났다. 예수회를 중심으로 시도된 음모로 그들은 프랑스 북부의 두에 라임에 대학을 세우고 여기서 양성된 사제들로 가톨릭 신앙을 일으켜 세우려 하였다.[18] 그러나 1572년 프랑스에서 벌어진 가톨릭 교회에 의한 개신교인 학살 소식(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에 경악한 영국은 이들 예수회의 움직임이 세속정치에 참여하여 가톨릭을 바탕으로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를 무너뜨리려 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고 1585년 예수회와 가톨릭 신학생들을 규제하는 법령을 내리고 예수회원들을 추방 시키며 다음과 같은 법령을 내걸었다.

"로마 가톨릭의 명령과 관례를 따라 해외에서 무수한 예수회 사제와 신학생들과 사제들이 영국의 영토와 여왕의 통치를 받는 자치령에 계속해서 밀려들어오고 있다. 그들의 목적은 여왕의 권위를 떨어뜨려 백성들이 여왕의 위엄에 복종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그 뿐만 아니라 영국의 영토 자치령 내에서 여왕을 반역하도록 선동하고 적개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중략)...이와 같은 현재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뛰어난 위엄을 지닌 여왕과 영적인 영역과 세속적 영역을 주관하는 귀족들과 의회의 하원들과 의회의 권위로써 이 법령을 제정하노니,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부터 모든 예수회 수도자와 신학생, 사제들은 영국과 여왕의 통치를 받는 지역에서 추방하고, 로마 가톨릭의 주교 환할권으로부터 파생된 모든 권위와 권력과 사법권을 몰수하는 바이다. 의회의 현재 회기가 끝난 후40일 안에 예수회에 소속된 모든 이는 이 나라와 여왕의 통치아래 있는 지역에서 떠날 것을 명한다. 만일 바람과 날씨가 항해하기에 적합하지 않아 영국을 떠나지 못한다면, 4-5일 이후에라도 바람과 날씨가 허락하는 대로 떠나야 한다."[19]

  • 1688년 명예혁명 때 네덜란드 총독 오렌지공(公) 윌리엄과 메리 부처에 의해 제임스 2세와 함께 추방당함.

프랑스[편집]

  • 1598년 프랑스에서 개신교인들에 대한 종교적 관용을 담은 낭트칙령이 반포되기 이전 예수회는 이를 막으려 프랑스 국왕 앙리 4세의 암살을 기도했다. 1593년 8월 27일 피에르 바리에르가 암살을 기도하다 붙잡혀 예수회의 사주를 실토했다. 그 다음해에도 예수회의 암살 시도가 적발되는데 장 샤텔이 1594년 12월 27일 암살을 시도하다 붙잡힌다. 결국 연이은 예수회의 암살 시도에 1593년 8월29일 프랑스고등법원은 예수회원들을 모두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20]
  • 서양사학연구회의 논문집 21호에 실린 정동준 교수가 쓴 <18세기 중반 프랑스 예수회의 추방 : 라발레트의 파산을 중심으로> 라는 논문에는 당시 예수회가 어떻게 프랑스에서 추방됐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예수회는 카리브해의 안틸레스 제도에서 거대한 아시엔다(대규모 농장)를 운영했다. 중남미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단의 책임자였던 라발레트는 그 곳에서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흑인 노예 노동력을 이용하여 사탕수수를 생산하는 아시엔다를 차려 엄청난 부를 쌓았다.당시 사탕수수는 설탕의 원료로 정제하여 원당을 유럽에 내다 팔면 엄청난 이득을 남길 수 있었다. 라발레트는 이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근처의 땅을 조금씩 조금씩 죄다 사들여 농장 규모를 계속해서 넓혀나갔다. 그렇게 아시엔다를 대형화 하기 위해 또 많은 돈이 필요해지자 라발레트는 유럽내 금융가들과 어음거래를 시작했다. 먼저 돈을 빌려 땅을 산 후 설탕 원당을 보내 대금을 갚는 형태로 거래를 한 것이다. 처음에 예수회의 사업은 순조로웠는데 나중에 카리브해의 해적선에 의해 설탕 수송선이 털리면서 사업은 찬바람을 맞게된다. 돈을 갚기로 한날 설탕 수송선이 도착하지 않자 유럽 내 라발레트에게 돈을 빌려준 금융가들이 파산해 버린 것이다. 돈을 받지 못한 이들 금융가들이 프랑스 법원에 예수회 본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프랑스 의회에서는 실태조사를 벌여 예수회의 불법 사례들을 하나하나 밝혀 내고 예수회 회원의 저서 24권을 압수해 이 조직 자체를 불법으로 공포한다.[21]

