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보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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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보위
David Bowie
David-Bowie Chicago 2002-08-08 photoby Adam-Bielawski-cropped.jpg
데이비드 보위(2002년)
기본 정보
본명 데이비드 로버트 존스
(David Robert Jones)
출생 1947년 1월 8일(1947-01-08)
잉글랜드 런던 브릭스턴
사망 2016년 1월 10일 (69세)
미국 뉴욕 시 맨해튼
국적 영국
직업 음악가, 배우
장르 , 글램 록, 아트 록,
악기 보컬, 기타, 건반 악기, 하모니카, 색소폰, 비올라, 첼로, 코토, 퍼커션
활동 시기 1962년 ~ 2016년
레이블 Deram, RCA, 버진, EMI, ISO, 컬럼비아, BMG, Pye
관련 활동 라이엇 스쿼드, 아놀드 콘스, 틴 머신, 더 하이프
웹사이트 davidbowie.com

데이비드 로버트 존스(영어: David Robert Jones 데이비드 로버트 존스[*]) 또는 가명인 데이비드 보위(영어: David Bowie 데이비드 보이[*], 1947년 1월 8일 ~ 2016년 1월 10일)는 영국싱어송라이터이자 배우이다. 출세작인 두 번째 음반 《Hunky Dory》, 드레스를 입은 파격적 모습으로 표지에 등장한 세 번째 음반 《The Man Who Sold The World》 등에 이어 1972년 발표한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는 그를 70년대 글램 록의 대표 주자로 만들었다.[1] 그는 음악에 철학, 미학적 요소를 도입하는 카운터 컬쳐 장르를 이끌고 간 인물로 패션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데이비드 보위는 자신의 69번째 생일인 1월 8일에 맞춰 음반 《Blackstar》를 발매했고, 이는 그의 유작이 되었다.[2]

잡지 《NME》가 2000년에 뮤지션을 대상으로 한 앙케이트에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에 뽑혔다. 1996년 미국의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보위는 미술 전시회도 가지는 등 예술 전반에 끼친 공로를 인정 받아 1999년엔 프랑스 최고 예술 훈장을 받았다.[3] 2000년에는 대영 제국 훈장 3등급(CBE) 수훈자, 2003년에는 기사 작위 서임자 명단에 올랐으나 두 번 모두 고사했다.[2]

초기 생애[편집]

데이비드 로버트 존스는 1947년 1월 8일 런던 남부 브릭스턴에서 태어났다. 8살 때 아버지가 틀어준 록 음악을 듣고 “나는 최고의 록스타가 될 거예요”라고 선언했다. 13살 생일 선물로 받은 색소폰을 불며 악기와 인연을 맺은 뒤 기타, 건반 등 거의 모든 악기를 직접 연주하게 된다.[1] 학창 시절, 싸움으로 인해 왼쪽 눈의 시력을 거의 잃어버렸다. 왼쪽 동공이 열려있는 상태가 되어, 이후 양눈의 색이 각각 달라 보이게 되었다.[1][3]

경력[편집]

1962–1967: 초기 경력과 데뷔 음반[편집]

1964년 6월 5일에 데이비 존스 앤 더 킹 비즈(Davie Jones and the King Bees)란 이름으로 싱글 〈Liza Jane〉을 발표하며 데뷔했으나, 한동안 히트를 치지는 못했다. 같은 해 10월 데이빗 보위는 매니쉬 보이스(Manish Boys)에 가입했고, 새롭게 로우어 서드(The Lower Third)를 조직하고서 7인치 싱글 〈You've Got A Habit Of Leaving〉을 발표했다.[4]

1966년 중반에 몽키스의 데이비 존스와 혼동을 불러 일으킨 데이비 존스 앤 더 로어 서드(Davy Jones and the Lower Third)라는 무대 이름에 만족하지 못했던 보위는 19세기 미국 국경 지방의 주민인 짐 보위와, 그의 칼 이름을 따서 이름을 바꿨다.[5] 보위는 솔로 아티스트로 전향해서, 1966년 4월 싱글 〈Do Anything You Say〉부터 데이비드 보위란 이름을 쓰기 시작한다.[4] 고교 졸업 후에는 광고회사에서 근무하기도 했던 보위는 더 후와 공연을 펼칠 정도로 빠르게 인지도를 쌓아 나갔다.[4]

Bowie looking to the camera
1967년의 보위

19세의 나이인 1967년 6월 1일, 데뷔 음반 《David Bowie》를 발표했다. 음반 제작 중에 티베트 불교에 심취해서 티베트 난민 구제 활동을 하는 티베트 소사이어티에 참가한다. 같은 해 9월 단편 영화 《이미지》(The Image) 촬영에 참여하기로 결정되었고, 촬영 중에 실험 연극 아티스트 린지 켐프와 만났다. 1968년 1월부터 3월까지 켐프의 극단에서 생활하면서 팬터마임과 연기 실력을 쌓았다. 이때 다양한 캐릭터와 시각적 효과, 무대 연출을 공부했다.[6]

