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웨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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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
John Wesley

출생 1703년 6월 28일[1]
잉글랜드 왕국 링컨셔 주 엡웟
사망 1791년 3월 2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런던
국적 영국
학력 옥스퍼드 대학교
직업 신학자, 목사
자녀 없음[2]
부모 부친 사무엘 웨슬리, 모친 수산나 웨슬리
친척 동생 찰스 웨슬리
감리교
John Wesley clipped.png
배경
기독교
프로테스탄트
아르미니우스주의
청교도
성공회
인물
존 웨슬리
찰스 웨슬리
조지 화이트필드
리처드 알렌
교리
복음주의 신학
조직신학
경건주의
자유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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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John Wesley, 1703년 6월 28일[3] ~ 1791년 3월 2일)는 감리교를 실질적으로 설립한 영국 국교회 목사이자 신학자이다. 또한 웨슬리의 사역과 저술은 훗날 성결 운동과 오순절 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차터하우스 학교와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한 존 웨슬리는 옥스퍼드 링컨 컬리지의 교수(fellow)가 되었으며, 1725년에는 집사 목사가, 1728년에는 장로 목사가 되었다.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의 교구에서 보좌 목사로 사역한 후 1729년 옥스퍼드로 돌아와 신성회(Holy Club)를 지도하였다. 신성회는 신학 공부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경건을 연마하기 위한 모임이었으며, 동생 찰스 웨슬리가 처음 시작하여 조지 휫필드도 가입하였고, 존 웨슬리도 가입한 후 모임을 지도하게 되었다. 존 웨슬리는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아메리카 식민지 조지아로 건너가 2년 동안 선교를 했지만 실패했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영국으로 돌아온 후 웨슬리는 아메리카로 건너가는 동안 만났던 모라비아 교도들과 교류하였다. 1738년 5월 24일, 웨슬리는 복음주의적 회심을 경험하였다. 웨슬리는 이날의 일기에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라고 기록하였다. 이즈음 웨슬리는 모라비아 교도들과 결별하고 스스로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웨슬리의 사역은 조지 휫필드처럼 교회라는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사역이었다. 하지만 휫필드칼빈주의를 신봉하였던 것과 달리 웨슬리는 아르미니우스주의와 가까운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브리튼 섬 전역과 아일랜드를 다니면서 웨슬리는 자신이 가는 곳마다 소규모 그룹을 조직하여 소그룹 안에서 신자들이 훈련 받고 양육 받을 수 있게끔 했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웨슬리가 평신도 설교자를 세워 자신처럼 나라 곳곳을 다니며 전도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웨슬리의 지도 아래, 감리교도들은 감옥 개혁과 노예 해방 등 당시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를 이끌고 개혁하였다.

웨슬리는 비록 조직신학자는 아니었지만 신학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해 주장하였고, 칼빈주의이중예정론에 맞섰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인 내면에 하나님의 사랑이 깊게 자리한다면, 이를 바깥으로 표출하여 사회적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웨슬리의 신학은 성례와 전례를 중요시하는 영국 국교회 고교회주의와 개인의 경험을 중요시하는 복음주의가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웨슬리는 은총의 수단(means of grace)을 통해 신자들이 변화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경험할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전생애를 통틀어 웨슬리는 영국 국교회 목사로 남았으며, 감리교 운동은 단지 영국 국교회를 개혁하는 국교회 내부의 신앙 운동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웨슬리 사후 감리교영국 국교회로부터 독립하여 자체적인 교단을 형성하였으며, 감리교로부터 성결교, 오순절 운동, 구세군 등이 나타났다. 즉 당시 영국 사회와 교회사에 끼친 웨슬리의 영향은 지대하였다. 그래서 웨슬리리는 "영국에서 제일 사랑 받는 사람"이라고 흔히 묘사되곤 한다.

