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밍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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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밍거스
Charles Mingus
Charles Mingus 1976 cropped.jpg
찰스 밍거스 (1976년)
기본 정보
본명 찰스 밍거스 Jr.
(Charles Mingus Jr.)
출생 1922년 4월 22일
미국 애리조나주 노갤러스
사망 1979년 1월 25일 (56세)
멕시코 쿠에르나바카
국적 미국
직업 음악가, 밴드리더
장르 재즈, 하드 밥, 비밥, 아방가르드 재즈, 프리 재즈
악기 콘트라베이스, 피아노, 첼로
활동 시기 1943년 ~ 1979년
레이블 애틀랜틱, 컬럼비아, 임펄스!, 머큐리
관련 활동 페퍼 아담스, 마일스 데이비스, 에릭 돌피, 듀크 엘링턴, 조니 미첼, 찰리 파커, 맥스 로치

찰스 밍거스(Charles Mingus, 1922년 4월 22일 ~ 1979년 1월 5일)는 미국재즈 작곡가, 베이스 연주자, 밴드 리더, 피아노 연주자이다. 그리고 음악 산업의 상업화를 피하려는 시도로서 자신의 레코드 레이블, 재즈 작곡가 워크숍, 연주자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베이스 연주자로서의 기교가 풍부했고 항상 새로운 기법을 탐구했고, 언제나 반주자나 사이드맨이 아니라 독주자로서 더욱 뛰어났다.

생애[편집]

찰스 밍거스는 1922년 4월 22일 미국 애리조나주 노갤러스에서 태어났지만, 대부분의 유년기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보냈다. 부모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여서 밍거스도 어릴 적 찬송가를 비롯한 개신교 음악에 익숙했지만, 이내 집에서는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던 재즈블루스에도 심취했다. 당시 인종차별 때문에 정규 음악 교육의 혜택은 거의 받지 못했지만, 학창 시절에도 트럼펫첼로를 아마추어 수준으로나마 교습받는 등 계속 음악 수업을 받았다.

1930년대 후반에 레드 칼랜더에게 콘트라베이스 연주법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다만 그 때까지도 첼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개인적으로 계속 연습했다. 이후 당시 뉴욕 필하모닉의 수석 콘트라베이시스트였던 허먼 레인스하겐에게 약 5년 동안 클래식 연주법을 비롯한 체계적인 베이스 연주법을 다시 배웠고, 로이드 리스로부터 작곡 개인 레슨을 받기도 했다.

1940년대 초반부터 바니 비가드, 루이 암스트롱, 키드 오리등의 밴드가 순회 공연을 할 때 비상근 베이시스트로 협연하면서 재즈계에 발을 들였고, 1947~1948년 라이오널 햄턴 빅 밴드에서 작곡도 하고 연주도 했으며 레드 노보와 레코드를 취입했다. 1950년대 초반에는 음악 산업의 상업화를 피하려는 시도로서 자신의 레코드 레이블, 재즈 작곡가 워크숍, 연주자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듀크 엘링턴, 찰리 파커, 델로니우스 몽크 등과 흑인영가, 멕시코 민요, 그리고 전통 재즈와 20세기의 음악회 음악 등에서 영감을 얻었다. 비록 그가 남긴 수작들의 대부분은 트럼펫 연주자 대드 존스, 드럼 연주자 대니 리치먼드, 알토 색소폰 연주자 재키 맥린, 목관악기 연주자 에릭 돌피 등과 같은 즉흥 연주자들과 긴밀하게 협조한 결과 나온 것이지만 밍거스는 보다 규모가 큰 기악곡과 몇 편의 영화음악도 작곡했다.

1953년에는 찰리 파커맥스 로치, 디지 길레스피, 버드 파웰과 함께 퀸텟(5중주단)으로 팀을 이루어 잠시 공연했는데, 이 중 캐나다 토론토의 매시 홀 실황이 재즈 팬들에게 The Quintet으로 회자되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인 명반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밍거스는 주로 비밥 베이시스트 정도로만 평가받고 있었을 뿐이었다. 같은 해 밍거스는 비밥 이후의 실험적인 음악을 위해 재즈 작곡가의 워크숍을 만들었고, 그 동안 코드(화음)에 기반한 즉흥 연주 위주였던 재즈 스타일에서 가능한한 악보화된 음악으로 재즈를 연주하는 시도를 했다. 하지만 이 시도는 기존 재즈 뮤지션이나 청중 모두에게 너무 분석적이고 되레 재즈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처럼 여겨졌고, 밍거스 자신도 악보로 기보하기에는 재즈의 세계가 너무 다양하다고 인정하고 포기했다.