1968–1971: 《Space Oddity》, 《Hunky Dory》[편집]

1969년, 전년도에 공개된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모티브로 해서 음반 《David Bowie》(재발매 때에는 《Space Oddity》)를 기획했다. 그의 두 번째 정규 음반은 1969년 11월 14일 발표되었고 영국 차트 5위, 전미 차트 15위까지 올라 인기 뮤지션으로 꼽히기 시작한다.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에 맞춰, 착륙 직전에 가상의 우주인인 톰 소령에 대한 싱글 〈Space Oddity〉를 발매했고, 이 싱글은 BBC가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을 보도할 때에도 쓰였다.[7]

1970년, 믹 론슨과 의기투합해 《The Man Who Sold The World》를 발매했다. 가사에 철학, 미학적 요소를 다분히 포함시켜 1971년의 음반 《Hunky Dory》에서 그 노선은 더욱 깊어져 사운드에도 철학, 미학적 요소를 집어넣어 보위는 카운터 컬처의 기수로서 지위를 확립시킨다.

1972–1973: 《Ziggy Stardust》[편집]

지기 스타더스트 투어 중인 보위 (1972년–1973년)

1972년, 세상의 종말을 5년 앞두고 화성에서 날아온 외계인 로커 ‘지기 스타더스트’가 인류를 구원하고 장렬히 죽는다는 이야기를 담은 콘셉트 음반,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를 발매했다.[1]롤링 스톤》지에서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반 500장에서 35위를 기록했다.

이 콘셉트를 기초로 가공의 록스타 지기 스타더스트를 연기했고,[8] 그 백 밴드인 스파이더스 프롬 마스(Spiders From Mars)를 이끌며 전 세계를 무대로 1년 반 정도의 긴 투어를 시작했다. 초기는 음반의 설정을 따른 것이었으나, 서서히 기발한 의상, 기발한 메이크업으로 변모해 갔다. 같은 해, 1972년 1월 음악 잡지 《멜로디 메이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양성애자라고 말해 충격을 줬다.[4] 또한 이 때 모트 더 후플과 루 리드와의 공동 작업을 시작했다.[4]

다음 음반 《Aladdin Sane》은 미국 투어 중에 녹음되었고, 성정체성이 모호한 대표적인 재킷으로 꼽힌다.[4] 이 때는 얼굴에 번개 무늬를 그리고 나타났다.[9] 1973년 7월 3일, 영국에서의 최종 공연을 최후로, 보위는 이 가공의 록스타인 지기 스타더스트를 영원히 매장했다. 일련의 지기 스타더스트로서의 활동으로 보위는 글램 록의 대표적인 뮤지션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게 되었다. 지기 스타더스트를 연기하는 것을 그만두고, 얼마간의 휴식을 취한 그는 어린 시절 즐겨 들었던 악곡을 중심으로 구성한 커버 음반 《Pin-Ups》를 발표함으로써 지기 스타더스트 시대의 유일한 유산인 백 밴드 스파이더즈 프롬 마스를 해산시켜 절친한 친구 믹 론슨과도 헤어지게 된다.

1974–1976: "플라스틱 소울"과 씬 화이트 듀크[편집]

1974년, 〈Rebel Rebel〉의 홍보 영상에서

1974년, 그러한 상황 중에 심기일전해 원점으로 복귀해서 음반을 제작하게 되었다. 작사 중에 윌리엄 버로우즈를 유명하게 한 "컷 업"의 수법을 도입한 콘셉트 음반 《Diamond Dogs》를 발표한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와 전위 작가 윌리엄 S. 버로스의 소설에서 발상을 해서 만들었는데,[4] 오웰의 유족으로부터 정식 허가는 받지 못하고 "1984년이란 말을 대대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1984년의 무대화도 안 된다."는 계약을 했다.

1974년 6월에 시작한 북미 투어에서는 록 사상 공전의 거대 무대 세트를 도입해 큰 호응을 얻었으나, 계속되는 기자재의 말썽, 보위의 컨디션 불량으로 2개월 정도 투어가 중단됐다. 그 사이에 보위는 필라델피아 소울에 심취하게 되어 6주간 중단후에 재개된 북미 투어는 완전히 무시하게 되었다.