1762년 4월 6일 프랑스 법원은 다음과 같은 영장을 발부했다. " 위 단체는 문명국가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단체이다. 그것은 위 단체의 본질이 종교적으로나 세속적으로나 모든 권위에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위 단체는 종교라는 가면을 쓰고, 복음 완성이라는 진정한 목적을 외면하고 부정하며, 은밀하고 사악한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권력을 추구해온 단체이다... 그리스도의 정신을 모독하고 시민사회에 유해하며 국민의 권리와 왕권을 무시했고 통치 질서를 위협하였고 국가적 소요을 조장하였으며 종교적이며 기본적인 모든 윤리를 파괴한 조직으로서 그들 가슴 속에는 극악한 부패를 담고 있다."

  • 1880년 쥘 페리 행정부 때, 1901년 각각 추방당했다.[22]

스페인[편집]

포르투갈[편집]

1750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아메리카 대륙의 국경선을 확정하는 조약을 맺음으로써 포루투갈은 예수회가 활동하던 우루과이 강 동부의 영토를 얻게 되었다. 따라서 스페인 영토로 편입된 지역의 신부들과 개종자들은 새로운 국경선안으로 철수해야만 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회는 과라니족을 무장시켜서 오랫동안 게릴라전을 전개하였고 마침내 스페인에 편입되었던 그 땅의 주인이 되었다. 이에 포르투갈의 수상, 폼발 후작은 자신의 명예가 손상되었다고 여겼고 1757년 예수회를 추방시키고 예수회의 전도 활동을 금지시킨다. 예수회와 몇번의 마찰이 있은 후, 폼발 후작은 국민을 상대로 홍보책자를 발간하였다. 그 중의 하나인 <<예수회의 왕국, 파라과이>>는 국민의 커다란 분노를 유발시켰다. 그는 교황 베네틱트 14세로부터 조사권을 위임받아 그들의 활동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나서 마침내 포르투갈의 영토에서 예수회를 추방시켜 버렸다. [23]

독일[편집]

1872년 문화투쟁[Kulturkampf, 文化鬪爭] 당시 독일의 수상 비스마르크에 의해 추방당했다. 비스마르크는 가톨릭 교회가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분리주의 운동을 벌이자 문화투쟁을 벌여 독일에서 예수회를 추방했다. 비스마르크는 문화부 내의 가톨릭 담당 부서를 폐지(1871년)하고, 성직자의 설교 조항의 폐지(1871년),―이 조항은 성직자가 자신의 직무 수행에 있어서 국가의 공적인 관심사에 평화를 위협하는 방식으로 도전할 경우 2년의 투옥 또는 금고의 형에 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예수회와 관련된 법률(1872년),―예수회와 유사한 수도회의 해체 및 그 구성원의 추방― 5월법(1873년),―교회를 적대시하는 정신에 입각한 성직자의 양성과 교육 그리고 교회의 순치를 규정하는 법으로서, 이 법을 준수하지 않을 경우 고액의 벌금형과 투옥의 처벌에 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학교 감독법,―전체 학교는 물론 종교 교육에 관한 감독권을 오로지 국가가 행사한다는 내용―이른바 봉쇄법(1874년)과 빵 광주리 법(1875년),―교회에 대한 국가의 재정적 지원의 중단―바티칸에 거주하는 프로이센 사절의 폐지 그리고 병자 간호에 기여하지 아니하는 수도회의 금지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24]

스위스[편집]

1843년 스위스에서 예수회는 가톨릭 세력이 더 많은 스위스의 7개주끼리 동맹을 만들고 친 가톨릭 국가인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 등의 도움을 받아 스위스를 삼키려 했다. 이들 7개주의 연합을 ‘존더분트’라 한다. 이들 7개 가톨릭 주는 연방협정을 따르지 않는 모든 주와의 관계를 끊는다는 데 합의했고, 1844년 루체른 주는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의 혐오의 대상이었던 예수회를 초청하여 종교교육을 담당하게 했다. 이러한 행동은 광범위한 대중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이에 스위스 의회의 다수파인 개혁주의 세력은 1847년 여름 존더분트의 해체와 새 연방협정의 제정, 예수회의 추방을 지지했다. 개혁주의 세력은 명장 앙리 뒤푸르 장군의 뛰어난 전략으로 존더분트 연합군을 무찌른다. 존더분트를 격파한 개혁주의 세력은 예수회의 활동 금지를 헌법에 못박고 예수회를 추방한다.