생애[편집]

어린 시절[편집]

존 웨슬리는 1703년 6월 28일 엡웟(Epworth)에서 태어났다. 엡웟은 링컨에서 북서쪽으로 37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웨슬리는 사무엘 웨슬리(Samuel Wesley)와 수산나 웨슬리(Susanna Wesley)의 열아홉 자녀 중 15번째 자녀였다. 사무엘 웨슬리는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영국 국교회 목사이자 시인이었으며, 1696년부터 엡웟의 교구 목사로 있었다. 사무엘 웨슬리는 1689년 비국교회 목사인 사무엘 아네슬리(Samuel Annesley)의 25번째 딸인 수산나와 결혼하였다. 사무엘과 수산나는 총 열아홉 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이 중 아홉 명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사무엘과 수산나는 모두 비국교회 목사의 자녀였지만 젊은 시절 국교회로 개종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대부분 가정에서 그랬던 것처럼 웨슬리의 부모도 자녀들을 일찍부터 교육시켰다. 딸들을 포함하여 모든 아이들은 걸음마와 말을 배우자마자 읽는 법을 배웠다. 사무엘과 수산나는 아이들을 라틴어그리스어에 능통할 정도로 가르쳤고 존 웨슬리와 형제들은 어린 시절부터 원어로 신약성경을 읽으며 생생하게 성경의 가르침을 새겼다.

존 웨슬리와 그의 형제들에게 지대한 영향은 끼친 것은 사무엘보다 수산나 웨슬리였다. 수산나는 점심 식사와 저녁 기도 시간 전에 아이들을 불러 배운 것을 잘 익혔는지 점검해 보았다. 수산나는 아이들이 반찬 투정을 하지 못하게 했고, 무분별하게 간식 먹는 것도 엄격히 금했다. 이를 어길시에는 어김 없이 회초리를 들었다. 회초리를 맞고 나서 큰 소리로 우는 것도 금했다. 수산나는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의 의지를 정복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 형성을 위해 불가피한 것이라고 보았다. 아이들을 엄격히 가르치면서 수산나는 아이들 한 명 씩 밤에 따로 시간을 내어 만나 고민을 듣고 대화하였다. 존 웨슬리는 목요일 밤마다 어머니와 만났으며, 성장한 후에도 평생 목요일 밤 시간을 그리워 하였다.

존 웨슬리의 어린 시절 중 가장 특기할 만한 사건은 1709년 2월 9일 목사관에서 일어난 화재일 것이다. 당시 웨슬리는 다섯 살이었다. 다른 가족들이 화재를 보고 피신한 것과 달리 웨슬리는 늦게까지 화재를 인지하지 못하다가 뒤늦게 불이 난 사실을 알고 간신히 창가에 올라가 도움을 요청하였다. 아들이 두려움에 떨며 울부짖는 모습을 보고 사무엘 웨슬리는 아들을 구하려고 노력했으나 화재가 심해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사무엘은 어쩔 수 없다 생각하여 아이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 찰나에 같이 불을 끄던 주민들 중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어깨를 딛고 올라가 웨슬리를 구했고, 웨슬리가 구조되자마자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 지붕이 무너지던 찰나 구조된 웨슬리를 보고 수산나는 웨슬리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수산나는 스가랴 3장 2절을 인용하며 웨슬리를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토막"이라고 불렀고, 웨슬리 자신도 이 별명을 즐겨 사용하였다.

열한 살이 된 1714년, 웨슬리는 런던에 있는 차터하우스 학교(Charterhous School)에 입학하였다. 차터하우스에서의 생활은 결코 풍족하고 행복한 것은 아니었지만 웨슬리는 집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엄격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견뎌내었다. 차터하우스에서 6년 간 수학한 후, 1720년 웨슬리는 옥스퍼드 대학 크라이스트처치 컬리지에 입학하였다.