그 대신 1950년대 중반에는 연주자들에게 피아노나 베이스 연주로 자신의 의도를 설명한 뒤, 자신 뿐 아니라 모든 연주자들이 초기 뉴올리언스 재즈처럼 더 자유롭게 그 틀에서 즉흥 연주로 음악을 뽑아나가는 방식의 새로운 워크숍을 열었다. 이런 방식으로 1956년에 애틀랜틱에서 나온 앨범이 《Pithecanthropus Erectus》(라틴어로 직립원인)였고, 밍거스가 사이드맨이 아닌 리더로 낸 앨범 중 최초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비록 인류학 지식이 턱없이 부족한 밍거스가 어설프게 곡을 설명한게 까이기는 했지만, 듀크 엘링턴 이후 그와 다른 방식의 대규모 재즈 작품을 발표한 것이 크게 주목을 받았다.

1년 뒤 발표한 《The Clown》에서는 아이티 민중들의 독립 투쟁을 반영한 〈Haitian Fight Song〉을 삽입했고, 1959년에 메이저 음반사인 컬럼비아에서 내놓은 《Mingus Ah Um》에서는 레스터 영듀크 엘링턴, 젤리 롤 모턴 등 선배 뮤지션들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곡들과 함께 2년 전 미국 아칸소주 리틀록에서 흑인 학생들이 백인 학생들과 등교하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했다가 아이젠하워에게 데꿀멍했던 주 지사 오벌 포버스(Oval E. Faubus)에 대한 공개적인 디스곡인 〈Fables of Faubus〉를 같이 끼워넣는 등의 행보로 음악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한편 1960년 애틀랜틱에서 발매한 《Blues & Roots》에서는 자신이 어릴 적 들었던 블루스흑인영가의 추억을 바탕으로 한 〈Wednesday Night Prayer Meeting〉을 넣기도 했고, 1962년에 RCA에서 발매한 《Tijuana Moods》에서는 라틴 풍 재즈 음악을 선보여 상업적인 감각도 다른 뮤지션들에 비해 떨어지지 않음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임펄스!에서 대규모 발레 스타일의 모음곡만으로 앨범 전체를 채운 《The Black Saint and the Sinner Lady》으로 엘링턴 이상의 복잡하면서도 대규모의 모음곡 형식 작품에 더욱 경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 앨범과 그 직후 발매한 셀프 리메이크 앨범인 《Mingus Mingus Mingus Mingus Mingus》이후에는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는데, 대니 리치먼드재키 바이어드, 에릭 돌피, 조니 콜즈, 클리프 조던과 함께 결성한 섹스텟(6중주단)이 결성 몇 달 만에 콜즈의 지병과 돌피의 사망으로 와해되었다. 게다가 나름대로 공들여 집필한 자서전 〈Beneath the Underdog〉도 상당히 과격한 내용 때문에 출판해주겠다고 나서는 출판사가 없었고, 만성적인 재정난에 시달리다가 뉴욕에 있던 자택을 처분하고 잠시 연주 일선에서 물러나는 등 망했어요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1972년에 컬럼비아에서 《Let My Children Hear Music》을 발표하면서 다시 복귀했고, 1974년에는 카네기홀 무대에서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는 등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에 흔히 루게릭 병으로 부르는 근위축성측색경화증에 걸리면서 베이스 연주가 힘들어지게 되었고, 1977년 이후 베이스 연주가 불가능해지자 작곡으로 관심을 돌렸지만 이내 손발이 모두 마비되면서 이것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결국 조니 미첼이 자신에게 헌정하는 앨범인 《Mingus》의 작업에 참가한 것을 끝으로 멕시코쿠에르나바카에서 요양하던 도중 세상을 떠났고, 유해는 유언에 따라 화장되어 인도갠지스 강에 뿌려졌다.

음반 목록[편집]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