러시아[편집]

1815년 12월 20일 러시아 짜르는 예수회 추방 칙령을 포고한다. 칙령 내용은 이렇다 "그들은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않았다. 그들은 국외 체류자로서 평화롭게 살아가기 보다는 러시아의 전통적인 국교이며 국민의 평화와 행복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러시아 정교를 불신하도록 유도하였으며 순진한 여인들을 미혹하였다. 한 마디로 이 종교단체가 세계의 모든 국가에서 추방당하고 그들의 활동이 그 어느 곳에서도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다"[25]

멕시코[편집]

  • 1873년 1차추방

베니토 후아레스대통령은 1857년 새 헌법을 제정한다. 이에따라 가장 비옥한 땅을 차지하고 있던 가톨릭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1873년 200명의 예수회 신부들을 멕시코 전역에서 추방시킨다. 그러나 군사독재자 포르피리오 디아스 정권이 들어서면서 예수회는 다시 부활한다.

  • 1917년 2차 추방

멕시코 혁명으로 포르피리오 디아스 정권과 마데로 정권이 무너지고 베누스티아노 카란사가 1914년 대통령이 되었다. 1917년 멕시코의 새헌법이 통과된다. 당시 멕시코 국가의 부의 4분의 3을 차지하고 있던 가톨릭 교회의 재산권을 부정하고, 교육에 있어 교회의 개입을 금지하고, 성직자의 재산을 국유화 했다. 이에 가톨릭 교회가 크게 반발하고 새헌법에 불복종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자 혁명정부는 예수회의 추방으로 대응했다. [26]

일본[편집]

  • 1549년 8월 15일 일본에 첫발을 내디딘 예수회의 사비에르 신부 일행은 카고시마 영주 시마즈 타키히사의 환대를 받는다. 그 곳에서 1년여 선교활동을 한 후 1550년 교토 야무구치 영주를 찾아가 오오우치 요시타카를 만나다. 사비에르 신부는 요시타카에게 화승총 등을 선물하고 교토에서 선교 허락을 받아낸다. 이후 일본에서 가톨릭 교세는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등 순조로웠다. 1587년 전국을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처음에는 교회 부지를 제공하고 선교를 적극 후원했다. 1589년 5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예수회 신부 코엘료를 불러 은근히 중국과 조선의 침공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밝혔다. 그리고 만약 조선과 중국 정복에 성공하면 조선과 중국 각지에 교회를 지어 선교사들을 협력하겠다고 말하며 실제로 그때가 오면 포르투갈 군함 2척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해 코엘료는 히데요시의 계획에 찬성할 뿐 아니라 자신의 영향력 하에 있는 기리시탄 영주들을 움직여 적극 협력하겠다고 제안했다.하지만 이 제안은 반대로 화가 되었다. 히데요시는 기리시탄 영주들이 예수회 신부들의 명령에 움직일 수 있다고 판단하고 이들을 경계하게 된다.[27] 그리고 히데요시는 코엘료를 불러 다음 네 가지를 질문했다.

1. 어째서 신부들은 그렇게도 열심히 사람들을 강제로 기리시탄으로 삼는가?

2. 어째서 '가미(신)'나 부처의 신사와 불교 사찰을 파괴하고 주지들을 박해하며 그들과 융화하지 않는가?

3. 어째서 도리에 벗어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말과 소를 먹는가?

4. 어째서 포르투갈인들은 다수의 일본인들을 사들여 노예로 삼아 국외로 방출하는가?

이상의 질문에 대해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자 바테렌(Pardre 신부) 추방령'을 내리고 선교활동을 금지시킨다.[28] 추방령이 떨어지자 예수회원들은 기리시탄 공동체로 몸을 피하고 영주들을 규합하여 무기를 끌어모으고 필리핀의 마닐라 총독에게 원조를 요청하는 등 반란을 도모했다.[29] 이후 1590년 발리냐노 신부와 히데요시가 다시 만나 담판을 벌여 히데요시는 예수회의 선교를 묵인한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고니시 유키나가 등 일본의 기리시탄들은 최선봉에 앞장서서 싸웠다.

