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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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4세
Louis XIV
Louis XIV of France.jpg
Grand Royal Coat of Arms of France.svg
지위
Royal Crown of France.svg
프랑스 국왕
재위 1643년 5월 14일-1715년 9월 1일
대관식 1654년 6월 7일
전임 루이 13세
후임 루이 15세
섭정 안 도트리슈 (1643년–1651년)
재상
이름
별호 태양왕
신상정보
출생일 1638년 9월 5일
출생지 프랑스-나바르 왕국 생제르맹앙레
사망일 1715년 9월 1일(1715-09-01)(76세)
사망지 프랑스-나바르 왕국 베르사유
매장지 생드니 대성당
왕조 카페 왕조
가문 부르봉 가
부친 루이 13세
모친 안 도트리슈
배우자 마리테레즈 도트리슈
자녀 본문 참조(루이 왕세자 포함)
종교 로마 가톨릭
Louis XIV Signature.svg

루이 14세(프랑스어: Louis XIV, 1638년 9월 5일 ~ 1715년 9월 1일)는 프랑스의 왕이자 나바라[1]의 군주이다. 본명은 루이 디외도네(프랑스어: Louis-Dieudonné)이고, 공식 칭호는 루이 드 프랑스-나바르(프랑스어: Louis de France et de Navarre)다. 그는 다섯 살 생일이 채 되기도 전에 왕위에 올랐다. 통치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나이라 이탈리아 추기경 쥘 마자랭이 1661년 죽을 때까지 사실상 역할을 대신하였다. 루이는 1715년 9월에 죽을 때까지 왕의 자리에 있었는데, 77번째 생일을 맞이하기 4일 전이었다. 그의 치세기간은 최종적으로 72년 3개월 18일으로 유럽의 군주 중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루이 14세는 세간에는 태양왕(프랑스어: Le Roi Soleil)이란 별명으로 알려져 있다. 루이 14세는 왕권신수설을 믿었기에, 국왕의 권력은 신으로부터 받는 것이라는 학설을 지지했다.

루이의 치세 상당부분은 유럽에서 프랑스의 힘과 세력을 확장시키고자 3번의 주요 전쟁프랑스-네덜란드 전쟁,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스페인 왕위계승전쟁─과 2번의 작은 분쟁─상속 전쟁, 재결합 전쟁─을 치렀다. 이 시대 프랑스의 정치와 군사상 걸출한 인물의 면모를 살펴본다면 마자랭, 장바티스트 콜베르, 튀렌, 보방을 들 수 있다. 프랑스 문화 또한 이 시대 번성하여 위대한 명성을 가진 인물들이 나타났는데, 몰리에르, 장 라신, 부알로, 라 퐁텐, 르브룅, 리고, 루이 르 방, 쥘 아르두앙 망사르, 클로드 페로, 르 노트르 등이 이 시기의 사람이며, 이들의 대다수는 루이로부터 지원금을 받고 왕과 왕실을 찬양하는 작품을 쓰기도 했다.

루이 14세는 그의 전임자가 만든 중앙 집권화의 일을 계속 추진하여 프랑스의 지방에 끝까지 남아 있던 봉건제도의 잔재를 청소하고 수도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따라 통치할 수 있게 만들어 갔다. 그의 성과를 방해한것은 지방의 힘있는 귀족들로 많은 이들이 반란으로 일어났고, 그들 소수를 가리켜 프롱드라고 불리었다. 루이는 이들 힘있는 귀족들을 베르사유 궁전의 자신의 곁으로 불러들여 사치스런 생활을 즐기게 하면서 서서히 약화시켰고, 이를 통해 귀족들의 힘을 제어했다. 그 결과 그는 오랫동안 유럽에서 절대군주의 전형으로 고찰되게 되었다.

또한 절대군주의 자리를 다져 “짐이 곧 국가니라(L'État, c'est moi)”와 같은 말을 했다고 전해지지만, 역사학계에서 이 말은 그의 정적들이나 볼테르가 퍼뜨린 헛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루이 14세는 키에 대한 콤플렉스로 하이힐을 최초로 신었고 귀족들이 그것을 따라하여 유행처럼 번졌다고 한다.

초기 세월, 섭정 정치와 전쟁[편집]

8세의 루이 14세

1638년 루이 14세가 생제르맹앙레 궁전에서 태어났을 때 23년간 자녀가 없었던 그의 부모 프랑스의 루이 13세오스트리아의 안 도트리슈는 그를 "신성한 선물"로 여겨 이런 까닭에 그는 루이-디외돈(프랑스어: Louis-Dieudonn, 하느님이 주신 루이)로 세례를 받았고, 또한 프레미에 필 드 프랑스(프랑스어: Premier fils de France, 프랑스의 첫 아들)의 칭호와 전통적 칭호 도팽(프랑스어: Dauphin)이 주어지기도 했다. 메디치가합스부르크가의 일원들을 포함한 많은 유럽의 왕가들의 혈통이 루이의 정맥을 통하여 흘렀다. 그는 성왕 루이로부터 깨지지 않은 남성 계승에서 자신의 부계 혈통을 추적할 수 있었다.

루이 13세와 안 도트리슈는 1640년 두번째 아들 필리프 도를레앙을 두었다. 하지만 루이 13세는 자신의 사후 프랑스를 다스리는 데 부인의 능력을 신임하지 않아 안에 의하여 이끌어진 섭정 위원회가 아들의 미성년기 동안 그의 이름에서 다스려야 할 것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1643년 5월 14일 루이 13세가 사망하고 루이 14세가 그를 계승했을 때 안은 남편의 의지를 무효화 하여 위원회를 없애고 자신을 유일한 섭정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이미 프랑스에 귀화했어도 프랑스인이 아닌 외국인 배경 때문에 프랑스 정치계에서 가장 멸시를 받았던 그녀의 수석 장관 이탈리아 출신의 쥘 마자랭 추기경에게 권력을 위임하였다.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의 유럽 (1648년)

이전 통치에서 시작된 30년 전쟁이 마자랭에 의하여 주도된 베스트팔렌 조약과 함께 1648년에 끝났다. 이 평화 조약은 스페인으로부터 네덜란드의 독립과 신성 로마 제국에서 독일 왕자들의 독립을 보장하였다. 그것은 독일과 유럽의 정세에서 스웨덴의 권력과 영향력의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그것은 평화 조약의 조건들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원했던 프랑스였다. 오스트리아알자스와 사소한 독일의 주들에서 전체의 합스부르크 대지와 주장들을 양도하여 합스부르크의 지배에서 자신들을 몰아내는 열망에 자신들을 프랑스의 보호 아래 두어 더욱 나가서 제국 권력의 해산으로 이끌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신성 로마 제국과 유럽에서 합스부르크가의 야먕들을 모욕하였고 전체 기독교 국가에 세속적인 지배권을 가진 제국의 아이디어에 휴식을 취했다.

30년 전쟁이 겨우 끝나면서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얻은 장점들을 좋게 만드는 데 효과적으로 능력을 억제한 "프롱드의 난"으로 알려진 프랑스 내전이 시작되었다. 마자랭 추기경은 자신의 전임자 아르망 장 뒤 플레시 드 리슐리외에 의하여 속행된 중앙 집권화의 정책들을 지속하여 귀족을 희생시킨 왕권 증대를 추구하였다. 1648년 그는 재판관들이 대부분 귀족 혹은 고위 성직자들로 이루어진 법정인 의회의 일원들에 세금을 부과하려고 하였다. 의원들은 준수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마자랭의 이른 재정 칙령들을 전부 불태우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마자랭이 특정 의원들을 채포했을 때 파리는 폭동과 반란이 일어났다. 화가 난 파리 시민의 군중은 왕궁으로 침입하여 자신들의 국왕을 보는 데 요규하였다. 왕실 침실에 들어가는 데 지도한 그들은 자는 척을 하고 있던 루이 14세에 바라보고 조용히 떠났다. 왕족과 군주에게 가능한 위험에 유발된 안은 국왕과 그의 신하들과 함께 파리를 달아났다. 짧은 후에 베스트팔렌 조약의 조인은 루이 2세 드 부르봉콩데 아래 프랑스 군대가 루이 14세와 그의 왕실의 도움으로 돌아가는 데 허용하였다. 1649년 1월까지 부르봉콩데 왕자는 반항적인 파리를 포위하기 시작하였으며 후속의 뤼에이 화약이 투쟁을 끝냈다.

