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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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
The Beatles
The Fabs.JPG
1964년의 비틀즈
상단: 존 레논, 폴 매카트니,
하단: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기본 정보
장르 ,
활동 시기 1960–1970
레이블
관련 활동
웹사이트 beatles.com
구성원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
이전 구성원
피트 베스트
스튜어트 섯클리프

비틀즈(The Beatles)는 1960년 리버풀에서 결성된 영국의 록 밴드다. 존 레논,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로 구성된 이 밴드는 록의 시대에서 최선두 주자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활동을 한 것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1] 스키플, 비트 음악과 1950년대 로큰롤에 뿌리를 둔 비틀즈는 이후 팝 발라드와 인도 음악에서 사이키델릭과 하드 록까지 그 범위를 확장시키면서 여러 음악 스타일을 실험했고, 종종 혁명적인 방식으로 클래식적인 요소와 관습에서 벗어난 녹음 기술을 결합하기도 했다. 1963년 이들의 어마어마한 유명세는 "비틀마니아"로 첫 표출되었으나, 그룹의 음악이 향후의 수년에 걸쳐 주된 작곡가인 레논과 폴 매카트니를 구심점으로 세련되게 성장하면서, 이들은 1960년대 반문화가 내세운 사상의 결정체적 존재로 간주되었다.

비틀즈는 리버풀과 함부르크의 클럽을 1960년부터 시작해 3년의 기간 동안 전전하면서 명성을 쌓았고 이 시기에는 스튜어트 섯클리프가 베이스 연주를 맡았다. 밴드의 중심축이던 레논, 매카트니, 해리슨은 피트 베스트를 비롯한 여러 드러머를 기용했고, 이후 1962년 스타에게 가입을 권유했다. 매니저 엡스타인은 이들을 전문적인 활동이 가능하도록 변형시켰고 프로듀서 조지 마틴은 1962년 말 영국에서 막대한 유명세를 얻게 일조한 이들의 첫 히트 싱글 〈Love Me Do〉부터 녹음물을 지휘 및 개발하였다. 이듬에 영국에서 비틀마니아가 성장함에 따라 "팹 포"라는 별명을 얻은 이들은 1964년 초 국제적인 스타로 발돋움하여 미국 팝 시장에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선도한다. 1965년부터는 《Rubber Soul》 (1965), 《Revolver》 (1966),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1967), 《The Beatles》 (1968), 그리고 《Abbey Road》 (1969) 등의 점차 혁신적인 녹음물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1970년 비틀즈는 해산되었지만 멤버들은 각자 성공적인 음악 활동을 누리며 제각기 다른 기간 동안 이어나갔다. 현재 생존한 멤버인 매카트니와 스타는 계속해서 음악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레논은 1980년 12월 피살되었고, 해리슨은 2001년 11월 폐암으로 사망했다.

비틀즈는 전 세계에서 6억 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올린 것으로 집계되어 역사상 가장 많은 음반을 판 밴드로 기록되었다. 그 누구도 비틀즈의 영국 1위 음반 갯수와 싱글의 판매고를 앞지르지 못했다. 또한 RIAA에 따르면 비틀즈는 1억 7,800만 장의 음반 판매 인증을 받아 미국에서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아티스트가 되었다. 2008년 《빌보드》에서 선정한 역대 가장 성공한 "핫 100" 아티스트 목록에서 그룹을 정상을 차지했다. 2017년 기준으로 스무 번 빌보드 핫 100 정상에 올라 가장 많이 오른 것으로 집계되었다. 그룹은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1988년 헌액되었고, 네 명의 멤버 모두 1994년부터 2015년까지 개별적으로 헌액되었다. 《타임》이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들 100인에서 집합적으로 포함되었다.

역사[편집]

1957–1962: 결성과 함부르크 활동, 영국에서의 유명세[편집]

1957년 3월, 쿼리 뱅크 그래머 스쿨을 다니던 16세 존 레논은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스키플 음악 그룹을 결성한다.[2] 원래는 블랙잭스라고 밴드 이름을 정했으나, 동명의 밴드가 이미 존재했던 이유로 밴드명을 쿼리맨이라고 변경하게 된다.[3] 그해 7월 존 레논과 만나게 된 15세의 폴 매카트니는 곧 밴드에 리듬 기타로 합류하게 된다.[4] 1958년 2월 6일, 매카트니는 리버풀의 윌슨 홀에서 열린 쿼리맨의 공연에 해리슨을 초대했다. 매카트니와 해리슨은 리버풀 인스티튜트의 학교 버스에서 만나 친해졌다. 14세의 해리슨은 존 앞에서 열성을 다해 오디션을 보았지만, 존은 조지가 밴드를 하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판단했다.[5] 해리슨은 이후로 몇 달 동안 들어가게 해달라고 졸라 결국에는 쿼리맨의 리드 기타리스트로 가입했다.[6][7] 1959년 1월, 레논의 쿼리뱅크 학교의 초기 멤버들은 그룹을 떠났으며 존은 리버풀 예술 대학에 입학했다.[8] 존, 폴, 조지 이렇게 세 명의 기타 연주자들은 드럼을 연주해 줄 드러머가 있을 때마다 자니 앤 더 문독[9]이라는 밴드명으로 로큰롤을 연주했다.[10] 1960년 1월, 존의 대학 친구인 스튜어트 섯클리프가 자신의 그림 하나를 팔아 산 베이스로 합류한다. 그는 밴드명을 버디 홀리와 크리켓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비탈즈(Beatals)라고 바꾸자고 제안했다.[11][12] 5월부터 그 이름을 쭉 사용하다 동료 리버풀 가수 자니 잰틀과 함께 스코틀랜드 투어를 다녀온 이후인 7월 초에 더 실버 비틀즈로 바꾸었다. 이들은 1960년 8월 중순에 "The Beatles"라는 이름으로 결정을 내렸다.[13]

함부르크 시기 비틀즈가 공연한 인드라 클럽의 2007년 모습

그 당시 비틀즈의 비공식 매니저였던 앨런 윌리엄스는 독일의 항구도시 함부르크에 상주 밴드로 비틀즈를 계약시키려고 했으나, 드러머가 없었다. 8월 중순, 그들은 오디션을 통해 피트 베스트를 드러머로 합류시킨다. 이렇게 다섯 명이 된 멤버는 4일 후 클럽의 주인이었던 브루노 코슈미더와 약 3개월의 계약을 맺고 함부르크를 향해 떠났다.[14] 비틀즈 역사학자 마크 루이손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썼다. "그들은 8월 17일 홍등가가 생기를 되찾는 시간대인 해가 질 무렵 함부르크에 발을 내딛었다 ... 네온 불빛이 깜박거리며 다양한 여흥거리를 광고하고 있었고, 맨살을 드러낸 여성들은 가게의 창문에 앉아 사업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15]

자신이 운영하는 스트립 클럽 두 개를 음악 클럽으로 바꾼 코슈미더는 비틀즈를 인드라 클럽에 배정했다. 두어 달이 지나는 동안 인드라에서 나오는 소음 때문에 주변 거주민의 불평이 거세지자 결국 인드라는 문을 닫았고, 그는 10월 비틀즈를 카이저스캘러로 옮겨 연주하게 했다.[16] 자신의 라이벌 클럽인 탑 텐에 출연하려는 낌새를 눈치 챈 브루노 코슈미더는 밴드에게 1개월의 해약통지서를 발급하고는[17] 17살의 미성년자이며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연주를 하던 조지를 경찰에 밀고했다.[18] 당국은 11월 말에 해리슨의 추방을 준비했다.[19] 일주일 뒤 코슈미더의 밀고로 매카트니와 베스트 또한 콘크리트 복도에서 콘돔에 불을 질렀다는 방화혐의로 당국에 의해 추방됐다.[20] 하지만 스튜어트는 음악을 그만두고 약혼녀인 아스트리드 커처 곁에 남기로 결심하여 2월 말까지 머물렀다.[21] 커처는 비틀즈를 찍은 첫 세미프로 사진가였다.[22]

이후로도 2년 동안 비틀즈는 함부르크에서 일정한 기간동안 머물렀고 그들은 밤을 세우는 공연을 위해 프리루딘 같은 각성제를 복용했다.[23] 1961년 두 번째 함부르크 활동 도중 섯클리프의 머리카락을 "exi"(실존주의자) 스타일로 잘라냈다. 커처의 이 헤어스타일은 다른 비틀즈 멤버에게도 채택되었다.[24][25] 그해 초 섯클리프가 밴드를 떠나 독일에서 미술 공부를 재개하기로 결정하자 매카트니는 마지못해 베이스를 맡았다.[26] 1962년 6월까지 4인조 밴드와 계약한 프로듀서 베르트 켐페르트는 이들을 폴리도르 레코드에서 진행한 일련의 녹음 작업 중 하나인 토니 셰리던의 백 밴드로 활용했다.[12][27] 비틀즈는 세션의 일부로 폴리도르와 1년간 계약했다.[28] 1961년 6월 녹음하여 토니 셰리던 & 더 비트 브라더스의 음악가 표기로 발매된 〈My Bonnie〉는 4개월 후 Musikmarkt 차트에서 32위에 올랐다.[29]