  • 1596년 도사의 우라토에 표착한 스페인선박 '산 펠리페호'의 승무원이 "스페인왕은 기독교로 먼저 인심을 끌어 모은 후 그 나라를 정복한다"며 호언장담한 것이 히데요시의 귀에 들어가고 그의 분노를 사 기리시탄에 대한 박해는 다시 강화되어 다음해 2월 신부와 기독교인 26명이 나가사키에서 최초로 처형당한다. 이것이 산 펠리페호 사건이라 한다.
  • 1612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기리시탄(그리스도인의 일본식 발음) 금지령'을 발표하고 예수회 신부들을 추방한다. 도쿠가와는 이들이 일본의 전통 종교인 불교와 신토를 반대하며, 국가의 권위를 반대하는 반체제적인 무리들로 여겼기 때문이다. [30]

기타 국가[편집]

  • 1872년 과테말라
  • 1874년 브라질
  • 1875년 에콰도르, 콜롬비아
  • 1884년 코스타리카

비판[편집]

반가톨릭 서적에 나타난 예수회[편집]

에드몽 파리의 <<예수회의 비밀역사>>에서 예수회는 개신교회의 파괴를 위해 스페인의 군인 로욜라가 만든 가톨릭 교회 비밀 조직이라 정의한다. 이 책에서 예수회의 목적은 첫째 세계 정치 권력의 장악이며, 두 번째는 세계 종교의 통합이다. 예수회는 각 국에서 로마 교황청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정치, 사회, 종교, 사회조직 등에 침투하였고,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음모, 암살 등을 자행해 왔기 때문에 여러 나라에서 추방된 경험이 있다.

예수회는 종교개혁 이 후 종교재판을 주도하며 수 많은 개신교인을 학살하였고[31], 많은 나라에서 가톨릭을 유지시키기 위해 정부와 협력해 개신교인이나 그리스 정교인을 고문하거나 강제 개종시켰다.[32]

예수회는 파시스트와 나치당을 지원하여 2차 대전을 일으켰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 과정 중에 교황청은 히틀러의 대량 학살을 교사(敎唆) 내지는 방조하였고, 한 번도 비난한 적이 없으며, 물심양면으로 나치를 지원하였다.[33]

저명인사들의 예수회에 대한 경고[편집]

  • "매우 위험한 자들! 그들은 절대로 제국에서 용납되지 아니할 것이다." -나폴레옹 1세-
  • "제수이트...흑암, 잔인, 배반, 전재독재제, 죽음" -존 아담스 대통령-
  • "만일 지옥이나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저주받을 인간집단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로욜라의 단체(예수회)일 것이다"- 토마스 제퍼슨[38]

세계은행 내부고발자의 증언[편집]

전직 세계은행 변호사이며 간부였던 캐런휴즈(Karen Hudes)는 2014년 2월 미국의 독립언론매체인 USA Watch Dog(http://usawatchdog.com/)과의 인터뷰에서 예수회를 역사상 가장 큰 폭력행위 집단이라고 주장했다. 예일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세계은행에서 20년 이상을 근무한 캐런 휴즈는 세계은행에 있는 부패들에 대해 여러번 고발하고, 특히 인도네시아와 관련된 세계은행의 10억달러(한화 약 1조원)에 달하는 사기를 고발하는 등, 미국 경제와 세계 경제에 대해 끊임없이 경고하다가 결국 세계은행에서 불법 해고를 당했다. 그는 USA Watch Dog 과의 인터뷰에서 FRB(미연방준비은행)와 세계 금융권이 예수회와 한패라고 고발한다. 또한, 세계은행의 부패를 추적하여 돈이 어디로 흘러가는가를 조사하면 그 끝에 바티칸과 예수회가 있으며, WCC(World Council of Churches)와 FRB(Federal Reserve Bank, 미국연방준비은행)의 배후에도 예수회와 교황권이 있다고 비판한다. 캐런은 스위스 취리히 로잔공과대학에서 행해진 연구를 언급했다. 그는 “세계의 43,000개나 되는 모든 다국적 기업들을 누가 소유하고 있는지 연구했는데, 연구결과는 이 기업들을 모두 사들인 폭력배들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정보는 모두 비밀이죠. 언론에서 읽으실 수 없는데, 그들이 언론사들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죠. 사람들이 매일 애용하는 언론들은 현실이 아닌 그 기업들이 여러분에게 알리고자하는 내용들만 실립니다…(중략) FRB와 국제결제은행(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와 같은 그룹들은 예수회와 한패입니다.”라고 주장했다. 캐런은 세계은행에서 해고를 당한 뒤 지난 5년간 모든 외교관들에게 편지를 하고 각국의 세계은행 내부고발자 그룹과 협력하여 ‘역사상 가장 큰 폭력행위 집단’에 대하여 밝히려 하고 있으며, 그녀는 그것을 현 교황이 속해있는 ‘바티칸의 예수회’라 지목하고 있다. 캐런이 최초 내부고발을 하게된 경위는 세계은행이 채권을 발행할 때 회계감사 기준에 맞지않게 감사를 받고 있었고, 그래서 세계은행과 KPMG(회계와 컨설팅을 주력으로 하는 세계적 다국적 기업)를 고소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188명의 재무장관들이 그 소송에 합의했으나, 결과가 이행되지 않자, 그녀가 직접 조사에 나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바티칸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정보국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리고 CIA나 다른 여러 국가들의 정보국들도 바티칸의 정보국 아래서 일하고 있으며 그들은 모두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은행들이 한패이듯이 이 모든 정보국들은 한패라고 주장한다. 캐런은 또 미국에서 거둬들이는 세금은 국세청을 통해 고스란히 바티칸 예수회로 흘러들어가고 있다고 주장했다.[39]

