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비스 프레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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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 프레슬리
Elvis Presley promoting Jailhouse Rock.jpg
1957년 영화 《엘비스 프레슬리의
교도소 로큰롤》의 홍보 사진
기본 정보
본명 엘비스 아론 프레슬리
Elvis Aaron Presley
출생 1935년 1월 8일
미국 미시시피 주 투펄로
사망 1977년 8월 16일 (42세)
미국 테네시 주 멤피스
장르 팝 록, 로큰롤, 펑크 록, 블루스, 컨트리
활동 시기 1954년 ~ 1977년
서명
Elvispresley-logo.svg
웹사이트 www.elvis.com

엘비스 아론 프레슬리(Elvis Aaron Presley, 1935년 1월 8일 ~ 1977년 8월 16일)는 20세기 가장 잘 알려진 미국 가수 중 한 명이었다. 하나의 문화 아이콘으로, 주로 엘비스로 많이 알려져있다. 엘비스의 음악들은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로큰롤의 제왕" 또는 단순히 ""으로 불리곤한다. 그는 블랙 뮤직과 백인 음악을 주 장르로 불렀으며, 로큰롤, 가스펠, , 펑크, 발라드, 등의 장르에서 모두 정상급에 올랐다. 그는 1954년 데뷔 이래 총 18곡의 빌보드 넘버원 히트 싱글을 남겼으며, 비틀스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약 2억 800만 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올렸다.[1]

엘비스는 미국 미시시피 주투펄로에서 태어나 13살때 테네시 주 멤피스로 이사를 갔다. 이후 아프리카계 미국인 음악 사운드를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었던 선 레코드의 사장 샘 필립스의 협력에 의해 1954년부터 음악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엘비스는 초기 기타리스트 스코티 무어와 베이시스트 빌 블랙과 함께 음악을 했다. 나중에는 RCA 빅터로 레이블을 옮겼고 커널 톰 파커가 20년동안 매니저를 하기로 계약했다. 1956년 1월, 엘비스는 RCA에서 발매한 첫 싱글 〈Heartbreak Hotel〉을 발표했고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하며 히트를 쳤다. 엘비스는 텔레비전 출연과 차트를 휩쓸며 인기를 얻었고 로큰롤을 새로운 인기있는 장르로 유행시켰다. 1956년 11월에는 《러브 미 텐더》에 출연하며 영화 데뷔도 했다.

프레슬리는 20세기 대중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꼽히고있다. 엘비스는 다양한 목소리와 컨트리, 팝 발라드, 가스펠, 블루스 등의 장르를 포괄하며 이례적인 상업적 성과를 거뒀다. 엘비스는 팝 역사상 두번째로 많은 음반 판매고를 올린 솔로 가수이다. 또한 14번의 그래미 후보로 지명받았고, 3번의 수상을 했으며 36살에는 그래미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다. 또한 엘비스는 많은 음악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2008년 빌보드지는 핫 100 차트 50주년을 기념하여 50년간 성공적인 차트 기록을 올린 아티스트들의 기록을 분석해 순위를 발표했고, 엘비스 프레슬리는 4위에 올랐다.[2]

초기 생애[편집]

프레슬리의 생가

엘비스 아론 프레슬리는 1935년 1월 8일에 미시시피 주 투펄로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쌍둥이였지만 형이 태어나자마자 사망했기 때문에 외아들로 자라났다. 프레슬리의 부모는 가난한 백인 계층이었다.[3] 어머니 글래디스 프레슬리는 목화밭이나 공장에서 일해 생계를 유지했고, 아버지 버논 프레슬리는 한때 밀주 판매 혐의로 옥살이를 했다.