첫 프롱드의 난이 끝난 후, 왕자들의 제2차 프롱드의 난이 1650년에 시작되었다. 피의 왕실의 왕자들과 국왕의 사촌들부터 합법적인 왕족의 귀족과 고대 가문의 귀족들까지 전체 계급의 귀족들이 왕실 지배에 반대하는 반란에 참가하였다. 성직자 마저 장 프랑수아 폴 드 공디에 의하여 대표되었다. 대비가 자신의 자녀들을 먹여 살리는 데 그녀의 보석을 팔았을 때 이 격동의 시간들의 결과는 귀족과 군중을 위한 영원한 불신으로 가득찬 국왕이었다.

전쟁의 종말과 개인 통치[편집]

루이 14세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결혼식

스페인과 전쟁은 지속되었다. 프랑스는 당시 호민관 올리버 크롬웰에 의하여 다스려진 잉글랜드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영국-프랑스 동맹은 1658년 됭케르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후 1659년에 조인된 피레네 조약피레네 산맥에서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의 국경을 수정하였으며 그 조건에 따라 스페인령 네덜란드와 루시용에서 스페인은 다양한 주와 촌들을 프랑스에게 양도하였다. 조약은 스페인의 쇠퇴와 프랑스의 상승과 함께 권력의 균형에서 변화를 맺었다. 위에서 언급된 조약에 의하여 루이 14세는 스페인의 펠리페 4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결혼하는 데 약혼되었다. 그들은 1660년 6월 9일 결혼하였으며 결혼 계약에 조건 아래 3 분할로 지급되는 데 큰 혼수 (5,000 금 에쿠)의 전액 지불의 댓가로 마리아 테레지아는 스페인 군주와 그 영토들로 모든 주장들을 포기하는 데 동의하는 것에 자신이 만족한 것을 찾아냈다. 하지만 혼소는 스페인이 파산했던 이래 지불되지 않은 것으로 남아 이론적으로 포기를 무효로 만들었다.

장기적 전쟁 후에 프랑스의 국고는 루이 14세가 1661년 자신의 수석 장관의 사망에 정부의 고삐를 개인적으로 통제했을 때 파산 위기에 처했다. 니콜라 푸케를 없애고 그의 재무 총감 직을 폐지한 후 루이 14세는 1665년 장바티스트 콜베르를 재무 장관으로 임명하였다. 푸케가 마자랭이 자신 후에 그 혹은 콜베르 전에 일으키지 않은 무분별한 재정적 행위를 하지 않았고, 스페인과 프롱드와 전쟁이 일어난 동안 자신이 효과적으로 재무 총감으로서 자신의 임무들을 수행하고 국왕의 충성스러운 지지자로 지냈던 것이 진실인 동안 수석 장관으로서 리슐리외와 마자랭의 자리를 차지하는 데 그의 자라나는 야먕은 루이가 만약 자신이 홀로 다스린다면 그를 없어야 하는 것이었다.

루이의 개인 통치의 시작은 행정 및 재정 개혁의 일련에 의하여 표시되었다. 콜베르는 더욱 효율적인 과세를 통하여 국가의 빚을 줄였다. 그의 과세에 관한 주요한 의미들은 원조, 세관, 염세와 인두세를 포함하였다. 원조와 세관은 관세, 염세는 소금에 세금, 그리고 인두세는 대지에 세금이었다. 콜베르가 귀족과 성직자에 의하여 즐겨진 역사적 면세를 폐지하지 않았던 동안 그는 당시 이용된 세금 징수의 방법들을 향상시켰다. 그는 또한 상업과 교역을 통하여 프랑스를 강화시키는 데 광범위한 계획들을 가지기도 했다. 그의 행정부는 리옹비단 제조와 태피스트리를 생산했고 아직도 생산하는 고블랭 제조업 같이 새로운 산업들을 규정하였고, 제조업자와 발명가들을 격려하였다. 그는 무라노에서 온 유리 제조공, 혹은 스웨덴에서 온 철공 혹은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온 조선업자들 같이 전체의 유럽으로부터 전문적인 제조업자와 장인들을 데려오기도 하였다. 이 매너에 그는 따라서 프랑스의 외부로 의 흐름을 감소시키는 데 프랑스의 수출을 증가시킨 동안 외제 수입품들에 프랑스의 의존도를 낮추는 데 추구하였다. 콜베르는 전쟁과 평화의 시기에 프랑스 해군의 명성을 늘이고 외양을 장악하는 목적에 해군에 향상들을 이루었다. 그는 또한 적어도 부분적으로 네덜란드인의 손으로부터 프랑스의 상업의 통제를 없애고, 왕국을 주위로 물품 운송의 비용들과 시간을 줄이는 데 프랑스의 상선과 고속도로와 수로들에 향상들을 이루기도 하였다. 프랑스의 외부에 콜베르는 프랑스의 수출품을 위한 시장들을 마련하는 것 뿐만 아니라 또한 프랑스의 산업을 위한 자원들을 마련하는 데 아메리카 대륙, 아프리카아시아에서 식민지들의 개발을 지지하고 격려하였다. 그는 중상주의로 알려진 무역과 경제를 여기는 것을 가르치는 학파들의 하나로서 랭킹에 들어왔으며 사실 프랑스는 "중상주의"를 "콜베르티즘"으로 부르고 그의 정책들은 효과적으로 국왕을 위한 국가의 총수입을 늘였다.

콜베르, 그의 가족, 고객과 궁정에 동맹들이 경제와 해상 문제에 전념했던 동안 미셸 르 텔리에와 그의 아들 루부아 후작 프랑수아-미셸 르 텔리에와 함께 선두에 있던 또다른 파벌이 군사 문제에 그들의 관심을 돌렸다. 이 2개의 대립된 세력들을 창조하면서 루이 14세는 서로를 상대로 게임을 하려고 했고, 그러므로 자신의 지배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데 궁정에서 아무 단체가 그런 권력과 영향력을 달성하지 않을 것을 보장하는 견제와 균형을 창조하였다. 르 텔리에와 아들은 정부에서 할 중요한 역할을 가져 궁정과 군대에서 귀족의 독립의 정신을 휘둘렀다. 장군들이 계급과 지위를 두고 서로 다투었던 동안 더욱 큰 정치와 외교적 형세와 상관없이 국경에서 전재을 벌이고 수도에서 오는 명령을 불순종했을 때 날이 갔다. 군대에서 선임과 계급의 직위들이 오래된 귀족정의 단독 소유였을 때 날이 갔다. 특히 루부아 후작은 군대를 현대화 하고, 새로운 전문적으로 규율있고 잘 훈련된 부대로 결성하는 것에 자신을 서약하였다. 그는 캠페인을 고안하고 지시하려고 노력하였고, 군인들의 물질적 안녕과 사기를 위하여 마련하는 데 자신을 헌신하였고, 훌륭하게 해냈다. 콜베르와 루이 1세처럼 루부아 후작은 매우 열심히 일하였다. 라자르 카르노에 비교하여 루부아 후작은 가장 좋은 전쟁 장관들의 희귀 학급 중에 가자 위대한 학급 중의 하나였다.

루이는 다양한 법적 개혁을 세우기도 하였다. 루이 14세에 의하여 공식화된 민사 및 형사 둘다 법전인 "코드 루이" (프랑스어: Code Louis, 루이 법전)는 또한 현대의 프랑스 법전들을 위하여 자체가 근거인 나폴레옹 법전을 위한 근거로서 프랑스의 법적 역사상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 그것은 2개 - 북부에 관습법과 남부에 로마법이 이었던 단일법 체계와 함께 프랑스를 규정하려고 추구했다. "코드 포레스티에" (프랑스어: Code Forestier)는 프랑스에서 임업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데 추구하여 파괴로부터 을 보호하였다. "코드 누아르" (프랑스어: Code Noir)는 노예제를 승인하였으나 노예가 로마 가톨릭의 일원이거나 가톨릭 성직자들이 각각의 노예에게 세례를 주지 않은 한, 프랑스의 식민지들에서 아무도 노예를 깎아내릴 수 없었다.