비틀즈가 두 번째 함부르크 활동을 마친 무렵에는 머지비트 붐으로 리버풀에서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으나, 동시에 매일 밤마다 같은 클럽에서의 공연을 하는 단조로운 생활에 곧 염증을 느꼈다.[30] 1961년 11월 빈번히 캐번 클럽에서 공연하던 비틀즈는 인근에서 음반 가게를 운영하면서 음악 칼럼을 쓰던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눈에 띄었다.[31]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난 바로 그 소리가 마음에 들었다. 그들은 신선하고, 정직했으며, 내가 생각하는 일종의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 스타가 될 수준이었다."[32] 엡스타인은 몇 달 동안 밴드를 설득했고, 비틀즈는 1962년 1월 그를 매니저로 임명했다.[33] 그렇게 매니저가 된 엡스타인은 1962년 초부터 베르트 켐페르트 프로덕션과 맺은 비틀즈의 계약상 의무를 없애려고 시도했으며, 결국에는 함부르크에서 딱 한 번 녹음 세션에 참여하는 것과 한 달 일찍 계약을 파기하는 것을 맞바꾸어 협상에 타결했다.[34] 4월 독일로 돌아온 그들은 그 전날 섯클리프가 사망했다는 비극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이후 뇌출혈로 사망했음이 밝혀진다.[35] 엡스타인은 녹음 계약을 맺기 위해 음반사와 협상을 시작했다. 영국 음반 계약을 확보하기 위해 엡스타인은 토니 셰리던의 백 밴드로 녹음에 더 많이 참여하는 것과 계약 조기 파기를 맞바꾸어 폴리도르와 협상했다.[36] 그의 노력으로 비틀즈는 1962년 1월 1일 데카 레코드에서 오디션을 보았지만, 데카 측에서는 "기타 그룹은 한물 갔습니다, 엡스타인 씨"라고 말하며 탈락시켰다.[37] 3개월 후 EMI팔로폰 레코드에서 일하는 녹음 기술자 조지 마틴이 록 밴드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에게 찾아간 엡스타인은 비틀즈의 데모 테이프를 들려주었고, 마틴은 오디션의 기회를 주었다. 오디션을 통과한 그들은 팔로폰 레코드와 계약을 맺었다.[35]

A flight of stone steps leads from an asphalt car park up to the main entrance of a white two-story building. The ground floor has two sash windows, the first floor has three shorter sash windows. Two more windows are visible at basement level. The decorative stonework around the doors and windows is painted grey.
애비 로드 스튜디오의 정문

마틴이 비틀즈와 가진 첫 녹음 세션은 1962년 6월 6일 EMI의 애비 로드 스튜디오였다.[38] 마틴은 즉시 엡스타인에게 베스트의 형편없는 드럼 연주에 대해 불평하며, 여기선 세션 드러머를 쓰라고 제안했다.[39] 베스트의 해고를 이미 염두에 두고 있던[40] 비틀즈는 8월 중순 '로리 스톰 앤드 더 허리케인스'를 떠난 링고 스타를 영입하여 그를 대체했다.[38] 9월 4일 EMI에서 열린 〈Love Me Do〉의 녹음 세션에 스타의 드럼이 들어갔지만, 이에 불만족한 마틴은 한 주 후에 열린 세 번째 세션에서 드럼 연주자 앤디 화이트를 고용하여 〈Love Me Do〉, 〈Please Please Me〉, 〈P.S. I Love You〉를 녹음했다.[38]

마틴은 처음에 링고의 〈Love Me Do〉를 비틀즈의 첫 번째 싱글로 선택했으나, 차후 앤디 화이트의 드럼에 링고가 탬버린을 치는 형태로 음반을 다시 발매했다.[38] 10월 초에 출시된 〈Love Me Do〉는 레코드 리테일러 차트에서 17위까지 올랐다.[41] 비틀즈의 첫 텔레비전 출연은 그달 말 지역 뉴스 프로그램인 《피플 앤드 플레이스》에서 한 라이브 공연으로 이루어졌다.[42] 〈Please Please Me〉는 마틴이 더 빠른 박자로 재녹음할 것을 제안하여[43] 11월 말에 열린 스튜디오 세션에서 재녹음했다.[44] 마틴은 녹음 세션이 끝나자 "자네들의 첫 번째 1위 곡이 나왔네. 훌륭해."라고 정확하게 예측했다.[45][46]

1962년 12월, 비틀즈는 함부르크에서의 그들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생활을 마무리 짓는다.[47] 1963년, 비틀즈는 보컬에 제한이 없잖아 있는 스타를 포함한 모든 구성원의 보컬이 음반에 들어갈 것을 약속했다.[48] 레논과 매카트니는 작곡 파트너십을 맺어 밴드의 성공에 따른 그들의 주도적인 협업으로 해리슨의 기회는 제한되었다.[49] 엡스타인은 비틀즈의 상업 잠재력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공연에서 전문적인 용모와 행동을 취할 것을 요청했다.[50] 레논은 그가 이렇게 말했다고 증언했다. "애들아, 너희가 정말 큰 무대에 서고 싶다면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어. 무대에서는 식사도, 욕도, 담배도 금해야 해 ..."[37] 레논은 또한 이렇게 말했다. "저흰 무대에 오를 때 마음에 드는 옷을 입었어요. 그는 청바지를 입으면 바보같이 보일 것이니 적절한 바지를 입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사각형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그는 저희 자신만의 개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했죠."[37]

1962–1966: 비틀마니아와 투어 시기[편집]

《Please Please Me》와 《With the Beatles》[편집]

The words 'The Beatles', rendered with large letters B and T in the second word
비틀즈의 로고는 악기 판매상이자 디자이너인 이보르 아비터의 즉석 스케치에서 비롯되었다.[51]

〈Love Me Do〉의 준수한 성공 뒤 발표된 〈Please Please Me〉는 보다 확실한 반응을 얻었다. 1963년 1월 발매 후 2위에만 머무른 《레코드 리테일러》 차트를 제외하면 런던의 모든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했다.[52] 1963년 2월 11일, 비틀즈는 《Please Please Me》의 수록곡을 위해 스튜디오 세션에서 10곡을 녹음했다. 음반에 있던 네 개의 곡은 이미 두 개의 싱글로 발표된 상태였다. 마틴은 처음에 캐번 클럽에서 녹음을 진행하여 LP로 내보내려고 했으나, 건물의 음향조건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여 최소한의 제작비로 "애비 로드에서 마라톤 세션"을 통해 "라이브" 흉내를 낸 음반을 만들기로 결심했다.[53] 비틀즈가 데뷔 음반을 서둘러 발매한 것에 올뮤직스티븐 토마스 얼와인은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앨범이 발매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그 원래의 열정으로 그 앨범은 여전히 신선한 음악을 선사하고 있다."[54] 레논은 당시에 별 생각없이 노래를 썼으며, 매카트니와 자신이 "에벌리 브라더스 풍 또는 버디 홀리 풍의 대중적인 음악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 이외에는 없었고, 가사는 거의 무관했다"고 말했다.[55]

1963년 3월 22일 발표된 첫 정규 1집 《Please Please Me》은 그들이 1970년까지 영국에서 발매한 열두 장의 스튜디오 앨범 중 열한 장의 앨범이 1위를 하는 역사적인 기록의 시작이 되었다.[56] 4월 발매된 밴드의 세 번째 싱글 음반인 〈From Me to You〉는 차트 정상에 오르는 히트를 쳤고, 여기서부터 그들이 6년에 걸쳐 발표한 18개의 싱글 중 17개의 영국 싱글이 차트 정상에 연속으로 오르는 기록이 시작되었다.[57] 8월 발표된 비틀즈의 네 번째 싱글 〈She Loves You〉는 영국에서 4일에 걸쳐 75만 장이 팔려나가 당시 영국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팔려나간 음반으로 기록되었다.[58] 밴드가 처음으로 백만 장 판매를 돌파한 싱글인 〈She Loves You〉는 멤버인 폴 매카트니가 탈퇴하여 결성한 윙스에서 1978년 발표한 〈Mull of Kintyre〉 이전까지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싱글의 자리를 점하고 있었다.[59]

그들의 상업적 성공은 미디어 노출을 증가시켰고, 비틀즈는 당시 대중 음악가에게 가진 기대에 겸손하지 못한 태도로 반응하였는데, 이는 더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60] 그들의 인기가 치솟자 광팬의 수도 급증했다. 비틀즈에게 열광하는 시끄러운 팬들에 대해 언론은 "비틀마니아" 현상이라고 이름붙였다.[61] 비틀즈는 반년에 걸쳐 영국에서 세 번 투어를 돌았다. 2월부터 시작하여 처음 전국에서 4주 동안 공연을 했고, 계속해서 3월과 5월 ~ 6월 동안 3주의 공연을 진행했다.[62] 비록 비틀즈가 투어의 리더가 아니긴 했지만, 그들은 2월 동안 "청중의 수요에 따라" 고용되어 최고의 로열티를 받았고, 같이 동행한 미국의 배우인 토미 로와 크리스 몬테즈를 무색하게 했다. 당시 미국 예술가들과 함께 투어를 돈 영국 예술가 중 이런 성과를 거둔 이는 없었다.[63] 로이 오비슨과의 5월 ~ 6월 투어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발생했다.[64]

1963년 10월 30일 스웨덴의 텔레비전 쇼 《드롭인》에 출연한 매카트니, 해리슨, 스웨덴의 팝 가수 릴밥스와 레논[65]

10월 말, 비틀즈는 1962년 12월 함부르크 거주 이례로 처음 외국에서 진행한 스웨덴 투어를 떠났다.[66] 그들이 10월 31일 영국으로 돌아오자 비틀즈 역사학자 루이손에 의하면, "수백명의 비명을 지르는 팬들"이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는 와중 히스로 공항에 운집했다. 50명에서 100명 정도의 기자와 사진사가 공항에 모였고, 이는 이후 일어날 100건이 넘는 유사한 사건 중 처음에 불과했다.[67] 다음 날 비틀즈는 9개월만에 영국에서의 네 번째 투어를 시작했으며, 6주 동안 진행되었다.[68] 11월 중순,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아진 비틀마니아의 위세에 경찰은 플리머스에서의 콘서트 전 고압의 물 호스로 군중을 통제해야 했다.[69]