아버지는 엘비스가 세 살 때 위조수표를 발행해 투옥되었고 가정폭력을 일삼았지만, 어머니는 빈곤한 가계에도 아들의 교육과 감수성 함양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4] 아버지가 무능하고 폭력적인 까닭에 모자관계는 돈독했다.[5] 그의 어머니는 엘비스의 열한 살 생일에 기타를 선물했다. 엘비스는 TV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따라 부르고, 기타를 연주하면서 음악에 흥미를 느꼈다.[4] 어머니를 따라 간 일터인 목화밭에서 흑인들의 찬가를 수없이 들으며 흥얼거린 노력 덕분에 흑인의 블루스를 제대로 소화할 수 있었다.[6]

그의 나이 13살 때인 1948년, 엘비스의 가족은 테네시 주 멤피스의 빈민가로 이사한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흑인들의 거주 지역에서 살아가는 동안 흑인 음악에 자연스레 젖어들었으며, 교회 성가대에서 가스펠을 부르며 감성을 익혔다.[4]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트럭 운전 등의 일을 했다. 밤에는 근처 술집을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르는 생활을 계속했다.[5]

경력[편집]

선 레코드[편집]

1954년 선 레코드 홍보용 사진에서

그의 나이 18세인 1953년 7월, 어머니의 생일 선물로 노래를 하고 싶다는 엘비스의 계산된 핑계로 처음 음반을 발표했다. 샘 필립스 소유의 음반사 선 레코드에서 자비로 4달러를 내고 〈My Happiness〉와 〈That's When Your Heartaches Begin〉를 녹음했고,[7][8] 당시 레코딩 매니저였던 머라이언 키스커는 엘비스의 모습을 보고 "구걸하러 온 떠돌이인 줄 알았다"고 회상했다.[9] 엘비스가 지불한 4달러의 레코드는 2015년 1월, 프레슬리의 80번째 생일에 경매로 부쳐 30만 달러(약 3억 2500만 원)에 팔렸다.[4] 1954년 1월 다시 선 레코즈를 찾아가 〈I'll Never Stand In Your Way〉와 〈It Wouldn't Be The Same Without You〉를 녹음했다.[8]

1954년 7월, 선 레코드사의 사장 샘 필립스는 로큰롤 시장을 키우려면 로큰롤을 흑인처럼 부르는 백인 가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엘비스의 재능에 좋은 인상을 받았던 음반사의 여직원을 통해 그를 소개받는다.[7][10] 샘 필립스는 그에게 기타 연주자 스코티 무어, 베이스 연주자 빌 블랙을 주선하여 팀을 짰고, 프레슬리는 블루스 가수 아서 '빅 보이' 크러덥의 1946년 노래 〈That's All Right〉를 녹음해 데뷔 싱글로 발표했다.[8] 7월 10일 밤 9시 30분경, 노래가 멤피스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방송되자 청취자들의 엽서와 전화가 폭주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무대에 올라 멤피스 인근에서 이름을 알렸다. 엘비스는 필립스와 함께 데모곡을 만들고 여러 훈련을 받았다.[7] 1955년 가을까지 선 레코드사의 소속으로 순회공연을 하던 엘비스는 그해 11월, 미국의 거대 레코드사인 RCA 빅터와 계약을 체결했다.[4]

RCA[편집]

1955년 가수 행크 스노의 매니저이자 공연 프로모터였던 톰 파커 대령과 만났다. 그해 11월 톰 파커 대령의 권유로 선 레코즈에서 메이저 레이블 RCA 빅터로 이적했다.[8] 1956년 1월, RCA 빅터에서의 첫 번째 녹음에서는 기타 연주자 쳇 앳킨스와 피아노 연주자 플로이드 크래머, 드럼 연주자 D. J. 폰타나를 포함한 실력있는 세션들이 참여해 완성도를 높였다.[4] 같은 달 RCA을 통해 발표한 데뷔 싱글 〈Heartbreak Hotel〉은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8주 동안 정상에 머물렀고, 곧바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7][8][11] 엉덩이 흔들기 춤은 돈에 눈이 멀었던 톰 파커가 엘비스에게 "섹스는 베스트셀러야. 엉덩이를 흔들면 좋겠는데, 그러면 여자애들이 흥분할거야."라고 말한 것에서 시작되었다.[6] 그해 3월 톰 파커 대령과 정식으로 매니저 계약을 체결했고, 데뷔 음반 《Elvis Presley》를 발표했다. 이 음반은 1956년 미국 빌보드 앨범차트 1위에 올랐고, 빌보드 음반 차트 1위에 오른 첫 번째 로큰롤 앨범이 됐다.[8]