1975년, 카를로스 아로마를 파트너로 받아들여 《Young Americans》를 발표한다. 미국 차트 1위를 획득한 존 레논과의 합작 싱글 〈Fame〉을 포함한 이 음반은,[4] 필라델피아 소울에서 더욱 파고들어서 "백인은 얼마나 흑인음악인 소울에 근접할 수 있을까"라는 콘셉트로 만들어졌다. 이 음반 직후, 니컬러스 로그가 감독한 첫 주연 영화 《지구에 떨어진 사나이》의 촬영을 시작한다.[3] 그는 영화 내에서 물을 찾아서 지구로 온 토마스 제롬 뉴튼(Thomas Jerome Newton)이라는 다소 난해한 외계인 역할을 소화해냈다.[4]

1976년, 씬 화이트 듀크로서 메이플 리프 가든에 나타난 보위

1976년 스스로 주연영화의 내용에 영향을 받아, 또 오랜 기간 동안 약물사용, 중독으로 정신면으로 피로가 극에 달했었던 보위는 스스로 아이덴티티를 재점검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결국 그것은 전작에 이어 "백인이며 유럽인인 나는 어떻게 흑인음악을 받아들여야 할까"라는 방향으로 바뀌어 새 콘셉트로 만들어진 음반 《Station to Station》을 내놓게 된다. 이 음반에서 보여 준 새로운 캐릭터인 씬 화이트 듀크(The Thin White Duke)는 시각적 측면에서 그가 주연한 영화 《지구에 떨어진 사나이》의 캐릭터인 토머스 제롬 뉴튼(Thomas Jerome Newton)의 연장선에 있었으며, 음악적으로는 전작인 〈Young Americans〉에서 보여준 소울 음악이 이어지는 한편, 이후 베를린 3부작에서 나타날 크라우트록과 신시사이저 음악을 예고하는 일종의 과도기적인 음반이었다.

보위는 다시 가상 캐릭터 씬 화이트 듀크를 자칭하며 연기했다. 독일에서의 라이브는 나치즘을 강하게 의식한 무대로 구성되었다. 1975년 《플레이보이》지와의 인터뷰에서는 히틀러를 옹호하는 듯한 아슬아슬한 발언을 하고 팬들 앞에서는 지크 하일(나치 경례) 같은 손짓을 하는 소동이 벌어지고, 미디어에서 격렬한 비난을 받아 지기 스타더스트 이상의 위험 인물로 간주되었다.

1976–1979: 베를린 시기[편집]

베를린에 세워진 하우프트스트라세 155번지의 아파트. 보위는 1976년에서 1978년까지 여기서 살았다.

1976년 '마약과의 동거'로 파산한 후에는 독일 서베를린으로 거주지를 옮겨, 베를린 장벽 바로 인근 스튜디오에서 로버트 프립, 브라이언 이노와의 협업 작업으로 음반을 제작했다.[10] 이들은 나중에 베를린 3부작이라고 불려지는 음반 《Low》, 《Heroes》, 《Lodger》로, 런던 펑크/뉴웨이브 전성기 중에 프로토-펑크/올드 웨이브를 앞세웠다.

1978년 그는 세계를 돌아다니는 장기 공연을 시작하는데, 이때는 주로 《Station to Station》, 《Low》, 《Heroes》 등의 삽입곡을 주로 불렀다. 공연이 끝나자 그는 두 번째 영화 출연작인 《사랑하는 플레이보이》에 등장했으며 《Low》, 《Heroes》에 이은 브라이언 에노와의 세 번째 합작 앨범인 《Lodger》를 19곡의 싱글을 담고 79년에 발표했다. 이후 그의 부인이던 앤지 보위를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에게 빼앗기자 한동안 슬럼프에 빠져버렸다.[11]

1980-1988: 뉴 로맨틱과 팝 시기[편집]

1983년, 시리어스 문라이트 투어에서의 보위

1980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뉴 웨이브를 앞세운 《Scary Monsters》를 발표했다. 〈Space Oddity〉의 등장인물인 톰 소령을 다시 등장시켜 〈Ashes to ashes〉를 불렀고, 보위는 컬트 스타로서의 그와 결별했다. 그해 《엘리펀트 맨》(The Elephant Man)이라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주연을 맡아, 1981년까지 무려 157회의 공연을 성공리에 마쳤다.[4]

1983년 나일 로저스를 프로듀서로 기용하고, 스티비 레이 본과 이기 팝이 피처링으로 참여한 음반 《Let's Dance》는 큰 히트를 쳤다.[4] 그리고 대규모 월드 투어인 《시리어스 문라이트 투어》를 대성공시켰다. 같은 해 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전장의 크리스마스》에서 영국 육군 셀리어스 소령을 연기했다.[12]