1670년의 루이 14세

태양왕은 화려한 낭비가로 왕실 자금을 조달하는 데 거액의 돈을 분배하였다. 그는 자신의 후원 아래 프랑스 아카데미를 데려와 그 "보호자"가 되었다. 그는 또한 예술의 후원자를 운영하여 몰리에르, 샤를 르브룅장 바티스트 륄리 같은 문학과 문화적 인물들에게 자금을 조달하였다. 그것은 풍자 만화의 예술을 정복하고 작품들이 아직도 현대의 프랑스의 문학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친 몰리에르, 그 조화, 단순함과 시에서 문체의 우아함이 예외적인 것으로 간주된 장 라신 혹은 작품들이 오늘날 프랑스 학생들의 세대들에 의하여 배워진 가장 유명한 프랑스의 우화 작가 장 드 라 퐁텐 같은 작가들과 함께 고전적 프랑스 문학이 번성했던 그의 지배와 후원 아래 있었다. 시각 예술도 또한 샤를 르브룅, 피에르 미냐르, 앙투안 크와즈보, 앙드레 르 노트르와 작품들이 유럽을 통하여 유명하진 자신 리고 같은 다양한 화가들을 루이 14세가 기금하고 위임한 것으로 그의 궁극적인 우원에서 찾아졌다. 음악에서 장 바티스트 륄리, 자크 샹피옹 드 샹보니에르와 프랑수아 쿠프랭 같은 작곡가와 음악가들도 현장을 점령했다. 쿠프랭의 유명한 책 〈L'Art de toucher le clavecin〉이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요한 슈트라우스모리스 라벨에 거대하게 영향을 주었던 동안 륄리는 프랑스에 오페라를 소개하여 프랑스 오페라를 창립하였고, 몰리에르와 함께 〈Comédie-Ballet〉를 대중화 하였다.

루이 14세는 군대에서 자신을 충성적으로 섬긴 장교와 군인들을 위하여 집을 제공하는 데 앵발리드 같은 군사 단지의 건설을 명령했으나 부상을 당하거나 나이가 든 자들은 허약해졌다. 당시 의약품의 방식들은 아주 기초적이었고 앵발리드는 새로운 치료법을 개척하고 오히려 기간의 잔인한 간호 치료 스타일의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 루이 14세는 그 건설을 베르사유 궁전과 더불어 자신의 통치의 거대한 성취들 중의 하나로 숙고하여 유럽에서 가장 크고 가장 낭비적인 순간 중의 하나로 국왕과 그의 나라를 칭송한다.

그는 또한 많은 다른 왕실 거주지들은 물론 루브르 궁전을 향상시키기도 하였다. 원래 루브르 궁전에 추가들을 계획했을 때 루이 14세는 건축가로서 잔 로렌초 베르니니를 기용하였다. 하지만 루브르를 위한 그의 계획들은 많은 기존 구조의 파괴를 촉구하여 그것을 파리의 중심지에서 가장 어색해 보이는 이탈리아식 여름 별장과 함께 대체하였다. 자신의 장소에서 루이는 루브르 궁전의 "페로 익면"이 널리 알려진 프랑스의 건축가 클로드 페로를 선택하였다. 그늘진 공허를 대고, 양쪽 끝에 대형 천막이 있으면서 지하 1층의 단순함은 율동적으로 짝을 이루는 코린트식의 기둥에 의하여 시작되며 뚜렷하게 비프랑스적 고전적인 지붕으로 왕관이 씌어졌다. 중앙을 통하여 박공벽이 있는 개선문 입구를 일으켰다. 페로의 절제된 고전화 바로크 건축의 루브르 궁전은 오랜 세월 동안 유럽과 아메리카를 통하여 웅대한 건물의 모델을 제공하려고 했다.

저지대 국가에서 전쟁[편집]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때 로비트에서 라인 강을 건너는 루이 14세와 그의 군대

루이 14세의 장인이자 외삼촌 스페인의 펠리페 4세1655년에 사망한 후, 펠리페 4세의 두번째 부인에 의하여 출생한 그의 아들이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가 되었다. 루이 14세는 저지대 국가에서 스페인의 국왕에 의하여 지배된 영토 브라반트가 그들의 부친의 첫 결혼 생활에 의하여자신의 부인이자 카를로스 2세의 이복 누이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귀속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브라반트의 관습은 자녀가 자신의 부친의 결혼생활로부터 고통을 겪지 않도록 요구하여 이런 까닭에 두번쩨 혹은 그후의 결혼생활의 자녀들에 상속에 우선권을 가진다는 것을 논하였다. 루이는 개인적으로 1667년에 터진 이어지는 상속 전쟁의 캠페인들에 참가하였다.

네덜란드 공화국의 내부의 문제들은 저지대 국가에 루이 14세의 설계들을 원조하였다. 당시 네덜란드 공화국의 저명한 정치인 요한 더빗은 공화국에서 통제권을 장악하려고 하면 최고 권력의 더빗을 박탈하고 오라녜나사우가를 복구하는 게 추구했던 빌럼 2세가 지금까지 자신이 죽을 때까지 누렸던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어린 윌리엄 3세의 야망을 두려워했다. 그러므로 더빗과 오라녜의 빌럼의 지지자들 각각 "국가당" 파벌과 "오라녜" 파벌 사이에 내부 갈등에 네덜란드 공화국과 함께 지지된 네덜란드와 제2차 영란 전쟁에 잉글랜드가 몰두하면서 양국 사이에 조인된 조약들의 조건에 따라 그들의 동맹 루이 14세에 의하여 프랑스는 플랑드르프랑슈콩테를 둘다 쉽게 정복하였다. 프랑스의 빠른 성공과 미래에 관한 겁에 질린 네덜란드 공화국은 자신들의 옛 친구들에 눈을 돌려 잉글랜드와 차이점을 제쳐 두고, 스웨덴에 의하여 가입되었을 때 1668년 3국 동맹을 형성하였다. 전쟁의 퍼짐의 위협에 직면하고 황제와 스페인 계승 전쟁을 분할한 비밀적인 조약을 맺었고 다른 주요 청구인 루이 14세는 평화를 만들기로 동의하였다. 엑스라샤펠 조약의 조건 아래 프랑스는 의 거대한 요새를 포함한 플랑드르를 계속 유지하였으나 프랑슈콩테를 스페인에게 돌려주었다.

3국 동맹은 오래가지 않았다. 1670년 프랑스의 뇌물과 연금에 의하여 이끌린 찰스 2세도버 밀약을 맺어 프랑스와 동맹으로 들어갔으며 어떤 라인란트 독일의 왕자들과 더불어 2개의 왕국은 1672년 네덜란드 공화국에 전쟁을 선언하여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을 촉발하였다. 빠른 침입과 네덜란드의 대부분의 점령은 더빗을 쓰러뜨리고 윌리엄 3세가 권력을 장악하도록 허용한 쿠데타를 일으켰다. 윌리엄 3세는 스페인, 황제와 제국의 나머지와 함께 동맹으로 들어갔으며 1674년 잉글랜드와 화약이 맺어져 전쟁으로부터 잉글랜드가 전쟁에서 물러나고 윌리엄 3세과 찰스 2세의 조카딸 메리 공주 사이의 결혼의 결과를 가져왔다. 그해 저지대 국가에 있던 동안 자신의 측면에서 제국의 진격 가능성에 직면한 루이 14세는 더욱 방어가 가능한 위치들로 자신의 군대에 철수를 명령하였다.

이 외교적과 군사적 반전들에 불구하고 전쟁은 반대 연합의 압도적인 세력에 대항한 찬란한 프랑스군의 승리들과 함께 지속되었다. 루이 2세 부르봉콩데가 오라녜공 아래 오스트리아,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부대들과 함께 한 훨씬 더욱 크게 결합한 군대를 꺾은 동안 1674년 몇주 안에 프랑슈콩테의 스페인 영토는 프랑스군에게 떨어져 파리에 내려오지 못하도록 방지하였다. 1674년 ~ 75년의 겨울에 가장 대담하고 화려한 캠페인을 통하여 우세한 튀렌 자작 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라이몬도 몬테쿠콜리 아래 제국군들에 패배를 안겨 그들을 알자스의 외부와 라인 강을 건너 그들을 다시 몰아냈고 루이 14세를 위하여 지방을 회복하였다. 전쟁의 말기를 향하여 가장, 행렬 그리고 반대 행진의 일련을 통하여 루이 14세는 프랑스에 전쟁 선언으로부터 찰스 2세와 그의 잉글랜드 의회를 단념시키고 아주 우월한 위치에 협상 탁자로 동맹국들을 끌어들이는 데 자신을 허용한 활동으로 헨트를 포위하고 점령하는 데 자신의 군대를 지도하였다. 6년 후에 유럽은 전쟁에 의하여 지쳤고, 1678년 네이메헌 조약과 함께 동행된 평화 협상들이 시작되아써다. 루이 14세가 포획한 네덜란드의 영토를 반환했던 동안 그는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더 많은 도시들과 관련 토지를 얻었고, 몇주 안에 루이와 그의 군대에 의하여 포획된 프랑슈콩테를 유지하였다. 자신이 훨씬 더 어마어마했던 요구할 수 있던 위치에 있으면서 루이의 활동들은 승리에서 자신의 절제의 미덕의 증거로서 축하가 벌여졌다.