《Please Please Me》는 《레코드 리테일러》의 메인스트림 차트에서 정상을 30주 동안 머물렀고, 그들의 다음 음반인 《With the Beatles》가 나오고서야 물러났다.[70] 1963년 11월 30일 EMI는 선주문 270,000장을 기록한 비틀즈의 두 번째 정규 음반 《With the Beatles》를 발표했고, LP는 1주 동안 50만 장이 넘게 팔렸다.[71] 7월과 10월 사이에 녹음된 《With the Beatles》는 전작과 비교하여 더 나은 스튜디오 기술을 이용하여 제작되었다.[72] 이 음반은 21주 동안 차트 정상을 차지했으며 차트에는 40주 동안 머물렀다.[73] 얼웨인은 음반을 "오리지널보다 훌륭한 최고의 후속작"이라고 평가했다.[74] EMI는 판매량을 극대화하기 위해 〈I Want to Hold Your Hand〉를 2집에서 빼고 발표 이후에 싱글로 발매하는, 당시의 표준적인 관행을 되풀이했다.[75] 음반은 레논과 매카트니를 "걸출한 1963년의 영국 작곡가"라고 평가한 《타임스》의 음악 비평가인 윌리엄 맨의 관심을 끌었다.[72] 신문에서 출판한 일련의 기사에 맨은 이 노래에 존경을 바치면서 상세한 분석을 담았다.[76] 《With the Beatles》는 1958년 사운드트랙 《South Pacific》 이후로 영국 차트 역사에서 백만 장이 넘게 팔린 두 번째 음반이 되었다.[77] 《With the Beatles》의 속지에서 토니 배로우는 조지 해리슨이 작곡한 노래인 〈Don't Bother Me〉를 소개하면서 기막힌 4인조(The Fabulous Foursome)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후 "the Fab Four"라는 줄임말로 널리 채택되었다.[78]

"브리티시 인베이전"[편집]

EMI의 미국 자회사였던 캐피틀 레코드는 비틀즈 음반을 발매하는 것을 꺼렸지만, 결국 조류에 항복하여 비틀즈가 발표한 첫 세 개의 싱글을 비롯한 음반을 발매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미국의 독립 레이블 비-제이 레코드도 협상을 통해 1963년 몇 곡을 추려 발매했으나 전부는 못했다. 비-제이는 팔로폰의 《Please Please Me》에서 몇 개의 곡을 가져와 《Introducing... The Beatles》를 준비했지만 대대적인 경영 개혁으로 인해 출시가 연기되었다.[nb 1] 레이블이 판매 수익의 로열티를 보고하지 않자 EMI와 체결한 비-제이의 라이센스는 무효화되었다.[80] 새 라이센스는 이후 싱글 〈She Loves You〉를 위해 스완 레이블에게 넘어갔지만 로열티와 출판권을 둘러싼 법적 문제로 미국 내 그룹의 성공적인 마케팅에 장애가 되었다.[81] 미국에서의 차트 성공은 엡스타인이 마케팅 캠페인으로 40,000달러를 지불하고 DJ 캐롤 제임스의 도움을 받은 뒤에서야 이루어졌다. 제임스는 1963년 중순 DJ로서 처음 비틀즈의 음반을 재생한 사람이었다. 같은 달 말에 비틀즈는 WGH 라디오 방송국의 진 러빙에 의해 버지니아의 티드워터 에리어에 초대받는다. 그는 비틀즈 셔츠 경품 이벤트를 포함한 모든 홍보를 진행했다. 며칠 만에 방송국은 거의 대부분의 비틀즈 곡을 녹음했다. 1964년 1월 1주차가 끝나기 전까지 노래는 뉴욕 시로 송출되었고(비슷한 방송 횟수로 마케팅 캠페인이 이루어졌다), 이후 미국 전역과 다른 나라의 라디오 방송국에서도 송출되었다. 이로 인해 수요가 늘어나자 캐피틀은 다음달 〈I Want to Hold Your Hand〉를 서둘러 발표했다.[82] 1963년 12월 26일 발표된 〈I Want to Hold Your Hand〉는 백만 장이 팔렸고, 미국에서 1월 중순까지 정상을 점했다.[83] 이에 비-제이는 《Introducing... The Beatles》을 발표, 뒤이어 캐피틀에서 《Meet the Beatles!》를 발표했으며, 스완은 〈She Loves You〉를 재생산하기 시작했다.[84]

A black and white image of four men are standing in front of a crowd of people at the bottom of an aeroplane staircase.
1964년 2월 7일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 도착한 비틀즈

비틀즈가 영국을 출발하던 날인 1964년 2월 7일에 히스로 공항에는 4,000명으로 추정되는 팬이 운집하여 비행기를 향해 손을 흔들고 고성을 질렀다.[85] 뉴욕 시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 발을 내디딘 그들은 3,000명의 요란한 군중에게 환영을 받았다.[86] 2일 뒤 비틀즈는 《에드 설리번 쇼》에서 처음 미국 라이브 공연을 선보였고, 미국 인구의 34%에 가까운 2,300만 가구에서 약 7,300만 명 이상의 시청자가 시청했다.[87] 닐슨 시청률 서비스를 인용한 전기작가 조나단 구드에 의하면, 이는 "미국 텔레비전 프로그램 사상 그 어떤 유례도 없는 가장 많은 시청자"다.[88] 다음 날 아침 비틀즈는 대다수의 미국인에게서 자신들이 혹평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그 다음 날 카네기 홀에서 진행된 첫 미국 콘서트에서는 폭발적인 비틀마니아를 맞이하게 되었다.[89][90] 다음 날 뉴욕으로 돌아간 비틀즈는 카네기 홀에서 열린 두 번의 콘서트에서 또다시 강렬한 반응을 마주하였다.[87] 이후 플로리다로 떠난 비틀즈는 2월 22일 영국으로 돌아오기 전 7,000만 명이 시청한 두 번째 《에드 설리번 쇼》에 출현했다.[91]

《A Hard Day's Night》[편집]

캐피틀 레코드는 1963년을 지나면서 관심이 줄었고, 경쟁사인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레코드는 이 틈을 타 자신들의 영화 부서를 설득하여 비틀즈와 장편 영화 계약을 맺는다. 이 영화는 사운드트랙 음반을 팔기 위한 목적이 강했다.[92] 리처드 레스터가 감독한 《하드 데이즈 나이트》에서 비틀즈는 자신들을 모큐멘터리의 등장인물로 분하여 1964년 3월에서 4월까지 함께 제작했다.[93] 런던과 뉴욕에서 각각 7월과 8월에 초연된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일부 비평가들은 마르크스 형제와 견주기도 했다.[94] 얼윈의 글에 의하면 동시에 출시된 사운드트랙 음반 《A Hard Day's Night》는 그들에게 있어 "자신들을 진정으로 밴드로서 우뚝서게" 했으며 "처음 두 음반에서의 영향과는 상이하게 찰랑이는 기타와 매혹적인 멜로디가 합쳐진 밝고, 즐거운 오리지널 사운드가 응축되어 있다."[95] 해리슨은 1964년 《에드 설리번 쇼》 출연을 위해 뉴욕 플라자 호텔에 머무는 동안 리켄베커 회사에서 12현 일렉트릭 리켄베커를 받았다.[45] 음반에서 나타난 "찰랑이는 기타" 사운드는 이 기타로 대부분 제작되었다.[96][nb 2]

1964년 4월 4일의 주중에 비틀즈는 1위에서 5위까지를 포함해 총 15개의 곡을 빌보드 핫 100 싱글 차트에 올려놓는다.[97][nb 3] 그들의 인기로 영국 음악은 사상 초유의 관심을 맞게 되었고, 이후 따라서 미국에 데뷔한 영국 음악가들은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이후 3년간의 기간 동안 성공적인 음반 및 투어 성적을 거두었다.[99] 오래동안 인기를 끌며 성인의 조롱을 산 비틀즈의 헤어스타일[12]은 급성장한 청소년 문화와 맞물려 반항의 상징이 되었다.[100]

Paul McCartney, George Harrison, and John Lennon playing guitars and wearing matching grey suits.
1964년 네덜란드의 텔레비전에 등장한 매카트니, 해리슨, 레논

6월에서 7월까지 전 세계를 돌며 투어를 진행한 비틀즈는 27일간 덴마크, 네덜란드, 홍콩, 호주, 뉴질랜드에서 37개의 쇼에 출연했다.[101][nb 4] 8월 미국으로 돌아온 그들은 23개 도시에서 30번의 콘서트를 열었다.[103] 다시금 격렬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비틀즈는 한달 동안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에서 연 30분 가량의 공연에서 만 명에서 2만 명의 팬을 끌어모았다.[103]

8월, 저널리스트 알 아르노위츠는 비틀즈와 밥 딜런의 만남을 주선했다.[104]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만남을 가진 딜런은 대마초를 소개시켜 주었다.[105] 구드는 비틀즈가 음악 및 문화적 중요성을 깨달은 순간이 이 만남이었다며, 이전까지는 각각의 음악가들이 지니고 있는 팬들이 "두 개의 분리된 하위문화 세상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인식되었다."고 지적했다. 딜런을 듣는 "예술적이고 지적이며, 정치와 사회적 이상주의를 거론하며, 가벼운 보헤미안 스타일이었던 대학생"과는 달리 비틀즈의 팬은 "텔레비전, 라디오, 팝 음악, 팬 잡지, 청소년 잡지 등 상업적인 대중매체에 몰두한 '10대 소녀 그 자체'인 고등학생이나 초등학생이었다. 또한 이들은 이상숭배자가 아닌 우상 숭배자였다."[106] 딜런과의 만남 뒤 6달이 지나면서, 구드의 말을 빌리자면 "레논은 딜런의 콧소리, 불안정한 기타 주법, 자기 성찰적인 보컬을 대놓고 모방하면서 음반을 만들기 시작했다."[106] 1년이 지나자 "포크와 록을 듣는 사람의 차이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가 되었으며, 이는 그들이 성장하고 있단 것을 보여주는 신호였다."[106][nb 5]

《Beatles for Sale》, 《Help!》, 《Rubber Soul》[편집]