1956년 10월, 프레슬리는 싱글 〈Love Me Tender〉을 발표했고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했다.[7] 1956년 11월, 나이 22세에 로버트 D. 웹이 감독한 영화 《러브 미 텐더》에서 주연을 맡아 데뷔하였다.[7] 《타임》은 영화를 찍는 그를 "소시지인가? 분명히 매끈하고 촉촉해 보이는데. 180㎝에 77㎏짜리 소시지에 대해 들어본 일이 있는가."라며 독설했다.[9] 엘비스는 1956년부터 1969년까지 대부분 뮤지컬이거나 노래를 중요한 소재로 삼은 31편의 영화에 출연했다.[5]

그의 인기는 1957년에도 계속되었고, 멤피스의 흑인 빈민가에서 10대를 보낸 엘비스는 10만 달러의 거금을 지불하고 멤피스에 그레이스랜드라는 저택을 구입하였다. 1957년 한 해에만 〈Too Much〉, 〈All Shook Up〉, 〈Jailhouse Rock〉으로 연결되는 세 곡의 빌보드 넘버원 싱글을 히트시켰다. 특히 〈Jailhouse Rock〉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교도소 로큰롤》이라는 동명의 영화로 제작, 주연배우로 출연해 흥행에도 성공했다.[4]

TV 출연[편집]

1956년 6월, 엘비스는 NBC 텔레비전의 《밀튼 벌 쇼》에 출연해 엉덩이와 다리를 흔들며 기타를 메고 히트곡 〈Hound Dog〉을 불렀다.[4] 1956년 7월 1일 엘비스는 NBC의 《스티브 앨런 쇼》에 나왔다. 흰 나비넥타이에 검정 연미복 차림으로 출연한 엘비스는 〈Hound Dog〉를 불렀지만 방송에 나간 시간은 1분도 안 됐다. 앨런은 녹화 뒤 "재능도 없고 바보 같은 가수"라고 혹평했다. 이튿날 싱글 레코드로 녹음된 이 노래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Photo of Elvis and Ed Sullivan
1956년 10월 26일, 《에드 설리번 쇼》의 두 번째 출연 리허설 중인 에드 설리번과 프레슬리

엘비스가 경쟁 쇼에 먼저 나간 것에 화가 난 설리번은 “내 쇼에는 절대로 그 자를 출연시키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나. 2주 만에 말을 바꿔 엘비스에게 5만 달러를 주고 3회 출연 계약을 맺었다. 1956년 9월 9일, 《에드 설리번 쇼》 첫 출연 때 엘비스는 〈Hound Dog〉와 〈Love Me Tender〉를 불렀다. 설리번 쇼의 명성에 한창 떠오르던 엘비스의 이름값이 합쳐져, 무려 5500만에서 6000만명의 사람들이 공연을 시청했고,[12] 미 TV 역사상 가장 높은 82.6%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전문가들은 "프레슬리의 쇼 출연이 대공황과 2차 대전을 겪은 구세대와 베이비붐 신세대 간의 갭을 이어주는 징검다리였다"고 설명한다.[13] 방송사가 엘비스의 허리 윗부분만을 보여줬기 때문에 그의 모습은 당시 화면에 절반밖에 나 오지 못했다. 연출자 말로 루이스는 "그가 춤을 출 때에 여성팬들의 눈길을 끌려고 바지 속에 콜라 병을 넣는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듬해 1월, 설리번은 마지막으로 출연한 엘비스에게 무려 7곡을 부를 시간을 내줬다.[10]

군 복무[편집]

Elvis being sworn into the US Army
1958년 3월 24일, 아칸소 주 포르 샤피에서 선서하는 프레슬리

1957년 말, 미국 국방부로 부터 징집 영장을 받았다. 미 국방부에서는 그의 인기를 활용하기 위해 연예 사병으로 복무하기를 권했지만,[4] 엘비스는 외부의 시선을 의식해 그냥 일반 전투병으로 복무하기로 결정했다. 1958년 3월 24일에 머리를 깎고 군복을 입는다. 가을, 엘비스는 기초 훈련을 마치고, 독일연방공화국 내에 소재하는 제1기갑사단 소속 미군기지에 소총병으로 18개월 복무하였다.[14] 수만 명의 여성 팬이 엘비스의 근무지 독일까지 따라갔을 정도로 인기는 지속되었다. 군에 있는 동안 어머니가 사망하자 엘비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9] 그는 실의에 빠졌지만, 1959년 9월 연회에서 훗날 아내가 되는 소녀 프리실라 보리외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4][5]