술탄 후사인에 의하여 루이 14세에게 보내진 페르시아 사절단

네이메헌 조약은 유럽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더욱 증가시켰으나 루이 14세를 만족시키지 않았다. 국왕은 1679년 자신의 외무 장관 시몽 아르노 드 퐁폰이 동맹국들과 너무 많은 타협을 했다고 여겨지고, 지나치게 평화주의자였기 때문에 그를 해고하였다. 루이 14세는 또한 자신의 군대를 유지하였으나 순전히 군사적 행동을 통하여 자신의 주장을 추구하는 대신 그는 더욱 나가서 영토 확대를 달성하는 데 사법 절차를 이용하였다. 당시의 조약들의 애매모호한 성격 덕분에 루이는 영토들에게 이전적으로 속했던 전체의 종속성과 토지와 더불어 양도해야 할 이전의 조약들에서 자신에게 양도된 것을 주장할 수 있었으나 평화 조약들에서 실제로 규정되어 있던 세월에 분리되었다. 프랑스의 재결합 회의소가 이전적으로 프랑스에 속했던 것을 확인하는 데 임명되었으며, 프랑스군이 후에 그들을 점령하였다. 이 적은 영토들의 병합은 세바스티앙 르 프레스트르 드 보방에 의하여 제안된 더욱 방어적인 전선 "pré carré" (광장 초원)를 프랑스에게 주는 데 제안되었다. 루이는 북부 이탈리아의 중심에 포 강 유역으로 자신에게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카살레는 물론 전선에 그 전략적인 공격과 방어적 자리를 위하여 룩셈부르크 같은 도시들을 얻는 데 추구하였다. 루이는 또한 다양한 제국 군대들이 프랑스를 침입하는 데 이전의 전쟁들에서 라인 강을 건넌 것을 통하여 중요한 전략적 전초 기지 스트라스부르를 얻는 데 희망하였다. 스트라스부르는 알자스의 일부였으나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합스부르크 통치의 알사스의 나머지와 함께 양도되지 않았다. 그럼에 불구하고 그것은 1681년 루이의 새로운 법적 구실 아래 프랑스군에 의하여 영유되었고 룩셈부르크와 카살라 같은 다른 점령된 영토들과 더불어 레겐스부르크 휴전에 의하여 20년 동안 프랑스에게 양도되었다.

1680년대에 권력의 높이[편집]

1684년의 루이 14세

1680년대 초반까지 루이 14세는 유럽과 세계에서 자신과 프랑스의 크게 강화된 영향력과 권력을 가졌다. 1683년에 사망한 루이 14세의 가장 유명한 장관 장 바티스트 콜베르는 왕실 국고와 금고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왕실의 총수입은 그의 그의 관리 감독 아래 3배를 가졌다. 유럽의 왕자들은 예술, 음식과 유행에서 취향부터 정치 제도들까지 모든 것에서 프랑스와 루이 14세를 모방하기 시작하였으며 그것이 베르샤유에서 했기 때문에 많은이들은 단순히 공식 정부를 취하기까지 했다. 외교 관계들이 시암, 인도페르시아 같은 먼 해외 국가들과 시작되었던 동안 유럽의 외부로 프랑스의 해외 식민지들은 아메리카 대륙,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증식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예수회와 선교사들이 중국 (청나라)에서 보일 수 있던 동안 1682년 탐험가 르네 로베르 카벨리에 드 라 살은 루이 14세의 영예에 북아메리카에서 미시시피 강의 분지를 "루이지안" (Louisiane, 루이지애나)라고 주장하여 이름을 지었다.

프랑스에서도 루이 14세는 교회와 귀족들의 비용으로 프랑스 국왕의 영향력과 중앙 집권화를 설립하고 늘이는 데 성공하였다. 루이는 프랑스에서 교황의 권한을 제한시킨 독트린으로 알려진 전통적 갈리아주의를 강화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는 1681년 11월 성직자 집회를 소집하였다. 1682년 2월 해산되기 전에 그것은 프랑스의 성직의 선언으로 동의하였다. 프랑스 국왕의 권력은 줄여진 교황의 권력에 대조적으로 늘어났다. 교황은 국왕의 동의없이 프랑스로 교황 특사를 보내는 데 허용되지 않았으며 프랑스에 들어갈 수 있던 그런 사절들은 더욱이 그들이 자신들의 힘을 행사할 수 있기 전에 추가 승인을 필요하였다. 주교들은 왕실의 승인 없이 프랑스를 떠날 수 없었으며 아무 공무원들도 자신들의 임무에 따라 행해진 행위에 대하여 파문할 수 없었고 국왕의 찬성 없이 교황에게 항소할 수 없었다. 국왕은 교회법을 제정할 수 있었고, 교황에 의하여 만들어진 전체의 규정은 군주의 동의 없이 프랑스에서 유효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선언은 명백한 이유로 교황에 의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베르사유 궁전 입구에 있는 루이 14세의 기마상

루이는 또한 베르사유에서 자신의 궁전에서 자신의 궤도에 더 높은 귀족의 대부분을 본질적으로 첨부하면서 프랑스에서 귀족의 것인 제2의 소유권에 엄청난 통제력을 얻어 반란과 폭동을 계획한 그들의 지방 공동체와 전력 기반들에서 대신 그의 감시 아래 한해의 다수를 보내는 데 그들을 요구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계급으로 연금과 필요한 특권을 얻을 수 있었던 이 방향에만 있었다. 그는 루이의 권력과 지금까지 제멋대로인 귀족에 통제로 공헌했던 중요한 요인들이었던 사치스러운 잔치들과 다른 주의 산만과 함께 자신의 영구 방문자를 즐겁게 하였다. 그러므로 루이는 추기경들 리슐리외와 마자랭의 업무를 지속하고 있었다. 프롱드의 난으로부터 파생된 경험의 결과로서 그는 자신의 권력이 만약 평민과 함께 자신이 고위 관직을 채웠거나 혹은 적어도 비교적 새로운 귀족의 회원들의 경우에만 우세할 것이라고 믿었고, 단순하게 자신을 해고하면서 평민들을 실체로 환원할 수 있었던 동안 그는 자신이 쉽게 고대 혈통의 위대한 귀족의 영향력을 파괴할 수 있었다는 것을 믿얻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루이 14세는 자신이 평민 혹은 새로운 귀족들을 장관과 지방 관리들로 임명했던 동안 나이 많은 귀족을 조신으로 자신을 의례적으로 섬기는 데 강요하였다. 조신으로서 위대한 귀족들의 권력은 더욱 약하게 자라났다. 고위 귀족의 권력의 감소는 루이 14세 이후에 프롱드 같은 반란들의 부족에서 목격될 수 있었다. 사실 귀족에 왕실의 승리는 결국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까지 프랑스를 괴롭히는 데 마지막 주요 내란이었다는 것을 확신한 루이 14세 아래 달성되었다.

루이는 원래 자신의 부친에 의하여 사냥터로 지어진 파리의 외부에 있는 베르사유 궁전을 4개의 중요하고 뚜렷한 건설 캠페인의 일련에서 멋진 왕궁으로 개조하였다. 3번째 건설 캠페인의 말기까지 궁전은 통치의 마지막 10년의 세월에 추가되었던 왕실 예배당을 제외하고 오늘날까지 유지하는 대부분의 모습을 취하였다. 그는 1682년 5월 6일 궁정과 더불어 거이에 공식적으로 이주하였다. 루이는 사치스러운 풍요의 상징과 위엄있는 웅장함 같은 것을 창조하기 위하여, 그리고 군주의 자리를 옮기기 위한 몇몇의 이유들을 가졌다. 하지만 향상시키고 개발했던 동안 영광스러운 기념물과 함께 자신의 수도를 꾸미기를 멈추지 않으면서 자신이 파리를 미워했기 때문에 그가 그렇게 했다는 주장은 결함이 있었다. 베르사유는 국정에 대한 눈부시고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설정으로, 그리고 수도와 국민들과 주의가 나누어지지 않았던 외국 고위 인사들의 접수를 위하여 지냈으나 왕의 사람에 의해서만 가정되었다. 궁정 생활은 장엄함을 중심으로 하였고, 조신들은 값비싼 사치품의 삶을 살았으며 장엄한 옷을 입고 끊임없이 무도회, 저녁, 상연과 축제에 참석하였더. 그러므로 많은 귀족들은 모든 영향력을 포기하거나 장려금과 보조금을 위하여 국왕에 전체적으로 의지하였다. 권력을 행하고 잠재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대신 귀족들은 국왕의 식탁에서 식사의 영예 혹은 국왕이 침실로 물러나면서 촛대를 드는 것의 특권을 위하여 경쟁하였다.