구드의 말에 의하면, 비틀즈의 네 번째 정규 음반인 《Beatles for Sale》는 비틀즈가 세계적인 성공으로 인한 상업적 압박과 자신들의 창조적인 야망이 서서히 충돌하는 갈등의 시기에 제작되었다고 한다.[108] 비틀즈는 1964년 8월에서 10월까지 녹음한 이 음반을[109] 첫 두 LP와는 다르게 오리지널 곡을 담아 발표한 이전 음반인 《A Hard Day's Night》와 같은 형식으로 계획했으나,[110] 비틀즈는 이전 음반으로 모아둔 곡을 거의 다 소진한 상태였던데다 바쁜 공연 일정 속에 작곡하는 시간조차 부족했다. 레논은 "수록곡이 산더미같은 문제가 되어버렸다."고 말했다.[111] 그 결과 음반의 수록곡 중 여섯이 비틀즈가 자주 공연하던 레퍼토리를 가져온 커버곡이 되었다. 12월 초에 발매된 음반에 수록된 8개의 두드러지는 오리지널 곡은 레논-매카트니 작곡 파트너십이 성숙해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110]

1965년 5월 1일 빌보드에 게재된 비틀즈의 그래미 우승 기념 사진

1965년 초 비틀즈는 레논과 해리슨의 치과 의사의 저녁에 초대받았는데, 이 의사는 그들에게 LSD를 몰래 담은 커피를 권했다. 레논은 이 경험을 이렇게 표현했다. "무서웠지만, 한편으로는 환상적이었어요. 전 두어달 정도 정신이 혼미해졌습니다."[112] 레논과 해리슨은 마약을 자주 복용하게 되었고, 스타도 최소 한 번 이상 그들과 뜻을 같이 했다. 매카트니는 처음에 이를 꺼려했지만 결국 1966년 말부터 받아들였다.[113] 그는 비틀즈 중에서는 처음으로 그들의 마약 복용에 대해 논의한 이가 되었다. 이를 언급했던 잡지 인터뷰에서 매카트니는 마약이 "제 눈을 열어주었"으며 자신을 "더 정직하고 관대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말했다.[114]

수상 해럴드 윌슨이 비틀즈를 대영 제국 훈장 구성원 (MBE) 후보로 선정한 뒤, 1965년 6월 그들은 엘리자베스 2세에 의해 훈장을 수여받았다.[115] 당시 이런 영예는 제대 군인이나 사회 명사에게 주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논란거리가 되었다. 이에 항의한 보수적인 서작자들은 자신들의 훈장을 도로 반환하기도 했다.[116]

The Beatles performing music in a field. In the foreground, the drums are played by Starr (only the top of his head is visible). Beyond him, the other three stand in a column with their guitars. In the rear, Harrison, head down, strikes a chord. In the front, Lennon smiles and gives a little wave toward camera, holding his pick. Between them, McCartney is jocularly about to choke Lennon.
영화 《헬프!》 트레일러에서의 비틀즈

7월, 전작과 마찬가지로 레스터가 감독한 비틀즈의 두 번째 영화 《헬프!》가 개봉했다. "제임스 본드 패러디로 점철된"[117] 이 영화는 비평가와 심지어는 비틀즈 사이에서도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매카트니는 영화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헬프!》는 훌륭하지만, 저희 영화는 아닙니다 – 저흰 일종의 게스트 스타였어요. 재미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영화의 아이디어 자체는 조금 어긋나 있었습니다."[118] 영화의 사운드트랙 수록곡 대부분은 레논의 주도로 쓰여지고 녹음되었다. 그는 여기서 싱글컷된 곡인 〈Help!〉와 〈Ticket to Ride〉 등을 썼다.[119] 비틀즈의 다섯 번째 음반인 《Help!》는 〈Act Naturally〉와 〈Dizzy Miss Lizzy〉를 제외하면 모두 자신들의 오리지널 곡으로 채워져 있다. 이 음반 이후로 《Let It Be》에 수록된 리버풀 고전 포크송인 〈Maggie Mae〉를 제외하면 비틀즈 정규 음반에는 커버곡이 없다.[120] 비틀즈는 《Help!》에 보컬 오버더빙 사용을 늘렸고, 고전 악기를 일부 편곡에 포함시켰다. 이같은 기법이 사용된 곡의 예시로는 현악 4중주를 사용한 팝 발라드 〈Yesterday〉가 있다.[121] 매카트니가 쓴 이 곡은 가장 많이 커버된 곡이 되었다.[122]

1965년 8월 미네소타 주 블루밍턴에서 기자회견을 가지는 비틀즈

비틀즈의 세 번째 미국 투어는 1965년 8월 15일 55,600여 명이 운집한 셰이 스타디움 공연으로 첫 단추를 끼웠다. 이 공연을 루이손은 "아마도 비틀즈 콘서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할 것"이라고 썼다.[123] 미국의 다른 도시에서도 아홉 번의 성공적인 투어를 돌았다. 아틀랜타에 있을 때 비틀즈는 최초로 폴드백 시스템을 라이브 무대 공연에 적용한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124] 투어가 끝날 무렵에 그들은 자신들의 음악적 기반을 다지게 해 준 엘비스 프레슬리의 초대를 받아 베벌리힐스에 위치한 그의 자택을 방문했다.[125][126] 9월에는 미국에서 토요일 아침마다 방영하게 된 애니메이션 시리즈인 《비틀즈》가 초연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원 방영일인 2년간 《하드 데이즈 나이트》의 우스꽝스런 슬랩스틱을 연출했다.[127] 이 시리즈는 생존 인물을 주제로 한 최초의 주간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시리즈로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128]

1965년 10월 중순 비틀즈는 녹음 스튜디오에 들어가 처음으로 아무런 간섭이나 약속없이 긴 기간동안 음반 제작에 몰두했다.[129] 조지 마틴을 당시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음반을 싱글 모음집처럼 만들었습니다. 드디어 음반을 자신 스스로의 예술로서 생각하며 만들었던 겁니다.[130] 12월 발표된 《Rubber Soul》은 비틀즈 음악의 성숙함과 복잡함을 진일보시켜 비평가의 극찬을 받았다.[131] 음반의 주제에서는 사랑과 철학의 깊은 측면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132] 전기작가 피터 브라운스티브 게인스는 비틀즈가 새로운 음악적 진로를 결정한 것은 대마초 상용의 결과라고 분석한다.[133] 레논은 이 음반을 "대마초 음반(the pot album)"이라고 부르기도 했다.[134] 스타는 이렇게 말했다. "대마초(Grass)는 우리의 변모, 특히 작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때문에 노래의 소재도, 연주법도 달라졌어요."[134] 《Help!》에서 플루트와 현악기를 통해 고전 음악을 시도한 해리슨은 〈Norwegian Wood (This Bird Has Flown)〉에 시타르를 도입하여 계속해서 전통적인 대중음악을 벗어났다. 그들의 가사가 더 예술적으로 변해갈수록 팬들 또한 깊은 의미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Norwegian Wood〉에 대해 레논은 이런 말을 했다. "전 혼외정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관한 노래를 쓸 때 복잡하게 쓰고 싶었습니다. 뭔가 장막에 싸인 방식으로요. 하지만 어떤 여자를 생각하며 썼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요."[135]

《Rubber Soul》의 대부분 곡은 레논과 매카트니의 작곡 파트너십이 빚어낸 작업물이었다.[136] 계속해서 동등한 작곡가 표기를 사용하기는 했으나, 서로의 곡은 뚜렷한 차이점을 드러내 보였다.[137] 그들이 서로 자신의 주도로 쓰인 곡이라고 주장하는 〈In My Life〉는 레논-매카트니의 곡 중에서도 하이라이트로 간주되고 있다.[138] 해리슨은 《Rubber Soul》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반"이라고 말한 바 있으며,[134] 스타는 "시작의 음반"이라 일컬었다.[139] 매카트니는 "우리는 귀여운 시간을 보냈지만, 이제는 확장할 때가 온 거였어요."라고 말했다.[140] 하지만, 녹음 엔지니어 노먼 스미스는 후에 음반의 스튜디로 세션이 서로간의 불화가 커지고 있음을 증명해줬다고 증언했다. 그는 "존과 폴 사이에서의 충돌은 점점 분명해졌"다며, "폴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록 조지는 아무런 권리를 얻지 못했다"고 썼다.[141]롤링 스톤》지는 《Rubber Soul》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반 500장에서 5위에 올려놓았으며,[142] 올뮤직의 리치 언터버거는 "클래식 포크 록 음반 중 하나"라고 불렀다.[143]

논란과 마지막 투어, 《Revolver》[편집]

1960년대 중반 EMI 스튜디오에서 조지 마틴과 함께

1963년 12월부터 미국 시장에 비틀즈 음반을 판매하면서 통제권을 쥔 캐피틀 레코드는[144] 미국 음반에 그들이 싱글용으로 녹음한 곡을 수록했고 영국 음반과 이들은 뚜렷한 차이를 가지게 된다.[145][nb 6] 1966년 6월 캐피틀을 통해 발매된 컴필레이션 음반 《Yesterday and Today》의 커버는 비틀즈 멤버가 정육점 작업복을 입고는 씩 웃고, 그들 주위에 날고기와 훼손된 플라스틱 아기 장난감이 널부러진 기괴한 모습을 연출하여 큰 논란이 불거졌다. 이 커버에 대해서 '비틀즈가 캐피틀 측에서 자신들의 미국판 음반을 "도축"하여 이를 풍자적한 것'이라는 잘못된 분석이 있기도 했다.[147] 수천 장의 음반이 새 커버로 덧씌워졌다. 새 커버를 벗기지 않은 1쇄판이 2005년 12월 경매에 붙여져 10,500달러에 팔렸다.[148] 한편, 영국에서는 해리슨이 저명한 시타르 연주자 라비 샹카르에게 가르침을 부탁하여 그의 허락을 받아내었다.[149]