복귀[편집]

1960년 3월 2일, 엘비스는 독일에서 군 생활을 마치고 미국 뉴저지의 미 육군 포트 딕스 기지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귀국했다.[5] 1960년 3월 5일, 제대한 지 불과 보름 만에 내슈빌의 RCA 스튜디오 B에서 뽑아낸 싱글 〈Stuck on You〉는 발매와 동시에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가장 상위권을 점령했다. 곧이어 〈It's Now or Never〉, 〈Are You Lonesome Tonight?〉 같은 발라드곡이 포함된 포함된 《Elvis is Back!》도 음반 차트 2위에 등극하면서 성공을 거뒀다. 〈It's Now or Never〉, 〈Are You Lonesome Tonight?〉은 차례대로 미국 빌보드 차트의 넘버원 싱글로 자리했다. ‘엘비스는 섹시하게 노래하지 않았다. 외설적으로 노래했다’라는 평과 함께했다.[1] 데뷔 시절의 인기 요인이었던 빠른 템포의 곡에서 벗어나 스탠더드 팝 계열의 곡으로 변신을 꾀했다.[5]

1960년 3월 12일 프랭크 시나트라 쇼가 마련한 《Welcome Home Elvis》 프로그램에 엘비스는 록 가수답지 않게 턱시도와 정장 차림으로 출연해 자신이 국민가수로 지향점을 조정하고 있음을 알렸다.[15] 1960년대 초중반 엘비스 프레슬리는 가수로서의 활동보다는 영화배우로서 활동했고, 그의 복귀 후 첫 번째 영화는 미국 군인으로서의 공익적 이미지를 옮겨온 《지아이 블루》였다.[1] 1961년에는 영화 《블루 하와이》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61년 6월에 발표한 또 하나의 히트 음반 《Something for Everybody》로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한 데 이어 그해 10월에 발표한 동명 영화의 사운드트랙 《Blue Hawaii》는 빌보드 차트에서 20주간 1위, TOP 10 차트에서 39주간 머무는 성공을 자랑했다. 음반에 수록된 발라드 넘버 〈Can’t Help Falling in Love〉도 큰 인기를 누렸다.[1]

Photo of Elvis Presley kissing his new bride Priscilla
1968년, 리사 마리를 안은 프레슬리와 프리실라

할리우드 배우로서의 활동에 집중한 1960년 ~ 1967년에 엘비스 프레슬리는 음악적으로 심각한 슬럼프 시기를 겪었고, 1965년 비틀즈가 엘비스의 캘리포니아 자택을 방문해 잼 세션을 나눴다는 것이 호사거리가 됐을 뿐, 영화 출연 외에는 은둔과 칩거 생활이 계속되었다.[1] 1967년 5월 1일, 엘비스는 독일 군복무 중에 만난 22세 소녀 프리실라 보리외와 결혼했다.[7][1] 이듬해에 외동딸 리사 마리가 태어났지만, 결혼 생활은 5년 만에 파경을 맞는다.[5] 딸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마이클 잭슨의 첫 배우자였으므로 엘비스 프레슬리는 마이클 잭슨의 장인이기도 하였다. 1968년 12월 3일, NBC 방송국은 엘비스의 복귀 프로그램을 특집 방송으로 편성했다. 가수로서 복귀를 선언한 엘비스는 컴백 공연을 통해 재기에 성공했다.[1][5]

1969년 7월에는 라스베이거스에서 4주간 총 57회의 공연을 선보였고, 13만 명의 관객이 동원됐다. 그해 8월에 발매한 싱글 〈Suspicious Minds〉는 엘비스의 18번째 넘버원 싱글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이 곡은 엘비스가 기록한 마지막 빌보드 넘버원 싱글곡이다. 그는 1969년에 연속 출연한 《차로》, 《습관의 변화》를 끝으로 더 이상 영화 출연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1970년 6회에 걸친 투어 중 총 2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고, 존 레논, 밥 딜런, 조지 해리슨, 데이비드 보위, 아트 가펑클 등이 함께 출연한 1972년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의 4회 공연도 완전 매진을 기록했다.[1]