제노바의 폭격에 이어 베르사유 궁전에서 제노바 공화국의 총독을 영접하는 루이 14세 (1685년 5월 15일)

1685년까지 루이 14세는 자신의 권력의 정점에 섰다. 프랑스의 주요 라이벌들 중의 하나인 신성 로마 제국1683년에 시작되어 1699년까지 지속된 대튀르크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을 싸우는 데 몰두했다. 오스만 제국의 대재상은 거의 을 포획하였으나 마지막 순간에 폴란드의 얀 3세 소비에스키가 폴란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군대를 1683년 빈 전투에서 최종적 승리로 이끌었다. 그동안 레겐스부르크 휴전에 의하여 루이 14세는 전선을 덮고 외국의 침입으로부터 프랑스를 보호한 룩셈부르크와 스트라스부르 같은 몇몇의 영토들의 통치를 얻었다. 빈에서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격퇴한 후, 신성 로마 제국은 튀르크인들로부터 더 이상 임박한 무덤에 있지 않았으나 그럼에 불구하고 황제는 루이 14세에 의하여 병합된 영토들을 다시 얻는 데 시도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휴전의 기정 사실을 동의하였다. 스페인을 지지하고 프랑스-네덜란드 전쟁에서 그들에게 제노바의 선박들을 이용한 것을 승인한 것에 관한 처벌로서 1685년 자신의 도시가 프랑스군에 의하여 폭격을 당한 후, 제노바 공화국의 총독은 배르사유로 여행을 떠나 궁중의 웅장함 속에 받아지고 루이 14세에게 사과하고 화해하였다.

1683년 루이 14세의 왕비 마리테레즈가 사망하였다. 그는 그녀의 사망에 대하여 그녀가 그를 고뇌에 빠지게 한 유일한 기회였다는 것으로 언급하였다. 그는 자신의 매밤 무술을 수행했다는 것이 말해졌어도 그는 1660년 자신들의 결합 후에 오랫동안 그녀에게 완전히 충실하지 않았다. 그의 정부들은 루이즈 프랑소와즈 르 블랑 드 라 발리에르, 아테나이 드 로슈슈아르 모르트마르, 앙젤리크 드 퐁탕주와 프랑수아즈 도비녜를 포함하였다. 결과로서 그는 많은 사생아를 낳았으며 후에 가장 높은 혈통의 가족들에게, 심지어 왕실 자신의 가족의 가지로 재혼하였다. 이 결과로 생긴 사생아 왕실 생도 가지의 많은 자손들은 다음 세기에 권력의 지위와 영향력을 주장하러 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두번째 부인 프랑수아즈 도비녜에게 더욱 충실한 것을 증명하였다. 아마 1685년 후순에 일어난 루이 14세와 맹트농 부인 사이의 결혼 생활은 비밀스럽고 조직적이었으며 그의 사망까지 지속될 것이었다.

한번 개신교 신자였던 맹트농 부인은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것은 한번 그녀가 원기있게 개신교도들의 박해를 조장했고, 위그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부여한 낭트 칙령 (1598년)을 철회할 것을 루이 14세에게 촉구했다는 것이 믿어졌다. 하지만 그녀의 참여에 대한 이러한 견해은 이제 심문을 받았다. 루이 14세 자신은 그런 계획을 지지하였으며 그는 유럽의 나머지와 더불어 가톨릭 혹은 개신교가 민족의 통일을 위한 목적에 있었던 것을 믿었으며 그는 처음에 종교적으로 통일 국가를 달성해야 했으며 그의 경우 특히 가톨릭이었다. 이것은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 의한 그 설립 이래 유럽을 통하여 종교 정책을 정의한 "누구의 영역, 그들의 종교"의 원칙에서 모셔졌다. 그는 그것이 이론적으로 그의 봉건적 권리 안에서 따라서 법적이었어도 그의 주제 중 하나와 함께 그렇게 하기 위해 그들의 집에서 군인들을 포위함으로서 위그노들의 박해를 이미 시작하였다.

루이는 1685년 3월 칙령을 내리면서 종교적으로 연합된 프랑스를 달성하는 데 자신의 시도를 지속하였다. 칙령은 프랑스의 식민지들에 영향을 미쳤고, 그들로부터 전체의 유대인들을 쫓아냈다. 가톨릭을 제외한 아무 종교의 공적 행위는 금지되었다. 그해 10월 루이 14세는 개신교와 프랑스에서 개신교도들의 거의 멸종이 그들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모든 칙령을 중복되게 만들었다는 핑계로 퐁텐블로 칙령을 내려 낭트 칙령을 철회하였다. 개신교 학교와 시설들은 금지되었다. 개신교 집안에게 태어난 어린이들은 가톨릭 성직자들에게 강제로 세례를 받아야 했고, 개신교의 예배 장소들은 철거되었다. 칙령은 단순히 믿는 것이 아닌 공공적으로 종교를 실천하거나 행사하는 것으로부터 개인을 배제하였다. 칙령은 "개신교의 상기 인사들에게 ... 상기 종교의 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혹은 기도 혹은 근행을 구실로 회의의 조건으로 자유가 부여된다."는 것을 제공하였다. 칙령이 정식으로 위그노들이 프랑스를 떠나는 것을 거부하였어도 그들 중 대략 20 만명이 어떤 경우에도 떠나 상업과 무역에서 자신들의 실력들을 자신들과 가져갔다. 칙령은 파괴적이지 않음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해를 끼치는 것을 증명하였다. 루이 14세의 가자 영향력 있는 장군들 중의 하나인 세바스티앙 르 프레스트르 드 보방은 공개적으로 그 조치를 비난하였고, 그 선언문은 프랑스를 통하여 널리 축제가 벌여졌다.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편집]

1690년의 루이 14세

낭트 칙령의 폐지의 더 넓은 정치적 그리고 외교적 결과는 하지만 개신교 국가들에서 증가한 반프랑스 감정의 도발이었다. 1686년 가톨릭과 개신교 둘다의 통치자들은 표면적으로 라인 강을 보호하는 데 방어 조약이나 실제로 프랑스에 대항하는 공세 동맹인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에 가입하였다. 연합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제국의 일부를 형성한 몇몇의 독일의 주들 - 가장 주목할 만한 팔츠, 바이에른브란덴부르크를 포함하였다. 네덜란드 공화국, 스페인과 스웨덴도 또한 동맹에 고수하였다.

루이 14세는 만료된 계수의 주장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레겐스부르크 휴전을 비준하고 합병된 영토들의 자신의 소유를 확인하는 데 독일의 왕자들에 대한 최후 통첩 후 1688년 팔츠로 자신의 군대를 보냈다. 표면상 군대는 팔츠에 루이 14세의 계수 엘리자베스-샤를로트 오를레앙 공작 부인의 주장을 지지하는 임무를 가졌다. (오를레앙 공작 부인의 오빠 팔츠 선제후 카를 2세는 1685년에 사망하였고 헌신적인 왕관이 그녀에게 갔으나 가족의 후배 노이부르크 지부에게 갔다) 하지만 침입은 외교적 압력 적용의 실제 목표를 가졌고 동맹을 떠나는 데 팔츠를 강요하여 동맹을 약하게 하였다.

루이 14세의 활동들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뒤에 독일의 왕자들을 통합하였다. 루이는 가톨릭 군주 제임스 2세 아래의 잉글랜드가 중립을 유지할 것을 기대하였다. 하지만 1688년 명예혁명은 제임스 2세의 폐위와 그의 딸이자 그녀의 남편 윌리엄 3세와 공동 통치한 잉글랜드의 메리 2세에 의하여 그의 대체에 결과를 가져왔다. 네덜란드 전쟁이 일어난 동안 동안 윌리엄 3세가 루이 14세에 대한 적개심을 키우면서 그는 잉글랜드를 당시 대동맹으로 알려진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으로 밀어 넣었다.