《Yesterday and Today》 논란 한 달 뒤의 필리핀 투어에서 비틀즈는 필리핀의 영부인 이멜다 마르코스가 초대한 점심 환영 연회를 의도치 않게 무시한다.[150] 초대장이 왔을 때 엡스타인은 이러한 정식 초대를 수락하는 정책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비틀즈를 대표하여 정중히 거절을 했다.[151] 그들은 이내 마스코스 정권이 답장을 거절당하는 일에 익숙치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과적으로 폭도들이 이들을 위협했고, 그들은 필리핀에서 어렵사리 탈출한다.[152] 이 직후 비틀즈는 인도에 처음 방문했다.[153]

그들이 영국에 돌아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 쿠 클럭스 클랜같은 미국의 종교 및 사회 보수주의 단체가 레논이 3월 영국 리포터 모린 클리브에게 한 인터뷰를 두고 비틀즈를 맹렬한 비난한다.[154] 레논은 클리브에게 "기독교는 없어질 겁니다. 점점 줄어들어서 소멸할 거예요. 논쟁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제 말이 맞아요. 언젠가 맞다는게 증명될 겁니다. 지금 우리들은 예수보다 인기가 있어요. 어느 것이 먼저 없어질지는 모르겠어요. 로큰롤일지 기독교일지. 예수는 괜찮았지만, 그의 제자들은 우둔하고 평범했죠. 제 생각엔 그들이 기독교를 망쳐놨어요."라고 말했다.[155] 이 발언은 영국에서 거의 관심을 받지 못했으나, 미국의 틴에이저 팬 잡지 《데이트북》이 5달 뒤(8월 비틀즈 미국 투어 전날) 기사를 게재하면서 미국의 "바이블 벨트"를 중심으로 논란이 촉발되었다.[154] 바티칸은 성명을 통해 항의하고 나섰으며 비틀즈의 음반은 스페인 및 네덜란드 방송국과 남아프리카 국립 방송국에서 금지되었다.[156] 엡스타인은 《데이트북》이 레논의 발언을 아무런 맥락없이 가져다 썼다며 비판했다. 논란을 진압하기 위해 연 기자회견에서 레논은 "만일 '텔레비전이 예수보다 더 인기가 많다'고 했으면 그냥 지나갈 수 있었겠죠."라고 말했으며,[157] 또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성공을 바라보는지를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기자가 설득하자 레논은 "당신이 사과를 원한다면, 그게 진정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면, 좋습니다. 제가 사과하지요."라며 논쟁의 끝을 지었다.[157]

1966년 10월 지미 스탁스와 비틀즈

자신들의 음악이 거의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던 비틀즈는 미국 투어를 위해 만발의 준비를 한다. 원래 사용하던 Vox AC30 앰프보다 더 강력한 100와트 앰프를 받았다. 복스에서 더 큰 무대를 위해 특별 설계한 것인데, 이조차도 부족했다. 사운드 볼륨과 시끄러운 팬들의 소음이 팽팽히 대치하는 사이 비틀즈는 일상과 같은 라이브 공연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다.[158] 자신들의 공연이 더 이상 음악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안 그들은 8월 투어를 마지막으로 투어를 종결하기로 결심한다.[159]

《Rubber Soul》으로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딛은 그들은 마지막 투어 이후인 1966년 8월 출시된 《Revolver》으로 또 한 걸음을 내딛는다.[160] 피치포크의 스콧 프래켄호프는 이 음반이 "밴드의 사운드를 절대적인 신뢰로 성장시켰"으며 "대중음악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재정립했다"고 썼다.[161] 《Revolver》는 세련된 작곡, 스튜디오 실험, 혁신적인 클래식 현악기에서부터 사이키델릭 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악 스타일의 레퍼토리를 선보였다.[160] 관례적인 그룹 사진에서 탈피한 – 함부르크 시기부터 친구 사이였던 클라우스 부어만이 디자인한 – 커버는 구드의 설명에 의하면 "삭막하고 예술 흉내를 내고 흑백인, 오브리 비어즐리를 등에 업은 펜 그림 스타일의 비틀즈 캐리커처 콜라주다."[160] 음반에 앞서 뒷면에 〈Rain〉을 실은 싱글 〈Paperback Writer〉가 출시된다.[162] 두 곡 모두 짧은 홍보 영상이 제작되었는데, 문화 역사학자 사울 아우스테를리츠의 말에 의하면 이는 "최초의 뮤직비디오 중에서도 진정한 처음이다."[163] 이 두 영상은 《에드 설리번 쇼》와 《탑 오브 더 팝스》에 1966년 6월 방영되었다.[164]

《Revolver》의 실험적인 곡 사이에서도 돋보이는 〈Tomorrow Never Knows〉의 가사는 레논이 티모시 리어리의 저서 《더 사이키델릭 익스페리언스: 어 매뉴얼 베이스드 온 더 티베탄 북 오브 더 데드》에서 따온 것이다. 음반의 창작은 EMI의 건물에 널리 설치되어 있던 8테이프 덱으로부터 성장했다. 각각의 직원들은 엔지니어와 밴드 구성원에 의해 테이프 루프에 다양한 무작위의 움직임을 더했고, 조지 마틴은 들어오는 데이터를 샘플링을 통해 합성물을 제작했다.[165] 매카트니의 〈Eleanor Rigby〉는 현악 8중주 사용이 두드러진다. 구드는 이 곡을 "스타일 및 장르를 알아볼 수 없는 진정한 합성체"라고 묘사한다.[166] 작곡가로서 성장한 해리슨은 음반에 자신의 세 곡을 넣을 자리를 획득한다.[167] 2003년 《롤링 스톤》지는 《Revolver》를 역사상 세 번째로 위대한 음반에 선정했다.[142] 음반 발표 뒤인 다음해 그들은 미국 투어를 떠났지만 《Revolver》의 수록곡은 단 한 곡도 부르지 않았다.[168] 크리스 잉엄의 글에 의하면, 그 곡들은 너무나 "스튜디오 착장품이었으며, 3곡은 4인조 록 그룹으로서 팬의 고함이 만들어낸 둔감의 벽을 통해 연주할 방법이 없었다. '라이브 비틀즈'와 '스튜디오 비틀즈'는 이제 완전히 다른 짐승이 되었다."[169] 8월 29일 샌프란시스코 캔들스틱 파크에서 이루어진 비틀즈의 마지막 콘서트는 그들의 마지막 상업 콘서트이기도 했다.[170] 이렇게 전 세계에서 1,400번이 넘는 콘서트를 거의 쉬지도 않고 벌인 그들의 4년에 종지부를 찍었다.[171]

1966–1970: 스튜디오 시기[편집]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편집]

"그 어떤 음반보다 유명하고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모방된"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의 표지[172]

부담가는 투어에서 해방된 비틀즈는 1966년 11월 말부터 시작한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녹음 작업에 실험적 접근을 늘렸다.[173] 엔지니어 제프 에머릭의 말에 의하면 음반의 녹음에는 700시간을 상회하는 기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174] 그는 밴드 구성원의 고집을 이렇게 회상했다. "《Sgt. Pepper》의 모든 것은 달라야 했어요. 우리는 마이크를 금관악기의 벨 아래쪽에 달았고, 바이올린에 연결된 마이크가 헤드폰 역을 수행했습니다. 우리는 거대한 원시 발진기를 사용해 악기와 보컬의 속도에 변화를 주었고, 테이프를 조각내 서로 붙이거나 뒤집어놓거나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았어요."[175]A Day in the Life〉의 한 파트에서는 40인조 관현악단이 쓰였다.[175] 세션의 결과물이 처음 선보여진 것은 더블 A면 싱글로 출시된 〈Strawberry Fields Forever〉/〈Penny Lane〉이었으며[176] 《Sgt. Pepper》는 6월 LP로 출시되었다.[177] 비교적 원시적이었던 4테이트 녹음기로 제작된 이 음반의 복잡성에 동시대의 아티스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172]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음악 평론가가 음반에 극찬을 보냈다.[178] 구드는 이렇게 썼다.

비틀즈의 압도적인 합의는 잘 알려진 걸작의 창작으로 승화되었다. 이 풍부하고, 일관되고, 범람하는 천재적인 합작품은 굵은 야망과 선명하고 독창이고 극적이며 커지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고, 대중음악 음반에 담기는 음악에 대한 기대를 그 무엇보다도 높였다. 이 의식의 기초를 다진 페퍼 상사는 록 음반 형식에 대한 열의에 불을 붙이는 기폭재가 되어, 음반 산업의 미학과 경제학 모두에 혁명을 가져왔다. 이는 1956년 엘비스 현상과 1963년 비틀마니아 현상을 훨씬 앞지른 성과다.[179]

《Sgt. Pepper》은 처음으로 팝/록 LP의 뒷면에 모든 가사가 표기된 음반 중 하나다.[180][181] 음반의 가사는 분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67년 말 미국의 문학 평론가이자 전문가인 영국의 리처드 포이리어는 음반을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고, 자신의 학생들이 "그룹의 음악과 거의 붙어다닐 정도가 되었다.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이보다 부러운 것은 없다."고 말했다.[182] 포이리어는 이 음반 속에 "암시가 섞여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한 가지 스타일로서 하나의 주제와 감정만으로 작업했다고 추측하는 건 억측이다 ... 하나의 감정만이 주제가 되었다는 것은 잘못되었다 ... 단 하나의 곡이라도 그 안에서 모순되는 대체적 문구가 드러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182] 매카트니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곡을 썼습니다. 저흰 그게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아요. 하지만, 일주일이 되면 누군가 여기에 대해 말을 꺼내고, 그러면 당신은 부인할 수 없게 되요 ... 당신은 우리 곡에 대해 스스로의 위치에 따라 스스로의 의미를 찾겠죠.[182] 음반의 정교한 커버도 큰 흥미와 분석을 가져왔다.[183] 팝 아티스트 피터 블레이크와 잰 하워스가 디자인한 콜라주는 음반의 타이틀 트랙에서 나타난 가공의 밴드를 그룹에 적용하여 묘사했다.[184] 그들은 많은 유명인들 사이에서 바로 앞에 서있다.[185] 그들이 착용한 통통한 콧수염은 그들에게서 성장하는 히피 스타일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186] 문화 역사학자 조나단 해리스는 그들이 "군복을 알록달록하게 패러디"했다고 썼으며 "반권위주의와 반체제"를 묘사할 의도였다고 분석했다.[187] 2003년 《롤링 스톤》지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500개 음반 목록 1위에 올려놓았다.[142]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죽자 폴과 조지는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그들의 아버지가 급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리라 ... 브라이언이 그들을 발굴했고, 그들을 믿었고, 그들을 형성했고, 그들을 백만장자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그들을 전 세계의 누구보다도 유명하게 만들었다 ... 우리는 인생이 전과 같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 조지 해리슨의 아내 패티 보이드[188]