주석[편집]

  1. 최인호의 최장기 연재소설 《가족》에 따르면, 로욜라는 병상에서 기독교 서적을 탐독하면서, 열정적으로 살다 간 예수 청년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2. 이영림《프랑스사연구 제29호:예수회 추방과 '국민교육'의 시도》(한국프랑스사학회,2013)
  3. 고명섭《광기와 천재》P98
  4. 《바쿠닌과 네차예프의 관계》, 네차예프와의 결별에 관한 바쿠닌의 편지(P150)
  5. 에드몽 파리《The Vatican Against Europe》(P252)
  6. Walter Schellenberg: 《Le Chef du centre-espionnage nazi vous parle》(Julliard, Paris, 1957, P23~24)
  7. 에드몽 파리《예수회의 비밀역사》(P263)
  8. 에드몽 파리《The Vatican Against Europe》(P127)
  9. 에드몽 파리《The Vatican Against Europe》(P253)
  10. 《시골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중 편지 14》
  11. 에릭 펠프스의 《바티칸 암살단》P123
  12. 최용섭. “가이 포크스”. 네이버 인물세계사. 
  13. 존 클락 리드파스《리드파스의 세계사》(뉴욕:메릴과 베이커,1901)13권 P267
  14. 에릭 펠프스《바티칸 암살단》P147
  15. Baron de Ponnat, <<Historie des variations et des condictions de 1'Eglise romaine>>P215
  16. 에드몽 파리《예수회의 비밀역사》P121
  17. 에릭 펠프스《바티칸 암살단》
  18. 김병흥<<영국 성공회 개혁에 대한 고찰>>(대구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19. 심창섭 외 편저, <<원 자료 중심의 근현대 교회사>>P64~65
  20. 김충현《낭트 칙령에 나타난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서양사학연구 제14집)
  21. <18세기 중반 프랑스 예수회의 추방 : 라발레트의 파산을 중심으로>(서양사학연구회 논문집 21호)
  22. 에드몽파리<<예수회의 비밀역사>>P126
  23. <<예수회의 비밀역사>> P118
  24. “문화투쟁”. <<교황사전>> 
  25. 삐에르 도미니크 <<La Politique des Jesuites>>(Grasset, Paris,1955, p220
  26. 라틴아메리카연구 제14권 제2호 <멕시코혁명과 종교>
  27. 윤재필《16세기 예수회의 일본 선교 연구 : 일본 선교의 부흥과 쇠퇴의 요인 분석을 통한 적절한 일본 선교 전략의 모색》(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대학원)
  28. 이훈《동아시아 국가(日本·中國·韓國)의 그리스도교 박해에 대한 비교 연구 : 최초의 박해를 중심으로》(광주가톨릭대학교대학원)
  29. 루이스 프로이스《일본사》P257
  30. 《김수진 일본 개신교회사》(홍성사)
  31. 윌리엄 폴부쉬 편저 <<폭스의 순교사>>
  32. 아브로 맨하탄 저<<바티칸 대학살>>
  33. 아브로 맨하탄 <<바티칸 대학살>>
  34. Baron de ponnat, "Hisroire des variations et des contradictions de l'Eglise romaine", p215
  35. Caraccioli : <Vie du Pape Clement ΧIV>
  36. 챨스 치니퀴(Charles Chiniquy)<로마 교회 안에서의 50년>
  37. 카탈로니아 찬가
  38. 에드몽 파리예수회의 비밀역사P127
  39. “교황 속한 '예수회' 정체, 세계은행 전직 임원 폭로 눈길” (인터넷뉴스 신문고). 2014년 8월18일에 확인함. 

같이 보기[편집]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