나뮈르의 포위 공격에서 (1692년)

9년 전쟁 (1688년 ~ 1697년)의 캠페인들은 정통적으로 프랑스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많은 제국군들이 아직도 오스만 제국을 싸우는 것에 집중을 하고 정통적으로 프랑스군보다 훨씬 늦게 현장에 가면서 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들은 효과가 없음을 증명하였다. 그러므로 프랑스는 공해와 식민지들에서 뿐만 아니라 북부에서 플랑드르부터 동부에서 라인 강 유역, 남부에서 이탈리아와 스페인까지 일련의 승리를 축적할 수 있었다. 루이 14세는 제임스 2세가 영국의 왕관을 다시 얻는 시도에 그를 원조하였으나 스튜어트가의 국왕은 성공하지 못하여 1690년 보인강 전투가 일어난 1년 후 아일랜드 왕국에서 자신의 마지막 요새를 잃었다. 윌리엄파의 잉글랜드는 그러고나서 대륙에 전쟁으로 더욱 많은 기금과 군대를 헌신할 수 있었다. 그럼에 불구하고, 유럽의 대부분을 둘러싼 반대 연합의 규모에 불구하고 루이 2세 드 부르봉콩데의 유명한 제자 프랑수아 앙리 드 몽모랑시뤽상부르 공작 아래 플랑드르에서 프랑스군은 스텡케르크 전투 (1692년)과 네르빈던 전투 (1693년)는 물론 보인강 전투와 같은 해에 플뢰뤼스 전투에서 동맹군을 분쇄하였다. 루이 14세의 개인적 감독 아래 프랑스군은 1691년 몽스1692년 지금까지 난공불락의 나뮈르 요새를 포획하였다. 그러므로 네르빈던에서 승리 후에 1693년 뤽상부르 공작의 샤를루아 포획 후에 프랑스는 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 디 사보이아 공작 아래 동맹군에 승리를 거두어 그의 영토를 넘어서 그의 효과적인 명령에 따라 단지 토리노를 주위로 영토를 줄였다. 남동부에서 피레네 산맥을 따라 테르강 전투는 카탈루냐를 프랑스의 침입으로 열었다. 1690년 비치헤드 전투에서 프랑스 해군의 승리는 1692년 플뢰뤼스와 라오그 전퉁들에서 영국-네덜란드 해군의 승리에 의하여 상쇄되었다. 하지만 어느쪽도 상대의 해군을 전체적으로 물리칠 수 없었다. 전쟁은 1696년 사보이아 공작이 프랑스와 별도의 평화와 이어지는 동맹을 맺을 때까지 4년간 지속되어 밀라노 공국의 포획에서 그들의 포로로 가담하기로 약속하고 이탈리아에서 다른 군대를 강화하는 데 프랑스 군대를 허용하였으며 이 강화된 군대들 중의 하나는 바르셀로나를 포획한 스페인군이었다.

9년 전쟁은 결국적으로 1697년 레이스베이크 조약과 함께 끝났다. 루이 14세는 룩셈부르크와 1679년 네덜란드 전쟁의 말기 이래 자신이 장악한 전체의 다른 영토들을 항복하였으나 스트라스부르를 유지하여 라인 강을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 사이의 국경으로서 확신하였다. 그는 또한 퐁디셰리아카디아의 반환은 물론 자신의 자신의 지금까지 아이티의 사실상 소유의 법률상 인정을 얻었다. 루이는 또한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를 영국과 아일랜드의 공동 군주로 인식할 것을 약속하였고, 그가 더 이상 제임스 2세를 보조하지 않을 것에 그들을 확신시켰으며 동시에 그는 금전적 보상의 대가로 쾰른 선제후국에서 개입과 팔츠에 주장들을 포기하였다. 하지만 그는 내부 경쟁자들을 조작하고 회원국을 의심하면서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의 해산을 확보하였고, 그렇게 해서 그는 아무도 스스로 상태가 프랑스를 감당할 수 있었던 이래 자신의 적들을 나누었고 그들의 권력을 깼다. 스페인은 이 전쟁과 저지대 국가에서 이전의 전쟁 둘다에서 카탈루냐와 잃었던 많은 영토들을 회복하였다. 루이 14세는 로렌을 그녀의 공작에게 돌려주었으나 언제든지 프랑스의 통과를 허용하고 공작의 정치적 기동성을 엄격하게 제안한 조건에서였다. 네덜란드인들은 프랑스의 가능한 침략으로부토 자신들을 보호하는 데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요새들을 수비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조약의 관대한 조건들은 결국적으로 스페인의 국왕 카를로스 2세가 필리프 드 프랑스 앙주 백작 (루이의 손자)를 자신의 상속인으로 선언할 것으로 이끌 친프랑스 감정을 키우는 데 꾸며진 스페인에게 양보로 간주되었다. 게다가 레이스베이크 조약에서 그런 불리해 보이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영향력은 루이 14세가 자신의 사촌 프랑수아 루이 드 부르봉 콩티 공에게 폴란드의 왕관을 제공할 수 있어 폴란드 하원에 의하여 그를 정당하게 선출하고 폴란드의 대주교 미하우 라지에요프스키에 의하여 폴란드의 국왕으로 선언되면서 전체의 유럽에서 여전히 그런 높이에 있었다. 하지만 콩티 공의 왕위를 주장하는 폴란드에게 진행하는 데 그의 지연은 그의 라이벌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2세가 왕좌를 차지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 것을 허용하였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편집]

레이스베이크 조약에 이어 스페인 군주에게 승계의 중대한 문제가 유럽의 외교 정세를 지배하였다. 심각한 무력화의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는 상속인을 낳을 수 없었다. 스페인의 계승은 스페인 뿐만 아닌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밀라노 공국, 스페인령 네덜란드와 다양한 식민지 제국 - 모두에서 22개의 다른 영역을 다스린 카를로스 2세를 위하여 많이 찾는 상을 제공하였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둘다 스페인의 왕족에게 가까운 가족 관계를 가진 왕좌에 대한 주요 주장자들이었다. 프랑스의 요구자 당주 공작 필리프 (후에 스페인의 펠리페 5세)는 스페인의 펠리페 3세의 맏딸 안 도트리슈의 증손자이자 펠리페 4세의 맏딸 마르가리타 테레사 데 에스파냐 왕녀의 손자였다. 하지만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경우 그들의 포기와 함께 왕족에게 상속을 가로막는 유일한 장벽은 조약의 다른 조건들이 스페인에 의하여 성취되지 않으면서 법적으로 무효였다.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 1세의 작은 아들 카를 6세 (이후의 신성 로마 황제)가 펠리페 3세의 막내딸이었던 그의 친조모 마리아 아나 데 에스파냐 왕녀를 통하여 왕위를 주장하였으며 하지만 이 주장은 어떤 포기로도 더럽혀졌다. 하지만 장자의 법칙에 순전히 기반으로 프랑스는 자신들이 맏딸들로부터 파생되었던 이래 최고의 주장들을 가졌다.

많은 유럽의 권력들은 만약 프랑스 혹은 신성 로마 제국이 스페인을 다스리러 왔다면 유럽에서 권력의 균형이 위협을 받을 것에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네덜란드인과 잉글랜드인들은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 1세의 첫 부인 펠리페 4세의 어린 딸 마르가리타 테레사 데 에스파냐 왕녀를 통하여 그의 손자였던 또다른 후보 요제프 페르디난트 바이에른 왕자을 오히려 좋아했다. 헤이그 조약의 조건들 아래 그것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왕조들 사이에 나누어진 이탈리아와 저지대 국가에 영토들과 함께 바이에른 왕자가 스페인을 상속받을 것이 동의되었다. 하지만 스페인은 상의하지 않았고 그 제국의 분열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스페인의 궁정은 스페인 제국의 전체를 유지하는 것을 주장하였다. 1698년 조약이 카를로스 2세에게 알려지게 되었을 때 그는 요제프 페르디난트를 자신의 유일한 상속인으로 삼아 그에게 전체의 스페인의 유산을 할당하였다.