1967년 7월 25일, 비틀즈는 최초의 글로벌 텔레비전 링크인 《아워 월드》에서 자신들의 발표 예정 싱글 〈All You Need Is Love〉를 3억 5,000만 시청자 앞에서 공연한다.[189] 발표 1주일 뒤인 서머 오브 러브 시기에 노래는 플라워 파워의 앤섬으로 채택되었다.[190] 두 달 뒤 비틀즈는 자신들의 커리어를 혼란으로 몰아간 손실을 입는다. 런던에서 마하라시 마헤쉬 요기를 소개받은 그들은 다음날 8월 25일 뱅고어에서 진행되는 초월 명상에 참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2일 뒤 매니저의 비서 피터 브라운은 그들에게 전화를 걸어 브라이언 엡스타인이 32세의 나이에 별세했다고 전했다.[191] 검시관은 죽음의 원인을 카르비톨 과다 복용으로 판명했지만, 그가 자살을 했다는 뜬소문이 널리 퍼졌다.[192] 엡스타인은 당시 유리같은 불안정한 감정 상태였고 개인적인 일들로 스트레스를 받았다.[nb 7] 그의 죽음으로 비틀즈는 방향키를 잃고 우왕좌왕했으며 미래를 내다볼 수가 없게 되었다. 레논이 회고하기를, "우리는 붕괴되었습니다. 우리가 당시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은 자명했지요. 저는 우리가 음악을 연주하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겁을 먹었어요. 생각했죠, '우린 끝났구나'"[194]

《Magical Mystery Tour》, 《the White Album》, 《Yellow Submarine》[편집]

영화 속 〈I Am the Walrus〉 장면

비틀즈의 텔레비전 영화의 사운드트랙 《Magical Mystery Tour》이 영국에서 6트랙 더블 EP 형식으로 1967년 12월 초 출시되었다.[144][195] 미국에서는 동명의 LP가 음반의 6곡과 이전에 그들이 싱글로 발표한 5트랙을 수록하여 출시한다.[98] 언터버그는 《Magical Mystery Tour》의 미국 사운드트랙이 "이 사이키렉릭 사운드는 《Sgt. Pepper》의 정맥에 극히 가깝다. 그리고 마약에 물든 트랙이 곳곳에 (특히 〈I Am the Walrus〉의 사운드 콜라주 부분이 그렇다) 있다." 이어 그는 1967년 싱글에서 가져온 다섯 곡에 대해서는 "크고, 웅상하며, 혁신적"이라고 했다.[196] 출시 이후 3주가 되자 음반은 캐피틀 LP 사상 가장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고, 이후 캐피틀 음반만이 밴드 정규 음반으로 인정받게 된다.[197] 박싱 데이에 첫 선을 보인 영화, 《메지컬 미스테리 투어》는 폴 매카트니가 대다수 감독하였고, 처음으로 비틀즈는 영국의 통신사로부터 큰 혹평에 시달린다. 이는 《데일리 익스프레스》로부터 "노골적인 쓰레기"라며 무시되었고, 《데일리 메일》은 "엄청난 자만"이라고 불렀다. 《가디언》은 영화를 "관중의 상스러움과 따스함, 멍청함에 대한 환상적인 도덕성 연극"이라고 썼다.[198] 구드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버스에 탑승, 하차, 타고 가는 미가공 장면을 보여주는 거창함"이라고 묘사했다.[198] 사실, 이 영화는 꽤 괜찮은 시청률을 확보했지만 언론의 쇄도하는 비판으로 미국의 텔레비전 방송사는 영화를 방영하는데 소극적이 되고 만다.[199]

1968년 1월 비틀즈는 애니메이션 장편 영화 《옐로우 섬머린》에 카메오로서 출연했다. 이 영화에는 만화 버전의 밴드 멤버가 등장하고, 스튜디오에 녹음했지만 발표되지 않은 네 곡이 영화에서 데뷔 이후 동명의 사운드트랙에 담겨 출시된다.[200] 1968년 6월 발표된 영화는 음악, 유머, 진보적인 시각 스타일로부터 평론가의 찬사를 받았다.[201] 영화의 사운드트랙 음반은 영화 공개 7달 후 발표되었다.[202]

화이트 앨범으로도 알려진 《The_Beatles》의 미니멀리즘한 커버는 팝 아티스트 리처즈 해밀튼으로부터 "《Sgt. Pepper》와 직접적으로 대비된다"며 "깨끗한 점판암"이 연상된다고 했다.[203]

이 와중, 특색없는 커버로 이른바 화이트 앨범으로 잘 알려진 더블 LP 《The Beatles》가 출시되었다.[204] 음반의 창조적 영감은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지시가 없는 새로운 방향에서 비롯되었다. 비틀즈는 잠시 그들의 구루, 마하라시 마헤쉬 요기에게 의지했다.[205] 인도의 리시케쉬에 있는 그의 아쉬람에 방문하여 세 달 동안 "지도 강의" 계획을 수료하던 그들은 이 시기에 음반에 수록된 30곡의 대부분을 비롯한 수많은 작품을 써내렸다.[206] 스타는 이곳을 버틀린에 비유하며 10일이 되어 떠났고, 매카트니는 커지는 무료함에 그만 한 달이 되어 떠났다.[207] 창작열에 물이 오른 레논과 해리슨은 전기 기술자 매직 알렉스의 마하라시가 자신들을 조종하고 있다는 말에 의문을 느낀다.[205] 여성 참여자에게 마하라시가 성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말에 설득된 레논은 두 달이 되어 강의에서 이탈했고 아울러 해리슨과 그룹의 수행원을 불신하게 되었다.[207] 마하라시에 대한 분노로 레논은 〈Maharishi〉라고 이름붙인 준영한 곡을 썼고, 이후 소송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Sexy Sadie〉로 이름을 고쳤다. 매카트니는 "우리는 실수했던 거예요. 우리는 그가 거기 원래 있는 것보다 더 큰 의미를 부여했다고 생각했죠."[205]

1968년 3월 말에서 10월 중순으로 늘어진 화이트 앨범의 녹음 세션에서 비틀즈의 관계는 뚜렷하게 분열되고 있었다.[208] 스타는 2주 동안 그만두었고, 매카트니가 드럼 키트를 맡아 〈Back in the U.S.S.R.〉 (해리슨과 레논도 드럼에 참여했다), 〈Dear Prudence〉를 녹음한다.[209] 레논은 매카트니와 협업하는데 염증을 느끼기 시작하고,[210] 자신이 기여한 그의 곡 〈Ob-La-Di, Ob-La-Da〉에 대해 "구닥다리 할머니 음악"이라고 경멸조로 말했다.[211] 이 불안정한 상태는 레논이 매료된 아방가르드 예술가 오노 요코가, 비틀즈가 서로 자신의 여자친구를 스튜디오에 데려오지 않겠다는 합의를 그가 어기고 세션에 참석하면서 중첩되었다.[212] 음반에 대해 레논이 말하길, "모든 트랙은 개별적입니다. 여기에 비틀즈 음악은 존재하지 않아요. [이건] 존과 밴드, 폴과 밴드, 조지와 밴드의 것입니다."[213] 매카트니는 음반을 "기분 좋게 만든 것이 아니었다"고 말했다.[214] 레논과 매카트니 모두 세션이 밴드의 해체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말했다.[215][216]

11월 출시된 화이트 앨범은 처음으로 애플 레코드를 통해 발표한 것이었다. 하지만 EMI가 그들의 음반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217] 이 새로운 레이블은 엡스타인이 효율적 세무 구조를 세우기 위해 브라이언 엡스타인 계획했던 애플 코어의 자회사였다.[218] 음반은 2백만 장의 선주문을 받아 미국에서 한 달이 되어 4백만 장이 넘게 팔려나갔다. 그리고 수록곡은 미국의 라디오 방송국의 플레이리스트를 점령했다.[219] 엄청난 음반의 인기에도 당시에 호평은 들려오지 않았다. 구드가 적기로는,

평론가의 반응은 ... 엇갈림부터 무난함까지 다양했다. 글 쓸줄 아는 록 평론가들을 집결시킨 《Sgt. Pepper》과 비교된 화이트 앨범은 그 어떤 평론에서도 인상을 주었다는 기색은 없었다. 동정을 가지던 평론가조차 ... 분명 곡들이 왜 짜임새 없이 터져나왔나 모르고 있었다. 《뉴스위크》의 휴버트 살은 패러디의 비중이 크다는 이유로, 그룹이 자신들의 혀를 자신의 뺨을 가져다대고 있다며 비난했다.[219]

평론가의 시각은 해가 지날수록 호평으로 반전되었고, 2003년에는 《롤링 스톤》에서 10번째로 가장 위대한 음반으로 선정하기에 이른다.[142] 피치포크의 마크 리처드슨은 이 음반을 "크고 제멋대로이며, 넘실거리는 아이디어와 막무가내가 거대하고 변동심한 재료의 집합체를 이루었다 ... 이 실패는 대성공한 특색과 더불어 필수적이었다."[220] 어윈은 "밴드의 두 주된 작곡 힘이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지만, 그것은 조지와 링고 또한 마찬가지"라고 했지만, "레논은 최고의 발라드 두 곡을 썼"고, 매카트니의 곡은 "충격적"이며, 해리슨은 "작곡가로서 마땅히 더 노출되었"고, 스타의 작곡은 "즐겁다"고 썼다.[221]

영화에서 데뷔한 미공개 곡들이 네 개, 《Revolver》에 담겨 이미 출시되었던 타이틀 트랙, 싱글과 미국판 《Magical Mystery Tour》 LP에 담겨 출시되었던 〈All You Need Is Love〉, 그리고 마틴이 작곡한 기악곡 6개가 담긴 《Yellow Submarine》 LP가 1969년 1월 출시되었다.[202] 새로운 비틀즈 곡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올뮤직의 언터버그와 브루스 에드거는 음반이 "꼭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해리슨의 〈It's All Too Much〉에 대해서는 "새 곡들 중에서도 보석이다 ... 소용돌이치는 멜로트론은 눈부시고, 삶보다 웅장한 퍼커선, 그리고 피드백 기타가 해일이 된다 ... 흐릿한 사이키델릭 연무로 진입하는 명연주"라고 평가했다.[222]

비틀즈는 꾸준히 불화 상태에 있었으며 관계는 개선되려 하지 않았다. 그 가운데 매카트니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자라는 뜻이 담긴 싱글 〈Get Back〉을 발표하여 1위를 차지하는 기쁨을 맞이 했다. 그리고 레논은 〈The Ballad of John And Yoko〉를 발표해 1위를 하였다.