A mutton-chopped Presley, wearing a long velour jacket and a giant buckle like that of a boxing championship belt, shakes hands with a balding man wearing a suit and tie. They are facing camera and smiling. Five flags hang from poles directly behind them.
1970년 12월 21일,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을 만난 프레슬리

프레슬리와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만남은 프레슬리의 요청으로 이뤄졌다. 1970년 12월 21일, 프레슬리는 자신의 리무진을 타고 백악관을 찾았으며 자신의 경호원을 통해 닉슨 대통령과의 만남을 요청하는 편지를 백악관측에 전달했다. 록스타로서 정부의 '마약과의 전쟁'을 돕고 싶다는 게 만남을 요청한 이유였다. 프레슬리는 이 편지에서 마약 남용의 폐해와 공산주의 세뇌 기술을 심도있게 연구했다면서 마약국 연방 요원 배지를 요구했다. 그는 "연방요원증을 받을 때까지 백악관 앞에 있을 것"이라고 고집을 부렸다. 백악관 비밀경호국 요원들은 당시 닉슨 전 대통령의 보좌관이었던 버드 그로그에서 이를 보고했고 프레슬리의 팬이었던 그로그는 프레슬리와 만난 뒤 그가 진심이라고 판단, 대통령과의 만남을 주선했다.[16]

프레슬리는 2시간 30분 뒤 검은색 벨벳 오버코트, 금도금 벨트, 검은색 가죽 부츠 등 특유의 화려한 의상을 입고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갔다. 그로그는 프레슬리가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갈 때 긴장으로 굳어졌다면서 프레슬리가 자신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대통령 책상 앞까지 갈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프레슬리와 닉슨은 30여분간 환담을 나눴으며 프레슬리는 자신의 딸 사진과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으로부터 받은 셔츠 소매단추 등을 닉슨에게 보여줬다. 또 미 전역의 경찰 배지 등을 보여주며 마약국 배지를 갖고 싶다고 말했고 닉슨을 이를 흔쾌히 들어줬다. 이 내용은 프레슬리의 요청에 따라 1년 이상 극비에 부쳐지다 1972년 1월 27일 워싱턴 포스트에 의해 기사화됐다.[16] 1970년 12월 21일에 백악관에서 악수하는 기념사진은 미국 국립 기록 관리처 문건 중 최다 열람 요청을 기록한 사진이다.[17]

1973년에는 인공위성 생중계인 하와이 자선 공연 《엘비스: 알로하 프롬 하와이》에서 다시 한 번 슈퍼스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5] 이 공연은 40개국 15억 명이 시청한 것으로 추정됐고, 8만 5천 달러의 기금을 모았다.[8] 두 장의 LP, 4면에 담긴 이날의 공연 음원은 《Aloha from Hawaii via Satellite》이라는 타이틀로 발매했고, 음반 차트 정상을 차지했다.[1] 하와이에서의 위성 생중계 이후 엘비스 프레슬리는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했다. 그해 10월 9일에는 아내 프리실라와 합의 이혼했다. 그는 이혼에서 오는 상실감을 이겨내고자 폭식을 했고, 한때 74kg이던 몸무게는 117kg에 이르렀다. 그는 잠들기 위해 수면제를 복용하고, 잠을 깨기 위해 각성제를 복용하며 8개월 동안 9000개의 약을 먹은 것으로 전해진다. 멤피스의 마피아라 불리던 호위병 친구들은 엘비스의 추락을 부추겼다.[1]

죽음[편집]

A long, ground-level gravestone reads "Elvis Aaron Presley", followed by the singer's dates, the names of his parents and daughter, and several paragraphs of smaller text. It is surrounded by flowers, a small American flag, and other offerings. Similar grave markers are visible on either side. In the background is a small round pool, with a low decorative metal fence and several fountains.
그레이슬랜드에 세워진 프레슬리의 묘비

1973년부터 엘비스는 각성제, 진정제 등 각종 약물 남용으로 인해 몇 차례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후에도 꾸준하게 음반 및 공연 활동을 했지만 약물로 건강을 악화시켰다.[8] 1977년 8월 16일, 엘비스 프레슬리는 미국 테네시 주멤피스에 위치한 자택 그레이슬랜드의 욕조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향년 42세의 나이에 약물중독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11]