6개월 후 천연두가 바이에른 왕자를 주장했을 때 전체 문제가 다시 열렸다. 스페인 궁정은 한 우두머리 아래 통일된 광대한 제국을 지키는 것에 의도였고 프랑스 혹은 오스트리아의 왕가 어느 쪽이던 그런 목표가 회원을 선택해야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자신의 독일인 부인의 압박으로 카를로스 2세는 오스트리아의 왕가를 선택하여 황제의 어린 아들 카를 대공을 삼았다. 스페인의 결정을 무시한 루이 14세와 윌리엄 3세는 두번째 조약을 맺어 루이 14세의 맏아들과 후계자 루이 드 프랑스 도팽 드 비에누아가 사보이 혹은 로렌을 위하여 이탈리아에 있는 영토들을 교환하는 마음과 함께 그것들을 물려받으려고 하는 동안 카를 대공이 스페인, 저지대 국가와 스페인의 식민지들을 차지하는 데 허용하였다.

1700년 자신이 임종을 맞이했을 때 카를로스 2세는 예기치 않게 사건에 개입하였다. 그는 프랑스 혹은 신성 로마 제국 어느 한쪽과 함께 연합하는 것으로부터 스페인을 방지하려고 노력했으나 프랑스의 우월한 무기에 관한 자신의 과거 경험에 근거를 두었고 프랑스를 제국 전체를 보존하는 것에 더욱 유능한 것으로 숙고하였다. 그러므로 전체의 스페인의 계승은 도팽의 어린 아들 앙주 백작 필리프에게 제공될 것이었다. 그의 거부 혹은 수락 불가능의 경우 도팽의 셋째 아들 베리 백작 샤를에게, 그리고 그후에 카를 대공에게 제공될 것이었다. 만약 이 왕자들이 왕관을 거부하였다면 스페인 왕가과 거리가 먼 사보이아가에게 제공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루이 14세는 어려운 선택을 향하였는 데 그는 유럽에서 분할과 가능한 평화로 동의할 수 있거나 혹은 전체의 스페인의 계승을 받아들일 수 있으나 다른 유럽의 국가들을 소외시켰다. 루이 14세는 원래 윌리엄 3세에게 그들의 이전 조약과 스페인의 자치권을 분할에 관한 조건들을 자신이 이행할 것을 납득하였다. 하지만 후에 콜베르의 조카 토르시 후작 장바티스트 콜베르가 만약 프랑스가 스페인의 계승의 일부를 수락하더라도 신성 로마 제국과 전쟁이 거의 확실하게 일어날 것을 루이 14세에게 조언하였고, 윌리엄 3세는 전쟁을 이루는 것이 아닌 피하는 데 자신이 헤이그 조약을 맺었다는 것을 매우 명확히 하여 이런 까닭에 그는 그 조약들에 의하여 그녀에게 주어진 영토들을 얻기 위하여 전쟁에서 프랑스를 원조하지 않으려고 했다. 루이 14세는 만약 전쟁이 어떤 경우에 발생했다면 그것은 스페인의 계승의 전체를 받아들이는 데 더욱 수익성일 것을 동의하였다. 따라서 카를로스 2세가 1700년 11월 1일에 사망했을 때 앙주 백작 필리프가 국왕 펠리페 5세가 되었다.

1701년의 루이 14세

루이 14세의 상대들은 마지못해 펠리피 5세를 스페인의 국왕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루이 14세는 너무 조급하게 행동하였다. 1701년 그는 영국의 무역을 위하여 잠재적으로 해로운 결과와 함께 스페인 식민지들로 흑인 노예들을 파는 허가인 "니그로 동의서" (Asiento de Negros)를 프랑스로 옮겼다. 게다가 루이 14세는 제임스 2세의 사망에 윌리엄 3세를 영국과 아일랜드의 국왕으로서 인정하는 데 중지하여 대신 제임스 2세의 아들이자 사실 상속인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를 찬사하였다. 더욱 나가서 루이 14세는 펠리페 5세에게 충성도를 확보하고 프랑스의 잠재적인 공격으로부터 네덜란드 공화국을 보호하는 장벽의 일부로서 네덜란드군에 의하여 주둔된 스페인의 요새들을 수비하는 데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군대를 보냈다. 결과는 둘다 윌리엄 3세의 지배 아래 있던 네덜란드 공화국과 영국의 추가 소외였다. 따라서 또다른 대동맹은 영국, 네덜란드 공화국, 황제와 신성 로마 제국 안에 있는 사소한 주들 사이에 형성되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외교는 루이 14세와 펠리페 5세, 바이에른, 포르투갈사부아를 위하여 동맹국으로 확보하였다.

후속의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루이 14세의 남은 통치 기간의 대부분 동안 지속되었다. 그것은 전쟁이 공식적으로 선언되기 전에도 이탈리아에서 제국의 침략과 함께 시작되었다. 프랑스는 어떤 시조거 성공을 가졌으며 빈을 거의 포획하였으나 뿐만 아니라 라미예 전투, 토리노 전투오우데나르데 전투 같이 다른 반전은 물론 1704년 8월 13일 블레넘 전투에서 제1대 말버러 공작 존 처칠외젠 드 사부아카리냥 공자의 승리는 프랑스의 무적의 신화가 깨졌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기근과 늘어나는 부채와 결합된 군사적 패배들은 프랑스를 방어적인 자세로 몰아넣었다. 바이에른은 전쟁에서 쫓겨났으며 팔츠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분할되었고,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폰 바이에른 선제후는 블레넘 전투에 이어 그 정복 후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달아나는 데 강요되었다. 포르투갈과 사부아는 이후 상대편으로 넘어갔다. 전쟁은 루이 14에게 비용이 많이 드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라미예 전추와 오우데나르데 전투와 함께 프랑스-스페인 군대는 굴욕적으로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쫓겨났고, 토리노 전투는 이탈리아에서 남아있던 몇몇의 군대를 철수시키는 데 루이 14세를 강요하였다. 1709년까지 루이는 심하게 약해졌고 자신의 통치 동안 자신에게 양도된 전체의 대지와 영토들을 반환하고 60년 이상 전에 조인된 베스트팔렌 조약의 전선들로 반환하는 것까지 거의 모든 비용으로 평화를 위하여 기꺼이 소송하고 있었다. 그럼에 불구하고 동맹국들에 의하여 지시된 조건들은 너무 가혹했으며 후자에게 굴욕적인 평화 조건들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데 자신의 손자를 공격한 요구들을 포함했으며 그 전쟁은 지속되었다. 프랑스가 전체의 스페인 계승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해진 동안 스페인 중부에서 동맹국들을 몰아냈던 알만사 전투, 비야비시오사 전투브리우에가 전투에서 결정적인 프랑스-스페인 군대의 승리 후에 그 상대들이 스페인에서 펠리페 5세를 타도할 수 없었다는 것이 명확히 보이기도 했다. 더욱 나가서 1709년 말플라크 전투는 동맹국들이 전투 지대를 얻은 동안 그것은 프랑스군을 물리 치는 것이 쉽지도 않고 저렴하지도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클로드루이엑토르 드 빌라르 공작이 이끌어진 그들이 그렇게 하였고 끔찍한 비용으로 프랑스군의 두배인 25,000명을 잃었다. 1712년 빌라르 공작이 외젠 드 사부아카라냥 공자 아래 동맹군에 결정적 승리로 프랑스군을 이끌었던 드냉 전투는 루이 14세에게 전쟁을 유리하게 돌려 많은 잃었던 영토와 자부심을 회복하였다.