옥스퍼드 재학 시절[편집]

1720년 옥스퍼드 대학교에 입학한 존 웨슬리는 1724년, 문학사(B.A.) 학위를 땄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문학석사(M.A.) 학위 취득을 위해 계속 공부하였다. 웨슬리는 1725년 9월 25일 옥스퍼드의 감독 존 포터(J. Potter)의 주례로 집사 목사(deacon)로 안수 받았다. 안수 받을 즈음 웨슬리는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제레미 테일러의 《거룩한 삶과 거룩한 죽음(Rules and Exercises for Holy Living and Holy Dying)》이라는 글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웨슬리는 이 책을 통해 참된 신앙은 먼저 마음 속에 뿌리 내리고 자라서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에까지 미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1726년 3월 17일, 웨슬리는 옥스퍼드 링컨 컬리지의 연구교수(fellow)가 되었다. 연구교수가 된 웨슬리는 학교 안에 연구실을 얻을 수 있었고 1751년 결혼할 때까지 해마다 18파운드에서 최고 80파운드까지, 평균 약 30파운드의 급료를 받을 수 있었다. 웨슬리는 연구를 계속하면서 학교에서 고전 문학과 논리학, 그리스어와 신약성경, 고전 문학과 철학을 가르쳤으며 이외에도 학생들의 개인 지도를 하였다. 웨슬리는 1735년 조지아로 떠날 때까지 연구교수로서 연구와 강의를 성실히 수행했다.

복음주의 운동[편집]

존 웨슬리는 1725년 영국국교회 집사목사[4]로 허입되었으며, 1726년에는 옥스포드대학교의 링컨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진로 문제로 고민하던 존 웨슬리는 중세 영성가 토머스 캠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제러미 테일러의 《거룩한 삶과 죽음》의 영향으로 성직자가 되어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회심[편집]

1728년 9월 성직안수를 받은 존 웨슬리는 1729년 옥스퍼드 대학교에 돌아와, 동생 찰스 웨슬리(1707년 12월 18일생)가 결성해 놓은 "거룩한 모임"[5]의 지도자가 되었다. 존 웨슬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로 청중들을 감화시켰는데, 이는 신학생 시절 신학과 웅변을 성실하게 공부한 덕분이었다. 1738년 5월 24일 런던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우연히 들은 마르틴 루터로마서 서문을 읽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였다. 회심 후 존 웨슬리는 조지 휫필드 목사의 영향으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를 돌아다니며 직접 민중들에게 전도하였는데, 죽을 때까지 40만km나 여행했다고 한다. 1739년 미국 뉴저지 주에서 선교를 하고 있던 집사목사에게 영국국교회가성직안수를 하지 않는 것에 반발해 자신이 스스로 감리교 감독목사의 직임을 인정하고 미국에 파송할 감리교 목사와 감독목사의 성직안수를 함으로써 사실상 영국국교회에서 감리교회가 분열되었다. 하지만 존 웨슬리 자신은 자신을 영국국교회 성직자 자격을 유지했다. 존 웨슬리의 복음주의 운동은 사회적인 영향을 상실한 당시 영국의 교회를 갱신하려는 신학운동을 전개되었다. 웨슬리는 당시 감리교회 내부의 분리주의적 입장을 지지하지 않았았으나, 영국국교회의 태도로 인해 말년에는 교회분리에 대해 고민하였고 미국의 독립 연회에 대해 분리적 입장을 취했다.[6]

감리교회에서의 활동과 별세[편집]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영국국교회 제제와 직무파면으로 국교회 소속 교회에서 목회를 할 수 없게 되자, 존 웨슬리는 그 자신이 이룬 영국내 복음주의 운동이었던 감리교회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감리교회가 영국내에서 활동하고, 기독교 윤리적으로 무기력하던 영국국교회 내부에서 복음주의적 변혁의 힘이 되길 바랐다. 그래서 그는 감리회의 대표이며 대표 성직자인 동시에 직무를 박탈 당했어도 파면된 영국국교회 성직자의 자격은 남았다. 1791년 3월 2일 친지들에게 "평안히 계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8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복음주의 운동의 영향[편집]