영향[편집]

임진모는 "엘비스가 등장하기 전에는 일렉트릭 기타드럼으로 울리는 로큰롤은 보편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Heartbreak Hotel〉이란 곡으로 로큰롤이 무엇인 지를 알게 됐다. 젊은이들은 로큰롤에 열광했고 음악은 선율 중심의 스탠다드 음악에서 격렬한 리듬의 로큰롤로 바뀌게 됐다. 로큰롤 이전의 주류 음악은 스탠다드 음악이었다. 프랭크 시나트라로 대표되는 이 음악은 50년대 초반만 해도 세대 전체에 걸쳐 인기를 누린 음악이었다. 그러나 엘비스가 로큰롤을 대중화하면서 젊은이들은 스탠다드 에서 로큰롤로 선회했다. 엘비스가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이러한 '청춘의 음악적 독립'을 이뤘다는 공로 때문이다."고 설명한다.[18]

존 레논이 “엘비스가 나타나기 전까지 어린 시절 내게 영향을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라고 말했을 만큼 엘비스 프레슬리는 비틀스 멤버들을 완전히 매혹시켰다. 폴 매카트니 역시 이렇게 말했다.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가 바로 구루(guru)였고 우리가 기다려오던 구세주였다.”[19]

미국 프로레슬링 WWF(현재 WWE)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 복장을 따라한 홍키통크맨이 등장했다. 그러나 홍키통크맨은 프로레슬러로서 능력은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영화 로보캅 2에서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유발이 남은 유골과 사진이 그대로 등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밖에도 《이집트의 왕자 요셉》을 뮤지컬화 한 작품들에서 대부분 파라오들이 엘비스 프레슬리를 따라하여 등장, 춤과 노래를 했다

가족[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하종욱 (2015년 6월 1일). “엘비스 프레슬리❷”. 《월간객석》. 
  2. Billboard Hot 100 Chart 50th Anniversary
  3. “팝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아티스트”. 《전남일보》. 
  4. 하종욱 (2015년 5월 1일). “엘비스 프레슬리❶”. 《월간객석》. 
  5. 박중서. “엘비스 프레슬리”. 《네이버캐스트》. 
  6. “신화에 숨겨진 ‘인간 엘비스’의 고뇌”. 2006년 7월 21일. 
  7. 임형주 (2015년 11월 9일). “[신문과 놀자!/임형주의 뮤직 다이어리]美 ‘로큰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 가수-배우 벽 허문 최초의 ‘만능 연예인’”. 《동아일보》. 2016년 11월 24일에 확인함. 
  8.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1935.1.8~1977.8.16]”. 《두산백과》. 
  9. 허언. “[허연의 비블리오필리]알 카포네와 엘비스 프레슬리 그리고 `미국의 슬픈 연대기`”. 《매일경제》. 
  10. “[어제의 오늘]1977년 엘비스 프레슬리 사망”. 《경향신문》. 
  11. 박병선 (2011년 1월 8일). “[역사 속의 인물] ‘엘비스 프레슬리’ 태어나다”. 
  12. “[어제의 오늘]1956년 ‘에드 설리번 쇼’ 나온 엘비스 프레슬리”. 《경향신문》. 
  13. 김정형. “[역사속의 오늘]미 TV프로그램 ‘에드 설리번 쇼’ 방송 시작”. 《조선일보》. 
  14. “영국 이코노미스트, "현빈은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 극찬”. 2011년 5월 17일. 
  15. 이즘. “[라이벌열전] 프랭크 시나트라 vs 엘비스 프레슬리”. 《채널예스》. 
  16. “<'로큰롤 황제'와 대통령의 만남>”. 연합뉴스. 2007년 1월 9일. 
  17. 옥선희 (2016년 12월 7일). “닉슨의 사적인 만남, 그 결과는 …”. 
  18. 엘비스 프레슬리 - 그 음악의 뒷 얘기
  19. 강헌. “[특별기획] 비틀스는 왜 ‘현대의 고전’이 되었나?”. 《중앙일보》.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