1985년, 보위는 퓨전재즈 밴드 팻 매스니 밴드와 영화 《숀 펜과 티모시 허튼의 위험한 장난》의 테마곡 〈This Is Not America〉를 녹음했고,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와 함께 〈Dancing In The Street〉를 리메이크해서 차트에서 맹위를 떨치게 된다.[4] 1986년 개봉한 판타지 뮤지컬 영화 《라비린스》에서 보위는 고블린들의 왕 자레스(Jareth) 역할을 맡았다.[4] 1987년 《Never Let Me Down》을 통해서 히트 행진을 계속한 보위는[4] 1988년에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연출한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 출연했다.[7]

1989–2016[편집]

1989년 리브스 가브렐스, 토니 세일즈, 헌트 세일즈의 라인업으로 밴드 틴 머신을 결성해서 정규 음반을 2장, 라이브 음반을 1장을 선보였으나 별 반응을 끌어내지 못했다.[4] 이후 마지막 히트 메들리 콘서트라고 명명한 《사운드 앤 비전》 월드 투어를 실시했다. 1998년 뮤지션 최초로 인터넷 서비스 업체인 ‘BowieNet’을 만들었고, 이 때문에 메이저 레이블로부터 고소당하기도 했다.[9] 1991년 《Tin Machine II》를 발표했고, 이후 현재까지 틴 머신의 정규 앨범은 출시되지 않아 사실상 해산 상태가 되었다.

1992년, 동명의 미국 드라마에 바탕을 둔 《트윈 픽스》에서 FBI 요원 필립 제프리를 연기했다.[12] 1993년 모델 이만 압둘마지드와 재혼했고, 나일 로저스와 다시 팀을 짜고 6년만에 솔로 음반 《Black Tie White Noise》를 발표했다. 이 음반으로 보위는 9년만에 영국 차트 1위에 오른다. 1995년에는 브라이언 이노와 팀을 짜고 《Outside》를 발표했다. 1997년 1월 그의 50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마련한 《매디슨 스퀘어 가든 콘서트》 실황은 《Earthling》 앨범으로 제작되었으며, 1999년 이후 보위는 시간과 인생, 늙어가는 인간의 삶을 주제로 한 《Hours》와 《Heathen》을 차례로 내놓았다.[4]

2000년에 들어서며 보위는 대영 제국 훈장 3등급 수훈자와 기사 작위 명단에 올랐으나 모두 거절했다. 보위는 작위 거절의 이유에 대해서 “나는 결코 용을 때려잡은 적이 없다. 그냥 음악을 만든 것 뿐이다”라는 대답을 남겼다.[4]

2003년 《Reality》 음반 발표 이후 순회공연을 하던 중 2004년 심장마비로 쓰러져 음악활동을 중단했고,[4][6] 2006년부터는 공연도 삼가 왔다.[3] 오랜 휴지기를 갖던 그는 2013년 1월 8일, 새 음반을 낸다고 발표하면서 신곡 〈Where Are We Now?〉의 뮤직비디오를 공개했고, 3월 8일 정규 음반 《The Next Day》를 발표했다.[1] 이 음반으로 2014년 3월 브릿 어워드 2014에서 영국 남성 솔로상을 가져갔다. 같은 시상식 최고령 수상 기록도 세웠다.[13]

보위의 69번째 생일인 2016년 1월 8일에 25번째 정규 음반이 발매되었다. 1월 10일, 데이비드 보위는 18개월 동안의 암투병 끝에 70세의 나이에 간암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유작 음반이 된 《Blackstar》는 비평가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으며 영미를 포함한 전 세계 각국의 차트에서 1위에 오르는 등 성공을 거뒀으며, 제59회 그래미상에서 최우수 얼터너티브 뮤직앨범상, 최우수록 퍼포먼스상, 최우수 록 뮤직상, 최우수 엔지니어 앨범상 등 4개 부문에 올랐다.[14]

사생활[편집]

가족[편집]

두 번 결혼을 했는데 두 번 모두 여성과 했다. 1970년부터 1980년까지 앤지 바넷과 결혼 생활을 하며 아들 던컨 존스를 낳았다. 그녀는 후에 보위가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와 동성 연인 관계였다고 폭로했다. 두 번째 결혼은 1992년 소말리아 출신 슈모델 1세대인 이만 모하메드 압둘마지드과 재혼한 것으로 둘 사이에 딸을 하나 낳았으며, 단란한 가정을 유지해왔다.[13][15]

성적 취향[편집]

1972년 1월, 영국 음악지 《멜로디 메이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양성애자라고 말해 충격을 줬다. 이로 인해 그는 롤링 스톤스 멤버인 믹 재거와 염문설에 휩싸이기도 했다.[3] 이후 《Station to Station》 음반을 발표할 땐 양성애자로 수정했으나, 1983년에는 이성애자라고 고백했다.[9]

음반 목록[편집]

정규 음반[편집]

각주[편집]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