존 웨슬리를 중심으로 한 복음주의(Evangelical) 운동은 개인적 복음과 사회적 복음의 입장을 지닌 감리교회로 발전하였고, 국가교회인 영국국교회로만 안주하는 것에 반대하는 복음주의적 생명력을 심으며, 영국국교회가 현재의 성공회로 발전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존 웨슬리의 복음주의 운동은 교회의 전통, 예전, 성사를 중요하게 생각한 옥스퍼드 운동(Oxford Movement)과 함께 영국신학의 전통으로 존중되고 있다. 전자는 저교회파(Low Church), 후자는 고교회파(High Church)로 불리기도 하였다.[7]

신학[편집]

존 웨슬리의 신학은 당시 교리 중심의 사상적 신학에 대비하여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실천중심"의 신학을 전개하였다.[8] 교리를 선택하는 문제로서 신앙이 아니라 "성화" 즉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에 견주어 오로지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특히 은총과 사랑은 웨슬리의 중요한 신학적 주제이며, 신학이 추구해야 할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삶의 기준이 되며 최종적 칭의를 향한 능력으로 보았다. 이는 개신교의 교리를 형성했던 칼빈주의나 루터주의, 경건주의 등과 구별되는 신학적 방법론이었다.

웨슬리의 신학적 접근은 교부신학자와 같이 성경에 기초하여 성경의 진리를 실현하며 전인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주목하는 실천적 신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에게 성경의 진리를 실현하는 신학은 세상을 낙관론이나 비관론적 입장이 아니라 양쪽의 긴장을 지닌 중도적 대안 또는 제3의 과정적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 제3의 방법의 현실적 표상은 율법과 복음, 은총과 행위, 사랑 받음의 은총과 힘 입음의 은총, 칭의와 성화, 순간과 과정, 은총의 보편성과 은총의 제한적 실현, 하나님의 주도권과 인간의 응답, 최초 칭의와 최종 칭의와 같은 긴장 속의 주제에 대한 대안과 방법을 제시하며 나타났다.[9] 이 신학의 주제들은 은총의 개념으로 초점이 맞춰진다.

은총의 개념은 초기 교부들과 고전 공의회의 신학을 뛰어넘어 결정적인 체험의 순간을 시작으로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는 발전의 과정을 수반한다고 보았다. 기독교인의 '삶'이란 구원을 주는 은총의 실천 속에서 일관되게 매일 성장을 가져오며, '의'도 내주하는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점차 자란다고 보았다. [10] 이를 위한 실천적 은총의 수단은 일반 수단과 특별 수단으로 구분하였다. 하나님의 여정 속에 있는 일반적 은총의 수단인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을 깨달아가는 보편적 순종이고, 특별한 은총의 수단은 제도적 은총의 수단과 상황적 은총의 수단으로 구분하였다.

제도적 은총의 수단은 대부분의 신자가 생각하는 신앙공동체 안에서의 경건한 행위들이다. 그러나 경건의 모양만이 아니라 능력을 경험하는 체험도 존중하였다. 공중예배와 성경읽기, 성만찬 참여, 가족기도, 개인기도, 성경공부, 속회와 금식과 절식이 제도적 은총의 수단이며 이들을 습관적으로 실천하고 그 안에서 영혼의 체험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11] 이 중 특히 성례전인 성만찬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구분을 따라 내적인 은총에 대한 외적인 징표이고 이로서 우리가 내적인 은총을 받는 수단이라고 강조하였다. [12] 그가 보았던 성만찬은 기존의 성례전시각인 루터주의와 칼뱅주의, 츠빙글리주의와 차이를 둔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엄숙한 기념으로 이 기념인 온전한 기억과 참여를 통해 하나님의 몸의 현전이 아니라 실재적인 영적 현존이 있다고 구분하였고, 성례전을 통해 칭의와 성화의 현재적 구원 은총인 하나님의 사랑이 다시금 나탄다고 설명하였다. [13] 성례전으로 세례에 대해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을 구세주로 믿음으로 믿고 행하여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칭의(稱義)론을 기독교인성령에 의해 거룩한 사람으로 자라가기 위한 전제로 보았다. 세례는 기독교인이 되는 첫단계이나 완전한 단계는 아니며, 죄를 짓는 과정 속에서 세례로 받은 주님의 자녀로 온전히 새롭고 깨끗하게 될 수 없기에 체험적인 온전한 마음의 변화와 경건한 성화의 삶이 따라야 한다고 밝혔다. 세례와 거듭남을 구분하였으므로 성인의 세례와 유아 세례를 묶어서 생각하였다.