루이 14세의 사후 프랑스의 지도

1705년 자신의 부친 레오폴트 1세의 뒤를 이었던 신성 로마 황제 요제프 1세는 카를 대공에 의하여 위험하게 지배된 카를 5세의 것 만큼 큰 제국의 번영을 이루었다. 영국에게 이것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결합 만큼 바람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선들은 평화를 추구하면서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조인되었다. 루이 14세와 펠리페 5세는 결국적으로 위트레흐트 조약과 함께 1713년 영국과 네덜란드 공화국과 함께 평화를 이루었다. 1714년 각각 라슈타트 조약과 바덴 조약과 함께 황제와 신성 로마 제국과 함께 평화가 왔다. 위트레흐트 조약과 라슈타트-바덴 조약사이에 결정적인 간격은 란다우와 프라이부르크를 포획하는 데 루이 14세를 허용하여 황제와 제국과 함께 더 나은 위치에서, 하나의 강점에서 협상하는 데 그를 허락하였다. 일반적인 진술은 펠리페 5세를 스페인의 국왕과 스페인 식민지들의 통치자로 인정하였다. 지브롤터미노르카가 영국에 의하여 유지된 동안 저지대 국가에 있는 스페인의 영토와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와 사부아 사이에 분할되었다. 더욱 나가서 루이 14세는 영국의 왕좌로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의 주장들을 위하여 자신의 지지를 끝내는 데 동의하였다. 프랑스는 또한 일생장 (프랑스어: Île-Saint-Jean, 오늘날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주)와 일루아얄 (프랑스어: Île-Royale, 오늘날 케이프브레턴섬)을 유지한 동안 아메리카 대륙에서 뉴펀들랜드, 루퍼츠랜드아카디아의 식민지와 소유들을 영국에 양도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동맹국의 끈기와 반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저지대 국가에서 처참한 패배 속에서 잃은 그 대륙의 영토들이 반환되었다. 프랑스는 또한 알프스 산맥과 이탈리아를 통하여 길을 덮은 우바예 계곡은 물론 오라녜 공국 같이 주장을 가졌던 것으로 추가 영토들을 받기도 하였다. 유럽에서 프랑스의 확장을 되돌리는 데 동맹국의 거창한 계획은 무효가 되었다. 게다가 프랑스는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 에마누엘의 재활과 회복과 함께 자신의 대지, 칭호와 위엄으로 자신의 동맹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사망[편집]

루이 14세와 그의 가족들

1715년 9월 1일 자신의 77세 생일을 맞을 며칠 전 루이 14세는 괴저로 사망하였다. 그의 시신은 파리의 외곽 생드니에 있는 대성당에 놓여있다. 그는 72년간 통치하여 유럽 역사에 기록된 최장기적 통치로 만들었다. 루이 14세의 합법적 자녀들의 거의 전체는 어린 시절에 사망하였다. 성인기를 살아남는 데 단 하나였던 "Le Grand Dauphin"으로 알려진 그의 맏아들 루이 드 프랑스 도팽 드 비에누아는 1711년 루이 14세보다 먼저 사망하고 3명의 자녀를 남겼다. 이 자녀들의 맏아들 루이 부르고뉴 백작은 1712년에 사망하여 곧 부르고뉴의 맏아들 브르타뉴 백작 루이에 의하여 이어졌다. 부르고뉴 백작의 어린 아들이자 자신의 조부, 부친과 형의 사망에 도팽이었던 루이 14세의 5세 증손자 앙주 백작 루이는 왕위에 올라 국왕 루이 15세로 통치할 것이었다.

루이 14세는 장래의 루이 15세를 위하여 섭정이 될 가장 가까운 생존 적법한 친척으로서 자신의 조카인 필리프 2세 오를레앙 백작의 권력을 제한하는 노력을 했다. 루이 14세는 대신 몽테스팡 부인에 의하여 낳은 위법 아들 멘 공작 루이 오귀스트에게 어떤 권력을 옮기는 것을 오히려 좋아했고 루이 14세의 소수자를 예상하여 루이 13세에 의하여 설립된 섭정 위원회를 창조하였다. 루이 14세의 의지는 루이 15세의 보호자, 어린 국왕의 교육장과 근위병의 사령관 역할을 할 것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오를레앙 공작은 국회에서 루이 14세의 의지의 무효화를 보장하여 그가 그렇게 지칠 줄 모르고 폐지한 그들의 특권의 반환과 함께 그렇게 하는 데 국회의원들에게 뇌물을 주었다. 멘 공작은 국왕에 의하여 그와 자신의 동생 툴루즈 백작 루이 알렉상드르에게 주어진 "Prince du Sang Royal" (혈왕의 왕자) 칭호를 박탈당했다. 이 행위는 앙시앵 레짐 프랑스의 헌법을 어기는 데 국왕의 시도로서 조회되었으며 그것은 왕국의 관습법으로 말하는 것이다. 다른 손에 그것은 또한 이것이 단순히 자신의 부인과 아들에게 죽어가는 남자의 경우였다는 것이 가능하였다. 오를레앙 백작이 유일한 섭정으로서 다스렸던 동안 멘 공작은 또한 근위병의 사령관 칭호를 박탈당하였으나 교육장으로서 자신의 직위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법정 음모에서 멀리 떨어지면서 툴루즈 백작은 자신의 형과 달리 자신의 특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결론[편집]

루이 14세 (1643년 ~ 1715년) 아래 프랑스의 성장

루이 14세는 스페인의 왕좌에 프랑스 왕가의 일원을 놓아 카를 5세의 세월 이래 유럽의 4분의 1에서 발생한 수백년의 위협과 골칫거리를 효과적으로 끝냈다. 부르봉가는 18세기의 나머지 동안 스페인의 왕관을 유지하였으나 1808년 후에 몇번이나 전복과 회복을 경험하였다. 그럼에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스페인의 군주는 루이 14세의 후손이다.

루이의 다수의 전쟁과 호화스러운 궁전과 성들은 효과적으로 국가를 파산시켜 농민에 그에게 더 높은 세금을 부과하도록 강요하였고 귀족과 성직자가 이 세금들을 내고 공공 기금으로 공헌한 것으로부터 면제를 가지면서 다양한 재정가들로부터 막대한 국채를 들었다. 그러나 빈곤한 것은 국가가 아니라 국가였다.

루이 14세는 프랑스를 유럽에서 돋보이게 하여 전 유럽에 문화적과 언어적 영향력은 물론 10개의 새로운 지방들과 해외 제국을 주었다. 그를 반대한 몇몇의 유럽의 위대한 동맹국과 마저 그는 프랑스의 영토, 권력과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증가시켰다. 문화적 성취는 물론 이 군사 승리들의 결과로서 유럽은 프랑스와 그 문화, 양식, 생활방식 등을 감탄하였고, 프랑스어로마노프가러시아 만큼 멀리 전체의 유럽 엘리트층을 위하여 링구아 프랑카가 되었으며 독일의 왕자들은 자신들의 큰 비용에 루이의 삶의 방식을 모방하는 것을 추구하려고 했다. 계몽주의의 유럽은 루이 14세의 통치를 계몽된 규칙의 예로 보고, 가능한 만큼 그를 닮기 위해 노력하려고 했다. 아첨을 좋아했던 루이 14세는 "태양왕" 혹은 "위대한 군주"로 알려졌다. 계몽주의의 제자 볼테르는 그를 아우구스투스와 비교하여 그의 통치를 "영원히 기억에 남는 시대"로 불러 "루이 14세의 시대" 혹은 "Le Grande Siècle" (위대한 세기)로 더빙하였다.

부인들과 자녀들[편집]

정부인과 적자[편집]

왕비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1660년 6월 9일 결혼했다.

사진 이름 생일 사망 기타
Hyacinthe Rigaud - Louis de France, Dauphin (1661-1711), dit le Grand Dauphin - Google Art Project.jpg 왕세자 루이 1661년 11월 1일 1711년 4월 14일(49세) 슬하 3남
Daughters of France.jpg 안 엘리자베트 1662년 11월 18일 1662년 12월 30일 요절
마리 안 1664년 11월 16일 1664년 12월 26일 요절
Marie therese de bourbon.jpg 마리 테레즈 1667년 1월 2일 1672년 3월 1일(5세) 요절
Filip Karol Burbon.jpg 필리프 샤를 1668년 8월 5일 1671년 7월 10일(2세) 요절
루이 프랑수아 1672년 6월 14일 1672년 11월 4일 요절

정부와 서자[편집]

  • 아테나이 드 로슈슈아르 모르트마르³ - 몽테스팡 후작부인
    • 루이즈 프랑소와즈 드 부르봉 (1669-1672)
    • 멘 공작 루이 오귀스트 (1670-1726)³
    • 루이 세자르 (1672-1683)²
    • 부르봉과 콩데 공비 루이즈 프랑수아즈 (1673-1743)³
    • 오를레앙 공작 부인 프랑수아즈 마리 (1677-1749)³
    • 툴루즈 백작 루이 알렉상드르 (1678-1737)³
  • 클로드 드 빈
    • 루이즈 드 메종블랑쉐 (1676-1718)
  • 앙젤리크 드 퐁탕주 - 퐁탕주 공작부인
    • 아들 (1691-1681)

각주[편집]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

전임
루이 13세
(재위 1610 - 1643)
프랑스의 군주
칭호상 나바라의 왕
1643년 5월 14일~1715년 9월 1일
후임
루이 15세
(재위 1715 - 1774)