《Abbey Road》, 《Let It Be》, 해체[편집]

그 후 비틀즈는 《Get Back》 앨범의 녹음을 마치고 발매하려 했지만 매카트니는 이 앨범이 마음에 들지않았고 발매가 보류되었다. 《Get Back》 앨범이 보류되자 비틀즈는 사실상 마지막 앨범인 《Abbey Road》의 녹음에 들어갔고 서로 화합된 모습으로 녹음을 무사히 끝마쳤다. 그리고 애비로드 스튜디오 앞에서의 자켓촬영을 마친 후 1969년 8월 18일에 《Abbey Road》가 발매됐고 차트 1위를 차지하였다. 무그 신시사이저를 폭넓게 사용한 이 앨범은 비틀즈 앨범 중 가장 세련된 앨범이라 여겨진다. 특히 이 앨범의 백미인 일련의 짧은 곡들로 이어지는 메들리(트랙 9번 부터 16번까지, 일명 '애비로드 메들리')는 록 음악에 드라마틱한 오페라적 요소를 결합시켜 많은 음악팬들을 매료시켰다. 앨범의 마지막 곡인 〈Her Majesty〉는 최초의 히든트랙이라 여겨진다. 1번트랙과 2번트랙인 〈Come Together〉와 〈Something〉은 따로 싱글로 발매, 두 곡 모두 1위를 차지하였다. 특히 〈Something〉은 해리슨이 작곡한 노래 중 최초의 1위곡이다. 해리슨은 이 앨범의 〈Something〉과 〈Here Comes The Sun〉을 통해 자신의 커다란 음악적 성장을 보여줬다. 그리고 링고 스타 또한 〈Octopus's Garden〉으로 나름대로의 음악적 성장을 보여주었다.

계속되는 성공 속에도 비틀즈의 결속력은 계속 떨어져 불화로 이어졌고, 레논은 비틀즈보다는 오노 요코와 활동하기를 원했다. 비틀즈는 사실상 해체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고 이미 멤버들은 각자의 솔로 앨범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매카트니는 비틀즈를 놓지 않았고 보류되었던 앨범인 《Get Back》을 조지 마틴이 아닌 필 스펙터에게 프로듀싱을 맡기며 결국에는 《Let It Be》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1970년 5월 8일에 발매 하였다. 싱글로 〈Let It Be〉를 발표, 1위를 차지하였고 후에 〈The Long and Winding Road〉를 싱글로 발매하여 마지막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유명한 애플 레코드의 옥상 공연이 포함된 영화 《Let It Be》가 개봉하였다.

《Let It Be》 앨범이 발매되고 나서도 여전히 멤버들 간에 사이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멤버들은 이미 각자의 솔로 앨범을 발매하였다. 언론에서도 비틀즈의 해체를 기정사실화 하였다. 그리고 결국 매카트니가 1970년 4월 10일 데일리 미러와의 인터뷰에서 해체를 공식발표하며 비틀즈는 공식 해체되었다.

1970–현재: 해체 이후[편집]

해체 이후 공연이나 신곡을 녹음하는 등의 활동은 없었으나 1980년 존 레논은 뉴욕의 집 근처에서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이라는 암살자에게 암살 당해 세상을 떠났다. 1995년 시작된 《비틀즈 앤솔로지》 기획에 맞춰 존 레논이 1977년 녹음한 미완성곡 〈Free As A Bird〉의 데모 테이프에 남은 세 멤버가 연주와 코러스를 덧입혀 비틀즈의 신곡으로 발표하였다. 이것이 공식적으로 유일한 재결성이 되었으며, 다음해 레논의 솔로 곡인 〈Real Love〉도 같은 형식으로 제작하여 비틀즈 버전으로 발표했다. 하지만 이후 2001년 조지 해리슨이 폐암으로 사망해서 더 이상의 재결성은 불가능해졌다.

2000년에는 영국 및 미국에서 음악 차트 1위를 한 곡을 모은 컴필레이션 앨범 《1》을 발매, 1주일만에 360만장을 판매하여 세계에서 가장 빨리 팔린 앨범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되었다. 전 세계적으로는 3000만장 이상 팔린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2003년에는 《Let It Be》 음반을 리믹스하고 보너스 디스크 〈Fly on the Wall〉을 추가한 《Let It Be... Naked》를 발매했다.

2006년에는 《태양의 서커스》 배경곡으로 사용된 악곡을 모은 《LOVE》를 발매했다. 태양의 서커스는 비틀즈 자신이 출연하지 않은 매체의 배경 음악으로 비틀즈의 원곡이 사용된 최초의 사례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조지 마틴과 그의 아들 가일스 마틴이 공동 제작했다.

음악[편집]

작곡자[편집]

레논과 매카트니가 밴드의 주요 곡들을 작곡했으며, 초창기에는 작곡면에서 큰 활약은 없었던 해리슨은 후기 비틀즈에서 큰 공헌을 했다. 비틀즈의 멤버는 단 한명도 악보를 볼 수 없어서, 새로운 악상이 떠오르면 데모 테이프에 기타로 주 선율이나 리프를 일단 녹음 한 뒤에 그걸 바탕으로 멤버들이 연주해가며 다듬어서 완성,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곡을 만들었고 악보에는 전혀 의지하지 않았다. 이렇게 악보를 보거나 쓰지 못하고 데모 테이프 녹음 방식으로 작곡을 하는 방식은 비틀즈 뿐 아니라 당시 6,70년대의 다른 주요 록뮤지션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영향[편집]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는 주로 다음 가수(그룹)에게 영향을 받았다.

  • 밥 딜런 - 밥 딜런과 비틀즈는 서로 간에 영향을 주고 받은 관계였다. 밥 딜런은 비틀즈에게 영향을 받아서 기존의 포크에 락캔롤을 접목시키려는 시도에 눈을 떴고, 비틀즈는 딜런의 영향을 받아서 가사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 〈You've Got to Hide Your Love Away〉(Help!), 〈Norwegian Wood (This Bird Has Flown)〉(Rubber Soul)과 같은 곡에서 그 영향을 찾을 수 있다. 딜런은 뉴욕의 호텔방에서 비틀즈에게 마리화나를 처음 소개시켜 준 사람이기도 하다.
  • 마이클 잭슨 - 마이클 잭슨과 폴 매카트니는 영향을 주고 받은 적이 있었다.〈Thriller〉앨범이 나오기 전에 먼저 연락하여 음악적 교류를 하며 두 사람은 급속도로 친해졌다고 한다. 비틀즈가 부른 〈Come Together〉이나 폴 매카트니와 같이 불렀던 듀엣곡인 〈The Girl Is Mine〉, 〈Say, Say, Say〉등이 있다.
  • 엘비스 프레슬리 - 비틀즈는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많은 수의 엘비스 커버를 녹음했다. 또한 다큐멘터리 앤솔리지에서 비틀즈의 멤버 4명은 프레슬리를 스승(guru)라 칭한 바 있다.
  • 척 베리 - 비틀즈는 〈Roll Over Beethoven〉이나 〈Rock and Roll Music〉과 같은 척 베리의 노래를 그들의 초기 앨범에 수록했었고, 라이브로 공연한 적도있다. 레논이 처음 베리를 만났을 때, 레논은 "척 베리! 당신은 내 영웅이에요!"라고 소리쳤다는 일화도 있다.
  • 비비 킹 - 킹은 비틀즈에 블루스적인 성격에 영향을 주었다. 그의 영향은 〈Get Back〉이나 〈I Me Mine〉에서의 기타 연주에서 발견할 수 있다.
  • 버디 홀리 - 초기에 영향을 미쳤다. 비틀즈는 〈Words of Love〉를 녹음한 적 있다. 또한 비틀즈라는 이름이 홀리의 배킹 그룹 크리켓츠(The Crickets)에서 왔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이다. 스튜어트 섯클리프가 Beetles를 제안했고, 레논은 이를 Beatles로 살짝 변형했다.
  • 에벌리 브라더스 -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는 돈 에벌리와 필 에벌리의 독특한 이중창을 모방했다. 〈Love Me Do〉나 〈Please Please Me〉는 에벌리의 〈Cathy's Clown〉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고, 〈Two of Us〉는 완벽한 에벌리 스타일 노래였다.
  • 리틀 리처드 - 초기의 몇몇 곡들은 리처드의 〈Long Tall Sally〉에서와 같은 가성 스크림이 등장한다. 1962년, 리처드는 함부르크에서 비틀즈와 교제한 적 있으며, 〈Long Tall Sally〉는 초기 비틀즈 콘서트에서 꾸준히 등장했던 곡이다.
  • 초기 모타운 음악 - 비틀즈는 초기에 배럿 스트롱의 모타운 레코딩인 〈Money (That's Wat I Want)〉나 마블릿츠의 히트곡 〈Please Mr. Postman〉을 카피한 곡을 앨범에 수록한 적이 있다.