상황적 은총의 수단은 제도적 은총의 수단을 초월하는 성령의 인도로 은총 안에서 자라 가도록 하는 이성과 경험에 기초한 수단을 구분하였다. 선핸 응통을 통해 생긴 도덕법은 신앙인의 양심과 상황에 맞춰 생각하도록 하였으나 상황적인 대응이 아니라 하나님, 그리스도론과 밀접한 도덕법으로서 윤리적 기준을 의미한다. [14]

사회참여[편집]

존 웨슬리는 신약성서희년사상(누가복음서 4:18-19)에 근거한 사회운동을 고민하였던 실천하는 신학자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사회개혁사상을 주장하였다.

  1. 고용안정:실업은 빈곤의 원인이므로 고용이 안정되어야 한다.
  2. 자본주의의 부당성 : 자본주의는 실업증가, 가난, 사회적 불평등, 독점화를 가져온다고 지적하고,재산을 공유한 고대교회의 사회주의 사상을 주장함.
  3. 세금제도 개혁:부자감세 반대,민중감세 주장(민중들의 세금부담 감소)
  4. 상속반대: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만 상속.
  5. 노동으로써 정직하게 번 돈으로 이웃을 도와야 한다.
  6. 돈의 위험성 지적: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한다.만약 교회가 부자가 되면 성령께서 떠나신 교회가 될 것이다.웨슬리는 그를 따르는 설교자들에게 부자들을 비평하는 설교를 하여야 한다고 했다.
  7. 연대실천:억눌린 자를 변호하고 고아를 위로하며 과부에게 남편이 되어 주어 마음속에서 기쁨 의 노래가 나오도록 도와야 한다.[15]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율리우스력으론 6월 17일
  2. 부인이 사별한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은 있었지만 친자식은 없었다.
  3. 6월 28일은 그레고리우스력으로 따졌을 때의 날짜이고, 율리우스력으론 6월 17일이다. 영국은 그레고리우스력을 1703년이 지나서야 받아들였기 때문에 웨슬리의 출생 날짜는 두 달력의 날짜로 전해내려온다.
  4. 감리교 창시자로 존중하여 대한민국의 감리교회 공식용어로 표기함, 감리교 한국선교시 초기 용어로 현재는 '준회원' 자격의 '전도사'로 칭함
  5. 원어는 Holy Club이며, 신성 클럽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6. 존 웨슬리.《존 웨슬리의 일기》. 김영운 옮김.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84.
  7. 홍영선.《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새로운 나,우리》서울: 대한성공회. 136
  8. 케네스 콜린스. 《존 웨슬리의 신학: 거룩한 사랑과 은총》. 이세형 옮김. 서울: 도서출판 케이엠씨, 2012.
  9. Outler, A. C. Theology in the Wesleyan Spirit. Nashiville: Dixcipleship Resources-Tidings, 1975.
  10. O'Malley, J. S. "Pietistic Influence on John Wesley: Wesley and Gerhard Tersteege", Wesleyan Theological Journal. 31, no. 2 (Fall 1996): 64.
  11. 기독교대한감리회.《교리와 장정》. 서울: 기독교대한감리회, 2007.
  12. Borgen, O. E. John Wesley on the Sacraments. Grand Rapids, Mich.: Francis Asbrury Press, 1985.
  13. 존 웨슬리 . 〈계속되는 성만찬의 의무〉. 《웨슬리 설교전집 6권》. 한국웨슬리학회 옮김.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6.
  14. Davies, R. E. The Works of John Wesley Volume 9: The Methodist Societies - History, Nature, and Design. Nashiville: Abindon Press, 1989.
  15. 웨슬리의 희년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