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irl of My Best Friend 발매: 1976년 8월 20일 (1976-08-20)
《Elvis Is Back!》은 미국의 가수, 음악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네 번째 정규 음반이다. 1960년 RCA 빅터에서 모노와 스테레오로 발매되었다. 3월과 4월 두 차례의 세션에서 녹음되었다. 엘비스가 미국 육군에서 만기 제대한 이래로 처음 취입한 음반으로 또한 《Elvis' Christmas Album》 이래 전곡이 신곡인 정규 음반이기도 하다.
1957년, 전성기를 구가하던 프레슬리에게 멤피스 징병 위원회에서 징집 영장이 날아든다. 엘비스는 최근 찍고 있던 영화 《킹 크리올》의 제작을 끝막기 위해 입영 유예를 받았다. 프레슬리는 독일에 2년간 배치되게 되었고, 그 사이 RCA 빅터와 파라마운트 픽처스가 엘비스가 입대 전에 불러둔 곡을 각일각으로 시장에 풀었다. 전역하기 몇 달 전부터 엘비스는 새로운 구음을 실험하고 한층 더 발전된 공연을 위해 운동했다. 역시 제대 직후 내슈빌에서 열릴 세션에서 녹음될 곡을 연습하는 데도 준비를 끝냈다. 1960년 3월 2일 프레슬리는 미국으로 귀국한다. 이후 베이시스트 빌 블랙을 제외한 자기 전속 밴드 블루 문 보이스와 합류하여 3월 20일, 21일, 4월 3일, 4일을 세션에 투자해 본 음반을 만들었다.
《Elvis Is Back!》는 영국 음반 차트 1위, 빌보드 톱 LP 차트 2위였다. 본시 평단에서는 호평과 혹평을 두루 내렸으나, 호평의 비율이 늘어나는 추세이다. 1999년 7월 15일 미국음반산업협회에서 골드 인정을 받았다.[4]
12월 20일 프레슬리는 징집 영장을 받는다. 그렇지만 파라마운트 픽처스 및 프로듀서 할 월리스가 350,000달러를 투자해 놓은 차기작 《킹 크리올》의 제작은 끝막아야 했으므로 입영 유예를 받았다. 1958년 어귀, 싱글 〈Don't〉이 차트 정상까지 올랐다.[9]
1958년 3월 24일 엘비스는 군으로 징집당한다.[10] 근근 엘비스는 텍사스주 포트 후드로 기초 훈련을 수료하러 갔다. 이곳에서 그를 내방한 사업가 에디 패달의 회고에 따르면, 엘비스는 자기 경력이 끝났음을 "완연히 믿고 있었다."[11] 10월 1일 기초 훈련이 끝난 엘비스는 독일 프리트베르크의 제3기갑사단에 편입했다.[12]
1960년 3월 2일 엘비스는 미국으로 귀국한다. 3월 5일 병장 계급으로 명예 제대한다.[21] 한편 엘비스가 독일에 있는 동안 매니저 톰 파커 대령이 프레슬리의 영화 사운드트랙 계약의무를 이행하고자 RCA 빅터와 새로운 조건을 교섭했다. 또한 프로듀서 월리스와 나눠갖는 프레슬리의 급여 및 이윤을 증가하는 데 합의하고 《프랭크 시나트라 쇼》의 출연 계약도 성립했다.[22] 그러는 동안 빈스톡은 퍼블릭 도메인이 돼 버린 〈O Sole Mio〉의 인세를 확실히 받아내기 위해 새로운 가사를 붙일 것을 청탁했다.[19]
3월 20일 파커가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전세하여 엘비스 및 그 수행단을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내슈빌로 이송한다. 기타리스트 스코티 무어, 드러머 D. J. 폰타나, 피아니스트 플로이드 크래머, 기타리스트, 행크 갤런드, 베이시스트 보비 무어, 퍼커셔니스트 버디 하먼, 배킹 그룹 조더네이어스로 꾸려진 세션이었다. 엘비스의 초대 베이시스트 빌 블랙은 빌 블랙 콤보로 대성한 터라 참여 요청을 거부했다. 팬들에 의한 세션 파탄을 방지하기 위해서 참여 인원들은 처음에 짐 리브스의 세션에서 연주하기로 듣고 왔다. 제어실에는 파커가 시켜 온 RCA 경영자 숄스 및 빌 벌록, 파커의 조수 톰 디스킨, A&R 최고 책임자 쳇 앳킨스, 엔지니어 빌 포터, 힐 앤 레인지의 빈스톡이 동존했다.[23]
본 앨범이 발매된 지 머지 않은 1960년 5월에 찍힌 프레슬리.
취입이 있은 RCA 빅터의 스튜디오 B는 당시 막 삼트랙 녹음기를 설치했던 참이었다.[24] 프레슬리의 구음을 보다 정밀히 녹음하기 위해 포터는 텔레푼켄 U-47 마이크로폰을 역시 비치했다.[25] 이 U-47은 최초의 콘덴서 마이크로폰이며 전방향 특성(omnidirectional patterns)과 심장형 특성(cardioid patterns)을 임의 변경하는 것이 가능했다. 구음, 주악은 물론 사방팔방의 음향을 담는 것에 특화된 마이크로폰이었다.[26] 맨 먼저 녹음된 곡은 오티스 블랙웰의 〈Make Me Know It〉으로, 19 테이크나 녹음해서 마스터를 정했다. 다음으로 〈Soldier Boy〉를 15 테이크만에, 그다음으로 〈Stuck on You〉와 〈Fame and Fortune〉을 앨범 미수록곡으로 녹음했다. 그리고 〈A Mess of Blues〉를 녹음하는 것으로 세션을 파했다.[27] 새로운 세션은 한 달 건너 4월에 생겼다. 《더 프랭크 시나트라 타임엑스 쇼: 웰컴 홈 엘비스》의 촬영을 끝내고 프레슬리는 일정에 맞춰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를 떴다.[28]
4월 3일, 이전에 모였던 음악인들이 하나둘씩 스튜디오로 다시 모여들었다. 이날 세션에는 색소포니스트 부츠 랜돌프 역시 참여했다. 세션의 발을 뗀 곡은 〈Fever〉로, 베이스와 드럼만 동원한 곡이다.[29] 다음으로 〈O Sole Mio〉, 여기서는 가사를 새로 붙혀 〈It's Now or Never〉로 이름한 곡을 녹음했다. 프레슬리가 본곡의 끝을 장식하는 고음역대의 구음을 번번히 틀리자, 포터는 해당 구간만 따로 불러서 나머지 음원과 이어 붙이는 것을 제안했다. 프레슬리는 이를 물리치고 끝이 마음에 들 때까지 계속 녹음했다.[30] 〈Girl Next Door Went A-Walking〉을 10 테이크에 끝내고 그다음 〈Thrill of Your Love〉를 녹음했다.[24] 앨범 미수록곡 〈Are You Lonesome Tonight〉를 끝내고서는, 호지와 듀엣으로 부른 〈I Will Be Home Again〉를 녹음했다. 세션의 마지막 곡은 로웰 풀슨의 〈Reconsider Baby〉로, 프레슬리 본인이 몸소 깁슨 슈퍼 400 기타를 쳐서 리드했다.[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