구성원[편집]

연대표

음반 목록[편집]

영국에서 발매한 LP[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내용주[편집]

  1. 비-제이사의 회장 이워트 애브너가 자신이 도박 빚을 충당하기 위해 회사 자금을 사용했다고 밝힌 후 사임했다.[79]
  2. 해리슨의 울리는 12현은 로저 맥권에게도 영향을 미쳐, 그는 직접 리컨배커를 사서 더 버즈의 트레이드마크 사운드를 제작하는데 썼다.[96]
  3. 1964년 4월의 같은 주에 세 번째 비틀즈 LP가 두 개의 음반이 유통되는 도중 합류한다. 셋 중 둘은 빌보드 음반 차트에서 1위에 올랐고, 세 번째는 2위에 오른다.[98]
  4. 스타는 편도선 수술 이후 잠시 입원되었고, 그 대신 지미 니콜이 영입되어 5일간 드럼을 맡았다.[102]
  5. 9월, 비틀즈는 플로리다에서 지역의 기획자가 관중을 인종별로 분리하지 않을 때까지 공연하는 것을 거부했다.[107]
  6. 이는 트랙 리스트가 영국과 미국 모두 같은 1967년작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전까지 이어졌다.[146]
  7. It was speculated that he was concerned that the band might not renew his management contract, due to expire in October, over discontent with his supervision of business matters, particularly regarding Seltaeb, the company that handled their US merchandising rights.[193]

참조주[편집]

  1. (영어) Unterberger, Richie. 비틀즈 - 올뮤직. Retrieved 5 July 2013.
  2. “비틀즈 [The Beatles]”. 《네이버캐스트》. 
  3. Spitz 2005, 47–52쪽.
  4. Spitz 2005, 93–99쪽.
  5. 스파잇츠 봅 (2005년). The Beatles, 126~127쪽. ISBN 0-316-80352-9
  6. Miles 1997, 47쪽.
  7. Lewisohn 1992, 13쪽.
  8. Harry 2000a, 103쪽.
  9. Lewisohn 1992, 17쪽.
  10. Harry 2000b, 742–743쪽.
  11. Lewisohn 1992, 18쪽.
  12. Gilliland 1969, show 27, track 4.
  13. Lewisohn 1992, 18–22쪽.
  14. Lewisohn 1992, 21–25쪽.
  15. Lewisohn 1992, 22쪽.
  16. Lewisohn 1992, 23쪽.
  17. Lewisohn 1992, 24, 33쪽.
  18. Gould 2007, 88쪽.
  19. Lewisohn 1992, 24쪽.
  20. Lewisohn 1992, 24–25쪽.
  21. Lewisohn 1992, 25쪽.
  22. Spitz 2005, 222–224쪽.
  23. Miles 1997, 66–67쪽.
  24. Lewisohn 1992, 32쪽.
  25. Miles 1997, 76쪽.
  26. Gould 2007, 89, 94쪽.
  27. Spitz 2005, 249–251쪽.
  28. Lewisohn 2013, 450쪽.
  29. Everett 2001, 100쪽.
  30. Lewisohn 1992, 33쪽.
  31. Miles 1997, 84–87쪽.
  32. Lewisohn 1992, 34–35쪽.
  33. Miles 1997, 84–88쪽.
  34. Winn 2008, 10쪽.
  35. Lewisohn 1992, 56쪽.
  36. Lewisohn 2013, 612, 629쪽.
  37. The Beatles 2000, 67쪽.
  38. Lewisohn 1992, 59쪽.
  39. Spitz 2005, 318, 322쪽.
  40. Miles 1998, 49–50쪽.
  41. Lewisohn 1992, 59–60쪽.
  42. Lewisohn 1992, 81, 355쪽.
  43. The Beatles 2000, 90쪽.
  44. Lewisohn 1992, 62, 84쪽.
  45. 비틀즈 2010, 92쪽.
  46. Harry 2000a, 875쪽.
  47. Lewisohn 1992, 62, 86쪽.
  48. Gould 2007, 191쪽.
  49. Harry 2000a, 494쪽.
  50. Gould 2007, 128, 133–134쪽.
  51. Womack 2007, 76쪽.
  52. Lewisohn 1992, 88, 351쪽.
  53. Gould 2007, 147쪽.
  54. Erlewine 2009a.
  55. Sheff 1981, 129쪽.
  56. Lewisohn 1992, 90, 351쪽.
  57. Lewisohn 1992, 89, 350–351쪽.
  58. Gould 2007, 159쪽.
  59. Harry 2000a, 990쪽.
  60. Gould 2007, 166–169쪽.
  61. Spitz 2005, 444–445쪽.
  62. Lewisohn 1992, 90, 98–105, 109–112쪽.
  63. Lewisohn 1992, 88쪽.
  64. Lewisohn 1992, 90쪽.
  65. Miles 1998, 86쪽.
  66. Harry 2000a, 1088쪽.
  67. Lewisohn 1992, 92–93쪽.
  68. Lewisohn 1992, 127–133쪽.
  69. Davies 1968, 184–185쪽.
  70. Lewisohn 1992, 90, 92, 100쪽.
  71. Lewisohn 1992, 93쪽.
  72. Gould 2007, 187쪽.
  73. Harry 2000a, 1161쪽.
  74. Erlewine 2009b.
  75. Gould 2007, 187–188쪽.
  76. Harry 2000a, 1162쪽.
  77. Harry 2000b, 978쪽.
  78. Harry 2000a, 402쪽.
  79. Spizer 2004, 36쪽.
  80. Spizer 2004, 40쪽.
  81. Harry 2000a, 225–226, 228, 1118–1122쪽.
  82. Everett 2001, 206쪽.
  83. Lewisohn 1992, 136, 350쪽.
  84. Davies 1968, 218쪽.
  85. Spitz 2005, 457쪽.
  86. Spitz 2005, 459쪽.
  87. Lewisohn 1992, 137쪽.
  88. Gould 2007, 3쪽.
  89. Spitz 2005, 473–474쪽.
  90. Harry 2000a, 1134–1135쪽.
  91. Lewisohn 1992, 137, 146–147쪽.
  92. Harry 2000a, 483–484쪽.
  93. Gould 2007, 230–232쪽.
  94. Harry 2000a, 489–490쪽.
  95. Erlewine 2009c.
  96. Gould 2007, 286–287쪽.
  97. Lewisohn 1992, 138쪽.
  98. Lewisohn 1992, 351쪽.
  99. Gould 2007, 9, 250, 285쪽.
  100. Gould 2007, 345쪽.
  101. Lewisohn 1992, 161–165쪽.
  102. Lewisohn 1992, 160–161, 163쪽.
  103. Gould 2007, 249쪽.
  104. Gould 2007, 252쪽.
  105. Miles 1997, 185쪽.
  106. Gould 2007, 252–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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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9. Lewisohn 1992, 167–176쪽.
  110. Gould 2007, 255–256쪽.
  111. Gould 2007, 2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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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3. Gould 2007, 317쪽.
  114. Brown & Gaines 2002, 228쪽.
  115. Spitz 2005, 556쪽.
  116. Spitz 2005, 557쪽.
  117. Gould 2007, 275쪽.
  118. Gould 2007, 274쪽.
  119. Gould 2007, 276–277쪽.
  120. Gould 2007, 276–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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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3. Unterberger 200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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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8. Gaffney 2004.
  149. Lavezzoli 2006, 176쪽.
  150. Spitz 2005, 619쪽.
  151. Spitz 2005, 620쪽.
  152. Spitz 2005, 623쪽.
  153. Lavezzoli 2006, 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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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6. Norman 2008, 4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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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1. Plagenhoef 2009.
  162. Lewisohn 1992, 350–351쪽.
  163. Austerlitz 2007, 18쪽.
  164. Lewisohn 1992, 221–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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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7. Lewisohn 1992, 224쪽.
  168. Lewisohn 1992, 361–365쪽.
  169. Ingham 2006, 44쪽.
  170. Miles 1997, 293–295쪽.
  171. Gould 2007, 5–6, 249, 281, 347쪽.
  172. Harry 2000a, 970쪽.
  173. Lewisohn 1992, 232쪽.
  174. Emerick & Massey 2006, 190쪽.
  175. Gould 2007, 387–388쪽.
  176. MacDonald 2005, 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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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8. Gould 2007, 420–4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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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0. Lewisohn 1992, 236쪽.
  181. Inglis 2008, 96쪽.
  182. Gould 2007, 423–425쪽.
  183. Gould 2007, 394–95쪽.
  184. MacDonald 2005, 312쪽.
  185. The Beatles 2000, 248쪽.
  186. The Beatles 2000, 236쪽.
  187. Harris 2005, 12–13쪽.
  188. Boyd 2008, 106-107쪽.
  189. Lewisohn 1992, 237, 259–260쪽.
  190. Gould 2007, 428–4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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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 Brown & Gaines 2002, 249쪽.
  193. Brown & Gaines 2002, 227–228쪽.
  194. The Beatles 2000, 268쪽.
  195. Gould 2007, 452쪽.
  196. Unterberger 2009c.
  197. Harry 2000a, 699쪽.
  198. Gould 2007, 455–456쪽.
  199. Harry 2000a, 703쪽.
  200. Gould 2007, 485쪽.
  201. Gould 2007, 487, 505–506쪽.
  202. Lewisohn 1992, 304, 350쪽.
  203. Gould 2007, 510–511쪽.
  204. Gould 2007, 510쪽.
  205. Harry 2000a, 705–706쪽.
  206. Harry 2000a, 108–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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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9. Winn 2009, 205–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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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편집]

추가 참고 문헌[편집]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